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은 조금만 - 자부심과 번민의 언어로 쓰인 11인의 이야기
이충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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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충걸 작가의 [질문은 조금만]을 읽었다. 부제는 "자부심과 번민의 언어로 쓰인 11인의 이야기"이다. 인터뷰이가 되어 자신의 이야기를 잘 모르는 인터뷰어에게 털어놓게 되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누군가 나에게 지나온 삶의 여정을 물어봐주고 지금까지 이룬 일에 대한 칭송과 더불어 그러한 개인적 또는 공적 과업을 이루기까지의 지난한 시간들이 어떠했는지 묻게 되는 것 말이다. 사람들을 개인적으로 만나 차를 마시거나 밥을 먹거나 술을 한 잔 하게 되면 아주 어색한 관계가 아니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자기 얘기를 들어주기를 바라게 된다. 누가 물어본 것도 아닌데 마치 마법에 걸린 것처럼 안물안궁의 TMI까지 낱낱이 얘기해주는 사람도 있다. 듣고 있다보면 대체 왜 나한테 이런 사적인 얘기까지 해주는 것일까란 의아함과 더불어 약간의 지루함이 더해질 때 쯤, 자신의 얘기에 더 집중하라는 듯이 저 깊은 마음의 심연 속에 담아두었던 말을 툭하니 던지는 경우가 있다. 마시던 술이 홀딱 깨듯이, 마시던 물에 사래가 들리듯이 깜짝 놀라게 되지만 상대방의 눈을 보니 어렵게 진심을 토로하는 것이 보여 '뭐라고요' 라는 반응도 보이지 못한 채 몇 알 남지 않은 집중력을 끌어모아 집중력을 발휘하게 된다. 


어쩌면 우리가 바라는 인터뷰는 대중들이 듣고 싶어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보다는 인터뷰이가 하고 싶은 말을 맘편히 할 수 있는 분위기와 장을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책의 제목처럼 말이다. 그래서 그런지 다른 인터뷰집과는 다르게 구성조차도 통상적인 인터뷰어의 이름과 질문에 이어지는 인터뷰이의 이름과 대답이라는 형식이 아니라 마치 인터뷰어인 저자 개인의 에세이의 중간에 인터뷰이의 생각과 의견을 인용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저자가 어떤 주제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다가 불현듯 인터뷰이가 했던 말이 떠올라 그 내용을 삽입하고 또 다시 자신의 생각을 펼쳐나가는 것처럼 보인다. 부제에 쓰인 것처럼 이번 인터뷰집에는 최백호(지금의 노래), 강백호(마운드의 토르), 법륜(다름의 평등함), 강유미(마음속의 완구 공장), 정현채(파도 속의 영원), 강경화(최초의 이름), 진태옥(백자의 마음), 김대진(캠퍼스의 호로비츠), 장석주(소년의 심장), 차준환(얼음의 꽃), 박정자(죽음의 왈츠)님 등 총 11명과의 대화가 실려 있다. 연예인, 예술가, 운동선수, 공무행정가, 디자이너, 교수, 종교인에 이르까지, 20대의 청년에서 80대의 노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직업군과 연령대를 넘나든 인터뷰가 담겨 있다. 


인터뷰이들은 모두 우리나라에서 이미 이름을 알린 유명한 분들이고, 나이가 많은 분들은 그동안 이룬 업적들이 많고 놀라워 아마도 꽤 많은 이들이 롤모델로 삼고 있을 것이다. 어떤 특정한 분야에서 성공한 유명한 이들을 보면서 아주 단순하게도 그들과 나는 다른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들은 나처럼 재능이 없지 않다거나, 나처럼 게으르지 않았다거나, 나처럼 운이 나쁘지 않았다거나 하는 지극히 주관적이고 아무 근거없는 생각 말이다. 어째서 이런 편견이 자리잡게 된 것일까 생각해보니 그들이 이룬 성과의 현재의 명성을 막연히 부러워해서 작은 터럭이라도 묻은 흠을 내고 싶은 편협한 마음에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싶다. 하지만 이렇게 자신의 삶에 대한, 지금까지 이룬 성과에 대한 그리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에 대한, 지금의 직업을 대한 생각을 토로하는 내용들을 읽다보면 결국 그들과 나는 전혀 다른 사람이 아니라는 너무나도 자명한 사실을 깨닫게 된다. 나와 똑같은 고뇌와 방황의 시기를 보내고, 못나 보이는 자신을 한탄하는 세월을 보낸다. 그리고 사람들이 사적인 자리에서 자신의 어떤 부분을 인정해줬으면 좋겠다는 말을 툭하니 내뱉는 것처럼 인터뷰이들은 인터뷰어의 질문의 의도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스스로의 직업에 대한 자부심과 그 일을 지속적으로 할 수 있도록 버텨온 자신을 날것의 말로 들려준다. 이러한 자기 일에 대한 만족과 자신감은 상세히 묘사하지 않아도 그가 어떻게 지금까지 성실히 살아왔는지를 보여준다. 인터뷰이들의 삶에 대한 성실함과 진실함이 인터뷰어의 문학적 묘사와 곁들어져 있기에 부제에 담긴 '자부심과 번민의 언어'라는 표현이 우리 삶에 정말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고 있다. 


"어떤 세계 안에서 누군가를 알고 싶다면 그의 결핍을 들추어야 할 것이다. 각자는 자기가 맛본 세계의 유일한 중심체, 그가 겪은 것을 경험하지 못하는 한 완전한 이해는 없다. 그 마음의 극단으로 다가가 더 깊이 엿본다 해도 모든 글자는 감상적인 암호에 불과할 것이다. 그는 타인이 그리는 사람이 아니고, 그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도 아니니까.(8)"


#질문은조금만 #이충걸 #한겨레출판 #하니포터 #하니포터6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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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소감 - 다정이 남긴 작고 소중한 감정들
김혼비 지음 / (주)안온북스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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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혼비 작가의 [다정소감]을 읽었다. 부제는 "다정이 남긴 작고 소중한 감정들"이다. 이미 [아무튼 술]과 [전국축제자랑]을 통해서 깨알같은 유머와 불현듯 훅 치고 들어오는 감동을 받았던 기억 때문에 기대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이번 책은 정말 좋았다. 어떤 문장은 읽는 순간 '아 이 글을 쓰기 위해서 저자가 얼마나 오랜시간 심혈을 기울였을까, 이런 문장은 얼마나 고뇌했기에 가능한 것일까.' 란 감탄과 더불어 독자가 한 번 쓱 읽고 지나가는 한 줄, 한 페이지를 위해서 작가들은 그 몇 십배, 몇 백배에 해당되는 숙고의 시간을 보낼 것이라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내용이 많았다. 그래서 읽는 동안 이런 감정의 소감을 나눠줘서 고맙다는 말이 절로 나올 지경이었다. 특히나 프롤로그에서 "글 쓰는 일이란 결국 기억과 시간과 생각을 종이 위에 얼리는 일이어서 쓰면서 자주 시원했고 또한 고요했다.(8)"는 내용은 페이지를 멈추고 가만히 단어 하나하나를 음미하기에 충분했고, 글을 쓴다는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을 가장 투명하게 비춰볼 수 있는 계기라는 성찰을 가져다 주었다.


근래에 '츤데레'라는 말이 유행한다. 인터넷에서 검색해보니 "쌀쌀맞고 인정이 없어 보이나, 실제로는 따뜻하고 다정한 사람을 이르는 말"이라고 설명한다. 또한 위키백과에는 "일본의 인터넷 속어로 새침하고 도도한 모습을 나타내는 의태어인 츤츤, 부끄러워하는 것을 나타내는 일본어 의태어 데레데레의 합성어"라고 말한다. 요즘에는 더불어 MBTI가 유행하면서 외향적인 E성향과 내향적인 I성향에 대한 얘기도 많이 떠돌고 있다. 아무래도 사회생활을 하는데 있어서는 외향적인 E성향이 도움이 많이 되지 않을까 싶다. 낯을 가리지 않고 흔히 '살갑다' 혹은 '곰살맞다'라는 말로도 표현될 수 있는 친근한 행동들은 타인의 경계를 쉽게 무너뜨리고 긴장감을 완화시켜 함께 있는 시간과 공간을 편안하게 만들어준다. 하지만 과도한 친한척은 이해관계가 우선시되는 공적인 만남에서는 오히려 마이너스의 효과를 가져오기도 하기에 천성적으로 외향성이 강하고 어색한 기류가 흐르는 것을 못 견디어 하는 사람들은 '사람이 가볍다'라든지 '믿음이 가지 않는다'라는 말로 본심이 오해받기도 한다. 그래서 그런지 현대 사회에서는 '츤데레'와 같은 사람을 선호하는 것 같다. 아주 오래전의 시골인심과는 정반대로 서울깍쟁이와 같은 경계태세가 기본이 되어야 하는 시대를 살다보니 사회생활의 관계에서는 어느 정도 본래의 모습을 감추고 사무적이고 딱딱한 태도를 갖춰야 신뢰를 줄 수 있다고 믿는 것 같다. 


하지만 몇 번의 안면을 트고 나면 처음의 드높은 경계심은 어느 정도 사라지고 상대방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지기 마련이다. 향후 지속적으로 만남을 가져야 한다면 아마 이런 기대와 궁금증은 더욱 커질 것이기에, 이후에 불쑥불쑥 드러나는 원래 모습을 감추기란 쉽지 않다. "처음에는 그렇게 쌀쌀맞아 보이더니 알고 보니까 아주 다정한 사람이었어."라는 말들은 결국 그 사람은 꽤 괜찮은 사람인 것 같아, 앞으로도 계속 신뢰를 갖고 만나도 될 것 같아 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특히나 연인 사이라면 아무한테나 친절하고 다정한 사람보다는 오로지 나한테만 숨겨진 다정함을 보여주는 츤데레 같은 사람을 원하게 된다. "아 이 사람은 내면 깊숙한 곳에 담아준 다정함을 오직 나에게만 보여주는구나, 나를 그렇게 많이 아끼는구나" 라는 뿌듯함을 갖게 해준다. 그런 면에서 일반적인 다정함이 아닌 사골을 우려내듯이 찐득한 다정함은 고이고이 간직해서 바닥을 치고 있는 소중한 이에게 선물처럼 내어주어야 겠다는 다짐을 하게 만든다. 


'가식에 관하여' 편에서는 그동안 위선에 대해서 당연히 느껴왔었던 부정적인 생각들을 뒤집는 전환이 있었다. 위선을 포기하고 솔직하게 진실을 드러낼 때 오히려 재앙 같은 일이 벌어지게 된다는 말은 지속적인 위선을 유지하는 것은 웬만큼 노력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고 오히려 솔직함을 빙자해 책임을 놓아버리는 행동이 타인에게 더 큰 상처와 아픔을 줄 수 있음을 일깨워준다. 특히나 직장 생활에서 위선적인었던 팀장과 정반대의 직설적인 팀장과의 일화는 가식과 위선의 시대성을 반영하고 있다. 위선에 대한 저자의 긍정적인 해석은 분명 불완전한 존재로서의 자기 자신을 인식하고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의지가 반영된 것이기에 그동안 위선적인 자신을 탓해왔다면 오히려 조금씩 아주 조금씩 괜찮은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는 신호로 받아들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마치 큰바위 얼굴을 닮은 사람을 찾고자 헤매였던 소년 자신이 그 얼굴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더 스퀘어> 영화에서 등장인물이 자신과 타인에게 커다란 상처를 주거나 해를 입혀 결국 파국을 맞는 순간은, 사람들의 위선이 벗겨진 순간 그러니까 누구도 더 이상 위선을 부리지 않고 있으며, 부릴 의지도 없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만약 끝까지 약자를 배려하는 척, 정의로운 척 위선이라도 부렸더라면 누구도 다치지 않고 넘어갔을 일이, 꼭 위선을 벗는 바람에 큰 문제가 된다.(54-55)"


'문 앞에서 이제는' 편에서는 학교에서 외톨이였던 반 친구 M과의 일화를 전하고 있다. 아마도 같은 또래의 친구들과는 어울리기 힘든 취향과 생각을 갖고 있었을 그 친구에게 다가갔던 저자는 다정함을 건네며 M이 고립되었던 시간을 구원한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다른 반이 되고 다시금 홀로 된 M이 홀로 점심시간을 견디는 모습을 보고 저자는 다가가 수다를 떨며 M의 웃음소리를 기억하게 된다. 갑작스럽게 전학을 가며 편지를 남긴 M의 마음을 읽으며 저자가 펑펑 울었다는 내용은 전혀 알지 못하는 M이 보냈을 어쩌면 그렇게 외톨이로 살아가는 많은 이들의 외로움이 느껴져서 그런지 눈시울이 붉어지게 만들었다. 


"M은 끝내 오지 않은 내가 너무 미워서 전학 가는 걸 미리 알려주지 않은 것으로 복수한다며 '메롱'을 의미하는 혓바닥 그림을 그려 넣었는데, 그 그림은 편지 전체에서 유일하게 M답지 못한 부분이었다. 그게 또 오래 가슴에 걸렸다. 작은 기대일지라도 번번이 좌절될 때 조금씩 바스러지는 마음에 대해, 이루어지지 않는 무언가를 바라는 순간 받게 되는 상처에 대해 나 역시 잘 알고 있었기에 M의 아픔은 다시 나의 아픔이 되었다. 정말 미안해. 미안해, M.(135)" 


마지막으로 어쩌면 이 책의 다정함의 절정을 보여준 '한 시절을 건너게 해준' 편에서는 앞서 저자의 직장생활에서 지옥을 경험한 내용을 예고했기에 그 내용이 어디에 나올까 궁금했었는데, 한 사람이 어떤 상황에 의해 그리고 누군가에 의해 얼마나 크게 무너질 수 있는지 자세히 그려낸다. 사랑하는 연인조차 저자의 무너진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할 때 친구 J의 집에서 보낸 시간은 어찌보면 구원의 동아줄과도 같은 다정함의 끝판왕이 아니었나 싶다. 


"한 입 두 입 계속 먹을 때마다 몸속을 세차게 흐르는 뜨겁고 진한 국물에 심장에 박혀 있던 비난의 가시들이 뽑혀나가는 것 같았다. 마음의 틈새마다 눌어붙어 있던 자괴와 절망이 녹아 내리는 것 같았다. 국물이 흘러들어오고 눈물이 흘러나가면서 내 눈에 옮아 있던 날 선 눈빛들이 씻겨 내려가는 것 같았다.(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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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영혼 오로라 - 천체사진가 권오철이 기록한 오로라의 모든 것
권오철 글.사진, 이태형 감수 / 씨네21북스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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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철 사진작가의 [신의 영혼 오로라]를 읽었다. 부제는 "천체사진가 권오철이 기록한 오로라의 모든 것"이다. 책의 표지부터 이목을 확 끌어당기는 오로라의 사진은 첫 장을 넘기기 전부터 가슴을 설레게 만든다. '오로라'라니~~ 많이 들어보기는 했지만, 주변에서 오로라를 봤다거나 오로라를 보러 여행을 다녀왔다는 얘기는 듣기 힘들었다. 이제는 해외여행을 떠나는 것이 보편적이 일이 되어버렸지만 그래도 많은 시간과 적지 않은 비용을 들여야 하기에, 유명한 관광지나 휴양지를 선택하게 된다. 반면에 오로라를 보기 위해서는 10시간 이상의 비행을 해야 하고 비용도 만만치 않게 드니 선뜻 오로라 만을 위한 여행을 선택하기란 쉽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한 페이지씩 넘어갈수록 다양한 오로라의 사진을 보면서 또한 극대기가 다가온다는 설명을 읽으며 오로라 여행에 대한 꿈이 서서히 커져감을 느낀다. 


4계절이 뚜렷하고(이제는 봄과 가을이 너무 짧아지기는 했지만), 낮과 밤의 길이도 적당한 우리나라는 사람이 살기에 꽤 좋은 기후를 갖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만 살 때는 몰랐지만 타국에서 머물다보면 면 인정할 수 밖에 없게 되는 점 중의 하나이다. 유럽에 대한 로망을 갖고 있는 이들이 많지만 막상 겨울에 여행을 가게 되면 하루 걸러 추적추적 내리는 비와 음습한 기운과 더불어 오후 5시도 안되서 밤처럼 어두워지는 일정에 당혹스러움과 불안감이 엄습해오곤 한다. 서유럽에서 위도가 높은 아일랜드과 영국의 경우 펍 문화가 발달한 이유 중의 하나가 겨울철에 밤이 너무 길어 아이부터 어른까지 놀이문화로 우울함을 달랬다고 하니, 맹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겨울철을 보내지만 일조량이 좋은 곳에 사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 마음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참으로 신기하게도 살기에는 척박할 것이라 여기는 위도가 높은 지역에서는 우리가 좀처럼 상상이 되지 않는 백야와 극야 현상이 반복되고, 그곳에서 힘겹게 자연을 극복하고 사는 이들에게 신이 고생이 많다며 이걸 보고 위안을 삼으라는 듯 '오로라'라는 천체쇼를 보여준다. 지금이야 수많은 여행객들이 오로라를 보기 위해서 그곳을 방문하고 사진과 영상을 통해서 오로라의 놀라운 아름다움을 누릴 수 있게 되었지만, 교통수단과 통신이 발달하기 이전에는 오로지 그곳에 사는 이들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 아니었을까 싶다. 




저자는 1장에서 '오로라의 모든 것'이라는 제목으로 오로라에 대한 과학적 정의와 설명을 간략하게 전해준다. 아주 오래전에 과학잡지에서 보았던 지구의 내부 구조와 같은 사진들을 곁들여 오로라가 극지방 주위에서 생겨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알려준다. 간혹 뉴스를 통해서 태양의 흑점이 폭발 빈도가 높아졌다는 소식을 전하며 통신장애가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했었는데, 그렇게 흑점이 많아지며 태양이 뿜어내는 에너지가 지구에 전달될 때에 대기와 만나며 오로라의 극대기가 형성된다는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흑점의 폭발로 일상의 불편함이 가중될지도 모르지만 오로라를 기대하는 이들에게는 희소식이 아닐 수 없다. 이미 10년 전에 출간된 책이 개정되어 새롭게 나오게 된 이유가 바로 극대기가 얼마 남지 않았기에 오로라를 더 많은 이들이 보기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음은 오로라에 대한 저자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오로라의 극대기가 2024-2025년이라고 하니 다음 여행지는 캐나다의 엘로나이프로 삼고 일상이 노곤해질 때마다 엘로나이프 오로라 여행지 사이트를 통해 오로라 여행을 꿈꾸는 것이 새로운 에너지가 되지 않을까 한다. 


1장에서 오로라에 대한 개괄적 지식을 알게 되었다면, 2장에서는 오로라를 본격적으로 볼 수 있는 여행을 소개하고 있다. 갑자기 여행책자로 변신을 한 듯이 오로라를 볼 수 있는 지역과 여행 방법 등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올컬러로 된 책자이기에 지루하지 않게 오로라의 수많은 사진을 감상할 수 있어서 어서 빨리 오로라 여행을 계획하라는 유혹의 손짓이 멈추지 않는다. 우리나라도 겨울에 며칠 정도 영하 20도의 추위가 맹위를 떨칠때가 있기는 하지만, 오로라를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지역으로 소개된 캐나다의 엘로나이프는 겨울에 영하 20도에서 40도까지 육박한다고 하니 그 추위는 얼마나 대단할지 감히 상상이 되지 않는다. 오로라를 보기 위해서는 오랜시간 밖에서 머물러야 할텐데 그 추위를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우려가 되지만, 저자의 자세한 소개를 보니 여행지에서 제공되는 방한복과 인디언 전통 가옥인 티피에서 몸을 녹이며 오로라를 구경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진에 가장 많이 등장한 오로라 빌리지 외에도 엘로나이프에서 오로라를 볼 수 있는 다양한 코스를 소개하고 있는데, 문제는 어떤 코스를 선택하느냐게 아니라 내가 그곳을 방문했을 때 오로라가 펼쳐지느냐이다. 




책에서 소개한 일반적인 일정은 6일 정도로 3일이나 4일밤을 오로라를 보기 위해서 대기하게 되는데, 안타깝게도 그 기간에 오로라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무척 속상할 것만 같다. 그리고 저자가 너무 큰 감동에 저절로 눈물이 나오게 된다면 오로라 폭풍은 어쩌면 신의 선택을 받아 선물을 받기에 마땅한 이들에게만 펼쳐지는 황홀한 광경이 아닐까 싶어 부러운 마음만 커져간다. 책에서 언급된 '오로라 헌터' 다큐멘터리 영상을 보니, 마지막 날에 기적적으로 오로라 폭풍을 본 이들이 환호하고 눈물을 흘리며 기뻐하는 모습은 마치 어마어마한 가치를 가진 선물을 받는 것처럼 보인다. 영상 중에 나온 어느 출연자는 오로라 폭풍을 보고 너무 감격한 나머지 "오로라 폭풍을 보고 나니 한국에 돌아가서는 못 할 일이 없을 것 같다"고 말한다. 대체 오로라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일까?


저자는 에필로그에서 오로라를 보고 인생이 바뀌었다는 고백을 전한다. 직장생활 중 오로라를 보러 간 여행에서 큰 감동을 받고 사표를 과감히 던지고 전업 사진작가로 탈바꿈할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된 것 또한 오로라를 통해서라고 말한다. 아마도 주변에서는 두 팔 들고 만류했을 그 용기 있는 선택으로 인해 저자가 찍은 오로라의 수많은 사진과 영상이 그곳을 방문하지 못할 많은 이들에게 대체재가 되어주니 이 또한 기적이자 선물이 아닐 수 없다. 


#신의영혼오로라 #권오철 #씨네21북스 #한겨레출판 #하니포터 #하니포터6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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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완벽한 멕시코 딸이 아니야
에리카 산체스 지음, 허진 옮김 / 오렌지디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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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카 산체스의 [나는 완벽한 멕시코 딸이 아니야]를 읽었다. 어릴 때에는 ‘단일 민족’이라는 말을 너무 많이 들어서 그런지 혼혈, 혼종 과도 같은 말에 대한 막연한 거부감이 있었던게 아닌가 싶다. 하지만 유전자 검사를 통해서 알게 된 바, 우리나라 사람들은 결코 단일 민족이 아니며 우리의 피속에 저 멀리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의 어느 인종의 피도 섞여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러한 과학적 사실은 그동안 외향 중에 어느 한 부분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서는 보기 힘든 외국인의 외양을 보고 의아했던 기억들을 이제서야 납득하게 해 준다. 숨겨져 있던 유전자가 어느 대에 이르러 겉으로 드러난 것일 뿐이다. 이렇게 우리는 전세계 다양한 인종들과 연결되어 있다. 완전한 순종과 순혈은 결코 존재할 수 없다. 그럼에도 여전히 앞으로도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인종적 차별이 너무나도 만연하다. 우리나라 이민사의 대부분은 일제 강점기 시기에 이루어졌다. 도저히 우리나라에서 살 수 없다고 판단한 이들이 또는 독립 운동을 하다가 도망쳐야 하는 이들이 그리고 나라 잃을 슬픔을 잊고 새로운 땅에서 희망을 얻고자 한 이들이 배를 타고 미지의 땅으로 떠났다. 지금처럼 비행기를 타고도 힘든 여정이 많은데, 그 당시에야 한 번 떠나면 다시는 고향 땅으로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직감하면서도 생고생을 하며 알지 못하는 언어의 땅에 도착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이민사가 그렇듯이 미지의 땅에 도착한 이들의 거의 대다수가 노동력을 착취당하며 폭력에 노출되었고 극심한 빈곤의 나날을 보냈다. 그들의 삶을 그린 소설 들은 차마 눈물 없이는 볼 수 없을 만큼 비극적인 장면들이 많다. 


몇 년 전 뉴스에서 멕시코의 불법 이민자들을 막기 위해 미국 남부의 광활한 영토에 엄청난 높이의 장벽을 쌓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미국과 멕시코의 크기가 우리나라 몇 십배에 해당되는데, 그 넓은 국경선을 어떻게 다 장벽으로 막을 수 있단 말인가? 종종 우리나라의 치안 상황에 대해서 상당히 안전하다고 자부하는데, 그 이유 중의 하나는 바닷길  말고는 육로가 다 막혀 있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북한과 이렇게 대치하고 있지 않다면 엄청난 중국 사람들이 우리나라로 남하할 가능성이 높다. 소설에 나온 훌리아의 아마와 아파의 경우처럼 우리나라의 경제력이 점점 부강해질수록 높은 인건비를 감당할 수 없어서 제3세계의 사람들을 고용하고 있다. 노동이 필요한 어느 곳에서든 동남아시아 사람들과 중국 동포들이 없다면 당장 문을 닫을 공장들이 수두룩하고 심지어 농촌에서도 그들의 수고가 없다면 수확 또한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이전에 독일에서 탄광 노동자와 간호사로,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건설 노동자로 일했던 아버지 세대가 벌어온 외화 덕분에 경제적 급성장을 할 수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하지만 훌리아의 아마와 아파는 다시는 고향 멕시코로 돌아갈 수 없다. 그들은 목숨을 걸고 브로커를 통해 국경선을 넘었고 불법체류자 신분이 드러날 경우 강제 추방당할 위험에 놓여 있다. 하지만 소설 속에 나온 것처럼 실제 미국 사회에서 거칠고 힘든 노동의 상당수를 그렇게 불법 이민한 이들의 수고로 뒷받침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 척하고 이용만 한다. 훌리아의 아마는 부유한 이들의 집을 청소하고 아파는 캔디를 만드는 공장에서 일한다. 훌리아는 문학을 사랑하고 글을 쓰는 작가가 되고 싶지만, 어릴 때부터 유난스럽다는 핀잔을 듣고 아마가 원하는 대로 다소곳하지 않아서 번번히 아마와 부딪히게 된다. 소설의 시작은 훌리아와는 정반대로 아마의 말을 잘 듣고 집안에 머물려 아마의 일을 도와주는 훌리아의 언니 올가가 교통사고로 죽는 장면부터이다. 참척의 고통을 겪는 아마는 몇 주 동안 방에서 나오지 못할 정도로 고통스러워하고 훌리아는 아마가 걱정되기 시작한다. 올가의 부재로 인해 훌리아의 일거수 일투족을 더욱 강박적으로 통제하려고 하는 아마는 훌리아와의 갈등이 더욱 커진다. 언니 올가를 미워하는 것은 아니지만 매 순간 완벽한 딸로 여겨진 올가와는 반대로 사촌들과 이웃들에게도 말 안 듣는 딸인 자신이 더욱 답답하게 여겨진다. 훌리아는 올가의 죽음을 애도하다가 올가의 방에서 예상치 못한 물건을 발견하게 된다. 올가가 전혀 입을 것 같지 않은 야한 속옷과 피임도구 그리고 호텔키. 이것들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무척이나 궁금하지만 훌리아가 올가의 방에 들어간 것에 화가 난 아마는 올가의 방을 잠궈버린다. 


숨겨진 올가의 비밀은 무엇일까? 훌리아의 방황과 아마와의 갈등은 사춘시 시기를 힘겹게 보내는 소녀의 모습으로 단정지을 수도 있지만, 아마가 일방적으로 훌리아를 통제하려고 하는 모습 또한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급기야 훌리아가 말을 듣지 않자 아마는 그동안 자신의 모든 희생이 대체 무엇을 위한 것인지 아느냐고 올가가 그렇게 된 것도 너 때문이 아니냐고 훌리아를 다그치며 서로의 갈등은 극단에 치닫게 된다. 외출 금지와 휴대폰을 빼앗기는 일의 반복으로 훌리아는 극단적 선택을 하게 되고 다행히 병원에서 깨어나게 된다. 소설 속에서 나온 우울증과 공황 장애로 인해 위급한 상황에 처한 이들이 똑같은 선택을 하지 않도록 방지하는 상담 시스템은 부러울 정도로 잘 되어 있는 듯하다. 특히나 저소득층에 대한 그들의 제도적 배려는 개인주의가 만연한 자본주의 사회가 지탱할 수 있는 또 다른 힘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쿡 선생님에게 주기적인 상당을 받는 훌리아는 아마의 제안으로 멕시코의 고향 땅에 방문하게 되고 그곳에서 마마 하신타와 아마의 티오, 티아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된다. 매순간 핀트가 어긋난 것처럼 아마와 대화가 되지 않고 언쟁만 불거졌던 것과는 반대로 훌리아는 고향에서 할머니의 지극한 사랑과 이모와 사촌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상처가 조금씩 아물게 된다. 그리고 아마의 언니를 통해서 아마가 왜 그렇게 훌리아를 단속해왔는지 이유를 듣게 된다. 훌리아를 사랑으로 감싸주던 고향도 나르코스와 같은 이들에 의해 다시 위기감이 고조되고 훌리아는 시카고의 집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리고 올가의 노트북을 통해서 언니가 죽기 전에 유부남과 무려 4년 동안이나 비밀리에 관계를 맺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올가는 죽기 전에 그 남자의 아기를 갖고 있었다는 충격적인 사실 또한 알게 된다. 훌리아는 올가가 직장에서 만났던 나이 많은 유부남을 만나게 되고 그에게 분노를 표출하며 왜 올가를 이용했냐고 따져 묻는다. 아마의 숨겨진 과거와 올가의 비밀을 아마와 아파에게 말해야 할지 말지 고민하는 훌리아. 훌리아에게는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로레나와 후앙가와 같은 좋은 친구들이 있었다. 그리고 훌리아가 사랑하는 코너까지. 그들은 인내심을 갖고 훌리아를 지켜주고 훌리아가 상처를 딛고 일어날 수 있도록 곁에 있어준다. 이 시대의 [호밀밭의 파수꾼]이라는 찬사가 어울릴 정도로 훌리아의 내면적 변화와 성장은 독자로 하여금 세상 사람들의 잣대에 휘둘릴 필요가 없다고 말해주는 것 같다. 


“영원하기를 바라지만 누가 알까? 보장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다시 한 번 머리가 이상해지면 어떻게 하지? 내가 할 수 있는 건 계속 나아가는 것뿐이다. 

언제쯤이면 내 잘못도 아닌 일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게 될까 궁금하다. 누가 알까? 어쩌면 영원할지도 모른다. 

어떤 면에서는 (아마가 이해를 하든 못 하든) 아마와 아파, 올가를 위해서 사는 것도 내가 이루려는 것의 일부가 아닐까 싶다. 엄밀히 말해서 내가 세 사람을 위해 사는 것은 아니지만, 나에게는 세 사람이 갖지 못했던 수많은 선택의 기회가 있고, 나에게 주어진 것으로 정말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듯한 기분이 든다. 내가 지루하고 평범한 삶에 안주한다면 세 사람이 걸어온 길을 낭비하는 셈이다. 언젠가 세 사람도 이 사실을 깨달을지 모른다.(3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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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나의 집에게 (리커버) - 지나온 집들에 관한 기록
하재영 지음 / 라이프앤페이지 / 2020년 12월
평점 :
품절


하재영 작가의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를 읽었다. 부제는 “지나온 집들에 관한 기록”이다. 처음 몇 페이지를 읽었을 때에는 그동안 살아왔던 집의 기억을 토대로 우리나라의 건축문화의 변화나 거주 형태에 대한 설명을 덧붙이는 내용이지 않을까 싶었는데 완전한 착각이었다. 저자의 책을 왜 이제서야 처음 접하게 된 것인지 억울함이 느껴질 정도로 좋았다.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길 때에는 이야기가 끝나는 것이 너무나도 아쉬웠고 찐득한 감동의 여운이 한동안 지속될 것 같다. 이 시대를 사는 젊은이들에게 이 책은 꼭 읽어야 한다고 그래서 이미 접혀진 지나온 시절을 추억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해주고 싶다. 살아온 집들에게 대한 섬세한 묘사와 그 집을 구성하고 있던 물건들의 배치와 주변 환경을 너무나도 상세하게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놀라웠고, 집을 구성하는 요소들의 적확한 이름으로 마치 눈 앞에 이미 사라진 집들이 재구성되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경제 발전의 호황을 이루던 시기를 지나 IMF와 같은 혹독한 계절에 보낸 이들이 겪은 부침은 우리나라 사람들 중 상당수를 쓰러뜨리고 아예 일어나지 못하게 만들기도 했을 것이다. 저자의 유년시절을 보낸 대구의 첫 번째 집은 어찌보면 우리나라의 아주 소수만이 누렸던 부를 상징한다. 하지만 시대의 거대의 전환은 수많은 이들을 되돌릴 수 없는 수렁의 늪으로 끌어들이듯이 몇 번의 이사를 통해 집은 점점 작아지고 서민 아파트와 같은 공간으로 치환된다. 지금의 아이들이 그러듯이 어느 아파트에 사느냐로 친구네 집의 경제적 상황을 미루어 짐작하고 또래를 형성하며 잊히지 않을 작은 못을 서로의 가슴에 박는다. 생각해보니 나도 그랬던 것 같다. 나의 유년 시절의 8할을 차지하는 성당은 그 당시 가장 부유한 아파트 근처에 있었기에 버스를 타고 그 성당을 다녀야 했던 나는 언제든 미사와 교리를 마치고 걸어서 집에 가는 친구들을 항상 부러워했었다. 심지어 엄마에게 이런 말을 했던 기억이 난다. 우리집에 저 아이들처럼 성당에서 가까우면 매일 등하교 길에 성당에 들러 기도를 할 거라고 말이다. 아무도 없는 성당에 우두커니 앉아 있으면 그때만은 나만의 특별한 공간이 생긴 것 같아 좋아서이기도 했지만, 아마도 부러웠던 친구들처럼 좋은 아파트에 살고 싶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저자도 30평이 넘는 친구네 집에 다녀와서는 불행하다는 느낌이 들지만, 저자의 집에서 조금 더 깊이 들어가면 몇 평 되지 않은 쪽방촌의 사람들이 행여나 그곳에서도 쫓겨날까 두려워하며 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때 안도와 미안함을 든다고 말이다. 이런 양가적 감정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며 누구나 느낄 수 있는 것이지만 그러한 감정을 기억하고 언제든 내 안에서 되살려내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한강뷰가 보이는 수십억에 달하는 집을 구하는 것은 요원한 일이지만 쪽방촌에서 불안과 추위에 떨며 지내는 일은 언제든 나에게 닥칠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염려하고 기억하는 일은 행여나 나 자신에게도 닥칠지 모를 불행의 불을 지피게 될까 두렵기에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그런 면에서 저자의 글은 읽는 이에게 용기를 가지라고 힘을 북돋워주는 것 같다.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어른이 되어서도 아이의 유치함을 버리지 못하고 불행 배틀을 벌일 때가 있다. 내가 더 빡센 군대에서 군생활을 했다느니, 내가 학교 다닐때가 더 많이 맞았다느니, 내가 더 찢어지게 가난했다느니 하는 허세가 반이요 뻥이 반인 이야기들이다. 어느 정도는 사실일 수도 있겠지만 진짜로 불행했던 과거를 솔직하게 털어놓는 일은 쉽지 않다. 왜냐햐면 그 이야기를 하는 동안 그때의 자신을 마주하기 때문이다. 갑자기 울컥하는 마음이 들 수도 있고, 불현듯 분노가 치밀어 예기치 않은 행동을 해서 상대방을 놀라게 할 수도 있다. 웃자가 한 배틀이 죽자고 덤비는 다큐가 될 수도 있기에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뻥을 쳐서 우위를 점하고자 한다. 하지만 저자가 고백하는 내용들을 읽고 있자니 특히나 동생과 함께 살다가 각자 살자는 내용이 나오는 부분에서는 어쩌면 그 글을 쓰는 동안 꽤 많은 눈물을 흘리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가슴이 아려왔다. “나의 글은 가족을 착취한 결과였다.(84)”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을, 가장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서 사랑하는 누군가의 등을 밟고 살아간다는 것은 얼마나 큰 비참함을 안겨줄지 쉽게 상상이 되지 않지만 그럼에도 글쓰기를 포기하지 않고 작가로서는 고백하기 힘든 대필 작가로 생계를 이어가는 필사적인 노력까지 낱낱이 밝힌다. 나는 분명히 처음에 집에 대한 이야기를 읽고 있었는데, 어느덧 작가의 용기있고 담대한 고백에 몰입하며 응원하게 된다. 부디 글쓰기를 놓지 말아달라고… 


너무나 현실적이라 외면하고 싶을 정도의 민낯을 보여주는 이웃들과의 만남은 필터를 거치지 않고 마주한 세계에 대한 두려움을 가중시키지만, 그게 바로 내가 살아갈 세상이라고 어느 눈을 뜨라고 또 한 번의 용기와 힘을 북돋워준다.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백할 용기까지 얻어낸 저자는 드디어 그들의 보금자리를 꾸미게 되고 그 집의 리모델링을 아버지에게 맡기게 된다. 동생의 경우처럼 아버지와 다툼이 발생되지 않을까 염려가 되지만 아빠는 저자에게 착한 딸이라는 말로 안심을 시킨다. 하지만 우려했던 바는 현실이 되고 몇 번의 언쟁과 토라짐을 통해 아빠와 딸로 오랜시간 같이 살았음에도 서로를 잘 알지 못했음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어쩌면 이 책에서 가장 큰 감동을 준 부분으로 사업에 실패하거나 가장으로서 역할을 하지 못했을 때마다 입을 꾹 다물거나 사라지는 아빠의 모습을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엄마를 보면 늘 마음이 아팠던 이유는 역할 때문이었을 것이다. 엄마는 자존감과 독립심으로 무장해 있는 사람이었지만 나는 늘 엄마가 가여웠다. 엄마는 자신의 불행이나 고통을 남에게 티 내지 않았고 동정받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도하고 부당하며 때로는 불가능하기까지 한 요구를 감내하는 엄마-아내-며느리의 역할을 맡은 사람을 나는 연민 없이 바라볼 수 없었다. 

엄마와 달리 아빠에 대한 감정은 양가적이다. 아빠는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사람이자 엄마를 불행하게 만드는 사람처럼 보였다. 아빠에게 연민을 가지게 된 것은 내가 마흔에 가까운 나이가 되고 그가 투병을 시작했을 무렵이었다. 그리고 집을 고치면서 나는 아빠를 좀 더 이해하게 되었다. 내가 나이가 들어서, 아빠가 아파서, 우리가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서가 아니었다. 아빠의 나약함과 결핍감을 발견하면서 과거에 그가 부재하거나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아빠는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강인한 해결사-을 할 수 없을 때, (사라지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사라져야만 했다. (침묵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침묵해야만 했다. 가부장제는 약함을 여성성으로, 강함을 남성성으로 환원하므로 아빠는 자신이 강하지 못할 때 보이지도, 말하지도 말아야 했다. 아빠 또한 남성의 감정을 억압하는 가부장제의 피해자가 아니었을까?(165-166)"


나이가 들수록 연로해지는 부모님을 뵐 때마다 나는 나의 엄마와 아빠를 얼마나 알고 있을까 궁금해진다. 엄마와 아빠는 어린 시절을 어떻게 보내셨을까? 내가 알지 못하는 시절에는 어떤 꿈을 갖고 계셨을까? 저자의 책을 읽고 나니 부모님과 함께 살았던 집을 떠올리며 그때의 이야기를 건네는 것이 어쩌면 엄마와 아빠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가 아닐까 싶다. 


"열정적인 사랑이나 낭만적인 결혼이 아니라 온화한 마음으로 서로를 존중하고 지지하는 관계가 되고 싶었다. 그와 함께, 나의 삶을 살고 싶었다. 두 사람이 함께, 서로의 삶을 살고 싶었다. '여성의 삶을 방해하고 축소하는 가부장적 결혼이 아니라 여성이 자신을 창조해나가는 과정의 연장선상으로서의 결혼'(에이드리언 리치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 그것이 내가 바라는 삶이었다.(122)"


"쓰기는 삶의 특정한 순간을 다시 한 번 살아내기이다.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과거를 뭉뚱그리지 않기, 외면하고 싶었던 고통, 분노, 슬픔, 상실, 결핍을 다시 한 번 겪어내기. 그것은 나 자신의 이방인이 되는 일이다.(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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