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2명이 퇴근하지 못했다 - 일터의 죽음을 사회적 기억으로 만드는 법
신다은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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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다은 기자의 [오늘도 2명이 퇴근하지 못했다]를 읽었다. 부제는 “일터의 죽음을 사회적 기억으로 만드는 법”이다. 책을 장바구니에 넣어 놓고 한동안 망설였다. 다른 책을 주문할 때도 마치 매직아이처럼 눈에 띄게 다가와도 일단 유보하려고 했다. 미루고 미루다 마치 더 이상 미루는 것은 직무유기를 하는 것처럼 여겨져 책을 주문했지만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책머리의 내용을 눈대중으로 살펴보지 않아도 제목이 의미하는 바가 너무나도 의미심장했기에 차라리 그냥 몰랐으면 어땠을까라는 마음까지 들었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아주 미약한 것은 책을 읽고 고요히 분노하고 슬퍼하며 연대의 마음을 가지는 것 뿐이었기에 용기를 내어 마주하기로 결심했다. 


역시나 산재 사고의 첫 장면을 그리는 내용은 페이지를 넘기기가 힘들었다. 이건 그냥 재난 영화나 소설을 위해서 작가가 상상으로 그려낸 얘기에 불과해야만 하는 것이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다. 이미 뉴스를 통해서 들어봤던 재해자 분의 이름이지만, 책을 읽어나갈수록 처음의 강렬하고 충격적이었던 사고에 등장하는 이름이 헷갈리기 시작했다. 내가 주의깊게 읽지 않아서 그런것인가 송구스러운 마음이 들 무렵 이유를 알게 되었다. 책에 등장하는 재해자 분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었다. 아니 불과 몇년 사이에 이렇게 많은 분들이 산재사고로 유명을 달리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충격적이었고, 뉴스보도를 통해서 짧은 단신으로 보도되었던 내용들을 무심코 지나쳤던 날들을 떠올리게 되었다. 


이 세상은 몸을 움직이지 않고서는 돌아가지 않는다. 내가 오늘 하루를 보내는 가운데 편안한 서비스를 누렸다면 그건 나의 몸을 대신해 누군가가 열심히 땀을 흘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를 대신하는 수많은 노동 덕분에 삶의 윤택함을 체험하게 된다. 책에도 언급된 사건인 제빵 관련 내용물을 섞는 과정에서 노동자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한 적이 있었다. 그때 뉴스 보도를 보고 주위 사람들과 아니 빵을 만들다가 사람이 죽다니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라는 대화를 나눈 기억이 난다. 우리가 너무나도 손쉽게 프랜차이즈 빵집에 들러 별 생각없이 간식거리로 산 빵에 넣을 부속물을 새벽부터 만들다가 사람이 죽다니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책에 나온 산재 사건들을 발생된 과정을 살펴보니 빵을 만드는 과정도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 아니 노동자들이 하는 모든 작업에는 언제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건설노동자에 대한 책을 읽었을 때에도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불법 하도급이 만연된 하청 구조였다. 역시나 이번 책에 언급된 내용에서도 수많은 노동자들이 원청의 하청을 받은 회사에 소속된 노동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신자유주의의 논리에 따라 이윤 추구를 최대 목표로 삼는 대부분의 회사들은 안전관리에 들어가는 비용을 최소화하려고 하고 하청을 받은 작은 기업들은 행여나 밑보여 일감을 뺏기게 될까 두려워 위험요소가 발견되어도 원청에 개선을 요구하기 힘들다고 한다. 엄청난 무게를 가진 물건들과 날카로운 속성을 지닌 도구들을 빈번하게 사용되는 노동 현장에서 최소한의 안전이 보장되지 않은 채 상처받기 쉬운 몸을 그대로 노출한 채 일할 수 밖에 없는 열악한 상황을 견딘 이들 덕분에 나는 오늘도 편안한 저녁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산재가 발생되고 나면 책임 회피를 위한 갖가지 비겁한 행동을 일삼는 사측의 방어를 보면 대체 이 나라의 정의가 존재하기는 하는 것인지 의구심이 들었지만, 생계의 위협을 느끼면서도 사건의 진상 규명과 희생된 분의 명예 회복을 위해서 분투하는 동료 노동자들의 용기와 희생에 큰 감동을 받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재해자 분들의 가족들이 재판장에서 마지막으로 읍소한 내용을 읽으며 산재 사고가 발생된다는 것은 어느 노동자 한 사람의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와 관련된 많은 이들의 삶이 다시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게 되어 결국은 우리 사회가 얼마나 이기적인 존재로 병들어 있는지 드러내는 표징임을 알게 되었다. 


책의 표지를 덮으며 가만히 눈을 감고 재해자 분들을 떠올려 보았다. 가족들에게 전해진 비보의 전화 한통이 가진 무게가 얼마나 클지 나는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다. 그리고 하루를 어떻게 숨쉬고 살아가야 하는지의 방법을 모두 잃어버린 것처럼 상심의 늪에 빠진 분들의 비통에 찬 삶을 기억하며 기도드리게 된다. 부디 하루 하루가 지날수록 아픔의 상처가 1센티씩 만큼이라도 치유되기를, 어디선가 이렇게 기억하고 연대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진 이들이 분명히 있음을 겸손되어 청해본다. 


“다만 그 시도가 지나쳐 특정인의 ‘잘못’에만 초점을 맞추게 되면 앞서 노동부와 안전보건공단이 했던 실수를 언론도 똑같이 되풀이하게 된다. 즉 ‘사고가 어떻게 났느냐’보다 ‘누가, 얼마나 큰 잘못을 했느냐’에 초점이 맞춰지는 것이다. 재해를 이해하고 재발을 방지하는 첫걸음은 어떤 위험이 왜 사고로 이어졌는가를 자세히 분석하는 것이다. 그런데 안전관리자나 사업주 등의 특정인을 도덕적으로 비난하는 데만 치중하면 더 중요한 과제가 뒤로 밀리게 된다.(221)”


#신다은 #오늘도2명이퇴근하지못했다 #일터의죽음을사회적기억으로만드는법 #한겨례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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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
권여선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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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을 읽었다. 권여선 [사슴벌레식 문답], 최진영 [썸머의 마술과학], 서유미 [토요일 아침의 로건], 최은미 [그곳], 구병모 [있을 법한 모든 것], 손보미 [끝없는 밤], 백수린 [빛이 다가올 때] 이렇게 7편이 실려 있다. 어느덧 해마다 짙은 가을이 오면 한해를 마무리하기 전에 김승옥문학상 작품집을 읽으며 쓸쓸해지고 흩어지려는 마음을 억지로라도 다잡을 수 있는 기회를 맞게 되는 것 같다.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 내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이들의 삶의 이면, 비슷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은 이웃들의 이야기 등등 소설을 읽지 않는다면 나는 얼마나 더 이기적인 모습을 살아왔을까 막막하고 두렵기만 하다. 


대상을 받은 권여선 작가의 [사슴벌레식 문답]은 제목만 보고 대체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일까 도저히 예상이 되지 않았다. 사슴벌레를 자주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도시에 살다보면 아예 곤충이라는 벌레 자체를 마주하는 것이 희미한 일이 되어 버리고 그러다보니 아무 이유없이 혐오의 대상이 되어버리고 마는 현실에서 제목부터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그리고 이른바 말장난처럼 느껴지는 펜션 주인과의 대화에서 그 말도 안되는 것 같은 문답이 어디까지 확장되어 적용될 수 있는지 상상의 나래를 펼쳐나가다보면 내가 정답이라 생각해 왔었던 범주의 영역이 때로는 얼마나 하찮은 것이었는지 사슴벌레를 무시하고 혐오했던 시간들에 용서를 청하고 싶어진다. 아무리 둘러봐도 사슴벌레가 들어올 만한 데를 찾을 수 없는데, 대체 “어디로 들어오는 것일까?”라는 질문에 “어디로든 들어와”라는 대답은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진부한 질문에 “인간은 무엇이로든 산다”라는 말문이 막히는 대답을 전해준다. 커다란 실패와 배신을 마주하게 되었을 때, “대체 앞으로 어떻게 살 수 있을까”란 막막함이 밀물처럼 밀려올 때, 자기 삶이 아니니까 막던지는 말처럼 들려오는 “어떻게든 살아가게 되어 있어”라는 무책임한 대답이 애써 감춰놓았던 지뢰의 뇌관을 건드리는 것처럼 폭주하게 만든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시간이 아주 많이 흐르게 되면 나를 폭주하게 만들었던 그 허무맹랑한 대답이 결국은 현실이 되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래 나는 어떻게든 지금까지 살아왔구나 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 당연하고도 진부한 철학적 명제가 이루어지기까지 타인은 절대로 알 수 없는 버텨왔던 시간의 밀도를 감히 어떻게 측량할 수 있을까? 


백수린 작가의 [빛이 다가올 때]를 읽고 나서도 내가 생각해왔었던 두려움과 고통이 반드시 누구에게나 공통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8살 차이 나는 사촌 자매의 첫사랑의 감정에 대한 풋풋한 고백을 소재로 하고 있지만, 시각을 상실해가는 큰 이모의 딸인 인주 언니가 엄마를 위해서 자신의 모든 욕망을 포기한 것이 아닐까란 화자의 추측은 소설의 말미에 이르러 보기 좋게 엇나가게 된다. 화자의 인주 언니에 대한 묘사에서 가족 중 누군가가 중병을 앓게 되거나 장애가 생기게 되었을 때 혈육이라는 관계는 맹목적인 희생을 강요당하게 되는 현실의 무게를 강조하는 것 같았다. 결국 인주 언니는 큰이모를 돌보며 이른 나이에 철든 효녀로 자라매김하고 급기야 엄마의 꿈이었던 대학교수의 자리에까지 이르게 된다. 하지만 엄마를 돌보며 반듯한 삶의 범위로만 살아온 인주 언니는 안식년을 계기로 화자와 뉴욕에서 재회하여 10개월 간의 자유로운 삶을 만끽하게 되고 스무 살이나 어린 카페 직원인 개리를 짝사랑하게 된다. 너무나도 뉘늦게 찾아온 사춘기에 몰입하며 행여나 인주 언니가 엄마 때문에 묻어 놓았던 욕망을 폭발시키는 것은 아닐까 염려했지만 안식년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 일상의 삶의 살아가게 된다. 누구나 경험하게 되는 첫사랑의 감정을 십대가 아닌 사십대에 치르게 되었다는 통속적인 이야기가 되어버릴 뻔한 순간에 화자는 인주 언니와의 이야기를 회상하며 독자에게 큰 깨달음을 준다. 인주 언니가 시각을 상실한 큰 이모와 해질녘의 산책한 날들의 대화이다. 


“엄마가 살아 있을 때 우리는 언제나 하루에 한 번씩 해질녁에 산책을 나섰어. 언니가 큰이모 이야기를 꺼내는 건 재회한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고, 그래서 나는 더 집중해 귀를 기울였다. 앞이 안 보이는 큰이모가 언니의 팔꿈치를 부잡은 채로 둘은 동네 공원을 천천히 걸었다고 했다. ‘이제 생각해보면 엄마와 그렇게 꼭 달라붙은 채 매일같이 시간을 보낼 수 있던 건 다른 사람들은 누리지 못할 축복이었어.’ 그리고 언니는 또 이렇게도 말했다. 걸으면서 언니는 큰이모를 위해 보이는 풍경을 묘사해주곤 했다고. ‘엄마와 여길 같이 걸었다면, 나는 이 아름다움을 묘사하기 위해 애를 썼겠지. 사방이 믿을 수 없을 만큼 환하고, 온통 부드러운 흰빛이라고. 눈 위로 떨어져내리는 햇살은 아주 연한 노란색이라고.’ 그렇게 묘사를 하고 나면 큰이모는 ‘이젠 내 차례야’라고 말하곤 했다고 했다. 그리고 큰이모는 시각을 잃은 후 얻게 된 예민한 다른 감각들을 활용해 큰이모가 느끼는 풍경을 언니에게 묘사해주었다. 바람이 어제보다 부드럽고 가볍구나. 눈 때문인지 사방에서 지난여름 우리가 쪼개 먹었던 수박 향이 나는구나. 까치 소리가 평소보다 가깝게 들리는구나. ‘엄마가 묘사해주던 그 세계 역시 정말로 아름다웠어’”(317-318)


지나간 시간들을 자주 떠올리게 된다. 그때 지금의 나를 있게 한 선택이 아닌, 다른 결정을 내렸더라면 나는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혹은 정반대의 선택을 했다 하더라도 결국은 돌고 돌아 지금과 같은 상황을 비슷하게 마주하고 있지는 않을까 라는. 그래서 지금 마주하고 있는 회피하고만 싶은 현실을 가치있게 바라보지 못하는 이유는 과거의 잘못된 선택 때문이 아니었을까란 어리석은 후회만 반복하게 된다. 하지만 타인의 눈에 불행으로만 여겨지는 순간이 오히려 큰 축복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처럼 잘못된 선택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이유와 근거를 찾아 타당함을 주장하기 보다는 나의 한계를 인정하고 맞닥뜨린 현실이 주는 무게를 겸허히 받아내는 것만이 나를 살게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2023김승옥문학상수상작품집 #권여선 #사슴벌레식문답 #백수린 #빛이다가올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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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을 더하면
은모든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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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모든 작가의 [한 사람을 더하면]을 읽었다. 마스크를 한 묶음이 아니라 한 장에 5천원 가까이에 구입한 때가 있었다. 그나마 그것도 없어서 못 살 판국이었으니, 그때 어렴풋이 나마 대공황이나 전쟁과도 같은 무질서한 상황이 펼쳐지면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란 두려움이 느껴졌었다. 지긋지긋한 마스크와 어느 정도 이별을 하고 지내는 요즘 팬데믹이 또 다시 찾아온다면 이란 가정은 끔찍할 정도로 그리고 싶지 않은 미래이다. 이번 소설의 배경은 지금과 그리 멀지 않은 20여년 후의 미래를 그리고 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과는 너무나도 다른 아니 지금 우리가 우려하고 있는 나쁜 일들이 한꺼번에 다 발생된 것처럼 각박한 삶이 그려지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번 소설의 가장 뚜렷하면서도 특이한 가정은 바로 집합 가족이라는 개념이다. 피를 나눈 혈연관계인 가족을 원가족이라 칭하고, 결혼과도 같은 제도로 얽힌 가족이 아니라 그저 철저한 경제적 관념에 의거해 함께 살아가는 가족을 집합 가족이라 칭하고 있다. 그도 그럴만한 것이 소설의 주인공으로 나오는 이심은 가정의학과 의사이지만 경제적 풍요로움은 눈꼽만치도 찾아볼 수 없고 일반 노동자처럼 하루 하루 발생되는 비용과의 피곤한 신경전을 벌여야 하는 상태이다. 더군다나 이심은 아직 집합 가족을 정하지 못해 몇 년 동안 혼자 살고 있기에 독신세를 부담해야 해서 더욱 경제적 상황이 열악하진 상태이다. 1인 가족이 점점 늘어가는 작금의 상황에서 혼자 사는 이들이 과중한 독신세를 부담해야 한다는 설정은 독특하면서도 급격하게 변화하는 현대 사회의 여러 가지 양상들을 반영하고 있는 설정이 아닐까 싶다. ‘무도회’라는 이름으로 집합 가족을 찾는 이들의 모임은 독신세의 부담이 엄청나기에 함께 살 사람을 찾아야 하지만, 이왕이면 자신에게 도움이 될 만한,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피해를 주지 않고 편하게 지낼 상대를 찾게 될 것이다. 


이심은 가정의학과 의사이지만 공공의료기관에 등록되어 있기에 국가에서 지정한 바우처를 사용하고자 신청한 이들에 한해서만 왕진을 나가 진료를 해준다. 만일 바우처를 사용하지 않는 이들을 진료했다가는 방지법에 의해 처벌을 받게 되니, 과거 공산주의 치하의 전체주의 발상이 고도로 의학과 과학이 발달한 미래에서도 충분히 적용될 수 있다는 두려움을 갖게 만든다. 마치 무상 진료를 해주는 것처럼 바우처를 남발하지만 결국 소시민들은 원하는 때에, 원하는 만큼 충분한 진료를 받지 못하기에 첨단 의학의 발전은 그들에게 무용지물일 뿐이다. 이에 반해, 부자라는 말이 소거된 미래 사회에서는 대신에 자산가라는 말이 통용되며 SNS를 통해 상대적 박탈감을 불러일으킬 만한 게시물이 금지되는 법을 통해 부자들의 세상은 완전히 감춰지게 된다. 비용을 지불하지 않고서는 국가에서 통제하는 공공 뉴스 밖에 시청할 수 없는 많은 이들은 유료 뉴스를 통해서만 전해지는 실제 사건의 진실을 모른 채 살아갈 수 밖에 없다. 


이심은 무도회를 통해 알게된 샴푸의 요정이 있는 가족과의 삶을 선택하려고 하는 순간에, 어린 로아가 계란 알레르기가 있다는 사실에 무심했던 쌍둥이 형제 훈민에게 실망감을 느끼며 선택을 철회하게 된다. 그리고 그 가족에게 관심을 갖게 된 첫 무도회에서 어설픈 실력으로 칵테일을 만들어준 모영과 급속도로 가까워져 함께 집합가족을 이루게 된다. 경총이라는 미래의 독재자와 같은 지도자로 인해서 부자와 일반 시민들의 갭은 더욱 멀어지게 되었고, 부자들이 어떤 감세혜택을 받고 그들만의 세상을 이루며 살아가는지 일반 시민들은 전혀 알지 못하게 된다. 이심은 어느 날 우연히 엄마의 옛 친구에게 초대를 받아 부자들이 사는 곳을 방문하게 되고, 엄마와 함께 그곳으로 넘어올 것을 제안 받는다. 서안이라는 엄마의 친구가 머무는 곳은 집합 가족들이 아등바등 살아가는 대신 온갖 풍요로움을 다 누릴 수 있는 유토피아 같은 곳으로 그려졌다. 


서안이 머무는 세계와 이심과 모영이 사는 세계는 어찌하여 자유롭게 왕래할 수 없는 것인가? 사람들이 흔히 꽤나 넉넉한 사람들이 끊임없이 재물에 욕심을 보이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쉽게 말한다. 누가봐도 충분한 재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더 큰 돈을 벌기 위해 욕심을 부리는 것은 돈에도 중독될 수 있기 때문이다. 쓰지 않더라도 늘어나는 통장잔고를 보면 그냥 기분이 좋아지는 희열에 빠진 것이다. 그보다 더 무서운 이유는 부디 그냥 망상이길 바라고 싶지만, 특정한 부와 권력을 누리는 사람들은 자신이 누리고 있는 지위를 타인에게 나눠주기를 싫어한다는 것이다.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이들을 바라보며 연민의 마음을 갖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누리지 못하는 것을 자신이 속한 극소수의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누리는 것에 꽤나 큰 만족감을 얻는 것이다. 이 소설에 나온 방지법을 토대로 비뚤어진 세상이 바로 이렇게 계급화되고 철저히 분리된 이들의 자화상이라고 할 수 있다. 


경총을 비롯한 권력을 가진 이들이 어떻게 자신의 지위를 높여 가는지 설명하는 대목이 비단 소설 속의 한 인물에 대한 묘사만이 아니라는 느낌적인 느낌이 드는 씁쓸한 비유를 곱씹어 본다. 

“예컨대 지금도 어느 실험실에서 은밀하게 이루어지고 있을지 모르는 유전자조작의 방식부터 경총의 수법까지 무엇이든 명료하게 짚어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비리 의혹이 제기되면 우선 단호하게 부정하여 시간을 벌고, 사익을 추구하여 벌인 일의 극히 일부에 불과한 공적인 요소가 사건의 본질인 것처럼 호도하며, 적절한 시점에 꼬리를 잘라 책임을 떠넘기고서는 다른 화젯거리를 띄워 관심사를 돌리는 경총의 기술은 가히 예술적이니 한 번쯤 꼼꼼히 살펴보라는 말도 덧붙였다고 했다.(89)”


#은모든 #한사람을더하면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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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 단편 만화선 세트 - 전9권 무라카미 하루키 단편 만화선
김난주 외 옮김, 무라카미 하루키 원작, Jc 드브니 각색, PMGL 만화 / 비채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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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펀딩에 참여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네요. 역시나 받아보니 페이지에 지문이 남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한 장을 넘기기게 됩니다. 막연히 상상속에 그려왔던 하루키월드가 이렇게 이미지로 구현됨에 찬사를 보내며 강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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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버지들의 마지막 나날
조엘 디케르 지음, 윤진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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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엘 디케르의 [우리 아버지들의 마지막 나날]을 읽었다. 우리가 일하느라 정신없이 너무 바쁜 날을 보내거나 견디기 힘든 일을 지속해야만 할 때, 비유처럼 전쟁같은 나날을 보내고 있다고 쉽게 말한다. 어쩌면 전쟁이라는 단어를 중간에 넣어서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전쟁을 겪지 않는 이들이기 때문에 가능할 것이다. 인간이 극도의 공포를 경험하고 나면 그 공포를 경험하기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기 어렵다. 마치 공포로 인해 인간의 머리와 마음 속 어딘가의 균형을 이루며 살아가도록 만드는 장치에 이상이 생긴 것처럼 이상한 증세를 보이기도 한다. 어릴 때만 해도 역사 시간에 배운 세계대전과 한국 전쟁이 다시는 반복될 수 없는 인류의 가장 큰 실수와 잘못이라고 생각했었다. 앞으로 또 다시 유사한 형태의 전쟁이 일어난다면 인간은 이전과 같은 행복을 절대로 누릴 수 없을 것이기에 그 누구도 전쟁을 일으키려고 하지 않을 것이라 쉽게 단정지었었다. 


하지만 우리가 한국 전쟁 이후 경제 발전을 위해서 부단히 허리띠를 졸라 매고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할 때에도 지구상의 어딘가에서는 끊임없이 크고 작은 전쟁이 지속되고 있었다. 그리고 팬데믹이 끝나가려는 시기에 설마 했던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시작되었고, 벌써 2년 째 전쟁이 지속되고 있다. 그리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의 참혹한 실상이 길게 이어지는 것은 아닐까 우려가 되는 상황에 팔레스티나와 이스라엘의 전쟁까지 시작이 되었다. 뉴스에서는 폭격을 맞아 무너진 건물 더미에 깔린 사람들과 피를 흘리며 병원에 후송되는 사람들의 장면들이 지속적으로 보도되고 있다. 너무 잔인한 장면들은 분명 방송으로 보여주지 않겠지만, 아마도 그곳은 아비규환이라는 말이 맞아떨어지는 지옥과도 같은 상황이 아닐까 싶다.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그리고 전쟁이 아니라도 해도 생전에 만나거나 엮일 일이 전무한 나라 사람들의 이야기라서 그런지 뉴스를 통해 보도되는 참상을 보면서도 그들의 아픔을 헤아려야 하는 공감의 기능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 것만 같다. 지금 이 순간에도 가자 지구에서는 3분 마다 어린이들이 죽어나가고 있다고 하는데, 우리는 여전히 맛집이 나오는 정보 프로그램을 보고 친구나 동료에게 내일은 무엇을 먹을까 시답잖은 농담을 던지고 있다. 하긴 광화문 광장에서 세월호로 희생된 학생들의 부모들이 단식 투쟁을 할 때, 그 옆에서 먹방을 선보인 무뢰배들도 있었으니, 그 먼 나라의 고통에 동참해 달라는 부탁은 언감생심일 것이다. 


사람이 인간이고 인격을 가진 존재일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이렇게 인간으로서의 존재를 가장 부각시킬 수는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 능력이 떨어지지 않을 수 있도록 부단히 노력하는 자세가 아닐까 싶다. 마치 베터리가 다해 더 이상 기능을 하지 못하는 것처럼, 타인의 고통에 무덤덤해지는 마음을 다잡으려고 애쓰지 않는다면 더는 그런 공감 능력을 회생시킬 수 없는 인두겁을 뒤짚어 쓴 몸뚱아리에 불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타인의 극심한 고통의 순간을 외면하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이미 벌어진 일을, 지나간 과거를 뒤짚어 본다 하더라도 결코 돌이킬 수 없다. 하지만 내가 편히 먹고 자고 쉬는 동안에 누군가가 지나왔을 지옥같은 시간의 면면을 유심히 살펴보고 나면 주위의 사람들을 바라보는 시선의 변화가 생긴다. 혹시나 저 사람도 그런 극심한 고통의 시간을 견디고 있는 중은 아닐까란 염려와 배려의 마음. 누군가 나에게 그런 마음의 흔적을 보여준다면 우리는 엄청난 위로를 받게 되고 그 염려와 배려의 마음 덕분에 살아갈 힘을 얻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군에 점령당한 프랑스의 젊은이들이 영국의 모처에 모여 몇 달 동안 특수 군사 훈련을 받으며 첩보원으로 거듭다는 내용을 그린 이 소설은 단순히 전쟁으로 인해 발생된 국가간의 반목이나 드라마틱한 작전 성공을 영화처럼 그려내지 않는다. SOE 비밀 정보원이 된 폴에밀 곧 팔은 어린 나이에 조국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훈련을 받아 마침내 프랑스에서 여러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유능한 첩보원이 된 팔은 함께 훈련받은 가족같은 전우들과 사랑하는 연인 로라까지 얻게 되지만, 몇년 간 연락하지 못한 홀로 지낼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에 몸서리친다. 비밀 작전을 수행하는 긴장감 속에 지속된 이야기는 팔이 자신의 신분으로는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하며 정점에 달하게 된다. 자신을 애타게 기다릴 아버지를 위해서 자신에게 호감을 보인 레지스탕스 마리를 이용해 아버지에게 자신의 안위를 전하는 엽서를 보내게 된다. 


하지만 팔과 같은 이들이 영국에서 훈련되어 독일군을 염탐하고 작전 방해를 위해 프랑스로 보내진 것처럼 독일군 방첩대에서도 영국 비밀요원들과 레지스탕스를 잡아내기 위한 이들이 있었다. 쿤처라는 독일군 소속의 장교는 결국 마리의 꼬리를 잡아 염탐하던 중 팔이 아버지를 만나러 간 순간에 맞딱뜨려 팔에게 선택을 강요한다. 아버지를 수용소로 보내 비참한 최후를 맞게 할 것인지, 아니면 파롱과 로라가 머물고 있는 안가의 주소를 말하던지 말이다. 결국 팔은 동료와 사랑하는 연인을 쿤처에게 팔아넘기고 아버지를 구하게 된다. 팔은 독일군 수용소에 끌려가 참수형을 당하게 되고, 쿤처는 팔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팔의 아버지를 지켜보며 그가 살아갈 수 있도록 가짜로 만든 팔의 엽서를 지속적으로 보내게 된다. 


소설 속에서 어이없는 우연의 연속은 쿤처가 팔의 끄나풀이었던 마리가 치마 속에 권총을 숨기고 자전거를 타고 가는 모습을 발견하는 장면이다. 마리가 연합군의 폭격으로 사망한 사랑하는 연인을 닮지 않았다면, 파롱이 마리에게 추근덕거리다가 권총을 선물로 주지 않았다면, 쿤처가 마리를 유심히 지켜보며 팔의 아버지에게 엽서를 전달하는 것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쿤처는 팔을 잡아내어 독일군의 근거지를 폭파하려던 작전을 저지시켰음에도 팔에게 아버지를 선택하도록 종용한 자신의 상황을 몹시도 증오스러워 한다. 프랑스를 비롯한 연합군에게 독일군은 악마와도 같은 이들이었겠지만, 반대로 쿤처의 연인처럼 연합군에 의해서 죽임을 당한 이들도 있다. 결국 전쟁은 서로가 서로에게 사랑하는 이들을 강제로 빼앗이 복수심을 불타오르게 하여 고통만을 가중시키는 인간의 가장 추악한 모습이다. 


가자 지구의 무너진 건물 잔해의 먼지를 뒤짚어쓰고 피를 흘리는 어린 아이를 안아 들고 울부짓는 팔레스티나인들은 이스라엘의 유대인들을 향해 복수심을 불태운다. 갑작스러운 하마스의 포격으로 콘서트 장에서 죽임을 당하거나 납치를 당한 이들의 부모들은 팔레스티나인들을 하마스와 같은 테러집단으로 단정지으며 그들을 몰살시키려고 한다. 얼마나 많은 자녀들이 부모를 잃은 채 제대로 먹지도 잠들지도 못한 채 복수심에 불타는 유년기를 보내야만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는 것일까? 얼마나 많은 부모들이 전장에 나간 자녀의 전사 소식을 듣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하루를 보내야만 이 비극의 나날을 멈출 수 있을까? 소설 속에 등장한 인물들은 허구에 불과할 지 모르지만 내가 모르는 어딘가에서 제2의 팔과 제2의 쿤처가 생겨나는 것은 아닌지 씁쓸한 마음이 든다. 


“그들은 이제 어떻게 될까?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악마가 분명 또다시 나타날 것임을 그들은 알고 있다. 인류는 쉽게 잊기 때문이다. 인간들은 기억하기 위해 기념비와 동상을 세운다. 기억을 돌에 맡기는 것이다. 물론 돌은 잊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들은 돌의 말에 귀기울이지 않게 된다. 그렇게 악마는 또다시 나타난다. 그러나 그때도 여전히 어딘가에 진정한 인간이 있지 않겠는가.(482)”


#조엘디케르 #우리아버지들의마지막나날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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