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쓴 것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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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남주 작가의 [우리가 쓴 것]을 읽었다. ‘매화 나무 아래’, ‘오기’, ‘가출’, ‘미스 김은 알고 있다’, ‘현남 오빠에게’, ‘오로라의 밤’, ‘여자아이는 자라서’, ‘첫사랑 2020’ 이렇게 8개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이미 예전에 다른 단편집에 읽었던 소설이 몇 개 있었지만, 다시 읽어보니 새롭기도 하고 예전에 읽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역시나 술술 잘 읽힌다. 그러면서도 어딘가 마음을 꽝 울리는 부분들이 있다. [82년생 김지영]을 읽었을 당시만 해도 나중에 그렇게 큰 논쟁의 화두가 될지는 전혀 몰랐다. [82년생 김지영]에 나온 재미있는 부분을 강론 시간에 전해주었을 때에 중년의 어머니들은 격하게 웃으며 화답했다. 사실 이 시대 뿐만 아니라 인류의 역사 이래로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고통받아온 이들에 대한 이야기는 [82년생 김지영] 뿐만 아니다. 이 소설이 인기를 누릴 무렵, 수신지 작가의 [며느라기]는 만화로 더욱 신랄하게 젠더 문제에 대해 비판한다. [82년생 김지영]을 읽을 때보다 [며느라기]를 읽을 때 더욱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리고 그 이후에 맞이하는 명절에는 더 이상 방바닥에 본드를 붙인 것처럼 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럼에도 ‘오기’에 나온 것처럼 [82년생 김지영]은 논쟁의 중심이 되어버렸다. 사실 아주 오랜시간이 관습처럼 지속되어 온 행위들에 대한 옳고 그름은 쉽사리 판단내릴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옳지 않은 것임에도 당연한 것으로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윤리적인 판단을 내리는데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것을 양심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비인간적인 행동을 한 사람을 보고 ‘양심에 털이 났냐?’, ‘인간의 탈을 쓰고 어떻게 그럴 수 있냐’ 라는 비난을 던지기도 한다. 사실 그렇다. 우리가 아주 이상한 교육을 받지 않은 다음에야 양심을 갖고 있는 인간이 어째서 인간답지 못한 행동을 하는 것일까? 이 당연하고도 보편적인 질문에 대해서 생각보다 아주 오래 전부터 대단한 철학자와 신학자들이 함께 고민해왔었다. 이에 대해 토마스 아퀴나스는 [진리론]이라는 책에서 양심의 양성에 대해서 말한다. 우리 모두가 양심을 갖고 태어났지만 올바른 양심이 형성되도록 교육받지 못하다면 우리는 양심에 털난 행동을 하고도 뻔뻔할 수 있다는 것이다. 

‘페미니즘’의 기원은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계급적 차별에 대한 저항을 근간으로 여성이 무산계급처럼 남성이라는 유산계급의 소유물처럼 인식된 헤게모니를 철폐하고자 시작된 것이다. 여성에게 투표권도 주지 않고, 계집아이라서 학교도 보내지 않고, 아들을 낳지 못했다고 소박을 맞고 살아온 기나긴 시간의 종지부를 내자는 당연한 목소리가 역차별이라는 맞대응을 소환해내고 처음의 의도와는 다르게 새로운 대립현상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런 첨예한 논쟁거리에 모두가 다른 생각을 갖고 각자의 색깔을 드러내는 발언을 할 수 있겠지만, 집으로 돌아간 우리는 서로 다른 성을 가진 누군가의 가족이 될 수 밖에 없다. 결국 인간이 모인 어느 공동체에서든 동성과 이성으로, 여러 세대를 걸치는 집단의 구성원으로 살아가야만 한다면 진심어린 환대만이 각 개개인의 존재의 가치를 확인할 수 있는 길이 아닐까. 

“다리에 힘이 풀렸다. 눈 위에 풀썩 주저앉은 채로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며 나는 아예 엉엉 울었다. 어른이 된 후로 내가 이렇게 얼굴을 내놓고 울었던 적이 있었나. 소리 내서 울었던 적이 있었나. 억울함과 서운함, 고통과 후회로 사무친 눈물이 아니라 맑고 개운한 눈물. 몸과 마음 속 모든 낡은 것들이 빠져나갔다. 이 순간을 위해 살았구나. 지금, 여기, 이렇게, 살아 있구나.(246)”

“사람이 할 수 없는 영역이 분명 있다. 그럼에도 할 수 있는 일은 기다리는 것, 준비하는 것, 완전히 절망해 버리지 않는 것, 실낱같은 운이 따라왔을 때 인정하고 감사하고 모두 내 노력인 듯 포장하는 않는 것. 눈물이 멈췄다.(250)”

“좋아하는 시인의 시에서 인중에 대한 구절을 읽은 적이 있다. 천사들이 배 속 아기에게 세상의 모든 지혜를 가르쳐 준 후 다 잊고 태어나라고 아기의 입술 위에 쉿, 손가락을 얹는데 그때 인중이 생긴다는 이야기. 손을 들어 인중을 더듬어 보았다. 분명 다른 세계에 다녀왔지만 기억이 없다. 하지만 내 안에 그 세계의 빛이 깃들었음을 안다.(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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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미나의 나의 첫 외국어 수업
손미나 지음 / 토네이도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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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미나 작가의 [손미나의 나의 첫 외국어 수업]을 읽었다. 부제는 ‘언어적 자유를 위한 100일 프로젝트’이다. 그동안 저자가 써온 여행기를 모두 읽고 팬이 되었기에, 다른 내용을 다루고 있지만 다국어를 사용할 줄 아는 저자가 어떻게 공부했는지 알고 싶어 읽어보게 되었다. 우리나라 사람 중에 외국어를 잘하는 사람을 부러워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분명 학창시절부터 영어에 대한 엄청난 압박을 받고 지내왔기에 외국어를 능수능란하게 잘하는 사람은 무조건 부러웠던 것 같다. 더군다나 한 가지 외국어를 잘해도 놀라운데, 서너개의 다른 외국어를 구사하는 사람을 보면 도대체 저 사람은 나랑 뭐가 다를까 라는 자괴감이 밀려오기도 했다. 작년에 전세계적으로 코로나 19 팬데믹 상황이 벌어졌을 때, 저자가 우리나라가 방역시스템에 대한 설명을 스페인의 공영방송에서 인터뷰 하는 내용이 뉴스로 보도된 적이 있었다. 우리나라의 위상을 높이 저자에 대한 자랑스러움과 동시에 그동안 저자가 남모르게 외국어를 익히느라 보냈을 오랜 시간들에 박수를 보낼 수 밖에 없었다. 

학원 다니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아서 몇 번의 경험 밖에 되지 않지만, 그 몇 번의 경험이 모두 외국어를 위한 학원이었다. 제대를 하고 자발적으로 새벽 같이 일어나서 영어 학원을 다닌 적이 있다. 그런데 두 달 정도 다니다가 회화 시간만 되면 말을 걸까봐 두려워 그만 두게 되었다. 역시나 저자가 강조하는 것처럼 말하기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어려워 하는 부분인 것 같다. 오죽하면 예능에서 자주 사용되는 말 중의 하나가 영어 울렁증일까. 그래서 그런지 저자의 책을 읽고 나니 나도 한 번 다시 도전해볼까라는 용기가 저 밑에서 조금씩 올라오는 기분이 든다. 

책 날개에는 “결국 외국어 능력자가 된 사람들의 마인드셋을 이렇게 규정한다. 
1. 외국어를 완벽하게 구사하겠다는 생각을 버린다. 
2. 외국어 공부에 필요한 연료는 폭발력이아니라 지속성임을 잊지 않는다.
3. 외국어를 배울 때 ‘듣기’와 ‘말하기’를 나중으로 미루지 않는다.
4. 외국어 능력자가 된 멋진 미래의 모습을 상상한다.
5. 슬럼프가 올 때마다 공부를 시작한 이유를 떠올린다. 

특히나 내가 공감했던 부분은 ‘피헤갈 수 없는 딜레마들’ 부분에 나온 외국어 공부에 대한 슬럼프에 대한 설명이다. “실력이 늘지 않고 제자리걸음인 느낌이다. 전과 다름없이 혹은 더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데, 어느 정도 실력이 좋아진 상태에서 제자리걸음만 하거나 심지어 후퇴하고 있는 느낌마저 들 때가 있다. 실력이 느는 것 같아 신이 날라 치면, 그 타이밍을 노렸다는 듯 인내심의 한계를 테스트 하는 일이 생긴다. 갑자기 실력이 제자리에 멈추어 선 느낌이 들고, 대개의 경우 그 답답한 느낌이 적지 않은 시간이 지속되다가 도리어 실력이 퇴보하는 것 같은 짧은 침체기가 찾아오는 것이다. 희한한 일은 바로 이 시기에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든 버티면서 공부를 지속하면 거짓말처럼 눈에 띄게 실력이 급향상된다는 것이다.(84-85)”

무릎을 탁 칠 수 밖에 없는 명쾌한 설명이다. 유학 중에 수없이 선배들에게 들었던 조언들 중에 어쩌면 가장 중요한 언급이 아니었나 싶다. 그럼에도 아무리 좋은 선생님과 원어민 친구와 교재가 있다 하더라고 결국은 꾸준히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지치지 않고 자기만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만이 또 다른 언어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저자 또한 가장 강조하고 있다. 외국어에 대한 로망이 나이가 들어도 사그러들지 않고, 작심삼일이 되어도 새로운 도전을 하는 마음만은 변하지 않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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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단어 - 생활견 키키와 반려인 진아의
임진아 지음 / 미디어창비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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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아 작가의 [오늘의 단어]를 읽었다. 제목 앞에 ‘생활견 키키와 반려인 진아의’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그리고 견과 인자 위에 방점이 찍혀 있어 키키와 저자의 관계를 더욱 강조한다.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이라는 4개의 장으로 구분하여 계절마다 저자가 중요하게 생각했던 단어들을 중심으로 짧은 만화에 몇 가지 에피소드가 이어지고, 그 단어에 관련된 저자의 에세이로 마무리짓는 형식이다. 이렇게 만화와 에세이가 반복적으로 구성된 책은 많지 않아 색다른 매력을 갖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작가의 말에 나왔듯이 저자에게 있어서 반려견 키키는 너무나 소중한 존재이고 보통은 사람이 반려견을 바라보며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째서 그런 반복된 행동을 하는지 궁금해하는데, 오히려 이 책에서는 키키가 사람의 시선으로 저자를 바라본다. 그래서 생활견 키키라는 이름과 반려인 진아라는 부제를 붙인 것 같다. 

만화에서 키키는 진아와 자연스럽게 대화도 하고 장도 보러 가고 음식도 먹고 취미생활도 즐긴다. 그리고 함께 잠들며 진아의 삶을 풍요롭게 만든다. 만화에 나온 대부분의 에피스도는 아마도 저자가 실제로 키키와 함께 살면서 겪은 일에 키키를 의인화해서 표현했을 것이다. 반려견이 키키처럼 대화가 가능하고 서로의 생각을 나눌 수 있다면 어떨까? 많은 사람들이 개를 키우며 적잖은 위로를 받는 것 같은데 실제로 반려견이 말을 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만화에 나온 것처럼 함께사는 사람들은 반려견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특히나 키키와 함께 서점을 가서 서로가 원하는 책을 고른다거나, 외출을 나가는 키키는 진아에게 뭘 사다줄까 물어보는 장면들은 왠지 모르게 포근하고 정답게 느껴졌다. 정말 그런 강아지가 있다면 나도 함께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계절에 대한 저자의 색다른 감각과 시선은 대부분 봄부터 계절이 시작된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일요일부터 시작되는 달력이 아닌 월요일부터 시작되는 달력을 반기는 사고의 전화의 불러일으킨다. 아마도 우리나라는 봄부터 새학기가 시작되고 그러다보니 많은 직장들도 새해가 될 무렵에 신입사원을 뽑게 되고, 1월이라는 새해가 반드시 출발점이어야 한다는 사고방식에 고착되어 있었던 듯 하다. 이러한 생각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고 살았는데, 로마에서 공부를 하며 10월에 학기가 시작이 되어서 처음에는 조금 혼란스러웠다. 우리나라처럼 2021학년도가 아니라 2년에 걸쳐 한 학년이 이어지니 반드시 1월이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나라처럼 4계절인 나라에서 어찌보면 가장 온화한 날씨가 지속되는 10월에 무엇인가를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은 새로운 장소와 환경에 대한 두려움에서 조금은 덜 긴장된 마음으로 다가설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려 몸과 마음이 경직된 3월이 아니라 뜨거운 여름을 견디고 결실을 맺는 계절에 새로운 것을 시작하는 것도 좋은 것 같다. 

특히나 올해 1월 초에 이사를 하면서 겪은 혹한의 추위는 꽤나 긴 후유증을 남겼다. 이사짐을 꾸리고 나르고 풀고 하느라 손등이 너무 심하게 터서 보름 이상 피딱지를 안고 견뎌야했다. 혼자 짐싸고 푸는 것도 서러워 죽겠는데 손등이 터서 피까지 나니까 짐을 다 집어던져 버리고만 싶어졌다. 왜 해마다 이 추운 겨울에 이동을 해야 하는 것인지, 좀 따뜻할 때 이동하면 안되나 라는 푸념도 터져나왔다. 갑자기 한 여름을 앞두고 왜 이런 한탄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여름부터 시작된 저자의 생각에 나도 모르게 젖어든 것 같다. 매일 매일의 일상은 충실하게 하지만 삶의 커다란 테두리는 변화무쌍한 도전을 한다면 조금 더 재미있어지지 않을까?

“주변에 소중하고 친한 사람 몇 명만 두어도, 1년간 선물을 고르며 지내게 됩니다. 봄에 태어난 사람에게는 일렁이는 설렘을, 여름에 태어난 사람에게는 활기찬 기운을, 가을에 태어난 사람에게는 잔잔한 마음을, 경ㄹ에 태어난 사람에게는 따뜻한 온도를 선사하고 싶어집니다. 가끔씩 오래 알고 지낸 사람에게는 생일과 다른 계절의 물건을 골라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다음 해가 되면 결국 계절에 맞는 선물을 고르게 됩니다. 계절에 맞춰서 그 사람을 떠올리는 게 더 자연스럽다는 생각이 느즈막이 듭니다. 일단 지금을 잘 보내자, 하루씩, 한 계절씩 잘 살자고 말하고 싶어집니다.(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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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에 살고 죽고 - 치열하고도 즐거운 번역 라이프, 개정판
권남희 지음 / 마음산책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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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남희 작가의 [번역에 살고 죽고]를 읽었다. 부제는 ‘치열하고도 즐거운 번역 라이프’이다. 불과 두 달 전에 [혼자여서 좋은 직업]을 읽고 십년 전에 출판된 [번역에 살고 죽고]를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번에 개정판이 나와서 단숨에 읽게 되었다. 역시나 권남희 작가의 책은 잘 읽힌다. 이 책이 십년 전에 쓰인 것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지금의 이야기를 전해주는 생생함이 느껴진다. [혼자여서 좋은 직업]이 번역가로서의 완숙미를 보여주었다면, [번역에 살고 죽고]는 저자가 전문 번역가가 되기까지의 여정이 솔직담백하게 그려져 있기에, 그리고 정말 번역가를 꿈꾸는 이들에게는 자상한 안내서가 될 법하기에 펄펄 튀어 오르는 활어의 기운이 느껴진다. 그럼에도 변변한 취미생활도 누리지 못한 채 치열하게 번역을 해내는 것이 과연 가능한 것인가란 의문과 더불어 저자의 무서운 인내심이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이 책에서 몇 번이 강조된 번역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실력이라는 말에 담긴 의미가 결국은 그 실력을 갖추기까지 얼마나 긴 인고의 시간을 보낸 것인지 본인 말고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새로운 서문에 딸 정하의 새로운 일상을 전해주었는데, 그것 또한 저자가 갖고 있는 독특한 매력인 것 같다. 많은 이들 앞에서 말하거나 마주하는 것이 무척 힘든 소심한 성격이라고 스스로 말하면서도, 책에서는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딸까지 그들과의 일상을 소소히 전해주는 솔직함이 많은 이들에게 큰 위로를 전해줄 것 같다. 엄마를 위로해주고 응원해주며 커가는 정하의 이야기들은 아마도 독자들이 저자에게 묻고 싶은 이야기 중의 하나일 것이다. 결국 우리를 지탱해주고 전진하게 해주는 것은 가족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저자가 좋아하는 일을 무던히도 잘 해내어 우리나라의 유명한 번역가의 위상을 갖게 된 큰 원동력은 분명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의무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무리 좋아하는 일이라도 당위와 일종의 강요가 없다면 무엇인가의 마침표를 찍기란 여간해서 쉽지가 않다. 아마도 이렇게 번역에 대한 책을 당당히 쓸 수 있는 것은 죽을만큼 힘든 시간을 보내며 가장 좋아하는 일을 해내어 생계를 이어나간 스스로에 대한 충만함 때문일 것이다. 

이 책에서는 저자가 번역을 시작할 때의 이야기도 전해주는데, 우리나라에서 일본 문학이 본격적으로 인기를 누리기 시작할 때라 그런지 아니면 대부분의 나라에서 아직 저작권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기 때문인지 판권 없이도 번역해서 책을 출판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조금 놀라웠다. 그리고 영화 ‘러브레터’의 이야기에서는 90년대 중반까지 일본 대중 문화가 수입되지 못했던 기억이 떠올라 지금 노노재팬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어둠의 경로로 영화 ‘러브레터’를 본 친구들이 극장에서 그 영화를 보지 못하는게 너무 한스러워하는 걸 몇 년 후에야 공감할 수 있었다. 이 외에도 저자가 번역한 수많은 일본 작가들의 책이 나오는데, 몇명을 빼고는 모르는 이름이 많아서 그동안 일본 문학을 많이 읽었다고 생각한 것이 순전한 나의 착각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사실 저자의 이야기와 번역에 관련된 에피소드들도 재미있지만 꽤나 유명하고 베스트 셀러였음에도 접하지 못한 좋은 작품들을 소개해주는 부분이 특히 좋았다. 이렇게 저자가 번역한 작품이 시간이 많이 흘렀음에도 새로운 독자가 생겨나는 기회가 될 것이라 생각된다. 

“검다, 까맣다, 꺼멓다, 새까맣다, 시꺼멓다, 시커멓다, 거무스름하다, 거무튀튀하다, 가무잡잡하다, 거뭇거뭇하다, 희다, 하얗다, 허옇다, 새하얗다, 희붐하다, 희뿌옇다, 허여멀건하다, 붉다, 빨갛다, 뻘겋다, 발갛다, 벌겋다, 발그스름하다, 불그죽죽하다, 푸르다, 파랗다, 퍼렇다, 새파랗다, 시퍼렇다, 푸르딩딩하다, 푸르죽죽하다, 파릇파릇하다, 파르스름하다(185)” 

타이핑 하기도 힘든 이런 단어들을 모조리 외울 정도의 노력이 있어야 뭐를 하든 해낼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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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집
손원평 지음 / 창비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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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원평 작가의 [타인의 집]을 읽었다. 저자의 첫 번째 소설집으로 ‘4월의 눈’, ‘괴물들’, ‘zip’, ‘아리아드네 정원’, ‘타인의 집’, ‘상자 속의 남자’, ‘문학이란 무엇인가’, ‘열리지 않는 책방’ 이렇게 8편이 수록되어 있다. 표지 또한 멋진 작품으로 되어 있어서 그런지 소설집의 품격이  한껏 올라가 보인다. 하지만 수록된 단편들을 읽을수록 우리가 처한 현 시대의 상황이 참으로 녹록지 않으며, 그럼에도 후회하지 않고 미련을 남기지 않고 살아가야만 한다는 자명한 사실이 나의 마음을 더욱 무겁게 만들었다. 어른이 되고 사회 생활을 하면 세상에서 벌어지는 대부분의 일들을 이해하고 알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막상 예상했던 그 나이를 훌쩍 넘겼음에도 오히려 타인을 바라보는 시각은 좁아지고 잦은 비판과 염세적인 판단으로 활짝 웃는 일이 비일상적인 사건이 되어버렸다. 

저자의 의도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여러 편의 주인공들에게 벌어지는 각자 다른 사건과 주변 인물들이 등장함에도 공통적으로 그들의 중심에는 어떤 집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내 삶이 영위될 수 있도록 근거를 마련해주는 일터나 나의 육신이 원활히 순환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입에 넣어야 하는 식도락의 만족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바로 아무 걱정없이, 아무런 눈치없이 온전히 내 한 몸을 편히 누울 수 있는 나만의 공간이 있는 집이다. 그런데 그 편안한 집을 얻는 것이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자연인이다’에서처럼 주인이 누군인지도 모를 땅에다 철저히 고립된 삶을 스스로 선택하여 움막같은 집을 짓고 산다면 모르겠지만, 도시의 인프라가 만족스럽고 어떤 위협이나 불안감 없이 안정된 삶을 취할 수 있는 내 소유의 집을 갖는 것은 어쩌면 요원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누군가 특히나 부모님의 도움 없이 자립된 삶을 살고 싶은 강렬한 자존감의 소유자라 할지라도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무상으로 받은 것에 대한 거부감을 느끼지 않도록 해주는 부모님이 나의 터전을 마련해준다면, 그 누가 쉽게 그 안락한 손길을 외면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그러한 행운을 누리는 이들은 극소수에 불과하지만 우리는 너무나도 태평하게 극소수의 이들이 누리는 안락함을 중산층의 표본이라고 내뱉는다. ‘타인의 집’의 주인공인 ‘나’는 세입자의 세입자로 쾌조씨와 계약을 맺고 화장실이 달린 안방에서 혹시나 이 안락한 계약이 영원히 지속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를 꿈꾸게 된다. 하지만 재화언니가 쿠키와 레몬청을 권하며 화장실을 함께 쓸 수 있느냐는 제안을 외면하자 싸늘한 관계가 지속된다. 설상가상으로 보일러가 고장나서 쾌조씨가 계약을 맺은 집주인이 집의 상태를 확인하러 오게 되고, 나를 비롯한 희진, 재화언니는 세입자가 아닌 것처럼 꾸미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주인공이 쓰는 방은 쾌조씨의 방으로 급변경하게 된다. 그러한 과정에서 내돈내산 미니냉장고와 그녀의 유일한 사친 스타벅스 한정판 텀블러 20개가 들어간 박스는 생활가전 버리는 곳에 놓아두게 된다. 집주인은 집을 내놓아 여러 부동산의 비딩을 즐기며 돌아가게 되고 주인공이 자신의 방을 원상태로 돌리기 위해 물건을 찾으로 내려가보니 이미 냉장고와 텀블러들이 사라져버렸다. “환하디환한 햇살이 창밖으로 보이는 음울한 뒷산과 대조를 이뤄 광휘로 가득한 쓸쓸함을 빚어낸다. 풍경과 빛과 음악, 그리고 고독한 내 존재는 완벽을 이룬다. 절망과 비관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던 때도 있었지만 어쩌면 삶이란 꽤 괜찮은 건지도…. 머릿속의 생각을 맺기도 전, 두 귀가 쫑긋 선다. 반갑지 않은 소리가 한순간 모든 걸 망쳐놓는다.(136-137)” 타인은 내 삶의 구원자일수도 있지만 이렇듯 내 삶을 망쳐놓을 수 있는 대상이기도 하다. 

“내면의 어둠은 바깥으로 발설할수록 몸집을 부풀려 결국 자신에게 비수가 되어 돌아온다는 사실을 영화는 학창 시절과 짧았던 직장생활을 통해 이미 알고 있었다.(78)”

“영화는 말없이 운전을 했다. 왜 귀에는 덮개가 없을까. 눈은 감아버리면 되고 입은 닫아버리면 되고 숨은 턱 끝에 차오를 때까지 참아버리면 그만인데 귀는 왜 이렇게 속수무책인 걸까. 왜 의지로는, 자력으로는 단 한마디로 막아낼 수가 없는 거지. 게다가 나는 지금 손으로 귀를 막을 수도 없잖아.(85)”

“내 어깨 위의 무게감이 다만 근육의 피로감이기를, 절망의 그림자가 나를 덮치지 않기를, 불행과 우울의 악취가 스며들지 않기를.(170)”

“기본적인 예의와 사회성을 갖추고 때로는 억울함을 견디며 손해 보는 느낌을 묵묵히 참아 넘기는 것. 그것이 나 같은 노동자들이 살아남기 위해 벌이는 소리 없는 투쟁이다.(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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