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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년세세 - 황정은 연작소설
황정은 지음 / 창비 / 2020년 9월
평점 :
황정은 작가의 [연년세세]를 읽었다. 연작소설의 형식답게 '파묘', '하고 싶은 말', '무명', '다가오는 것들'의 4단편의 주인공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이순일 엄마, 한영진 큰딸, 한세진 작은 딸이 이 소설의 주인공들이다. '파묘'는 한세진의 관점에서 엄마와 함께 외증조부의 묘소를 찾아 뼈를 골라내어 화장하는 내용이다. 엄마의 외할아버지는 나중에 '무명'에서 엄마 이순일의 삶이 그려지며 배다른 형제의 자녀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전쟁 중에 홀로 살아남은 이순일을 살뜰히 보살피지 않은 살갑지 않은 인물로 그려지지만, 이순일의 동생이 옷에 불이 붙어 큰 화상을 입을 때 손으로 아기를 살리기 위해 불을 끄려다 생겨난 켈로이드 피부가 마음에 걸려서인지 외할아버지의 제사를 지내오곤 했다.
제작년에 김승옥 문학상 수상작품집에서 '파묘'를 읽고 이순일과 한영진의 삶이 궁금했었는데, 이어지는 다른 단편들을 통해서 그들의 삶을 엿볼 수 있었다. '파묘'에 그려진 이순일의 삶은 무척 고달파보였다. 큰딸의 집에 얹혀 산다는 이유 때문인지 무능력하게 그려진 남편과 사위와 손주들의 식사와 청소까지 집안 일을 하느라 불편한 다리를 편히 놓을 세도 없이 과도한 노동을 부과한 큰딸이 매정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하고 싶은 말'의 주인공으로 등장한 한영진의 이야기는 그녀를 불효막심한 딸로 규정할 수 없도록 했다. 백화점에서 이불 판매 사원으로 일하는 큰딸은 어쩌면 엄마 이순일이 지나온 삶을 전처를 그대로 밟는 듯 그려진다. 제목이 '하고 싶은 말'이듯 한영진은 정말로 엄마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엄마의 "하고 싶은 걸 다 하고 살 수는 없다"는 말 때문이다. 막내 한만수는 호주에 가서 일하고 지내며 자유롭게 살 수 있도록 허락하지만 한영진은 엄마가 자신을 보내주지 않을 것을 안다. 맹목적인 희생을 강요당한 이순일의 삶이 지금도 지속되며 한영진의 가족이 지탱할 수 있는 원천임을 알지만, 한영진은 엄마에게 이제 그만 편히 쉬라는 말을 하지 못한다.
'무명'에서는 이순일이 어릴때 순자라고 불리던 때의 이야기를 전해준다. 피란을 떠나다 논밭에 엎드려 있다가 가족과 분리된 순일은 외할아버지와 살며 동생의 죽음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갑자가 나타난 고모내외가 순일을 데리고 가서 식모살이를 시키며 온갖 고생을 하다 집을 나와 친구 순자의 도움으로 어느 병원의 간호조무사로 일을 배우게 되지만 고모가 다시 데리고 들어가 순일의 작은 꿈은 산산조각나고 만다. 이후 고모집에서 벗어나기 위해 남편을 만나 결혼하게 되고 순일의 고달픈 삶의 면면이 비춰진다. 제목' 무명'은 순일의 첫 눈에 대한 기억이 누군가 어린 그녀를 눈더미에 던져버린 것으로 인해 솜으로 만든 옷감을 뜻하는 것으로 생각되지만, 실제 제목의 한자어인 무명(無名)은 이순일이라는 이름이 버젓이 호적에 등록되어 있음에도 그녀를 아무렇게나 순자라고 부른 뜻이 담겨져 있었다. 이순일이 그토록 고된 삶을 살아 누군가의 일상을 지탱하도록 했음에도 그녀의 이름과 삶은 무명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라는 억울함이 담겨 있다.
마지막 단편 '다가오는 것들'은 2016년에 개봉한 동명 제목의 영화를 오마주 한듯 하다. 실제로 영화 시나리오를 쓰는 한세진은 아마도 애인으로 추정되는 하미영과의 추억을 떠올리며 업무차 뉴욕으로 떠나게 된다. 뉴욕에 머물며 이모할머니의 아들 노먼을 만나기로 약속하고 역시나 한국 전쟁의 단면인 양색시로 비난을 받던 이모할머니와 그런 놀림으로 인해 한국말을 할 줄 알면서도 하지 않았던 아들 노먼의 사연이 그려진다. 그리고 '다가오는 것들;의 영화 속 포스터가 오해를 불러일으킨다는 하미영의 말을 떠올리며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두 사람은 이제 막 기차역에서 재회한 연인처럼 보이지만 이 재회의 목적은 나탈리가 들고 있는 라탄 바구니에 있으며 둘은 연인 관계가 아니다.(181)"
"한영진이 생각하기에 생각이란 안간힘 같은 것이었다. 어떤 생각이 든다고 그 생각을 말이나 행동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고 버텨보는 것. 말하고 싶고 하고 싶다고 바로 말하거나 하지 않고 버텨보는 것. 그는 그것을 덜 할 뿐이었고 그게 평범한 사람들이 하는 일이었다. 평범한 사람들이 매일 하는 일.(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