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녀 이야기 (리커버 일반판, 무선)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김선형 옮김 / 황금가지 / 2018년 4월
증언들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김선형 옮김 / 황금가지 / 2020년 1월


  이 두 권의 책은 시리즈라고 할 수 있다. <시녀이야기>는 1985년에, 그 후속작이랄 수 있는 <증언들>은 34년만인 2018년에 출간되었다. 작가는 캐나다의 마거릿 애트우드 여사. <그레이스>나< 눈먼 암살자> 등의 어마무시한 작품들을 빚어낸 소설가이시다. <증언들>을 출간한 2018년도에 애트우드는 79세였다. 존경스럽지 않을 수 없다. 

  <시녀이야기>가 오브프레드를 주인공으로 하는 길리어드에서의 시녀의 삶을 다루고 있다면 <증언들>은 '아주머니'인 리디아와 소녀인 그레이스와 니콜이 엮어가는 이야기이다. 조지 오웰의 <1984년>이 연상된다. <1984년>이 전체주의 국가에서 공무를 집행하는 남자가 기록한 소설이라면 시녀이야기와 증언들은 지배체제의 핵심 세력인 '아주머니'리디아와 소녀들이 기록한 이야기다. 

  이들이 살아가야 하는 길리어드는 신정국가이면서 전체주의 국가이다. 그 안에서 여성의 위치는 아주 낮고 수동적일 수 밖에 없다. 국가를 위해, 국가의 핵심 세력인 일부 남자들에게 할당되는 존재가 여자들이다. 그들은 여자들의 역할을 극도로 선명하게 분리시켜 놓고 그 역할에 충실하도록 어려서부터 교육시킨다. 

  그래서 여자는 아내와 시녀, 하녀,진주소녀 등의 신분으로 묶어 조종하고 필요에 따라 희생을 강요한다. 상징적이면서 실제적인 장치는 시녀가 빨간 드레스를 입고, 하녀는 녹색의 옷을 입으며 아내는 파란 드레스를 입는다는 식의 룰이다. 이 강렬한 색상 때문에 <시녀들>을 읽으면서 저절로 이미지가 형성되는 부분이 있었다. 그래서 <핸드메이즈 테일>로 드라마화되었을 것같기도 하다. <시녀들>이 너무 재미있어서 당장 이 시리즈를 찾아보고 싶었으나 넷플릭스에는 걸려있지 않았다. 웨이브에 있다고 하는데 거기까지 찾아가서 몇 십회의 드라마를 보는 건 지나치게 시간을 잡아먹을 것 같아 그만두었다. 

  그러나 인간을 색깔이나 옷으로 규정할 수 있고 조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체계는 무너지게 되어있다. 그리고 34년 만의 후속작인 <증언들>은 정말 길리어드가 어떻게 무너지게 되었는지 단초가 되는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잊혀지지 않을 독서였다. 마거릿 애트우드 여사의 상상력과 지성과 패기에 기립박수를 보낸다. 


* <핸드메이즈 테일> 시리즈를 찾다가 비슷한 테마의 <그레이스>를 보게 되었다. <그레이스>도 애트우드 작가님의 또다른 작품인데, 하녀인 그레이스라는 여자의 삶을 다루고 있다. 근데 이게 또 너무나 흥미롭다. <그레이스>는 실제 캐나다에서 하녀였던 어린 소녀 그레이스가 주인 부부를 살해하고(물론 단독범행이 아니고 직접 살인한 남자와 공범이다) 구속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러니까 실화에서 출발한 이야기이다. 한데 실화라고 생각하니까 더 마음이 아팠다. 하녀인 어린 소녀의 하루하루의 삶이, 자신을 위해서는 단 몇 시간도 살 수 없고 오직 주인을 위해 허드렛일을 하는 작고 여린 소녀의 일상이 비전없이 평생 계속된다는 생각만 해도 숨이 막혔다. 또 그레이스를 탐하는, 하녀를 함부로 물건짝마냥 탐하다가 잔혹하게 내버리는 남자들의 행태가 구역질났다. 

  그러나 무엇보다 작가의 심리묘사가 드라마 가운데에서도 돋보였다. 그레이스를 속으로만 사랑했던 상담의사와 나중에 만나게 된 남편조차도(작품에서, 실화 속의 그레이스는 결혼하지 못했을 것) 그녀의 불행을 자신의 쾌락을 위한 일종의 변태적인 상관물로 여긴 셈이니까. 으, 인간의(특히 남자) 이기적이고 기만적인 태도는 부지불식간에 드러나고,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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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 오빠 강민호
이기호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5월



     생김새로 사람을 판단하면 안 된다. '권순찬과 착한 사람들'을 읽으면서 나는 작가를 순박하고 소탈한 이미지의 남자일 거라고 생각했다. 단순한 상상이었다. 작가를 검색해보았다. 그의 여러 사진을 보면서 나는 내 상상이 정말 단순하다는 걸, 내가 형편없는 추리력을 갖고 있다는 걸 새삼 확인했다. 이기호 작가는 예쁘고 (?) 지적이면서도 섬세한 윤곽을 지닌 사람이었다. 물론 나는 사람을 추리하는 데에도 영 젬병이지만 실제 모습을 표현하는데도 잘 짚어내질 못하는 편이라 나와 다르게 평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한데도 내가 이기호 작가의 외모를 이야기하는 데는 그만큼 그 작가가 내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걸 말하고 싶어서이기도 하다. 사람이 맘에 들면 괜히 그사람 얘기를 자꾸 하는 게 인지상정이니까 말이다. 나는 요즘 이 작가에게 존경심마저 느끼고 있다. 그의 작품들의 성격이나 지향이 정말 인간적이고 또 윤리적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집은 작품마다 평범한 소시민들이 주인공이고 제목마저 그들의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최미진은 어디로'
  화자인 작가가 언젠가 우연히 북 콘서트에서 만난 최미진에게 한 사인이 문제가 된다. 최미진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전혀 모르는 옛 남자친구였던 남자가 그 책 때문에 괴롭다고 한다. 그가 작가에게 말한다. 따지는 것인지, 하소연하는 것인지 애매하게  딴지를 건다. 
  "아저씨는 우리 미진이도 잘 모르잖아요...... 모르면서 그냥 좋은 인연이라고 쓴 거잖아요...... 그건 그냥 쓴게 맞잖아요...... 씨발, 아무것도 모르면서..... 내가 왜 책을 파는지...... 내가 당신이 쓴 글씨를 얼마나 오랫동안 바라봤는지......"
  내가 최미진일 수도 있고 최미진을 잊어야하는데 잊지 못하며 헤매는 예전의 남자친구일 수도 있고 화자인 작가처럼 아무것도 모르면서 형식적으로 말만 좋은 인사를 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얼마든지 있는 일이지만 때론 엄청난 고통이 그 가운데에 끼어들기도 한다. 그것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지만 피해갈 수 없는 일이 될 수도 있다. 삶을 아무리 긍정적으로 산다해도 그 긍정성이 언제나 바른 것도 아니고 누군가에게는 오히려 상처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안다면 겸손해야 할 일이고 함부로 쉽게 누군가를 판단할 일도 아니다. 

'나정만씨의 살짝 아래로 굽은 붐'
  "아니, 아니, 다른 게 아니고...... 거 용산에서 일어난 그거 말이에요...... 지금 형씨가 그걸 쓰겠다고 이러는 거 아니에요. ... 그거 때문에 우리가 그 난리를 쳤고...... 한데요...... 그걸 쓰려고 하는 사람이...... 하필 왜 나를 찾아왔어요?..... 거기 있었던 사람들을 만났어야지, 거기에 갔던 크레인 기사를 만났어야지, 왜 나를 찾아왔냐...... 나는 그게 진짜 궁금한 거예요..... 그게 정상 아니에요?" 
  여기서 말하는 용산에서 일어난 그거는 용산 참사를  말한다. 그 사건을 쓰고 싶은 화자(작가)는 그런데 현장에 있었던 누군가를 만나지 않고 현장에 가려다 가지 못한 크레인 기사를  만나 같이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듣고 있다. 둘이 곤드레가 되었을 때 기사가 위의 대사를 한다.  그리고 작가인 화자는 계속 울고 있다. 
"그러니까 형씨도 나랑 비슷한 거 아니냐구요. 안타까운 건 안타까운 거고, 무서운 건 무서운 거 아니냐구요. 네? 내 말이 틀렸어요? 아, 나 참, 이사람..... 아, 씨발 울지 좀 말고!"
  왜 작가는 술에 취해 울고 있을까, 왜 그는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에게 가지 못한 것일까. 그는, 끔찍한 불행을, 분노할 수밖에 없는 사건을 직접 맞대면할 용기가 없어서라는 것을 나정만이라는 크레인 기사는 어느새 알게 된 것 같다.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의 불행을, 백성을 얕잡아보는 권력을 향한 분노를, 그대로 직설적으로 발설하기 어려운 사람은 작가만이 아니다. 대부분은 알고 있지만 결코 맞대면하려 노력하지 않는다. 최선을 다하지 않고 간혹 차선을  행하면서 자기 위안이나 하고 있는 것이다. 용산 참사의 이면에 이토록 무수한, 비겁하고 소심한 사람들이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속으로만 우는 경우가 얼마나 많을지. 작가는. 용산 참사를 쓰려하면서도 정작 그 한가운데, 끔찍한 부패와 태만과 고통이 얽혀있는 현장으로는 파고들지 못하는 작가를  비난하면서 부끄러워하고 있는 것이다. 

권순찬과 착한 사람들
  이 소설집 전체가 그렇지만 이 단편 또한 읽어볼 만한 작품이다. 작품이라는 말은 아무 글에나 붙일 수 없다.  이 단편에는 그러나 꼭 붙여서 쓰고 싶은 말이다. 권순찬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파온다. 

나를 혐오하게 될 박창수에게
  김숙희라는 여자의 진술서에 의해 이야기가 진행된다. 한 여자의 어쩔 수 없는 불행을 심도있게 그렸다. 누군가에게 계속 지원을 받는다면, 지원을 받는 그 사람은 행복할 수 있을까. 도움을 받는다는 것은 어쩌면 자신의 자존감과 자아를 잃어버릴 위험에 처한다는 것과 상통할 수 있다. 이럴 때 지원을 하는, 도움을 주는 사람은 정말 순수하게 상대를 위해서 지원을 하는 것일까. 혹시 자기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 최소한 나는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는, 자신의 이미지를 위해서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오래전 김숙희는
  남편에게 오래전 지원을 받았고 그로 인해 결혼하게 된 김숙희는 고맙기만 한 남편을 죽이고 남편의 보험금을 잠시 불륜관계를 가졌던 다른 남자 정재민에게 전부 주었다. 김숙희는 남편에게서 무한정 받았던 사람이었고 그것은 김숙희에게 모종의 반발심을 가져왔다. 그녀는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는 정재민과 불륜을 하면서 남편에게 그 사실을 말한다. 자신이 다른 남자를 만났고......   그러나 남편은 대답을 하지 않는다. 모른척, 상대를 해주지 않는다. 그녀는 몇 번인가 더 남편에게 자신은 불륜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남편은 끝까지 대답을 하지 않고 다른 이야기를 꺼낸다. 
  남편은 그녀에 의해서 죽임을 당한다. 나는 김숙희를 백번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죽이고 싶었으리라. 추궁하고 화를 내고 따지는 게 진짜 동등한 인간으로서의 행동이 아닌가. 그는 아내를 어떻게 생각하길래 묻지도 화를 내지도 않은 것일까. 
  그녀는 남편의 보험금을 정재민에게 다 준다. 둘은 이미 헤어질 사이인데 김숙희는 그 돈을 전부 줘버린다. 그리고 그녀는 십 오년 뒤, 경찰서를 찾아가 자수한다. 자신이 남편을 죽였노라고..... 그녀의 진술로 정재민은 참고조사를 받지만 그는 그녀의 남편을 죽인 일이 없으므로 그냥 풀려나온다. 
 "그는 길을 건넌 후, 다시 한번 경찰청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저기 저 건물 어딘가에 그녀가 있다. 남루하고 살찐, 그리고 모든 것을 자백한...... 그는 그렇게 생각하는 자신이 조금 혐오스러웠다. 그 생각을 잊으려고, 그는 다가오는 택시를향해 크게 손을 흔들었다."

  김숙희는 남편에게 전적인 지원을 받았고 정재민에게 아무 보상도 바라지 않고 보험금 전부를 줘버렸다. 그녀는 남편을 증오한 것 같고 정재민을 향해서도 결국엔 아무 감정이 없었던 것 같다. 그들의 관계에서 애정은 없었다. 주고 받는 일이 오히려 애정과 무관할 수 있다는 게 무서운 일이기도 하다. 

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 오빠 강민호
  이 작품도 누구에게나 친절한 게 얼마나 나쁜 일이고 무책임한 일인지를 생각할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이 작품의 강민호는 정말 공평하게 정말 순수하게 한 일이지 무엇을 기대하고 계산적으로 행한 것은 아니었다. 한데도 상대에게는(윤희) 돌이킬 수 없는 상처가 되었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친절한 것은 애초에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알려준다. 아무나 예수가 아니고 석가가 아니다. 

한정희와 나
  황순원 문학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시작부터 아주 재미있다. 현재 상황을 말하기 전에 그렇게 될만한 과거의 이야기를 죽 나열해 보여준다. 그래서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의 서론이 한참 길지만 이야기의 인과성을 저절로 느끼게 해준다. 화자의 무조건적인 베풂이 그럴만하다고 느끼게 된다. 하지만 선의로 한 선택이 꼭 좋은 결과만을 가져오지는 않는다. 그게 한 어린 여자아이인데도 그렇게 되고 만다. 한정희라는 어린 소녀에 엃힌, 결코 행복하지 않은 기억과 결말은 화자에게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는 그늘이 될 것이다. 
 
 우리는 아무 조건없이 누군가를 환대할 수 있을까. 상대가 나를 곤란하게 만들지라도 그를 환대할 수 있을까. 해설에서 김형중은 데리다의 환대를 이야기한다. 데리다의 환대는 무조건적인, 정언명령같은 환대를 말하지만 그것이 어려운 이유도 데리다는 말하고 있단다.
  "이제 다시 읽자닌 데리다는대문자 환대의 법(Low)에 대해서 강조한 만큼이나, 소문자 환대의 법들(low)에 대해서도 말한 적이 있었다. 그에 따르면 환대의 윤리는 정언명령이자 대문자 '법'이다. 그러나 우리는 실제로 그 법이 명하는 바를 우리가 속한 가족과 시민사회와 국가의 '법들'속에서만 수행할 수 있다. 말하자면 항상 부족한 환대, 항상 제한적인 환대, 항상 특정 조건과 상황 속에서만 실행되는 환대...... 무조건적인 환대 같은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환대는 그래서 부끄러움을 수반한다. 부끄러움은 환대의 윤리에 대해 구성적이다. 환대하는 자는 항상 자신의 불철저한 환대에 대해 부끄러워하는 자이기도 하다. 그러니 부끄러움 속에서 환대하라."

  혹시 이 책을 읽게 된다면 마지막의 '이기호의 말(작가의 말)'을 읽어야 한다. 앞의 작품들도 작품이지만 작가의 길고 긴 말도 진짜 작품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작가가 자신의 부끄러움을, 자신의 비윤리적인 행위를 고백하는 데, 그래서 이 작가가 존경스럽다고 말하게 되는 것이다. 
  이 책이 될 원고의 교정지를 받고 서랍에서 꺼내지 않은 채 지내다가 우연히 학교 앞에서 사고를 내었는데, 그 사고의 과정과 결말을 작가는 지나치게 상세하게 고백한다. 마지막 문장이 이렇다.
  "진실이 눈앞에 도착했을 때, 자네는 얼마나 뻔하지 않게 행동할 수 있는가? 
  나는 아직 멀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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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룰루 밀러 지음, 정지인 옮김 / 곰출판 / 2021년 12월


  과학 전문 기자인 룰루 밀러가 자신의 삶을 다시 일으켜세우기 위해 분류학자인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생을 추적하다가 만나게 된 진실을 상세히 다루고 있다.

  밀러는 한 남자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러나 뜻밖에 한 여자와 불장난같은 원나잇 관계를 가진다. 그녀로서도 이해할 수 없는 일... 그리고 그녀의 고백은 남자를 떠나게 한다. 밀러는 남자를 기다리지만, 모든 것은 끝났다. 

 

  그때 밀러는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라는 분류학자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다. 조던은 어류 전문가로 수십 년에 걸쳐 인류에게 알려진 어류 중 5분의 1을( 그와 그의 동료들이 )발견한 학자였다.

밀러가 그에게 집착에 가까운 관심을 쏟게 된 이유는 이 분류학자의 평생에 걸친 노고가 범상치 않아서였다. 콧수염을 기른 과학자 조던은 자신이 만든 어류 표본들을 첫번째로는 화재로 잃고, 두번째로는 지진으로 잃게 되는데, 그는 그런 상황에서도 좌절하거나 멈추지 않는다. 그는 그 중차대하고 절망할 법한 상황에서도 자신이 이 세계에서 질서를 세우려던 모든 시도를 다시 시작한다. 

  밀러가 그를 연구하고 캐보려는 의도는 바로 그것이었다. 어떻게 희망을 잃지 않고 다시 시작하는 것을 당연한 것처럼 해낼 수 있는가. 밀러는 조던이 그처럼 명백하게 낙망하지 않고 끝까지 살아갔는지를 알고 싶었던 것이다.

 

  한데, 뛰어난 업적으로 명성을 날렸고 수많은 상과 그를 기리는 지명과 건물과 거리까지 있는, 이제는 고인이 된 데이비드 스타 조던을 추적하던 밀러는 그가 우생학을 열렬히 지지했고 그런 정책을 펴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고보니 그의 의견에 반대하는 많은 과학자와 학자들도 사실은 곳곳에 산재해 있었다. 단지 죽어서까지 유지된 조던의 명성이 반대 의견을 가진 그들을 막고 있었던 것이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어린시절 별에 심취했던 소년이었고, 후에는 식물이나 꽃에 열정적인 관심을 가졌던 소년이었다. 그리고 성인이 되어서는 어류를 포획해 연구하려고 대륙과 대양을 찾아다닌 열성적인 학자였다. 숨어있는 작은 것을 소중히 여기던 그, 그런 그가 어째서 힘없고 약한 인간은 지구상에서 사라져야 한다며 강제 피임화를 서슴지 않고 자행했던 것일까. 

  그에게는 청년시절에 만난 아가시라는 스승이 있었고 그 스승이 처음 그에게 심어준 사상이 우생학이었다. 인류가 진보적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약한 자, 타락한 자, 가난한 자, 범죄적인 인간이 절멸해야 한다는 아주 단순한 판단이었다. 그들은 우생학을 철저하게 신봉하고 지상을 건전하게 지키기 위해서는 쓸모없는 인간들을 파괴할 권리가 있다고 믿었다.

  

  순수하고 열정적이었던 행위가 변질되어가고 있음을 조던은 깨닫지 못했으므로 자신의 생각에 오점이 있다고 느끼지 않았다. 거기에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스탠퍼드 설립자인 제인 스탠퍼드 부인을 죽이는 데 일조한 것처럼도 보인다. 조던은 죽었고 제인의 죽음은 자연적인 사고사로 오래전에 판명이 났기에(조던이 앞장서서 살인이 아니라 자연적인 사고였다고 주장하고 다녔다) 이제와 그 진실을 파헤칠 수는 없지만 룰루 밀러는 제인의 몸에서 검출된 독이 바로 조던이 물고기들을 쉽게 얻기 위해 사용한 독, 스트리크닌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룰루 밀러는 강제로 불임시술을 당한 애나를 찾아가 그녀의 오래전 경험을 듣는다. 누가 애나에게 어머니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명령과 판단을 내릴 수 있는가, 애나는 이웃들과 잘 지내고 있었고 오히려 메리라는 여자를 돌봐주는 일을 자진해서 하고 있었다. 메리는 애나를 의지해 행복한 삶을 영위하고 있다. 

  밀러는 깨닫는다. 이 지구상에 생명을 배열하는 사다리는 없다는 것을. 그것은 인간이 자신들의 편의를 위해 상상으로 만들어낸 관념에 불과하다는 것을. 자연에는 위도 아래도 없으며 더 나은 것도 더 나쁜 것도 없다는 것도. 그래서 자연은 늘 혼돈, 그 자체이다. 그런데 혼돈이야말로 자연스러운 것이다. 위계를 설정해 자연의 지도를 작성해서 아래에 위치한 것들을 하찮게 여기고 없애려한다면 오히려 자연 전체에 위험하다는 것이다. 인간의 눈에 너무나 사소하고 하찮은 존재가 사실은 어느 순간에 어떤 존재를 구원할 존재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생태학자 조너선 밸컴은 "물고기들은 우리보다 더 많은 색을 보며, 특정한 기억 과제에서 우리보다 더 나은 시력을 보이고, 도구를 사용하며, 바흐의 음악과 블루스를 구별할 줄 안다고 한"다.

  이 독서를 통해 알게 된 것도 많은데, 민들레 법칙이 확실하게 기억에 남는다. 민들레는 잡초이고 거둬내야 할 풀 같지만, 이 풀은 여러 방면에서 약제로 사용되며 염색제로도 쓰인다. 그러니까 인간의 눈으로 자연을 질서화시키지 말아야 한다. 자연은 우리가 알 수 없고 안다 해도 충분히 알고 있는 게 아니므로, 혼돈을 당연히 받아들이고 있는 그대로를 보려고 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룰루 밀러는 혼돈을 받아들이고 인간의 눈으로 보는 것을 그대로 믿지 말아야 한다고, 그래서 다른 편으로는 더 많은 길이 열려있고 할 수 있는 일이 더 많으리라는 것,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신이 옳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겸손히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루루 밀러의 이 역작은 결론에서는 조금 의외였다. 자신은 양성애자라는 것, 자신은 이제 그레이스라는 여자의 남편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그럴 수 있다. 인간이 정해놓은 배열도는 잘못된 것이니까. 누가 남자만 남편노릇을 하라고 했나. 그건 인간이 정한 빤한 관습에 불과하지 않은가. 하지만 그렇다해도 이토록 대담하고 거대한 사상의 끝에 양성애자라니... 그건 그냥 본인의 사적인(너무나 자연스럽다치고) 삶이지 않은가. 밀러를 응원하지만 자신을 옹호하기 위한 거창한 글쓰기로 가라앉아버린 느낌이 들었다. 내가 너무 냉소적인 사람인가, 싶다.

  

  아, 이 책의 제목,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물 속의 모든 동물을 고기로 한정하는 것은 인간이 자신들이 우위에 있고 저들을 경멸하여 붙인 이름이라는 것. 나는 전적으로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어류라는 것은 없다고 말하는 학자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바닷속에 물고기는 너무나 많고 비교불가능할 정도의 종들이 각자 달리 존재하고 있다. 인간과 비슷한 종도 있고 포유류 동물과 흡사한 종도 있으며 육지 위의 생명들과 아주 닮은 생명도 있다. 그러니 물고기라는 한 단어로 그들을 마구잡이로 통칭해 부르는 것은 곤란한 일이다.

  "조류는 존재한다. 포유류도 존재한다. 양서류도 존재한다. 그러나 꼭 꼬집어, 어류는 존재하지 않는다."(1980년대에 분류학자들이 타당한 생물 범주로서"어류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또 내가 늘 느끼던 것이었는데 이 책에서 읽으니 너무나 반갑고 다시금 하고 싶은 말이 있다. 페이지를 잊어버려 내 말로 쓴다.

  인간은 동물이 인간보다 더 능력을 발휘하는 일에는 동물의 '본능'이라고 말하고, 동물이 인간보다 열등할 때는 당연히 동물이니까 그런 거라고 말한다. 정말 내 식대로 저렴하게 썼다. 나는 가까이에서 동물들의 총명한 머리와 현명한 태도를 직접 본 적이 많기 때문에 절실하게 느낀다. 동물은 인간보다 열등하지 않다. 인간이 동물보다 윤리적으로는 훨씬 더 열등하다는 걸 인간들은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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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제14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이미상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4월






  그간 젊은작가상수상작품집을 읽은 적이 여러번이다. 문학동네에서는 이 수상집을 아주 저렴하게 내놓는다. 작년까지만 해도 5,500원에 산 것 같다. 매년 이 책을 살 때마다 가격에 놀라며 고마웠는데, 올해는 여기도 시장의 영향울 벗어날 수 없었는지 6,930원(정가는 7,700원)이 되어있었다. 그래도 특별한 가격이 아닐 수 없다(특별보급가라고 책 뒷표지 아래에 그렇잖아도 씌어 있다).

  젊은 작가상하면 손보미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3,4,5,6회를 연거푸 수상한 것도 그렇고 작품들의 면면도 매력적이고 문체 또한 특이했던 까닭이다. 손보미 작가의 '폭우'를 읽으며 창밖에 폭우가 내리는 이미지를 떠올렸던 오래전 일이 여전히 어제일처럼 생생하다. 이제 그 손작가도 벌써 중견작가가 되었고(?) 올해의 대상작가는 이미상이다. 

 

   

   이미상-모래고모와 목경과 무경의 모험


 웬지 이미상 작가는 앞으로 탄탄대로를 걸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작품마다에서 보여지는 순발력과 지적이면서도 용감무쌍한 정신이 느껴져서이다. 수상작 '모래고모와 목경과 무경의 모험' 또한 좋았다. 

  도입부부터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진지하고 희생적인 어떤 정신을 보여주는데, 소설에 대해 얘기하는 두 여자와 환경을 위해 불편을 감수하는 한 여자의 등장이 그것이다. 그들은 카페에서 주인공 옆 테이블에 앉아있던 사람들인데 작가는 그들을 통해 흥미로운 장면을 묘사한다. 그 에피소드는 실제 생활에서 있을 법하지만 쉽게 마주칠 수 있는 장면은 아니다. 영원히 비닐봉지와 용기를 쓰지 않겠다는 여자는 모든 짐을 일일이 자신의 가슴에 쌓아 두 팔로 간신히 껴안고 카페를 나간다. 물건이 떨어지고 그걸 주워주는 사람이 있고, 아슬아슬하게 바라보는 눈길들이 있다. 그래도 여자는 스스로 자신이 정한 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건 도입부다.

  그리고 본격적인 시작은 모래고모로부터 시작된다. 고모는 쌀보리게임에서 보리도 되지 못하는 존재, 아무도 반기지 않는 딸로 태어났고 관심이나 위함을 받아본 적 없다. 그녀는 자신이 곧 모래같은 존재라고, 그래서 모래고모라는 별명이 붙었다. 

  모래고모는 부모에게조차 하찮은 존재로 취급당하고 그래서인지 특별한 일도 없이 여기저기 일손이 필요할 때, 옮겨다니면서 지내고 있다. 그런 고모와 목경과 무경이 여행을 떠나고 그 여행에서 두 남자를 만나게 된다. 남자들은 총을 가지고 있고(사냥꾼들이다) 밤이었다. 

  모닥불을 가운데 두고 앉은 그녀들에게 남자들은 성적인 희롱을 하고 위협적인 언사를 함부로 내뱉는다. 모래고모는 두 조카아이 때문에 그 상황을 견뎌야하고 어린 소녀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모닥불 너머로 눈과 추위까지 이들을 가로막고 있는데, 이때 어느순간 무경이 갑자기 사라진다. 밤새 일행이 무경을 찾아헤매다 새벽에야 무경이 발견되는데, 아직은 소녀인 무경은 홀로 숲이 끝나는 지점인 아파트 뒤편에서 발견된다. 

  무경이 말한다. "할 순 있지만 정말 하기 싫은 일, 고모의 그 일을 내가 했어요."라고.

  나로서는 모르겠다. 무경은 무엇을 했다는 걸까. 추위와 어둠을 무릅쓰고 혼자 길을 찾아헤맸던 것일까. 빨간남방과 파란남방을 입었던 무뢰한을 떠나서 그들의 희롱과 위협이 별 거 아니라는 뜻을 전하려 했던 걸까. 그 캄캄한 밤에 잃어버린 총을 찾아 나섰던 것일까. 아무튼 세사람의 모험은 이렇게 끝난다. 

  처음부터 끝까지 에피소드마다 흥미롭고 주제도 선명해서 좋았다. 아무래도 이미상작가의 시대가 곧 열릴 것 같다. 


  

    김멜라-제 꿈 꾸세요


  어느날, 갑자기 죽음을 당한 나가 안내자인 챔바의 인도로 다른 세상을 향해 가는 이야기.

  죽음은 온전히 사라지는 무의 세계가 아니라 또다른 세계로의 입문이라는 설정이 마음 따듯해진다. 그렇게 재미있게 읽지는 못했지만, 마지막에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의 꿈으로 찾아가서 그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하는 망자의 마음이 애닯으면서도 따스하게 다가왔다. 


   성혜령-버섯농장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 어려운 주제를 완벽하게 형상화하지 않았나싶다. 

  자신이 져야 할 책임을 선택하는 버섯농장 주인의 행태가 너무 괘씸했는데, 주인공이 죽은 남자의 머리통을 골프채로 치는 장면이 통쾌했다. 다시 읽어볼 만한 작품.


   이서수-젊은 근희의 행진


  장녀이자 "유교걸" 문희가 화자로 동생 근희에 대한 불만과 염려로 시작되던 이야기가 결론에서는 근희를 응원하는 이야기로 맺는다. 젊지 않으면 쓰기 어려운 이야기.

  "SNS를 통해 자기 자신을 전시하거나 타인의 전시된 일상을 봄으로써 타인과 촘촘히 연결되는 것을 보편적인 일로 받아들이는 시대에 누군가의 관심을 바란다는 것이 더이상 별난 욕망"(해설편에서)이 아니라 당연할 수 있다는 사실을 결말엔 이해할 수 있었다. 작가가 근희의 당위성을 독자에게 설득했다고 할 수 있겠다.


   정선임-요카타


 눈물겨운 96세 할머니의 역사. 일제시대를 살아야했던 식민지의 소녀가 겪어야했던 비정상적인 삶의 행로, 또다시 한 여자가 겪어내는 6.25. 읽는 내내 마음 아팠다. 한데 작가는 이 작품이 초고와 매우 다르며 여러번의 수정으로 이런 글이 되었다고 한다.


  함윤이-자개장의 용도


  삼 대를 물려내려오는 자개장의 쓰임새. 절대 비밀인 자개장의 용도는 만만치 않은 용기를 필요로 한다. 여자들이 멀리 떠났다가 돌아오며 어머니가 되고 할머니가 되는 이야기. 우리 인생의 행로가 이렇지 않을까.


  

   현호정-연필 샌드위치


  먹는 것과 먹지 않는 것 사이의 차이. 누군가를 먹이고 그렇게 먹이기 위해서 열심히 먹어야하는 여자들의 삶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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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6년 6월



  드뎌, 소세키의 <마음>을 읽었다. 

  정말 오래전부터 읽어야지, 읽어야지 했던 작품이었다. 그래서 너무 좋았다. 갈망하던 책을 드디어 행위로써 실천했다는 이유만으로...   

  마음은 상,중,하로 구성되어 있는데, 상이' 선생님과 나', 중이 '부모님과 나', 하가 '선생님과 유서'로 이루어져 있다. 장의 제목이 단순하듯 내용도 어찌 보면 단순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작품이 전체적으로 굉장히 정적이다. 주요 주인공인 나의 성격도 그런데다 선생님의 성격 또한 너무나 조용하고 평화로울 정도에다 또다른 중요 인물인 k의 성격 또한 그렇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사의 결말은 비극적이다. 선생님이 내게 유서를 남기고 떠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의 극진한 존경을 받던 선생님은 자신의 친구였던 k라는 친구의 죽음(자살)에 자유로울 수 없는 사람이었다. 자신의 비겁하고 교활한 행동으로 인해 친구인 k가 죽었다는 자책과 죄의식에 시달리며 살아온 것이다.

  어째서 그토록 욕심 없고 건조할만큼 단정하게 살던 선생님이 스스로의 모멸과 자책에 시달렸던 것일까. 인간은 아주 폭넓게 다르지만 다른 면으로는 굉장히 비슷하게 살고 비슷한 감정에 시달린다. 질투와 미움, 열등감과 소유욕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선생님도 k에 대한 질투와 열등감 때문에 괴롭다가 자신을 망치고 말 행위를 한 것이다. 

  선생님은 끝내 자신이 가야할 길을 떠나는데, 그 부분에서는 조금 실망스러웠다. 내가 일본인 독자라면 절대 이런 마음을 갖진 않을 텐데, 한국사람이라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천황이 죽는 날 노기라는 군인이 죽고 그리고 며칠 뒤에 선생님이 죽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의 천황에 대한 숭배와 감성은 우리의 예측을 넘어선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이 <마음>이 왜 스테디셀러이고 읽어야할 책인지는 알 만하다. 일단 내면 묘사가 뛰어나다.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처럼 파격적이지는 않지만 인간심리를 하나하나 섬세하게 파헤치는 문장들이 내내 계속된다. 그런 특징이 정적인데도 지루하지 않게 읽게 되는 묘미를 갖고 있다. 이 <마음>은, 소설이란 역시 인간심리를 파헤치고 그대로 묘사하는 데서 독자를 거느리게 된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할 것이다. 언제나 배우지만 참 어려운 길이다. 사람의 마음을 일일이 기록하고 파헤치고 따라가며 그대로 그려낸다는 것은... 소설가란 커다란 행위보다 아주 사소하고 하찮은 것을 관찰하고 해석하고 이해하는 좀스런 사람이어야 한다. 가장 작고 좀스럽고 하찮은 것을 이해하고 묘사하는 작가가 위대한 작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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