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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사랑과 혁명 1~3 세트 - 전3권
김탁환 지음 / 해냄 / 2023년 9월
평점 :
김탁환 작가의 [사랑과 혁명 1-3]을 읽었다. 소설을 읽다보면 영화를 본 것 이상으로 여운이 남아 계속해서 소설 속의 장면이 떠오를 때가 있다. 1,500 여 페이지에 달하는 장구한 스토리를 따라가다보니 열흘 내내 1,800년대 조선의 전라도 곡성을 비롯한 짙은 어둠이 자리한 길도 없는 산길을 걷는 기분이었다. 리뷰를 쓰기 위해 표지에 음각처럼 인쇄된 사랑과 혁명이란 글자를 손으로 쓰러내리다 갑자기 ‘사랑의 혁명가’라는 노랫말이 떠올랐다. 벌써 30년 전인 어느 여름날 바닷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 뛰어들었다가 당신은 주님품으로 떠난 학장 신부님의 트레이트 마크와 같은 낱말이었다. 신부님이 돌아가신 이후에 신학생들은 신부님을 기리며 노래를 만들었고, 평소 신부님의 신념과도 같은 가르침을 노랫말로 삼아 오랫동안 신부님을 생각하며 불렀다.
“사랑의 혁명가는 자신을 버리고
타인을 위해서 평생을 사는 것
소박한 웃음과 불같은 열정을
한몸에 가득히 품고 산다는 것
그리스도인으로 살고 있는 현실이 꿈보다
아름답다고 말씀하시던 모습
잊지 않으리 언제까지나”
잊고 지냈던 노랫말을 떠올리니 저자가 소설의 제목을 왜 [사랑과 혁명]으로 지었는지 알 것 같았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자신 안에서 일어나는 혁명과도 같은 일이기에, 그래서 그 혁명과도 같은 일이 일어나면 사랑하는 사람은 그 이전의 자신으로 결코 돌아갈 수 없고,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그래서 사랑은 혁명일 수 밖에 없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그렇게 혁명적인 사랑에 빠진 이들의 이야기를 전해준다.
천주교에 관심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조선 말기에 극심한 박해의 시기가 있었다는 것을 들어봤을 것이다. 현재 가톨릭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로마에서도 초기 교회에서는 거의 300여년에 걸쳐 박해가 지속되었고, 목숨을 부지하며 신앙을 지키기 위해 수많은 그리스도교인들이 지하에 굴을 파고 들어가서 살았고 지금까지도 카타콤베라는 이름의 순교지로 보존되어 있다. 우리나라의 천주교 박해는 18세기 말에 시작되어 거의 백년에 걸쳐 지속되어 수많은 순교자들이 목숨을 잃었다. 당시에 양반도 중인도 천민도 가릴 것 없이 평등 사상에 입각해서 천주를 받아들였기에 이름이 없는 무명 순교자들이 많아 정확히 얼마나 많은 분들이 순교했는지는 알지 못한다. 1984년에 103위 순교 성인을 기리게 되었지만,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분들까지 예상컨대 1만명쯤 되지 않을까 추측해볼 수 있다.
유럽에 여행을 가면 성당을 보지 않고서는 역사를 알 수 없는 것처럼, 우리나라 조선 말기의 역사에서도 천주교가 도래한 부분은 생략하기 힘들다. 다른 나라에서는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선교사들에 의한 전교가 아니라 사람들이 스스로 공부하며 믿고자 했던 것은 단순히 우리나라 사람들이 종교에 관대한 마음이 있어서가 아니다. 처음 천주교가 우리나라에 소개될 때에는 양반들을 중심으로 서학이라는 이름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불교의 영향력보다 사대주의의 뿌리와도 같은 유교사상이 나라의 근간을 이루던 때이고, 기득권이 권력을 유지하는 데 있어서 공맹사상은 계급의 차이를 지속시키는 데 있어서 무척이나 효과적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계급이 정해진 삶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조선시대의 대다수였던 일반 평민들은 조선 말기에 이르러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끼니를 잇기 힘든 부조리와 부폐가 만연한 상태였다. 계급의 차이가 있더라도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정의가 존재했다면 서학의 영향력이 미비했을지도 모른다.
소설의 중간에도 언급이 되는데, 정말 악랄하고 치가 떨릴 정도로 묘사된 징제비 금창배는 유독 자신이 천주교 신자들을 발본색원하여 뿌리까지 뽑으려 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이미 조선에 천주를 믿는 이들 뿐만 아니라, 절에 다니며 부처님을 믿는 사람들, 그리고 굿을 하는 무당들도 많다고. 하지만 이들을 잡아서 문책하고 고문하며 배교를 강요하지 않는 이유는 그들의 믿음이 나라의 근간을 흔들정도로 위협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부처님께 드리는 염불과 무당에게 큰 돈을 들여 굿판을 벌인다 해도 조선의 계급 사회와 부조리와 부폐의 현실과 대립하지 않는다. 그러나 천주를 믿게 된 이들은 다른 세상을 꿈꾸기 시작한다. 양반과 천민의 차이를 없애고 예수님의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기존의 관습처럼 지속된 악습의 이별을 선고한다. 많이 가진 이들은 자신의 것을 조금이라도 빼앗길까 항상 경계하며 지내왔기에 귀신같이 알아챈 것이다. 아 이들을 가만 놔둬서는 안되겠다고.
이 소설의 가장 중요한 역사적 배경은 정해박해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4대 대박해만큼 많은 이들이 희생된 것은 아니지만 전라도 곡성을 중심으로 옹기를 굽는 교우촌을 형성해 살아온 많은 이들이 관아에 끌려가 문초에 시달리다 배교를 해서 풀려나거나 매를 맞고 고문을 당해 병을 얻어 죽게 된 이들이 적지 않았다. 천주교가 처음 서학이란 이름으로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많은 용어들이 한자어로 축약되어 사용되었다. 지금도 그대로 유지되는 단어들도 있지만 탁덕이라는 말처럼 이제는 사용되지 않는 말들도 많이 등장한다. 지금이야 전국 어느 성당을 가도 신부님을 쉽게 만날 수 있지만, 그 당시에는 가장 먼저 입국했던 중국인 주문모 탁덕이 치명당하고 나서 몇 십년 동안 새로운 탁덕을 모시기 위해 부단히 애쓰게 된다. 탁덕이 몇 명이라도 있었다면 어렵더라도 신자들은 간간히 성체를 모시고 성사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탁덕이 전무한 상태에서 공소회장의 역할은 그야말로 어마무시하게 중요했다. 어찌보면 이 소설의 주인공 중의 한 명이라고 할 수 있는 야고보 회장은 놀라운 카리스마로 덕실, 무명 교우촌을 이끌어간다.
독립운동에 관련된 영화를 보면 고구마 백 개를 먹은 것처럼 답답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꼭 나오는데, 바로 밀정을 알아보지 못하는 장면이다. 사실 최후의 만찬 이후 예수님을 잡아갈 절호의 찬스를 제공한 유다의 배신은 너무나도 유명하고 아주 머나먼 나라의 오래된 이야기라 그런지 감정이입이 쉽게 되지 않았는데, 징제비 금창배로 인해 간자로 한 평생을 산 공원방이 나오는 장면에서는 나도 모르게 분노가 치밀어 올라 반드시 그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기를 바라게 되었다. 특히나 사람이 얼마나 잔혹해질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이 있는데, 공원방이 배교하기 이전에 함께 치명하기로 약속했던 이오득 야고보의 행적을 알아내기 위해 강송이 아가다를 고문하는 부분이다. 옥리들에게 쥐를 죽이지 말고 잡아들여 사람이 들어갈 만한 항아리에 쥐를 무려 80여 마리나 넣어놓고 뚜겅을 닿아놓은 채 으름장을 놓는 것이다. 강송이 아가다에게 원하는 대답을 얻지 못하자, 공원방은 항아리 안에 아가다를 집어 넣는다. 치도곤으로 살이 터지도록 매를 치고, 주리를 틀고 뼈를 부러뜨리는 폭력과는 어쩌면 차원이 다른 고통이 아니었을까. 강송이 아가다는 쥐에게 물려 살점이 떨어지고 피가 뚝뚝 떨어지는 고통 속에서도 입을 다물지만, 옥에서 나간 후에도 그 후유증을 견디지 못해 얼마 후 죽게 된다.
우리가 흔히 사람이 몹쓸 짓을 하면 짐승만도 못하다는 비하를 하게 되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짐승은 인간과 같은 파렴치한 짓을 하지 않는다. 짐승에게는 오로지 생존을 위한 본능이 있을 뿐이지, 의도적으로 고통을 주기 위한 악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 인두겁을 쓰고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한탄이 섞인 말이 나오는 것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인간이 얼마나 지독해질 수 있는지 지속적으로 반복되었기 때문이다. 홀로코스트와 같은 만행들, 전세계에서 반복된 제노사이드. 그리고 과거를 묻어버리고 책임지지 않으려는 수많은 위정자들.
3권에 이르러서 전라감영에 갇힌 채 십여년의 옥생활을 하며 배교를 거부한 6명이 등장하는 내용은 그냥 차라리 작가의 상상 속에서 만들어낸 허무맹랑한 이야기라면 차라리 마음이 편할텐데라는 생각마저 들게 만들었다. 물론 지금도 감옥생활이 힘들고 고통스럽겠지만, 소설에 묘사된 조선시대의 옥은 그야말로 누구라도 없던 병마저 생기고 얼마나 그곳에서 버틸 수 있을지 감히 장담할 수 없는 끔찍한 상태였다. 입으로는 신념이나 자존심을 어떤 경우에도 버릴 수 없다고 쉽게 말하지만, 머리속으로 상상해온 고통과 실제 내 몸이 겪는 고통은 맞닥뜨리기 전까지는 전혀 체감할 수 없다. 생살이 터져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뼈가 휘어져 앉은뱅이가 될 수 밖에 없는 고통을 대체 어떻게 견뎌낼 수 있을까? 그러한 고통이 시시각각 다가오는 순간을 십년 넘게 견디며 치명의 순간이 왔음을 기뻐하며 기도하는 이들의 굳건함은 과연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신태보와 이태권이 주교에게 부탁받은 옥중기를 전하기 위한 방법으로 소인정 요안은 공원방이 원하는 <옹기꾼의 노래>를 적어 전해주는 묘수를 실행한다. 1권에서부터 등장한 덕실마을 교우촌 부부인 전원오 안또니와 감귀남 글나라가 일생에 걸쳐 만들고자 했던 노래인데, 자세한 내용이 나오지 않아서 얼마나 심오한 내용을 함축적으로 담으려는 것이까 궁금했는데, 3권의 말미에 그 내용이 나온다. 그리고 3권의 소제목이 왜 ‘나만의 십자가’인지 그 깊은 뜻이 담겨 있다.
“나자렛에선 가족이 원수였고
갈릴래아에선 이웃이 원수였고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길에선
가난과 배고픔과 목마름이 원수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간 다음엔
유대교라는 종교와 로마라는 제국이 원수였어라
십자가에 매달렸을 땐
원수라 여긴 모든 것들을 사랑하여야 하므로
저마다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겠다는 맹세보다
더 어렵고 무섭고 벅찬 것은 없어라
십자가를 지고도 원수가 여전히 원수라면
당신의 십자가는 십자가가 아니다
당신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3권 332)”
시간이 아무리 흘렀어도, 시대가 아무리 좋아졌다해도 불변의 진리를 뼈아프게 알려주고 있다. ‘당신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라는 말이 지나온 나의 삶을 돌아보게 만든다. 사랑이라는 말로, 십자가라는 말로 얼마나 많이 나 자신을 정당화했는가. 나와는 전혀 다른 시대를 살아간 사람이지만 이미 그때 진리를 깨달았기에 거짓 사랑과 거짓 십자가를 지닌 이들은 감히 이해하거나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고통의 시간을 인내로이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결국 새로 태어나는 모든 이들에게는 동등한 삶의 숙제가 주어진다. 사랑을 참사랑으로 받아들여 내 안에 혁명을 일으킬 것인지, 아니면 공원방과 같은 간자의 삶을 선택할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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