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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스페인은 시골에 있다 - 맛의 멋을 찾아 떠나는 유럽 유랑기
문정훈 지음, 장준우 사진 / 상상출판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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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훈 교수의 [진짜 스페인은 시골에 있다]를 읽었다. 맛깔나는 글과 장준우 셰프의 화보 같은 사진 덕에 잠깐이나마 스페인의 시골 순례를 마친 것 같은 황홀함이 밀려온다. 특히나 스페인하면 누구나 알 만한 유명한 곳이 아니라 아마도 사람들이 거의 가본 적이 없을 것만 같은 진짜 스페인 마을의 이야기를 전해주어서 그런지 스페인이 더욱 가깝게 느껴졌다. 코로나만 아니었다면 분명 읽는 동안 ‘아 나 이거 아는데, 나 이거 먹어봤는데’라는 감탄사를 수없이 외치지 않았을까하는 하나마나한 한탄을 내뱉고 있다. 스페인 대사관에서 6개월짜리 비자를 받고 나오면서 마스크는 조만간 벗지 않을까란 기대를 했었던 작년 겨울이 생각난다. 사람 사는 게 맘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막상 나 뿐만이 아니라 전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어찌할 수 없는 초난감의 상황이 닥쳐올 때, 누구를 원망하거나 탓하는 것은 얼마나 부질없고 어리석은 일인지 우리 모두가 처절히 경험하고 있다. 

계란프라이를 먹을 때 흰자부위만 슬슬 떼어 먹고 노른자부위만 남겼다가 한 숟가락에 떠 먹는 습관이 있다. 맛있어 보이고 멋져 보이는 것을 누리는 기회를 뒤로 미루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그런지 이태리에 산지 1년이 넘어서야 그토록 가보고 싶어했던 피렌체의 두오모에 올랐었다. 스페인에서 지내기 위해 오랜 시간 준비를 했다. 어쩌면 다시는 그런 기회가 오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후회나 미련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모든 계획이 완벽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방금 점원에게 받은 아이스크림을 바닥에 떨어뜨린 것처럼 황망함이 밀려왔다. 이걸 어찌해야 하지? 땅바닥에 늘어붙어 점점 흐물흐물한 액체로 변해가는 아이스크림을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것처럼, 손으로 주워서 다시 과자콘에 넣을 수도 혀를 내밀어 핥아먹을 수도 없는 그야말로 버럭 승질을 부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친절한 누군가가 어깨를 토닥이며 다시 아이스크림 매장에서 새로운 콘을 사다준다면 바닥에 떨어뜨린 실수를 아쉬워하며 언제 그랬냐는 듯이 새로운 콘을 조심스럽게 맛보겠지만, 우리 삶에서 그런 새로운 콘은 주어지지 않는다. 때로는 바닥에 떨어져 형태를 잃고 물처럼 변해버려 여러 사람의 발에 밟혀 끈적거리는 흔적을 망연히 바라봐야만 하는 때가 온다. 

우리 모두는 부단히 그 시간을 버텨오고 있다. 소중한 것을 아끼지 않고 마음대로 써버린 지난 시간에 대한 대가를 치루고 있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지만,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인고의 시간을 어떠한 벌을 받는 기간으로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대신 소중하고 아껴온 것들을 다른 누군가를 위해서 양보하는 마음이 생겨날 수 있기를, 원하는 것을 다 얻지 못해도 나 대신 누군가가 그 좋은 것을 누렸을 것이라는 기대를 바라는 시기로 생각하고 싶다. 

“기후적 요인으로 인해 아스투리아스에서는 예로부터 사과를 많이 길렀고, 사과를 발효시켜 술을 만들어 마시는 문화가 발달했다. 스페인에서는 이 술을 시드라라고 한다. 프랑스 서북부 노르망디 지역에서도 비슷한 기후적 특성을 가지고 있어 역시 사과주를 많이 생산하는데, 프랑스어로는 시드르cidre라고 부른다. 영국에서는 이를 또 사이더cider라고 부른다. 우리가 먹는 사이다랑 어떤 관련이라도 있는 것일까? 맞다. 그 사이다가 이 사이더고, 그게 또 시드르고 시드라다. 우리가 탄산음료로 마시는 사이다의 기원이다. 오래전에 유럽의 사과주 맛에 흥미를 느낀 일본 친구들이 설탕물에 약간의 향료와 탄산을 주입해 일본식 사이다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한국으로 넘어온 것이다. 실제 영국식 사이더와 프랑스식 시드르는 강한 탄산감을 자랑한다는 점에서 사이다와 유사점이 있다.(111-112)”

“피멘톤은 스페인 고춧가루다. 스페인어로 피미엔토pimiento는 피망 고추를 의미한다. 피멘톤은 피미엔토를 가루로 낸 것이다. 피미엔토를 프랑스어로 피망piment이라고 하며, 독일, 헝가리 등의 동유럽에서는 파프리카paprika라고 한다. 이것이 나중에 영어로 페퍼peper가 되었다. 스페인에서는 피미엔토 중에서 작고 매운 고추를 칠레chile라고 하고, 미국에서는 이를 칠리chili라고 하고 한다. 한국에서 피망은 초록색, 파프리카는 노란색, 주황색, 빨간색을 주로 지칭한다. 위의 어원들을 보면 우리 나름대로 괴이하게 사용하는 것이다. 참고로 작은 매운 고추 칠레와 세상에서 가장 긴국가 칠레는 어떤 연관도 없다.(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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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오늘을 그린다는 것 - 그림책 작가 이석구의 매일매일 아빠 되기
이석구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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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구 작가의 [함께 오늘을 그린다는 것]을 읽었다. 부제는 '그림책 작가 이석구의 매일매일 아빠 되기'이다. 등장인물이 그림으로 표현되어서 그런지 아빠와 딸의 모습이 너무나도 사랑스럽게 귀엽게 느껴진다. 아빠는 퉁퉁한 몸집에 거의 삭발머리에 가까운 모습이고 딸은 유쾌하고 이보다 더 자유로울 수 있을까 싶을 정도의 유연한 몸집을 가진 아가의 모습이다. 아마도 인간이 태어나 겪을 수 있는 최고의 경험은 자녀를 낳아 기르는 것이 아닐까 싶다. 지금은 자녀 출산에 대한 비관적이고 부정적인 시선을 갖고 있는 이들이 많아졌지만, 자녀를 낳고 싶지 않는 진짜 이유는 아이가 싫어서라거나 자녀양육에 대한 부담을 갖고 싶지 않아서라든가의 개인적인 이유보다는 우리가 처한 현실이 자녀를 낳은 것을 거부하도록 만드는 사회구조의 탓이 큰게 아닌가 싶다. 


아무튼 저자가 그린 아빠와 딸의 일상은 행복이 꿀처럼 뚝뚝 떨어지다 못해 넘처 흐를 것만 같아, 저절로 '부럽다, 부러워'라는 말이 터져나올 듯 싶다. 그리고 우리가 어릴 때에는 스스로 인식하지 못했지만 어른의 시각으로 바라본 어린이들의 말과 행동은 가끔씩 우리를 섬뜩하게도, 기가 차게도, 경탄하게도 만든다. 책에 나온 딸도 상상치도 못한 답변들을 내놓아 웃음을 빵 터트리게 만들고, 전혀 생각지 못했던 점을 지적해 어른들을 당황케 하기도 한다. 


특히나 만화를 보던 딸이 "너같이 약해 빠진 녀석은 필요 없다"라는 대사에 갑자기 주먹을 움켜쥐고 "왜! 청소 같은 걸 시키면 되잖아!"라고 외치는 장면은 너무나도 재미있고 아이의 순진하고 진지한 모습이 우리를 감동시킨다. 그리고 그러한 외침과 더불어 청소 밀대를 돌리고 있는 아빠가 그려진 장면은 더 큰 웃음을 선사한다. 아마도 우리는 이런 사소한 일상의 대화와 몸짓 덕분에 자녀를 낳아 키우는 고된 과정을 기꺼이 기쁘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닐까?


"외부 회의 자리에서 가방을 열었다가 딸이 등원하며 넘기고 간 곰 인형이 튀어나와 깜짝 놀랐던 일(그 친구의 이름은 '안녕곰'이었다), 밍밍한 라볶이의 맛을 조금은 즐기게 된 일(그렇지만 언제쯤 칼칼하게 먹을 수 있을까), 아주 긴 코끼리 미끄럼틀에 관심만 보이고 타지 못하는 딸 대신 혼자 느낀 스릴(으아아아아아). 딸이 아니었다면 알지 못했을 순간들이 한 장 한 장 쌓여 간다. 늘 반복되는 것 같지만 똑같지는 않은 하루. 사소하지만 아름다운 하루. 우리가 함께 그리는 하루들이다.-작가의 말 중에서(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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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7 - 동백과 한란
김진명 지음 / 이타북스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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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명 작가의 [고구려7]을 읽었다. 장장 5년 만에 7권이 나와 그 이전의 이야기가 가물가물해 처음부터 다시 읽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란 우려가 있었지만, 읽다보니 조금씩 과거의 인물들이 흐릿하게 그려졌다. 2011년 고구려 시리즈가 발간되며 처음으로 E-Book 을 다운받아 읽기 전용 테블릿이 아닌 지금 스마트폰의 반쪽 만한 것으로 어딘가 밤 비행기를 타고 가는 도중에 홀린 듯 읽었던 기억이 난다. 10년이 지난 지금 그렇게 작은 폰으로는 도저히 [고구려]를 읽을 자신이 없지만 당시에는 그 작은 폰 안에 전혀 알지 못했던 고구려의 역사가 영화처럼 그려지고 있었다. 


10부작을 예상한다고 하니 8권는 언제 또 나올지 모르겠다. 이번 7권은 소수림왕 고구부와 그의 동생인 고국양왕 고이련의 이야기이다. 고이련은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 광개토대왕 고담덕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아마도 다음 권에서는 고구려의 엄청난 활보가 예상된다. 작가의 상상력이 더해졌기 기 때문이겠지만 고구부는 정말로 신선이라고도 불릴만한 엄청난 예지와 담력과 분수를 아는 인물이다. 또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의 영토가 그 옛날 백제와 신라, 가야의 땅이기에 현재의 북한과 중국 영토에 속한 고구려의 지형에 대한 묘사와 풍속들은 마치 다른 나라의 이야기처럼 들려온다. 아마도 북한 사람들이 고구려를 읽는다면 우리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요하의 낙랑을 둘러싼 수많은 부족 국가들과 고구려의 대치 상황은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전쟁을 피하고 화친을 유도하는 정치와는 거리가 멀게 느껴졌다.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갖고 외교를 하려고 해도 당시에는 무력으로 침략하고 노략질을 일쌈는 부족들이 많았고, 언제 어느 때 침탈해 올지 모르는 경계의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고구부의 노련하고 몇 수 앞을 내나보다는 혜안도 중요하지만, 고이련의 철저한 전쟁 준비는 독자를 설득하기에 충분했다. 고이련의 기개와 충절 그리고 한결같이 고구려에 대한 충심에서 우러나오는 단련은 비록 눈 앞의 거대한 거란족을 한 번에 쓸어버릴 수 있는 대승의 기회를 놓아버리고 피가 거꾸로 솟는 심정으로 회군하는 결정을 가능케 했다. 그리고 그러한 고이련의 억울하고 참담한 선택을 종용했던 태왕 고구부는 고구려의 역사를 찾는 7년의 방랑 생활을 마치고 참으로 그답게 동생 고이련에게 태왕의 자리를 이양한다. 실로 무협지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은 전장의 모습과 더불어 고구부와 고이련의 충직하고 한결같은 모습이 너무나도 이상적으로 그려졌다. 이런 왕들만 있었다면 우리의 역사가 아마도 더욱 공부하기 수월했으리라. 

“서너 달이 지날 무렵에야 비로소 국정을 파악하기 시작한 이련은 경악했다. 고구려 조정의 신하들이란 그야말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위인들이었다. 그저 주어진 일상의 소임만을 겨우 수행할 뿐, 나라의 크고 작은 일어날 적마다 그들은 망부석처럼 이련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간혹 비루한 의견이나마 내놓는 자가 있거든 다른 자들은 그를 비난하고 깎아내리는 데에만 급급했다.(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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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년세세 - 황정은 연작소설
황정은 지음 / 창비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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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은 작가의 [연년세세]를 읽었다. 연작소설의 형식답게 '파묘', '하고 싶은 말', '무명', '다가오는 것들'의 4단편의 주인공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이순일 엄마, 한영진 큰딸, 한세진 작은 딸이 이 소설의 주인공들이다. '파묘'는 한세진의 관점에서 엄마와 함께 외증조부의 묘소를 찾아 뼈를 골라내어 화장하는 내용이다. 엄마의 외할아버지는 나중에 '무명'에서 엄마 이순일의 삶이 그려지며 배다른 형제의 자녀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전쟁 중에 홀로 살아남은 이순일을 살뜰히 보살피지 않은 살갑지 않은 인물로 그려지지만, 이순일의 동생이 옷에 불이 붙어 큰 화상을 입을 때 손으로 아기를 살리기 위해 불을 끄려다 생겨난 켈로이드 피부가 마음에 걸려서인지 외할아버지의 제사를 지내오곤 했다. 


제작년에 김승옥 문학상 수상작품집에서 '파묘'를 읽고 이순일과 한영진의 삶이 궁금했었는데, 이어지는 다른 단편들을 통해서 그들의 삶을 엿볼 수 있었다. '파묘'에 그려진 이순일의 삶은 무척 고달파보였다. 큰딸의 집에 얹혀 산다는 이유 때문인지 무능력하게 그려진 남편과 사위와 손주들의 식사와 청소까지 집안 일을 하느라 불편한 다리를 편히 놓을 세도 없이 과도한 노동을 부과한 큰딸이 매정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하고 싶은 말'의 주인공으로 등장한 한영진의 이야기는 그녀를 불효막심한 딸로 규정할 수 없도록 했다. 백화점에서 이불 판매 사원으로 일하는 큰딸은 어쩌면 엄마 이순일이 지나온 삶을 전처를 그대로 밟는 듯 그려진다. 제목이 '하고 싶은 말'이듯 한영진은 정말로 엄마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엄마의 "하고 싶은 걸 다 하고 살 수는 없다"는 말 때문이다. 막내 한만수는 호주에 가서 일하고 지내며 자유롭게 살 수 있도록 허락하지만 한영진은 엄마가 자신을 보내주지 않을 것을 안다. 맹목적인 희생을 강요당한 이순일의 삶이 지금도 지속되며 한영진의 가족이 지탱할 수 있는 원천임을 알지만, 한영진은 엄마에게 이제 그만 편히 쉬라는 말을 하지 못한다.


'무명'에서는 이순일이 어릴때 순자라고 불리던 때의 이야기를 전해준다. 피란을 떠나다 논밭에 엎드려 있다가 가족과 분리된 순일은 외할아버지와 살며 동생의 죽음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갑자가 나타난 고모내외가 순일을 데리고 가서 식모살이를 시키며 온갖 고생을 하다 집을 나와 친구 순자의 도움으로 어느 병원의 간호조무사로 일을 배우게 되지만 고모가 다시 데리고 들어가 순일의 작은 꿈은 산산조각나고 만다. 이후 고모집에서 벗어나기 위해 남편을 만나 결혼하게 되고 순일의 고달픈 삶의 면면이 비춰진다. 제목' 무명'은 순일의 첫 눈에 대한 기억이 누군가 어린 그녀를 눈더미에 던져버린 것으로 인해 솜으로 만든 옷감을 뜻하는 것으로 생각되지만, 실제 제목의 한자어인 무명(無名)은 이순일이라는 이름이 버젓이 호적에 등록되어 있음에도 그녀를 아무렇게나 순자라고 부른 뜻이 담겨져 있었다. 이순일이 그토록 고된 삶을 살아 누군가의 일상을 지탱하도록 했음에도 그녀의 이름과 삶은 무명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라는 억울함이 담겨 있다. 


마지막 단편 '다가오는 것들'은 2016년에 개봉한 동명 제목의 영화를 오마주 한듯 하다. 실제로 영화 시나리오를 쓰는 한세진은 아마도 애인으로 추정되는 하미영과의 추억을 떠올리며 업무차 뉴욕으로 떠나게 된다. 뉴욕에 머물며 이모할머니의 아들 노먼을 만나기로 약속하고 역시나 한국 전쟁의 단면인 양색시로 비난을 받던 이모할머니와 그런 놀림으로 인해 한국말을 할 줄 알면서도 하지 않았던 아들 노먼의 사연이 그려진다. 그리고 '다가오는 것들;의 영화 속 포스터가 오해를 불러일으킨다는 하미영의 말을 떠올리며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두 사람은 이제 막 기차역에서 재회한 연인처럼 보이지만 이 재회의 목적은 나탈리가 들고 있는 라탄 바구니에 있으며 둘은 연인 관계가 아니다.(181)" 


"한영진이 생각하기에 생각이란 안간힘 같은 것이었다. 어떤 생각이 든다고 그 생각을 말이나 행동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고 버텨보는 것. 말하고 싶고 하고 싶다고 바로 말하거나 하지 않고 버텨보는 것. 그는 그것을 덜 할 뿐이었고 그게 평범한 사람들이 하는 일이었다. 평범한 사람들이 매일 하는 일.(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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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주원규 지음 / 한겨레출판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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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원규 작가의 [나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를 읽었다. 소설을 읽기 전 내용을 살펴보면서 읽는 내내 참 힘든 시간이 되겠구나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그냥 외면하고 싶은 생각이 들다가도 피한다고 그러한 현실이 사라지는 것이 아님을 알기에 마주해야 하는 의무감이 들었다. 여기에 나오는 이야기가 그냥 소설 속의 마냥 꾸며낸 이야기에 불과하다면, 작가의 상상력이 너무나도 풍부하여 전혀 가능성 없는 이야기를 만들어낸 것에 불과한다며 독자의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그런데 현재 벌어지는 사건, 사고들의 전황을 살펴봤을 때, 그리고 저자가 오랜 시간 가출 청소년들에게 관심을 기울여 온 저자의 말로 추정해 볼 때 우리가 사는 세상의 이면에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란 두려움이 밀려왔다. 

그리고 그 상상의 끝이 없는 무한한 죄악의 원천은 바로 ‘돈’이라는 사실이다. 신자유주의와 무한 경쟁사회에서는 더 이상 개천에서 용난다는 말이 용납되지 않는다. 재력도 능력이고 재능이라는 사고방식에 길들여진 청소년들은 아주 어린 나이때부터 부모의 부를 과시하며 급우들과의 계층을 나눈다는 믿기 힘든 이야기를 듣기도 한다. 소수의 이야기이기를 바라지만 그 정반대의 도저히 집에 머물 수 없는 아이들은 거리에 내몰리게 된다. 

“희생자이면서 동시에 괴물로 여겨지는 친구들의 이야기를 어떤 식으로든 기록해야 했습니다.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야 했습니다. 알고 싶지 않아서 애써 외면했던, 우리가 모르고 지나쳐온 이들의 잔혹사를 살펴야 했습니다. 무섭고 끔찍하지만, 더없이 푸르고 순수하기도 한 그들의 세계를 어떻게든 마주했습니다. 해부하듯 목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야만 비로소 우리 사회가 직면한 문제의 근본을 들여다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였습니다. 이는 가족의 폭력과 학교의 방임, 성차별, 대중의 무관심이 실타래처럼 엉켜 있는 한국 사회의 폐단을 가감 없이 논의하는 시작점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작가의 말 중에서(13)”

“하지만 길 위의 아이들은 복잡했다. 예지도 마찬가지겠지만 이들은 폭력과 범법의 세계에 노출되어 있다. 때론 잔인한 처세의 규칙을 사용할 때도 있다. 그들은 피해자이기도 하지만 가해자가 되기도 한다. 피해자에서 가해자가 되는 건 시간문제다. 비열한 거리의 규칙을 몸에 익힌 아이들은 또 다른 피해자를 먹잇감으로 포획하려는 유혹에 빠져든다. 이유는 단순하다. 그것이 길 위의 아이들이 먹고사는 방식이기 때문이다.(102)”

아주 오래전 오로지 생존을 위해서 약육강식의 행태로 인간이 인간을 죽이고 능멸하는 것을 당연시하던 때에도 인간은 누군가에게 상해를 입히고 나서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않았을까? 그러나 이제는 충분한 교육을 받고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알고 있음에도 인간은 여전히 약육강식의 방법으로 약자의 생존을 보장해주지 않으려 한다. 약자의 생존을 돕는 것이 귀찮고, 나와 상관없고, 때로는 약자의 고통을 통해 행복함 을 느끼기 때문이다. 문명화된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자부하지만, 깔끔한 옷차림으로 하루 5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출퇴근 장소로 삼는 신도림역에 위치한 24시 맥도날드가 새벽녘에는 길 위의 아이들이 생존을 위해서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야생의 장소로 극변되는 것을 우리는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닐까? 그런면에서 역시나 이 소설을 읽지 않았더라면 이렇게나 무책임한 어른의 삶을 무덤덤하게 연명해나가는 것이 이렇듯 부끄럽지는 않았을텐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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