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을 더하면
은모든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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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모든 작가의 [한 사람을 더하면]을 읽었다. 마스크를 한 묶음이 아니라 한 장에 5천원 가까이에 구입한 때가 있었다. 그나마 그것도 없어서 못 살 판국이었으니, 그때 어렴풋이 나마 대공황이나 전쟁과도 같은 무질서한 상황이 펼쳐지면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란 두려움이 느껴졌었다. 지긋지긋한 마스크와 어느 정도 이별을 하고 지내는 요즘 팬데믹이 또 다시 찾아온다면 이란 가정은 끔찍할 정도로 그리고 싶지 않은 미래이다. 이번 소설의 배경은 지금과 그리 멀지 않은 20여년 후의 미래를 그리고 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과는 너무나도 다른 아니 지금 우리가 우려하고 있는 나쁜 일들이 한꺼번에 다 발생된 것처럼 각박한 삶이 그려지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번 소설의 가장 뚜렷하면서도 특이한 가정은 바로 집합 가족이라는 개념이다. 피를 나눈 혈연관계인 가족을 원가족이라 칭하고, 결혼과도 같은 제도로 얽힌 가족이 아니라 그저 철저한 경제적 관념에 의거해 함께 살아가는 가족을 집합 가족이라 칭하고 있다. 그도 그럴만한 것이 소설의 주인공으로 나오는 이심은 가정의학과 의사이지만 경제적 풍요로움은 눈꼽만치도 찾아볼 수 없고 일반 노동자처럼 하루 하루 발생되는 비용과의 피곤한 신경전을 벌여야 하는 상태이다. 더군다나 이심은 아직 집합 가족을 정하지 못해 몇 년 동안 혼자 살고 있기에 독신세를 부담해야 해서 더욱 경제적 상황이 열악하진 상태이다. 1인 가족이 점점 늘어가는 작금의 상황에서 혼자 사는 이들이 과중한 독신세를 부담해야 한다는 설정은 독특하면서도 급격하게 변화하는 현대 사회의 여러 가지 양상들을 반영하고 있는 설정이 아닐까 싶다. ‘무도회’라는 이름으로 집합 가족을 찾는 이들의 모임은 독신세의 부담이 엄청나기에 함께 살 사람을 찾아야 하지만, 이왕이면 자신에게 도움이 될 만한,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피해를 주지 않고 편하게 지낼 상대를 찾게 될 것이다. 


이심은 가정의학과 의사이지만 공공의료기관에 등록되어 있기에 국가에서 지정한 바우처를 사용하고자 신청한 이들에 한해서만 왕진을 나가 진료를 해준다. 만일 바우처를 사용하지 않는 이들을 진료했다가는 방지법에 의해 처벌을 받게 되니, 과거 공산주의 치하의 전체주의 발상이 고도로 의학과 과학이 발달한 미래에서도 충분히 적용될 수 있다는 두려움을 갖게 만든다. 마치 무상 진료를 해주는 것처럼 바우처를 남발하지만 결국 소시민들은 원하는 때에, 원하는 만큼 충분한 진료를 받지 못하기에 첨단 의학의 발전은 그들에게 무용지물일 뿐이다. 이에 반해, 부자라는 말이 소거된 미래 사회에서는 대신에 자산가라는 말이 통용되며 SNS를 통해 상대적 박탈감을 불러일으킬 만한 게시물이 금지되는 법을 통해 부자들의 세상은 완전히 감춰지게 된다. 비용을 지불하지 않고서는 국가에서 통제하는 공공 뉴스 밖에 시청할 수 없는 많은 이들은 유료 뉴스를 통해서만 전해지는 실제 사건의 진실을 모른 채 살아갈 수 밖에 없다. 


이심은 무도회를 통해 알게된 샴푸의 요정이 있는 가족과의 삶을 선택하려고 하는 순간에, 어린 로아가 계란 알레르기가 있다는 사실에 무심했던 쌍둥이 형제 훈민에게 실망감을 느끼며 선택을 철회하게 된다. 그리고 그 가족에게 관심을 갖게 된 첫 무도회에서 어설픈 실력으로 칵테일을 만들어준 모영과 급속도로 가까워져 함께 집합가족을 이루게 된다. 경총이라는 미래의 독재자와 같은 지도자로 인해서 부자와 일반 시민들의 갭은 더욱 멀어지게 되었고, 부자들이 어떤 감세혜택을 받고 그들만의 세상을 이루며 살아가는지 일반 시민들은 전혀 알지 못하게 된다. 이심은 어느 날 우연히 엄마의 옛 친구에게 초대를 받아 부자들이 사는 곳을 방문하게 되고, 엄마와 함께 그곳으로 넘어올 것을 제안 받는다. 서안이라는 엄마의 친구가 머무는 곳은 집합 가족들이 아등바등 살아가는 대신 온갖 풍요로움을 다 누릴 수 있는 유토피아 같은 곳으로 그려졌다. 


서안이 머무는 세계와 이심과 모영이 사는 세계는 어찌하여 자유롭게 왕래할 수 없는 것인가? 사람들이 흔히 꽤나 넉넉한 사람들이 끊임없이 재물에 욕심을 보이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쉽게 말한다. 누가봐도 충분한 재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더 큰 돈을 벌기 위해 욕심을 부리는 것은 돈에도 중독될 수 있기 때문이다. 쓰지 않더라도 늘어나는 통장잔고를 보면 그냥 기분이 좋아지는 희열에 빠진 것이다. 그보다 더 무서운 이유는 부디 그냥 망상이길 바라고 싶지만, 특정한 부와 권력을 누리는 사람들은 자신이 누리고 있는 지위를 타인에게 나눠주기를 싫어한다는 것이다.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이들을 바라보며 연민의 마음을 갖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누리지 못하는 것을 자신이 속한 극소수의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누리는 것에 꽤나 큰 만족감을 얻는 것이다. 이 소설에 나온 방지법을 토대로 비뚤어진 세상이 바로 이렇게 계급화되고 철저히 분리된 이들의 자화상이라고 할 수 있다. 


경총을 비롯한 권력을 가진 이들이 어떻게 자신의 지위를 높여 가는지 설명하는 대목이 비단 소설 속의 한 인물에 대한 묘사만이 아니라는 느낌적인 느낌이 드는 씁쓸한 비유를 곱씹어 본다. 

“예컨대 지금도 어느 실험실에서 은밀하게 이루어지고 있을지 모르는 유전자조작의 방식부터 경총의 수법까지 무엇이든 명료하게 짚어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비리 의혹이 제기되면 우선 단호하게 부정하여 시간을 벌고, 사익을 추구하여 벌인 일의 극히 일부에 불과한 공적인 요소가 사건의 본질인 것처럼 호도하며, 적절한 시점에 꼬리를 잘라 책임을 떠넘기고서는 다른 화젯거리를 띄워 관심사를 돌리는 경총의 기술은 가히 예술적이니 한 번쯤 꼼꼼히 살펴보라는 말도 덧붙였다고 했다.(89)”


#은모든 #한사람을더하면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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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 단편 만화선 세트 - 전9권 무라카미 하루키 단편 만화선
김난주 외 옮김, 무라카미 하루키 원작, Jc 드브니 각색, PMGL 만화 / 비채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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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펀딩에 참여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네요. 역시나 받아보니 페이지에 지문이 남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한 장을 넘기기게 됩니다. 막연히 상상속에 그려왔던 하루키월드가 이렇게 이미지로 구현됨에 찬사를 보내며 강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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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버지들의 마지막 나날
조엘 디케르 지음, 윤진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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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엘 디케르의 [우리 아버지들의 마지막 나날]을 읽었다. 우리가 일하느라 정신없이 너무 바쁜 날을 보내거나 견디기 힘든 일을 지속해야만 할 때, 비유처럼 전쟁같은 나날을 보내고 있다고 쉽게 말한다. 어쩌면 전쟁이라는 단어를 중간에 넣어서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전쟁을 겪지 않는 이들이기 때문에 가능할 것이다. 인간이 극도의 공포를 경험하고 나면 그 공포를 경험하기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기 어렵다. 마치 공포로 인해 인간의 머리와 마음 속 어딘가의 균형을 이루며 살아가도록 만드는 장치에 이상이 생긴 것처럼 이상한 증세를 보이기도 한다. 어릴 때만 해도 역사 시간에 배운 세계대전과 한국 전쟁이 다시는 반복될 수 없는 인류의 가장 큰 실수와 잘못이라고 생각했었다. 앞으로 또 다시 유사한 형태의 전쟁이 일어난다면 인간은 이전과 같은 행복을 절대로 누릴 수 없을 것이기에 그 누구도 전쟁을 일으키려고 하지 않을 것이라 쉽게 단정지었었다. 


하지만 우리가 한국 전쟁 이후 경제 발전을 위해서 부단히 허리띠를 졸라 매고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할 때에도 지구상의 어딘가에서는 끊임없이 크고 작은 전쟁이 지속되고 있었다. 그리고 팬데믹이 끝나가려는 시기에 설마 했던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시작되었고, 벌써 2년 째 전쟁이 지속되고 있다. 그리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의 참혹한 실상이 길게 이어지는 것은 아닐까 우려가 되는 상황에 팔레스티나와 이스라엘의 전쟁까지 시작이 되었다. 뉴스에서는 폭격을 맞아 무너진 건물 더미에 깔린 사람들과 피를 흘리며 병원에 후송되는 사람들의 장면들이 지속적으로 보도되고 있다. 너무 잔인한 장면들은 분명 방송으로 보여주지 않겠지만, 아마도 그곳은 아비규환이라는 말이 맞아떨어지는 지옥과도 같은 상황이 아닐까 싶다.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그리고 전쟁이 아니라도 해도 생전에 만나거나 엮일 일이 전무한 나라 사람들의 이야기라서 그런지 뉴스를 통해 보도되는 참상을 보면서도 그들의 아픔을 헤아려야 하는 공감의 기능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 것만 같다. 지금 이 순간에도 가자 지구에서는 3분 마다 어린이들이 죽어나가고 있다고 하는데, 우리는 여전히 맛집이 나오는 정보 프로그램을 보고 친구나 동료에게 내일은 무엇을 먹을까 시답잖은 농담을 던지고 있다. 하긴 광화문 광장에서 세월호로 희생된 학생들의 부모들이 단식 투쟁을 할 때, 그 옆에서 먹방을 선보인 무뢰배들도 있었으니, 그 먼 나라의 고통에 동참해 달라는 부탁은 언감생심일 것이다. 


사람이 인간이고 인격을 가진 존재일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이렇게 인간으로서의 존재를 가장 부각시킬 수는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 능력이 떨어지지 않을 수 있도록 부단히 노력하는 자세가 아닐까 싶다. 마치 베터리가 다해 더 이상 기능을 하지 못하는 것처럼, 타인의 고통에 무덤덤해지는 마음을 다잡으려고 애쓰지 않는다면 더는 그런 공감 능력을 회생시킬 수 없는 인두겁을 뒤짚어 쓴 몸뚱아리에 불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타인의 극심한 고통의 순간을 외면하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이미 벌어진 일을, 지나간 과거를 뒤짚어 본다 하더라도 결코 돌이킬 수 없다. 하지만 내가 편히 먹고 자고 쉬는 동안에 누군가가 지나왔을 지옥같은 시간의 면면을 유심히 살펴보고 나면 주위의 사람들을 바라보는 시선의 변화가 생긴다. 혹시나 저 사람도 그런 극심한 고통의 시간을 견디고 있는 중은 아닐까란 염려와 배려의 마음. 누군가 나에게 그런 마음의 흔적을 보여준다면 우리는 엄청난 위로를 받게 되고 그 염려와 배려의 마음 덕분에 살아갈 힘을 얻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군에 점령당한 프랑스의 젊은이들이 영국의 모처에 모여 몇 달 동안 특수 군사 훈련을 받으며 첩보원으로 거듭다는 내용을 그린 이 소설은 단순히 전쟁으로 인해 발생된 국가간의 반목이나 드라마틱한 작전 성공을 영화처럼 그려내지 않는다. SOE 비밀 정보원이 된 폴에밀 곧 팔은 어린 나이에 조국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훈련을 받아 마침내 프랑스에서 여러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유능한 첩보원이 된 팔은 함께 훈련받은 가족같은 전우들과 사랑하는 연인 로라까지 얻게 되지만, 몇년 간 연락하지 못한 홀로 지낼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에 몸서리친다. 비밀 작전을 수행하는 긴장감 속에 지속된 이야기는 팔이 자신의 신분으로는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하며 정점에 달하게 된다. 자신을 애타게 기다릴 아버지를 위해서 자신에게 호감을 보인 레지스탕스 마리를 이용해 아버지에게 자신의 안위를 전하는 엽서를 보내게 된다. 


하지만 팔과 같은 이들이 영국에서 훈련되어 독일군을 염탐하고 작전 방해를 위해 프랑스로 보내진 것처럼 독일군 방첩대에서도 영국 비밀요원들과 레지스탕스를 잡아내기 위한 이들이 있었다. 쿤처라는 독일군 소속의 장교는 결국 마리의 꼬리를 잡아 염탐하던 중 팔이 아버지를 만나러 간 순간에 맞딱뜨려 팔에게 선택을 강요한다. 아버지를 수용소로 보내 비참한 최후를 맞게 할 것인지, 아니면 파롱과 로라가 머물고 있는 안가의 주소를 말하던지 말이다. 결국 팔은 동료와 사랑하는 연인을 쿤처에게 팔아넘기고 아버지를 구하게 된다. 팔은 독일군 수용소에 끌려가 참수형을 당하게 되고, 쿤처는 팔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팔의 아버지를 지켜보며 그가 살아갈 수 있도록 가짜로 만든 팔의 엽서를 지속적으로 보내게 된다. 


소설 속에서 어이없는 우연의 연속은 쿤처가 팔의 끄나풀이었던 마리가 치마 속에 권총을 숨기고 자전거를 타고 가는 모습을 발견하는 장면이다. 마리가 연합군의 폭격으로 사망한 사랑하는 연인을 닮지 않았다면, 파롱이 마리에게 추근덕거리다가 권총을 선물로 주지 않았다면, 쿤처가 마리를 유심히 지켜보며 팔의 아버지에게 엽서를 전달하는 것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쿤처는 팔을 잡아내어 독일군의 근거지를 폭파하려던 작전을 저지시켰음에도 팔에게 아버지를 선택하도록 종용한 자신의 상황을 몹시도 증오스러워 한다. 프랑스를 비롯한 연합군에게 독일군은 악마와도 같은 이들이었겠지만, 반대로 쿤처의 연인처럼 연합군에 의해서 죽임을 당한 이들도 있다. 결국 전쟁은 서로가 서로에게 사랑하는 이들을 강제로 빼앗이 복수심을 불타오르게 하여 고통만을 가중시키는 인간의 가장 추악한 모습이다. 


가자 지구의 무너진 건물 잔해의 먼지를 뒤짚어쓰고 피를 흘리는 어린 아이를 안아 들고 울부짓는 팔레스티나인들은 이스라엘의 유대인들을 향해 복수심을 불태운다. 갑작스러운 하마스의 포격으로 콘서트 장에서 죽임을 당하거나 납치를 당한 이들의 부모들은 팔레스티나인들을 하마스와 같은 테러집단으로 단정지으며 그들을 몰살시키려고 한다. 얼마나 많은 자녀들이 부모를 잃은 채 제대로 먹지도 잠들지도 못한 채 복수심에 불타는 유년기를 보내야만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는 것일까? 얼마나 많은 부모들이 전장에 나간 자녀의 전사 소식을 듣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하루를 보내야만 이 비극의 나날을 멈출 수 있을까? 소설 속에 등장한 인물들은 허구에 불과할 지 모르지만 내가 모르는 어딘가에서 제2의 팔과 제2의 쿤처가 생겨나는 것은 아닌지 씁쓸한 마음이 든다. 


“그들은 이제 어떻게 될까?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악마가 분명 또다시 나타날 것임을 그들은 알고 있다. 인류는 쉽게 잊기 때문이다. 인간들은 기억하기 위해 기념비와 동상을 세운다. 기억을 돌에 맡기는 것이다. 물론 돌은 잊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들은 돌의 말에 귀기울이지 않게 된다. 그렇게 악마는 또다시 나타난다. 그러나 그때도 여전히 어딘가에 진정한 인간이 있지 않겠는가.(482)”


#조엘디케르 #우리아버지들의마지막나날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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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게트 : 근 손실은 곧 빵 손실이니까 띵 시리즈 24
정연주 지음 / 세미콜론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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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연주 작가의 [바게트: 근 손실은 곧 빵 손실이니까]를 읽었다. 세미콜론 띵 시리즈 24번째 책이다. 어릴 때에는 빵이 밥처럼 주식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그저 빵이란 가끔씩 먹는 간식이자, 배고픔을 간단히 달랠 수 있는 보조식품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으니까. 예전에는 프랜차이즈 빵집이나 제과점보다 슈퍼에서 파는 포장된 빵을 많이 먹었던 것 같다. 보름달과 크리미와 같은 빵은 여전히 편의점에 시판 중이고 어쩌다 한 번 사먹어 보면 예전 향수도 생각나고 맛도 괜찮다. 하지만 요즘은 대형 프랜차이즈 빵집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고 동네 빵집들도 명성을 얻어 유명해진 곳도 꽤나 많이 생겼다. 빵지순례라는 말이 생겨났을 정도로 빵에 진심인 사람들도 많아졌다. 아마도 그만큼 제대로 된 빵을 먹어본 사람이 많아졌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사실 빵에 대한 심각한 오해 중의 하나가 밥이 아닌 빵을 먹고 나면 소화가 잘 되지 않고 신물이 올라온다는 말이다. 


밀가루에 대한 거부 반응일 수도 있겠지만, 어느 정도 납득이 되는 현상이다. 그래서 서양인들이 빵을 주식으로 삼는 다는 말을 들었을 때 소화력이 남다른 것일까란 생각마저 했었다. 하지만 막상 그들이 주식으로 삼는 빵을 맛보고 나면 우리가 밥을 먹었을 때 편안한 느낌이 드는 것처럼 빵이 밥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다. 그래도 여전히 빵을 싫어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지만, 일단 빵이 밥보다 소화가 잘 되지 않는다는 것은 오해가 맞는 것 같다. 문제는 우리가 밥을 할 때 쌀을 상태를 따지는 것처럼, 빵 또한 원재료인 밀가루의 상태가 그만큼 중요한게 아닐까 싶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웬만한 나이가 되면 대부분 밥을 할 줄 알게 된다. 솥밥을 하는 것은 예외일 수 있겠지만, 전기밥솥으로 밥을 하는 것은 너무나도 간단해서 초등학생들도 쉽게 배울 수 있다. 하지만 빵을 만들어본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일단 오븐이라는 빵을 구울 수 있는 기계가 있어야 하는데, 요즘은 오븐도 필수 주방용품 중의 하나로 꼽히기는 하지만 여전히 오븐이 없는 집들이 더 많을 것이다. 그렇다보니 빵은 만들어 먹기 보다는 주로 사먹는 음식이 되었고, 그래서 그런지 빵이 만들어지는 과정과 재료에 대해서 대부분은 잘 모른다. 심지어 요즘에는 빵의 이름도 너무 다양해지고 외국 이름이 많아져서 고르기조차 쉽지 않아졌다. 


이탈리아에서 머물 때에는 바게트보다 꼬르네또에 열광했었다. 프랑스의 크로아상과 이탈리아의 꼬르네또가 이름만 다르고 같은 빵을 말하는 줄 알았는데, 최근에 어느 방송에서 말하기를 형태는 비슷하지만 크로아상과 다르게 꼬르네또에는 초콜릿이나 크림 혹은 잼과 같은 부속물을 넣는 차이점이 있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이탈리아의 바에 가서 커피와 함께 꼬르네또를 주문할 때는 자신 있게 꼬르네또의 종류별 이름을 불러주는 것이 좀 있어보인다나 할까. 아무튼 이탈리아에서는 바게트 보다 각 지역 주마다 고유한 빵의 이름과 모양이 있었다. 파스타를 먹기 전에 손으로 뜯어 먹기도 하고 파스타를 먹다가도 같이 먹고 파스타를 다 먹고 남은 양념을 손으로 뜯은 빵으로 설거지 하듯이 먹기 좋은 질감을 갖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파스타와 같이 먹는 빵들은 우리나라에서 파는 빵처럼 부드럽지 않고 거친 느낌이 많아서 처음에는 식감이 그리 좋지 않게 느껴진다. 안타깝게도 바게트의 원조인 파리를 가보지 못해서 바게트의 찐 매력을 모르고 있다가, 어이없게도 바르셀로나로 여행을 갔다가 바게트의 참맛을 알게 되었다. 사실 바게트를 먹고 싶어서 샀다기 보다는 하몽을 먹고 싶어서 곁다리로 바게트를 구입했었다. 조금은 쌀쌀한 날씨였는데, 마땅한 식당을 찾지 못해서 아침에 호텔에서 만든 하몽을 넣은 바게트를 점심으로 때우게 되었다. 그나마 햇살이 좋아서 멋진 풍광을 바라보며 바게트를 한입에 자판기 커피를 한 모금 마시니, 마치 명오가 열리는 것처럼 아니 바게트 빵이 원래 이렇게 맛있는 거였었나 싶은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적지 않은 양이었는데 말끔히 바게트를 먹고 나니 입천장은 다까져서 쓰라리기까지 했다. 그래도 너무 맛있어서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바게트와 하몽을 더 사야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요즘 나 또한 책의 한 챕터를 맡은 ‘잠봉뵈르’를 꽤 좋아하게 되었는데, 문제는 이런 바게트를 파는 빵집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바쁜 아침에 한 조각이라도 입에 물고 나가거나, 아니면 간단히 챙겨가서 일을 시작하기에 앞서 따뜻한 커피와 함께 먹기 안성맞춤이지만 매일 그런 호사를 누리기는 불가능한 것 같다. 그래서 미약하나마 죽은 빵도 살린다는 토스트기로 냉동실에 저장해둔 빵을 부활시켜 하루를 시작해본다. 제목의 부제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좋아하는 빵을 나이들어서도 먹을 수 있기 위해서는, 그리고 달달한 잼을 마음껏 발라 먹을 수 있기 위해서는 정말로 운동이 필수적인 것 같다. 근 손실이 심각해지면 빵을 바라보기만 해야할테니까 말이다. 


#정연주 #바게트 #근손실은곧빵손실이니까 #세미콜론 #띵시리즈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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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사랑과 혁명 1~3 세트 - 전3권
김탁환 지음 / 해냄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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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탁환 작가의 [사랑과 혁명 1-3]을 읽었다. 소설을 읽다보면 영화를 본 것 이상으로 여운이 남아 계속해서 소설 속의 장면이 떠오를 때가 있다. 1,500 여 페이지에 달하는 장구한 스토리를 따라가다보니 열흘 내내 1,800년대 조선의 전라도 곡성을 비롯한 짙은 어둠이 자리한 길도 없는 산길을 걷는 기분이었다. 리뷰를 쓰기 위해 표지에 음각처럼 인쇄된 사랑과 혁명이란 글자를 손으로 쓰러내리다 갑자기 ‘사랑의 혁명가’라는 노랫말이 떠올랐다. 벌써 30년 전인 어느 여름날 바닷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 뛰어들었다가 당신은 주님품으로 떠난 학장 신부님의 트레이트 마크와 같은 낱말이었다. 신부님이 돌아가신 이후에 신학생들은 신부님을 기리며 노래를 만들었고, 평소 신부님의 신념과도 같은 가르침을 노랫말로 삼아 오랫동안 신부님을 생각하며 불렀다. 


“사랑의 혁명가는 자신을 버리고

타인을 위해서 평생을 사는 것

소박한 웃음과 불같은 열정을

한몸에 가득히 품고 산다는 것

그리스도인으로 살고 있는 현실이 꿈보다

아름답다고 말씀하시던 모습

잊지 않으리 언제까지나”


잊고 지냈던 노랫말을 떠올리니 저자가 소설의 제목을 왜 [사랑과 혁명]으로 지었는지 알 것 같았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자신 안에서 일어나는 혁명과도 같은 일이기에, 그래서 그 혁명과도 같은 일이 일어나면 사랑하는 사람은 그 이전의 자신으로 결코 돌아갈 수 없고,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그래서 사랑은 혁명일 수 밖에 없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그렇게 혁명적인 사랑에 빠진 이들의 이야기를 전해준다. 


천주교에 관심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조선 말기에 극심한 박해의 시기가 있었다는 것을 들어봤을 것이다. 현재 가톨릭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로마에서도 초기 교회에서는 거의 300여년에 걸쳐 박해가 지속되었고, 목숨을 부지하며 신앙을 지키기 위해 수많은 그리스도교인들이 지하에 굴을 파고 들어가서 살았고 지금까지도 카타콤베라는 이름의 순교지로 보존되어 있다. 우리나라의 천주교 박해는 18세기 말에 시작되어 거의 백년에 걸쳐 지속되어 수많은 순교자들이 목숨을 잃었다. 당시에 양반도 중인도 천민도 가릴 것 없이 평등 사상에 입각해서 천주를 받아들였기에 이름이 없는 무명 순교자들이 많아 정확히 얼마나 많은 분들이 순교했는지는 알지 못한다. 1984년에 103위 순교 성인을 기리게 되었지만,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분들까지 예상컨대 1만명쯤 되지 않을까 추측해볼 수 있다. 


유럽에 여행을 가면 성당을 보지 않고서는 역사를 알 수 없는 것처럼, 우리나라 조선 말기의 역사에서도 천주교가 도래한 부분은 생략하기 힘들다. 다른 나라에서는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선교사들에 의한 전교가 아니라 사람들이 스스로 공부하며 믿고자 했던 것은 단순히 우리나라 사람들이 종교에 관대한 마음이 있어서가 아니다. 처음 천주교가 우리나라에 소개될 때에는 양반들을 중심으로 서학이라는 이름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불교의 영향력보다 사대주의의 뿌리와도 같은 유교사상이 나라의 근간을 이루던 때이고, 기득권이 권력을 유지하는 데 있어서 공맹사상은 계급의 차이를 지속시키는 데 있어서 무척이나 효과적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계급이 정해진 삶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조선시대의 대다수였던 일반 평민들은 조선 말기에 이르러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끼니를 잇기 힘든 부조리와 부폐가 만연한 상태였다. 계급의 차이가 있더라도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정의가 존재했다면 서학의 영향력이 미비했을지도 모른다. 


소설의 중간에도 언급이 되는데, 정말 악랄하고 치가 떨릴 정도로 묘사된 징제비 금창배는 유독 자신이 천주교 신자들을 발본색원하여 뿌리까지 뽑으려 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이미 조선에 천주를 믿는 이들 뿐만 아니라, 절에 다니며 부처님을 믿는 사람들, 그리고 굿을 하는 무당들도 많다고. 하지만 이들을 잡아서 문책하고 고문하며 배교를 강요하지 않는 이유는 그들의 믿음이 나라의 근간을 흔들정도로 위협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부처님께 드리는 염불과 무당에게 큰 돈을 들여 굿판을 벌인다 해도 조선의 계급 사회와 부조리와 부폐의 현실과 대립하지 않는다. 그러나 천주를 믿게 된 이들은 다른 세상을 꿈꾸기 시작한다. 양반과 천민의 차이를 없애고 예수님의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기존의 관습처럼 지속된 악습의 이별을 선고한다. 많이 가진 이들은 자신의 것을 조금이라도 빼앗길까 항상 경계하며 지내왔기에 귀신같이 알아챈 것이다. 아 이들을 가만 놔둬서는 안되겠다고. 


이 소설의 가장 중요한 역사적 배경은 정해박해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4대 대박해만큼 많은 이들이 희생된 것은 아니지만 전라도 곡성을 중심으로 옹기를 굽는 교우촌을 형성해 살아온 많은 이들이 관아에 끌려가 문초에 시달리다 배교를 해서 풀려나거나 매를 맞고 고문을 당해 병을 얻어 죽게 된 이들이 적지 않았다. 천주교가 처음 서학이란 이름으로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많은 용어들이 한자어로 축약되어 사용되었다. 지금도 그대로 유지되는 단어들도 있지만 탁덕이라는 말처럼 이제는 사용되지 않는 말들도 많이 등장한다. 지금이야 전국 어느 성당을 가도 신부님을 쉽게 만날 수 있지만, 그 당시에는 가장 먼저 입국했던 중국인 주문모 탁덕이 치명당하고 나서 몇 십년 동안 새로운 탁덕을 모시기 위해 부단히 애쓰게 된다. 탁덕이 몇 명이라도 있었다면 어렵더라도 신자들은 간간히 성체를 모시고 성사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탁덕이 전무한 상태에서 공소회장의 역할은 그야말로 어마무시하게 중요했다. 어찌보면 이 소설의 주인공 중의 한 명이라고 할 수 있는 야고보 회장은 놀라운 카리스마로 덕실, 무명 교우촌을 이끌어간다. 


독립운동에 관련된 영화를 보면 고구마 백 개를 먹은 것처럼 답답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꼭 나오는데, 바로 밀정을 알아보지 못하는 장면이다. 사실 최후의 만찬 이후 예수님을 잡아갈 절호의 찬스를 제공한 유다의 배신은 너무나도 유명하고 아주 머나먼 나라의 오래된 이야기라 그런지 감정이입이 쉽게 되지 않았는데, 징제비 금창배로 인해 간자로 한 평생을 산 공원방이 나오는 장면에서는 나도 모르게 분노가 치밀어 올라 반드시 그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기를 바라게 되었다. 특히나 사람이 얼마나 잔혹해질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이 있는데, 공원방이 배교하기 이전에 함께 치명하기로 약속했던 이오득 야고보의 행적을 알아내기 위해 강송이 아가다를 고문하는 부분이다. 옥리들에게 쥐를 죽이지 말고 잡아들여 사람이 들어갈 만한 항아리에 쥐를 무려 80여 마리나 넣어놓고 뚜겅을 닿아놓은 채 으름장을 놓는 것이다. 강송이 아가다에게 원하는 대답을 얻지 못하자, 공원방은 항아리 안에 아가다를 집어 넣는다. 치도곤으로 살이 터지도록 매를 치고, 주리를 틀고 뼈를 부러뜨리는 폭력과는 어쩌면 차원이 다른 고통이 아니었을까. 강송이 아가다는 쥐에게 물려 살점이 떨어지고 피가 뚝뚝 떨어지는 고통 속에서도 입을 다물지만, 옥에서 나간 후에도 그 후유증을 견디지 못해 얼마 후 죽게 된다. 


우리가 흔히 사람이 몹쓸 짓을 하면 짐승만도 못하다는 비하를 하게 되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짐승은 인간과 같은 파렴치한 짓을 하지 않는다. 짐승에게는 오로지 생존을 위한 본능이 있을 뿐이지, 의도적으로 고통을 주기 위한 악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 인두겁을 쓰고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한탄이 섞인 말이 나오는 것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인간이 얼마나 지독해질 수 있는지 지속적으로 반복되었기 때문이다. 홀로코스트와 같은 만행들, 전세계에서 반복된 제노사이드. 그리고 과거를 묻어버리고 책임지지 않으려는 수많은 위정자들. 


3권에 이르러서 전라감영에 갇힌 채 십여년의 옥생활을 하며 배교를 거부한 6명이 등장하는 내용은 그냥 차라리 작가의 상상 속에서 만들어낸 허무맹랑한 이야기라면 차라리 마음이 편할텐데라는 생각마저 들게 만들었다. 물론 지금도 감옥생활이 힘들고 고통스럽겠지만, 소설에 묘사된 조선시대의 옥은 그야말로 누구라도 없던 병마저 생기고 얼마나 그곳에서 버틸 수 있을지 감히 장담할 수 없는 끔찍한 상태였다. 입으로는 신념이나 자존심을 어떤 경우에도 버릴 수 없다고 쉽게 말하지만, 머리속으로 상상해온 고통과 실제 내 몸이 겪는 고통은 맞닥뜨리기 전까지는 전혀 체감할 수 없다. 생살이 터져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뼈가 휘어져 앉은뱅이가 될 수 밖에 없는 고통을 대체 어떻게 견뎌낼 수 있을까? 그러한 고통이 시시각각 다가오는 순간을 십년 넘게 견디며 치명의 순간이 왔음을 기뻐하며 기도하는 이들의 굳건함은 과연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신태보와 이태권이 주교에게 부탁받은 옥중기를 전하기 위한 방법으로 소인정 요안은 공원방이 원하는 <옹기꾼의 노래>를 적어 전해주는 묘수를 실행한다. 1권에서부터 등장한 덕실마을 교우촌 부부인 전원오 안또니와 감귀남 글나라가 일생에 걸쳐 만들고자 했던 노래인데, 자세한 내용이 나오지 않아서 얼마나 심오한 내용을 함축적으로 담으려는 것이까 궁금했는데, 3권의 말미에 그 내용이 나온다. 그리고 3권의 소제목이 왜 ‘나만의 십자가’인지 그 깊은 뜻이 담겨 있다. 


“나자렛에선 가족이 원수였고

갈릴래아에선 이웃이 원수였고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길에선

가난과 배고픔과 목마름이 원수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간 다음엔

유대교라는 종교와 로마라는 제국이 원수였어라

십자가에 매달렸을 땐 

원수라 여긴 모든 것들을 사랑하여야 하므로

저마다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겠다는 맹세보다 

더 어렵고 무섭고 벅찬 것은 없어라

십자가를 지고도 원수가 여전히 원수라면

당신의 십자가는 십자가가 아니다

당신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3권 332)”


시간이 아무리 흘렀어도, 시대가 아무리 좋아졌다해도 불변의 진리를 뼈아프게 알려주고 있다. ‘당신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라는 말이 지나온 나의 삶을 돌아보게 만든다. 사랑이라는 말로, 십자가라는 말로 얼마나 많이 나 자신을 정당화했는가. 나와는 전혀 다른 시대를 살아간 사람이지만 이미 그때 진리를 깨달았기에 거짓 사랑과 거짓 십자가를 지닌 이들은 감히 이해하거나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고통의 시간을 인내로이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결국 새로 태어나는 모든 이들에게는 동등한 삶의 숙제가 주어진다. 사랑을 참사랑으로 받아들여 내 안에 혁명을 일으킬 것인지, 아니면 공원방과 같은 간자의 삶을 선택할 것인지….


#김탁환 #사랑과혁명 #해냄 #옹기꾼의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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