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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T - 내가 사랑한 티셔츠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 비채 / 2021년 5월
평점 :
무라카미 하루키의 [무라카미 T]를 읽었다. 그야말로 반은 글이고 반은 티셔츠 사진이 다라고 할 수 있는 이름이 아직 알려지지 않는 작가들이 이런 책을 낸다면 과연 얼마나 팔릴 수 있을 것인지란 생각이 먼저 들게 만드는.. 그럼에도 하루키니까 용서가 된다는, 그리고 하루키만이 이런 식의 에세이에서도 하루키스타일을 드러낼 수 있다는 정반대의 생각도 들었다. 하루키스트들에게는 맹목적으로 그의 책을 구입하겠다는 강렬한 의지가 있기에 앞 뒤 재지 않고 책의 내용이 무엇인지 제대로 살펴보지도 않고 하루키의 신간이 나왔다고 하면 무조건 주문을 누르게 되지 않나싶다. 그럼에도 본국에서는 어떻게 출판이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마치 하루키 신간이 나왔으니 뽕을 뽑듯이 양장커버에 두꺼운 고급 종이를 사용한 것은 오로지 티셔츠 사진을 잘 보이기 위함이려나? 양장본이기에 책장에 꽂아두면 그럴듯한 폼이 나기는 하지만 페이지 수에 걸맞게 문고본으로 간출하게 나왔다면 어떨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아무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키는 하루키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대체 언제부터 그렇게 티셔츠를 모아놓을 생각을 했을까? 얼마전 이동진 영화평론가가 유퀴즈에 나와서 2만권에 달하는 책과 그 외 수집품을 놓을 아카이브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전하며 새로운 책을 구입해 책장에 꽂으려고 했는데 똑같은 책이 있음을 발견할 때의 아쉬움 또한 토로했다. 그런데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어느 작가는 소장하고 있는 책이 너무 많아서 원하는 책을 찾는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을 알고 그 책을 소장하고있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똑같은 책을 새로 사서 본다는 것이다. 이 정도면 중독이 아닐까 싶기도 한데 한편으로는 부럽고 존경스럽다.
하루키는 자신이 갖고 있는 수많은 티셔츠 중에서 자동차, 음악, 술, 음식, 동물, 운동 그리고 책 등과 구분지어 분류하고 이야기를 전해준다. 하루키가 구입한 티셔츠의 상당 부분은 하이와 섬에서 1달라 정도의 값을 지불하고 산 것이라 전한다. 그가 소개한 티셔츠는 명품은 단 하나도 없고 어떤 행사의 기념품이나 단체티 같은 것들도 상당수이다. 그리고 이런 저런 이유로 그가 한 번도 입지 못하고 그저 상자 속에 보관되어 있는 것들도 대다수이다. 하루키의 책 중에 다른 나라에서 출판된 기념으로 받게 된 그의 이름이 새겨진 티셔츠는 하루키 자신이 입고 싶어도 입을 수 없는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티셔츠를 입고 있는 모습을 대중들에게 보여지는 것은 몹시나 난처한 일이라고 말한다. 독자인 나는 어디서든 그런 티셔츠를 하나 구입할 수 있다면 참 좋을텐데 말이다.
책의 표지로 사용된 티셔츠의 문구는 "KEEP CALM AND READ MURAKAMI"라고 씌어 있다. 어디선가 하루키의 출판 기념회를 갖는 곳이 한적하게 휴가를 보낼 수 있는 곳이라면 금상첨화가 아닐까 싶다. 책을 읽고 싶어지는 최상의 환경 중의 하나는 의외로 에메랄든 빛 바다물결이 너무나도 투명해 육안으로도 작은 물고기들이 돌아다니는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해안가의 모래사장 앞에 놓여진 썬베드에서 그늘진 오후가 아닐까 싶다. 또 하나의 그럴듯한 곳은 추적추적 비가 내려 어두컴컴해진 어느 카페의 구석진 곳에서 빗물이 창문을 때리는 소리를 들으며 느릿느릿 페이지를 넘길때가 아닐까 싶다. 그렇지 않다면 스탠드 불빛에만 의지해 오로지 책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제일 좋기는 하다. 이러나 저러나 하루키가 마우이섬에서 1달러에 산 티셔츠에 새겨진 'TONY TAKITANI'라는 이름 하나만으로 생각하다 소설을 쓰고 나중에 영화까지 만들어지는 기이한 운명은 누구라도 그가 천상 작가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위스키와 달리기를 좋아하고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하루키가 일흔이 넘도록 롱런하는 이유를 조금은 알 것도 같다.
*소피스티케이션(sophistication), 트와이스 업, 라프로익, 데포르메, 디거맨, 비벤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