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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복숭아 - 꺼내놓는 비밀들
김신회 외 지음 / 글항아리 / 2021년 7월
평점 :
살다 보면 문득 그 옛날 그때가 떠오르며 이불킥을 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순간이 있다. 다른 건 잘도 잊어버리면서 영원히 기억나지 않았으면 하는 그 순간은 꼭 머릿속에서 튀어나오는데 뭐 비단 순간의 실수만 그런 건 아니다. 평소엔 잘 드러나지 않지만 어느 막다른 골목에서 반드시 정체를 드러내고야 마는 나의 약점들. 극복하고 싶지만 쉽지 않은 그것들. 이 책은 그 약점에 관해 9명의 저자가 쓴 책이다.
책은 나의 부족한 면, 나의 단점, 나의 비밀. 그렇지만 알고 보면 복덩이인 그것을 알맞은 빛깔을 내며 여름을 상징하는 탐스러운 과일이지만 쉽게 물러버리는 복숭아로 비유한다. 제목이 <나의 복숭아>가 된 이유다.
사랑, 노래, 야구, 걱정 등 참으로 다양한 기억에 관해서 다양한 저자들이 나의 복숭아를 털어놓는데 너무나 완벽해 보이는 저자들의 입에서 자신의 비밀이 나온다는 것만으로도 뭐랄까 우리는 같은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괜스레 입꼬리가 실룩거린다.
"어쩌면, 지난날 내가 사랑이라 착각하고 무수히 해왔던 실패들이 모두 진짜 사랑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사랑이 그의 복숭아인 저자는 모르는 채로 좋아하고, 알지 못하면서도 푹 빠져버리는 금사빠로 스스로를 소개한다. 그 고백 앞에서 나는 한참이나 킥킥거렸다. 나 역시 쉽게 좋아하고 쉽게 식어버리는, 어쩌면 사랑을 알게 되어서가 아니라 모르는 상태로도 살아냈던 날들이 떠올라서인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모르는 채로 했던 시도들이 사실은 가장 진짜에 가까웠다고 말한다. 그 말이 마음에 꽤 오래 남았다. 나는 어떤 사랑을 했을까?
어떤 이는 노래 앞에서 작아진다. 그래서 그는 악기를 다룬다. 어쩌다 노래할 일이 생기면 앞으로 남은 노래방의 수를 센다. 그게 열 번이라 치면 그 열 번만 견디면 더 이상의 굴욕은 없을 거라고. 이 대목에서 나는 실소를 터뜨렸다가, 곧 묘한 용기를 얻었다. 서툴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남은 굴욕의 분량을 어림해 마음을 가볍게 만드는 기술. 부끄러움을 견디는 것 역시 일종의 근육일지도 모르겠다.
또 어떤 이의 과자 이야기는 귀엽고 처연하다. 엄마 앞에서 과자를 먹으면 안 된다는 룰에 방문이 달칵 열리는 찰나에도 부스럭 소리 한 번 내지 않고 봉지를 감추던 소녀는 서른다섯이 되어서야 거실에서 당당히 과자를 먹는다. 규율이 만들었던 비밀의 습관이 어른의 일상에서 해방되는 순간이다. 우리 누구나 이런 순간이 있지 않나. 작은 욕망을 숨기느라 불필요한 재치를 키웠고 그 재치가 나를 살리기도 고독하게도 만들었던 웃픈 기억. 그랬다. 부끄러움은 때로 사람을 세밀하게 만든다. 그 세밀함이 지나쳐 자신을 옥죌 때 우리는 저자처럼 오래 묻어둔 복숭아를 밖으로 꺼내야 한다. 꺼내고 나면 생각보다 별것 아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나의 복숭아는 날씨와 야구와 밤과 자신감과 책이지만, 동시에 그것들에 대한 나의 기억이다."
어쩌면 우리의 복숭아는 어떤 대상이 아니라 '그때의 나'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과일의 맛은 제철이 아니라 '제 마음'이 결정한다.
어떤 날은 달고, 어떤 밤은 시다. 어떤 기억은 쉽게 멍들고, 어떤 약점은 오래도록 향기로 남는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리뷰를 위해 이 책을 돌아보니 책의 가장 큰 선물은 타인의 비밀을 엿보는 즐거움이 아니었다. 그들의 비밀이 곧 지금의 나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는 거다. 사랑을 모르는 채 사랑을 해왔고, 서툰 노래를 열 번쯤 더 부를 용기를 계산해 보고, 방문이 열리기 전에 봉지를 숨기던 손을 천천히 내려놓는 일.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복숭아를 구경하다가 슬며시 자신의 과일을 꺼내 들게 된다.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내 약점은 꺼내도 괜찮은 걸까? 나는 내 부끄러움을 다정하게 쓰다듬을 수 있을까?
나는 내 안에서 오래 굳어 있던 씨앗 하나를 꺼내 창가에 올려두었다.
내일 아침의 빛에서, 그 작은 씨도 언젠가 달큼한 향을 낼지 모른다.
아니, 오래 묵혀둔 그것은 이미 충분히 향기롭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렇게 서로의 글을 통해 조금 늦게 배운다.
사람들의 서툶 과 약점이 한 권에 모여 있는 풍경은 참으로 정겹다.
이불킥의 밤은 계속 오겠지만 이제는 그 발끝에 리듬을 붙여보려 한다. 쿵, 짝. 한 번의 민망함마다 한 번의 안도.
그러다 보면 언젠가 나의 복숭아도 누군가의 여름이 될 수 있을까.
그런 상상을 하며 노트북을 덮는다.
과일은 내일 아침에 먹기로 한다.
오늘 밤은 그저 이 달큼한 고백의 잔향 속에서 천천히 잠들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