댓글부대
장강명 지음 / 은행나무 / 2015년 11월


   이 작품은 인터넷을 기반으로 하는 사이트와 커뮤니티들이 얼마나 치졸하고 비열한 방식으로 자신들과 다른 정체성을 지닌 타자들을 파괴하고 간접살인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것은 대개의 사람들이 여실히 알고 있는 문제지만 그 과정을 리얼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 소설의 역할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과정의 끝에 다다르면 그곳은 단순히 조악하고 어떤 지평을 넘어선 곳이 아니라 공포스러울 만큼 소름끼치는 현장에 이른다. 정치와 언론과 경제가 긴밀한 네트웍을 형성하고 있는 크레믈린, 상층부의 비밀스런 곳이다. 물론 모든 댓글이 그 아래에 있다는 건 아니다. 아주 극소수의 댓글부대들이(자의일 수도, 조직화된 어용집단일 수도 있는) 그 상층부, 크레믈린 성의 지시에 의해 행해질 수 있고 또 행해지고 있다는 것. 

  기자 출신의 작가라서 그런 세계를 그리는 게 어렵지는 않았을 테지만 일견 용기가 필요했을 것도 같다. 하나 작가에게는 아주 쉬운 길이 있다. 자신이 그린 세계를 허구라고 말하면 되니까. 그리고 이 글 자체는 실제 허구이다. 하지만 읽는 이들은 알고 있다. 어디선가 분명히 있을 법하고, 조금은 다른 형태이지만 그런 무리들이 있을 거라는 것. 

  그리고 이젠(아니 오래전부터) 그 네트웍에 또 하나의 계를 추가할 수 있겠다. 사법계. 돈과 권력으로 이루어진 동맹체... 어린 백성들은 낄 수 없는, 거짓과 조작과 음모로 자신들이 원하고 지배하는 세상을 이룩하고 있을지도. 또 그들은 자신들의 네트웍을 단단히 지키기 위해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쾌락을 공유한다. 얼마나 기막힌 사악한 그물망인지... 

  나중에 시간이 된다면 한 번 더 읽고 싶지만 시간이 있을지 모르겠다.












5년 만에 신혼여행
장강명 지음 / 한겨레출판 / 2016년 8월


  이 책은 에세이다. 특별한 내용은 별로 없다. 작가가 자신의 아내 HJ와 신혼여행을 보라카이로 다녀온 후 그 일정을 복기해 일기처럼 쓴 글이다. 그런데 차례는 거창한 제목들을 붙였다. 매일의 일정에서 특별히 생각난 사유를 장마다 붙인 것인데 본문에 비해 거창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사실 매 장이 자신들이 들른 곳, 먹은 음식, 사소한 일상을 그대로 복기한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일기체적인 문장들이 장강명답다는 생각도 들었다. 여행 이상도 이하도 아닌 여정일 뿐인데 그걸 하나하나 기록했다는 것 자체가 의미있다고도... 의외로 우리는 단순한 실제의 이야기에서 쾌감을 얻기도 한다. 허구로 가득한 글들과 지성과 논리로 빽빽한 글들에서 휴가를 얻은 것 같은 쾌감. 

  그러나 이 책의 가장 행복한 독자는 작가의 아내일 것이다. 장강명이 아내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상상 이상으로 따듯하고 유한 성격같아 보여서 이런 남자랑 결혼해 사는 건 참 괜찮다, 싶을 정도였다. 그래도 돈을 주고 책을 산, 무언가를 얻으려한 내게 이 에세이는 그리 탁월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게 뭐 중요한가. 장강명은 자신의 신혼여행 전부를 기록했으니 그와 그의 아니에게는 두고두고 남을 명작이 될 것이고, 나는 젊은 부부의 신혼여행을 통해 결혼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었으니 그 정도면 읽은 보람은(작가에게는 쓴 보람이) 충분하다고 할 수 있겠다. 이젠 장강명에게 아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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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장강명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8월






  장강명의 문장은 간결하고 명확하다. 리얼리즘에 반할 정도로 구체적인 사실들을 나열하지 않는다. 다른 작가들이 세네 문장을 쓸 것을 그는 한 문장으로 끝낸다. 그래서 묘사가 짧고 선명하다. 또 독자를 고려해 전후사정을 상세히 설명하지 않는다. 처음 몇 페이지는 어떤 서사가 진행되고 있는지 감을 잡지 못한다. 인물이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한참 지나야 깨닫게 된다. 

  이 작품 '그믐'은 어느 소설보다 그런 작가의 문체가 두드러진다. 너무 간결하다보니 장편이고 서사가 단순하지 않은데도 페이지가 얇다. 많은 부분이 생략되었고 중요한 가지들만 깨끗하게 다듬어놓은 정원같다. 

  또 이 작품은 두 주인공인 남자와 여자의 대화로 거의 이루어져 있다. 그 대화 속에서 '우주의 알'이라던가 학창시절 학교폭력이 드러난다. 상황묘사로 사건을 전개하기보다 겹따옴표를 치지 않은 둘의 대화나 따옴표를 치지 않은 혼자만의 생각이나 혼잣말로 사건이 어떻게 지나왔는지, 현재 어떤 상태인지를 알려준다. 정통 소설에서 한 장면, 한 에피소드에 소용되던 묘사들을 아예 하지 않는다. 새로운 문체, 새로운 스타일이다. 그래서 처음 읽을 때는 갑작스런 대화나 상황 전개로 서사와 인물에 대해 깜깜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두 번 읽었다. 그랬더니 인물들의 말과 행동이 확연하고 서사가 굉장히 간결하게 처리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작가는 처음부터 작품을 이렇게 기획했던 것이다. 

  나는 이런 작품을 디자인이 아주 잘 된, 만들어진 작품이라고 말하고 싶다. 모든 소설이 기획되었고 만들어진 것이지만 다른 작가들이 자신이 지어낸 서사를 이끌어가는 방식과 많은 면에서 다른 것 같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정통 소설에서는 개연성을 중시해 독자가 수긍하고 그 분위기에 빠져들도록 많은 배경과 상황 묘사를 하고 작가 자신의 내적인 설명을 계속 붙여간다. 하나 이 '그믐'은 그런 수고를 하지 않고 가지치기를 많이 하고 결과적인 부분만을 보여주는 방식을 사용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과정을 등한시한다는 뜻은 아니다. 과정에서도 감정적이고 지난한 시간은 생략하고 현재 상황에서 인물들의 행동이나 대화로 그것들을 압축해 드러내준다. 그림으로 치자면 중요한 선과 뚜렷한 색만 입힌 회화같다.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자신의 감정이나 의도에 대해서보다 이 작품을 쓰기 위해 어떤 자료들을 참고했고 누구에게서 도움을 받았는지를 주로 밝히는데 지면을 거의 할애하고 있다. 또 그 뒤의 수상소감(20회 문학동네작가상)에서도 자신의 작가로서의 내적인 고투에 대해서보다 가장 신랄하고 절박한 한 가지 문제를 먼저 언급한다. "먹고 사는 수단, 돈 버는 방법으로서의 소설쓰기에 대해 말하고자 합니다."로 소감을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문제가 전업 작가의 삶에 일치함을 선언한다. "계속 싸워서 글과 돈을 열심히 벌어보겠습니다. 쓰고 싶은 소설을 다 써서 더이상 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때까지, 굶어죽지 않고 살아남겠습니다."라고. 

  장강명의 세 번째 소설과 에세이를 읽고(곧 택배가 도착할 것이다) 독후감을 쓸 때에 나는 또 그의 어떤 패턴에 놀라게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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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싫어서
장강명 지음 / 민음사 / 2015년 5월






  잘 보지도 않는 편인데 얼마전 알라딘 서재에서 장강명에 대한 애증을 말한 서재지기를 본 적이 있다. 그때 나는, 그정도의 작가란 말인가, 나는 모르는 작가도 너무 많고 본 것도 너무 없구나, 또 한숨을 쉬었더랬다. 그리고 곰곰 생각해보니 한참도 더 전에 누군가도 장강명을 엄청 띄우는  언사를 한 적이 있었다(오늘 이 책을 다 읽고나서 문자를 하다 보니 그가 바로 예선 언니). 그래서 읽기 위해 일단 산 책이 '한국이 싫어서'이다. 


  장강명은 일단 글이 쉽고 정확하다. 불필요한 단어나 구절을 찾아보기 힘들고 내용도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다. 이 책에 한해서일지 모르지만 굉장히 실질적이고 현실적인 부분을 잘 다룬다. 물론 작품 뒤 참조한 책들과 두 사람의 직접적인 체험 당사자의 이야기를 채취했으니 가능했던 결과일 것이다. 

  주인공 계나의 르포 비슷한, 인간극장 비슷한 스토리는 박진감있게 펼쳐진다. 그녀는 한국이 싫다고 말한다. 그러나 가만히 속내를 들여다보면 한국이라는 땅에서 자신이 제대로 자신을 펼쳐낼 자신이 없어서이다. 자신은 일류대를 나오지도 않았고 금수저도 아니고 김태희같은 얼굴을 지니지도 못했으니 나중에 폐품을 주우러 다닐지도 모른다고 자신을 비하한다. 하긴 우리 대부분이 젊든 늙었든 비슷한 처지가 아닐까. 그러고 보면 계나는 아주 진취적이고 용기있는 사람이다. 대개의 사람들은 그래도 이 한국 땅에서 살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떠난 호주는 어떤가. 그 호주도 만만하지 않다는 건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정말 계나는 호주에서 회계사가 되고 그곳의 시민권을 얻기 위해 고군분투해야했다. 경찰에도 붙들려가 보았고 믿었던 사람 때문에 패가망신하기도 했다. 그리고 사랑하는 한국의 연인, 지명을 떠나야했다. 

  이쯤 되고 보니, 계나가 호주에서 한, 그 많은 시련과 혹독함을 이겨낸 노력이 한국에서 그렇게 했더라면 마찬가지로 한국에서도 성공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런 쎔쎔이라는 계산을 계나는 하지 않는다. 

  171쪽 문단은 의미심장하다. 비록 호주인들이, 백인들이 동양인을 차별하고 그 사회도 완벽하지는 않지만 이 페이지를 읽으면서 나도 잠깐 넘어갈 뻔했다.

  "애국가 가사 알지? 거기서 뭐라고 해? 하느님이 보우하는 건 내가 아니라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야. 만세를 누리는 것도 내가 아니라 대한민국이고, 나는 그 나라를 길이 보전하기 위해 있는 사람이야. 호주 국가는 안 그래. 호주 국가는 "호주 사람들이여, 기뻐하세요. 우리들은 젊고 자유로우니까요."라고 시작해. 그리고 "우리는 빛나는 남십자성 아래서 마음과 손을 모아 일한다."고, "끝없는 땅을 나눠 가진다."고 해. 가사가 비교가 안 돼."

  그런데 계나 같은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이 이 한국 땅을 떠나지 않는 건 대한민국이 내 조국이기 때문이 아닐까. 내가 나서 자라고 말이 통하고 내 모국어로 생각할 수 있고... 등등.

  한참 '헬조선'이라는 말이 유행할 때 써낸 책인데 그 현상은 잘 설명하고 있지만 어딘가 아쉬운 데도 있었다(진짜 본질은 현상에서 모두 찾을 수 없을 것 같아서). 무척 현실적인 상황을 그대로 다루었지만 이상하게 내겐 만족스럽지 않다.  내가 국뽕스타일이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불만스럽다는 것도 아니다. 

  쨌든 내 의식은 불투명하지만, 은연 중에, 이 소설이 현실 너머의 인간의 심연에는(물론 계나의 심연은 이해되었다) 다다르지 못하고 있지 않나 싶다. 너무 건너뛰어서 하는 의식이라 누구에게 세세히 설명하지는 못하겠지만 그런 마음이 그냥, 직관으로 든다.

 해도 명징하고 날렵한 문장을 대하기 위해 '그믐'을 사려한다. 두 번째에는 또다른 장강명이라는 작가를 만나리라 기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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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제45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손보미 외 지음 / 문학사상 / 2022년 1월






목록 

대상 

손보미 불장난


우수작

강화길 복도

백수린 아주 환한 날들

서이제 벽과 선을 넘는 플로우

염승숙 믿음의 도약

이장욱 잠수종과 독

최은미 고별


  두 번째 스터디를 하기로 하고 우선 이 작품집을 택했다. 어쨌든 최고의 작품들에 주어지는 전통있는 상이니까 가장 무난하리라 여겨져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이상 문학상이 최상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 같다. 그 외의 문학상들에서도 이보다 더 좋은 작품들도 있거니와 어떤 상도 수상하지 않았지만 훌륭한 작품들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거기에 개개의 독자 특유의 취향을 고려한다면 가장 좋은 작품은 여기저기에서 외따로 빛을 발하기도 하고 일부는 그 빛들 뒤에 숨어있기도 하니까. 

  이번에 대상을 거머쥔 손보미의 불장난도 읽기에 따라서 대단한 성취를 이룬 작품 같기도 하고 주제가 분산되어 모자이크식 배열로 통일성이 떨어지지 않나 싶기도 하다. 하나 손보미는 내가  오래전부터 좋아했던 작가다. 처음 소설을 배우던 시기에 '폭우'나 '임시교사'등은 정말 매혹적으로 다가왔다. 조금은 이국적인(이질적인) 번역투의 문장도 하나도 흠이 되지 않았다. 이제는 거의 중견작가에 다가선 느낌마저 든다. 벌써 그렇게 세월이 흘러왔다.

  또 이번 수상작가들 중 이장욱만 빼면 모두 여성작가라는 점도 특징이라면 특징인데, 이런 현상은 벌써 몇 년 전부터 진행중인 것 같다. 아무래도 남자들은 문학보다 경제활동이 우선이어서 그럴테고, 또 자본이 순수문학보다 영화나 드라마, 웹툰으로 흘러들기 때문에 그쪽으로 일찌감치 목표를 정한 남자들이 많아서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다양한 매체가 많아서 이제 문학판이 굉장히 좁아졌고, 이런 형국에 여성들 일부의 문학에의 심도는 오히려 점점 깊어지고 있는 것 같다. ....별볼일 없는 서설은 그만 두고 얼른 독후 소감이나 써야겠다. 


  불장난 (손보미)

  한 소녀의 성장기쯤으로 읽힌다. 어린 소녀는 불장난으로 자신의 부조리한 상황에 반항하면서 어느 순간 어른이 되어간다. 그러나 이 작품에는 그 못지않게 중요한 다른 주제도 거론될 수 있는데, 친엄마와 새엄마의 확연히 대비되는 의식이 그것이다. 일종의 여성의 자기 길찾기라고 해야 할까. 소녀의 친엄마는 가정보다 자신의 일을 더 중요하게 여겨 딸을 남편에게 남겨두고 이혼한다. 소녀에게는 새엄마가 생긴다. 새엄마가 된 그녀는 소녀의 선생이었고 소녀의 아빠와의 불륜을 통해 가정을 택한다. 그리고 그 시절 견디기 어려운 부조리한 삶을 불장난으로 달랬던 소녀는 어른이 되어 결혼을 하고 또 이혼을 한다. 어쩌면 엄마처럼, 또는 운명처럼. 

  중편에 가까운 이야기에 두세 가지 가지치기를 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엮어져서 한편으로는 풍요롭고 한편으로는 조금 산만하기도 하지만 잘못 묶여있다고는 할 수 없을 것 같다. 우리 인생에서 한 시절에도 우리는 여러가지를 배우고 이면의 놀라운 다른 사건을 나중에 알기도 하니까.


  복도(강화길)

  젊은 부부가 임대주택으로 이사를 와서 겪는 아이러니와 절망.

  임대아파트 100동은 단지 내에 있는 게 아니라 한길 쪽으로 따로 지어져 있다. 그래서 재활용 분리수거장으로 가려면 아파트 정문을 들어가야한다. 일반 아파트 사람들이 혹시나 외부인들이 와서 쓰레기를 버리지 않나, 의심을 하기도 하고, 배달을 시키면 기사들이 주소지를 찾지 못해 전화를 하기도 한다. 그럼 부부는 일일이 설명을 해준다. 내비 맵에서도 그들이 사는 100동은 나오지 않는다. 그래도 여자는 걱정하지 않는다. 배달기사들에게는 설명하면 통하게 되니까. 또, 곧 지도에도 건물이 제대로 나오겠지, 낙관한다. 

  1년이 지나도 그들의 임대아파트는 지도에 여전히 나오지 않는다. 어느 순간 그들은 배달을 시키지 않게 된다. 그들은 서로 저녁을 미루면서 점점 부부간의 대화가 줄어든다. 그리고 여자는 한 어린 여자아이를 자꾸 쳐다본다. 베란다 밖에서 무언가가 나타나고 사라진다. 여자는 어린 여자아이의 손을 잡고 분리수거장 커다란 통으로 들어간다....

  상징성이 뛰어난 작품이었고 어떤 긴장감이 내내 흡인력있게 진행됐지만 마지막 결론이 황당하게 끝나버려서 아쉬웠다. 


  벽과 선을 넘는 플로우(서이제)

  랩에 관심이 조금이라도 있는 독자라면 더 반가웠을 작품이다.

  이 작가는 정말 대단한 입심에 엄청난 재능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특별한 사건이나 서사보다는 의식의 흐름 기법에다 대한민국의 언더그라운드 래퍼들을 소개하는 의미, 소설이 다른 장르와의 교집합을 이룰 수 있음을 보여주는 작품.

 '0%를 위하여'에서 보았던 작가의 놀라운 기획력과 문장과 문체들... 여기서도.


  믿음의 도약(염승숙)

  읽는 게 힘들었다. 그래서 중간쯤에 그만두었는데 나중에 혹 마음이 동하면 읽어볼까 싶지만, 모르겠다, 그런 날이 올지. 유다른 작품을 내가 놓쳤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썩 좋은 마음이 들진 않는다.


  잠수종과 독(이장욱)

  어디에선가, 이 복잡한 도시의 어느 모퉁이에서인가, 서로 모르는 원수끼리 서로 모르는 채 스쳐가고 서로 한 공간에서 우연히 쳐다보다 제 갈길을 간 적이 없었을까, 누구라도.

  그런데 정말 그런 일이 벌어진다. 중증인 자신의 환자가 누워있는데 알고보니 자신의 연인을 죽게 한 사람이다. 직접 살인은 아니다. 하지만 그의 행동 때문에 내 연인은 사고를 일으켰고 죽었다. 의사인 나는 그를 살려야 할까, 죽여야 할까.

  나는 잠수종을 타고 아래로 아래로, 까마득히 검푸른 물밑으로 떨어지고 있다. 심해에 다다르면서 나는 점점 풀어지고 흩어진다. 나는 결코 물 위로 나오지 못할 것만 같다. 한데 내 손 안의 주사기에는 약물이 들어있고, 약이란 너무 적으면 효능이 없고 너무 많으면 독이 된다.

  '잠수종과 나비'라는 영화를 보고 이 작품을 썼다고 한다.  


  고별(최은미)

  최은미 발견, 어떻게 이렇게 재기발랄할 수 있을까, 정말 대단한 소설가!!

  시어머니의 장례식장에서 벌어지는 사람들의 천태만상, 결혼 전 다녔던 회사의 사람들과 얽히고 설킨 이야기. 시니컬함과 따듯함이 직조된 에피소드들. 남편을 계속 이름으로 부르는 게 백미~ 그런데 결말이 너무 갑작스럽다. 그 사람들과의 관계와 지금의 자신, 그리고 남편, 그런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일들이 시어머니와의 고별과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 너무 빨리 원고를 쓰느라 그 부분을 채우지 못했던 것일까. 그 점이 안타깝다. 

  그래도 내게 최은미라는 작가는 그녀의 소설집을 사야될 만큼 중요한 일면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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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리타 (무선)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월



    <롤리타>를 읽었다. 작년부터 책상 아래에 나뒹굴던 책이 드디어 독서대 위에서 페이지가 넘어갔고, 이제 책장을 덮는다. 환희와 죄의식을 불러일으키는 첫 문장 때문에 (롤리타, 내 삶의 빛이여, 내 몸의 불이여, 나의 죄, 나의 영혼이여. 롤리-타, 혀끝이 입천장을 따라 세 걸음 걷다가 세 걸음째에 앞니를 가볍게 건드린다. 롤,리,타.) 그 전부를 보고 싶었고 그 어떤 책보다 금기된 욕망과 에로틱한 장면들을 상상했었다. 나야말로 나보코프가 제일 치를 떨며 독설하고 싶은 독자가 아닐까.
  실제로 나보코프는1956년에 쓴 '작가의 말'에서 (504쪽) "최초의 독자들은 더러 이 책을 음란 서적으로 오인하기도 했"다며, "그러나 예상이 빗나가자 실망하고 따분해하다가 결국 독서를 중단하고 말았다" 며 저급한 독자와 매너리즘에 파진 출판사를 향해 날을 세운다. 
  그렇다 해도 나는 그렇게까지 저급한 독자는 아니다. 책을 많이 읽지 못해 상상력이 좁은 불우한 독자일 뿐. 오히려 이 <롤리타>를 통해 나는 나보코프의 예술적인 심미안을, 광범한 모든 형식과 담론을 문학에 끌어들일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험버트는 관습적인 사회에서는 비정상적인 사람이다. 그러나 그의 독특하면서도 예술적인 내면에서는 진실하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그는 고군분투해야 하고 폭력적이고 비굴해야하며 남들 앞에서는 늘 연기를 해야한다. 
  하긴 보통의 사랑도 그것을 얻기까지는 얼마나 힘들고 괴로운 과정을 거쳐야 하는가. 그리고 사랑이란 게 남들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형식을 갖추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관습적이고 이성적인 사회에서 한쌍의 남녀는 서로 미혼이어야하고 나이가 엇비슷하게 맞아야하며 이상한 집단이나 결손가정에서 자라지 않았어야 한다. 하나 사랑이란 건 그렇게 맞출 수 있는 게 아니다. 어쩌다 보니 사랑에 빠진 남녀는 그들이 사랑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사랑에 선택당하고 만 것이다(이 부분은 이 책 어딘가에 분명히 비슷한 문장으로 씌여있다). 
  험버트로서도 어쩔 수 없이(?) 생겨난 성적 취향인 것이다. 어린 시절 사랑했던 애너벨리에 대한 못이룬 사랑이 평생 그를 유아적 시각장애인으로 만든 것이라면... 나보코프는 이렇게 험버트를 완전히 사랑에 결핍되어 장애를 입게 된, 유아적인 중년 남자로 그리면서 그의 내면과 그의 범죄적인 행위를 섬세하게, 장황하게 보여준다. 어느 순간 독자는 험버트라는 꼴불견인 한 남자의 내면과 작가의 종횡무진한 박식함과 예술적 소양의 세계로 빠져드는데, 그 세계는 너무도 넓고 다채로운 빛이 가득한 세상이다. 거기에 유머와 위트가 구석구석 상황마다 인물마다 더해져 책읽는 재미가 더해진다. 나는 작가가 등장하는 인물들에게 이런저런 한심스런 성격을 갈아입히는 데 우습기도 하고 경이롭기도 했다. 발레리아, 그의 새 남편, 샬럿, 진 팔로, 가스통이던가 보스통이던가, 퀼티, 여학교의 교장 등등.
  그러나, 그래도 <롤리타>는 꺼려지는, 불쾌한 소설이다. 소아성애자의 극단적인 에로티시즘에의 추구와 범죄에 가까운 어린 소녀와 단 둘만의 여정. 나보코프는 기예적으로, 환상적으로, 마법적으로 써나가지만 험버트라는 인물은 파렴치한 범죄자일 뿐이라는 인식이 자꾸만 들이닥친다.
  
  이쯤해서  해설자의 비평을 붙여보고 싶다. 해설자(로쟈 이현우)는 "서술자-험버트의 역할은 무엇인가. "님펫을 향한 사랑이라는 기이하고 무시무시하고 미칠 듯한 세계 속에서 지옥 같은 부분과 천국 같은 부분을 가려"내는 것이다. 그는 "더러운 것들과 아름다운 것들이 만나는 지점", 곧 그 경계선을 확인하고 싶어하지만 성공하진 못했다고 자평한다. 그가 실패한 지점이 한편으론 작가 나보코프가 성공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그것이 곧 서술자-험버트와 같은 목소리를 내면서도 작가 나보코프가 그와는 다른 결과를 얻어내는 방식이다. 험버트의 수기<롤리타: 어느 백인 홀아비의 고백>과 나보코프의 <롤리타>가 같으면서도 다른 이유다. 험버트의 수기에서 서술자-험버트는 '저자'이지만 나보코프의 <롤리타>에서 서술자-험버트는 저자라는 배역을 맡은 것에 불과하다. 자신이 만든 세계의 주인이자 신이 되려 하지만 험버트는 그가 대상화하고 소유한 롤리타의 욕망조차도 간파하지 못하고 그녀를 잃는다. 그는 롤리타에 대한 자신의 열정을 방해하는 사람으로 또다른 작가 퀼티를 지목하고 그에게 복수하지만 그것은 일종의 헛다리짚기다. 퀼티Quilty는 이름부터가 험버트의 죄의식Guilty을 반영하는 인물이므로 둘은 마치 거울상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 둘이 맞대결하는 장면은 나보코프식 유희와 조롱의 하이라이트다."(532~533쪽) 단순한 독자가 간파하지 못한 작가의 의도가 설명되어진다. 
  또 "주인공-험버트의 고백이 금지된 욕망을 다룬 에로틱erotic한 이야기라면 서술자-험버트는 이를 시적인poetic 것으로 변모시킨다. 한 비평가의 말을 빌리면 <롤리타>는 포에로틱한poerotic 소설, 곧 시적 에로티시즘의 소설이다."(532쪽 맨 위) 라고 정의를 내려준다.
  이로써 나는 주인공- 서술자- 작가라는, 삼위일체같으면서도 조금씩 다른 위상을 정립시킬 수 있게 된다. 주인공 험버트는 내면에 불이 붙은, 금지된 욕망 때문에 결핍과 과잉이 분출되는 인물이며 서술자 험버트는 지난 시간을 회상하면서 시적 서술을 하게 되는 인물을 맡는다. 그 위에 작가는 그들이 자신들의 배역을 잘 소화하고 그들이 작품의 층을 만들게 한다. 그리고 여기에 한 사람 더 추가하자면 험버트의 수기를 편집한 존 레이 주니어 박사 또한  미미하지만 작가의 배역에 필요한 인물이었다는 걸, 알게 된다. 
  로쟈 이현우 선생님은 정말 뛰어난 비평가다. 이 해설을 읽지 않았다면, 특히 존 레이 주니어 박사를 등장시킨 작가의 의도를 몰랐으리라. "<롤리타>의 저자가 존 레이란 가상의 인물을 편집자로 등장시킨 것은 그러한 트릭이자 문학적 유희의 일종이다. ........ 그는 편집자를 자신의 대역이 아닌 허수아비로 데려다놓고 정신병리학의 전문가연하는 그의 말을 조롱의 대상으로 삼았다. 하지만 대부분의 독자들은 그런 유희와 조롱을 그와 함께 즐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지한 작가의 말로 오해했다. <롤리타>가 정신병리학 분야의 고전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라는 식의 농담은 물론, "롤리타는 우리모두에게-부모든, 사회사업가든, 교육자든-경각심과 통찰력을 심어줌으로써 더 안전한 세상을 만들고 더 나은 세대를 길러내는 일에 매진하도록 이끌어 줄 것이다"와 같은 우스갯소리마저도 진지하게 받아들인 것이다."(528~529쪽) 진지함이 간혹 우매함과 상통할 수 있다는 걸 깨닫는다. 

  "지금 나는 들소와 천사를, 오래도록 변하지 않는 물감의 비밀을, 예언적인 소네트를, 그리고 예술이라는 피난처를 떠올린다. 너와 내가 함께 불멸을 누리는 길은 이것뿐이구나, 나의 롤리타."
  소설에서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의 중요성을, 외우고 싶은 시적 문장의 중요성을 <롤리타>가 다 보여준다. 하지만 첫, 마지막만이 아닌, <롤리타>의 모든 장면들은 너무나 한심스러웠고 코믹스러웠으며 기막혔고 잔혹했다. 그래도 가장 잔혹한 건, 롤리타는 알고 보면 그저 한 소녀였을 뿐이라는 것, 스물도 안 된 그녀가 아이를 낳다 죽었다는 것, 진정한 사랑을 그녀는 만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토록 험버트가 그녀가 오래 살기를 바랐지만 아이를 낳다 죽었다는 서사 자체로써 작가는 험버트와의 대척점에 그녀를 세워둔 것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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