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부력

이승우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21년 1월


  올해 이상문학상은 이승우 작가의 '마음의 부력'이 선정되었다. 이승우 작가라면 기본적으로 믿고 보는 작가이고 실제로 그의 작품들은 언제나 배울 점이 많아 기대했던 것 이상을 채워준다. 
  '마음의 부력'을 읽고 든 첫 생각은 어느 집에나 있을 법한 흔한 소재라는 것. 하지만 작가는 그토록 흔한, 형제를 둘러싼 어머니의 편애와 그 편애가 불러온 불편하고 수치스런 화자의 심리를 세세하게 풀어내면서 어느덧 묵직한 사유의 세계로 끌고 간다. 엄중하면서도 비밀스런 설화가 작품 중반이 넘어가면 깔려지는 것이다. 성경이라는 전통과 보편성에 이야기는 합쳐지고 야곱과 에서,그들 한가운데 위치한 어머니 리브가가 현재의 화자와 어머니로 대치된다. 
  작가가 차용하는 성경 속 설화는 가족들에게 소외된 장자의 외로움과 무력함을 일차적으로 조명한 뒤 모든 것을 가진 듯한 차남에게로 포커스를 돌린다. 어머니의 사랑과 아버지의 축복으로 사회적으로도 성공한 차남은 그러나 어느 순간 부끄러움과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다. 
  그리고 다시 작가는 그렇게 사태를 만든 어머니의 마음에 조명을 비춘다. 그때 드러나는 리브가의 어쩔 수 없는 회한. 정말 어머니는 차남을 더 사랑해서 그랬던가, 라는 물음. 똑같은 자식인데 하나를 배제하고 다른 한 자식을 더 챙겨야했던 어머니의 마음은 편했을까. 혹시 어머니가 한 자식을 편애할 때 그것은 어머니가 일부러 정한 것이 아니라 자식마다 지닌 태생적 인성에 기반을 둔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으리라는 가정이 부상한다. 
 그러나 어머니는 어머니라는 위치 때문에, 모성은 끈질기고 사라지지 않는 본성이기 때문에 오래도록 죄책감에 시달리고 회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화자는 그래서 이제는 세상에 없는 형을 대신해 어머니에게 돈을 부탁한다. 어머니가 장남에게 하지 못했던, 그래서 병이 되고 만 사랑과 배려를 할 기회를 마련해주는 것이다.  
  화자의 마음의 여정을 따라가는 과정이 세밀하고 깊어서 이렇게 표현하고 싶다. 마음이 진실을 깨달아가는 그 과정을보여주는, 심리적 지도를 보여주는 묘사였다고.



  이상문학상이 언제나 그렇듯 우수작으로 선정된 작품들도 다 좋았는데 윤성희의 블랙홀은 특히나 그 형식이 새롭고 그러면서도 친근한 이야기들의 끝없는 나열이라 더 재미있었다. 소소한 작은 이야기들이 화장틀에서 화장지가 끊임없이 풀려나오듯, 만화경 속의 그림들이 끝없이 눈앞에 나타나듯, 독자는 어느덧 이야기라는 블랙홀로 빨려들어간다. 

 끝없이 이어지는 이야기를 보여주기 위해 문단을 띄지 않은 페이지도 많았다. 그리고 그게 이 작품에는 완전히 맞아떨어졌다. 윤성희라는 작가의 매력을 보게 되었고 소설이 이렇게 다양한 방법으로도 쓸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없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가 환타지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멋진 작품이다.


 

 박형서의 97의 세계는 말세를 향해가는(언제나 사람들은 말세야, 말세.라고 말하지 않는가) 이 지구상의 어느 마지막 순간 직전에 일어날 이야기같다. 우리는 그때 무엇을 할 것인가. 우리는 그때 누구를 구하고 누구와 연대할 것인가. 지진이 날 때, 불이 났을 때, 서로 도와야 할 때, 위험에 빠진 이를 구해야 할 때, 이 소설은 우리에게 미리 각성하라고 주문한다. 우리 각자는 어느 한 순간 특별한 사람이 될 수도 있다고. 



 장은진의 나의 루마니아어 수업은 처음에는 조금 지루하게 읽혔다. 그녀의 눈동자와 분위기를 반복하고 있다는 느낌 때문이었는데, 작가의 이 지나치게 느리고 찬찬한 문장들은 특별한 사건없이 사라진 그녀를 독자에게 데려오기 위한 일종의 지연작전처럼 보였다. 왜 화자는 자꾸 그녀의 눈빛과 가을에 그토록 골몰하는가. 그건 내가 그녀와 아무 관계도 맺지 않았는데도, 그런데도 내가 그녀를 특별히 사랑했던 과거와 아직도 그녀를 잊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진실인가를 말하기 위해서인 것 같다. 일반적인 연인관계가 아닌, 루마니아 소설을 함께 읽고 나누었던, 특별하고 비밀스러워서 그런 일이 그녀와 나 사이에 정말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혹시 은영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녀가 실제 존재하기나 했었나, 하는 스스로의 의문 때문에 그토록 화자는 그녀의 눈빛을 자꾸 언급하는 것이다. 그녀는 짧은 가을날 그 바람 앞에 잠시 내 곁을 머물다 떠났으므로. 그리고 이젠 영원히 부재하기 때문에... 

  그러나 고양이는 하트 모양의 무늬를 등에 진 채 살고 있다. 혹한의 겨울을 이기고 주차장 자동차 밑에서 이리저리 옮겨다니며 살고 있다. 그 고양이와 나는 닮아있다. 



  천운영의 아버지가 되어주오도 친숙하게 읽혔는데, 어머니와 아버지,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차례차례로 등장한다. 

 플롯을 보면 

  어머니와 아버지의 위장 이혼, 나의 아버지에 대한 비난 - 어머니와 아버지의 만남과 결혼, 나의 출생과 두 분의 결혼생활 -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결혼생활, 어머니의 출생, 어머니의 결혼을 반대한 할아버지와 갈등과 화해(그 화해에는 아기인 내가 끼어있어서 가능) - 아버지와 어머니의 현재 - 어머니의 진실, 고백(나의 오해)

  이렇게 삼대에 걸친 이야기가 차례차례로 등장하는데, 흔히 옛날 얘기를 쓰면 올드하다, 상투적이다, 그런 이야기 없는 집안이 어디있냐, 이러는데 이런 시비를 걸지 못하도록 작가는 자신을 이야기의 중심에 놓고 있다. 그리고 어머니의 진실을 통해 아버지가 나의 아버지가 된 이유와 어머니가 아버지의 아버지가 된 내력을 말해준다. 


한지수의 야심한 연극반은 지금 바로 읽을 예정이다. 미리 감상문을 올리기 위해 순서가 뒤집혔다. 읽은 다음에 또 올리기로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1 올해의 문제소설

한국현대소설학회 엮음 / 푸른사상 / 2021년 2월



  어제 이 소설집에 대한 페이퍼를 쓰면서 마지막 두 작품을 읽지 못했다고 써놓고 나니 왠지 찜찜해서 오늘 늦은 오후에 두 작품을 마저 읽었다. 읽고나니 별것도 아닌 일이지만 그래도 맘이 편해졌다. 특히 전하영의 <남쪽에서>는 특히나 요즘  나태와 우울에 빠져있던 나를 향한 메시지처럼 느껴졌다. 그대로 옮겨온다.

 

""나는 눈을 감고 한 사람이 무언가를 쓰고 있는 장면을 상상했다. 40년이 넘도록, 아니 평생에 걸쳐 쓰는 삶에 대해서, 보이지 않아도 쓰이는 어떤 삶을, 어딘가에 존재하는 질서를, 그 깊고 어두운 세계를.(353쪽)"

이것은 작중 인물의 입을 빌린 작가의 독백이기도 하다. 작가는 자신이 잘 아는 것을 쓴다. 이 말을 이렇게 바꾸고 싶다. 사람이 가장 잘 아는 것은, 바로 자신이 견딘 것이라고. 지금까지............
그들은 자신이 꿈꾸는 세계를 지키려고 최선을 다한다. 비록 타인의 주목을 받지 못하는 평범한 삶에 머물지라도 말이다. 
  전하영의 인물들은 익숙한 퇴행으로 도피하지 않는다. 퇴행과 자기연민으로 가득한 레테로토피아의 세계에서 그들은 과거를 낭만적으로 포장하지 않고 끊임없이 기억하고, 기록하고자 한다. 타인의 인정과는 상관없이 이 행위는 끝내 의미를 획득한다. "보이지 않아도 쓰이는 어떤 삶"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 윤리 때문이다. 이것은 평생에 걸쳐 쓰고 싶다는, 한 작가의 출사표이기도 하다. 
  사람은 누구나 타인에게 주목받는, 특별한 삶을 꿈꾼다. 하지만 그 기대는 언제나 배신당하고 희망은 쉽게 휘발된다. 삶은 복잡하고 부조리한, 지리멸렬한 우연의 연속이라는 사실을 자각하면서 우리는 조금씩 생을 소진한다. 삶의 결정적인 순간들은, 늘 지나간 후에야 비로소 보인다. 대다수 사람들은 자신의 삶이 그다지 특별하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점차 체념에 길들여진다. 과거의 잃어버린 가능성을 복기하는 일은, 사람을 초라하고 쓸쓸하게 만든다. 어떤 소설들은 이 외로움을 동력으로 삼는다. 이것은 외로움에 초연하거나 극복한 결과가 아니라 쓸쓸할 수밖에 없는 삶에 공감하기에 가능해진다. 아픈 과거로의 '행진'은 끝났지만, 멈추지 않고 쓰는, '나'의 '아름다운 행진'은 계속될 것이다."((357~358쪽)작품 해설,  레트로토피아, 기록하는 자의 윤리, 이정현)


마지막 작품 최진영의 <유진>도 작품 자체가 당연히 좋았지만 해설을 읽으며 밑줄 그은 부분을 남겨두고 싶다. 


"........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기쁨과 만족을 느끼기보다는, 사람들 속에 있으면서도 심리적 고립 상태에 놓인 바로 그 형상 말이다. 고로 이 울렁거림은 "그 시절의 나", 즉 생물학적으로는 어른이었지만 결코 '어른'이 되지 못했던 '나'에 대한 자책과 부끄러움 때문에 유발된 것이라고 봐야할 것이다. 스무 살을 전후로 한 시점의 나는 무영과 헤어진 이후에도 사람을 신뢰하지 못한 채 고립된 삶을 자처하고, 이유진과 헤어진 이후에도 "완벽하게 혼자"이기를 꿈꿨다. 이는 그야말로 세계와의 교섭을 차단한, 미성숙한 어른임에 틀림없다. 이러한 나로서는 죽은 유진의 삶을 떠올린다는 것 자체가 어쩌면 자신의 미성숙한 민낯을 발견하는 일처럼 느껴지겠지만, 나는 사라진 기억의 조각들을 맞춰가면서 어른이 된다는 것의 의미를 질문하게 된다."((390쪽), 작품해설, 죽음 이후의 삶, 이만영)


필요한 순간에 책은 스승이 되고 처방전이 되어준다. 물론 그것은 감기약처럼 그 감기에 걸렸을 때 한 번 복용하고 낫는 것 이상은 아닐수도 있다. 완전한 해결책도 영원한 방법론도 아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에게서보다 책이 훨씬 큰 도움을 주기도 한다. 오늘 이 작품의 해설이 특히 그랬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1 올해의 문제소설
한국현대소설학회 엮음 / 푸른사상 / 2021년 2월


  

  푸른사상에서 펴낸 올해의 문제소설은 현대문학 교수 350명이 뽑은 작품이라고 한다. 이럴 때 나는 정말 350명의 교수들이 문제소설을 뽑아보냈는지 조금 의심스럽다. 그러나 내 의심이 어쨌든 작품을 읽다보니 문제소설이 될 만큼 좋은 소설들이 있었다.

  특히 첫 작품 김숨의 <철의 사랑>과 김지연의 <굴 드라이브>, 서장원의 <망원>은 아직도 뇌리에 남아있다(읽은지 한 달이 거의 넘은 것 같다). 뇌리에 남는다는 말은 실제로는 뇌리보다 가슴에 와 닿았기 때문에 기억나는 것으로써 뇌와 심장 어디가 더 중요하게 기억을 불러일으키는지 한 번 생각해 볼만한 일이다. 그래도 또 머리를 써서 생각해보면 흔히 가슴이 아프다, 가슴에 박혔다,라고 하지만 그 감동의 흔적이 남은 곳은 머리속일테니 뇌가 감동했고 뇌가 기억하고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철의 사랑>은 조선소에서 일하는, 하도급에 하도급을 딴 아주 영세한 사업자 밑에서 일하는 하루살이 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 현장을 그리고 있다. 작가는 이 글을 쓰기 위해 <현대조선 잔혹사>라는 책을 참조했다고 하는데 이 정도로 눈앞에 현장이 보일 정도로 쓰기 위해서는 공부를 하듯 몇 번 참고도서를 읽었을 것이다. 그 노력만으로도 귀한 상을 받아 마땅하다고 여겨진다. 

  <굴 드라이브>는 무진기행을 역으로 비틀면서 여성의 귀향기행과 도시로 돌아오기까지의 여정을 보여준다. 이 작품은 무진기행의 남성 중심적인 사고와 가치에 대해 비판하는 것으로도 읽혔는데 무진기행을 무진장 싫어하는 나로서는 아주 뛰어난 안티 무진기행으로 읽혔고(그러나 사실은 뒤에 따라붙은 해설 때문에 알게 되었다. 소설에도 해설이 정말 필요할 때가 있다.) 김지연 작가의 패기와 아이디어에 박수를 쳐주고 싶었다.

  <망원>은 서장원 작가의 글이었는데 차분하게 인물의 정서를 만들어내고 따라가는 것이 웬만한 여자작가보다 더 치밀하고 은근하면서 세심해서 마음 깊이 남겨진 작품이었다. 사람의 마음이란 것, 누군가를 의지하고 서로 공감하면서 서로를 지켜주는 것, 자신을 떠나 다른 여자와 결혼한 남자가 부탁하는 강아지를 데려오면서 겪는 아픔과 상실, 그러나 다른 대상에게 또 가닿게 되는 희망, 그런 세세한 마음들이 망원이라는 제목과 잘 맞아떨어졌다. 

  맨 뒤의 두 작품, <남쪽에서>와 <유진>은 읽지 못했다. 나중에 시간되면 읽기로 하고 지겨운 숙제 바이바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하생활자의 수기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이동현 옮김 / 문예출판사 / 1998년 12월



  읽은지 한 달이 넘었는데 이제야 페이퍼를 쓴다. 이 작품은 <모자>와 <비트겐슈타인의 조카>를 읽고 나서 내가 예선 언니에게 베른하르트에게 빠졌다고 하자 언니가 추천(베른하르트가 좋았다면 이 작품 또한 좋아하게 될 거라는 언니의 예측)한 책이었다. 나는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한 편견이 있었는데 그는 아주 길고 복잡한 서사를 주로 쓴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그의 책을 읽을 생각을 하지 못하다가 언니가 말한 걸 텀을 좀 두고 있다가 실행에 옮긴 것이다. 그런데 독서를 생활화한 사람들은 책을 분류할 줄 알고 책을 읽는 사람들의 성향을 파악할 줄 아는 것 같다. 그리고 이제 예선언니가 나를 어느 정도 파악한 것처럼 나도 나를 파악하게 되었다. 나는 명작을 다 좋아하고 동경하지만(나는 유난히 설레발을 치며 이러는 편이다) 특히나 이런 작품을 정말 좋아한다는 것, 동경한다는 것이다. 

  앞서 썼듯 다자이 오사무와 베른하르트, 그리고 도스토예프스키가 이번에 한꺼번에 내 안에 각인되었다.  나는 이런 작가들을 흥모한다. 이 작가들은 여느 작가들보다 사변적인데도 흥미롭고 개성적이며 서사가 뚜렷하지 않아도 줄줄이 고치에서 실이 나오듯 흘러넘치는 통찰과 사유의 문장으로 독자들을 경외감에 빠트린다. 내 안에 이 작가들의 문장이 하나하나 쌓여가기를 간신히 바랄뿐이다. 


  지하생활자의 수기는 얼마간의 상속을 받게 된 공무원인 '나'가 주인공이다. 그는 매일 방에 틀어박혀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며 할일없이 그나마 사이가 어색하지 않았던 상사의 집에 간혹 찾아다니고 학교 때 친구를 만나러 간다. 그는 그러나 현실에서는 외톨이이고 출세와 세속에 물들지 못해 무척이나 고독하다. 그는 자신을 한심하게 생각하며 자의식에 괴로워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통속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속으로는 경멸하기도 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그런 사람들을 그럼에도 필요로 하고 그들과 어울려보고 싶은 욕구가 있다는 것이다.  이 모순 때문에 그는 이랬다저랬다 혼자서 변덕을 부리며 괴롭고 외롭고 자신이 바보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그 사람들과 잘 어울리고 그들처럼 세상에서 즐거움을 구하고 세상의 통속적이고 유치한 삶을 살아가면 될텐데 그렇게는 또 안되는 것이 바로 그라는 인간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못난이라고 생각하고 더없이 속된 인간들을 속으로는 경멸하면서도 그들에게 망신을 당하면서까지 그들 무리에 끼이려한다. 이 모순의 욕구 때문에 그는 자신을 도외시하고 무시하는 친구들에게 조롱과 비웃음을 당한다.

  책은 1,2부로 구성되는데, 1부에서는 자신의 그런 모순적인 사고와 의식 때문에 괴로운 자신을 저주하고 2부에서는 실제로 그가 겪었던 더없이 수치스럽고 한스러운 이야기를 고백한다. 

  주인공 나는 친구를 찾아간다. 그 친구는 그가 찾아가면 맞아들이기는 하지만 썩 반기지는 않는데 친구가 없는 나는 그 친구 외엔 친구가 없기 때문에 다른 도리가 없다. 어느날  친구는 다른, 학교때 친구들을 내일 만날 거라 하고 그는 한번도 친한 적이 없던 친구들의 모임에 자신도 가겠다고 한다. 그는 그 말을 하면서도 자신이 괜한 짓을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도 그는 그 모임에 가서 친구들과 어떤 만남을 갖고자 한다. 

  그러나 네 친구는 그를 반기지 않고 떠나주기를 바라는데 그는 바보같이 그들에게 어이없는 소리를 하고 그들을 화나게 하고는 그들 곁을 떠나면 안된다고 여기면서 그들이 끝까지 자신을 무시하고 끼워주지 않는데도 그곳을 서성거린다. 한편으로는 한심하고 어이없고 한편으로는 이상한 자존심 대결을 펼치지만 친구들은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그는 몇 시간을 그렇게 진을 빼다가 결국은 그들에게 자신이  잘못했다고 고백하면서 용서를 구한다. 친구들은 어이없어하면서 자기네들끼리 목적지를 향해 떠나는데 그는 또 그들을 뒤따라간다. 이런 알 수 없고 한심한 짓을 하면서 그는 자신이 쓸데없는 짓을 한다는 것을 속으로는 뻔히 알고 있다. 그런데도 그러지 않을 수 없으니 얼마나 기막힌 상황을 스스로 만들고 있는지, 그는 알면서 그 수모를 당하기를 자초한다. 이상한 자존심, 이상한 굴욕에 대한 쾌감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친구들을 따라간 곳에서 그는(그곳은 일종의 룸싸롱 같은 데였나보다) 한 여자를 만난다. 그녀는 창녀라기엔 아직 어리고 순수한 일면을 지닌 여자인데, 그는 그녀에게 걱정과 위로가 담긴 길고긴 이야기를 남기고 돌아온다. 그리고 얼마 후 그녀가 그를 찾아온다. 그러나 그는 그녀에게 따듯한 말 한마디 하지 않고 그녀를 돌려보낸다. 그녀가 다시는 그를 찾아올 수 없게 만드는 말들을 내뱉는다. 그러면서 그는 또 멍청하게 자신의 마음과는 반댓말을 자신이 하고 있다는 것을 속으로는 얼핏 깨닫고 있다. 그녀에게 보여주어서는 안될 추레한 생활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그는 그러고 있는 것이다. 

  읽으면서 꼭 나를 보는 기분이었다. 이상하게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을 읽으면 그 인물들이 꼭 나인 것만 같다. 정말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고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어째서 도스토예프스키는 병든 인간, 너무나 외롭고 괴로워서 쓸데없는 짓을 일삼는 이들을 이다지도 잘 묘사하는지, 한 모순투성이의 인간을 이토록  잘 묘파하는지.....  

  요즘들어 페이퍼 쓰는 일이 자꾸 숙제가 된다. 이것도 일종의 루틴이다. 앞으로는 책을 읽으면 제까닥 써버릇해야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트겐슈타인의 조카
토마스 베른하르트 지음 / 현암사 / 1997년 11월




  

  파울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의 조카로써 음악과 연극, 정치, 철학 등에 뛰어난 식견과 예술혼을 가진 사람이었다. 베른하르트는 12년 간 파울과 만나며 정신적인 동반자로써 우정을 쌓는다. 베른하르트는 파울이 자신의 삶을 살게 해준, 구원자같은 존재였다고 밝힌다. 

  베른하르트는 파울을 논리적 글로써 유명 철학자가 된 아저씨 비트겐슈타인과 달리 행동으로 실천한 철학자라고 설파한다. 파울은 자신의 재산을 친구들과 가난한 사람들에게 마구 주었으며 그 대가로 중년 이후에는 궁핍한 삶을 살게 된다. 그러자 친지와 지인들이 떠나고 그는 마지막 길을 환자로써, 정신병자로써 조용히 외롭게 죽어간다. 베른하르트는 친구에 대한 미안함과 존경을 담아, 그를 지켜주지 못한 자신에 대한 회한으로 이 글을 써나갔을 것이다. 

  소설의 서두에서 그들은 한 시기, 거의 같은 시기에 베른하르트는 폐병 전문병원에, 파울은 정신병원에 입원했던 시절을 서두로 이야기한다. 이런 극한의 상황 속에서 둘은 서로를 더욱 각인하고 어떤 운명을 느꼈다고 생각된다. 그들의 우정은 그들의 병만큼이나 떨어질 수 없는 것이었다. 둘의 우정은 12년간 지속되고 파울의 죽음으로써 끝나는데, 이후에 베른하르트는 이 작품을 쓴다. 베른하르트는 파울과 있었던 일들, 그와의 대화 등을 파울의 생전에 메모해 두었다고 한다. 베른하르트는 파울의 놀라운 지성과 그의 독창적인 사고, 뛰어난 인간애를 기록해두고 싶었던 것이리라.

  이 작품을 통해 나는 베른하르트를 동경하는(근래들어 그의 책을 읽었으니 역사는 아주 짧지만) 사람이 되었다. 그의 글은 독자를 중독시키고 그런 글을 쓰고 싶게 만든다. 

  근래 읽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의 수기'(이건 아직 독후감을 쓰지 못했다),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 그리고 이 작품 '비트겐슈타인의 조카'가 왠지 삼총사처럼 느껴진다. 인간 심연까지, 그 치열한 자기 파괴적인 고뇌와 열정, 순수하면서도 모순 투성이인 인간들을 보여주어서일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