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21 | 22 | 23 | 24 | 25 | 26 | 27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수선화에게 - 정호승 시선집
정호승 지음, 박항률 그림 / 비채 / 2015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정호승, <수선화에게> 리뷰


 

시를 읽는다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다. 시를 접한다는 일 자체가 사회적으로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시는 교과서에서나 볼 법한 하나의 이벤트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나마 교과서에 실린 시들은 온갖 형형색색의 볼펜으로 난도질 당하기 일쑤다. 화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비롯해 온갖 다양한 심상은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 그런 것들을 알아내려고 안간 힘을 쓰는게 바로 시다. 시 한 번 내 맘대로 읽는 것이 이렇게나 어렵다. 그 때문인지, 스무살이 되기 전까지는 시집을 내 돈 주고 구매해본 적이 없다. 시를 왜 돈 주고 사야하죠? 언제나 시는 가격대비 글씨가 적은, 그야말로 가성비 안 먹히는 책에 불과했기 때문에.

그러다 문득 여백이 그리워지는 시점이 왔다. 시간은 넘쳐나는데 도무지 할 일은 없던 스무살 첫 여름방학에 나는 뭔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책을 삼켰다. 책의 내용은 중요치 않았다. 정말 중요한 건 내가 이 넘쳐흐르는 시간을 무엇으로 때울 수 있느냐 뿐이었다. 책장을 넘기는 속도보다 눈길이 빠르기를 바라며, 꾸역꾸역 책을 쌓아놓고 읽는데 왠지 모를 희열(?)을 느꼈던 찰나였다. 순간 빼곡한 활자들이 어지럽게만 느껴졌다. 꼭 이렇게까지 읽어야 하나. 그만하고 싶다.

큰 맘 먹고 시집을 구매했다. 어려운 시도 아니고 그냥 현대시집이었다. 세상에, 아직도 시집을 팔릴 거라 생각하고 내는 시인들이 있다니. 내가 시집을 구매한 사람이지만, 시집을 팔겠다고 쓰는 시인이나 이걸 출판해주는 출판사나 다들 놀랍다고 생각했다. 시집을 읽는 사람은 내 주변에 하나도 없었기에, 그리고 이러한 생각에 반박이라도 하듯 시집은 시리즈로(!) 판매되고 있었기에.

시집을 읽는다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일일이 설명해주는 글은 없이 짧은 몇 가지 문장들로만 페이지가 채워져있으니 생각보다 어려웠다. 무슨 말인지 모르는 채 책장을 넘기는 적이 많았고, 가끔은 시인이 어려운 한자나 옛말들을 가져다 놓아서 사전을 찾은 적도 있었다. 이걸 보고 엄마는, 너는 무슨 시를 사전 찾아서 읽냐, 고 하시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 빼곡한 활자가 아닌 여백에 숨겨진 몇 문장을 스스로 찾는 연습을 하면서 시집의 맛을 조금씩 배워갔다. 그렇게 해서 비로소 내 책장에 몇 안 되는 시집들에게 자리를 내어주기 시작했다.

정호승 시인의 <수선화에게>는 그 몇 안 되는 시집 중 하나다.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에서 다채로운 스토리를 만들어 주는 시집. 여전히 모든 시를 이해할 순 없지만, 두고 두고 꺼내 읽으며 한 줄 한 줄 되새기고 싶은 그런 문장들이 있다.

오늘도 당신의 밤하늘을 위해

나의 작은 등불을 끄겠습니다

오늘도 당신의 별들을 위해

나의 작은 촛불을 끄겠습니다

- 당신에게

수선화에게

작가
정호승
출판
비채
발매
2015.03.28.
평점

리뷰보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애프터 다크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64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5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무라카미 하루키 <애프터 다크> 리뷰

"사람마다 싸우는 전쟁터가 다 다른거야."

 

© 네이버 책 정보


사람마다 자신을 소개하는 방식은 제각각이겠지만, 유독 자신을 '관계'로서 표현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다. 어쩌면 관계를 통해 나 자신을 모르는 이에게 소개한다는 건 가장 쉽고 어색하지 않은 방법일지도 모른다. "나 누구누구의 친구에요" 혹은 "저는 누구누구 선생님께 배웠습니다" 같은 말들은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간 처음 보는 이 앞에서 잠시동안만이라도 웃음을 짓게 만드니까. 예전에는 관계로서 자기자신을 소개하는 누군가의 방식에 대해 유난히 불평하거나 고쳐주려는 사람들을 본 적도 적지 않았는데, 지금에서야 생각해보면 관계로서 나 자신을 정의할 줄 아는 사람은 누구보다 시야가 넓은 사람이라고 생각된다. 나 자신을 포함해 내 옆, 내 행동 반경 또한 나를 이루는 하나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있지, 미안한데 너 아사이 에리의 동생 아니야?"

​이 말 한 마디로 시작되는 스토리는 '아사이 에리'의 동생 '마리'의 시선을 통해 움직인다. 오직 이들의 공통점은 마리의 언니인 '에리'지만, 실제로 이야기 전개 상 언니 에리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저 동생인 마리의 입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존재할 뿐이다. <애프터 다크>는 비슷한 듯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아가는 두 자매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진행한다. 집에 있기 싫어 밖으로 나와 카페에서 밤을 지새우는 마리는 하룻밤동안 다양한 삶의 방식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언니한테 안부 전해달라고?"

"그것도 약간은 있을지 몰라."

"우리 언니는 트롬본이랑 오븐토스터의 차이도 잘 모를 텐데. 구치랑 프라다의 차이라면 단박에 알 것 같지만."

"사람마다 싸우는 전쟁터가 다 다른 거야."

​p.29


얼굴 없는 남자

<애프터 다크>는 주인공인 마리의 하룻밤과 '얼굴 없는 남자'의 일상을 교차하여 보여주는 조금은 독특한 방식이다. 얼굴 없는 남자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그가 알 수 없는 침입자이자 범죄자(?)라는 점이다. 특히 마리의 언니인 '아사이 에리'의 방 안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얼굴 없는 남자에 대한 묘사는 섬뜩하면서도 알 수 없는 궁금증에 빠지게 만든다. 더불어 독자들에게 이러한 얼굴 없는 남자의 '시선'을 공유할 수 있게끔 하면서 범죄 현장을 함께하고 있는 듯한 착각에 들게 만들기도 한다.

(...) ​우리는 하나의 시점이 되어 그녀를 보고 있다. 어쩌면 훔쳐보고 있다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시점은 공중에 뜬 카메라가 되어 방 안을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다. 현재 카메라는 침대 바로 위에 위치하며 그녀의 잠든 얼굴을 포착하고 있다. 사람이 눈을 깜박이듯 간격을 두고 앵글이 바뀐다. 그녀의 잘생긴 입술은 한일자로 곧게 다물어져 있다.

p.31



동은 트고


"언니가 두 달쯤 전에 '지금부터 얼마 동안 자야겠다'라고 말했어요. (...) 우리는 '잘 자'라고 했어요.

언니는 식사에는 손을 거의 안 대고 자기 방으로 가서 침대에 누웠어요. 그 이래로 계속 잠만 자요."

"계속?"

"네."

p. 192

언니는 계속해서 잠에 빠져들어 가지만, 정작 마리는 잠에 들지 못하는 밤이 더 많다. 깨어있는 모습보다 잠들어 있는 모습을 더 많이 보여주는 언니 '에리'는 동생인 '마리'와 그다지 살가운 관계는 아니였다. 언니와의 따뜻하고 정답던 기억들을 떠올리기가 쉽지 않다는 마리의 이야기를 통해, 마리가 끊임없이 언니와의 추억을 되새기고자 노력하고 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하룻밤을 지나며 마리는 서로가 서로를 꼭 껴안고 있었던 어릴 적 언니와의 기억을 다시금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생각하는 건데, 인간은 기억을 연료로 해서 사는 게 아닐까? 그게 현실적으로 중요한 기억인지 아닌지 생명을 유지하는 데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 같아. 그냥 연료야. 신문 광고지가 됐든, 철학책이 됐든, 야한 화보사진이 됐든, 만 엔짜리 지폐 다발이 됐든, 불을 지필 때는 그냥 종이쪼가리잖아? 불은 '오오, 이건 칸트잖아'라든지 '이건 요미우리 신문 석간이군'이라든지 '가슴 끝내주네'라든지 생각하면서 타는 게 아니야. (...) 소중한 기억도, 별로 소중하지 않은 기억도,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기억도, 전부 공평하게 그냥 연료."

p.202


마리에게 기억을 되새기는 과정인 이 하룻밤은 어떻게 끝이 날까.

기한 없는 잠에 빠져들어 나올 줄 모르는 에리는 깨어날 순 있는 걸까.


무라카미 하루키의 <애프터 다크>였다.



 

애프터 다크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
출판
비채
발매
2015.08.28.
평점

리뷰보기



* 아쉬운 점

재미도 있고, 특히 재미가 보장되는, '실패하기 어려운 작가'의 책이긴하나

소설치고 약간 '형이상학적(?)'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특히 얼굴 없는 남자에 대한 서술을 교차하여 보여주는 장면은 흥미롭지만

그 감상을 말로 설명하기가 참 힘들다.(...)


또한 굉장히 세련되고 현대적인 언어를 구사하는 작가의 책이지만, 가끔 과도하다고 느껴질 때도 있다.

<애프터 다크>는 특히나 영화적인 기법을 사용한 점이 눈에 띄어서 그런지

완전한 팬(...)이 아닌 나로서는 좀 어색하게 느낄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읽는 데 무리가 있는 정도는 아님을 밝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애프터 다크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64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5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영화적 기법이 들어간 책, 쉽지는 않지만 재미는 있음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왜 책을 만드는가? - 맥스위니스 사람들의 출판 이야기
맥스위니스 엮음, 곽재은.박중서 옮김 / 미메시스 / 2014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이 점점 안 읽히는 시대에 필요한 책을 위한 책입니다. 재미없게 책을 어떻게 만드나를 알려주는 내용이 아니라, 재미있는 에피소드 위주로 되어 있어요. 빌려 읽었다가 구입하려는 책!!!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eBook] 젊은 작가의 책
문학동네 엮음 / 문학동네 / 2016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짤막하게 끊어읽기에 더없이 좋다. 이북을 처음 접해보는 입장에서 지면으로 다시 만나보고 싶은 책이다. 인터뷰 질문의 퀄리티도 높고 생각보다 지루하지 않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21 | 22 | 23 | 24 | 25 | 26 | 27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