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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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의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을 읽었다. 제목부터 범상치 않은, 그동안 하루키의 소설을 거의 다 읽었음에도 이번 작품은 쉽지 않았다. 그리고 분권되지 않은 상태로 거의 벽돌책에 가까운 분량 또한 만만치 않았다. 어떤 사건의 흐름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야기보다 의식과 무의식을 넘나드는 때로는 의식과 마음의 거리를 인식하게만드는 이름이 없는 주인공의 서사를 따라가기가 쉽지 않았다. 어쩌면 하루키의 작품이 아니었다면 벌써 던져 버렸을지도 모를 감당하기 어려운 소설의 구조를 인내롭게 따라가보기로 했다. 하루키 작품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작기 후기에 나온 내용을 보니 이 작품의 첫 시작과 마무리에 무려 40년이라는 긴 터울이 있었고, 구체적으로 작품이 쓰여진 시기에 코로나 바이러스로 자발적인 감금이 지속된 시기인 것을 생각해보면, 이 암울한 실재가 현실과 비현실을 나누고, 주인공과 그의 그림자가가 대화를 나누는 부분과 결국 그림자를 살려 그림자가 주인공의 삶을 대체하는 역할을 충실히 해내는 상상에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감히 예상해본다. 


이 세상 어딘가에 특별한 존재만이 들어갈 수 있는 빈틈이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두터운 벽을 지키는 문지기가 있는 또 다른 곳이 존재한다는 설정. 그리고 그 도시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자신의 그림자를 떼어내야만 하고 자신에게서 떼어진 그림자는 얼마 되지 않아 소멸되고 그림자가 없어진 존재는 다시는 본래의 세상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설정. 그림자에게 인격적인 지위를 주고 본체로부터 떨어져 나갈 수 있지만 소설에 나온 것처럼 주인공을 대신해 주인공이 원래 있던 세상에서 그 대리자로서의 역할을 충실해 해 나갈 수 있다는 점은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에 나온 것처럼 우리가 속한 세계에서 그대로 믿고 있는 진실들이 때로는 우리를 둘러싼 바깥에서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모티브로 삼지 않았나 싶다. 


주인공이 열일곱 살때에 첫사랑이었던 소녀와 함께 만들어낸 가공의 도시. 소녀는 그렇게 주인공에게 첫사랑의 애틋함을 남기고 연락도 없이 사라지고 만다. 소녀를 잊지 못하는 주인공은 아주 오랜시간 타인과의 내적인 교감을 이루지 못하고 홀로 고독하게 살아가다가 소녀와 함께 만들었던 도시에 가게 된다. 그곳에서 주인공은 여전히 열여섯살인 소녀를 만나게 되고, 소녀는 소년과 만날 때 말했던 것처럼 그 도시에서는 주인공을 기억하지 못한다. 주인공은 소녀를 만나 도서관에서 오래된 꿈을 읽는 작업을 수행하게 된다. 시계탑에 바늘이 없는 도시에서는 계절의 변화는 있지만 시간의 흐름은 의미가 없다. 그곳에서는 시간이 멈춰있기에 본래 시간의 흐름으로 생겨나는 것들에도 의미를 둘 수 없게 된다. 주인공은 오래된 꿈을 읽어 정체되어 있던 무언가를 풀어 소멸될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 

마치 꿈 속 어딘가에 있을 것만 같은 수많은 사람들의 무의식 속에 일어난 일들을 더 이상 얽매여 있지 않도록 자유를 주는 것만 같다. 그 도시에서 오래된 꿈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은 주인공이 유일했는데, 주인공은 그림자가 소멸되어가는 과정 속에서 그림자를 본래 자신이 있던 세상에 보내기 위한 선택을 한다. 


주인공은 그림자와 함께 문지기 몰래 그 도시에서 도망가려고 했지만 그림자만 보내고 자신은 남기로 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면에서 깨어난 주인공은 자신이 원래 있던 현실 세계로 돌아왔음을 알게 되고, 그동안 일해온 직장을 그만두고 그 도시에서 오래된 꿈을 읽었던 것처럼 현실 세계의 도서관에 새로운 일자리를 구하게 된다. 소설의 말미에서 주인공의 업무를 대신할 수 있게 된 옐로 서브마린 파카를 입은 소년과의 대화를 통해서 현실 세계를 돌아간 것이 주인공이 아니라 주인공의 그림자임이 드러나게 되는데, 그 이전에 도서관장으로 일하며 펼쳐지는 이야기에서는 그런 기미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벽 안의 도시에 있는 주인공 또한 바깥세계에서 자신의 그림자가 대역을 하고 있다는 것을 소년과의 대화를 통해서 알게 된다. 하지만 주인공은 자신이 본체인지, 그림자가 본체인지 서로가 역할을 바꾼 것인지 의아해한다.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형이상학적인 주제를 논하고 있기에 이야기를 흐름을 따라가는 것도 쉽지 않았지만 하루키 특유의 인간 내면에 대한 집요한 통찰은 어느 사람이든 인생을 쉽게 얏잡아보며 막사는 삶을 선택하지 않는다는 점일 것이다. 우리는 타인에 대해서 특히나 타인의 선택과 인생에 대해서 너무나도 쉽게 폄하하며 단정짓곤 하지만 아무 생각 없어 보이는 그 타인의 삶도 결코 그렇게 막나갈리 없다는 것이다. 누구나 내면의 고독함과 어려움을 갖고 있기에 그것을 함께 나눌 이가 필요하지만 마치 일체를 이루는 것처럼 완벽한 분업이 가능한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운이 좋아서 그런 대상을 일찌감치 만난 아주 소수의 사람들은 마치 자신의 뛰어난 능력과 재능 때문에 그런 기회를 얻었다고 자신한다. 옐로 서브마린 파카를 입은 소년은 바깥세계에서는 서번트 증후군을 앓는 소년으로 도서관의 어머어마한 양의 책을 읽으며 그 내용을 모두 기억하고 있지만, 가장 가까운 가족과의 소통도 원활하지 않다. 그 소년과 가족을 지켜본 사람들은 그 소년이 가족들과 소통이 잘 되지 않고 오히려 도서관장이었던 고야스 씨와 잘 통하는 것 같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그 소년이 벽 안의 도시로 사라지자 주인공이 만난 소년의 아버지가 해왔던 고민을 알게 된다. 그리고 바깥세계에서 불완전해보였던 그 소년은 주인공의 양쪽 귓볼을 강하게 깨물어 주인공과 벽 안의 도시에 일체가 되고 주인공을 대신해 오래된 꿈을 읽는 역할을 능수능란하게 해낸다. 


바깥세계에서는 필담과 간단한 말 밖에 주고받을 수 없었던 소년이 벽 안의 도시에서는 주인공의 내면 가장 깊숙한 곳에서 자유로운 대화를 나누고 오래된 꿈을 해석하는 데 완전하지 못했던 주인공과는 다르게 수월하게 꿈을 읽는다. 현실과 비현실이 경계를 나누어 하나의 문으로만 출입이 가능한 그 불확실한 벽에 가려진 도시에서는 바깥세계에서의 판단과 기준이 모두 허물어진다. 주인공은 그곳에서 시간이 멈춰진 첫사랑 소녀를 만나게 되고 오래된 꿈을 읽는 작업이 끝나면 그녀를 집 앞까지 데려다주며 바깥세상에서 공허한 삶을 살아온 시간들을 위로받는다. 그림자가 다시 하나가 되어 바깥세상으로 돌아가자는 말에 주인공은 그럴 수 없다고 말한 것 또한 자신의 그림자를 잃어버리는 것보다 바깥세상에서 겪었던 의미를 찾을 수 없는 고독의 시간이 더 두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높은 벽돌 벽에 둘러싸인 도시에서는 특별한 자격을 얻는 것과 현실세계에서는 그 수많은 톱니바퀴 중의 하나일 뿐이라는 사실 사이의 간극이 주인공의 선택을 응원하며 동조하게 만든다. 그럼에도 마치 뭔가 꺼림칙한 게 남은 것처럼 언젠가는 주인공이 있던 자리에 돌아가야 하는 것은 아닐까 란 생각이 소설이 끝나는 순간까지도 멈추지 않았다. 결국 자신을 대체할 능력을 가진 소년과의 마지막 만남에서 주인공은 바깥세계로 돌아갈 것을 다짐하게 되고 촛불을 단숨에 불어 끔으로서 일장춘몽 같았던 오래된 꿈을 읽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자로서의 역할을 마감한다. 


어쩌면 하루키가 이 소설을 통해서 말하고 싶었던 주제 중의 하나는 유령 혹은 영혼이 되어 주인공과 마주한 여정을 통해서 비현실과는 다르게 현실에서는 비루한 하루 하루를 보낸다 하더라도 분명 충분한 의미가 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 아닐까 싶다. 

“고야스 씨는 한때 자신이라는 존재의 의미를 잘 파악하지 못해 고뇌했지만 이제 그런 건 아무려나 상관없었다. 부모에게서 한 덩어리의 정보를 물려받아, 자기 나름대로 약간의 수정과 가필을 하여 다시 자기 아이에게 물려준다 - 결국 자신은 단순한 일개 통과점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끝없이 이어지는 긴 쇠사슬의 고리 하나일 뿐이다. 그걸로 충분하지 않은가. 설령 인생에서 의미 있는 일, 널리 회자될 만한 일을 이뤄내지 못한다 한들 뭐 어떻단 말인가? 자신은 이렇게 어떤 가능성을 -그거 가능성일 뿐이라 해도- 아이에게 물려줄 수 있다. 그것만으로도 지금꺼 살아온 의미가 있지 않은가.(380)”


특히나 벽 안의 도시와 바깥세계에서의 극명한 차이점은 바로 시계바늘이 있느냐 없느냐인데, 반대로 양쪽 다 계절의 변화는 명확하게 드러나서 겨울을 지나 봄이 오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분명 시간은 흐르기에 겨울이 가고 봄이 오는 것이겠지만 , 벽 안의 도시에서는 시간이 흐름이 존재하지 않는다. 마치 어리고 젊을 때에는 시간이 무한한 것처럼 느끼듯이 말이다. 

“나는 눈을 감고 시간에 대해 생각했다. 예전에는 -이를테면 내가 열일곱 살일 때는- 시간 같은 건 말 그대로 무한에 가까웠다. 물이 가득찬 거대한 저수지처럼. 그러니 시간에 대해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그렇다, 시간은 유한하다. 그리고 나이들수록 시간에 대해 생각하는 일이 점점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어쨌거나 시간으 쉬지 않고 계속 나아가니까.(635-636)”


#무라카미하루키 #도시와그불확실한벽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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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주는 인생
이슬아 지음, 이훤 사진 / 디플롯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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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아 작가의 [끝내주는 인생]을 읽었다. 이슬아 작가의 책을 읽고 있노라면 자유를 누린다는 것이 무엇인지,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견뎌야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된다. 이전에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부모님과 조부무님의 이름을 아주 자연스럽게 언급하는 방식이, 앞에 가족 관계를 언급하는 말이 없으면 그냥 잘 아는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것처럼 친근하게 느껴져 잠깐 동안 부모와 조부모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까먹을 정도이다. 그런데 그런 친근한 언급이 처음에는 어색하게 느껴졌지만 이내 저자가 사랑하는 방식임을 그리고 그렇게 존중하며 애써 기억하려는 애정이 느껴져 참으로 사랑이 많은 사람이구나 여겨진다. 그리고 저자의 책을 읽다보면 이렇게까지 솔직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자신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전해준다. 아마도 가족들이 책의 내용을 알게 된다 하더라도 부끄럽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열렬히 응원해 줄 것이라는 담백한 믿음 때문이 아닐까. 


친구들과의 만남에 대한 이야기, 작업으로 인해 마주한 사람들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마치 딴세상 사람들처럼 보인다. 분명 요즘에는 어딜가도 쉽게 마음을 터놓지 못하고, 자기 이익을 챙기기에 급급하고, 손해볼 생각은 눈꼽만치도 없는 사람들이 가득한데, 저자는 어디서 이렇게 귀한 사람들만 골라서 만나는 것일까? 내가 그동안 너무 색안경을 쓰고 사람들을 바라본 것일까? 아님 사람들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에 문제가 있는 것일까? 좋은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는 나부터가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자명한 명제 앞에서 막연하게 책에 나온 사연들이 부러워지는 것은 나뿐일까 생각해 본다. 


그럼에도 어찌보면 강연의 달인일 것 같은 저자조차도 군부대에서의 강연과 공연에서는 동생의 말처럼 그야말로 ‘좆됐다’는 표현이 얼마나 리얼하게 다가오는지, 막바지에 극적 반전을 기대했으나 역시나 군대는 바뀌지 않는다는 DP  드라마 속 봉디샘의 말처럼 가장 흑역사로 남을 강연을 마치지 않았을까 싶다. 대체 이슬아 작가의 남자 팬은 어디에 있는 거냐는 질문에 읽는 동안 여기에 있다고 무음의 아우성을 보냈다. 그냥 지금처럼 익명의 소리없는 팬으로 남아 있을테니 그까이꺼 군대에서 지들끼리 킥킥거리는 애송이들의 무관심은 저 멀리 안드로메다로 날려버리길 바란다. 역시나 군대는 여전히 어렵다. 


이야기의 말미에 이르러 마감에 대한 그리고 글쓰기의 압박에 대한 저자의 마음을 토로한 부분이 있다. 어느 작가가 그렇지 않겠냐마는 ‘일간 이슬아’처럼 매일 무엇인가를 써내야 하다는 것에 대한 부담감이 얼마나 클지 나 또한 어느 정도 경험해봤기에 조금이나마 공감할 수 있었다. 세상에 책을 읽는 사람들은 점점 줄어든다고 하지만 막상 새 책이 매일 무더기로 쏟아져 내리고 세상에 얼마나 글을 잘 쓰는 사람들이 많은지 경탄하게 되는 아이러니가 반복된다. 강연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저자가 오디오매거진을 들으며 전해주는 내용은 우리가 경탄해마지 않는 위대한 작가들도 어쩌면 여느 사람들처럼 고뇌와 자기연민의 시간을 견뎌내며 그렇게 조금씩 아주 천천히 성장해온 것이 아닐까 싶다. 오늘 우연히 본 신병 시즌2에서 어리버리하지만 엄청난 열정을 가진 FM소대장이 주인공 군수저 일병 빅민석의 찬사에 이렇게 대답한다. “잘하고 못하고는 우리가 할 일이 아니야. 그건 시간이 할 일이지. 내가 할 수 있는 건 최선을 다하는 것, 그거 하나 뿐이야.”


“직업이든 공부든 생계든 해야만 하는 일이 있잖아요. 회피할 수 없는 일, 회피하면 모든 게 무너지는 그런 일이 누구한테나 있어요. 일루수한테 공은 그런 거죠. 그런데 그 일이 자신감이 없는 거예요. 감당할 수가 없는 거예요. 

잘 써야만 하는데 자신이 없는 원고를 마주할 때면 서툰 수영 실력으로 파도에 담기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나는 놀랐다. 이 사람도 무서워한다는 것에. 잘해야만 하는 소중한 일들 앞에서 두려움을 느낀다는 것에. 선생님에게도 글쓰기가 그런 공이라는 사실이 무지막지한 위안이 되었다. 그는 이렇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제안을 하나 드립니다. 약간 느슨한 협회를 만드는 거예요. 삶이 감당이 안 되는 사람들의 모임. 그런 모임을 만들어서 각자 상황을 얘기해보면 어떨까. 세상의 모든 일루수한테 마음을 조금 보내주는 거죠. 마음을 조금 보내는 게, 그렇게 어렵지 않아요. 모르는 사람이어도 그 사람이 처한 상황을 서로 생각하는 거죠.(212)”


#이슬아 #끝내주는인생 #디플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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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알래스카 샌더스 사건 1~2 - 전2권
조엘 디케르 지음, 임미경 옮김 / 밝은세상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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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엘 디케르의 [알래스카 샌더스 사건 1~2]을 읽었다. 신간 목록을 살펴보다가 미리보기를 잠깐 읽어보았는데, 단숨에 흥미유발이 되었다. 이전까지 저자의 책을 보지 못했지만 출판사의 안목에 기대어 보기로 했다. 읽다보니 이전에 발표된 소설들이 언급되었고, 이전 작품의 등장인물들이 나와서 전작에 대한 궁금증과 더불어 지금 읽고 있는 신작을 멈추고 절판된 전작들을 먼저 읽어야 하는 것은 아닌지 갈등이 일었다. 하지만 이미 알래스카의 살인 사건이 발생된 이후 숨가쁘게 진전되는 스토리에 몰입되어 행여나 전작의 스포일러가 나온다 하더라도 멈출 수가 없었다. 다행히 아마도 저자의 절묘한 배려로 전작의 등장인물들이 등장하며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란 의구심만 부추길 뿐 자세한 정황은 나오지 않아서 오랜만에 중고서적을 뒤적여 전작을 주문하도록 만들었다. 그동안 우리나라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거둔 기욤 뮈소와 더글라스 케네디의 소설들이 그렇듯이 조엘 디케르의 소설 또한 반전의 반전을 기하며 페이지 터너라는 이름을 붙이기에 모자람이 없어 보인다. 


이런 소설책만 있다면 여행을 홀로 떠나며 기차와 비행기를 장시간 탄다해도 지루함을 느낄 틈이 없을 것 같다. 책을 들고 있는 팔이 조금 무겁게 느껴진다면 잠시 눈을 감고 휴식을 청하다가도 궁금한 이야기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설렘으로 인해 여행은 더욱 즐거워진다. 이번 출장에도 가방이 무거워짐에도 불구하고 1권을 다 읽고 나면 집에 돌아올 때까지 2권을 기다릴 수 없을 것 같아 어깨의 통증을 견뎌내며 2권까지 짊어지고 갔다. 역시나 업무를 마치고 술을 한 잔 걸친 상태에서도 노곤한 몸을 침대에 뉘이며 나를 기다리고 있는 마커스의 행보에 눈길을 주지 않을 수 없었다. 


소설가가 소설가를 주인공으로 해서 그런지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마치 실존했을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더군다나 화자인 마커스 골드먼이 스승인 해리 쿼버트의 사건을 통해 슬럼프를 극복하고 저명한 작가가 되어 스승의 사건을 풀어나갈 때 만났던 경감 페리와의 조우는 장대한 시리즈물을 연상시킬만큼 긴박감을 조성하였다. 하지만 대부분의 추리소설과 형사물이 그렇듯이 사건의 발단 전개와 점점 미궁에 빠지는 등장인물들간의 긴장감은 결말에 이르러 용두사미 되는 꼴이 많았는데, 이번 작품도 마지막에 범인이 밝혀지는 절정에 이르러서는 약간의 실망감과 더불어 뜻밖의 인물들이 등장할 수 밖에 없었던 마무리가 아쉬움을 남겼다. 하지만 알래스카와 얽힌 월터와 에릭 그리고 페트리샤의 이중적인 면모에 대한 전개는 나약하고 이기적인 인간의 모습을 감추기 위해 어디까지 극단적일 수 있는지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리고 과거와는 다르게 요즘 소설들의 특징 중의 하나는 당연히 이성애적인 관계에만 집중해왔는 모습과는 반대로 주인공의 성적 지향이 동성애나 양성애일 수도 있다는 전제하에 성적 지향으로 인해 사건의 실마리를 찾는 것이 때로는 문제 해결의 결정적인 요소가 되기도 한다는 점이다. 이번 작품에서도 알래스카의 양성애적인 성적 지향이 드러나면서 미궁에 빠졌던 사건은 결정적인 전환을 맞이하게 된다. 


요즘들어 포털사이트의 메인에 걸리는 기사 제목을 보기가 두려워질 정도로 기괴한 사건들이 반복되고 있다. 일명 ‘묻지마 살인이나 폭행’이 빈번히 일어나고 익명의 다수를 헤하기 위한 무모한 시도와 성폭행을 하기 위해 의도적인 접근과 죽음에 이르는 폭행까지 서슴치 않는 범죄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들의 범행은 마치 갈때까지 간 망쳐진 인생에 화풀이라도 하듯이 미지의 대중들에게 평생 잊히지 않을 폭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다. 알래스카의 죽음에는 분명 서사가 있다. 알래스카를 죽인 범인으로 오인된 월터와 에릭의 정황도 다 이유가 있었고 우연이든 의도적이든 그들은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를 이어가다가 비참한 죽음을 맞기도 억울한 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우리나라에서 벌어지는 범죄들은 서사가 없다. 죄를 저지른 이들의 서사의 정당성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라 납득하기 힘든 그저 정신병이라고 밖에 볼 수 없는 죄의 결과들만 남아 있어 희생자들을 더욱 고통스럽게 한다. 


소설과 영화 속에서 등장인물들의 죽음은 너무나도 흔하게 발생된다. 허구의 이야기임을 알고 보기에 잔혹함과 안타까운 마음이 들지만 일시적인 공감에 불가하기에 다시금 쉽게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일이 실제로 주변에서 벌어진다면 나와 관계된 누군가가 그런 일을 당한다면 우리는 아무렇지 않은듯 일상을 살아갈 수 있을까? 흉악한 사건이 벌어지고 난 후 사건의 정황에 대한 뉴스 보도와 더불어 희생당한 분들의 가족들의 인터뷰가 기사로 전해질 때가 있다. 단 몇 줄로 요약된 인터뷰에서 남겨진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려보게 된다. 사건이 발생되고 난 직후에는 아마도 머리가 정지된 것처럼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이리저리 끌려다닐 것이다. 하지만 정말로 염려스러운 것은 그 끔찍한 사건이 대중들의 뇌리에서 서서히 잊혀질 때가 아닌가 싶다. 이제 더 이상 아무도 겉으로 그 이야기를 언급하지 않고 그저 안쓰러운 눈으로만 희생자의 가족들을 바라볼 때 홀로 남겨진 이들이 피눈물을 흘리며 견뎌내야만 하는 시간을 대체 누가 헤아릴 수 있을까? 그런 마음을 생각하면 뉴스에서 보도되는 사건들이 마치 내 가슴에 못을 박는 것처럼 아프게 다가온다. 


소설 속에서도 알래스카, 월터, 에릭, 엘레노어의 부모를 인터뷰하는 페리와 마커스의 장면이 여러 차례 나온다.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간신히 마음 속에 꾹꾹 눌어두었던 이야기들을 끄집어내야만 하는 부모의 심정은 어땠을까? 이제와서 그런 얘기를 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냐고 화를 내는 아버지의 모습이나 그럼에도 잃어버린 자녀와의 추억을 되살리는 것이 살아가는 힘이라고 생각하듯이 페리와 마커스의 질문에 대답하는 어머니의 모습은 비극적인 사건이 가져온 태풍과도 같은 변화를 실감케 만든다.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난다는 것은 결코 그 한 사람만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접하게 되면 그 이전의 자신으로 결코 돌아갈 수 없게 된다. 앞으로의 삶은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기 마련이다.  이번 작품에서 마커스와 해리 쿼버트의 사건을 해결한 후 절친이 된 페리 형사 또한 아내를 잃게 되는 슬픔을 맞게 되고, 마커스는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 속에서 헤어진 연인과 사촌들에게 발생한 비극적인 사건을 떠올리게 된다. [해리 쿼버트 사건의 진실]과 [볼티모어의 서]에 대한 궁금증을 유발시키는 회상 장면들은 마커스 골드먼의 과거가 어떠했을지, 스승인 해리 쿼버트는 어떻게 놀라 켈러건을 살인한 혐의에서 벗어날 수 있었는지 호기심을 자극했다. 뒤늦게 저자의 책을 접하게 되었지만 우리나라에서 첫 번째로 소개된 [해리 쿼버트 사건의 진실]로 돌아가도록 이끄는 저자의 놀라운 이야기의 힘에 박수를 보낸다. 


“돈의 함정이 뭔지 아니? 돈을 주면 모든 종류의 감각을 살 수 있어. 하지만 감감과 진짜는 달라. 돈은 행복하지 않아도 행복하다는 감각을 만들어줘. 진짜로 사랑받는 게 아니어도 사랑받는 느낌을 만들어주기도 하고. 돈으로 비바람을 피할 지붕은 살 수 있어도 내면의 평화를 사지는 못 해.(1-195)”


#조엘디케르 #알래스카샌더스사건 #밝은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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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방에 우짖는 새 - 개정판
현기영 지음 / 창비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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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기영 작가의 [변방에 우짖는 새]를 읽었다. 극장을 밥먹듯이 다니면서도 아주 유명한 영화들은 외면한 채 재미에 치중해서 영화를 보던 때가 있었다. TV에서 고전 영화를 방영해주는데 우연히 미션을 보게 되었다. 이미 스토리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고, 배우들도 다른 영화에서 익숙히 보아왔던 얼굴이고 OST는 너무나도 유명해서 마치 그 영화를 몇 번이나 본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며 순식간에 몰입이 되었다. 아메리카의 엄청난 대지를 폭력으로 점령하여 원주민들을 몰살시키고 영토 확장에만 열을 올렸던 당시 유럽의 몇 강대국은 가톨릭 선교를 수단으로 삼아 그들의 더러운 욕망을 정당화시켰다. 원시 생활을 해오던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총으로 무장한 이들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되고 선교사를 앞세운 무리배들은 그들을 무지몽매한 이들로 치부하며 강제로 교회를 세우고 원주민들을 복속시켰다. 열 명의 악인 중에 한 명의 선인에 해당되는 가브리엘 신부는 원주민과 가까워지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하고 그들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의 몸을 희생하게 된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성체거동을 하며 가브리엘 신부가 총을 맞는 장면에서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도대체 이들은 무엇을 위해서 원주민의 땅을 무단으로 점령하고 그들의 풍습과 문화를 무시한 채 선교라는 이름으로 내지른 폭력을 정당화시킨 것일까? 


어찌보면 유럽 교회가 일찌감치 무너진 큰 이유 중의 하나는 불가지론자들이 갑자기 늘어나서 혹은 급격한 세속화라기 보다는 영화 미션의 사례처럼 종교라는 이름으로 무리를 이룬 이들이 저지른 추악한 과오 때문이 아닐까 싶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고 마르크스가 비판한 것처럼 맹목적인 믿음과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과도한 추앙은 이성적인 사고를 마비시키고 성경에 나온 말씀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극단적인 행동의 밑바침으로 삼곤 한다. 우리나라에서 지속적으로 사이비 종교가 난립하는 것은 신생교의 이름만 바뀔 뿐 사람들을 현혹케 하는 방법은 아주 유사하여 불안과 불확실에 사로잡힌 이들의 빈구석을 꿰뚫고 다가가는 이들의 얄팍한 상술 때문이다. 


그런면에서 종교에 대해 무심하면서도 관대한 우리나라의 실정에서 두 차례의 민란을 다룬 이 소설은 여러 모로 선교에 대한 생각을 되짚어 보게 해준다. 어릴 때 역사 교과서의 한 귀퉁이에 살짝 등장했던 ‘이재수의 난’이 어설프게 기억이 난다. 조선 말기에 민란이 꽤 많이 일어났기에 그런 류의 난 중에 하나라고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재수의 난’을 천주교에서는 ‘신축교안’이라는 다른 이름으로 부른다. 제주시에서 남동쪽의 황사평에는 당시의 민란으로 가톨릭 신자 300여명이 죽임을 당하고 묻혀 있어 순교자들의 성지로 불리고 있다. 조선에 천주교가 서학이라는 이름으로 들어온 이후 약 200여년에 걸쳐 조정에 의해 기나긴 박해가 끝난지 20여년이 지난 1901년 제주의 신자들은 어째서 민란의 희생자가 되었던 것일까? 1901년에 일어난 민란의 희생자들을 기리며 순교터로 기억하는 황사평 성지와 반대로 천주교 신자들을 처단한 것으로 민심을 드높인 ‘이재수의 난’의 장두들을 기리는 삼의사비가 있는 제주는 종교가 정쟁의 도구로 사용될 시 어떤 기만과 만행이 정당화될 수 있는지 그로 인해 얼마나 많은 무고한 이들이 희생될 수 있는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다행스럽게도 대희년을 맞아 한국가톨릭교회는 신축년에 일어난 사건의 과오를 반성하는 심포지엄을 갖게 되었고, 2년 전에 120주년을 맞아 신축교안과 이재수의 난이 더 이상 대립과 반목이 아닌 화해와 용서를 요청하는 화해의 탑을 세워 역사적 교훈을 되새기는 자리를 마련하게 되었다. 


어찌보면 소설의 화자라고도 할 수 있는 제주도로 귀양가게 된 거객 운양 김윤식으로 눈으로 지켜본 방성칠의 난과 이재수의 난은 당시의 백성들이 민란을 일으키지 않고서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도록 만든 부폐한 조정의 민낯을 낱낱이 보여주고 있다. 특히나 제주라는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내륙과의 소통이 원활하지 않은 틈을 타고 목사로 임명된 이들의 수탈과 세폐는 얼마나 많은 고통을 가져다 주었을지 가히 짐작조차 할 수 없을 지경이다. 소설에 틈틈히 묘사된 백성들의 가난과 허기짐은 먹을거리가 부족해서 물똥을 싸지른 어린 아기의 엉덩이에 묻은 똥을 키우던 개에게 핧도록 만드는 장면에서 극에 달한다. 세상에 매길 수 있는 모든 것에 세금을 매켜 가혹하게 수탈해 가는 봉세관과 마름들의 지독함은 치를 떨 정도로 매정하여 당시의 사람들이 법국 신부들을 믿고 오만방자해진 교인들에 대한 미움이 얼마나 컸을지도 짐작이 간다. 교세를 확장한다는 미명하에 법국 신부들은 세폐를 교폐로 연결지어 관의 권세를 무력화시키고 교인이 되지 않은 이들을 뱀의 눈으로 지켜보다 작은 꼬투리라도 잡을라치면 교당에 끌어다 매를 치며 세력을 확장해 나가니 과히 무소불위의 힘을 휘두르는 성교를 기쁘게 받아들일 백성들이 누가 있었을까 싶다. 


“교리책에 쓰인 말과는 실지가 영 딴판이더라 이거여. 천주 십계를 열심히 수계할 생각은커녕 도리어 욕되게 하니, 그런 개망나니들이 천당 가는 교라면, 난 죽어서 지옥불 속에 떨어질지언정 그런 교는 못 믿어. 마방이 안되려면 당나귀들만 들어온다더니, 시방 교당이 그 꼴이 아닌가. 왼 섬 몽니꾼, 심술패기는 다 모여들었다고 해도 과연이 아니쥬.(245)”


#현기영 #변방에우짖는새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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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리커버 한정판)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사상 / 2023년 3월
평점 :
품절


무라카미 하루키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읽었다. 아마도 지금까지 읽은 책 중에 그 어느 작가보다도 하루키의 작품을 많이 읽은 것 같다. 장편소설은 거의 다 본 것 같고, 에세이류는 재즈를 비롯한 하루키의 취미에 반해 나의 관심사가 너무 동떨어져서 그런지 아직도 읽지 못한 게 있다. 마라톤에 대한 하루키의 사랑은 이미 다른 글을 통해서 익히 알고 있던터라 조금은 어떤 내용이 펼쳐질지 짐작했지만, 막상 벌써 15년 전에 발표된 책의 내용으로 보건데 작가이자 마라토너라는 수식어를 붙임에 전혀 이상이 없다는 놀라움을 갖게 된다. 그냥 막연히 글을 쓰기 위한 체력 유지를 위해서 달리기를 하는 루틴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 정도로 열정적인 러너인지 미쳐 알지 못했다. 그리고 하루키가 단지 뛰어난 재능만이 아니라 얼마나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기에 세계적인 작가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는지 달리기를 대하는 그의 마음가짐을 살펴봄으로써 여실히 드러났다. 


오늘이 광복절이니 일본 작가에 대한 찬사를 시작부터 장황하게 늘어놓는 것이 조금은 계면쩍기에, 벌써 몇 년 째 해다마 광복절이면 81.5km를 달리는 션 씨를 기억하고 싶다. 책에서 하루키가 100km를 달리는 울트라 마라톤에 대한 내용이 나오는데 81.5km면 거의 그 수준에 달하는 웬만한 러너들은 언감생신 엄두도 못내는 거리가 아닐까 싶다.  오후에 션 씨의 인스타에서 완주한 그래프를 올린 사진을 보았는데, 새벽 5시부터 무려 8시간 가까운 시간을 뛰어 완주했다고 한다. 인간 군상이 너무나도 다양할 수 밖에 없고 처지에 따라서 각자도생할 수 밖에 없는 세상사이지만, 어디선가에서는 죽을 힘을 다해 달리며 잊혀져 간 이들을 기억해 달라고 땀을 흘리고 있다. 그래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아는 이들은 8.15km를 함께 달리며 션 씨를 응원해주고 기부에 동참할 수 있는 분위기를 자아낸다. 


번역자인 임홍빈 님은 역자 후기에서 하루키의 소설이 전혀 다른 양상을 띠게 된 것 계기가 옴진리교 사건과 한신 대지진이었다고 말한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소설 - 그것은 하루키가 1인칭 소설만을 쓰면서 그 작품들 속에 깃든 자아의 존재와 가치, 그리고 상실과 재생의 세계에 중점을 두고 사회나 타인에 대해서는 냉담하고 무관심에 치중했던 이른바 디테치먼트의 문학세계에서 헌신이나 참여를 뜻하는 커미트먼트로의 문학 영토 확장 내지는 전환을 선언한 것이라는 지배적인 평가를 받기도 했다.(273-274)”


1인 가구가 늘어나고 비혼주의가 만연해지면서 타인에 대한 무관심과 냉소적인 삶의 태도가 정형화되어가고 있다. 이른바 고독사에 대한 사회적 심각함을 인지하면서도 공동체적 삶으로의 회귀는 불가하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그래서 그런지 디테치먼트적인 각박한 세상 속에서 커미트먼트적인 휘귀한 행동을 보게 되었을 때 우리는 생각지도 못했던 감동을 받게 된다. ‘아니 요즘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구나’ 라며 멀리서나마 박수를 보내게 된다. 하루키의 소설이 변화된 것은 옴진리교 사건이나 한신 대지진처럼 아무리 내가 열심히 살려고 노력한다 하더라도 그 모든 정성과 애정이 엉뚱한 누군가의 악의나 인간을 무력하게 만드는 자연재해와 같은 일로 너무나도 허무하게 물거품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은 아닐까. 그렇게 허무하게 자신의 재능과 노력을 허비하게 보다는 미약하게라도 세상에 도움을 줄 수 있다면 또 다시 세상을 무력하게 만드는 일이 생겨난다 하더라도 덜 비참해지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싶다. 


그런면에서 션 씨가 해다마 흘리는 땀은 커미트먼트로서의 삶으로 우리를 초대하고 있다. 모두가 각자의 이유로 생업에 종사하며 주변을 돌아볼 틈 조차 없을지 모르지만, 찰나의 순간에 고개를 돌렸을 때 누군가가 그렇게 세상에 대한 헌신과 참여를 위해 땀을 흘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은 것이리라. 


하루키가 이 책을 쓰기까지 25번의 마라톤 완주를 했으니 15년이 지난 지금까지 몇 번의 완주를 더 했을 것이다. 거기에 울트라 마라톤과 트라이애슬론까지 섭렵하는 작가는 아마도 지구상에 하루키 밖에 없지 않을까. 그런데 그가 달리면서 이렇게 많은 생각을 하고 달리다 걷지 않기 위해 부단한 결심을 반복한다는 것은 글쓰기에 대한 그의 진심이 얼마나 대단한지 보여주고 있다. 


책에 나온 작가로 살아가기 위한 조건들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첫 번째는 당연히 글쓰기의 재능이라고 말한다. 정말로 천재적인 아주 소수의 작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작가들은 재능만으로는 소설을 계속해서 써낼 수 없다고 말한다. 한 인간의 경험치는 한정되어 있기에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아닌가 싶다. 


두 번째로 중요한 자질은 집중력이라고 말한다. 문학상을 받은 작가들의 인터뷰 내용이나 소설의 말미에 붙는 작가의 말 부분을 보면 그들이 한 작품을 탈고하고 위해 얼마나 기나긴 자신과의 싸움을 벌였는지 짧게나마 고백하고 있다. 아주 어렵지 않은 소설이라면 짧게는 서너시간 길게는 하루 이틀이면 다 읽게 되는 소설 한 편을 쓰기 위해 작가가 보낸 긴 고뇌의 시간을 독자라는 이름으로 너무 쉽게 소비하는 것은 아닐까란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리고 그렇게 애써 한 편의 소설을 냈다고 해서 바로 이어서 새로운 작품이 구상되는 것은 결코 아닐 것이기에 자신이 쓸 수 있는 분야의 이야기에 집중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할 것이다. 


세 번째로 중요한 것은 지속력(지구력)이라고 말한다.  세 번째로 논하고 있지만 어찌보면 앞의 재능과 집중력도 지구력 없이는 무용지물이 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한 때 예술의 영역에 속한 이들이 무언가를 창작하는 과정 속에서 클리세처럼 여겨지는 요소들이 몇 가지 있었다. 술을 진탕 마시거나, 손에서 담배를 놓지 않고 줄담배를 태우며 자욱한 연기 속에서 격한 기침을 내뱉던가, 문란한 성생활을 지속해서 연인에게 버림받거나 하는 극단적인 삶의 행태를 계기로 위대한 창작물이 나온다고 보는 시선 말이다. 실제로도 그런 류의 예술가들이 있었고, 작품이 유명해진 이후에 그들의 기이한 삶이 주목되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런 극단적인 삶의 행태들은 결국 요절과도 같은 비극적인 결말을 가져왔기에 그들의 천재적인 능력에 반해 대중에게 남겨줄 작품들은 소수에 불과한 경우가 많았다. 그런 면에서 하루키의 지극히 범생 같은 하루의 루틴은 이제는 고령의 나이에 이르렀음에도 긴 장편 소설을 출간할 수 있는 진정한 힘의 원천이 아닐까 싶다. 


“나는 기본적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며, 그와 같은 생각에 따라 인생을 살아왔다. 어느 부분에 있어서는, 어디까지나 결과적이긴 하지만, 자진해서 고립과 단절을 추구했는지도 모른다. 특히 나와 같은 직업을 가진 인간에게 있어서는 그것은 정도의 차는 있을지언정 피할 수 없는 여정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타인으로부터의 고립과 단절은 병에서 새어 나온 산처럼 알지 못하는 사이에 사람의 마음을 갉아먹고 녹여버린다. 그것은 예리한 양날의 검과 같은 것이다. 사람의 마음을 보호하는 동시에, 그 내벽을 끊임없이 자잘하게 상처 내기도 한다. 그와 같은 위험성을 나 나름대로 잘 알고 있지 않았을까.(40-41)”


“그렇지, 어떤 종류의 프로세스는 아무리 애를 써도 변경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그 프로세스와 어느 모로나 공존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가정하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집요한 반복에 의해 자신을 변형시키고(혹은 일그러뜨려서), 그 프로세스를 자신의 인격의 일부로서 수용할 수 밖에 없다.(107)”


“고통스럽기 때문에 그 고통을 통과해가는 것을 기꺼이 감수하는 것에서 자신이 살고 있다는 확실한 실감을, 적어도 그 한쪽 끝을, 우리는 그 과정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산다는 것의 성질은 성적이나 숫자나 순위라고 하는 고정적인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행위 그 자체 속에 유동적으로 내포되어 있다는 인식에(잘 된다고 하는 가정이지만) 다다를 수도 있다.(255-256)”


#무라카미하루키 #달리기를말할때내가하고싶은이야기 #문학사상 #적어도끝까지걷지는않았다 #리커버한정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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