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코게임즈 : 호모사피엔스의 취미와 광기 오늘의 젊은 작가 38
심민아 지음 / 민음사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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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민아 작가의 [키코게임즈: 호모사피엔스의 취미와 광기]를 읽었다. 민음사 오늘의 젊은 작가 38번째 작품이다. 오늘의 젊은 작가 시리즈는 아직 대중적으로 주목받지 않고 있는 발표작도 많지 않은 작가의 작품이기에 매번 이번에는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기대가 된다. 때로는 내가 좋아하지 않는 소설의 형식인 경우도, 난해한 내용이 전개될 때도 있어 전작을 전혀 읽지 못한 작가의 책은 어느 정도의 긴장감을 안겨주기도 한다. 이번 작품은 제목부터 몇 번을 읽어야 기억될 정도로 뭔가 복잡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막상 소설 속으로 들어가니 제목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고 내용은 제목의 첫인상처럼 복잡하거나 난해하지 않았다. 제목부터 게임이 들어가니 당연히 게임에 대한 내용이 나올 것이고 소설의 도입부터 게임에 관한 전문용어들이 난립하기 시작해서 이걸 끝까지 읽고 이해할 수 있을까란 의구심이 들었지만, 소설의 주인공 조유라 또한 게임의 문외한이기에 주인공의 심리에 빙의되어 게임을 저주하고 거부하면서도 입에 풀칠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직장생활에 젖어들어갔다. 


소설의 시작은 조유라의 출근장면부터이다. ‘늦잠과 버스 연착과 미친 날씨. 망할 트리플 콤보’라는 첫 줄부터 어떤 가림막이 제거된 듯한 속살의 시원함을 안겨주었다. 주인공이 출근하는 곳은 키코라는 거대한 게임회사이지만 그녀는 게임을 잘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불문과를 나온 인문학도였다. 인문학을 전공했다고 해서 게임을 좋아하지 않을 법이라고는 없지만 소설에서도 몇 번이나 반복해서 나오듯이 행여나 SNS나 유튜브에 발끝이라도 나올까 전전긍긍하는 관종의 유행병에 전염된 요즘 젊음이들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왔다. 관심도 없는 게임 회사에 들어가는 것은 경력 관리에 도움이 커녕 오히려 발목을 잡힐 수 있다는 동생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조유라에게는 당장 돈이 필요했다. 200개가 넘는 자기소개서의 파일 목록을 보며 조유라는 어떻게 해서든 매달 월급을 받는 직장인이 되고자 했다. 그렇게 키코게임즈의 디자이너가 되었다. 


소설 속에 등장한 키코게임즈는 아마도 실제 우리나라의 대형 게임회사를 모티브로 했을 것이다. 언제부터인지 TV광고 중에 아주 고퀄리티의 마치 밀레니엄을 앞둔 시기에 뮤직비디오가 유행했듯이 영화같은 그래픽 화면이 나오기 시작했다. 영화 광고인가 라는 생각이 들무렵 갑자기 화려한 최첨단의 갑옷을 입은 전사들이 나오며 육감적인 몸매를 뽑낸다. 그래픽도 상당하지만 그 게임을 소개하는 이들도 유명한 연예인이 대부분이다. 그런 광고를 볼 때마다 아니 대체 누가 이렇게 게임을 많이 하길래 게임 광고가 끊이지를 않는 것일까 항상 궁금했다. 이미 꼰대가 되어서 그런 것일수도 있겠지만, PC 게임이 유행하기 시작할 무렵에도 스타크래프트를 몇 번 시전해보고 바로 마음을 접었다. 그래서 그런지 소설 속의 조유라의 마음을 백번 이해하고도 남았다. 조유라가 키코게임즈의 게임룸에서 3D 게임을 몇 번 하고 나서 극심한 멀미 증세와 몸살까지 난 것을 보면 요즘같이 난해해 보이는 전략게임은 아무나 할 수 없는게 아닐까란 생각이 든다. 하지만 조카들이나 학생들을 보면 하나같이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하고 게임 얘기 삼매경에 빠져 있는 것을 보면 내가 이상한 유년시절을 보낸 것인가란 생각마저 든다. 


아무튼 조유라의 키코게임즈에서의 고군분투기는 게임 용어를 몰라도 꽤나 재미있다. 입사 후 처음 발령받은 월드팀에서는 사실 거의 게임과는 상관없는 업무를 배정받았다. 회사 생활을 안해봐서 잘은 모르겠지만 어느 회사든 인사팀과 기획팀 같은 곳이 가장 선호하는 곳이라고 들었다. 어쨌든 회사의 사업 핵심을 구성하는 부서들이 힘을 갖고 있을 수 밖에 없고 그곳에서 능력을 발휘해야 인정받고 승진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에 반해 회사가 굴러가기 위해서는 사업이 잘 진행될 수 있도록 서포트 해주는 부서 또한 반드시 필요하다. 게임 회사라면 소설에도 나오지만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가장 중요시 할 것이고, 기껏 창의적인 아이디어라고 해봤자 어차피 싸우고 죽이고 살리고를 반복하는 내용이지만 그럴듯한 서사와 언제든 감각적인 성적 요소들을 교묘하게 삽입하여 게임 참여자들이 떠나지 않도록 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 중요해 보이는 일들 외에도 여타의 사무적인 절차를 진행시킬 사람이 필요한데 조유라는 키코게임즈에서 그런 업무를 배당받은 것이다. 그렇게 월드팀이 해체되고 드디어 오메가3 라는 게임을 만드는 부서로 배치 받게 되지만 조유라는 팀장과의 첫 면담에서부터 어긋나게 된다. 어찌보면 인문학적 사고와 정의를 갖고 살아온 이에게 윤리적인 가치 판단을 배제한 채 오로지 가성비와 서열을 따지며 자극적인 게임을 구성해보라는 것은 어불성설이지 않았을까. 조유라의 사고 체계를 가장 크게 흔든 사건으로 나오는 부분을 살펴보면 더욱 그렇다. 


오메가3에서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하는 조유라와 다른 부서에서도 유사한 이유로 발탁된 이들은 장차 게임디자이너가 되고 싶은 대학생들의 인턴쉽 프로그램의 멘토로 참여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조유라는 어떤 대학생이 만든 게임을 보고 이런 게임을 잘못된 것임을 지적한다. 그 게임은 장애를 가진 이가 장애를 극복하여 끝까지 도달하게 되면 비장애인들이 환호하는 것을 상징하는 동그라미 안에서 네모가 극복하는 내용이었다. 조유라는 이런 생각은 분명 문제가 있기에 이상하지 않느냐고 조심스럽게 묻지만 학생은 생각을 많이 했다며 유라에게 반문한다. 

“그러나 아무리 설명해도 그는 노오력과 장애와 인정이 결코 연결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대신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약육강식이란 것은 너무 당연한 세상의 진리라고 항변했다. 언제든 어디서든 자신이 강한 쪽에 서 있을 거라고 굳게 믿는 그 자신감. 강한 쪽에서 육식을 실컷 할 수 있을 거라고 굳게 믿는 그 자신감. 나로서는 도저히 그 근거도, 출처도 짐작이 안 되었던 자신감. 그건 대체 무엇있을까…(200)” 


이제 제목의 뒤에 붙은 호모사피엔스의 취미와 광기에 담긴 의미를 조금은 알 것 같다. 지혜를 갖고 자기 보다 힘센 동물들을 지배하는 인간의 학명을 갖게 되었지만 여전히 가상 현실 속에서 누군가를 죽이고 밟고 일어서는 것에 심취하는 시간을 습관적으로 갖게 된다면, 우리 몸 안 저 어딘가에 깊숙이 숨겨져 있던 광기가 아주 비좁은 틈을 열고 나와 호모사피엔스의 영혼을 야금야금 갉아먹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우습지만, 매일 얼굴을 보고 함께 일하는 사이에서 누구가가 일을 잘하고 못하고는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수준이면 된다. 일머리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내가 상대방을 싫어하느냐 좋아하느냐다. 마음과 호감의 문제랄까. ~~ 인간은 마음의 동물이고, 마음은 호불호의 동물이다. 한 번 좋음의 궤도가 돌아가기 시작하면, 좋으므로 좋고, 좋아서 좋으므로 더 좋게 된다. 그 무서운 원심력은 잘 깨지지 않는다. 거의 무한 동력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 또 반대로, 한 번 싫음의 궤도에 올라타게 되면, 거기에서 벗어나기도 쉽지 않다. 싫으므로 싫고, 싫어서 싫으므로 더 싫은 악순환. 이것은 영구 기관의 반대편에서 열역학 제2법칙을 차분히 지켜 나간다.(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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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
김병운 지음 / 민음사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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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운 작가의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을 읽었다. 작가의 첫 번째 소설집으로 "한밤에 두고 온 것",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 "윤광호", "11시부터 1시까지의 대구", "9월은 멀어진 사람을 위한 기도", "알 것 같은 밤과 대부분의 끝", "어떤 소설은 이렇게 끝나기도 한다" 이렇게 7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이미 첫 번째 장편 [아는 사람만 아는 배우 공상표의 필모그래피]를 통해서 퀴어 문학의 포문을 제대로 열어졌혔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이번 소설집을 통해서 명실상부 선두 주자로 자리매김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아무튼, 방콕]에서도 느꼈지만 퀴어라는 성소수자에 관한 이야기가 지닌 특징을 배제하더라도 저자의 글은 어느 때는 너무 간절하고 슬프도록 아름다워 한 동안 그 문장에서 계속 머물게 만드는 저력을 갖고 있다. 한 마디로 '어떻게 이렇게 글을 잘 쓰지' 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올 정도로 빼어난 문장력을 갖고 있다. 그리고 매우 진중하고 새드한 분위기가 이어지다가 별안간 터지는 터무니없는 개그력에 또한 한 표를 던지고 싶다. 


지난 장편소설을 읽을 때에는 소설의 주인공이 유명한 연예인이 누릴 수 있는 많은 것을 포기하면서까지 자신의 성정체성을 감추기를 그만두기까지의 용기를 보여주는, 어느 정도의 제3자의 시선에서 퀴어에 대한 소재가 펼쳐졌다면, 이번 소설집은 화자가 '나'라서 그런지 저자 자신의 이야기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7편의 단편이 조금씩 다른 환경과 주변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마치 한 사람의 내면을 더욱 깊이 들여다보면 이렇게 다채로운 만남 속에서 서서히 자신을 알아가는 것이 아닐까란 생각이 들 정도로 강렬한 몰입감을 선사했다. 


제작년 이태원발 코로나 사태가 정점에 달했을 때 성소수자에 대한 비난과 모욕은 끝을 모를 듯 정점을 치닫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그렇게까지 한 개인의 이동 경로를 동의도 없이 까발릴 수 있었을까 반발감이 들지만, 당시에 목숨을 저당잡힌 것 같은 극도의 긴장 상황에서 개인정보 정도야 당연히 국가에 헌납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마땅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이미 인격적인 존재에 대한 정의는 소멸해버렸다. 이런 위급한 상황에서도 확진자 추적이 불가능한 유럽의 문화를 지탄하며 확진자가 폭주하듯 늘어나 장례조차 제대로 치룰 수 없는 상황을 비웃곤 했다. 하지만 이제와 생각해보면 인본주의적 사고방식이 뿌리깊은 서구에서는 차라리 죽으면 죽었지 한 개인의 인권이 마구잡이 취급받는 것은 도저히 받아들 수 없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싶다. 우리는 똑같은 상황을 미지에 마주하게 된다면 예전처럼 또 다시 개인의 존재를 망각하게 될까? 아무튼 이태원발 코로나는 그곳을 다녀간 이가 거짓말을 하고 그로 인해 학원을 다니던 학생들이 감염되고 학부모들의 엄청난 항의로 일파만파 성소수자들에 대한 인신공격에 정당성을 부여하기까지 이르렀다. 


시간이 흘러 그 학원강사가 이동 경로를 거짓으로 말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아웃팅이 두려웠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과연 우리가 무슨 짓을 저지른 것인지, 별 생각없이 내뱉었던 무심한 말들이 그의 영혼을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은 아닌지 착찹함이 밀려왔다. 소설 속에서도 이러한 상황을 두려워한 등장인물들의 내면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방역을 빌미로 연일 게이 혐오 기사가 쏟아지고 폭력적인 아우팅이 자행되던 그 전례 없는 혼란 속에서, 혹시나 서로가 서로의 알리바이가 될까 봐 공포에 떨며 숨죽였던 상황 속에서, 단지 내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했던 거라고 생각하면.... 나는 죽고 싶어진다.(192)"


소설 속 화자인 '나'가 소설가로서 자신의 성정체성을 밝히기를 거부하며 자신의 실제 삶과는 다른 이야기만 쓸 수 있다고 자부하지만, 이내 아무리 꾸며내는 가공의 이야기라 할지라도 자신이 누구인지 도려낸다면 그건 결고 진실한 이야기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부분에서는 큰 감동을 받았다. "혐오와 비난, 배제와 박탈, 우울과 고립, 질병과 고통, 그리고 성소수자와 자살(204)"이라는 상황이 반복된다 하더라도 '나'는 누구의 허락을 필요로 하지 않는 온전한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는 것만이 자신의 소설을 진실하게 마주하는 것임을 확인하게 된다. 윤광호가 이러한 소설을 쓸 수 있는 것은 용기의 문제가 아니라 시간의 문제라고 말했지만, 이러한 시대가 도래할 수 있었던 것은 누군가의 인정도 응원도 필요없는 세상을 이끌어낸 '나'와 같은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서기만 하면, 선의와 정치적 신념을 담보하기만 하면 당신이 발언은 정당해지는가? 당신이 성소수자를 도구화해서 재생산한 편견에 대해서는 누가 책임지는가.(20)"


"나는 그건 용기의 문제가 아니라 시간의 문제라던 광호 씨의 말을 자주 곱씹는다. 어쩌면 그 말은 나를 향한 충고나 조언이 아니라 다가올 세상을 향한 기대와 희망이었을지도 모른다는 바람을 안고서. 우리의 정체성이 어떻든 거기엔 아무런 차별이 없어서 특별한 용기도 자긍심도 필요 없는 세상. 우리가 누구에게 어떤 종류의 끌림을 느끼든 그건 그다지 이상한 일이 아니어서 누군가의 인정도 응원도 필요 없는 세상. 그날의 광호 씨는 시간이 흐르면 그런 세상이 반드시 도래할 거라는 자신의 믿음에 내기를 걸고 싶었던 게 아닐까. 우리가 우리를 외면하지 않는다면 그런 세상은 틀림없이 앞당겨질 거라는 신념을 내게 보여 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117-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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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안락사 현장에 다녀왔습니다 - 조력자살 한국인과 동행한 4박5일
신아연 지음 / 책과나무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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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아연 작가의 [스위스 안락사 현장에 다녀왔습니다]를 읽었다. 부제는 "조력자살 한국인과 동행한 4박5일"이다. 제목과 부제부터 묵직한 어두움을 안겨준다. 의학과 과학의 발달은 인간의 평균수명을 두배 이상으로 연장시켜주었다. 이제는 백세시대라는 말이 그냥 막연한 꿈이 아니라 실재적인 일이 되어가고 있고 오래 산다는 것이 마냥 좋기만 일이 아니라는 것 또한 체감하고 있다. 인류의 역사에서 한 인간의 삶이 남긴 흔적은 먼지처럼 흐릿할 뿐이지만 개개인이 겪는 100년도 안 되는 시간은 참으로 지리멸렬한 시간이 주는 고통을 감내해야만 할 때가 많을 것이다. 불과 20여년 전만 해도 '안락사'라는 단어는 조금 생소한 말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죽음에 대해서 부정적인 입장을 갖고 있었고 안락사와 자살이 뭐가 다르냐는 듯한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생명연장의 가속도가 붙으면서 또한 웰빙과 더불어 웰다잉이라는 말이 번져가면서 안락사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이 조금씩 변해가기 시작했다. 


조조 모예스의 [미비포유]라는 소설을 읽기 전에 스위스에서 실제로 안락사가 시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소설에 나오는 이그니타스라는 병원은 실제하며 그곳에서 원하는 사람이 원하는 시기에 자발적인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무척 놀랐던 기억이 난다. 그것도 벌써 수년 전이니 아마도 지금은 스위스 뿐만이 아니라 다른 나라의 어느 곳에서 안락사가 합법적으로 실행되고 있을지 모르겠다. 우리나라도 여러 우여곡절 끝에 2018년 연명의료 결정법이 실행되었다. 사실 연명의료 결정법이 법적으로 공표되고 법적 효력을 갖기까지 논의된 가장 큰 화두는 인간이 스스로의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자기결정권을 인정할 수 있느냐, 아니야의 문제였다. 오용과 잘못된 이해의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지만 여러 현실적인 문제와 불필요한 치료로 인해 고통받는 환자의 상황을 받아들여 임종기에 이른 사람에 한해서만 연명의료를 받지 않겠다는 문서가 법적 효력을 얻게 된 것이다. 당시 이 법이 국회에 상정되고 공표되기까지 가장 염려한 부분이 바로 안락사법으로 받아들이지 않을까란 우려였다. 이런 우려가 점차 현실이 되어가고 있는 것은 얼마전 어느 국회의원이 '조력존엄사'라는 이름으로 안락사를 허용하는 취지의 법을 상정했기 때문이다. 


연명의료 결정법에서도 많은 이들이 공감했던 부분은 바로 '존엄한 죽음'이라는 표현이었다. 실제로 연로한 어른들은 아직 큰 병을 앓고 있지 않아도 혹시나 갑자기 중병을 얻어 자식들에게 폐를 끼치게 될 까 두려워한다. 그리고 어차피 일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길고 고통스러운 치료를 받느니 차라리 좀 더 상태가 원만할 때 인간답게 죽고 싶다는 생각을 피력한다. 그게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존엄한 죽음'의 일반적 상태가 아닐까 싶다. 사지를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상태가 되어 기저귀를 차고 배변을 배출해야 하거나 제대로 먹지고 마시지도 못하고 가족들에게 온갖 신경질을 부리며 비참한 말로를 겪게 될까 두렵기만 한 것이다. 하지만 이 존엄한 죽음이라는 표현은 아직 죽음과는 먼 거리에 있는 건강한 사람들의 시선이 아닐까? 막상 나 자신이 생사를 오가는 상태에 이르렀을 때에 온전히 대소변을 자발적으로 볼 수 있는 것과 아닌 것이 차이가 과연 임종자에게 존엄함의 유무를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 될 수 있을까? 


우리는 죽음 이후의 경험을 듣고 볼 수 없기에 죽는 자가 존엄한지 아닌지를 알 수 없다. 그저 죽음을 바라보는 이들이 스스로 존엄함을 느끼고 유지하고 싶을 뿐이다. 삶이 스스로의 선택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기에 죽음 또한 우연적일 수 밖에 없다. 모든 것을 조작하고 선택할 수 있다면 자유의지를 가진 존엄한 인간임을 폐기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저자의 안락사 현장에 대한 동반기는 페이지를 넘기기에 참으로 힘든 시간이지만, 가족이 아닌 제3자의 시선으로 안락사를 선택한 이의 여정을 좀 더 객관적으로 남길 수 있지 않았나 싶다. 어쩌면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죽음에 대한 선택권을 권리로 생각하며 안락사를 법으로 제정하고 싶다고 주장할지도 모르겠다. 생명연장이라는 꿈같은 일이 가능해지는 세상에 이렇듯 개인주의적인 선택의 만연이 팽배해질 상황에 저자의 맺음말이 더욱 깊이있게 와닿는다. 비록 죽음은 한 개인의 소멸인듯 하지만 그 개인이 함께한 소중한 사람들과의 관계는 지속된다. 나의 삶을 당장 끝내고 싶을 정도로 고통스럽지만 나의 소멸 이후에 살아갈 사랑하는 사람들을 생각한다면, 지금의 죽을 것 같은 고통은 나에게 남겨진 마지막 숙제이니 그 숙제를 잘 마무리할 때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의 부재의 슬픔을 이겨내고 일상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죽음이란 최고의 스승이 가르치는 과목은 단 하나, '사랑'입니다. 사랑만이 죽음의 공포를 이기게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죽음이 곧 사랑을 일깨운다는 뜻입니다. 죽음은 죽음보다 더 깊었던 무지에서 우리를 깨어나게 합니다. 그 무지란 사랑하는 능력을 그냥 묻어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이란 '전 존재를 거는 일'입니다. 나의 관심사나 이기적 욕구와는 아무 상관 없이 그저 나를 내어주는 일이라는 걸 깨달아 갑니다.(118-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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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울어진 미술관 - 이유리의 그림 속 권력 이야기
이유리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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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리 작가의 [기울어진 미술관]을 읽었다. 부제는 “이유리의 그림 속 권력 이야기”이다. 얼마 전 뉴스 기사에 교권 추락에 대한 타이틀과 더불어 충격적인 사진이 하나 게시되었다. 수업 중에 선생님이 판서를 하는 도중에 학생 한 명이 교단 바닥에 누워 스마트폰을 충전기에 연결한 채 마치 사진 촬영을 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이후 또 다시 등장한 기사에는 그 학생의 스마트폰을 포렌식 검사 한 결과 선생님을 촬영하지는 않았다는 내용이 있었다. 수업 중에 교단 앞에서 학생이 대놓고 스마트폰을 들고 있는 것이나, 또 그 학생의 스마트폰에 전문적인 포렌식 검사까지 적용하다니 도대체 어떻게 이 세상이 돌아가고 있는 것인지 혼란스럽기만 했다. 밀레니엄 시대가 열리기 전까지만 해도 선생님들의 체벌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오히려 군대보다도 더 폭력적이었던 학창 시절을 어떻게 군말없이 버틴 것인지 신비롭기까지 하다. 단체기합을 받고 줄빠타를 맞을 때면 이건 학생의 악습관을 선도하기 위한 체벌이 아니라 이 선생이 미치거나 어디선가 받은 스트레스를 이런 식으로 풀고 있는 것이 아닌가란 의심이 들기도 했었다. 그래도 거의 대다수가 반항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그 고통의 시간을 견뎌냈다. 


‘라떼는 말이야’가 유행어가 되면서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 중의 하나라고 한다. 이 ‘라떼는’는 상대적인 평가로 기성세대가 되었을 때 어리고 젊은 세대를 보면 충분히 좋고 편안한 시대를 살고 있으면서도 힘들어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할 때, 기성세대가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 썰을 푸는 형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라떼는’ 이야기를 듣는 젊은 세대들은 대놓고 말하지는 못해도 속으로 ‘그래서 어쩌라구’의 냉소를 퍼붓는다. 하지만 지금의 기성세대도 분명 앳된 시대를 보냈고 그들에게 ‘라떼는’을 시전한 올드세대가 반드시 존재했을 것이다. 어쩌면 무한루프처럼 반복되는 ‘라떼는’이란 어려운 시절의 경험담은 세대를 연결하고 싶은 어설픈 시도일지 모른다. 그럼에도 나이가 들수록 ‘라떼는’의 유혹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좀 쿨하게 세태의 흐름을 받아들이고 같이 누리고 싶은데 자꾸 본전 생각이 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책에 나온 수많은 부조리와 불평등의 시대를 살아온 이들이 지금의 우리에게도 분명하게 ‘참 좋은 시대에 살고 있으니 행복한 줄 알라고’ 말하지 않을까 싶다. 


5.25, 3.5 플로피 디스크를 들고 다니며 행여나 디스크에 담긴 파일이 뻥나지 않을까 노심초사한 때가 있었다. 메가에서 기가로 이제는 테라바이트 용량의 소형 드라이브가 일상화된 시대이니 정보를 공유하고 저장하는 것은 너무나도 간단한 일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사진 한 장도 쉽게 찍을 수 없는 아니 그보다 훨씬 더 오래전에는 그림과 건축물을 통해서 오래전의 일상들을 엿볼 수 있을 뿐이다. 전세계의 미술관에 전시된 오래된 명화들은 너무나도 귀중히 보관되며 금전적 가치를 환산한다면 천문학적인 금액의 작품들도 꽤 될 것이다. 미술에 대한 문외한이라도 몇몇 유명한 작품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화가 이름과 작품의 제목까지도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유명세와는 반대로 미술 작품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사실 잘 알지 못한다. 이번 책에 나온 그림들은 거의 상당수가 잘 알지 못하는 작품들이었지만 저자의 배경 설명과 화가들의 이야기가 곁들이지 않았다면 그 명화 속에 담긴 시대적 상황을 하나도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그저 대단한 작품이라고만 생각해왔는데, 사실 화가의 의도가 생각보다 옳지 못했구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그 당시에는 그럴 수 밖에 없었겠구나라는 이해의 마음이 들기도 한다. 


어쨌든 명화를 그린 화가를 비판하고 평가절하하기 위함이 아니라 화가의 명화 속에 담긴 인간과 자연과 세상에 대한 온갖 기울어지고 삐뚤어진 시선을 좀 더 냉철한 시각으로 재조명하고, 저자가 매 쳅터마다 강조한 것처럼 그림 속에 나타는 온갖 불합리와 불평등한 시선들은 과연 지금의 시대에는 얼마나 변화된 것인지 자성하는 시간을 갖게 만든다. 


“노년의 지혜란, 노년들은 긴 시간을 살면서 다양한 경험을 쌓았으니 삶이라는 여행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다음 세대에게 소중한 안내판 한두 개쯤은 전승해줄 것이라는 기대가 있을 때 가능하다. 그리고 이러한 기대는 삶이라는 여행의 의미를 다면적으로 묻고 추구하는 문화 속에서 싹튼다. 삶의 의미가 활용 가능한 자원이나 기술 등을 이용해 얻는 성공이나 부, 권력으로 환원되는 사회문화 맥락에서라면, 지금과 같은 기술 환경에서 노년들에게 청해 들을 지혜는 별로 남아있지 않다.-흰머리 휘날리며, 예순 이후 페미니즘 (168-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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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자전
정은우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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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우 작가의 [국자전]을 읽었다. 전래동화나 고전에서나 나올 법한 누구누구의 일대기를 그린 ‘전기 전’자가 들어간 소설이라니. 뭔가 진부한 냄새가 나면서도 너무 오랜만이라 그런지 오히려 신선함도 느껴졌다. 그리고 실제로 국자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도 있을테지만, 이국자라는 이름은 얼마나 많은 놀림을 당했을까라는 생각과 더불어 뒤에 전자를 붙이니 또 그럴듯해보였다. 이야기는 국자의 딸 미지가 독립하려는 시도를 번번이 놓쳤던 과거의 회상에서부터 시작된다. 국자와 아버지가 미지가 독립 못하도록 억지로 막아 세운 것은 아니었지만, 미지의 독립을 탐탁치 않게 여겼던 국자는 언제나 미지에게 맛깔스러운 식사를 준비하여 엄마가 해준 밥을 먹고 나면 독립을 반대하는 국자의 의견에 매번 KO 당하는 것이었다. 미지가 엄마인 국자가 요리해준 음식에 대한 묘사 부분은 정말 얼마나 맛이 좋고 입맛에 딱 맞으면 독립하고자 하는 그 열망을 누그러뜨릴 수 있는 것인지 국자의 요리실력에 대한 궁금증이 마구마구 생겨났다. 그렇게 미지는 엄마의 요리에 뭔가 감춰진 비밀이 있지 않을까란 의구심을 갖고 김치 담구는 법부터 배우려 하지만 국자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미지에게 간단한 레시피만을 알려줄 뿐이다. 이래서는 독립한 이후로의 식생활은 보마마나 뻔할 테니, 어쩌면 독립을 미룰 적절한 핑계를 마련한 것일지도 모른다. 


국자와 미지의 독립을 둘러싼 음식 이야기가 펼쳐질 때만 해도 능력자와 반동이 나오는 히어로물이 등장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완전한 사실주의 소설인지 알았더니 국자를 비롯한 수많은 숨겨진 능력을 가진 이들이 등장하는 판타지가 삽입되어 있었다. 마블 시리즈에 환장한다면 모르겠지만, 왠지 모르게 소설 속에서의 히어로들의 등장은 뭔가 거부감이 느껴지곤 한다. 어차피 소설은 가공할 만한 이야기가 삽입되고 작가의 상상에 의해서 부풀려진 내용이 있지만 현실적으로 일어날 수 있다고 예상되는 것과 가능성이 제로인 것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이건 순전히 취향의 문제이므로 히어로들의 등장 요소는 차치하고 국자의 과거 이야기와 사랑 등의 전개는 그들이 가진 능력과는 무관하게 현대 사회의 많은 모순을 적절하게 배치하고 있다. 실제로 어딘가에 그런 초월적인 능력을 가진 이들이 존재할지도 모르겠지만, 시간을 되돌리거나, 순간이동, 염력, 투시와 같은 능력을 가진 이들을 테스트해서 등급으로 나눌 수 있을까? 소설 속에서는 국가에서 이런 능력을 갖고 있는지 테스트하여 능력을 가진 이들이 국가에 충성하는 이들일지 아니면 능력을 갖고 있지만 오히려 국가에 반하는 이들일지 선별하는 기준의 모호함을 우선적으로 비판한다. 차라리 아무런 능력을 갖고 있지 않다면 일반인으로서 평범하게 살아가겠지만, 혹시나 하는 바람에 테스트를 받아 부적합한 능력을 가진 이로 판별이 된다면 강제로 교정시설에 끌려가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는 이들이 많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적합한 능력을 가진 이들을 등급으로 나누어 최고 등급에 속한 이들은 스타 대접을 받으며 영웅이라는 칭한다. 이런 우상화에 길들여진 국민들은 능력을 가진 이들 중 영웅에게는 온갖 찬사와 관심을 베풀지만 부적합한 능력을 가진 이들은 혹시나 이 사회에 반하는 행동을 하지 않을까 우려하며 반동이라는 적대세력을 간주한다.


이렇게 능력자에 대한 구분이 이루어지고 국자는 음식을 만들고 그 음식을 먹은 이들의 마음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지만 일부러 낮은 등급을 받아 튀지 않는 삶을 선택한다. 국자의 친구 경남 글로리아 또한 미래를 내다보는 예지력을 갖고 있지만 일부러 자신의 능력을 낮추어 국자와 비슷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 그들이 훈련소에 있을 때 각광받던 새로 지워진 아파트 단지가 무너지는 사고가 발생되고 영웅이라 칭송받던 능력자들은 때마침 해외순방 중이라 구조에 참여하지 못하고 그보다 등급이 낮은 김숙녀와 어윤경이 무너진 건물에 깔린 이들의 구조에 앞장서게 된다. 이미 많은 이들이 죽고 다친 사고와 언제 이어질지 모를 붕괴에 두려움을 느낀 영웅과 높은 관료들은 어윤경에게 책임을 미룰 생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히어로들이 등장하는 소설이지만 그들이 가진 능력으로도 사고를 되돌릴 수는 없으며 가장 중요한 것 바로 죽은 사람을 되살릴 수는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뛰어난 능력이라도 벌어진 일을 바꿀 수는 없었다. 


어쩌면 소설 속에 등장하는 히어로들의 능력은 이미 우리 사회가 무수히 세밀한 간격으로 등급을 매겨 구분해 온 것을 반영한 것이 아닐까 싶다. 인간은 모두가 평등하게 존엄한 존재라는 사실을 어릴 때부터 가르쳐왔지만 그러한 시선으로 한 평생 살아가는 것은 삼시 세끼를 항상 잘 챙겨먹는 것 만큼이나 어려운 일이 되어버렸다. 재난 사고와 적합한 능력을 갖고 있는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테스트와 같은 설정은 비단 소설 속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근대사에 굴직한 획을 그은 사건들과 오버랩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국자와 미지의 아버지가 된 윤수일 또는 박종일과의 사랑의 연대기는 소소한 재미와 감동을 안겨주며 비정한 사회구조 속에서도 미지가 선생님으로서의 실패를 딛고 일어날 수 있는 근원이 되지 않았나 싶다. 


“회피는 생선회 접시 가장자리에 놓인 레몬 조각과 같았다. 신경썼다는 티를 은근히 내면서도 횟감에서 비린내가 나면 레몬즙을 뿌리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핑곗거리가 되기도 했다. 막상 레몬 조각을 짜다보면 레몬즙은 회가 아니라 애먼 손만 흠뻑 적시기 마련이었다.(346-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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