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개의 죽음 - 번식장에서 보호소까지, 버려진 개들에 관한 르포
하재영 지음 / 창비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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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하재영 작가의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개의 죽음]을 읽었다. 부제는 "번식장에서 보호소까지, 버려진 개들에 관한 르포"이다. 현재의 우리나라 사회에서 진지하게 논의하길 꺼려하는 주제들이 몇 가지 있다. 진보와 보수의 정치적 성향과 더불어 사회 전반적인 문제에 걸쳐 있는 차별금지법과 생명 보호와 존중에 대한 서로 다른 시각이 바로 그러하다. 사전적인 지식과 인간에 대한 철학적인 접근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하더라도 막상 이야기를 시작하면 어느 순간에는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상당수의 사람들이 그런 주제에 대해서 무관심하고 한 마디로 먹고 살기도 바빠 죽겠는데 그런 데 신경 쓸 겨를이 없다고 말할 것이다. 지금 당장 내 삶과 무관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 책의 주제도 그렇게 비춰질 것이다. 개를 농장에서 키우고 팔고 죽이고 먹는 것이 대체 우리 삶이랑 무슨 상관이냐고 물을 것이다. 꽤 근래까지도 개를 먹는 것에 대해서 큰 거부감이 없던 관습 때문인지 반려견이라는 말이 일상화되었음에도 먹는 개와 키우는 개를 구분하거나, 개는 원래 집 밖에서 키우는 게 당연한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특히나 저자가 언급한 것처럼 서양의 어느 배우가 '개고기를 먹는 미개한 나라'라는 비난 섞인 말을 기사로 접했을 때, 나 또한 '지가 뭔데 개고기 하나로 우리나라를 싸잡아 욕하느냐'고 발끈하곤 했다. 개식용에 대한 찬반을 떠나서 한 나라가 오랫동안 답습해온 문화를 그렇게 쉽게 평가할 수는 없는 것이라 생각했기에, 많은 사람들이 한 개인의 비아냥 거림으로만 여기고 넘어갔다. 그런데 책을 읽으며 생각해보니 개고기에 대한 문화 상대주의는 중동 어느 나라의 명예살인과 강제할례와 같은 인권 유린에 비판할 자격을 주지 않는다(230). 우리가 어떻게 사람에게 그런 짓을 할 수 있느냐고 비난한다면 그들도 우리처럼 '니들이 뭔데 우리나라의 관습에 대해서 왈가왈부 하느냐'고 반문할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문화 상대주의가 윤리적 상대주의와 맞물리게 될 경우 약자에게 폭력을 행사하며 생명 존중에 대한 다양성을 토대로 지금까지 그래왔던 '사실'을 '진리'인 것처럼 여길 것이라 우려하고 있다. 


몇 년 전부터 동물권이라는 단어를 듣고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아직 인권에 대한 인식도 확실하게 자리잡지 못한 것 같은데, 동물권이라니 너무 앞서가는 것이 아닐까 혹은 반려견을 키울만큼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긴 사치한 논쟁이 아닐까 싶었다. 그리고 동물권에 대한 수많은 사례 중에 유독 유기견, 번식견, 식용견에 대한 말이 많은 것 또한 단순하게 반려견 인구가 늘어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었던 보신탕집이 하나 둘 사라지는 것 또한 비슷한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개고기를 먹는 사람을 혐오하거나 아예 고기를 먹지 않는 비거니스트가 되는 것은 조금 유난떠는 일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며 너무 큰 충격을 받았다.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이 나라가 이렇게 되기까지 대체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부끄러웠다. 


공장식 축산 산업에 대한 문제와 심각함은 다른 책을 통해서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비건의 삶을 살기로 결심한 작가들의 책에서 왜 그런 결정을 실천하기로 마음 먹었는지, 그들의 선택을 종요한 인식의 전환은 어떤 계기였는지 어렴풋이만 짐작했었다-). 하지만 이 책은 르포라는 부제가 달린 것처럼 그 어떤 설명보다 직설적으로 개농장의 실태를 보도하고 있다. 뜬장에 갇힌 개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하게 느껴져 몸서리가 처진다. 그리고 그렇게 개들이 돈이 되는 물건 취급을 받으며 팔려나가고 죽임을 당하는 것을 막지 못하는 법규에 분노가 차오른다. 세금을 내지 않는 불법을 저지르며 썩어가는 음식쓰레기를 사료로 먹이고 이득을 취하는 개농장 주인에게 던진 '개고기를 먹는냐'는 질문에 아무 대답이 없는 부분은 참담함의 늪에 빠지게 만든다. 그럼에도 해마다 10만 나리의 개들이 죽음을 당하는 현실에서도 단 한 마리의 개를 구조하기 위해 애쓰는 이들의 분투를 읽으며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는 저자의 질문을 가슴 깊숙이 되새기게 된다. 결국 동물권에 대한 자각과 성찰은 인간이 만물의 주인으로 창조되었다는 믿음이 피조물을 내 맘대로 해도 된다는 권리가 아니라, 인간과 종이 다른 동물이라 할지라도 고통과 아픔을 느끼는 생명이라는 사실을 그 어떤 종보다도 앞서 기억하고 존중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법의 저촉을 받지 않음에도 가장 미약한 동물을 자발적으로 존중할 수 있다면 그게 바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출발점이 아닐까 싶다. 


"피터 씽어의 말처럼 동물 애호가라는 표현은 정치적이고 도덕적인 논의로부터 인간이 아닌 존재를 배제한다. 동물을 쾌락과 고통을 느끼는 존재로 인식하고 연민을 확장하는 일은 사랑하고 좋아하는 감정과 별개의 것이다. 특정한 종의 동물을 좋아하는 것은 취향이더라도 누군가의 고통에 대해 이야기하는 일은 취향과 아무 상관없다. 씽어가 비유했듯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사람을 유생인종 애호가라 부르지 않고 성차별에 반대하는 사람을 여성 애호가라 부르지 않는다면, 동물의 고통에 반대하는 사람을 동물 애호가라고 부르는 것도 적절하지 않다.(49-50)"


"동물실험에 반대하는 국제 동물보호단체인 '크루얼티 프리 인터내셔널'이 공개한 영상에서는 드레이즈 테스트를 위해 상자에 갇히 토끼가 목을 돌려 옆에서 같은 일을 당하고 있는 친구의 눈을 정성스레 핥아주는 장면이 나온다. 이 장면은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표현에 의문을 품게 만는다. 우리는 '짐승 같다'는 표현을 잔인함으로, '인간적'이라는 표현을 도덕적인 무엇으로 사용하지만 저 영상 속에서 인간적인 것은 누구인가? 극도의 고통 속에서도 같은 처지의 친구를 돌보는 토끼인가, 아니면 토끼를 고통으로 몰아넣는 인간인가?

만약 담뱃갑에 붙어 있는 경고문처럼 식품에, 화장품에, 의류에, 침구에, 그 제품의 생산을 위해 희생된 동물의 사진이 붙어 있다면 우리는 매순간 동물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경고문이 없으므로 기억은 의지의 문제가 된다. 저 동물들을 인간의 영역으로 데려온 이들이 다름 아닌 우리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일, 우리의 시스템 안에서 동물들이 어떤 일을 겪는지 이야기하는 일, 그들에게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 질문하는 일이 오로지 우리의 의지에 달려 있는 것이다. 

우리가 그런 의지를 발휘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의 삶이 동물의 고통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말이 지나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과장도 왜곡도 없이 동물은 우리의 삶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같은 종의 인간뿐 아니라 동물에 대한 책임도 있다. 우리의 삶과 죽음이 그들에게 빚지고 있다면 우리 또한 그들의 희생에 의무를 지니고 있다. 나는 그 책무를 망각하지 않는 것이 인간다움, 내가 갔던 그 장소들에서 발견할 수 없었던 우리의 인간다움이라고 믿는다.(289-290)"


#아무도미워하지않는개의죽음 #하재영 #창비 #버려진개들에관한르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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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한국어 오늘의 젊은 작가 42
문지혁 지음 / 민음사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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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지혁 작가의 [중급 한국어]를 읽었다. 민음사 오늘의 젊은 작가 42번째 작품이다. 오늘의 젊은 자가 시리즈 중에 한 작가의 책이 두 번이나 들어간 것은 이번에 처음인 듯 하다. 마치 전작인 [초급 한국어]와 [중급 한국어]가 2권으로 이어진 긴 장편인 것처럼 여겨졌기에 가능했던 것일까 아니면 원래 가능한 것이었는지. 아무튼 소설에서 지혁의 아내 은혜가 말한 것처럼 초급이든 중급이든 소설의 제목이 꼭 한국어 교재 이름 같다는 말에 한 표를 던진다. 전작에서는 시간에 대한 설명 중 크로노스와 카이로스에 대한 부분이 마음에 꽤 와닿았었는데, 이번에는 전작보다도 훨씬 더 풍요로운 성찰 거리는 가득 담고 있다. 


뉴욕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던 지혁은 엄마의 부고를 듣고 한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지혁의 여동생인 지혜가 사귀는 미국인 라이언이 "왜 한국으로 돌아온거냐?"고 물었을 때, 선뜻 지혁이 대답하지 못한 것처럼 지혁의 귀환 이유는 명확히 나오지 않는다. 사실 지혁이 왜 돌아왔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고 자세히 설명하지 않아도 우리가 짐작할 수 있는 이유 중의 하나일 것이다. 책을 두 권 내기는 했지만 정식으로 등단하지 않은 작가라고 스스로를 칭할 수 있는지 의문인 지혁은 선배의 소개로 강릉의 바닷가를 마주한 대학에서 글쓰기 수업을 담당한 시간 강사로 일하게 된다. 요즘 대학에서 인문학 계열의 종말을 눈 앞에 두고 있다는 것이 기초 인문학과들이 통폐합되고 오로지 실리와 자격을 위한 변종된 이상한 이름의 학부들만이 남게 되는 것을 보아 충분히 짐작이 된다. 소설의 배경과 우리의 현실이 다르지 않아 국문학과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글쓰기 수업에서도 지혁은 학생들의 반응을 이끌어내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글쓰기 수업의 시작부터 합평을 거쳐 과제물을 내는 것에 이르기까지 실제로 어느 글쓰기 교수의 수업계획서를 그대로 떼어와 붙여놓은 것처럼 지극히 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지혁의 수업 내용을 귀가 아닌 활자를 읽는 눈으로 따라가고 있음에도 마치 오디오 서비스가 동시에 제공되는 것 같은 황홀감에 빠져들곤 했다. 너무나도 유명한 작가들, 제임스 조이스의 [애러비], 안톤 체호프의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 롤랑 바르트의 [애도 일기], 레이먼드 카버의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와 같은 단편소설과 에세이를 토대로 나 또한 글쓰기 수업을 참석한 것 같은 상상에 빠져들곤 했다. 아마도 읽으려고 했다면 중간에 멈춰버렸을지도 모를 막연히 지루하고 어려울 것이라 예상되는 작품들을, 지혁 선생님은 간략하게 줄거리를 소개하며 소개된 작품들 속에서 저자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일지 고민하는 시간으로 독자들을 초대한다. 그리고 그러한 작품들 속에 주제를 해석하기 위한 키워드를 제시하며, 그 단어와 사건들은 단지 소설속에서만 박제된 나와 무관한 일들이 아니라 저자와는 다른 시대를 살고 있는 오늘의 나의 현실 속에서도 그대로 적용되는 일이다. 이제 나에게 맡겨진 것은 오늘의 삶을 나의 힘으로 해석해내는 것이다. 


소설의 왼편에서는 시간 강사 지혁의 글쓰기 수업이 진행되고 있다면, 오른편에서는 지혁이 은혜를 만나 은채를 낳기까지의 지난한 과정과 은채를 낳아 키우며 작가로서 살아가는 모습이 그려진다. 글쓰기 수업을 진행하는 지혁은 대문호들의 작품을 친절히 소개하며 글을 쓰고, 읽고, 고치는 반복된 작업을 통해서 진실한 자기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게 된다는 무언가 통달한 자처럼 보이지만, 은혜와 결혼하고 은채를 갖기까지 여러 차례의 인공수정 시도를 통해 깊은 좌절의 늪을 경험한 지혁은 하루에 왕복 6시간 이상의 운전과 3시간 짜리 수업의 연강으로 끼니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경우를 감당해야 하는 가장이었다. 글쓰기 수업에서는 학생들이 냉랭함과 무관심에도 불구하고 위트가 담긴 말을 던지며 부단히 밀도높은 시간을 이어가고 있다. 집으로 돌아와 은채를 돌보며 자신과는 다른 아내 은혜와의 관계를 곱씹는 지혁은 역시나 전혀 다른 성향임에도 무던히 가족이라는 틀을 유지한 이유는 부모님에게 있어 삼각형의 한 부분으로 자신이 존재했기 때문임을 깨닫게 된다. 


무엇보다도 이 소설 속에서 진주처럼 빛나는 부분은 두 권의 소설을 출판했지만 작가로 인정받지 못하고 언제든 잘릴 수 있는 시간 강사로서의 위기를 겪으면서도, 일상을 가진 가정을 지키고 코로나 확진이라는 최고의 불안 속에서 한 편의 소설을 탄생시키는 지혁을 담담하게 그려낸 것이다. 내가 만약 지혁이었다면 그 모든 것을 지켜낼 수 있었을까? 소설 속에서는 자세히 그려지지 않았지만 가족의 일상과 소설이라는 꿈을 지켜내기 위해서 견뎌야만 했던 소소히 고통들을 감내할 수 있었을까? 저자의 자전적인 요소가 얼마나 많이 담겨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저자가 정말로 하고 싶었던 말은 글쓰기 수업에서 마지막으로 예를 들었던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 소설에 나오는 검은 빵에 대한 설명이 아니었을까 싶다. 불의의 사고로 생일을 앞둔 어린 아들을 잃은 부부는 생일 케익을 찾으러 간 빵집 주인에게 분노를 쏟아내다가, 사정을 알게 된 주인이 내어 준 시나몬롤과 커피를 먹으며 기운을 되찾게 되고, 마지막에 빵이라고 할 수 없는 검은 빵 덩어리를 함께 나누며 아들을 잃은 재앙을 견디고 살아내야 하는 이유를 찾게 된다. 어떤 특별한 목적이나 이유가 아닌 남겨진 자에게는 살아갈 날들이 있기에 말이다. 


"'뜯어 먹기 힘들지만, 맛은 풍부한' 인생 그 자체를 발견하게 되는 거죠. 이 단계에서는 기쁨도 슬픔도 행운도 불운도 쾌락도 고통도 모두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집니다. 그러니까 '좋다, 싫다'가 아니라 '풍부하다'고 말할 수 있는 거예요. 희망도 절망도 없이, 그냥 사는 것입니다. 일어난 일을 두 팔 벌려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부부는 이름조차 정해지지 않은 이 빵을 먹죠. 더 이상 먹지 못할 정도로 먹습니다. 먹는다는 건 그 걸 내 몸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거잖아요? 이 검은 덩어리를 내 안에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에게는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데, 그건 바로....(220-221)"


소설 속에서 저자는 그게 바로 무엇인지 바로 답을 알려주지 않는다. 답은 이미 앞서서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바로 에피파니, 곧 현현이다. "조이스의 주인공들은 거룩한 공간에서 신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일상의 공간에서 아무것도 아닌 사건을 통해 인생 전체를 뒤바꾸는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32)" 아들을 잃은 부부는 검은 덩어리를 먹으며 그들이 겪은 상처와 고통을 살아내려고 할 때 그들 안에서는 에피파니가 이루어진다고 말해준다. 그리고 그 부분에게 검은 덩어리를 전해주는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지혁이 그랬듯이 '먹이고 놀아 주고 치우고 재운다', '쓰고, 읽고, 고친다'가 되풀이 되는 하루를 살아가는 것이다. 


"되풀이하는 것만이 살아 있다.

되풀이만이 사랑할 만하다

되풀이만이 삶이다.(162)"


#중급한국어 #문지혁 #민음사 #오늘은젊은작가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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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요 2023-03-23 2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 리뷰입니다. 초급편을 읽고 중급을 이제 막 읽으려는데 리뷰 덕분에 기대가 샘솟네요

제코루 2023-03-24 09:08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글쓰기 수업에 대한 내용 중에 위트 넘치는 곳이 몇 군데 있어서 혼자 웃게 됩니다. 즐거운 독서 되시길 바래요.
 
여행의 시간 - 도시 건축가 김진애의 인생 여행법
김진애 지음 / 창비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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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애 작가의 [여행의 시간]을 읽었다. 부제는 “도시건축가 김진애의 인생 여행법”이다. 바야흐로 팬데믹의 종식이 눈앞으로 다가오며, 몇 년동안 억누르던 여행세포가 마구마구 폭발할 것만 같은 시기이다. 일상을 견디는 힘을 키우기 위해서는 어딘가 떠나면 좋겠다는 생각이 앞서지만, 막상 어디를 갈 것인가, 누구와 갈 것인가를 비롯하여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다 보면 비용적인 면을 무시할 수 없어서 ‘그냥 집에서 쉬지 뭐’ 라는 단순한 결론에 다다르곤 한다. 요즘 시작한 여행 예능 중 ‘지구마불 세계여행’이라는 프로는 유명한 여행 유튜버 세 명이 나와서 우리가 어릴 때 했었던 부루마불 보드게임처럼 실제로 주사위를 던져 나온 나라를 여행하는 컨셉이다.  여행 유튜버들이다 보니 일반인들과는 다른 여행의 고수처럼 어느 곳이든 아무 문제없이 일정을 수행할 것 같지만, 그들도 낯선 곳에서는 긴장과 두려움과 설렘을 드러내며 좌충우돌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유튜부 채널은 구독자와 조회수를 늘리는 것이 제일 중요할텐데, 여행 채널에서 조회수가 올라가는 영상은 한 마디로 유튜버가 여행지에서 개고생을 하는 내용이라고 한다. 그 말이 설득력있게 느껴지는게 어차피 여행지의 드라마틱한 영상들은 이미 제대로된 촬영을 마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 널려 있다. 여행 채널을 통해서 독자들이 보고 싶은 것은 영화와 그림 같은 영상이 아니라, 내가 만약 그 곳에 가게 된다면 혹은 실제로 그 곳을 방문하게 된다면 몸으로 감당해야 할 것을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여행을 좋아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래서 학생 때 단체로 어디를 갈 때를 제외하고는 어디를 가야겠다거나 가고싶다는 생각이 든 적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제일 친했던 친구는 방학이 되면 항상 어딘가 여행을 다녀왔다. 방학을 마치고 다시 만난 그 친구는 당시 우리 나라임에도 처음 듣는 이름의 장소를 다녀온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그 이후로도 며칠씩 집을 나서는 것, 집을 나서기 위해 짐을 꾸리는 것, 단체로 잠을 자고 세면과 용변을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 못내 귀찮은 일로만 여겨졌었다. 어찌보면 여행을 즐기게 된 것은 유학시절에 도저히 이렇게는 못 살겠다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에 도피처로 생각한 다른 도시의 방문과 언제 다시 살아볼지 모를 타지에서의 삶을 즐기기 위한 방편이었다. 없는 살림과 짧은 일정으로 다른 도시를 다녀오기 위해서는 철저한 계획이 필요했다. 아마도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어딘가 여행을 떠나기에 앞서 계획을 세우는 것이. 그리고 저자의 책을 읽으면서 어쩌면 여행을 다녀오고 몇 번 후회되었던 것은 너무나도 철저히 계획을 세운 탓이 아니었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MBTI의 영향도 있겠지만 여행지에서 동선을 생각했을 때 미리 장소를 생각해두지 않으면 거리에서 시간과 체력 낭비를 너무 많이 하게 된다. 마치 어떤 미션을 완수하겠다는 강박증을 가진 사람처럼 여행지에서도 쓸데없고 불필요한 동선을 거부하겠다는 몸부림이 아니었나 싶다. 사실 저자의 말처럼 여행이 주는 커다란 선물 중의 하나는 바로 우연성이다. 어차피 낯설고 어색한 곳에 가는 것이니 일상의 삶이 있는 곳처럼 자연스러울 수는 없다. 길을 잃기도 하고 맛이 없는 식당에서 밥을 먹기도 하고 현지인과 짧은 대화를 나누기도 하는 것이 여행일텐데, 그런 것들을  반갑게 맞이한 적이 별로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여행 유튜버들의 영상에 나오는 어이없는 상황을 즐기는 모습이 부럽기만 하다. 이런 저런 이유를 대면서 방구석에만 머물려고 한다면 나를 기다리는 세상의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닫는 것과 마찬가지일텐데, 지금까지의 여행 습관을 버리려면 용기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여행길이란 일상을 깨뜨리는 시간이다. 모르던 세계, 처음 가보는 공간, 낯선 문화, 익숙지 않은 문물, 낯선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세계에 떨어지는 상황 그 자체가 비일상이다. 이 비일상은 나의 일상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 낯선 여행길은 나를 비추고, 나의 관계, 내가 익숙해했던 모든 것을 비춰준다. 그 과정에서 여행은 인생에 풍부한 소재와 주제를 던져준다. 여행을 하다가 저도 모르게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나를 다시 찾고, 찾았다고 생각한 나를 다시 잃어버리기도 하고, 내가 몰랐던 또다른 나를 만나게 되기도 한다.(11)”


“홀로여행이란 ‘결단의 행위’이자 ‘용기의 행위’이고 ‘모험의 행위’이자 ‘자신을 대면하는 행위’다. 그만큼 두렵고 주저하는 시간이지만 그만큼 완벽한 시간이 된다.(305)” 


#여행의시간 #김진애 #창비 #인생여행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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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력 뒤에 쓴 유서 오늘의 젊은 작가 41
민병훈 지음 / 민음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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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훈 작가의 [달력 뒤에 쓴 유서]를 읽었다. 민음사 오늘의 젊은 작가 41번째 작품이다. 오늘의 젊은 작가 시리즈는 양장으로 출판되기에 책장에 순서대로 꽂아두면 훨씬 더 폼이 나는 것 같다. 그 고유의 폼을 내주는 치트키는 바로 표지에 그려진 화가들의 그림이다. 소설의 내용이나 그 속에 담긴 의미를 연상시키는 그림을 사용하기에 표지를 유심히 살펴보기도 한다. 그런데 이번 작품은 유독 표지의 그림에 눈길이 많이 갔다. 아마도 지금 어느 집에서는 사용하고 있을지도 모를 둥그런 모양의 철제 밥상. 소재가 스테인리스인지 알루미늄인지 잘 모르겠지만, 우아함과 고상함은 눈꼽만큼도 찾아볼 수 없다는 걸 만드는 사람도 알았는지 밥상 윗면에는 항상 화려한 꽃과 같은 무늬가 형형색색 새겨져 있었다. 밥상의 다리 또한 부실해서 오래 사용하게 되면 다리 한 쪽이 시원치 않아서 금방 밥상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은 불안함이 엄습해 오기도 했다. 어쩌면 다리가 세 개인 이 밥상은 드라마와 영화의 단골 장면처럼 누군가 밥상을 손쉽게 뒤엎기 위해 제작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렇게라도 밥상을 뒤엎은 이가 시간이 지난 뒤에 계면쩍음을 느끼며 다시 살아가기만 한다면 말이다. 


하지만 밥상의 소재와 촌스러움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밥상 위에 놓인 음식에 눈길이 저절로 가며 순식간에 침이 고인다. 흰쌀밥에 두부가 들어간 된장국과 김치, 계란말이, 날고추, 양파와 마늘 짱아치, 그리고 이 밥상의 하이라이트인 잘 구운 조기 두 마리. 이런 메뉴 설정은 자기 자신이 먹기 위해서가 아니다. 누군가를 위한 차림이 분명하다. 그리고 지금은 함께 살지 않고 자주 만나지 못하는 사랑하는 누군가를 위해서 정성껏 준비한 상차림이다. 없는 살림에 미리 찬거리를 준비하지 못했지만 얼려둔 조기가 생각나 두 마리나 구워 올린 것이다. 날고추가 풍성한걸 보니 어쩌면 자기 자신을 위한 상차림에는 밥과 고추와 김치 밖에 없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렇게 보기만 해도 눈물이 날 것 같은 상차림을 가능케 하는 존재는 이 세상에 부모 밖에 없다. 엄마는 언제나 나를 기다리며 그렇게 상을 차려주신다. 


식탁 옆에는 당연한 소품으로 언제나 달력이 등장한다. 밥을 먹으며 일상을 기억하기 위함이기도 하겠지만, 연로해질수록 점점 커지는 달력 숫자는 그리운 이와의 만남을 카운팅 한다. 그래서 식탁 옆에는 언제나 달력이 있다. 그렇게 당연한 소품의 뒷면에 아버지의 마지막 말이 적혀 있다. 저자의 이름과 동명인 화자 병훈은 어린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아버지를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달력 뒤에 아버지의 유서가 씌어 있다. 농약을 마셔 본 적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한편으로는 얼마나 죽고자 하는 의지가 강했다면 그 엄청난 고통을 감내하겠다는 결심이 섰을까 싶다. 아들 병훈은 병원에 실려간 아버지가 며칠 간 고통 속에서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차라리 자신이 더 늦게 발견을 했더라면 아버지가 겪었을 고통의 시간이 짧아지지 않았을까 라는 후회를 한다. 때마침 엄마 마저도 집을 떠난 때라 화자인 ‘나’는 홀로 그 시간을 견뎌내야만 했다. 아버지의 자살을 고백하며 시작하는 화자의 이야기는 무엇 때문에 아버지가 그런 선택을 한 것인지 친절하게 설명해주지 않는다. 그리고 엄마는 또 왜 아들을 버리고 집을 나간 것인지도 알려주지 않는다. 여타의 소설처럼 어떤 사건과 정황을 토대로 유추해볼 수 있는 이야기도 전개되지 않는다. 그저 이 소설에서 어떤 화제가 된 일이란 아들과 엄마가 오키나와로 여행을 갔다는 정도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아버지의 자살의 이유를 찾고자 하는 의도를 갖고 화자의 과거에 대한 기억과 현재의 이야기를 뛰따라가 가지만, 작가는 그렇게 쉽게 독자에게 그 이유를 알려주지 않는다. 아니 그 이유를 아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만 같다. 주인공은 소설을 쓰며 아버지와 엄마와의 흔적을 기억하려 애쓴다. 유독 마음이 가는 장면은 엄마가 온 장터를 들쑤셔서 찾아낸 스케이트 날로 썰매를 만들어 동네 아이들의 주목을 받던 아들을 위해 썰매장에 연결된 관이 얼지 않도록 빙벽에 오른 아버지를 발견한 주인공이다. 행여나 잠깐의 실수라도 있다면 끔찍한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는데도 아버지는 왜 이리 무모한 것일까란 생각에 화자인 병훈은 온 몸이 덜덜 떨리지 않았을까? 도대체 사랑은 자신의 목숨을 그렇게 하찮게 여기도록 만들면서도 자신의 죽음을 자식이 제일 먼저 발견할 것을 뻔히 알면서 농약을 들이마시는 결단은 어디서 비롯된 것이란 말인가! 그래서 저자는 이렇게 말한 것이 아닐까? 


“나는 여전히 에두르고, 빙빙 돌고, 중요한 것을 분명하게 말하지 않았다. 뉘앙스만을 풍겼다. 가령 이런 문장. 당신은 소설에게 당신의 손을 빌려준다. 명확한 서사와 분명한 주제를 쓰지 않았다. 읽는 이의 공감을 불러일으켜 소설을 따라오도록 안내하지 않았다. 그러니 소설은 어딘가에 도착하지 않았다. 

나는 왜 자꾸 명확하고 분명한 것들을 회피하고 있는 걸까.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야 한다. 왜 이 이야기를 쓰는가. 나의 가족 이야기는 무엇이 다르고, 무엇이 달라야 하는가.(117-118)”


#달력뒤에쓴유서 #민병훈 #민음사 #오늘의젊은작가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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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새끼 잡으러 간다
염기원 지음 / 문학세계사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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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기원 작가의 [오빠 새끼 잡으러 간다]를 읽었다. 처음 제목을 접하고 하이틴 소설일까, 아이돌을 대상으로 하는 내용일까 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여기서 오빠는 혈육인 친오빠를 뜻하고 채하나인 여동생이 채강천인 오빠가 서울에서 진짜 사고를 친거라 생각하고 고향인 태백으로 데리고 오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 지난 이틀 동안 강릉으로 출강을 다녀오면서 기차를 타고 가며 창밖으로 보이는 논밭과 작은 야산들을 보고 있자니 드문드문 작은 마을이 보이고 집 한 채만 덩그러니 놓인 곳도 있었다. 물론 아파트도 중간 중간 보이긴 하지만 그래도 고층 건물은 거의 보이지 않고 사람들도 눈에 잘 띄지 않았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어딜가나 사람이 많은 도시에서 살다가 한적한 시골에 가면 더 답답함이 느껴지곤 한다. 익숙해진다는 것은 참으로 무서운 일이다. 도저히 살지 못할 것 같은 환경에서도 어느 순간 적응하고 그곳을 편안하게 느끼며 벗어나길 거부하게 되니 말이다. 도시의 번잡스러움에 익숙해진 나는 시골의 한적함을 견디지 못한다. 자동차의 소음과 경적소리, 사람들이 술마시며 소리를 지르고, 때로는 화를 내며 싸우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음에도 어둠이 너무나도 빨리 찾아오는 시골의 고요함은 이름모를 두려움을 가져다 준다. 


석탄 소비가 줄어들면서 거의 대부분의 탄광이 문을 닫기는 했지만, 한때 강원도의 사북과 태백은 수많은 광부들이 있었다. 태백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주인공 채하나와 절친 미주는 완전히 정반대의 경제적 상황이지만 하나는 미주에게 열등감을 느끼지 않고, 미주는 하나에게 있는 척을 하지 않아 친구로 지내며 서로에게 의지하고 있다. 하나의 오빠 강천을 짝사랑하는 미주, 그리고 미주의 오빠 우주를 짝사랑하는 하나라는 인물 설정은 오히려 소설의 긴장감을 저조하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란 의구심이 들지만, 우주는 거의 등장하지 않기에 하나와 미주의 관계 설정에 집중하며 과연 하나의 우려처럼 강천이 정말 사기꾼의 유혹에 넘어간 것인지 궁금증을 자아낸다. 고등학교를 졸업한지 얼마 되지 않은 앳된 하나와 미주는 여전히 학생처럼 재잘거리며 수다를 떨지만 하나는 엄마의 병환으로 인한 죽음과 아빠의 무책임한 행동으로 인해 혼자가 될까 두렵기만 하다. 하나는 육상부였던 오빠를 만나러 학교에 갔다가 투포환 선수가 되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게 되고 나중에는 국가대표 상비군에까지 오르게 된다. 그동안 올림픽을 보면서 거의 대부분의 종목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우리나라 선수들이 유독 육상의 필드경기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이유를 조금은 알게 되었다. 하나의 경우처럼 여자 투포환 선수가 국내가 아닌 국제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체격 조건이라고 한다. 메달을 따는 여자 투포환 선수들은 거의 대부분 100kg이 넘는 신체 조건을 갖고 있는데, 우리나라 여성이 그런 조건을 갖추기란 여간해서는 쉽지 않기 때문에 메달권에 진입하는 힘을 뿜어내기란 불가능한 것이다. 


어쨌든 85kg에서 무게가 멈춘 하나는 현실을 파악하고 운동을 그만두게 된다. 그리고 공장에 취직해 아빠 때문에 열악해진 거주지를 옮기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중이다. 고된 노동을 마치고 휴식을 취하며 우연히 유튜브에 나온 오빠 강천의 얼굴을 보고 하나는 경악하며 오빠가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 것인지 불안하기만 하다. 오빠를 잡으러 서울에 가기 위해 거의 불가능한 연차를 내고 함께 따라 나선 미주와 함께 서울 시내 곳곳을 돌아다니며 오빠의 흔적을 찾게 된다. 하나와 미주의 경제적 상황이 정반대라면, 태백의 황지 페투페라는 카페 겸 호프집은 도시의 스타벅스와 대조를 이루며 소설 속에서 여러번 등장한다. 미주를 기다리며 스타벅스에 머물던 하나는 사람들을 관찰한다. 그곳에 머무는 사람들은 모두 동등한 입장에서 비슷한 가격을 지불하고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지만, 누군가에게 그곳은 여유롭게 차 한 잔을 마시며 수다를 떠는 곳인 반면에, 누군가에게는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 하는 또 하나의 전쟁터와 같은 곳이기도 하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스타벅스는 우리나라에서 도시화의 상징이 되어버렸다. 스타벅스가 있는 건물은 비싼 매물이 될 확률이 높고 유동 인구는 다른 곳에 비해 월등히 많으며 차량의 흐름도 만만치 않게 복잡한 곳이 대부분이다. 


연결이 잘 되지 않는 오빠와의 만남을 위해서 미주와 함께 옛 고향 언니 하연은 언론사에 취직하여 기자로 생활하고 있지만, 막상 하연 언니를 만나 설명을 들으니 그녀가 하는 일이란 고작 다른 기사의 내용을 우라까이 하여 다시 웹상에 게재하는 기래기의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럼에도 하연은 하나와 미주보다 냉철한 시각으로 강천이 하는 일이 분명 책기꾼에 만들어놓은 사슬에 걸려들었다고 자신했다. 그럴만한 것이 유튜브에 나온 강천의 소개는 베스트셀러 작가이며 스타트업 대표이자 교수를 가르치는 사람으로 나왔기 때문이다. 하나는 이렇게 어이없는 뻥을 치는 강천이 누구에게 홀딱 속아 넘어간 것인지 불안하기만 하다. 강천에게 마저 무슨 일이 생긴다면 세상에 자기 혼자 남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에 어서 빨리 강천을 제정신 차리도록 태백에 데리고 가야 한다고 종용한다. 갑작스럽게 등장한 하연이 하나와 미주와 저녁을 먹고 술을 마시며 책기꾼에 대한 설명을 해주는 부분은 강천의 사기로 의심되는 부분과 상관되기에 필요한 설명이기도 했지만, 어딘가 부자연스럽다는 느낌은 지울 수 없었다. 


#오빠새끼잡으러간다 #염기원 #문학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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