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유결점
서동주 지음 / 필름(Feelm)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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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아무런 접점이 없는 사람인데 이상하게 궁금한 이들이 있다. 서동주도 그랬다. 세상의 모든 것을 가진 것처럼 보였던 사람. 이름만으로도 반짝거리는 세계가 따라붙는 듯했던 사람. 그런데 어느 날 그가 가진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렸다. 그것이 그의 잘못 때문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온갖 오해와 소문이 꼬리를 물고 따라붙었다. 나는 그 무게를 짐작조차 할 수 없지만 세간의 시선 속에서 버텨내는 일이 얼마나 고단했을지는 분명했다.(책에도 그 이야기가 잠깐 등장한다.) 그런데도 여전히 웃고, 행복해 보이는 그 사람. 그래서 더 궁금했다.


그는 한 걸음만 내디뎌도 또 다른 길이 열린다고, 자신이 그런 삶을 살아왔으니 가만히 자신의 삶을 따라와 보라고 스스로 이 책을 소개하며 책을 열러젖힌다. 굴곡진 삶 가운데 꽤 많은 에피소드들을 들려주며 그가 하고 싶은 결국은 이런 거다.

"소소한 행복이란 거창한 게 아니다. 고구마 잔뜩 먹고 강아지와 함께 발걸음 맞춰 공원을 산책하는 일, 집에서 정성껏 지은 따뜻한 밥을 사랑하는 이에게 대접하는 일, 주말에 늦은 밤까지 지루한 영화 한 편이라도 끝까지 함께 보는 일, 밤늦게 눈이 마주치면 '치맥 콜!'을 외치며 야식을 함께 나누는 일." 그는 예전의 자신은 이런 일들을 성공을 가로막는 요소라 생각했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게 안다. 삶은 거대한 목표를 이루는 순간보다, 하루하루의 분명하지만 작은 행복들이 모여 완성된다는 것을.


사실 누구나 그렇다. 부끄럽지만 이 리뷰를 적고 있는 나도 그랬다. 더 많이 성취해야 한다는 조급함이 사실 지금의 내게도 있다. 좋은 대학, 안정된 직장, 더 큰 집, 더 넓은 세계. 늘 그다음 단계로 향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현재는 늘 희생되어야 했다. 오늘의 기쁨은 내일을 위해 미뤄야 한다고 생각했고, 심할 때는 웃음조차 아껴야 한다고 여겼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 과정에서 잃어버린 것이 너무 많았다. 그냥 젊다는 것만으로도 빛나던 나의 청춘, 아내와 아이와 고양이와 함께하는 소소한 순간들, 가족과 나누는 늦은 저녁 식사, 친구와 그냥 떠드는 시간들. 그것들이야말로 삶을 버티게 하는 진짜 힘이었다는 걸 책을 읽으며 문득 알게 되었다.


서동주는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결과로 착각한다고. 더 높은 성취, 더 많은 부, 더 큰 명예가 행복을 보장한다고 믿지만 진짜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루를 어떻게 살아가는가"라고. 행복은 미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있다. "행복은 현재에만 존재한다"는 그의 말은 단순한 진리 같으면서도 쉽지 않은 깨달음이다. 우리는 늘 바쁘게 살아가며 더 나은 내일을 꿈꾸지만 정작 그 내일을 위해 오늘을 포기하고 있지는 않은지 한 번쯤 자문해야 한다.


나는 그 문장을 읽으며 문득 내가 가졌던 작은 것들을 떠올렸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내 무릎 위에 털썩 몸을 던지고, 배를 보이며 갸릉대던 작은 고양이만으로 하루가 충분히 빛났다. 아이의 사소한 장난에 깔깔 웃는 소리 하나가 나의 오늘을 행복하게 했다. 행복이라는 건 어떤 거대한 성취가 아니라 이 작은 순간들이 모여 단단하게 만들어주는 게 아닐까. 서동주의 "행복은 지금 이 순간, 맛있는 소금 베이글 한입 베어 물고 사랑하는 이와 '바로 이 맛이야'라고 외치는 그 순간 속에 있다"는 이야기에 문득 베이글을 사서 아이의 입에 넣어주고 싶어졌다.


완벽한 유결점. 다시 한번 이 단어를 책 제목으로 쓸 수 있는 저자의 삶에 대해, 그가 말하는 행복에 대해 곱씹었다. 흠 없는 상태가 아니라 부족함과 상처를 껴안고도 웃을 수 있는 태도. 완벽할 수 없지만 그래서 더 사랑스럽고 그래서 더 가치 있게 오늘을 살아가는 것.


결국 <완벽한 유결점>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단한 답을 내리기보다, 우리가 이미 가진 삶의 조각들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태도를 묻는다. 어떤 오해에도 견디며 웃을 수 있었던 힘, 결점을 품은 채로도 흔들리지 않고 자기만의 행복을 지켜낸 태도. 맞다. 행복은 결코 멀리 있지 않다. 우리가 오늘 하루를 대하는 태도 속에, 함께 웃는 순간 속에, 이미 충분히 와 있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 결점투성이인 우리로 그렇게 있는 그대로 살아가는 게 우리 삶의 진짜 빛이라고.

꽤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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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사주
강성봉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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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으면서 계속 여기가 어디인지 확인했다. 나는 지금 길 위에서 아이들과 함께 있는가, 벽돌집이라 불리는 곳에서 아이들을 보고 있는가. 아니 내가 지금 읽고 있는 장면은 환상인가 현실인가. 책은 사이비 집단에서 탈출한 두 아이의 이야기다. 거리와 아이들의 옛 기억이 어지러이 얽혀서 처음엔 당혹스럽기도 했는데 이야기의 끝으로 치달을수록 이 감정은 분노로 치환된다. 그리고 이 모든 상황을 뚫고 나가는 아이들의 마음에 괜히 한편이 아련해지기도 한다. 여러 가지로 좀 복잡하다.

책의 제목인 파사주는 두 가지 뜻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길, 여정을 뜻하는 passage와 사주를 파한다는 뜻의 파사주. 아이들은 스스로에게 주어진 굴레를 파하고 길로 나서 또 다른 구원을 찾는다. 우리는 그저 그 길을 가만히 지켜봐야 한다.


해수는 밤마다 야구 놀이를 핑계로 공을 맞아야 했고, 유림은 그 옆에서 억지로 박수를 쳐야 했다. 그들을 둘러싼 이들은 아이들에게 늘 죄책감을 강요했다. 이미 무너져 버린 많은 아이들 가운데 해수는 소위 또라이였다. 죄를 고백하라는 어른들의 고함에 지독하게 맞섰다. 유림은 늘 그런 해수의 편이었다. 그렇게 다른 사람들이 벽이라고 여기는, 그들을 둘러싼 깜깜한 그곳을 두 아이는 문으로 보았다. 열고 나갈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고 보면 갑갑한 우리 삶도 벽을 벽으로만 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야기해야 한다. 살아있어도 죽어있지도 않은 것만은 피하기 위해서"


살아있지도, 죽어있지도 않은 것. 마음이 덜컥 내려앉는 문장이다. 권력에 맞선 아이들의 선택은 바로 살아 있다는 증거였다. 벽돌집 안에서 그들은 침묵을 강요당했지만 아이들은 그 죽음을 거부했다. 서로를 향해 목소리를 내고 함께 고통을 증언하는 순간 그들의 생은 되살아났다


그래서 <파사주>는 결국 성장소설이다. 단순히 억압에서 탈출하는 서사가 아니라 아이들이 자기 목소리를 되찾고, 자기 길을 스스로 만들어 나가는 이야기다. 해수의 용기와 유림의 동조는 그 자체로 삶의 태도에 대한 선언이었다. 그들은 상황이 바뀌기를 기다리지 않았고 오히려 상황을 다른 눈으로 바라보며 막힌 벽에서 문을 발견하려 애썼다. 그 다정한 연대와 긍정적인 태도가 결국 탈출의 힘이 되었고 미로 같은 인생 속에서 스스로 통로를 만들어가는 길이 되었다.


아이들의 이야기는 끝나지만 우리의 이야기는 이제 시작한다. 나는 지금 내 앞의 벽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단단히 막힌 벽으로만 보는가, 아니면 문이 될 수도 있다고 믿는가. 때로는 벽 앞에서 주저앉아 버리고 싶을 때가 있다. 하지만 이 책은 묻는다. 그렇게 살아있지도 죽어있지도 않은 상태로 머무르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답은 명확하다. 이야기해야 한다. 서로에게, 자기 자신에게, 그리고 한없이 막막한 지금 이 순간에게.


인생은 누구에게나 미로처럼 주어진다. 하지만 그 미로를 통로로 만드는 건 우리 자신의 선택과 의지다. 해수와 유림의 탈출은 단순한 탈출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나침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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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무엇을 타고나는가 - 유전과 환경, 그리고 경험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
케빈 J. 미첼 지음, 이현숙 옮김 / 오픈도어북스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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궤도의 추천이라니 믿지 말았어야 했다. 어쩌면 재밌겠다 싶었는데 뼛속까지 문송한 나에게 유전학과 뇌과학의 이야기는 멀고도 낯설었다. 그래도 책장을 덮기 좀 그랬다. 유전자 교과서 같은 책은 덮을라치면 반복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인간은 무엇을 타고나는가 그리고 우리는 어디까지 스스로가 될 수 있는가. 사실 이 질문은 과학의 질문이 아니라 철학의 질문이가 우리 모두의 질문이다.


전반부는 인간 본성과 뇌의 구조 그리고 환경이 뇌의 발달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차근차근 풀어낸다. 뇌의 가소성, 신경 발달의 원리, 유전 연구의 방법론 같은 이야기들이 어렵다면 그냥 눈으로만 읽자. 굳이 이해하지 않아도 괜찮다. 결국 우리가 '어떻게 지금의 내가 되었는지'를 설명하기 위한 살짝 졸리는 어떤 서론이라고 생각해도 괜찮겠다. 후반부로 넘어가면 성격 특성과 지능, 성별과 신경 발달 장애 같은 좀 더 우리 눈에 보이는 구체적인 주제를 다룬다. 특이한 점은 과학자라는 포지션을 가짐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본성과 양육이라는 오랜 논쟁에서 저자는 어느 한쪽의 절대성을 경계하며 균형을 잡으려 노력한다는 점이다.


현대 유전학은 종종 '유전자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식의 단순한 신념으로 오해된다. 그러나 저자는 단호하다. 유전자는 지금의 나를 형성하는 데 기여하지만 나의 미래까지 결정하지는 않는다. 즉, 우리는 타고난 어떤 것에 의해 출발선을 가지지만 걸어가는 길과 방향은 여전히 우리에게 열려 있다는 것이다.

즉 사람은 서로 다르게 태어나며, 그 차이는 계속 이어진다. 누군가는 세상에 쉽게 적응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하루하루 버티는 것조차 벅차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우리에게 이런 차이를 부정하고 끊임없이 노력하고 변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책은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간다. 오히려 그 차이를 환영하라고 그 다양성을 이해하고 인정하며 받아들이라고.


생각해 보면 내 삶도 그랬다. 나는 늘 앞에서 이끄는 이들은 부러워했고 그 모임에 적응하지 못하는 나의 성격을 탓하기도 했다. 때로는 불안하고 충동적인 모습으로 스스로를 더 위축되게 만들었고 한없이 소심해진 순간에는 내가 싫어졌다.

하지만 이 책은 그런 이에게 말한다. 당신이 느끼는 그 복잡함 자체가 살아 있는 증거라고. 당신은 바뀌거나 또 다른 누군가가 되지 않아도 괜찮다. 결국 중요한 건 나를 바꾸려는 억지가 아니라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이며 거기서 비로소 힘이 생긴다고.


저자는 계속해서 윤리적이고 철학적인 질문을 던진다. 본성과 양육의 논쟁은 우생학을 극단으로 치닫게 해 최근 다시 불붙기 시작한 극단적 민족주의를 주도하기도 했다. 유전학의 성과는 과학에 유의미한 발자취를 남겼지만 동시에 '유전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위험한 신념을 낳기도 했다.

그래서 저자는 다시 묻는다. 우리는 무엇을 타고나는가, 그리고 무엇을 스스로 만들어갈 수 있는가.


분명히 과학 책인데 내가 모르는 것들 사이로 온기가 흘렀다. 유전자의 차가운 언어 속에서도 인간을 향한 이해와 환대는 흐르고 있다. 결국 이 책은 다름을 부정하지 말고, 오히려 환영하라고 말한다. 다양성을 있는 그대로 맞이하는 태도가 우리를 더 단단하게 만든다고.

누가 과학이 차갑다고 그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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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복숭아 - 꺼내놓는 비밀들
김신회 외 지음 / 글항아리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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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보면 문득 그 옛날 그때가 떠오르며 이불킥을 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순간이 있다. 다른 건 잘도 잊어버리면서 영원히 기억나지 않았으면 하는 그 순간은 꼭 머릿속에서 튀어나오는데 뭐 비단 순간의 실수만 그런 건 아니다. 평소엔 잘 드러나지 않지만 어느 막다른 골목에서 반드시 정체를 드러내고야 마는 나의 약점들. 극복하고 싶지만 쉽지 않은 그것들. 이 책은 그 약점에 관해 9명의 저자가 쓴 책이다.


책은 나의 부족한 면, 나의 단점, 나의 비밀. 그렇지만 알고 보면 복덩이인 그것을 알맞은 빛깔을 내며 여름을 상징하는 탐스러운 과일이지만 쉽게 물러버리는 복숭아로 비유한다. 제목이 <나의 복숭아>가 된 이유다.

사랑, 노래, 야구, 걱정 등 참으로 다양한 기억에 관해서 다양한 저자들이 나의 복숭아를 털어놓는데 너무나 완벽해 보이는 저자들의 입에서 자신의 비밀이 나온다는 것만으로도 뭐랄까 우리는 같은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괜스레 입꼬리가 실룩거린다.


"어쩌면, 지난날 내가 사랑이라 착각하고 무수히 해왔던 실패들이 모두 진짜 사랑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사랑이 그의 복숭아인 저자는 모르는 채로 좋아하고, 알지 못하면서도 푹 빠져버리는 금사빠로 스스로를 소개한다. 그 고백 앞에서 나는 한참이나 킥킥거렸다. 나 역시 쉽게 좋아하고 쉽게 식어버리는, 어쩌면 사랑을 알게 되어서가 아니라 모르는 상태로도 살아냈던 날들이 떠올라서인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모르는 채로 했던 시도들이 사실은 가장 진짜에 가까웠다고 말한다. 그 말이 마음에 꽤 오래 남았다. 나는 어떤 사랑을 했을까?


어떤 이는 노래 앞에서 작아진다. 그래서 그는 악기를 다룬다. 어쩌다 노래할 일이 생기면 앞으로 남은 노래방의 수를 센다. 그게 열 번이라 치면 그 열 번만 견디면 더 이상의 굴욕은 없을 거라고. 이 대목에서 나는 실소를 터뜨렸다가, 곧 묘한 용기를 얻었다. 서툴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남은 굴욕의 분량을 어림해 마음을 가볍게 만드는 기술. 부끄러움을 견디는 것 역시 일종의 근육일지도 모르겠다.


또 어떤 이의 과자 이야기는 귀엽고 처연하다. 엄마 앞에서 과자를 먹으면 안 된다는 룰에 방문이 달칵 열리는 찰나에도 부스럭 소리 한 번 내지 않고 봉지를 감추던 소녀는 서른다섯이 되어서야 거실에서 당당히 과자를 먹는다. 규율이 만들었던 비밀의 습관이 어른의 일상에서 해방되는 순간이다. 우리 누구나 이런 순간이 있지 않나. 작은 욕망을 숨기느라 불필요한 재치를 키웠고 그 재치가 나를 살리기도 고독하게도 만들었던 웃픈 기억. 그랬다. 부끄러움은 때로 사람을 세밀하게 만든다. 그 세밀함이 지나쳐 자신을 옥죌 때 우리는 저자처럼 오래 묻어둔 복숭아를 밖으로 꺼내야 한다. 꺼내고 나면 생각보다 별것 아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나의 복숭아는 날씨와 야구와 밤과 자신감과 책이지만, 동시에 그것들에 대한 나의 기억이다."


어쩌면 우리의 복숭아는 어떤 대상이 아니라 '그때의 나'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과일의 맛은 제철이 아니라 '제 마음'이 결정한다.

어떤 날은 달고, 어떤 밤은 시다. 어떤 기억은 쉽게 멍들고, 어떤 약점은 오래도록 향기로 남는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리뷰를 위해 이 책을 돌아보니 책의 가장 큰 선물은 타인의 비밀을 엿보는 즐거움이 아니었다. 그들의 비밀이 곧 지금의 나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는 거다. 사랑을 모르는 채 사랑을 해왔고, 서툰 노래를 열 번쯤 더 부를 용기를 계산해 보고, 방문이 열리기 전에 봉지를 숨기던 손을 천천히 내려놓는 일.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복숭아를 구경하다가 슬며시 자신의 과일을 꺼내 들게 된다.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내 약점은 꺼내도 괜찮은 걸까? 나는 내 부끄러움을 다정하게 쓰다듬을 수 있을까?

나는 내 안에서 오래 굳어 있던 씨앗 하나를 꺼내 창가에 올려두었다.


내일 아침의 빛에서, 그 작은 씨도 언젠가 달큼한 향을 낼지 모른다.

아니, 오래 묵혀둔 그것은 이미 충분히 향기롭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렇게 서로의 글을 통해 조금 늦게 배운다.


사람들의 서툶 과 약점이 한 권에 모여 있는 풍경은 참으로 정겹다.

이불킥의 밤은 계속 오겠지만 이제는 그 발끝에 리듬을 붙여보려 한다. 쿵, 짝. 한 번의 민망함마다 한 번의 안도.

그러다 보면 언젠가 나의 복숭아도 누군가의 여름이 될 수 있을까.

그런 상상을 하며 노트북을 덮는다.

과일은 내일 아침에 먹기로 한다.

오늘 밤은 그저 이 달큼한 고백의 잔향 속에서 천천히 잠들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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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프링 피버 - 긴 겨울 끝, 내 인생의 열병 같은 봄을 만났다
백민아 지음 / 필름(Feelm)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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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서울에서 상처 입고 자의반 타의 반으로 시골로 내려온 여주인공(전문직, 여기서는 교사). 그녀는 보통 겁나 예쁘지만 뭔지 모를 어두움을 가지고 있으며, 곧 서울로 돌아가야 하니 잠시 머무는 이 시골마을에 최대한 정을 주지 않으려 한다. 물론 그러거나 말거나 시골 인심은 눈치 없이 온 마을이 하나 되어 그녀에게 모든 정을 준다. 게 중에는 잘생긴 외모와 재력(재력의 여부는 늘 여주인공의 마음이 열리고 나서 밝혀진다!)을 갖춘 시골 총각이 등장하는데 보통 이들은 자기의 사회적 지위 따위는 생각지도 않고 팔불출처럼 여주인공을 졸졸 따라다닌다. 그녀는 이 촌스러운 남자를 죽어라 밀어내지만 결국 사소한 에피소드들이 쌓이며 마음의 빗장을 풀고 남주를 받아들인다. 그때 비로소 남주의 재산과 능력과 등등등이 폭발하면서 긁지

않은(사실 이미 긁혀 있지만 여주만 모른) 복권은 온 세상을 가지게 되고 둘은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주고 때론 해결해 주며 그렇게 행복하게 살았더라는..


회귀물과 더불어 웹소설, 웹툰의 2대 장르인 로코의 내용은 어쩌면 이렇게 뻔하고 뻔하다. 지금 당장 저 스토리 라인을 가진 콘텐츠를 읊자 해도 서너 개는 쉽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갯마을 차차차, 동백꽃 필 무렵, 웰컴 투 삼달리 등등)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콘텐츠들이 팔리는 이유는 뭘까. 다 모르겠고 일단 재미있다. 다음 얘기가 충분히 예상됨에도 불구하고 (아니 요즘은 예상되는 콘텐츠가 더 팔린다고) 그냥 재미있다. 청춘들의 사랑 이야기는 늘 싱그럽고, 여주를 시골로 밀어 넣은 빌런의 최후는 통쾌하다. 복잡한 서울을 벗어나 평화로운 바닷가에 나란히 앉은 연인의 실루엣은 보고만 있어도 좋다. 내가 가지지 못한, 내가 누리지 못하는 것들의 대리만족으로 사실 이만한 콘텐츠도 드물다.


장장 712페이지의 책이다. 하드커버가 아니라 벽돌책 느낌은 아니어도 웬만한 벽돌책 저리 가라 할 만큼 두껍고 글자도 작다.

그런데 나는 오늘 이 무거운 걸 하루 종일 들고 다니며 읽었다.

재미있다. 퍽퍽한 오늘을 잠시 벗어나 나 도 재규와 봄이 살고 있는 경남 어느 시골마을로 잠시 여행 온 기분이었고, 몽글몽글한 감정의 흐름은 이미 닳을 대로 닳아버린 마음을 가만히 안아준다.

우리가 책을 읽는 이유는 퍽이나 많을 테지만 개인적으로 이런 유의 책 읽기가 제일 즐겁다. 재미있고 위로가 되는.


싱그러운 소설을 좋아한다면, 읽을거리를 찾고 있다면, 책 읽기의 즐거움을 알고 싶다면(공부하는 거 말고) 추천.


*내년에 tvn 드라마로 방영 확정이라고 하고 안보현, 이주빈, 차서원, 조준영, 이재인, 배정남이 나온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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