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로라 - 들키면 어떻게 되나요? 위픽
최진영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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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영 작가의 [오로라]를 읽었다. 위즈덤하우스 위픽 시리즈 49번째 작품이다. 표지에는 "들키면 어떻게 되나요? 사랑을 감출 수 없어요"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최유진이라는 이름의 주인공은 제주도에서 한달살이를 위해 떠난다. 바쁘고 정신없이 보낸 직장생활 중에 주어진 잠깐 동안의 유예이거나 새로운 곳에서의 출발을 위해 맛보기로서의 정착도 아닌 오로지 타인에 대한 선의로 인해 조금은 어이없게 위탁받은 친구 오세정의 예약금을 날리지 않기 위해서이다. 


지방의 한적한 곳에서 한달살이가 유행하고 있다. 특히나 제주도의 이국적인 자연경관은 도시의 일상에 지친 이들에게 확실한 기분전환의 계기가 될 수 있기에 여유가 있는 이들은 기꺼이 비용을 감내해가며 제주도의 원룸과도 같은 공간을 대여한다. 소설에서 나온 것처럼 주인공이 머문 숙소도 맨 윗층을 제외한 나머지 집들은 여느 집들처럼 오랜 시간 머무는 사람들이 사는 집이고, 유진이 머문 곳의 몇 개의 방만이 일시적인 대여 형태로 유지되고 있다. 실제로 제주도에 게스트하우스나 렌털하우스를 지어놓고 수도권에 살면서 관리자를 고용하여 운영하고 있는 주인들이 꽤나 많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주인공이 머문 숙소도 일상생활을 위한 웬만한 도구들이 다 비치가 되어있는 짧은 기간 혼자 머무는데에는 별다른 어려움이 없는 상태로 준비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한달살이를 위한 공간의 상태보다 그곳에 머물고자 하는 이의 마음일 것이다. 유진은 친구 오세정의 어이없고 심지어 적반하장의 태도로 돌변한 팔렴치하다고까지 치부할 수 있는 대응에도 불구하고 제주도에서의 시간을 받아들인다. 유진에게는 세정과의 소모적인 감정싸움보다 사랑하는 연인의 거짓말에 속아 보낸 시간에 대한 위로가 절실했기 때문이다. 유진은 제주도의 숙소에서 만난 관리인과 우연히 들른 식당에서의 호의를 계기로 조금씩 이미 어긋나버린 사랑을 추억하며 또 다른 이름을 자신에게 붙인다. 안녕하세요. 오로라입니다. 


오로라라는 이름으로 제주도에서의 새로운 자신을 마주하게 된 유진은 상처만 남긴 상대가 유부남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자신을 만나왔음을 드러낸다. 오로라라는 또 다른 이름의 제목은 작가가 선택한 주인공을 너라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독특한 화법이 아니었다면 사기 연애에 이어 결혼까지 이르는 진부한 사연의 주인공이 될 법한 유진의 여행을 좀 더 객관적으로 바라보며 공감할 수 있도록 이끌어준다. 아무리 유부남이 자신을 속이고 사랑을 속삭였다고 해도 배신감에 치를 떨며 복수의 칼을 간다 하더라도 그와 만나며 미래를 기약했을 유진의 감정은 사라지지 않고 그의 폐부에 쌓여 숨을 쉴 때마다 그와 함께 시간의 감상을 토해내는 고통을 감내하게 만든다. 


믿음, 소망, 사랑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는 성가의 가사말처럼 사랑없는 믿음은 존재할 수 없지만, 믿음없는 사랑은 가능한 것이니, 유진이 보낸 사랑의 시간은 믿음은 처음부터 전제되지 않았음에도 사랑이라는 감정이 넘쳐나 누군가에게 들키게 된다면 여전히 그에 대한 사랑이 남아있음을 숨길 수 없기에 유진은 오로라는 새로운 이름을 선택하여 믿음과 사랑에 대해서 관조하는 시간을 갖는다. 


"네가 잊은 것들을 모조리 되살려 이어 붙인다면, 망각을 복원한다면, 그렇다면 타인을 사랑하듯 자신을 사랑할 수 있을까? 너는 네가 망각한 것들을 그리워한다. 망각은 돌에 가까운가 돌과 돌 사이 바람 통로에 가까운가. 망각과 기억 중 무엇에 기대어 아직 무너지지 않고 살아가는 것일까. 아니, 이미 어느 정도 허물어졌을지도 모른다. 완전히 와르르 무너지지 않았을 뿐 어쩌면 귀퉁이부터 조금씩...(31)"


"숙소로 돌아가는 길, 거센 바람에 취기를 식히면서 너는 중얼거린다.

내가 나로 살지 않아도 되는 두 달.

바람에 목소리가 묻히는 것만 같아서 너는 조금 더 큰소리로 말한다. 

내가 나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두 달. 

숙소의 공동 현관을 열며 다짐하듯 말한다. 

내가 나를 선택할 수 있는 두 달.(36)"


#최진영 #오로라 #위즈덤하우스 #위픽49 #wef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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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한 세상
피에르 르메트르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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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르메트르의 [대단한 세상 Le Grand Monde]을 읽었다. 오랜만에 벽돌책을 읽었다. 800여쪽에 달하는 촘촘한 간격의 글씨를 읽느라 시간이 꽤나 걸렸지만 파리와 베이루트와 사이공을 오가는 네형제의 이야기에 지루함을 느낄 겨를이 없었다. 역자 후기에서도 말하듯이 일흔이 넘은 나이에 이런 놀라운 대작을 연속적으로 써낸다는 것이 정말 놀랍기만 하다. [오르부아르], [화재의 색], [우리 슬픔의 거울]에 이르는 재앙의 아이들 3부작을 읽으면서도 대체 이 많은 이야기거리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구성할 수 있는 것인지 경탄을 금할 수 없었는데, 이번 작품을 시작으로 영광의 세월 4부작이 시작된거라고 하니, 두 번째 이야기가 벌써부터 기대된다. 


혹자들은 지금 제3차 세계대전이 발생된 것과 마찬가지의 혼돈의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며 진단하고 있듯이 세계 각지에서 발생된 전쟁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오히려 새로운 냉전이 시작되는 것이 아닌가란 우려가 커지고 있다. 그 혼란의 소용돌이 우리나라도 포함되어 있기에 긴장된 촉각이 곤두서야겠지만 평화를 지켜나가기 위한 준비가 잘 되어가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지난 3부작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제2차 세계대전까지의 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면, 새로 시작된 4부작의 서막인 [대단한 세상]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1948년에 일정 기간 프랑스의 지배를 받았던 레바논의 베이루트와 완전 공산화 되기 이전의 베트남의 사이공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소설의 말미에 이르러 네 형제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누군인지 밝혀지는 깜짝 놀란 반전이 있기에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이 전작들과의 유기적인 연관성을 이루며 동시대의 실존했던 인물들처럼 생동감을 배가시킨다. 네 형제의 부모인 루이 펠티에와 앙젤은 베이루트에서 비누 공장으로 크게 성공하여 부유한 삶을 누릴 수 있었다. 그들에게는 장, 프랑수아, 에티엔, 엘렌이라는 네 자녀가 있었는데, 이들은 각자의 꿈과 자유를 위해 부모의 품을 떠나 파리와 사이공으로 떠나게 된다. 


먼저 맏아들인 장은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기 위한 과정에서 여러차례의 실수를 반복하며 자신의 무능함을 드러내게 되었고, 그의 아내 준비에브는 장과는 다른 치밀함과 약삭빠름으로 남편을 옭아매며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때는 막무가내로 밀어부치는 불도저 스타일이었다. 장은 준비에브와 전혀 다르게 소심하고 무능력해보이지만, 자신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익명의 누군가에게 억눌렀던 분노를 표출하며 연속된 묻지마 살인을 저지르게 된다. 과도한 폭력이 자행된 일련의 살인 행각들이 운좋게 발각되지 않지만 마치 준비에브는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장을 떠보기에 장은 초주검이 된 것처럼 아내에게 더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처지가 되고 만다. 


둘째 아들인 프랑수아는 장과는 다르게 바칼로레아를 합격해서 고등교사 자격을 얻을 수 있는 엘리트 코스로 나아갈 수 있는 명석함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기자가 되고 싶었기에 부모에게 거짓말을 하고 르 주르날이라는 신문사의 잡보로 취직하게 된다. 정식 기자로서 인정을 받기 위해 부단하게 애를 쓰지만 애송이 취급을 받던 프랑수아에게 절호의 찬스가 다가오게 되는데, 자신의 형과 형수를 억지로 만나기로 했던 영화관에서 벌어진 유명한 여배우의 살인 사건 현장을 두 눈으로 직접 목도하는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프랑수아는 혼란에 빠진 관객과들과는 달리 재빠르게 여배우의 가방을 뒤져 그녀의 신분을 알게 되고 그녀에게 남겨진 의문의 메시지를 기억하여 편집장에게 알려 기자로서 인정받을 수 있는 신호탄을 쏘게 된다. 아마도 다음에 이어질 작품에서는 장의 잔인한 살인 행각이 밝혀지며 프랑수아는 극도의 충격을 받게 되지 않을까 싶다. 


셋째 아들인 에티엔은 어찌보면 이번 작품의 가장 중요한 핵심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해방 후 3년째인 1948년에 우리나라는 제주 4.3사건을 비롯한 미군정의 지배와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한 혼란스러움이 지속되는 시기였는데, 에티엔의 성적지향은 이미 부모와 형제들의 인정을 받을 정도로 동성애에 대한 열린 시각이 있었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다. 처음 표지를 통해 짐작할 수 있었던 에티엔의 연인에 대한 암시는 혹시 동성연인을 향한 에티엔의 사랑이 심각한 사회적 시선과의 갈등으로 어려움을 겪는 내용이 아닐까 예상했었는데, 전혀 다른 내용이 펼쳐졌다. 에티엔은 벨기에 출신의 외인부대 군인으로 인도차이나 전쟁에 참여한 레몽을 찾아 사이공으로 떠나게 된다. 사이공에 도착하여 외환국에서 일하게 된 에티엔은 레몽의 흔적을 찾는 것과 동시에 피아스트로 환전을 통해 부당한 이득을 얻는 거래의 문제점을 발견하게 된다. 사이공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그의 거주지를 알아봐주던 지엠을(나중에는 시에우 린이라는 신종파의 교황에 이르는 어이없는 상황이 펼쳐지지만) 도와주며 레몽의 죽음을 확인하게 된다. 하지만 지엠이 로안 교황이 되고 에티엔이 부정 거래의 전모를 밝히려 그의 하인이자 또 다른 연인이 된 빈을 통해 증거를 입수하게 되어 프랑수아에게 도움을 요청하며 파리로 떠나려 하지만 고의의 사고가 의심되는 비행기 추락으로 죽음에 이르게 된다. 소설의 말미에 에티엔을 죽게 만든 이가 누구인지 엄마 앙젤과 여동생 엘렌이 사이공을 방문하며 아들의 흔적을 뒤쫓다 알게 되고, 전쟁이 지속 중이 혼란스러운 시대가 항상 그랬듯이 청부업자를 고용하여 아들의 죽음을 복수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막내 딸인 엘렌은 다른 형제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비중이 적게 나오지만 아마도 이어지는 다음 편에서 좀 더 부분을 할애하기 위함이 아닐까 싶다. 아직은 철부지인 엘렌은 부모의 품을 떠나 자유롭게 파리에서 자신의 꿈을 펼쳐보고 싶지만 결국 아버지의 청탁으로 전에 없던 기준을 부활시켜 청강생 자격으로 다니게 된 국립미술원에서도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채 마약을 파는 이들과 어울리며 방황하게 된다. 엘렌의 방황은 형제들 중에 가장 가까웠던 에티엔이 사이공으로 떠나 의문의 죽음을 당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녀가 에티엔과 주고받은 편지 덕분에 앙젤은 아들의 죽음이 단순한 비행기 사고가 아니라는 단서를 얻게 된다. 사이공에 도착한 앙젤과 엘렌이 외환국을 방문하여 장테 국장과 가스팔 이라는 음흉한 이를 만나는 장면에 대한 묘사에서 엘렌의 아름다움이 얼마나 대단한지, 젊은 여성이 성적 희롱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 적절히 그려졌다. 


에티엔이 피아스트로 거래의 증거를 프랑수아에 넘겨 언론을 통해 부정 축재를 해온 아마도 고위층의 인물들을 저격하려 했지만, 너무나도 견고한 그들의 세계는 프랑수아와 다른 형제들을 모두 납치하여 루이와 앙젤의 숨겨진 충격적인 과거를 알려주며 만일 지금 멈추지 않는다면 그들의 삶이 모두 망가질 것이라는 협박을 받게 된다. 겁에 질린 형제들은 그들의 겁박에 물러나게 되고 일상으로 돌아가게 되지만 자신의 부모님들이 과거에 어떤 잘못을 저지르고 베이루트에 정착하게 되었는지를 알게 된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하지만 루이와 앙젤의 지혜롭고 솔직한 고백으로 형제들은 부모의 선택을 이해하게 되고 루이는 장과 프랑수아에게 파리에서의 삶을 응원하고 앙젤은 엘렌과 함께 사이공으로 떠나 에티엔의 유품을 가져오게 된다. 


네 형제를 둘러싼 많은 사건들이 시작되었지만 여전히 다른 반전들이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기대된다. 4부작의 시작이기에 다음 편에서는 네 형제 중 어떤 이의 이야기가 중심이 될까, 아마도 장의 살인사건과 프랑수아의 기사가 연관된 내용이 아닐까 예상해본다. 역자 후기에는 프랑스에서 4부작의 두번째 작품인 [침묵과 분노]가 출간되었다고 하는데, 하루 빨리 번역본이 나오기를 고대한다. 


"길이 잘 보이지 않거나 불확실하게 느껴질 때, 그녀에게 일탈은 논리적 귀결처럼 보였다. 모든 것에 의혹이 일고 ,자신이 갈망하는게 무엇인지도 알 수 없는 그녀의 해결책은 윤리적 문란이었다.(139)"


#피에르르메트르 #대단한세상 #LeGrandMonde #열린책들 #임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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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단하고 녹슬지 않는 위픽
이혁진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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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혁진 작가의 [단단하고 녹슬지 않는]을 읽었다. 위즈덤하우스 위픽 시리즈이다. 표지에는 "어느 늙고 미친 여자가 이 하찮은 일에 자기 목숨을 걸었다고"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처음 자율주행 자동차 슈마허의 발명과 홍보의 과정을 거치는 재희와 세희의 이야기에서는 표지에 나온 구절과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인지 전혀 연결짓지 못했는데, 소설의 중반에 등장하는 학교 이사장 영인의 등장으로 어느 늙고 미친 여자가 누구를 지칭하는지 그리고 그 여자가 목숨까지 건 내용이 무엇인지 짐작이 가기 시작했다. 


운전을 즐기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꽤 많은 사람들이 필요에 의해서 운전을 하며 꽤나 피곤하고 성가신 일로 생각하지 않을까 싶다. 그야 당연히 차를 운전한다는 것은 나와 동승한 이의 생명 뿐만 아니라 무고한 타인의 생명까지도 앗아갈 수 있는 사고의 위험성이 항상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편의와 여유를 제공하는 자동차는 현대인의 필수품이 되었지만 차가 사람보다 많은 것 같은 과포화 현상의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러시아워와 주차 전쟁을 경험하게 되면 한적한 곳에서 두 다리로 여유롭게 거닐면 살고 싶다는 자연인의 욕망이 샘솟는다. 지금은 조금 나아지긴 했지만 몇 번의 작은 접촉사고를 경험하고 나니 아무것도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 완전한 안전이 보장된 자율주행차가 하루빨리 나왔으면 하는 꿈같은 바람을 가진 적이 있었다. 


요즘은 새차들의 사양이 워낙 좋아져서 안전에 대한 전자보조장치들이 늘어나서 자동으로 차량의 앞 뒤 간격을 조절해주어 자율주행에 대한 기대감이 더 커지게 되었다. 뉴스에서 보도되는 내용을 보면 자율주행 차를 시험삼아 운행하고 발생된 문제점들을 보완하는 단계에 이른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하지만 언제가 염려가 되는 것은 과연 백퍼센트 안전이 보장될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소설에서 슈마허를 개발하고 출시하여 폭발적인 인기를 누릴 것으로 기대했지만 처음엔 생각만큼 사람들의 호응이 시원치 않았던 것 또한 자율주행 차의 안전에 대한 불확실성이었다. 슈마허에 흠집을 내려는 사람들은 개를 피하려다 전봇대를 들이받은 사건을 계기로 슈마허에 대한 비난이 거세졌고 대표이사인 세희와 노회한 정치인같은 테드는 발명자인 재희의 의견과 상관없이 비밀리에 슈마허에 가격표를 대입시키게 된다. 결국 자율주행의 조건에서 안전이 보장되는 못하는 상황을 마주치게 되었을 때 슈마허는 선택을 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이든 재물이든 손해가 더 적은 쪽으로 말이다. 


가격표가 주입되어 업데이트된 후 슈마허는 마치 사람들이 꿈꾸던 시대가 도래한 것처럼 러시아워 시간대에도 시속 80키로를 유지하며 시원한 주행이 가능해졌고 사람들은 슈마허에 열광하기 시작했다. 

"이미 다 있는 거, 우리 다 하고 있는 거야. 보험사에는 평가액, 은행에는 신용 점수가 있고, 결혼 정보 회사에도 입사 시험에도 학교 시험에도 다 있잖아. 등급, 석차, 점수. 우리 이마엔 이미 바코드가 찍혀 있어. 리더기만 들이대면 '삑' 하고 얼마짜린지 다 나와. 모른 척하고 아닌 척할 뿐이지.(19)"


하지만 학교 이사장 영인이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이름이 붙은 AI 가정교사가 내장된 무버라는 교육용 머신으로 인해 발생된 학생들간의 다툼과 갈등을 원칙으로 해결하려는 학교 내 회의를 마치고 나오다가 눈쌓인 거리를 뛰어드는 어린 학생과 부딪쳐 뒹굴다 달려오는 슈마허를 마주하게 된다. 눈길에 미끄러지는 슈마허는 입력된 가격표에 따라 어린 학생을 피해 나이 많은 영인을 선택하여 충돌하게 된다. 심한 골절상을 입은 영인은 슈마허가 갑자기 방향을 바꿔 자신에게 달려온 것을 기억하며 회사에게 슈마허와 관련된 주행 자료를 요구하게 된다. 


가격표가 입력되었다는 비밀을 알려줄 수 없는 세희는 유능한 중재자 매튜를 통해서 영인과 협상을 진행하지만, 영인은 그 무엇도 필요없다며 진실을 알고자 한다. 회사의 중차대한 사안이 되어버린 영인의 사건은 테드의 이해타산적인 논리로 비약되고 슈마허의 성공에 마취된 세희는 인간의 도리와 같은 윤리적 기준들을 외면한 채, 영인의 사건을 계기로 한 단계 더 나아가는 기회를 삼으려 한다. 매튜는 영인의 가장 소중한 사람들이 피해를 입고 무너지는 압박을 통해 설득을 하려고 하지만 동시에 불치병에 걸린 딸의 치료를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 하는 자신과 영인의 마음이 결국은 같은 결임을 깨닫게 된다. 


더불어 재희의 아들이 무버에 의지하며 더 이상 걸을 수 없을 지경에 이르자 재희의 아내는 무버를 사들인 것을 후회하며 아들이 걷고 뛰며 살 수 있도록 눈물겨운 투쟁에 돌입하게 된다. 소설의 말미에서 엄마와 극도의 갈등을 겪던 아들이 아빠 재희에게 눈물을 쏟아내며 걸으려 노력하다 온 몸에 상처가 났음을 고백하는 장면은 결국 편리와 안전을 도모하고자 만들어낸 과학기술의 산물들이 과연 인간에게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인지의 철학적 물음을 자아내게 만든다. 매트의 회심과 재희의 사직으로 거대한 슈마허 회사와의 본격적인 법적 다툼에 돌입한 영인은 어떤 판결을 받게 될 것인지 열릴 결말로 소설을 끝을 맺지만 이는 단지 소설 속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우리 삶에 있어서 사랑해야 하는 대상에게 반드시 수반되는 고통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면 우리는 살아갈 가치가 없다는 사실이 가장 중요한 진리임을 독자들에게 일깨워 주지 않았나 싶다. 


"매튜 씨, 나는 봐야겠어요. 그래야 하는 게 있다는 걸, 원래, 누가 뭐라든 세상이 어떻고 세월이 어떻든 아무 상관 없이 당연히 그래야만 하는 게 있다는 걸요. 우리가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는 걸 허무하지 않게 만들어주는 게 하나라도, 단 하나라도 있다는 걸요. 그게 내가 생각하는 정의라는 말의 뜻입니다. 원래 그래야 하는 것, 누구도 아니라고 할 수 없이 당연히 지켜야 하고 그래서 적어도 내 가장 소중한 단 하나만큼은 허무한 게 되지 않게 해 주는 것. 내 전 재산을 다 갈아 넣어서라도, 이 종이 쪼가리에 적힌 사람들이 모두 피 흘려 쓰러지더라도 이제는 봐야겠어요. 이 일로 확실히 알았으니까요. 시간이 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한 순간에 내 모든 시간도 내 사람들처럼 사라질 수 있다는 걸요.(123)"


#이혁진 #단단하고녹슬지않는 #위즈덤하우스 #위픽 #wef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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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의 자세 소설Q
김유담 지음 / 창비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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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담 작가의 [이완의 자세]를 읽었다. 창비 소설Q 시리즈 작품이다. 때를 밀러 공중목욕탕에 간게 언제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뜨거운 김이 지속적으로 솟아나와 천장에 맺힌 수증기가 물방울이 되어 떨어질 때 갑작스레 머리 위에 찬기운이 느껴져 화들짝 놀라게 만드는 거대한 욕탕을 가진 공간에서 초록색 때타올을 장갑처럼 손에 껴고 살가죽이 벗겨지기 전까지 죽어라 몸에 학대를 가하는 것 같은 노동의 무위를 느끼고 난 다음부터인지, 아니면 이제는 물장구치며 냉탕과 온탕을 함께 왔다리 갔다리 할 유년시절의 친구가 없어서인지 모르겠지만. 어쩌다 한 번씩 온천이 유명한 곳에 여행을 갈 때야 물이 좋다니 몸을 담그고 샤워를 하는 정도로 즐긴 것이 전부인 것 같다. 목욕탕을 정기적으로 갔었던 어린 시절에도 세신사에게 몸을 맡긴 적은 한 번도 없는 것 같다. 탕비 말고도 따로 세신비를 지불해야 한다는 것도 한 몫 했겠지만, 알몸으로 플라스틱 침대위에 벌러덩 누워 생전 처음보는 타인에게 몸을 맡기는 것이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닐까 여겨졌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아이들 때에는 때를 밀때 엄청 아프기 때문에, 대체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거나 때릴 밀고 난 다음의 시원함을 어찌 알 수 있단 말인가. 


주인공 유라의 엄마 오혜자는 갑작스레 남편을 떠나보내고 타고난 몸매와 피부 덕분에 피부 관리실을 성공적으로 키워나가지만 사기꾼 남자에게 된통 당한 이후 하나뿐이 딸과의 생계를 위해 선녀 목욕탕의 때밀리로 취직하게 된다. 이후 엄마와 유라의 거주지는 여탕의 탈의실과 휴게실이 되었고, 유라는 엄마의 세신 실력 향상을 위한 희생양이 된다. 어린 나이의 유라는 엄마의 때밀이 대상이 되어 무한히 반복되는 신세 한탄과 더불어 때타올과 가만히 있으라는 엄마의 손지검으로 인해 벌겋게 얼룩지게 된다. 이후 유라가 무용의 세계에 들어서 지도자의 손길에 몸이 더 굳어지거나 점점 무거워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나, 만수 이전의 애인들과도 육적 친밀함을 나눌 수 없었던 것은 어린 시절 여탕에서 알몸으로 느꼈던 수치심의 트라우마 때문이었다. 


유라 엄마 오혜자의 억척스러움과 세신일에 있어서의 철두철미한 영업원칙등으로 인해 집과 차도 사고 딸도 명문여대에 보내는 인생역전의 강건함을 보여주지만 그럼에도 엄마에 대한 사람들의 시선은 때밀이 아줌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였다. 생각해보면 목욕탕에서 남의 몸의 때를 벗기는 일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닐 것이다. 엄청난 체력 손실을 요하고, 알몸으로 누워있는 손님의 비위를 맞추기도 해야하며, 피로에 쩔은 상대의 몸을 적절히 이완시키는 마사지 실력 또한 필요할 것이다. 분명 정당한 노동을 통해 수입을 얻는 일임에도 아주 오랜 시간 목욕탕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때밀이라고 폄하해 온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모두가 알몸으로 들어와 머무는 것이 탕 안에서의 룰임에도 불구하고 세신사들만이 유독 속옷을 입고 머무는 특권을 갖고 있다. 그렇게보면 탕 안에서는 세신사가 일반 손님들보다 권력의 상층이 아닐까. 


목욕탕은 화려한 겉옷을 벗고 알몸으로 들어가야 하는 곳이기에 누구에게나 공평한 장소일 것이라 생각하지만, 소설 속에 드러난 것처럼 오회장이 유방암 수술을 받고 한 쪽 가슴을 절제한 상태에서 아무렇지 않게 알몸을 보여주는 것을 기이하게 받아들이는 내용이 나온다. 남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는 오회장의 모습에 그제서야 외회장처럼 유방암 수술을 한 사람, 자궁을 적출한 사람, 또 다른 신체 부위를 수술하고 여전히 아파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몸을 감추지 않고 드러내며 아픔을 공유하게 된다. 생각해보면 목욕탕은 조금 위험한 곳이다. 뜨거운 수증기와 물 때문에 타일 바닥은 항상 미끄럽고, 뜨거운 욕탕물은 갑작스러운 심장의 변화를 가져올 수도 있는 곳이다.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나 또한 목욕탕에서 신체적 장애를 갖고 있는 분들을 만난 경험이 별로 없는 것 같다. 일반 대중들이 부담없이 드나들 수 있는 곳이라 여겼던 목욕탕마저 정상이라는 개념의 차별이 아주 오랜시간 지속되어온 장소였다는 것을 이번 소설을 통해서 깨닫게 되었다. 


“나는 그때서야 여탕이 온갖 사람들이 구별 없이 드나드는 곳처럼 개방되어 있어도 가만히 들여다보면 멀쩡한, 나무나 멀쩡한 몸을 가진 사람들만 자신 있게 벌거벗은 채 걸어 다닐 수 있는 곳이란 게 눈에 보였다. 목욕탕에서는 체력 소모가 컸다. 대중탕은 그것을 기꺼이 감당할 수 있는 사람들만 오갈 수 있었다. 여탕 입구 유리문에는 전염병 환자와 음주자의 출입을 금하고 뇌심혈관 질환자와 노약자의 각별한 주의를 요한다는 안내 문구가 붙어 있었다.(84)”


유라가 엄마에게 있어서 때밀이의 세계에서 벗어나 유라가 배우는 무용의 고고한 세계로 넘어갈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대를 저버리며 무용을 그만두겠다고 하자, 엄마는 평소의 습관처럼 ‘내가 누구 때문에 이 고생을 했는데’라는 레퍼토리를 읊어댄다. 홀몸으로 힘겹게 아이를 키워낸 엄마들의 진부한 한탄인지만 누구보다도 엄마의 지난 고된 삶을 잘 알기에 유라와 같은 자녀들은 진절머리 나는 그 대사에 함부로 토를 달아서는 안된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대부분의 자녀들은 그 감사한 마음과는 반대로 ‘누가 그렇게 살라고 했냐고’ 대들며 엄마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다. 유라는 진부한 막말과 더불어 남자와 모텔에 갔다는 커밍아웃으로 욕탕의 세계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다시금 그곳으로 돌아온 자신의 한계를 인정한다. 이때 엄마의 대답은 막돼먹고 싶은 유라의 막말을 단숨에 들어가게 만드는 기막힌 응대이다. 


“오늘 못하면 다음에 하면 돼. 인생은 지겹도록 기니까. 이제 잠 좀 자자. 너도 집에 들어가 잘 거 아니면 옷 벗고 편하게 누워서 자. 잠 안 오면 온탕에 한번 들어갔다 오고.(165)”


꿈을 포기하는 것으로 유년시절의 트라우마의 원천인 목욕탕이라는 장소의 구속에서 벗어나고 싶어 몸부림치는 유라의 고뇌 또한 극심한 육체적 노동에 길들여진 지친 엄마에게 있어서는 별 것 아니라는, 그까이꺼 다음에 또 하면 된다는 초연함을 보여준다. 정말 우리 삶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김유담 #이완의자세 #창비 #소설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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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사소한 것들
클레어 키건 지음, 홍한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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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어 키건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읽었다. 십여년 전에 더블린에서 공부하고 있던 친구 덕분에 아일랜드를 여행하게 되었다. 이제는 하나의 여행 루틴이 되어버린 아일랜드로 떠나기 전에 그 나라에 대한 정보를 얻고자 아일랜드 관련 여행책자를 검색해보았다. 서유럽의 유명한 나라들은 도시 이름으로만 된 여행책들이 주르륵 열거되었지만, 아일랜드를 다녀와서 쓴 여행기나 여행 정보를 담은 안내서들을 거의 찾을 수가 없었다. 최신의 여행 정보를 얻고자 했지만 어쩔 수 없이 오래 전에 쓰였던 여행기를 읽으며 비행기를 탔던 기억이 난다. 내가 알고 있는 거의 유일한 정보란 더블린에 있는 기네스팩토리에 불과했는데, 트리니티 대학 도서관에서 관람할 수 있는 오색찬란한 오래된 성경이라든지, 제임스 조이스의 동상이라든지, 코크를 지나 블라니성에 올라 허리를 젖혀 금구의 언변을 얻기 위한 성벽에 입맞춤하는 전통이라든지, 골웨이의 클리프모허와 같은 어마어마한 절벽 아래의 바닷가를 벌벌 떨며 바라본 순간이라든지, 그리고 아일랜드 특유의 펍문화를 즐기고 왔던 기억이 난다. 조금 아쉬웠던 것은 북아일랜드의 벨파스트의 세계에서 가장 큰 주상절리를 못 보고 온 것이었다. 


아일랜드에서 머무는 며칠 동안 알게된 충격적인 사실 중의 하나는 꽤 근래에 이르기까지 신교와 구교의 충돌로 오랜시간 반목하며 지내왔다는 점이다. 그냥 의견충돌이나 목에 핏대를 세우는 논쟁 수준이 아니라 피를 흘리며 서로 죽고 죽이는 지경에까지 이르러 신교의 지역과 구교의 지역이 나눠져 있을 정도라니, 이건 단순한 믿음의 차원이 아니라 종교가 정치문화 및 그들의 삶에 너무나도 깊이 뿌리내려 도저히 화합이나 관용을 찾아볼 수 없는 끔찍한 과거의 모습이 아닐까 싶었다. 우리나라처럼(사이비만 아니라면) 종교에 관대한 나라에서 지내다보면 어차피 한 분이신 하느님을 믿는 하나의 종교이면서도 갈라진 믿음의 형식으로 인해 서로의 목숨까지 위협하는 상황이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유럽 사회를 바라보게 되면 아주 오랜 시간 거의 그들의 역사 전체에 걸쳐 종교와 정치가 분리되지 않은 채 연결되어 있었고, 심지어 종교지도자들이 정치지도자와 같은 역할을 동일시하여 많은 사람들의 삶을 좌지우지할 수 있었다. 먹고 사는 문제에 있어서 그들의 힘은 너무나도 막강했고 절대자인 하느님의 축복과 저주까지 선별하여 내릴 수 있었으니 일반 대중들의 두려움과 맹목적인 복종은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다 옛날 얘기가 아니냐고 치부해 버렸을 때, 198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이 소설에 여전히 어느 수녀회가 운영하던 세탁소가 착취와 폭력이 난무했다라는 사실이, 그리고 그것을 사람들이 알면서도 ‘그들은 모두 한통속’이라는 소설 속 식당 여주인의 말처럼 10대의 어린 소녀가 강제노역에 시달리고 있음을 외면하는 모습이 너무나도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 우리나라의 형제복지원에서 수많은 어린이들이 역시나 유사한 노동과 폭력에 시달리다가 아무도 모르게 죽어나갔던 사건과도 유사한 일이 이 소설의 가장 핵심적인 배경이 아닐까 싶다. 


석탄 목재상인 주인공 빌 펄롱은 아내 아이린과 다섯 명의 딸을 둔 아빠다. 펄롱의 탄생과 유년시절은 순탄치 않았는데, 펄롱은 아버지가 누군지 모르는 사생아에 가까웠다. 나중에 어렴풋이 자신을 아끼고 돌봐준 네드가 아버지일 것이라 짐작하게 되지만, 열여섯 살에 펄롱을 나은 엄마는 미시즈 윌슨이라는 여유있는 집안의 가사일을 하다가 아이늘 낳게 된 것이다. 소설에서 미시즈 윌슨은 개신교도로 나오고 펄롱이 땔감을 납품하는 큰 고객인 수녀원은 가톨릭을 상징하며 큰 대척점을 이루고 있다. 아비없이 윌슨 부인 집에 얹혀 살수 있도록 허락되지 않았다면 당시의 시대 상황으로 보아 거리의 부랑아나 어딘가로 끌려가 강제 노역에 시달리다 병에 걸려 죽음을 당할 수 있는 애처로운 운명이었을지도 모른다. 윌슨이 결혼을 하고 석탄 목재상의 일을 어느 정도 안정적으로 운영하며 다섯 딸이 배를 곯지 않도록 먹이고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여 원하는 선물을 사줄 수 있었던 것은 윌슨 부인의 자비로움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임을 펄롱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자비로운 모습의 대명사인 윌슨 부인의 아량과 따뜻함과는 정반대의 매몰찬 모습으로 등장하는 수녀원장은 석탄광에 갇히 맨발의 어린 소녀를 발견한 펄롱에게 마치 그 소녀를 아끼고 돌보는 것처럼 위선적인 행동을 보여준다. 그리고 펄롱에게 아무것도 모르는 그 위선적인 행위에 속아넘어가기를 암묵적으로 강요한다. 펄롱의 딸들은 그 수녀원과 담벼락 하나로 붙어 있는 학교에 다니고 있었고, 딸들이 앞으로 더 잘 되기 위해서는 그 학교를 졸업하는 것이 필수적임을 그 도시 사람들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펄롱이 수녀원에서 착취 당하는 소녀를 보고 와서 아내에게 연민에서 비롯된 괴로운 마음을 토로하지만, 아내는 너무나도 현실적인 대답을 건넨다. 어찌보면 아내 아일린의 대답이 여느 사람들이 생각하는 답일 것이다. 이미 썩을대로 썩어버린 모두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나 하나 문제를 제기한다고 해서 해결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괜히 입을 잘못 놀렸다가는 그 덤태기를 내가 다 뒤집어쓸 수도 있다는, 지금 당신의 어줍지 않은 동정의 마음이 다섯 딸의 인생에 어떤 재앙을 가져올지 모른다는 암시까지. 펄롱은 아내의 말에 위압감을 느끼며 거리를 나서게 된다. 과연 이렇게 모른척, 못본척 하는게 옳은 걸까, 하지만 목에 가시가 걸린 것처럼, 마음 속 어딘가에 엄청난 돌덩어리가 들어앉은 것처럼 답답함이 지속되는데 지금처럼 살아갈 수 있을까 고뇌하게 된다. 


펄롱의 고뇌와 갈등은 크리스마스를 앞둔 아내와 딸들의 설레이는 분주함과는 또 다른 대척점을 이루며 자신을 돌봐주던 네드를 찾아가게 만든다. 하지만 네드가 머물던 윌슨 부인의 집에서 그가 입원해 있다는 소식과 더불어 처음보는 낯선 여자에게서 네드와 닮았는데 친척이 아니냐는 물음을 듣게 된다. 아 이런 식으로 아버지를 알게 되다니, 조금은 당혹스러운 상황이지만, 네드와 윌슨 부인과의 추억을 곱씹는 펄롱은 자신을 이렇게 살게 해준 그들의 따뜻한 애정을 되물림하기 위해 용기를 낸다. 그리고 그 맨발의 소녀를 석탄광에서 데리고 나와 보란듯이 시내를 거닐며 앞으로 자신과 가족에게 닥칠 불운한 일들을 기꺼이 감내할 것임을 다짐한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이라는 제목은 그 사소해 보이는 관심과 애정이 결국은 한 사람의 인생을, 사회를, 세상을 바꿀 것임을 독자들에게 일깨우기 위함이 아닐까 싶다. 


“문득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나날을, 수십 년을, 평생을 단 한번도 세상에 맞설 용기를 내보지 않고도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부르고 거울 앞에서 자기 모습을 마주할 수 있나?

아이를 데리고 걸으면서 펄롱은 얼마나 몸이. 가볍고 당당한 느낌이던지. 가슴속에 새롭고 새삼스럽고 뭔지 모를 기쁨이 솟았다. 펄롱의 가장 좋은 부분이 빛을 내며 밖으로 나오고 있는 것일 수도 있을까? 펄롱은 자신의 어떤 부분이, 그걸 뭐라고 부르든 -거기 무슨 이름이 있나?- 밖으로 마구 나오고 있다는 걸 알았다. 대개를 치르게 될 테지만, 그래도 변변찮은 삶에서 펄롱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와 견줄 만한 행복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최악의 상황은 이제 시작이라는 걸 펄롱은 알았다. 벌써 저 문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는 고생길이 느껴졌다. 하지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은 이미 지나갔다. 하지 않은 일,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은 일 -평생 지고 살아야 했을 일은 지나갔다. 지금부터 마주하게 될 고통은 어떤 것이든 지금 옆에 있는 이 아이가 이미 겪은 것, 어쩌면 앞으로도 겪어야 할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119-121)”


#클레어키건 #이처럼사소한것들 #다산책방 #홍한별 #clairekeegan #smallthingslikethe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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