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 대한 예의
권석천 지음 / 어크로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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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석천이란 나름 유명한 논설위원이 쓴 글이라서가 아니라, 이번엔 그냥 제목을 보고 선택했다. 긴 시간 동안 감정 난독증으로 인해 책을 읽지 못했기에 그냥 사람에 대한 예의라는 것이 절실했기에. 시간을 내서 책을 읽는 것은 이렇게 어려운 일인 줄 몰랐다. 시간이 있어도 글자는 그저 허공을 떠돌뿐 나에게로 오지 않았던 시간, 신기하게도 쏟아지는 서류의 빈틈을 찾고 새로 만들어내는 작업은 어찌나 순조롭게 되던지.

사람에 대한 예의’, 참 친근하고도 낯설고, 일상적이면서도 무거운 말이다. 삶의 기본이면서 가장 어려운 과제. 논설위원인 작가가 써 내려간 이야기가 다소 무거울 수 있었지만 책을 읽는 내내 내가 봤던 영화, 좋아했던 드라마들을 책과 함께 다시 보는 기분이 들어서 감정 난독증을 극복하고 읽을 수 있었다.

 

프롤로그 첫 제목 낯선 나와 마주치는 서늘한 순간부터 훅 들어온 글자들이 조금씩 이전의 나를 찾게 해 주었다. 스스로 나름 괜찮은 인간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온 시간을 뒤돌아보게 했다. 정말 나는 괜찮은 인간인가? 괜찮은 어른인가?

 

나는 얼마나 한심한 인간인가, 돈 몇 푼에 치사해지고, 팔은 안으로 굽고, 힘 있는 자에게 비굴한 얼굴이 되기 일쑤다. 아는 얼굴이 보이지 않는 곳에선 욕망의 관성에 따라, 감정이 시키는 대로 행동하려 한다. 소심할 뿐인 성격을 착한 것으로 착각하고, 무책임함을 너그러움으로 포장하며, 무관심을 배려로, 간섭을 친절로 기만한다. (p.16)

 

8가지 사항 중에 팔은 안으로 굽고정도? 이것도 자기기만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냥 우리 부서 일과 사람을 우선하는 것. 그러나 그 우선엔 항상 합리성이 함께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감정적이라기보다는 이성적이고, 아직은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이 많아 무조건 먼저 해 보니 소심하지 않고, 넘쳐나는 책임감을 노쇠한 몸이 따라가지 못해 힘이 든다. 고로 나는 아직은... 한심한 인간은 아니다. 이렇게 말하면 누군가는 그건, 네 생각이고!”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한없이 약한 인간도 악마가 갖지 못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 힘은 가족, 친구, 사람에 대한 마음이다. 오롯이 인간으로서 살고자 하는 마음이다. 악에 무릎 꿇지도, 용서하지도 않겠다는 마음이다. 그리하여, 인간이란 한계는 오히려 구원이 된다. (p.36)

 

가족, 친구가 언제나 편한 것은 아니다. 가족으로 인해, 친구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매일매일 뉴스를 장식한다. 인간으로서 살고자 하는 마음이 없거나 어떤 상황으로 인해 포기한 사람들의 이야기. ()은 본능이 원하는 것을 참을 때 얻어지는 쓰디쓴 열매인 반면, ()은 내가 원하는 것을 먼저 이룰 수 있음을 바탕으로 유혹한다. 세상 그 무엇보다 단맛을 보여주며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중독(中毒). 그래서 인간으로 살고자 하는 마음을 지키기란 말처럼 쉽지 않다. 악에 무릎 꿇고 나면 끝나지만, 악에 무릎 꿇지도 용서하지도 않겠다는 마음을 계속 가지는 삶에는 지켜야 할 선들이 너무 많아진다. 너무 비관적인가?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지켜야 할 많은 선들을 지키면서 끝까지 인간으로 살고자 애쓰는 사람들의 삶이 바로 평범한 우리들의 이야기다.

그래서 악에 굴복한 사람들의 이야기에 분노하고 그들로 인해 슬픈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고 위로해 주는 세상이 여전히 존재하는 것이다. 가장 어려울 때 비로소 빛나는 인간적인 삶. 코로나 19로 전세계가 뒤숭숭할 때, 어쩌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의료봉사자들부터 작은 나눔을 실천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들이 사는 세상이 여전히 아름다움을 보여주지 않던가!

 

너를 위해이데올로기는 위험하다. 진심으로 너를 위한 것일지라도 자칫 너에게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는 의미로 변질되기 쉽다. 자식에 대한 관심이 집착과 학대로, 사랑이 스토킹으로 변화는 건 순간이다. 너를 위한다는 마음으로 얼마든지 무례해지고 잔인해질 수 있는 게 인간이다.

어떤 관계든 서로를 인격체로 존중할 수 있는 적정 거리는 반드시 필요하다. (중략) ‘사회적 거리 두기(Social Distancing)’가 진짜 필요한 건 가까운 사이에서다. (p.50-51)

 

너를 위한다는 믿음으로 많은 부모가, 애인이, 상사가 내 삶을 옥죄어오는 순간이 있다. 본인은 정말로 그렇게 믿는 것이다. 정말로 너를 위해서라고. 내가 그들에게 너를 위해서네가 하는 말과 행동을 인정할 수 없다고 한다면? 일방통행인 그들은 그것마저 부정할지 모른다. 자신은 옳고 나는 그르다는 생각이 바뀌지 않는 이상, 이 상황은 도돌이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내가 먼저 그들과 사회적 거리 두기를 실천할 수밖에. 그러나 이마저도 스스로 할 수 없는 사람들이 많다. 사회적 약자라고 불리는 사람들. 갑자기 마음이 답답해진다.

 

부모들은 말한다. “남들이 잘 때 공부해야 이긴다. 악착같이 싸워서 무조건 이겨라. (중략) 누구도 믿지 말아라, 널 구해줄 사람은 너 한 사람밖에 없다.”

사장님, 회장님들은 말한다. “생존 경쟁의 시장에서 널 살아남게 하는 건 오직 실력뿐이다. (중략) 그러니, 눈에 보이는 성과로 우릴 설득해라.” (p251)

 

책 중간에 있던 사자성어가 생각난다. 주마가편(走馬加鞭), 말은 죽을 맛이다. 분골쇄신(粉骨碎身), 이미 만신창이다. 업무와 인간관계로 에너지가 바닥난 동료에겐 파이팅!”이란 말 대신 말 없이 따뜻한 차 한 잔을 건네는 것이 답이다. “파이팅!”하면서 두 주먹 불끈 쥐어 보이는 그놈의 팔모가지를그냥진정. 작가는 개인주의라고 하지만, 이것은 부모와 사장님들의 이기주의가 바탕이다. 자신의 것을 남을 통해 지켜보고자 하는 얕은 수작에 놀아나지 않으려면 선택해야 한다. 나의 삶을 살 것인지, 타인의 삶을 살 것인지.

세상은 이런 선택으로 조금씩 변화한다. 그리고 그 선택의 기준은 언제나 사람이어야 한다. ‘사람에 대한 예의를 지키면서.

바라건대, 스스로를 믿지 않기를, 낯선 나와 마주치는 순간 서늘한 바람이 불어올 것이다. (p.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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