<?xml version="1.0" encoding="utf-8"?><?xml-stylesheet href="https://blog.aladin.co.kr/blog/rss/rssUserXSL.aspx" type="text/xsl" media="screen"?><rss version="2.0"><channel><title>belleunhi님의 서재 (belleunhi 서재)</title><link>https://blog.aladin.co.kr/785688183</link><language>ko-kr</language><description /><copyright /><generator>Aladdin RSS(Alss) v0.9</generator><lastBuildDate>Sun, 07 Jun 2026 06:04:42 +0900</lastBuildDate><image><title>belleunhi</title><url>http://image.aladdin.co.kr/img/blog2/manage/profileimg.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85688183</link><width>100</width><height>100</height><description>belleunhi</description></image><item><author>belleunhi</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하느님을 사랑할 의무 - [신애론 - 베르나르도가 말하는 '하느님을 사랑할 의무']</title><link>https://blog.aladin.co.kr/785688183/17312104</link><pubDate>Mon, 01 Jun 2026 23:1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85688183/17312104</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119880&TPaperId=17312104"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254/68/coveroff/8932119880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119880&TPaperId=17312104"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신애론 - 베르나르도가 말하는 '하느님을 사랑할 의무'</a><br/>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 지음, 암브로지오 M. 피아조니 엮음, 방종우 옮김 / 가톨릭출판사 / 2026년 05월<br/></td></tr></table><br/>찬미예수님~가톨릭출판사 북클럽 5·6월 서평도서로 『신애론』을 읽었습니다. 공부를 하자는 마음으로 제목에 "론(論)"이 들어간 책을 골랐는데, 받아보고는 순간 당황스러웠습니다. 이 책으로 어떻게 서평글을 쓰지?, "지금 이 시대에 중세의 책을 읽어야 한다는 논리를 어떻게 내세울까 고민하다가 지난주 교리교육학 시간에 그 답을 얻었습니다.창세기에서 여자는 남자가 창조되는 순간을 보지 못했습니다. 세상에 나와 보니 이미 남자가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남자 역시 여자가 창조되는 순간을 본 적이 없습니다. 잠들어 있는 동안 여자가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남자와 여자는 서로에게 서로가 전부를 알 수 없는 신비의 존재라는 것입니다. 수천 년 전에 기록된 창세기인데도 우리는 지금 그 안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합니다. 시대가 바뀌었다고 해서 성경의 가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시대가 달라질수록 새로운 질문을 던지게 되고, 그 질문을 가지고 다시 읽게 됩니다.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진 오늘날에도 '왜 하느님을 사랑해야 하는가'라는 베르나르도의 질문은 여전히 낯설고 어려운 물음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은 중세의 답을 배우기보다 오늘의 언어로 다시 질문하기 위해 읽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nbsp;  『신애론』에 베르나르도의 유명한 말이었습니다."하느님은 사랑받아 마땅한 분이기 때문에 사랑해야 한다."예????? ^^;;; 우리는 사랑을 자유로운 관계와 상호성 안에서 이해하며, 무엇보다 개인의 감정과 선택을 중요하게 생각하기에 이 말이 권위적이기도 하고 억지스럽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책을 읽으며 베르나르도가 말한 사랑은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방향에 관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인간이 처음부터 순수하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존재라고 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인간은 두려움과 결핍, 고통 속에서 자기 자신을 위해 하느님을 찾는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사랑이 성장하면서 하느님이 주시는 선물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 자체를 사랑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베르나르도가 말하는 사랑은 인간 욕망을 부정하는 길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데서 출발하여 더 큰 사랑으로 나아가는 여정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그의 글은 중세 수도자의 엄격한 가르침이라기보다 인간 내면의 성장을 설명하는 영적 성찰처럼 읽히기도 했습니다. 물론 베르나르도를 무조건 이상화할 수는 없습니다. 그는 깊은 영성을 지닌 인물이었지만 제2차 십자군 원정을 적극적으로 설교하기도 했습니다. 사랑과 겸손을 이야기한 성인이 전쟁을 지지했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책은 이런 부분까지 숨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베르나르도를 위대한 성인이면서도 동시에 시대적 한계를 지닌 인간으로 보여줍니다.그래서 수긍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지금의 기준으로 중세를 판단하기 쉽지만, 중세 역시 자신만의 세계관과 역사적 조건 안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베르나르도는 그 시대의 한계 안에서 최선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려 했던 사람이며, 그 사랑의 길을 오늘까지 전해 주고 있습니다.『신애론』은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책장을 덮고 나니 왜 가톨릭출판사가 중세를 2026년에 소개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이 책은 중세의 답을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오늘의 우리에게 "당신은 왜 하느님을 사랑하는가?", "사랑은 어떻게 성장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아마 그것이 이 책을 지금도 읽어야 하는 이유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시대는 달라졌지만 인간과 사랑, 그리고 하느님에 대한 질문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기 때문입니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254/68/cover150/8932119880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2546895</link></image></item><item><author>belleunhi</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일상의 삶 안에서 만나는 복음 - [복음의 힘 - 복음을 여는 레오 14세 교황의 10가지 단어]</title><link>https://blog.aladin.co.kr/785688183/17269766</link><pubDate>Mon, 11 May 2026 09:4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85688183/17269766</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119910&TPaperId=17269766"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254/69/coveroff/8932119910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119910&TPaperId=17269766"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복음의 힘 - 복음을 여는 레오 14세 교황의 10가지 단어</a><br/>레오 14세 지음, 로렌조 파치니 엮음, 이재협 옮김 / 가톨릭출판사 / 2026년 05월<br/></td></tr></table><br/>찬미예수님~ 안녕하세요. ^^  &nbsp;  레오 14세 교황님 즉위 1주기를 즈음하여 가톨릭출판사에서 교황님의 연설문들을 모아 엮은 『복음의 힘』을 출간했습니다. 캐스리더스 9기 5·6월의 서평도서로 저는 레오 14세 교황님의  『복음의 힘』을 선택했습니다. 『복음의 힘』을 펼쳐보면 이전 교황이셨던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복음의 기쁨』이  떠오릅니다. 수원가톨릭대학교 하상신학원 과제로 다른 과목, 다른 교수님의 수업에서 『복음의 기쁨』을 읽고 제출한 적이 있습니다. 한 번은 책을 읽고 느낀점, 그 다음은 북리뷰로 두 차례 읽고 제출했었는데 커리큘럼상 알차게 배우는 과정중이라 학년의 차이가 다른 느낌으로 글을 보게 되었던 기억이 납니다. 『복음의 기쁨』은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사목실천이 느껴지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내용이었고, 이번 레오 14세 교황님의  『복음의 힘』은 좀 더 인간 내면에 관한 글이 많은 영성적인 글로 보입니다. 책을 보다보면 아우구스티노 성인에 대한 언급이 많았는데요, 내가 아는 그 『고백록』의 아우구스티누스, 히포의 아우구스티노주교 맞나? 싶어 찾아보니 같은 사람 맞구요, 교회의 긴 역사 안에서 라틴어·그리스어·히브리어 이름들이 각 나라 언어로 변형되면서 이름이 많아진거라 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라틴어 원형에 가까운 학문적·신학적 표기이고, “아우구스티노”는 성인명이나 수도회 전통에서 많이 쓰는 형태였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자주 언급될까 싶어 또 찾아보았는데요, 레오 14세 교황님이 아우구스티노수도회 출신이셨기 때문이었습니다. 평소 수도회에 대한 기본 지식이 없다보니 이런 디테일은 흘려 듣는편인데 이번을 계기로 확실히 인지가 되었습니다.   &nbsp;    『복음의 힘』에서 인상적인 두 부분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베드로와 바오로사도의 이야기였습니다. 두 성인은 많은 부분 서로 달랐고, 때로는 복음에 대한 서로 다른 신념으로 충돌도 했습니다. “두 사도의 축일은 같은 날이며, 그들 또한 하나였습니다. 두 성인은 비록 다른날 순교했지만 그들은 하나였습니다.” 라고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묘사했듯 두 성인을 통해 다양성 안에서 친교를 이루는 교회의 모습을 무엇보다 상징적으로 잘 드러낸 부분라 좋았습니다.   &nbsp;  그리고 또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4장 선교를 통해 배운 것’ 섹션입니다. 하상신학원을 졸업하고 선교사 과정을 준비하고 있는 단계이다 보니, 선교에 대한 레오 14세 교황님의 말씀을 더욱 새겨듣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선교에만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 활동의 모든 분야에 적용될 수 있는 내용이었습니다. 사회생활 속에서 드러나는 모습을 통해 “가톨릭 믿는 사람이 왜 저래?”, “역시 성당 다니는 사람은 다르네”와 같은 시선을 받기도 합니다. 이는 꼭 선교사증을 받은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예술가들을 대할때도 마찬가입니다. “예술하는 사람들은 왜 저래?”, “역시 예술하는 사람이라 다르네”와 같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비록 아직 부족하지만, 삶의 여러 자리에서 보여지는 모습에서 그리스도의 얼굴을 발견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어제 김찬수 신부님 강론에서 반복해서 들었던 “서로 사랑하여라”라는 말씀이 다시 떠올랐습니다. 결국 복음은 거창한 말보다도, 일상의 작은 자리에서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삶 안에서 드러나는 것이라 생각하게 됩니다. <br> 그러므로 일상의 삶 안에서, 작은 자리에서,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아무런 대가 없이 사랑하고 섬기십시오. 이는 여러분이 먼저 사랑받았다는 기쁨을 알았기 때문이며, 하느님 아버지께 모든 것을 거저 받았기 때문입니다. 2025년 7월 28일, 페루 젊은이들에게 한 연설. P.73<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254/69/cover150/8932119910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2546901</link></image></item><item><author>belleunhi</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배반의 수치심을 뚫고 피어난 진주: 엔도 슈사쿠의 『그리스도의 탄생』 - [그리스도의 탄생]</title><link>https://blog.aladin.co.kr/785688183/17169437</link><pubDate>Tue, 24 Mar 2026 07:4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85688183/17169437</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118213&TPaperId=17169437"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29265/60/coveroff/8932118213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118213&TPaperId=17169437"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그리스도의 탄생</a><br/>엔도 슈사쿠 지음, 이평아 옮김 / 가톨릭출판사 / 2022년 05월<br/></td></tr></table><br/>배반의 수치심을 뚫고 피어난 진주: 엔도 슈사쿠의 『그리스도의 탄생』​예수님을 알지 못해서, 그분을 더 잘 알고 싶어서 시작한 가톨릭출판사 서평단이었습니다. 그러나 첫해에는 도대체 무슨 말인지 책 내용을 전혀 알아듣지 못해서 서평 글을 쓴다는 것이 낯 뜨겁고 당황스럽기만 했습니다. 그냥 혼자 조용히 읽다 말걸, 괜히 출판사 서평단을 해서 창피만 당하는 것 같아 매달 후회하며 힘들게 숙제를 했었습니다. 두 번째 해에는 전년보다는 말귀를 알아들을 수 있을거라 기대했지만, 여전히 맹~ 했습니다. 세 번째 해가 되니 신학원에서의 공부와 맞물려 가면서 비로소 조금씩 알아들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마침 그 해에 서평 도서가 두 달에 한 권으로 변경된 덕분에 가톨릭 북클럽과 캐스리더스 활동을 둘 다 병행할 수 있었고, 그렇게 어느덧 가톨릭출판사 서평단 4년 차가 되었습니다.연차만 쌓인 4년 차라 말 꺼내기가 부끄럽지만, 이번 달 서평 도서로 그리스도의 탄생을 마주하니 서평단 첫해에 어버버하며 읽었던 엔도 슈사쿠의 『나의 예수』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실 지난달 올해 북클럽 첫 모임 때도 쑥스러워 직접 언급을 피했었는데, 또다시 엔도를 만나게 되니 결국 3년 전 첫해에 나의 예수를 봤다고 고백합니다. 읽었다고 말하기는 어렵고 책 페이지의 글자들을 본 적은 있습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가톨릭 출판사 서평단 활동을 10년은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기네요.​엔도 슈사쿠는 서양의 종교인 그리스도교를 어떻게 하면 일본 사람들의 마음속에 잘 뿌리내리게 할 수 있을지 한평생 고민했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 자기 의사와 상관없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신앙은 마치 내 몸에 맞지 않는 헐렁한 서양식 양복처럼 어색했습니다. 엔도는 오랜 시간 글을 쓰며 그 어색한 양복을 자기 몸에 딱 맞게 고쳐 입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이번 책 그리스도의 탄생에는 그런 작가의 깊은 생각이 담겨 있습니다.​이 책에서 엔도는 예수님을 조금 특별하게 바라봅니다. 당시 유다교 안에서 새로운 개혁을 꿈꿨지만, 결국 실패하고 처형당한 비극적인 인물로 본 것이죠. 엔도는 예수님의 삶을 진주조개 속의 작은 모래알에 비유합니다. 처음에는 조개 안에 들어온 거칠고 아픈 이물질이었지만, 제자들이 그 아픔을 마음속에 소중히 간직하고 키워냈기 때문에 아름다운 진주 같은 종교가 탄생할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엔도는 『예수의 생애』에서 예수님이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 고통받고, 그들의 짐을 함께 지며, 그들의 영원한 동반자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의 여러 소설에서 그리스도는 인간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고 함께 겪는 존재로 아주 강력하게 그려집니다. 이번 책 『그리스도의 탄생』에서도 예수는 무력하고 비참한 죽음을 맞이합니다. 하지만 엔도는 사랑 때문에 죽음을 택한 예수를 통해 우리가 하느님을 다시 인식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특히 엔도는 하느님의 침묵에 대해 제가 궁금해했던 이야기를 합니다. 하느님이 침묵하시는 이유는 우리를 외면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가장 비참하고 힘들 때, 하느님이 이미 우리 곁에 와서 함께 아파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무력하게 돌아가신 예수님의 모습은, 하늘에서 기적을 내려주는 강한 신의 모습이 아니라 우리 곁에서 끝까지 함께 울어주는 사랑의 하느님을 보여줍니다.그래서 엔도는 하느님을 혼내고 벌 주는 엄격한 아버지보다는 어머니 같은 모습으로 이해합니다. 서양의 그리스도교가 전통적으로 잘못을 엄격하게 따지는 아버지의 이미지가 강했다면, 엔도는 일본인들에게는 어머니처럼 그래도 괜찮다, 다 이해한다라며 아무 조건 없이 감싸주는 사랑이 더 절실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엔도는 일본을 무엇이든 집어삼켜 녹여버리는 늪에 비유하곤 했습니다. 논리적이고 딱딱한 서양식 신관은 이런 늪 같은 일본 문화에서 뿌리 내리기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조용히 수용하고 함께 젖어 들어가는 어머니의 사랑은 일본인들의 감성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졌습니다. 특히 전쟁에서 패하고 몸과 마음이 모두 부서진 당시 일본인들에게, 비참한 밑바닥까지 내려와 같이 울어주는 어머니 예수님은 그들의 슬픔과 열등감, 비겁함까지도 말없이 안아주는 유일한 통로가 되었습니다. 화려하고 강력한 힘을 가진 신보다, 인간과 똑같이 고통받는 무력한 예수님의 모습이 그들에게는 진정한 신성으로 다가온 것입니다.​제자들의 모습도 인상적입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 무서워서 모두 도망쳤습니다. 그들은 자기가 예수님을 배신했다는 사실에 부끄러움을 느꼈고, 예수님이 자기를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며 괴로워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며 돌아가셨습니다. 제자들은 나중에서야 그 큰 사랑을 깨달았습니다. 나 같은 겁쟁이도 사랑하시는구나라는 깨달음이 그들을 변화시켰고, 예수님은 제자들의 마음속에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엔도는 이를 연극의 제3막이라고 불렀습니다. 제1막이 예수님이 사람들과 함께 지내던 시기이고, 제2막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비극적인 순간이라면, 제3막은 죽은 줄 알았던 예수님이 제자들의 마음속에서 그리스도로 다시 태어나는 시기입니다. 사실 엔도는 여기서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십자가에서 무기력하게 죽은 예수가 어떻게 죽음 뒤에 영광스러운 그리스도로 불릴 수 있었는지, 그리고 스승을 배반했던 제자들이 어떻게 목숨을 걸고 가르침을 전하게 되었는지 말입니다.​엔도는 예수님이 돌아가신 뒤에야 제자들이 비로소 스승이 누구인지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했다고 봅니다. 바로 이런 제자들의 재발견이야말로 부활의 진짜 의미라고 강조합니다. 여기서 제자들이 전한 사랑이란 바로 나의 가장 못나고 비겁한 모습까지도 이미 다 알고 계시면서, 아무런 조건 없이 나를 먼저 용서해 주신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제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생 밑바닥에, 그리고 그들의 마음속에 다시 찾아오셨습니다. 제자들을 붙잡고 절대로 놓아주지 않으셨던 그 사랑이 곧 부활이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도 처음에는 이를 바로 깨닫지 못했지만,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야 이 놀라운 사실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이 자기들의 배신이라는 잘못을 숨기지 않고 오히려 그 큰 용서를 세상에 알리기 시작했을 때, 진짜 복음이 시작된 것입니다.​예수님을 알지 못해서, 그분을 더 잘 알고 싶어서 시작한 가톨릭출판사 서평단이었습니다. 그러나 첫해에는 도대체 무슨 말인지 책 내용을 전혀 알아듣지 못해서 서평 글을 쓴다는 것이 낯 뜨겁고 당황스럽기만 했습니다. 그냥 혼자 조용히 읽다 말걸, 괜히 출판사 서평단을 해서 창피만 당하는 것 같아 매달 후회하며 힘들게 숙제를 했었습니다. 두 번째 해에는 전년보다는 말귀를 알아들을 수 있을거라 기대했지만, 여전히 맹~ 했습니다. 세 번째 해가 되니 신학원에서의 공부와 맞물려 가면서 비로소 조금씩 알아들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마침 그 해에 서평 도서가 두 달에 한 권으로 변경된 덕분에 가톨릭 북클럽과 캐스리더스 활동을 둘 다 병행할 수 있었고, 그렇게 어느덧 가톨릭출판사 서평단 4년 차가 되었습니다.연차만 쌓인 4년 차라 말 꺼내기가 부끄럽지만, 이번 달 서평 도서로 그리스도의 탄생을 마주하니 서평단 첫해에 어버버하며 읽었던 엔도 슈사쿠의 『나의 예수』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실 지난달 올해 북클럽 첫 모임 때도 쑥스러워 직접 언급을 피했었는데, 또다시 엔도를 만나게 되니 결국 3년 전 첫해에 나의 예수를 봤다고 고백합니다. 읽었다고 말하기는 어렵고 책 페이지의 글자들을 본 적은 있습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가톨릭 출판사 서평단 활동을 10년은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기네요.​엔도 슈사쿠는 서양의 종교인 그리스도교를 어떻게 하면 일본 사람들의 마음속에 잘 뿌리내리게 할 수 있을지 한평생 고민했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 자기 의사와 상관없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신앙은 마치 내 몸에 맞지 않는 헐렁한 서양식 양복처럼 어색했습니다. 엔도는 오랜 시간 글을 쓰며 그 어색한 양복을 자기 몸에 딱 맞게 고쳐 입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이번 책 그리스도의 탄생에는 그런 작가의 깊은 생각이 담겨 있습니다.​이 책에서 엔도는 예수님을 조금 특별하게 바라봅니다. 당시 유다교 안에서 새로운 개혁을 꿈꿨지만, 결국 실패하고 처형당한 비극적인 인물로 본 것이죠. 엔도는 예수님의 삶을 진주조개 속의 작은 모래알에 비유합니다. 처음에는 조개 안에 들어온 거칠고 아픈 이물질이었지만, 제자들이 그 아픔을 마음속에 소중히 간직하고 키워냈기 때문에 아름다운 진주 같은 종교가 탄생할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엔도는 『예수의 생애』에서 예수님이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 고통받고, 그들의 짐을 함께 지며, 그들의 영원한 동반자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의 여러 소설에서 그리스도는 인간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고 함께 겪는 존재로 아주 강력하게 그려집니다. 이번 책 『그리스도의 탄생』에서도 예수는 무력하고 비참한 죽음을 맞이합니다. 하지만 엔도는 사랑 때문에 죽음을 택한 예수를 통해 우리가 하느님을 다시 인식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특히 엔도는 하느님의 침묵에 대해 제가 궁금해했던 이야기를 합니다. 하느님이 침묵하시는 이유는 우리를 외면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가장 비참하고 힘들 때, 하느님이 이미 우리 곁에 와서 함께 아파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무력하게 돌아가신 예수님의 모습은, 하늘에서 기적을 내려주는 강한 신의 모습이 아니라 우리 곁에서 끝까지 함께 울어주는 사랑의 하느님을 보여줍니다.그래서 엔도는 하느님을 혼내고 벌 주는 엄격한 아버지보다는 어머니 같은 모습으로 이해합니다. 서양의 그리스도교가 전통적으로 잘못을 엄격하게 따지는 아버지의 이미지가 강했다면, 엔도는 일본인들에게는 어머니처럼 그래도 괜찮다, 다 이해한다라며 아무 조건 없이 감싸주는 사랑이 더 절실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엔도는 일본을 무엇이든 집어삼켜 녹여버리는 늪에 비유하곤 했습니다. 논리적이고 딱딱한 서양식 신관은 이런 늪 같은 일본 문화에서 뿌리 내리기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조용히 수용하고 함께 젖어 들어가는 어머니의 사랑은 일본인들의 감성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졌습니다. 특히 전쟁에서 패하고 몸과 마음이 모두 부서진 당시 일본인들에게, 비참한 밑바닥까지 내려와 같이 울어주는 어머니 예수님은 그들의 슬픔과 열등감, 비겁함까지도 말없이 안아주는 유일한 통로가 되었습니다. 화려하고 강력한 힘을 가진 신보다, 인간과 똑같이 고통받는 무력한 예수님의 모습이 그들에게는 진정한 신성으로 다가온 것입니다.​제자들의 모습도 인상적입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 무서워서 모두 도망쳤습니다. 그들은 자기가 예수님을 배신했다는 사실에 부끄러움을 느꼈고, 예수님이 자기를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며 괴로워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며 돌아가셨습니다. 제자들은 나중에서야 그 큰 사랑을 깨달았습니다. 나 같은 겁쟁이도 사랑하시는구나라는 깨달음이 그들을 변화시켰고, 예수님은 제자들의 마음속에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엔도는 이를 연극의 제3막이라고 불렀습니다. 제1막이 예수님이 사람들과 함께 지내던 시기이고, 제2막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비극적인 순간이라면, 제3막은 죽은 줄 알았던 예수님이 제자들의 마음속에서 그리스도로 다시 태어나는 시기입니다. 사실 엔도는 여기서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십자가에서 무기력하게 죽은 예수가 어떻게 죽음 뒤에 영광스러운 그리스도로 불릴 수 있었는지, 그리고 스승을 배반했던 제자들이 어떻게 목숨을 걸고 가르침을 전하게 되었는지 말입니다.​엔도는 예수님이 돌아가신 뒤에야 제자들이 비로소 스승이 누구인지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했다고 봅니다. 바로 이런 제자들의 재발견이야말로 부활의 진짜 의미라고 강조합니다. 여기서 제자들이 전한 사랑이란 바로 나의 가장 못나고 비겁한 모습까지도 이미 다 알고 계시면서, 아무런 조건 없이 나를 먼저 용서해 주신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제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생 밑바닥에, 그리고 그들의 마음속에 다시 찾아오셨습니다. 제자들을 붙잡고 절대로 놓아주지 않으셨던 그 사랑이 곧 부활이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도 처음에는 이를 바로 깨닫지 못했지만,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야 이 놀라운 사실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이 자기들의 배신이라는 잘못을 숨기지 않고 오히려 그 큰 용서를 세상에 알리기 시작했을 때, 진짜 복음이 시작된 것입니다.​물론 엔도의 이러한 부활 해석은 전통적인 가톨릭 교의와는 미묘한 거리감이 존재합니다. 가톨릭 신학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신앙의 가장 근본적인 토대이자 초월적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엔도의 시도는 복음이 특정 문화에 뿌리내리는 토착화(Inculturation)의 관점에서 유의미한 비평적 가치를 지닙니다. 그는 서구적이고 부성적인 하느님상에 낯설어하는 일본인들에게, 불교적 자비 사상과 맞닿아 있는 함께 아파하는 하느님의 얼굴을 제시함으로써 신앙의 접점을 마련하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토착화 과정은 자칫 혼합주의로 흐를 위험을 내포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복음의 정신이 문화적 가치를 내적으로 변화시키는 역동적인 과정이기도 합니다. 엔도는 참 하느님이 참 사람이 되셨다는 강생의 신비를 인간의 고통이라는 가장 낮은 문을 통해 증명하려 했습니다. 그는 분노하고 벌하는 심판자 대신, 자식의 허물을 자기 몸처럼 아파하며 조건 없이 받아들이는 어머니 같은 이미지의 하느님을 통해 일본 특유의 정서를 어루만졌습니다.​결국 그리스도의 탄생은 인간은 누구나 약하고 비겁할 때가 있지만, 하느님은 바로 그 비참한 밑바닥까지 찾아오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기 때문에 우리에게 위로를 줍니다. 맞지 않는 양복을 제 몸에 맞게 고치려 했던 노작가의 따뜻한 손길은, 오늘날 자신의 부족함 때문에 괴로워하는 우리 모두에게 괜찮다고 말해주는 온기가 되어 머물고 있습니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29265/60/cover150/8932118213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92656030</link></image></item><item><author>belleunhi</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내려놓음으로써 마주하는 영원 - [죽음의 신비]</title><link>https://blog.aladin.co.kr/785688183/17169045</link><pubDate>Mon, 23 Mar 2026 23:3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85688183/17169045</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119848&TPaperId=17169045"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543/36/coveroff/8932119848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119848&TPaperId=17169045"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죽음의 신비</a><br/>아드리엔 폰 슈파이어 지음, 조규홍 옮김 / 가톨릭출판사 / 2026년 02월<br/></td></tr></table><br/>찬미예수님~ 안녕하세요. ^^&nbsp;가톨릭 출판사 북클럽 3,4월의 도서는 아드리엔 폰 슈파이어의 죽음의 신비입니다. 아드리엔 폰 슈파이어 하면 자동 연상으로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가 떠오르고,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 하면 아드리엔 폰 슈파이어가 생각납니다. 슈파이어는 현대 가톨릭 신학의 거장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와 평생에 걸쳐 신학적 영감을 주고받은 인물이라서 두 사람은 각자를 소개할 때에 꼭 서로를 언급하는 것을 봅니다. 두 사람의 관계가 그러하듯 가톨릭 출판사에서도 발타사르의 책이 나오면 슈파이어의 책이 나오고 마치 한 벌의 세트처럼 접하게 되곤 합니다. 많이 듣던 이야기라 하고 읽다가 문득! 2024년 2월에 나왔던 『발타사르 죽음의 신비를 묵상하다.』가 떠올랐습니다. 어느새 가톨릭 출판사 서평 경력직... ㅋ&nbsp;<br>발타사르의 신학적 체계 곁에는 언제나 슈파이어의 직관적이고 관상적인 목소리가 함께 흐르고 있습니다. 두 사람의 사유는 한 뿌리에서 나온 줄기처럼 닮아 있지만 그 끝은 미묘하게 다른 방향을 향합니다. 완전 다르지는 않구요, 결이 거의 비슷합니다.&nbsp;발타사르가 죽음을 통해 인간이 그리스도적 사랑 안에서 자신을 넘어서는 '자기 초월'의 드라마를 보여주었다면, 슈파이어는 죽음의 모든 과정을 하느님께 기꺼이 내어드리는 '순명'을 통해 그분의 신비에 참여하고 자신을 온전히 봉헌하는 자리를 조명합니다. 발타사르에게 죽음이 자아의 한계를 넘어 하느님께로 향하는 초월의 통로라면, 슈파이어에게 죽음은 가장 깊은 순명을 통해 하느님의 구원 사업에 자신을 봉헌하는 사명의 자리가 됩니다.&nbsp;이들의 깊은 시선을 길잡이 삼아 죽음과 생명의 신비를 풀어 봅니다.<br>스스로 삶의 주인이 되고자 했던 인간은 죽음 앞에서 한계를 깨닫게 됩니다. 그 앞에 서면 누구나 숨길 수 없는 두려움과 무력함을 마주하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평생동안 붙잡고 있던 욕심과 집착, 그리고 아집이 비로소 내려놓아지는 순간입니다. 아무것도 의지할 곳 없는 빈자리에서 인간은 비로소 하느님과 가장 가까워집니다. 끝이라고만 여겼던 그 지점은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는 해방의 문이 됩니다. 우리는 시간 속에 머물며 지금이라는 짧은 순간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살아갑니다. 그 안에서 무언가를 이루고 지키려 애쓰지만, 죽음은 우리가 쌓아온 모든 것을 내려놓게 합니다. 손에 쥐었던 것들과 소중히 여겼던 인연들, 나를 증명해 주던 생각들까지 더 이상 붙잡을 수 없게 됩니다. 죽음은 인간이 넘기 어려운 마지막 문턱인 동시에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묻는 깊은 질문이 됩니다.<br>신앙인에게 죽음은 그저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종말이 아닙니다. 삶을 하느님께 온전히 맡겨 드리는 능동적인 과정에 가깝습니다. 모든 것을 통제하려는 태도에서 벗어나 삶의 주도권을 하느님께 돌려드리는 마음가짐을 의미합니다. 죽음을 서두르거나 갈망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살아있는 동안 내려놓는 법을 조금씩 배워가는 소중한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br>성자의 삶과 수난은 죽음이 가진 이 비극적인 성격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제 죽음은 단순한 소멸이나 허무에 머물지 않고 하느님과 이어지는 새로운 길로 이해됩니다. 제아무리 자신을 중심에 두고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려 해도, 죽음이라는 문턱은 결국 우리를 다시 그분 앞에 세워 놓습니다. 사람은 때로 하느님을 외면하며 살아가지만 죽음이라는 한계 앞에서 다시 그분과 마주할 수밖에 없습니다. 죽음은 단절이 아니라 하느님과 이어지는 마지막 자리입니다. 우리가 가장 약해지는 바로 그 순간에 하느님과의 관계는 오히려 가장 깊어집니다.<br>육신의 죽음 너머에 펼쳐질 구체적인 모습은 여전히 베일에 싸인 신비로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떠나는 이의 몸을 볼 수 있을 뿐 그 이후의 일을 알지 못합니다. 죽음은 인간의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영역이기에 우리는 이를 삶과 기도 안에서 조용히 받아들입니다. 죽음은 단순히 두려워해야 할 대상이 아닙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마지막 초대이며, 영원을 향해 비밀스럽게 열린 문입니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543/36/cover150/8932119848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5433606</link></image></item></channel></r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