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이치조 미사키 지음, 권영주 옮김 / 모모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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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조 미사키의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를 읽었다. 일본 문화의 특징인 것일까? 아니면 유일신 사상에 입각한 종교가 아닌 신도라는 특정한 종교와 문화의 영향 때문일까? 일본 영화, 소설, 드라마의 멜로 타입에 단골 소재로 쓰이는 것은 주인공의 갑작스러운 죽음이다. 그리고 남겨진 이는 떠나간 사람을 잊지 못하고 그와의 추억을 되새기는 장면들이 비슷한 맥락으로 반복된다. 우리나라도 비슷한 면이 없지만 일본 문화에서 젊은이들의 애틋한 사랑에는 피할 수 없는 불치병이 반복된다. 어쩌면 생과 사에 대한 선택권이 인간에게 없음을 너무나도 빨리 간파했음에도 그러한 무력함과 수동성이 오히려 애틋함이 가중된 문학의 형태로 발전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꽤 오래 전에도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 혹은 드라마 [Summer Snow] 영화 [지금 만나러 갑니다]와 같은 눈물 샘을 자극했던 영화와 소설들도 모두 주인공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절절한 러브스토리를 그리고 있다. 이번 책도 비슷한 맥락의 소재로 결말이 이어지지만 이야기의 시작은 좀 다르다. 주인공 도루와 히노는 아무런 사적인 만남이 없이 시모카와를 괴롭히던 학생에 의해서 유사 연애를 시작하게 된다. 도루는 여느 인물과는 구별되는 일희일비 하지 않는 성격을 가진 모습으로 등장한다. 히노에게 전혀 관심이 없었지만 괴롭힘을 당하는 친구를 돕다가 여자친구가 생기자 도루에게도 예전과는 다른 일상이 조금씩 펼쳐지게 된다. 

도루가 갑작스럽게 사귀자는 제안에 덥석 그러자고 대답한 히노는 세 가지 단서를 붙인다. 마지막 조건은 자신을 좋아하지 말것이라는 조금은 이상한 제안이었는데, 그 이유는 히노가 얼마전 사고로'선행성 기억상실증'이라는 장애를 겪고 있기 때문이다. 아침에 일어나 잠들기 전까지는 그날의 일들을 기억하지만 잠을 자고 그 다음날 일어났을 때에는 전날을 일들을 기억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히노는 잠들기 전에 그날 있었던 일들을 수첩과 일기에 기록을 남기고 다음날 확인하며 일상을 버티어가고 있었다. 도루와의 교제가 이어지던 어느 날 히노는 도루에게 자신의 증세를 고백한다. 하지만 도루는 히노에게 자신이 그 사실을 말했다는 사실을 기록하지 말 것을 부탁하고 히노는 다음 날 도루에게 자신의 병을 고백한 것을 기억하지 못한다. 

이야기의 주요 인물은 도루와 히노 그리고 히노의 절친 와타야까지 세 명이지만, 도루의 친누나도 중요한 서사의 맥락을 이어가는 인물로 등장한다. 일본의 저명한 신인상 아쿠타가와상을 받게 된 도루의 누나는 도루의 아버지가 상처받고 싶지 않아서 외면했던 현실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도루의 아버지와 누나의 이야기는 아마도 히노가 처한 상황을 망연자실한 마음으로 바라보게 된다면 심각한 우울증의 상황으로까지 갈 수 있겠지만, 그 현실을 어떻게 마주하느냐에 따라 서술 기억이 아닌 절차 기억으로 조금씩 히노의 상황을 타개해 나갈 수 있는 길이 열리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게 만든다. 결국 도루의 제안으로 히노는 잊고 지냈던 그림 그리기에 다시 집중하게 되고 히노가 그린 도루의 크로키화는 마지막 순간에 히노가 도루의 기억을 재생시키는 도화선이 된다. 

노화가 진행되면서 생겨나는 수많은 병들이 우리를 위협하지만 상당수의 사람들이 가장 무서워 하는 것은 어쩌면 과거의 기억을 잃는 병일지도 모르겠다. [내 머릿속의 지우개]라는 영화처럼 수십년간 함께 해온 사람들과의 기억을 송두리째 잃어버리게 된다면 우리는 살아갈 힘을 놓아버리고 싶을지도 모른다. 이 소설의 주인공 히노도 가장 꽃다운 나이에 몹쓸 장애를 얻게 되었지만 도루와 같은 위생감을 중요시 하는 친구와의 공감과 사랑 덕분에 머리 속에서 떠오르지 않는 기억들을 마음 속에서 불러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게 된다. 

"기억이 하루 이상 남아 있지 못해도, 눈앞에 있는 사람을 정보로만 알아도, 그 사람이 나를 알고 있고 그 사람에게 나와 함께 보낸 기억이 있으면 이렇게 부드러운 눈빛으로 나를 봐준다.(104)"

"나한테도 결국 도루는 과거가 될 거야. 내가 계속해서 소설을 쓰고 있더라도 인터뷰하다가 도루의 죽음을 무심코 입 밖으로 낼 수 있을 정도로. 언젠가는 과거의 일부가 될거야. 어떤 상처든 한번 입고 나면 완전히 사라지진 않아. 상처는 기억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아픔이 계속되진 않거든. 그렇게 해서 살아가는 거라고 생각해. 추억 속의 바람이 문득 불었을 때, 원고를 쓰다가 키보드로 도루란 글자를 쳤을 때 생각나는 일은 있어도.(354-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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