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작품을 읽자고 언니가 말했다. 저번에 썩 재미있게 읽지 못했기 때문에 별로 내키지 않았지만 언니의 관심이 반가워서 그러자고 했다. 두 번째로 읽으니 처음 때와 달리 눈에 들어오는 게 많았다.
가. 주인공의 직업, 성격 묘사.
주인공은 의사이고 자신의 일에만 충실한 여자다. 지나치게 무미건조하고 냉정할 정도로 감성은 메마른 사람. 그런 여자가 화자이기에 시작하는 첫 문단은 전문적인 의학용어와 의사가 할 만한 멘트로 이루어져 있다.
"처음에는 자가호흡이 어려워 인투베이션까지 해야 했지만 상황이 호전되어 호흡기를 뗄 수 있었다. OS쪽에서는 요추 1번, 2번 압박골절로 척추 전체의 활용이 자유롭지 않은 데다 비골, 종골에도 균열이 심각하다고 했다." 등.
인투베이션-기도삽관, OS-정형외과, 비골-1.종아리뼈, 2. 넓적다리뼈, 3.코뼈,(셋 중 어느 부위의 뼈를 말하는지 모르겠다.), 종골-발꿈치뼈
나. 중요 사건을 후반부에 배치하고, 그 전에 독자에게 어떤 암시를 계속 언질한다.
"공은 토마토와 시신이 비슷한 과정을 거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시신'의 등장(현우의 죽음에 대한 암시-아직까지 독자는 아무것도 모르지만 왜 하필 시신이라고 하는 걸까, 정도를 느낀다)
"그것은 아마도 물속으로 가라앉으면서 주위를 둘러보는 일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어두컴컴한 심연으로 내려 가면서 자기 몸이 물리적으로 분산되는 것을 느끼는 일", '밤의 집중 치료실은 물속처럼 적막했다.- 잠수종을 연상시키고 주인공의 내면을 표현. 이후로도 '물속'이라는 직접적인, 잠수종을 연상시키는 문장들이 드문드문 서술된다.
"지난 한 달, 공에게는 많은 것이 바뀌었다."- 한 달 전에 어떤 사건이 일어났으리라는 추측 제공. 등등
다. 인물에게 호의를 갖게 하고 주인공의 감정에 이입되게 하는 묘사들.
현우의 성격과 품성에 대한 묘사, 그를 사랑했던 여자 의사에게 감정이입이 될 수 있게 해준다.
"사진 속의 현우는 말간 하늘처럼 웃고 있었다. ...사진작가씩이나 돼서 성의 없이 휴대전화 셀카를 찍어보내다니 너무해. 공이 그런 농담을 하면 현우는 웃음을 터트렸다. 말 그대로 푸하하... 에 가까운 웃음이었다. 공은 현우의 사진만큼이나 현우의 웃음을 좋아했는데 아마도 사람을 무장 해제시키는 웃음이라고 생각해서,"
"아무리 사진작가라도 그렇지, 꼭 그렇게 위험한 자세로 찍어야 해? 언젠가 공이 그런 말을 했을 때 현우는 하하하 웃고 나서 그런 걸 감수해야 사진에 영혼이 스며들어 걸작이 된다는 식으로 장황하게 설명했다."
"뉴질랜드를 거쳐 남극을 여행하고 시베리아 횡단 열차로 영하 오십도의 북구 마을을 찾아가고 몽골의 사막을 거칠게 달리며 오지라는 오지는 다 헤매고 다니는 사람이 현우였으니까. 어느 때부터인가는 또 분쟁지역을 누볐는데 이스라엘의 공격이 시작되었을 때는 팔레스타인에, 시리아 정부군이 반군을 공격했을 때는 국경 난민촌에 오큐파이 운동이 한창이던 때는 워싱턴에, 샤를리 에브도 테러가 일어났을 때는 파리에 가 있었다."
"현우만이 그 풍경에서 지워졌을 뿐인데도 베란다의 식물들은 민감하게 반응했다. 몇몇 수종은 금방 죽었다."
이런 정도의, 웃음이 말갛고 소탈한 성격에 탐험심이 강하고 그러나 화분에조차 다정한 남자라면 건조하고 사무적인 성격의 여자라해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라. 주인공의 내면(상실과 그리움, 허무)이 처음부터 끝까지 여러 번 진술된다.
"풍경은 하루가 다르게 탈색되어 가고 있었다. 모든 것이 무채색으로 변해 가는 중이다. 공은 그것이 좋았다. 뭐든.... 그만두어도 좋을 것 같은 계절이."
"숨을 쉬고 움직이면서 아직 지속되니 그냥 삶이라고 할 수 있나."
"베란다는 텅 비어서 공의 눈앞에 있을 뿐이었다. 그 아침처럼 베란다를 바라보며 혼잣말하는 일은 이제 없으리라는 것을 공은 알았다."
"무거운 잎을 견디기 위해 연약한 줄기가 안간힘을 다하는 것처럼 보였다. 공은 그 불균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심연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 심연으로, 잠수종에 갇힌 채, 공은 하강하고 있었다."
"살아 있으세요. 그래야 내가... 당신을 죽일 수 있습니다. 공이 환자에게 그렇게 말한 것은 아니었다."
마. 직업이 부여하는 의무와 신념,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의 분노와 허망함.
공은 직업의식이 투철하고 성실한 의사이다. 그녀는 자신의 환자인 방화범을 경찰의 압박에 대해 지켜야 하고 그러려고 노력했다. 하나 방화범이 불을 지른 사건은 현우를 순식간에 죽음으로 끌고갔다. 방화범이 현우의 죽음을 바라고 불을 지른 것은 아니니까 현우의 죽음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현우는 분명 그가 지른, 건물이 불이 난 것을 찍으려고 카메라를 잡았다가 죽었다.
"하지만 이 칼럼은 왜 하필이면 방화 대상이 그 신문사였는지, 왜 하필이면 그 시간이었는지, 왜 하필이면 사 층이었는지, 왜 하필이면 악마의 영상이었는지, 왜 하필이면...."
'왜 하필이면' 현우였는지 공의 내면에서는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사고는 현우의 잘못도, 방화범이 일부러 현우를 향했던 것도 아니었지만. 이런 일은 세상에 흔한 부조리이니까 그냥 고개를 주억거릴 수 있을까. 공은 허망하지만 분노하고 자신의 환자이지만 용서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지점의 딜레마, 그 갈등을 작가는 보여주려 했다.
"공은 자신이 공공연한 사형제 반대론자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있었다. 공은 자기 내면에서 충돌하는 모순을 물끄러미 바라보았지만 그것이 고통스럽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바. 이런 사건을 일으킨 방화범은 어떤 사람인가. 그의 행위는 부조리한 세상을 대변하는 듯 부조리하다. 작가는 이에 대해서 어떤 단언도 하지 않고 있을 법한 상황들과 언표들만을 보여준다. 그 걸로 작가는 인간의 운명이, 세계가 돌아가는 질서가 너무나 부조리하며 인간은 그것을 거스를 수도 해결할 수도 없음을 말한다. 우리는 부조리한 세계에 내던져진 존재에 불과하다.
"기자들은 경찰에서 흘린 몇몇 정보들을 조합해서 이야기를 만들고 있었다. 신문 기사를 보면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 애매했다. 사실과 허구가 기사 안에서 싸우고 있는 느낌이었다."
"동영상 서비스 플랫폼에 올라온 클립은 마치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보였다. 영상은 붉게 타오르는 실내로 시작된다. 카메라는 창 쪽을 비추었다가 다시 불타는 실내로 향한다. 동영상 촬영 모드를 실행한뒤 휴대전화를 창가에 올려 둔 것 같았다. 화재 현장에서 방화자가 자신을 찍으려는 모양이었다. ...불 속에서 만세를 부르듯 두 손을 치켜들었다."
"'악마의 영상'은 이것이 혐오범죄인지 사이비 종고 관련 범죄인지 여러모로 의구심을 일으켰다."
"잭 다니엘이 좀 걸리긴 했지만, 진보언론은 장 발장에 빗대어 사법부를 비판했다. 한 보수 신문에는 국가경제가 중요하기 때문에 이런 식의 비교는 부당한 데가 있다는 내용의 칼럼이 게재되었다. 구조는 바꾸지 않고 사람들의 목소리만 모여들었다가 흩어졌다. 반복되는 일이었다."
"한 일간지 칼럼니스트는 그런데 혹시... 지금까지 거론된 이유들 모두가 범행 동기였던 것은 아닌가?...라고 질문을 던졌다. 하나의 동기로 환원함으로써 우리는 다른 모든 문제를 덮어 두려는 것은 아닌가? 혐오와 분노와 무차별적인 복수심으로 가득한 사회를 애써 묵인하고 문제를 은폐하는 것은 아닌가?" 등.
사. 작가는 세 권의 의학관련 책을 참조했고 의사에게서 자문을 구했다. 주도면밀한 의사의 생각과 언어는 그렇게해서 문장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