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브 차일드
김현영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4월



  

 

  이 소설을 무슨 장르라고 해야 할까. SF라기엔 과학적인 논리로 시작되는 소설이 아니니까 아니라고 할 수 있을 것 같고, 엽기나 공상소설이라기엔 또 너무나 실제적으로 느껴져서 그도 딱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한데 실제적이라니, 내가 이런 현장을 본 적이 있나? 물론, 분명 없다. 그런데도 작가의 냉철하고 분명한 묘사를 따라가다보면 정말 그런 시대가 금방 도래할 것 같고 지구 어디선가 지금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을 것만 같다. 그만큼 이 작품의 무대와 서사는 공상임에도 현실과의 괴리감은 없다.  책을 읽어나갈 때의 끔찍함과 참혹함이 남의 일 같지 않고 지금 어디선가 벌어지고 있는 일처럼 느껴지니까 말이다.  

  쓰레기 하치장, 매일 실려나가고 버려지고 부려지고 있을 쓰레기들. 우리는 매일 그 쓰레기들을 양산해내고, 쓰레기는 우리가 살아가는 만큼, 정확히 그만큼 존재한다. 그리고 쓰레기는 단순히 사용이 끝난 물건들만을 지칭하지 않는다. 인간 말종, 인간 쓰레기, 어디에도 소용없는 사람들을 우리는 그렇게 부르고 치부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 소설이 무섭고 참혹한 이유다. 인간이 정말 쓰레기로 버려지고 재활용으로 분류되기 때문에. 


  과학과 의술이 첨단에 도달한 세계는, 그러나 민주적인 나라가 아니다. 최고위층이 지배자 계급이 되어 영원을 지향하며 의학의 도움으로 길고 긴 생을 구가한다. 그들에게는 쓰레기가 버려지는 땅을 볼 필요도 그럴 의향도 없다. 가장 높은 산 속, 요새 같은 영역이 그들의 땅이고 그들은 거기에서 산 아래 세계를 다스린다. 

  산 아래에는 민간인들이 살고 있다. 그들은 나름의 자유를 구가하고 있지만 그들의 자유와 삶은 유한하여 노쇠해 생산가치 없는 인간으로 판명나면 쓰레기로 처리된다. 

  그리고 정말 재활용인간이 되어 민간에 위탁되어 노예처럼 부려지는 노인들이 있다. 생산력이 없는 노인은 아무렇게나 민간에 의해 쓰여지고 학대를 받다 그마저도 어려워지면 쓰레기가 되어 쓰레기 산에 묻혀지거나 소각되어 비누나 초가 된다. 그야말로 효율성이 최대의 가치가 된 사회이다. 그렇다면 이 세계는 결국 그 어떤 시대보다 가장 야만적이고 독재적인 국가, 신분사회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도 인간은 그 참혹함을 딛고 살아보려고 발버둥친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그를 위해 무언가를 할 수 있다면, 그런 세상에서조차 살려고 노력한다. 최고위층의 애완생물이 되어 몇 십 년을 성장호르몬 억제제를 맞으며 아이로 살아온 진과 이 세계의 공무수행 인간을 낳기 위해 강간을 당해 아이를 강제 출산했던 수, 둘은 재활용 심사장에서 서로를 알아보고 만난다. 

  이 디스토피아 세상은 수많은 노인들을 쓰레기로 분류하고 내다버렸다. 그들은 쓰레기 산에 적재되고 소각장에서 태워지며 약품이 끓는 곳에서 액체가 되었다. 한쪽 팔이 잘린 진과 늙어서 더는 재활용품으로도 분류될 수 없는 수가 그곳에서 만난다. 쓰레기산 아래에서 쓰레기로 연명한 아이들이 쓰레기 더미 세상을 나가 새로운 세상을  맞이하려 한다. 회색빛 세상에 여명이 밝아오는 것 같은 결말... 그래도 마지막이 희망이어서 다행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언젠가 정말 도래할지도 모를 이야기를 읽으며 왠지 지금 어디선가 일어나고 있을 것만 같은 기시감은 무엇 때문일까. 우리가 이 책의 세상보다 더 나은 세상을 살고 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명두
구효서 외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6년 9월




목록


명두 - 구효서


최종후보작

권여선- 가을이 오면

김애란- 누가 해변에서 함부로 불꽃놀이를 하는가

김인숙- 조동옥, 파비안느

김중혁- 에스키모, 여기가 끝이야

윤성희- 무릎

은희경-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

전성태- 코리언 솔저

정미경- 내 아들의 연인

편혜영- 퍼레이드


  오래전 정미경의 내 아들의 연인을 읽었고, 이번에는 대상작 <명두>, <조동옥, 파비안느>, <에스키모 여기가 끝이야>, <무릎>, <코리언 솔저>만 읽었다. 

  <명두>는 대상으로써 충분하고도 남았고 그래서 다른 작품들에 대한 기대도 많았지만 막상 펼쳐보니 그렇지도 않았다. 그 가운데 가장 흥미롭고 끝까지 궁금증을 유발했던 작품은 <조동옥, 파비안느>였다. 소설은 '수령옹주'의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 서사는 점차 수령옹주의 기구한 운명과 고려시대 당시의 불행했던 역사가 조금씩 드러난다. 그러나 이야기는 '나'에게로 방향을 튼다. 나의 어머니인 조동옥의 이야기가 수령옹주에 빗대어 시작된다. 나의 어머니가 어떻게 파비안느가 되었는지에 대한 사연, 브라질에서 내게 날아온 열 여섯 살의 어머니의 딸이 보낸 편지. 간단치 않은 서사이고 보통의 모성은 상상할 수 없는 용기있는 어머니 조동옥. 

  그러나 심사평처럼 수령옹주의 서사에 목을 늘어뜨리던 독자에게 조동옥만 보여주기를 하고 결말을 낸 게 아쉽고 미진했다. 수령옹주의 서사를 제대로 전부 보여줬더라면 훨씬 묵직한 소설이 완성되었을 것이다. 나머지 작품들은 대상에 비해서(대상 명두가 보기 드문 걸작이라서) 조금 가볍지 않나 싶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 작품을 읽자고 언니가 말했다. 저번에 썩 재미있게 읽지 못했기 때문에 별로 내키지 않았지만 언니의 관심이 반가워서 그러자고 했다. 두 번째로 읽으니 처음 때와 달리 눈에 들어오는 게 많았다. 



가.  주인공의 직업, 성격 묘사.

 

  주인공은 의사이고 자신의 일에만 충실한 여자다. 지나치게 무미건조하고 냉정할 정도로 감성은 메마른 사람. 그런 여자가 화자이기에 시작하는 첫 문단은 전문적인 의학용어와 의사가 할 만한 멘트로 이루어져 있다.

  "처음에는 자가호흡이 어려워 인투베이션까지 해야 했지만 상황이 호전되어 호흡기를 뗄 수 있었다. OS쪽에서는 요추 1번, 2번 압박골절로 척추 전체의 활용이 자유롭지 않은 데다 비골, 종골에도 균열이 심각하다고 했다." 등.

 

  인투베이션-기도삽관, OS-정형외과, 비골-1.종아리뼈, 2. 넓적다리뼈, 3.코뼈,(셋 중 어느 부위의 뼈를 말하는지 모르겠다.), 종골-발꿈치뼈




나. 중요 사건을 후반부에 배치하고, 그 전에 독자에게 어떤 암시를 계속 언질한다.


 "공은 토마토와 시신이 비슷한 과정을 거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시신'의 등장(현우의 죽음에 대한 암시-아직까지 독자는 아무것도 모르지만 왜 하필 시신이라고 하는 걸까, 정도를 느낀다)


"그것은 아마도 물속으로 가라앉으면서 주위를 둘러보는 일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어두컴컴한 심연으로 내려 가면서 자기 몸이 물리적으로 분산되는 것을 느끼는 일", '밤의 집중 치료실은 물속처럼 적막했다.- 잠수종을 연상시키고 주인공의 내면을 표현. 이후로도 '물속'이라는 직접적인, 잠수종을 연상시키는 문장들이 드문드문 서술된다. 


"지난 한 달, 공에게는 많은 것이 바뀌었다."- 한 달 전에 어떤 사건이 일어났으리라는 추측 제공. 등등




다. 인물에게 호의를 갖게 하고 주인공의 감정에 이입되게 하는 묘사들.


현우의 성격과 품성에 대한 묘사, 그를 사랑했던 여자 의사에게 감정이입이 될 수 있게 해준다. 

"사진 속의 현우는 말간 하늘처럼 웃고 있었다. ...사진작가씩이나 돼서 성의 없이 휴대전화 셀카를 찍어보내다니 너무해. 공이 그런 농담을 하면 현우는 웃음을 터트렸다. 말 그대로 푸하하... 에 가까운 웃음이었다. 공은 현우의 사진만큼이나 현우의 웃음을 좋아했는데 아마도 사람을 무장 해제시키는 웃음이라고 생각해서,"

"아무리 사진작가라도 그렇지, 꼭 그렇게 위험한 자세로 찍어야 해? 언젠가 공이 그런 말을 했을 때 현우는 하하하 웃고 나서 그런 걸 감수해야 사진에 영혼이 스며들어 걸작이 된다는 식으로 장황하게 설명했다."

"뉴질랜드를 거쳐 남극을 여행하고 시베리아 횡단 열차로 영하 오십도의 북구 마을을 찾아가고 몽골의 사막을 거칠게 달리며 오지라는 오지는 다 헤매고 다니는 사람이 현우였으니까. 어느 때부터인가는 또 분쟁지역을 누볐는데 이스라엘의 공격이 시작되었을 때는 팔레스타인에, 시리아 정부군이 반군을 공격했을 때는 국경 난민촌에 오큐파이 운동이 한창이던 때는 워싱턴에, 샤를리 에브도 테러가 일어났을 때는 파리에 가 있었다." 

"현우만이 그 풍경에서 지워졌을 뿐인데도 베란다의 식물들은 민감하게 반응했다. 몇몇 수종은 금방 죽었다."

이런 정도의, 웃음이 말갛고 소탈한 성격에 탐험심이 강하고 그러나 화분에조차 다정한 남자라면 건조하고 사무적인 성격의 여자라해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라. 주인공의 내면(상실과 그리움, 허무)이 처음부터 끝까지 여러 번 진술된다.


"풍경은 하루가 다르게 탈색되어 가고 있었다. 모든 것이 무채색으로 변해 가는 중이다. 공은 그것이 좋았다. 뭐든.... 그만두어도 좋을 것 같은 계절이."

"숨을 쉬고 움직이면서 아직 지속되니 그냥 삶이라고 할 수 있나."

"베란다는 텅 비어서 공의 눈앞에 있을 뿐이었다. 그 아침처럼 베란다를 바라보며 혼잣말하는 일은 이제 없으리라는 것을 공은 알았다."

"무거운 잎을 견디기 위해 연약한 줄기가 안간힘을 다하는 것처럼 보였다. 공은 그 불균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심연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 심연으로, 잠수종에 갇힌 채, 공은 하강하고 있었다."

"살아 있으세요. 그래야 내가... 당신을 죽일 수 있습니다. 공이 환자에게 그렇게 말한 것은 아니었다."




마. 직업이 부여하는 의무와 신념,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의 분노와 허망함.

 

공은 직업의식이 투철하고 성실한 의사이다. 그녀는 자신의 환자인 방화범을 경찰의 압박에 대해 지켜야 하고 그러려고 노력했다. 하나 방화범이 불을 지른 사건은 현우를 순식간에 죽음으로 끌고갔다. 방화범이 현우의 죽음을 바라고 불을 지른 것은 아니니까 현우의 죽음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현우는 분명 그가 지른, 건물이 불이 난 것을 찍으려고 카메라를 잡았다가 죽었다. 

"하지만 이 칼럼은 왜 하필이면 방화 대상이 그 신문사였는지, 왜 하필이면 그 시간이었는지, 왜 하필이면 사 층이었는지, 왜 하필이면 악마의 영상이었는지, 왜 하필이면...."

'왜 하필이면' 현우였는지 공의 내면에서는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사고는 현우의 잘못도, 방화범이 일부러 현우를 향했던 것도 아니었지만. 이런 일은 세상에 흔한 부조리이니까 그냥 고개를 주억거릴 수 있을까. 공은 허망하지만 분노하고 자신의 환자이지만 용서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지점의 딜레마, 그 갈등을 작가는 보여주려 했다. 

"공은 자신이 공공연한 사형제 반대론자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있었다. 공은 자기 내면에서 충돌하는 모순을 물끄러미 바라보았지만 그것이 고통스럽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바. 이런 사건을 일으킨 방화범은 어떤 사람인가. 그의 행위는 부조리한 세상을 대변하는 듯 부조리하다. 작가는 이에 대해서 어떤 단언도 하지 않고 있을 법한 상황들과 언표들만을 보여준다. 그 걸로 작가는 인간의 운명이, 세계가 돌아가는 질서가 너무나 부조리하며 인간은 그것을 거스를 수도 해결할 수도 없음을 말한다. 우리는 부조리한 세계에 내던져진 존재에 불과하다.


"기자들은 경찰에서 흘린 몇몇 정보들을 조합해서 이야기를 만들고 있었다. 신문 기사를 보면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 애매했다. 사실과 허구가 기사 안에서 싸우고 있는 느낌이었다."

"동영상 서비스 플랫폼에 올라온 클립은 마치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보였다. 영상은 붉게 타오르는 실내로 시작된다. 카메라는 창 쪽을 비추었다가 다시 불타는 실내로 향한다. 동영상 촬영 모드를 실행한뒤 휴대전화를 창가에 올려 둔 것 같았다. 화재 현장에서 방화자가 자신을 찍으려는 모양이었다. ...불 속에서 만세를 부르듯 두 손을 치켜들었다."

"'악마의 영상'은 이것이 혐오범죄인지 사이비 종고 관련 범죄인지 여러모로 의구심을 일으켰다."

"잭 다니엘이 좀 걸리긴 했지만, 진보언론은 장 발장에 빗대어 사법부를 비판했다. 한 보수 신문에는 국가경제가 중요하기 때문에 이런 식의 비교는 부당한 데가 있다는 내용의 칼럼이 게재되었다. 구조는 바꾸지 않고 사람들의 목소리만 모여들었다가 흩어졌다. 반복되는 일이었다."

"한 일간지 칼럼니스트는 그런데 혹시... 지금까지 거론된 이유들 모두가 범행 동기였던 것은 아닌가?...라고 질문을 던졌다. 하나의 동기로 환원함으로써 우리는 다른 모든 문제를 덮어 두려는 것은 아닌가? 혐오와 분노와 무차별적인 복수심으로 가득한 사회를 애써 묵인하고 문제를 은폐하는 것은 아닌가?" 등.




사. 작가는 세 권의 의학관련 책을 참조했고 의사에게서 자문을 구했다. 주도면밀한 의사의 생각과 언어는 그렇게해서 문장화되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명두

구효서 외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6년 9월


  누가 언제 '명두'에 대해 말했는지 생각나지 않는다. 하지만 얼마전부터 '명두'라는 제목을 혼자서 외고 있었다.  알라딘에서는 품절이라서 중고서점에서 택배를 시켰다. 명작을 헐값에 샀다. 싸게 사서(요즘 중고알라딘이나 중고서점을 이용할 때가 몇 번인가 있었다. 하두 곤궁해서, 또 품절된 것들도 있어서) 좋기도 하지만 이 정도의 명작이 품절인 게 아쉽고 안타깝다. 
  한때 구효서 작가님 밑에서 짧은 기간 수업을 듣기도 했는데, 그때 나는 작가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다. 작가의 두세 작품을 읽었지만 큰 감흥을 받지 못했었던 것이다. 그리고 몇 년 뒤, 이 작품을 읽으니 내가 대작가를 너무 몰라뵈었구나, 싶다. 소설도 가요처럼 유행처럼, 발표되면서 지면을 타고 소수의 관심을 받고 상을 받고 얼마 뒤면 잊혀지고 품절되는 터라, 더는 만나기 쉽지 않은 옛 시절의 유행가처럼 사라지고 만다. 애석하고 안타깝다. 명두는 그런 작품이다. 

  "나는 죽었다. 죽은 몸으로 20년을 서 있다." 첫문장이 굴참나무의 서술로 시작된다. 죽은 나무는 자신의 죽음을 슬퍼하기보다 명두집을 이야기한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그녀는 나에게 다녀갔다. 몸이 아플 때는 시곗바늘처럼이나 느린 걸음으로 다녀갔다. 가뭄 때는 작은 물동이를 들고 와 발치에 부었고, 명절 때나 굿풀이를 한 날에는 사과와 배를 들고 찾았다. ....그녀는 그냥 왔고, 왔다가 그냥 갔다. 그러기를 한평생, 마침내 그녀는 오늘 늙어 죽으려는 것이다."
  그녀는 왜 하루도 빠지지 않고 굴참나무를 찾아갔던 것일까. 그런데 그녀는 오늘 죽을 것이라고 나무는 말한다.  하지만 일단은 왜 그녀가 나무를 찾아다녔는지부터,
  "아무도 모르는 얘기다. 나와 함께 숲을 이루었던 나무들이라면 알까, 마을 사람 그 누구도 모르는 얘기다. 명두집은 내 밑동에다 세 아이를 묻었다. 모두 생후 열흘도 채 안 된 아이들이었다. 첫아이의 시신은 남쪽으로 난 뿌리 밑에 나머지 두 아이는 각각 북쪽과 동쪽 뿌리 아래 묻혔다.", "그녀는 달빛 없는 날을 헤아려 아침부터 아이를 엎어놓았다. 그러곤 칠흑 같은 산길을 헤집고 올라와 화가 난 사람처럼 식식거리며 내 발치의 흙을 파헤쳤다. 채 가시지 않은 아이의 체온이 뿌리에 닿을 때 나는 부르르 진저리를 친 적도 있었다."
  자신이 낳은 아이를 엎어놓아 죽여놓고 한밤중에 나무 아래 흙을 파헤치는 여자, 이만하면 엽기 공포 스릴러 악녀의 얘기 같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이미 열 살 안팎의 아이가 둘이나 있었다. 맏딸은 여덟 살 되던 해 이미, 5대조가 겨우 초시에 합격했었다는 산 너머 곽씨네 둘째 마나님의 애보기를 주어버리곤 그만이었다. 사내아이는 아비와 함께 일찌감치 품앗이를 다니거나 송기를 베거나 하릴없이 싸리나무 빗자루를 만들거나 했는데, 가난하기로 치자면 마을 사람 전부가 다 거기가 거기여서 그들에게 품을 나누어줄 여유조차 없었다. 굶는 사람 살리자고 그들 부자에게 일부러 없는 품을 만들어주었다가는 자기가 굶어야 할 판이었다. 자기 땅이라곤 한 뼘도 없을뿐더러, 소작 부칠 땅조차 구할 수 없는 툇골이었다. ....인근 마을의 사정이라봤자 나을 게 없었다. 허기가 지도록 걸어나가야 고작 지붕을 얹은 초가를 볼 수 있었다. ....배를 채우려는 사람들로 샘물가엔 사람이 끊이지 않았으나 그나마 체면 때문에 실컷 마시지도 못했다. 누군지도 모른 채, 입을 덜자고 무작정 어린 자식을 타지 사람의 손에 딸려 보내거나, 끼니 굶지 않는 집이라 하여 열다섯도 안 된 계집아이를 애 줄줄이 딸린 홀아비의 재취로 들여보냈다."
  이쯤 되면 명두만 그러하지 않았으리라는 예감이 든다. 살아있는 것 하나가 그렇게도 힘든 시절, 산골짝의 일이라는 게 알만해진다. 배를 곯는 사람이 거의 없는 이 시대에는 야만스런 세월이라고  할 것이다. 한데 나무가 말한다. "지금은 이런 일들을 고릿적 얘기로 취급하지만, 사실 먼 얘기도 남의 얘기도 아니었다."고.
  그런데 가난한 이들이, 자기 한 입도 모자란 판국에, 어째서 책임지지도 못할 생명을 자꾸 잉태하는가?  "가난과 허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죽음에 대한 중압감은 일상적인 거였고 때로는 시시각각 아주 예리한 칼날처럼 그들을 위협했다. 그럴 때마다 도망치듯, 혹은 죽음을 앞당기듯, 아니면 대책 없는 습관처럼 곁에 있는 사람을 숨가쁘게 얼싸안았고, 당연한 결과로 불행이 예고된 새 생명이 탄생했다. 죽음은 끝없이 생명을 만들고, 삶은 끝없이 죽음을 낳았다."
  그리고 가난은 어이없는 죽음을 짓어낸다.  명두의 남편이 더덕을 캐려다 여뀌가 무성한 밭에서 떼뱀에게 물려 죽는 것이다. "죽은 그의 시체는 참혹했다. 뱀들은 그의 두 눈을 파고들었으며 입과 귀와 콧구멍과 똥구멍에도 뱀의 몸통이 득시글거리며 박혀 있었다."
  그리고 이 고달픈 삶에 전쟁마저 찾아온다. 그리고 전쟁의 끝에서 "겨우 목숨을 건진 사내들이 처음 기운을 내어 한 짓이란 홀로 남은 명두집을 겁간하는 일이었다. 서리꾼처럼 은밀히 찾아와 타고 누르거나, 헛간 검불 속으로 끌고 가거나, 나물 뜯는 거친 풀밭에 엎어뜨리거나, 산길에 숨어 있다가 가고리 같은 손으로 그녀를 나꿔챘다. 겉으론 입을 모아 불쌍하다며 혀를 차던 자들이 혼자가 되거나 밤이 되면 눈 귀 없고 양심도 없는 귀두 몽둥이로 돌변하여 그녀를 을러댔다. 명두집이 세 번째로 묻은 시신은 그렇게 생긴 아이였고, 그 마지막 아이를 묻은 뒤로 그녀는 갑자기 달라졌다." 
  갑자기 달라진 명두는 이전의 명두가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을 겁간했던 남자에게 도움을 청해 명두집 헛간에서 죽어간 공산 유격대장을 끌어다 성황당 아래 묻어준다. "행동은 굼뜨고 나른해 보이기까지 했지만 커다란 남자 시체를 옮기는 그녀에게서는 놀라운 힘이 느껴졌다. 그것은 힘이라기보단 일종의 기세 같은 것이었다. 몸이 아니라 눈빛과 서슬에서 뿜어져 나왔다." 죽은 남자를 언덕 아래, 성황당 나무 밑에 묻기 위해 그녀가 그 밤에 보인 결기는 그녀가 변하는 시작점이었던 것 같다.
  이렇게 변한 명두는 산골짝에 찾아든 개발의 바람에 저항하던 철거 반대 탑에 갇힌 청년을 구해내고, 동네 아픈 사람들에게 "화엄성중 탱화 속 인물처럼 근엄한 낯빛으로 사람에게 붙은 귀신을 쫓아내어 병을 다스렸다. 나무 방망이로 다듬잇돌을 두드리고 복화술로 어린 영혼의 음성을 흉내냈다."
  그녀는 병자들이 찾아오면 "잊은 게 있지? 라고" 묻는다.  아픈 이들은 "죽거나 죽인 아이를 떠올렸다. 죽거나 죽인 부모를 떠올렸다." 명두집은 "그 면상에다 대고" "냅다 소리를 내질렀다.
  불망!
  그 소리는 경천동지할 만큼 커서 대부분의 아낙들은 뒤로 나가자빠졌다."
  명두집은 그들이 버리거나 죽게 놔둔 자식들의 무엇이라도 가져오라고 시킨다. "명두집의 분부대로 아낙들은 배냇저고리의 한 귀퉁이를 오리거나 마른 태반 안쪽을 떼어다 그녀에게 바쳤다. 그도 저도 없는 사람들은 아이가 벴던 베개의 일부를, 아니면 아이가 묻힌 땅의 흙 한 자밤이라도 갖다 바쳤다."
  그리고 오늘 죽음에 이른 그녀, "몇 명의 아낙들이 명두집으로 황급히 달려간 사실을 골목의 가로등만 알 뿐이다."  명두집은 "눈길을 돌려 천장 아래쪽에 붙어 있는 작은 시렁을 오래도록 응시한다. 시렁에 얹혀 있던 백자 항아리를 아들이 조심스레 끌어내린다. 백자 항아리가 명두집 눈길 위에 한동안 머물 수 있도록 아들이 동작을 멈춘다." "어느새 어린 영혼의 것으로 변한 명두집의 목소리가 벌어진 입술 틈새로 힘없이 새어나"온다. "이제들.... 알아서..... 가져가."
  백자 항아리 안에는" 배냇저고리 오린 것, 마른 태반 조각, 베갯잇 조각, 약봉지에 싼 흙, 가느다란 머리카락 몇 올, 플라스틱 딸랑이, 노인의 비녀, 손톱처럼 보이는 것들, 때 묻은 동정 조각, 장갑, 안경집, 반지와 목걸이, 라이터, 그리고 출력한 지 얼마 안 돼 보이는 초음파 태아 사진도 세 장이나 나온다. 그동안 명두집이 삼킨 줄 알았던 망자의 유류품들이다."
  그리고 그 항아리 안에, "아이의 손가락처럼 생긴 나뭇가지"들이 세 개나 있다. "창칼로 껍질을  벗기고 사포로 문질러 표면이 끼끗하다. 하나의 줄기에 세 개의 작은 가지가 뻗은 꼴이다. ...아이를 하나씩 묻을 때마다 명두집은 내게서 가지를 꺾어갔다. 껍질을 벗겨 다듬었다. 이미 50년 전의 것들이지만 지금 속속들이 검게 죽어잇는 내 가지들에 비하면 살아 있는 것만큼이나 생생하다. 그것이 그녀의 명두였다."
  그녀가 명두집으로 불린 사정이면서 사람들이 자세히는 알지 못했던 사정이다.
  불망! 잊으면 안 된다고, 명두는 아낙들에게 호령했다. 그러기 위해 그녀는 그토록 50년이나 굴참나무를 매일 찾아다녔다. 죽은 아이들, 죽은 부모들이 생전에 닿았던 그 무엇이라도 갖다주면 자신이 백자 항아리에 대신이라도 간직하려 했던 그녀는, 명두집이었다. 
  불망!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2, 36회 이상 문학상 대상작 <옥수수와 나>와 김영하 자신이 뽑은 자선 대표작 <그림자를 판 사나이>를 읽었다. 아주 오래전도 오래전, 김영하를 읽었던 기억이 있는데 그때 몹시 실망했던 터라(필요 이상으로 성적인 이야기에 질려버렸었다) 다시는 김영하를 읽을 줄 몰랐는데 우연히 이 책이 다른 사람을 통해 내게 말을 걸어왔다. 

  나는 이 작가를 티브이나 지면으로 볼 때는 꽤 좋아하는 편이다. 나이에 비해 젊은 느낌이 들어 좋고 입담이 좋은데다 유머러스하고 댄디하기까지 해서 안 좋아할 수가 없다. 한데 그의 글은(많이 읽지는 못했지만) 자유롭고 개방적이어서 잘 읽히기는 하지만 무언가 중요한 부분을 건너띈 듯한 느낌이 든다. 건너띈다는 표현이 별로라면, 나로선 무언가 더 깊은 곳의 그 무엇을 놓치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어쩌면 작가의 문제라기보다 글을 읽는 사람의 문제일 수도 있으리라. 그러니까 내가 이런 작가의 책을 너무 읽지 않아서일지도 모르겠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와 작가의 성향이 아주 달라서일 수도 있겠다. 한데도 나는 한 사람으로서의 김영하를 싫어할 수가 없고 많은 사람이 이 작가를 사랑하고 있는 걸 보면 복이 많은 작가인 것 같다. 


  옥수수와 나

  작품속의 화자는 작가이다. 그는 자신이 옥수수라고 느낀다.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출판사 사장과 그의 아내인 영선을 닭이라고 생각한다. 서두를 슬라보에 지젝이 인용하는 동유럽의 농담으로 시작하고(농담의 내용이 아주 재미있다) 결말도 '나는 옥수수가 아니다'라는 문장을 소리내어 읽는 것으로 마친다. 

  옥수수는 이 지구상에서 가장 흔한, 영양가는 없지만 에너지원이 되는 식품이다. 그것은 언제나 먹혀져서 사라지고 또 수많은 다른 옥수수들이 끊임없이 소비되는, 싸구려 곡물일 뿐이다. 결국 작가도 이 세계의 자본 시장에서 소비되는 존재이고 소비로써의 가치가 없다면 폐기될 뿐이라는, 알레고리를 담고 있는 것 같다. 

 과하다 싶게 농담과 위트 넘치는 대화가 속출하고 그러다보니 의미없이 장면이 늘어져있다. 그런데 읽는 재미는 아주 쏠쏠하다. 자본 앞에서는 소설가와 그의 작품조차 하나의 소비재이며 상품이라는 인식이 마음에 와 닿는다. 


  그림자를 판 사나이

  "어리석은 의문은 또 있다. 창공의 새에게도 그림자가 있을까? 저렇게 작고 가벼운 것에게 어찌 그림자처럼 거추장스런 것이 달려 있으랴 싶은 것이다. 그러나 새에게도 분명 그림자가 있다. 날아가는 새 떼를 보고 있노라면 가끔, 아주 가끔, 뭔가 검고 어두운 것이 휙 지나간다. 너무 찰나여서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지 않으면 잘 모르기 십상이다. 달이 해를 가리는 걸 일식이라 하는데 그렇다면 새가 해를 가리는 이런 현상은 무어라 할까. 물론 나는 모른다. 그렇지만 가끔 새 그림자가 해를 가리는 일도 있다는 걸 말해두고 싶은 것이다."

  첫 페이지 도입부에 이런 문단이 나오는데 참 좋다. 

  맨 마지막 결말은 또 이렇다. 

  "그렇게 누군가와 옥닥복닥 부대끼며 지내다 보면, 어쩌면 내게도 그림자가 생길지 모른다. 그렇게 멋진 그림자가 생기면............ 그 생각을 하는 사이 거대한 새 그림자가 내 머리 위를 지나간다. 하늘을 본다. 이상하다. 달도 없는 밤에 웬 새 그림자. 몸이 다시 움츠러든다. 덕분에 쓸데없는 상상은 끝. 나는 옷만 벗어던지고 침대 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운다"

  '그리고 운다', 정말 쉽고 단순한 문장인데 코끝이 찡했다. 

  '새에게도 그림자가 있다'. 이 단편에서는 이 문장만으로 모든 게 통한다. 

  그러나 제목은 전체적인 이야기와 어울리지 않거니와 작품을 오히려 하향하게 만든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