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소한의 선의
문유석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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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유석 작가의 [최소한의 선의]를 읽었다. [개인주의자 선언]과 [쾌락 독서]를 통해서 판사에 대한 고정관념을 확실히 무너뜨렸다면 이번 책은 본연의 전공을 맛깔나고 저자의 색깔을 확실히 입혀 어렵게만 느껴지는 법을 조금은 가깝게 느껴지도록 만들어준 것 같다. 사실 우리나라 사회에서 ‘사’자가 들어가는 직업군의 지인 한 명만 있으면 사회생활이나 여타의 상황에서 큰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부정하고 싶지 않지만 병원이든 법원이든 전화로 부탁할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다면 어떤 일이 생겨날 지 모를 때 든든한 보험을 들어 놓은 것처럼 안심이 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특히나 요즘처럼 법을 처리하는 이들에 대한 신뢰가 바닥에 떨어지고 당연히 과거보다 훨씬 더 나아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돈 있고 힘 있는 이들이 법을 더 잘 이용한다는 불신은 좀처럼 회복되기 힘든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럼에도 법을 전공하거나 법 관련 일에 종사하지 않는 이들은 법에 대해서 잘 모른다. 막상 법이 거론되는 사건에 휘말리기 전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법 없이도 살 정도의 선량함을 갖고 있기 때문일까? 


사실 법이란 어떤 윤리적인 인간의 행동에 대한 기준에서부터 출발하여 저자가 서문에서 말한 것처럼 “법이란 사람들 사이의 넘지 말아야 할 ‘최소한의 선’인 동시에, 사람들이 서로에게 베풀어야 할 ‘최소한의 선’(9)”을 뜻한다. 최대한이 아니라 최소한 이것만큼은 어기거나 마음대로 해서는 안된다는 사회적 약속이기도 하다. 각양각색의 수천만명의 사람들이 서로가 다른 성향을 갖고 있음에도 어느 정도 수긍이 가능하도록 정한 약속이기에 때로는 불만과 수용이 힘들어도 받아들여야만 하는 약속이다. 하지만 막상 그 애매모호하게 해석될 가능성이 농후한 어떤 법 조문이 나의 상황에 적용될 경우에 ‘최소한의 선’이라는 이름에도 받아들이기 힘들 때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법을 잘 아는 변호사를 통해서 우리의 억울함을 해소해달라고 청하거나 받을 벌을 조금이라도 상쇄시키기 위해 비싼 돈을 지불하기도 한다. 


저자의 책을 읽으면서 세세한 법률 조항이 아닌 헌법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다. 특히나 헌법에 보장된 인간의 존엄함이라는 정의가 그냥 저절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전혀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겪지 못했던 시대의 수많은 사람들이 피와 땀을 흘려 만들어낸 것이라는 사실에 내가 공짜로 이 삶을 영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때아닌 감사의 마음이 들었다. 헌법에 보장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노예제와 노비제가 폐지되고 성평등에 대한 당연한 진리가 우리 사회의 문화 속에 정착되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어떤 한 사람의 성격이 어떻든간에, 재물을 얼마나 가졌든간에, 출생성분이 어떻든간에 인간은 모두가 동일한 존엄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 엄청나게 중요하고 당연한 것임에도 존엄함을 지키고 유지하기 위해 우리는 목숨을 건다. 나와 동일한 존엄함을 가진 누군가가 내 것을 빼앗아 갈까봐 말이다. 그 존엄함을 인정하고 누리기 위해 우리가 가진 자유를 언제든 마음껏 누릴 수 있을 것이라는 착각이 타인의 자유를 제약하고 ‘최소한의 선’을 누릴 공공질서를 위협한다면 나의 자유에는 제동이 걸릴 수 밖에 없다는 단순한 논리에도 많은 이들이 동의하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과연 이 시대에 정의라는 것이 가능한 것인가? 정의라는 것도 권력을 갖고 있는 이들이 해석하기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닌가? 라는 염세적인 시선이 때로는 극단적 행동도 불사하게 만든다. 


우리가 속한 어느 단체나 공동체에도 자신의 개인적인 시선 속에서 불의함의 존재한다. 최종결정권자의 선택을 이해할 수 없고 그런 불의한 선택에 동조하는 이들의 시류에 또한 분노가 넘쳐흐른다. 그럼에도 끈임없이 비판하고 질시하고 화를 내는 감정이 지속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저자의 글 속에서 어느 정도 수긍이 되는 답을 얻었다. “인간은 태생적으로 ‘관종’이다. 관심받고 싶어하고, 남들에게 관심도 많다. 인간은 탄수화물 중독 이상으로 인간 중독이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에게 탄수화물보다도 인간이 더 소중한 자원이기 때문이다.(124)” 


우리가 인간 중독으로 어차피 이 사회에 함께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면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마음은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인간의 존엄성이란 전쟁이나 대량학살, 난민촌에서나 비로서 찾게 되는 가치가 아니다. 전염병과 싸우는 게 아무리 중요하더라도 성소수자가 주로 드나드는 클럽에 누가 어느 날 들렀는지, 누가 언제 어느 모텔에 들렀는지까지 알 수 있도록 개개인의 동선이 공개되는 상황이 아무 문제 없는지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는 마음. 중학교에 다니는 여학생이 생리대 살 돈이 없어 운동화 깔창을 대신 사용하고 있다는 일을 알게 되고는 앞뒤 따질 겨를도 없이 ‘아유 어째! 그래선 안 되지!’하는 소리가 터져나오게 되는 마음. 학생들에게 점심 한끼라도 무료로 먹을 수 있게 해주되, 이왕이면 사춘기 아이들의 자존감까지 배려해서 누구든 돈을 내고 먹고 누구든 무료로 먹는지 알 수 없도록 제도를 만들어보자는 마음. 이런 마음들이 인간을 존엄하게 대하는 사회를 만든다.(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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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여 오라 - 제9회 제주 4·3평화문학상 수상작
이성아 지음 / 은행나무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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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아 작가의 [밤이여 오라]를 읽었다. 9회 제주 4.3평화문학상 수상작이다. 다뉴브, 블타바, 도나우 이름은 다른지만 모두 같은 강을 가리킨다. 같은 강줄기가 흘러 서로 다른 언어를 가진 민족들이 부른 이름이 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프라하의 카를교 위를 걸으며 이 강 이름이 블타바 라는 말을 들었을 때 아재 개그처럼 ‘불타봐’라는 말과 비슷하다고 웃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부다페스트의 국회의사당 앞에서 흐르는 강의 이름이 다뉴브이고 블타바와 같은 강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에는 ‘아 정말 유럽은 큰 대륙으로 다 연결되어 있구나’라는 직관적인 깨달음이 다가왔던 적이 있었다. 지금은 아니지만 불과 십여년 전까지만 해도 서유럽의 상당수의 사람들은 아시아의 한국이라는 나라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저 남과 북이 분단된 나라라는 사실과 재미삼아 south or north? 농짓거리나 할 줄 알았지. 그런데 생각해보니 나 또한 마찬가지로 발칸 반도의 나라들을 상세히 알지 못했다. 이 책에 나온 인종청소라 칭하는 ‘스레브레니차 집단학살’이 1995년에 일어났다고 하는데, 당시에 그런 뉴스를 본 기억이 전혀 없는 걸 보니 누굴 욕할 처지가 아닌듯 싶다.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몬테네그로 여전히 이들 나라가 어디에 붙어 있는지 지도를 찾아보고서야 알게 되니 나와 동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이 어떤 비극적인 일을 겪었는지 모르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까? 아님 부끄러운 일일까? 


이 소설의 주인공 변이숙에서 조한나라는 번역가로 활동하는 주인공은 마르코라는 사람의 책을 번역한 것이 계기가 되어 그의 집에서 머물며 발칸 반도를 여행하게 된다. 마르코가 알려준 앞서 언급한 인종청소가 벌어진 지역들을 방문하며 한나는 자신과 마르부르크에서 만나 사랑했던 기표를 떠올리게 된다. 한나의 고향은 제주였지만 소설에서 자세히 언급되지 않지만 아마도 한나의 어머니의 아버지가 빨갱이로 낙인이 찍혀 어쩔 수 없이 고향을 떠난 것으로 보인다. 광복 이후 수많은 제주도민들이 미군정의 허락과 서북청년단에 의해 집단학살을 당하고 간신히 살아남은 사람들 상당수도 내륙의 감옥에서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한나의 슬픈 역사는 서역 반대편에 마르코의 삶에서 재생되고 한나와 기표가 안기부에 의해 간첩으로 조작되는 사건은 마르코와 나쟈가 모두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용서를 청하지 않는 가해자의 쓸모없는 유산으로 인해 갈등을 빚는 모습과 오버랩된다. 


이런 끔찍한 일들이 소설 속에서 그려낸 망상이 아니라 불과 얼마전에 일어난 일이었다는 사실에 또 한 번 놀라지만, 사실 더 놀라운 사실은 지금 이 세상 어딘가에서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군부 쿠데타로 고통받고 있는 미얀마는 언젠가 사람들의 마음에 비수를 꽂게 될 이야기를 전해줄 지 모른다. 그럼에도 아무것도 할 수 없이 그저 간간히 들려오는 소식만 들어야 하는 현실은 사뭇 인간이란 무엇인지? 결국 나는 무엇 때문에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한 1차원적인 철학적 명제로 소급된다. 


“가늘게 숨소리를 내는 마르코 곁에서 세상은 고요했다. 테러는 이곳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나쟈만 아니었다면, 마르코도 나도 파리의 테러 뉴스를 보면서 아침을 먹었을 것이다. 누군가 안타까운 희생이 있었구나, 나는 거기 없으니 괜찮아. 값싼 동정과 연민을 보낸 후 각자의 일상을 살아갔을 것이다. 

사라예보에서도 그랬다고 했다. 

TV뉴스에서 세르비아군이 부코바르를 침략했다는 보도가 흘러나왔을 때, 안락한 자신의 거실에서 그걸 보고 있던 사라예보의 평범한 시민들 대다수는, 아, 정말 끔찍한 일이야, 하고 채널을 돌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예보는 그보다 더욱 참혹한 살육의 현장으로 변했다. 

나는 한동안 논란이 되었던 사진 한 장을 기억했다. 

밤하늘에 폭죽이 터지듯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고, 사람들이 언덕 위에 비치 의자 같은 걸 내놓고 앉아서 그걸 구경하고 있었다. 불꽃이 얼마나 뜨겁게 이글거리는지 캔맥주를 마시며 웃고 있는 사람들 얼굴이 번지르르했다. 그건 시리아에 포탄을 퍼붓는 장면이었고, 구경하는 이들은 이스라엘 사람이었다. SNS를 돌아다니는 사진에 붙여진 제목은 ‘나는 악마를 보았다’였다. 그러나 의문이 들었다. 과연 그들만이 악마일까?(190-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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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부들
치고지에 오비오마 지음, 강동혁 옮김 / 은행나무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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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고지에 오비오마의 [어부들]을 읽었다. 사놓은지 한 참이 지났고 심지어 비닐포장도 뜯지 않은 채 꽂혀 있었는데 갑자기 [어부들]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벽돌책은 아니더라도 촘촘한 줄간격과 글자 크기에 꽤나 장구한 이야기와 스토리에 몰입하기에 힘든 장황한 묘사가 잔뜩 있는 것은 아닐까 란 약간의 거부감이 들긴 했지만 몇 페이지 넘기지 않아 곧 빠져들게 되었다. 저자는 지금은 미국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지만 나이지리아에서 태어났고 이 소설 또한 나이지리아의 아쿠레라는 지역을 배경으로 한다. 저자의 이름처럼 등장 인물들의 이름도 몹시 낯설지만 한편으로는 반복된 적응 때문인지 정겨움마져 느껴지곤 한다. 


사실 이야기의 큰 테두리는 그렇게 거창하지 않다. [어부들]이라는 제목 때문에 어업에 관련된 이야기인가 싶지만, 그저 아쿠레 마을의 어느 집에 사는 4명의 소년들이 그 마을의 미친 사람인 아불루의 광기어린 예언에 휩싸이며 일어나는 사건이 전부이다. 화자인 ‘나’는 벤저민이란 이름으로 벤이라 불린다. 벤에게는 이켄나, 보자, 아벰베의 3명의 형과 데이비드, 은켐 이렇게 두 명의 동생이 있다. 사건이 일어나는 당시의 벤은 12살 밖에 되지 않은 앳된 소년이다. 1990년대의 나이지리아라는 나라의 정치적, 시대적 상황도 저변에 깔려 있어 아프리카 대부분 나라에서 해소되지 않은 군부독재와 부정부패에 대한 불만과 불안정한 치한의 상황도 엿볼수 있었다. 벤의 아버지는 나이지리아 중앙은행의 직원이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다른 곳으로 전근 발령을 받게 된다. 이야기의 화자인 벤은 아버지가 떠난 후 그 이전과 같은 삶으로 돌아갈 수 없게되었다는 의미 심장한 말을 남긴다. 


십대의 소년들이 다 그렇듯이 이켄나, 보자, 아벰베, 벤은 여러가지 놀이를 즐기다 아쿠레 마을을 관통하는 오미알라강에서 낚시를 하게된다. 조그만한 물고기를 잡는 것에 재미를 들린 소년들은 무려 3주 동안이나 부모님 몰래 낚시를 다니게 된다. 하지만 결국 어머니에게 들킨 소년들은 집에 들린 아버지에게 심한 체벌인 채찍질을 당하게 된다. 여기서 아쿠레 마을에서 오미알라강은 저주받은 곳으로 여겨지고 그곳에 가까이 하지 말라는 터부가 있었다. 검색해보니 나이지리아는 이슬람교가 50%, 그리스도교가 40%인 것으로 소설에서도 벤의 가족들은 모두 교회에 열심히 다니고 있었고, 목사의 권위가 상당한 것으로 나온다. 아프리카 대부분의 나라가 유럽 제국주의 국가 시기에 식민지였기에 영국의 식민지였던 나이지리아에는 당연히 성공회의 선교가 대단하지 않았을까란 생각이 든다. 


이켄나와 그의 동생들이 낚시를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광인 아불루를 마주치게 된다. 그때 아불루는 분명 아무소리나 지껄인 것이겠지만, 아켄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듣고 이켄나는 그가 한 말들에 몹시 예민해지게 된다. 당시 나이지리아 사회가 교회를 다니며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기도를 했음에도 상당히 토속 신앙적인 믿음이 강하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켄나는 아불루가 지껄인 말들에 휩싸여 사춘기 소년 특유의 반항적인 태도로 일관하게 된다. 함께 방을 쓰며 단짝같았던 동생 보자를 무시하고 어머니에게 대들며 아불루의 예언에 심취하게 된다. 이후 보자와 아벰베 그리고 벤에게 펼쳐진 일은 그야말로 마치 늪에 빠지는 것처럼 불운의 천조각이 엉겨 계속해서 서로를 끌어당기는 결과를 낳게 했다. 


한 사람의 인생이, 한 가족의 운명이 정신이 온전치 못한 사람이 내뱉은 아무말에 휩쓸려 망신창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지만, 어쩌면 우리의 인생이 이렇게 별로 대수롭지 않은 이들로 시작된 것이 대부분이 아닌가 싶다. 사소한 말과 행동이 누군가의 마음 속에 꽈리를 틀고 누워 아주 조금씩 자라나 언젠가는 서슬퍼런 칼날로 누군가의 목을 베어 반드시 피를 보고야 말겠다는 분노를 자아내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특히나 새로운 쳅터가 시작될 때 동물들의 이름을 붙이며 이야기의 서막이 펼쳐지는 비유 부분은 저자가 가진 풍요로운 자연에 대한 재산이 아닌가 싶다. 


“예전에 나는 두려움이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으면 그 사람을 약화시킨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형이 그랬다. 두려움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으면서 수많은 것 -그의 평화, 행복, 인간관계, 건강 심지어 신앙까지 강탈해 갔으니까.(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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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밥 먹여준다 - '안나의 집' 김하종 신부의 첫 고백
김하종 지음 / 마음산책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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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하종 신부님의 [사랑이 밥 먹여준다]를 읽었다. 부제는 “‘안나의 집’ 김하종 신부의 첫 고백”이다. 이제는 귀화하여 한국인이 된 신부님의 원래 이름은 Vincenzo Bordo 이다. 빈센조, 올초 인기리에 방영된 드라마 제목이다. 이탈리아에서 빈센조는 드문 이름이 아니기에 우연의 일치이기도 하겠지만, 드라마에 나온 빈센조는 멋진 슈트를 차려입고 화려한 액션으로 악의 무리를 소탕하는 매력적인 인물이었다면, 또 다른 빈센조 하느님의 종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김하종 신부님은 사제복 대신에 앞치마를 두르고 매일 매일 또 하나의 생명을 구하고 있다. 


최근에 밀라노에 스타벅스가 들어왔다고 하던데, 이탈리아 사람들의 커피에 대한 사랑과 자부심은 대단해서 아마도 로마 이하의 남부 지방에 스타벅스와 같은 프렌차이즈 카페가 들어서기는 거의 불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파스타와 피자의 나라에서도 맥도날드는 꽤나 대중적이다. 역시나 아이들의 입맛은 전세계 다 통용되는 것 같다. 어느 날 로마에서 맥도날드보다는 조금 더 고급진 버거킹에 들어가서 햄버거를 주문하고 있었다. 분명 내 앞에도 옆에도 여러 명이 줄서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순식간에 그 사람들이 갑자기 사라졌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주위를 돌아보려는 찰나 갑자기 욕지기가 밀려들었다. 주문대 앞에는 나와 사람들을 갑자기 사라지게 만든 노숙인 한 명이 서 있었다. 구토를 유발시키는 냄새의 원인을 알게 된 나는 앞뒤 볼 것 없이 문 밖으로 뛰쳐나왔다. 사람에게서 그런 끔찍한 악취가 날 수 있다라는 사실에 너무나도 깜짝 놀랐다. 


김하종 신부님처럼 하루 한끼가 하루 식사의 전부인 이들일 위하여 매일 800여명의 식사를 준비하는 일은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런데 책을 읽는 내내 몇번이나 울컥하게 만든 것은 바로 신부님이 노숙자들을 대하는 태도와 마음가짐이었다. 


“그런데 빠뜨릴 수 없는 고백을 해야겠다. 열악한 시설과 언제나 부족했던 쌀과 음식도 문제였지만 나 자신도 문제여다. 안나의 집에서 봉사하는 동안 이상한 냄새를 맡은 적이 있다. 강하고 역겨운 냄새였다. 금세 냄새 나는 지점을 알 것 같았다. 길거리에서 구걸하며 하루를 보내는 할아버지에게서 나는 냄새였다. 나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친절하게 말했다. 

<옷이 조금 더러운 것 같은데 마침 저한테 새 옷이 한 벌 들어왔어요. 화장실 가서 목욕하시고 깨끗한 옷 입으시면 어떠실까요?>

할아버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나를 따라왔다. 옷 벗는 것을 도와주는 순간 악취가 심해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바지 벗는 것을 도와주다가 깊은 상처를 발견했다. 상처에는 구더기가 있었다. 보는 순간 토할 것 같았다. 더 이상 견디기 힘들어 잠깐 밖에 나가 맑은 공기를 마시고 돌아왔다. 하지만 살 썩는 냄새와 뼈가 보일 정도로 깊이 팬 상처를 보고 더 이상 참기가 힘들어 결국 토하고 말았다. 그러고 나서 근처에 사는 도움을 줄 만한 간호사에게 전화를 했다.(139-140)”


어떻게 마음수양을 해야만 그들을 보듬으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평화와 기쁨이 내 몸에 스며드는 것 같았다(115)”라는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일까? 빵이나 국수가 아닌 밥을 고집하는 이유는 안나의 집에 밥을 먹으로 오는 이들이 밥을 주는 이들과 전혀 다르지 않은 똑같이 존중받아 마땅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이라고 하니, 그 어떤 극도의 장애물도 배고픈 이들에 대한 신부님의 사랑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노숙인들이 홈리스(Homeless)가 아니라 루트리스(Rootless)라고 표현한 이유는 술에 취해 거리에서 죽음을 맞이한 분을 떠올리는 글귀에서 찾으며 숙연함이 가시지를 않는다. 


“신부님, 지금보다 더 망가질 수 있겠습니까. 살거나 죽거나 그게 그거예요. 죽으면 오히려 저한테는 해방이에요. 신부님은 고독한 게 뭔지 잘 아시죠. 모든 사람들에게 거부당하는 것, 사랑받지 못하는 것. 저같이 실패한 인생에게는 친구라고는 술 한 병뿐이에요. 이 술 한 병은 몸이라도 따뜻하게 해주잖아요.(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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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밤의 애도 - 고인을 온전히 품고 내 삶으로 돌아가기 위한 자살 사별자들의 여섯 번의 애도 모임
고선규 지음 / 한겨레출판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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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선규 님의 [여섯 밤의 애도]를 읽었다. 포털사이트의 연예면 기사는 종종 누구누구의 몇주기라는 기사를 내보내곤 한다. 병으로 세상을 떠난 이들도 있지만 유독 스스로 생을 마감한 이들의 이름이 더욱 눈에 띄곤 한다. 그들의 얼굴은 오래전 젊을 때의 사진이 아님에도 너무나도 젊고 아름답기 때문이다. 사는 게 힘들다는 건 나이가 들수록 더욱 공감하게 되는 말이 아닌가 싶다. 때로는 반복되는 아니 그보다 더 힘든 일들이 생겨남에도 우리는 쉽게 생을 포기하지 않는다. 누군가 나에게 지금의 생을 살아가야만 한다고 매번 명령을 내리는 것이 아님에도 우리는 모두 참 열심히 살고자 노력한다. 좀 더 나은 나를 만나고 싶어한다. 이런 보편적이고 자연스러운 과정이 한 순간에 무너지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자살한 이들에 대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갖는 가장 큰 의문은 바로 왜? 라는 질문이 아닐까 싶다. 


주변의 가까운 친족이나 친구 중에 누군가가 자살을 선택하여 사별자가 된 경험이 없다 하더라도, 저서에 나온 것처럼 우리는 사회적으로 알려진 명사의 자살로 인해 적지 않은 충격을 받고 사별자가 된 듯한 느낌에 빠져들곤 한다. 특히나 자신이 무척 좋아했던 연예인이 그러한 선택을 했다면 팬으로서의 심리적 충격과 혼란을 상상 이상일 것이다. 자살한 이들에 대해서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자살할 용기가 있다면 이 세상의 그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라거나 '남겨질 사람들을 생각했다면 그런 이기적인 선택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말들은 우리가 얼마나 못난 사람이 될 수 있는지 스스로 증명하는 말이다. 그리고 자살 사별자를 위로하는 전형적인 말 중의 하나인 '당신의 잘못이 아닙니다'라는 말 또한 당사자에게는 별다른 위로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혈연관계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생각보다 부모와 형제들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한 집에서 같이 살지만 그가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만일 지금 힘들어하고 있다면 도대체 그가 얼마나 힘든지, 그 힘듬의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자세히 알기 위한 시도를 깊이있게 기울이지 않는다. 때로는 가족임에도, 아니 가족이니까 더 거친말로 위로 아닌 조언을 건네기도 하고 걱정이 되기는 하지만 잘 견뎌낼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갖고 지나치기도 한다. 


자살예방을 위한 캠페인에 자주 등장하는 '자살 경고신호'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말을 듣곤 한다. 주변에 자살할 위험의 신호를 보내는 사람에게 도움을 줘야 한다는 뜻이 담겨져 있지만, 실제 자살 사별자들은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면 자살한 가족들이 경고신호를 보냈음에도 그것을 눈치 채지 못한 자신들을 자책하게 된다. 그리고 어떤 누구도 자신의 가족이나 친구가 그렇게 생을 마감할 것이라고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행여 어떤 이들은 우리가 스스로 세상에 태어날 권리와 자유가 없었지만 죽음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냐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태어남과 동시에 죽는 날까지 끊임없이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존재이다. 그 관계성은 우리는 살아숨쉬게 만들고 나의 삶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해주는 원천이라고 할 수 있다. [여섯 밤의 애도]에 나온 자살 사별자들이 자조 모임에 나온 대화의 내용을 보면 사별자들의 느끼고 경험하는 고통이 얼마나 큰지 엿볼 수 있기에 죽음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은 아니다. 


"<어떤 상태가 되어야 제가 괜찮은 건가요?>라고 내담자가 질문한 적이 있었다. 상담을 시작할 때 들었던 '이 고통이 언제 끝나나요?'라는 질문은 시간이 흘러 이렇게 변한다. 괜찮은 상태라는 것은 사별자마다 조금씩 다르겠지만 애도에 관한 여러 이론에서 공통적으로 말하는 것이 있다. 사별 경험을 사별자 자신이 겪었던 삶의 사건으로 받아들이고 거기에 어떤 윤색도 하지 않으며 고인을 기억하고 말하는 것이 여전히 슬프지만 고통스럽지 않은 상태,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사별자가 자신의 삶을 다시 사랑하고 미래를 꿈꿀 수 있는 상태 말이다. 이런 상태는 물리적 시간이 흐른다고 그냥 도착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고인에 대해, 고인과 자신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고 느낀 것을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해야 힘겹게 도달할 수 있는 목표다.(147-148)" 


메리골드: '꼭 오고야 말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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