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켄슈타인 - 200주년 기념 풀컬러 일러스트 에디션 아르볼 N클래식
메리 셸리 지음, 데이비드 플런커트 그림, 강수정 옮김 / 아르볼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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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켄슈타인




메리 셸리 글.데이비드 플런커트 그림. 강수정 옮김

지학사 아르볼





프랑켄슈타인! 나의 편견을 뛰어 넘는 책이었다. 문학으로 만나기 이전에 이 작품을  단순 공포물로써 괴기스럽게만 생각했다. 1800년대에 이런 작품을 쓰다니! 그것도 고작 열여덟 살 나이 어린 여성이! 천재는 99퍼센트 노력으로 만들어진다는 데 그녀의 재능은 이미 타고난 것인가! 질투가 나도록 풍부하고 섬세한 묘사력 읽는내내 가슴이 저려왔다. 게다가 저자 메리 셸리는 엄친딸이다. 부모님도 당시 쟁쟁한 분들, 아버지 윌리엄 고드윈은 미스터리 소설가, 어머니는 그 당시 페미니스트 선언을 작성했다니 놀랍다. 그녀는 이복동생 클레어와 사랑하는 남자 퍼시 비시 셸리, 이렇게 셋이서 사랑의 도피여행을 떠난다. 찾아본 바로는 세 사람이 서로 삼각관계였는데! 아무리 작가와 작품을 떼려 해도 자꾸 오버랩된다. 그런 남과 다른 과감한  일생이 작품에 녹아 있는 듯하다. 




소설의 형식은 화자인 월튼이 누이에게 쓴 편지로 시작된다. 편지 내용은 눈물겨웠다. 월튼은 신실한 친구 하나 없이 외로운 항해를 한다. 편지의 마지막 장에서 그가 만난 기괴한 사건이자 본 소설의 발단인 젊은 과학자 빅터 프랑켄슈타인의 이야기로 자연스레 흘러간다. 200년이 지난 지금 봐도 전혀 촌스럽지 않은 구성이다. 나는 이 소설이 단순 공포물인 줄 알았고 심지어 과물 이름이 프랑켄슈타인인 줄 알고 있었다. 아! 나의 무지와 편견이 하나씩 그 껍질을 벗는 순간인가! 




계속 입을 닫고 조용하던 빅터 프랑켄슈타인의 이야기가 본격 시작된다. 그의 아버지는 친구 보포르의 딸 캐럴라인과 결혼한다. 아버지는  여러 공직을 거치며 명예와 명성을 가진 사람이었고 어머니는 다정하고 유순한 분이었다. 고모가 죽자 그녀의 외동딸 엘리사베스를 데려와 함께 살게 된다. 놀이 동무이자 친구로 성장한 두 사람. 그의 유년 시절은 그림같이 행복했다. 그러나 이미 불행이 문 앞까지 와 있다.




어느 날 우연히 코르넬리우스 아그리파의 책을 발견하고 이에 심취한다. 아버지는 책의 겉장을 보고 그런 책을 보는 것은 시간 낭비라고 다그치지만 오히려 그 일을 계기로 빅터는 연금술이나 신비주의에 더욱 깊이 몰두했다. 그런 그에게 아버지는 자연 철학 강의를 권한다. 열일곱 살이 되자 잉골슈타트 대학에 다니기로 결정한다. 이 무렵 첫 번째 비극이 찾아온다. 성홍열에 걸린 엘리자베스를 간호하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다. 죽음에 임박해서도 어머니는 강인함과 인자함을 잃지 않았다며... 다정했던 어머니와의 작별 이 부분 눈물 났다.




사랑하는 이들의 배웅을 받으며 그는 새로운 학교로 향한다. 여태 그가 해 온 공부 내용을 마구 비난하는 크렘프 교수와 지적인 발트만 교수의 수업을 듣는다. 그는 자연 철학 중 화학에 몰두한다.  학문에 대한 순수한 애정보다는 담당 교수님에게 끌린 듯. 거의 2년간 자연 철학의 이론과 현실 분야에 연구를 거듭한다. 그 무렵 그는 동물의 신체 구조나 해부로 관심이 옮겨간다. 밤낮을 탈진할 정도로 노력한 끝에 발생과 생명의 근원을 밝혀내고 생명이 없는 것에 생기를 불어넣을 수 있게 된다. 죽은 동물과 사람 시체의 일부를 결합한 작업인데 상상해보면 참으로 기괴하다.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이 헉! 이게 과학적으로 가능한가? 아무리 소설이지만....



 그는 납골당에서 뼈를 구해오고 건물 꼭대기 방에서 매일 연구에 매달린다.  마침내 완성한다. 그는 생명 없는 육체에 숨을 불어넣는다. 그가 자신의 피조물을 보고 처음 느낀 감정은 숨 막히는 공포와 혐오였다. 그것의 얼굴은 공포 그 자체였다. 그는 집을 뛰쳐나와 달리다가 친구 앙리 클레르발을 만난다. 앙리를 집에 데려가서도 그 괴물이 있을까 봐 전전긍긍. 그런데 괴물은 어디로 갔지? 그는 몸 져 눕는다. 앙리는 그를 간호하고 집의 식구들은 걱정이 태산이다. 쇠약해진 그에게 한 통의 편지가 온다. 엘리자베스였다. 그는 앙리의 도움을 받으며 차츰 괴물을 잊고 현실에 적응하는가 싶었는데 두 번째 비극 동생 윌리엄의 사망 소식이 전해온다. 실종되었던 윌리엄은 누군가에 의해 목이 졸린 채로 발견되었다. 엘리자베스는 자책으로 쓰러졌도 편지를 읽은 빅터의 고통도 이루 말 할 수 없었으리라. 




놀랍게도 살인자로 지목된 것은 집안일을 하던 가엽은 소녀 저스틴 모리츠. 빅터는 그녀의 결백함을 알고 있었다. 괴물의 짓이라는 것을. 그는 깨달았어야 했다. 이미 일어난 일은 어쩔 수 없다. 잘못된 판단을 신념으로 믿고 괴물을 만들어 버린 그. 자신이 한 일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몰랐단 말인가?  그런데 빅터는 지금 피하려고만 하고 있다. 무책임은 과연 어떤 재앙을 불러올 것인가! 이 작품에서 굳이 꼭 한 단어만 뽑는다면 나는 '책임'이라고 하겠다.




빅터는 자신의 기술을 이용해서 피조물을 만들어낸다. 뒤에 동생 윌리엄의 죽음이나 누명을 쓰고 죽은 저스틴의 고통, 친구 앙리의 죽음, 그리고 사랑하는 엘리자베스의 죽음. 그는 사랑하는 사람을 하나둘 잃는다. 그 고통을 어찌 말로 다 묘사할 수 있겠는가! 너무도 다정하고 따뜻한 사람들이었기에 죽음이 선뜻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책의 1/3 부분부터 절절한 고통이 전해져와서 읽는 나 역시 고통스러웠다. 그런데 정말 납득이 되지 않는 것은 그가 왜 이 피조물을 만들었내는 것이다. 반드시 창조해내야만 하는 절실한 이유보다는 연구를 하다 보니 순간 호기심과 아이디어와 2년간 공부에 대한 보상 등의 심리로 '일단 해보자' 싶어 시작한 것 같다. 내가 보기엔 반드시 생명을 창조해했던 명명백백한 이유나 근거는 없다. 어찌 됐건 그는 여기서 두 번째 오류를 저지른다. 자신의 피조물에 대한 일말의 책임감보다 그저 혐오감으로 일관했다.




나라면 어땠을까? 정말 눈 한 번 마주치기 힘들 정도로 공포스러울지라도 일단 뭐 어찌 된 이유에서건 본인이 창조한 작품인데 정말 일말의 연민도 없었을까? 하! 최소한의 관심도 그 어떤 자비도 없었던 것 같다. 내가 보기엔... 이 역시 편협한 나의 판단 오류일 수도 있다. 그가 적어도 괴물이 되기 이전에 창조물에게 조금이라도 정성을 쏟았더라면 이렇게까지 모든 걸 잃었겠냔 말이다. 과학도 로써의 양심을 배제한 채 그는 오로지 자신의 피조물을 부정한다.  반대로 창조해 낸 작품이 잘 생기고 예뻤다며 어쨌을까? 그때도 버리고 떠났을까? 물론 빅터를 힐난하려는 마음은 없다.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책임이 배제되면 남는 것은 실망과 증오뿐이다. 우린 이미 경험으로 알고 있다.




1부 끝부분에서 가엾은 저스틴이 감옥에서 마지막으로 대면하는 장면에서는 눈물이 났다. 그녀는 죽음을 택함으로써 결백을 주장한다. 엘리자베스 정말 다정한 사람이다. 절망에 빠진 빅터에게 네가 행복하면 주변에 행복한 기운이 가득해진다고 격려한다. 피조물은 프랑켄슈타인을 찾아온다. 아! 물론 이미 돌이킬 수 없었지만 그 때 조금이라도 따뜻하게 대해주었더라면 차라리 그가 원하는 여자 피조물을 동반자를 하나 만들어줬더라면 어땠을까 생각도 해봤다. 이렇게까지 외롭고 처절하며 고통에 몸부림치는데 정혀 불쌍한 마음 하나 없이 오로지 혐오라니! 





그의 피조물은 어떻게든 사람에게 정을 붙여보려고 백방으로 노력한 것 같다.  그 과정은 눈물겹다. 오두막집 사는 가족에게 의지해 보려 하지만 그의 몰골을 보자 사람들은 혼비백산하여 그를 내쫓고 집까지 팔고 떠나버린다. 그가 느끼는 감정을 어땠을까? 단 한 번도 사랑받아보지 못한 존재. 잘못 태어난 존재라는 느낌. 가파른 강둑에서 여자아이를 구해주지만 돌아오는 것은 그를 겨누는 총이었다. 총상을 입은 몸으로 혼자 숲을 떠돌다 빅터를 찾아온 것이다. 제발 여자를 친구를 함께할 무언가를 만들어 달라고! 그러나 빅터는 거의 완성단계에서 지금까지 해 온 작업을 산산이 부숴 버린다.




이제 괴물은 그의 결혼식 날 밤에 그를 찾아올 거란 무시무시한 예언을 남기고 떠난다. 격렬한 분노, 절망의 수렁, 그의 예언은 현실이 되고 빅터는 모든 것을 잃는다. 그는 고통으로 밤마다 아편을 복용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 빅터는 괴물을 쫓아 북으로 북으로 마침내 북극에서 월튼의 배를 만난 것이다. 




혐오의 관점으로 바라보면 그 대상은 정말 혐오덩어리가 된다. 우리는 '맘충' '일배충' '식충' '페미충' 이런 식으로 사람을 사람답게 대하지 않고 '무슨 충'이라고 빗대어 벌레 취급한다. 자신의 생각과 다르거나 입장이 다른 사람을 혐오하고 인정하지 않는 사회적 분위기는 심각하다.  나는 책임의 결여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책임 안에는 많은 하위 개념이 내포되어 있다. 일단 애정어린 시선으로 봐야 책임감이 생긴다. 단순 의무감과는 다른 개념이다. 나와 너 사이 서로 지키고 보듬어야 할 최소한의 책임을 다할 때 우리는 인간다워질 수 있다. 아! 가여운 프랑켄슈타인! 그리고 괴물이여!  




  리딩투데이 카페를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읽고 주관적으로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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