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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의 말 - 그 행복이 깊다
코이케 류노스케 지음, 양영철 옮김, 김재성 감수 / 21세기북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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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버리기 연습>의 저자로 유명한 코이케 류노스케 스님..

이 분의 책을 읽어보고싶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이번에 우연히 기회가 닿아 스님의 신작과 만나게 되었어요..

 

저는 막연히 구도자가 쓴 에세이를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더군요..

이 책은 불교의 경전 중에서 스님이 가려뽑은 글들을 싣고 있습니다..

(물론 경전의 말씀을 그대로 옮긴 것이 아니라 의역(더 나아가 초역)을 하고 있지만요..)

 

책의 형식이 마치 <법구경> 같아요.. <법구경>은 인생에 지침이 될 만큼 좋은 시구(詩句)들을 모아 엮어놓은 경전인데,, <부처의 말>을 후루룩 넘겨보다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이런 유형의 책들에게는 큰 장점이 있어요..

페이지 순서대로 따라 읽으며 서사의 줄거리를 쫓아 갈 필요가 없어요.. 저자의 논지에 정신을 집중할 필요도 없지요..

독서에 집중이 잘 안 되는 요즘 저 같은 사람에게 딱 맞는 책입니다..

 

그저 기분 내키는 대로 아무 페이지나 열어서 눈이 가는 대목을 읽으면 됩니다.. 

그러다보면 정신이 번쩍 나는 문구와도 만나게도 되지요..

스님도 서문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어떤 페이지를 무심코 펼쳤을 때 거기에 적혀있는 부처의 말이 마음속에 스르륵 스며"드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를 테면 작은 것에 만족하며 사는 삶은 그 충족감으로 인해 마음이 깨끗이 정화되는데,, '이 깨끗한 마음의 파동'이 '고차원의 생물들을 기쁘게' 한다는 대목이 그렇습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고차원의 생물들이라 함은 흔히들 신, 천사, 보살, 요정 같은 존재들을 생각하게 되는데,, 작은 것에 만족하며 사는 삶의 방식이 그분들을 기쁘게 한다니,, 어쩐지 저도 기쁜 마음에 빙그레 웃음이 나옵니다.. 한동안 <시크릿>이니 '끌어당김의 법칙' 운운하는 열풍이 불었는데,, 이 짧은 문구가 그 모든 것을 설명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바로 맞은 편 페이지에는 이런 말도 있네요..

 

"'있는 것'에 집착하지 않고 '없는 것'에 아쉬워하지 않게 되어, 마음은 무적이라고 할 만큼 부드러워질 것이다."

 

법정 스님의 무소유도 같은 차원의 말씀이지요.. 돈과 물질에 휘둘리지않는 삶,, 지금 내가 가진 것에 만족하고 행복할 줄 아는 삶.. 요즘 제 삶의 모토입니다.. 그러다 보니 이런 글이 눈에 들어와 박히네요..

 

아무렇게나 페이지를 펼쳐서 읽다보니 두 세번 읽은 구절도 있고 아직 한번도 읽지 못한 구절도 있어요..

머리맡에 두고 잠들기 전에 문득 문득 펼쳐서 읽고 있어요..

이런 식의 여유로운 독서가 제 마음을 편안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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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
주노 디아스 지음, 권상미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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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는, 그러니까 매콘도가 아니라 마콘도이던 당시에는

 

『금강경』에 보니 이런 구절이 있네요.

여래가 말하는 세계는 그것이 세계가 아니고 그 이름이 세계일뿐이다.

인상적인 구절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저를 가장 오래 서성이게 만드는 대목입니다.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어요. 세계는 세계가 아니고 그 이름이 세계일뿐이라니? 붓다께서는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신 걸까요.

어렴풋이나마 문학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시가 되었든 소설이 되었든 그것이 멋진 문학이라면 거기엔 하나의 완벽한 세계가 구현되어 있으니까요. 그러니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치고 문학 이상의 것이 또 있을까요.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도 하나의 완벽한 세계였습니다. 완벽함을 넘어 이 세계는 통찰 같은 것을 제게 떠다 안겼지요. 독재 치하? 트루히요? 푸쿠? 우리에게도 이런 건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시기를 다룬, 이런 소재를 다룬 문학이 있습니다. 그런데 두 세계를 비교해 보세요. 이쪽 세계엔 고뇌하는 굳은 얼굴과 비장미를 풍기는 까칠한 얼굴들이 넘쳐납니다. 그런데 저쪽엔 탐하고 발산하고 도발적이고 관능적인 인물들이 우글거립니다. 그들이 처한 환경은 같은 데 말이죠. 왜 이렇게 다르죠?

세계는 하나의 기억이자 해석이다. 저는 이런 결론을 도출해낼 수 있었습니다. 같은 상황을 겪고도 그 기억과 해석을 풀어놓는 사람이 누구인가에 따라 아니, 그보다는 애초에 그 상황을 겪고 있는 그들이 누구인가에 따라 세계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오스카도 말하잖아요. 세상은 그가 읽는 판타지소설에 다름 아니라고. 그래서 저는 깨달았습니다. 세계는 세계가 아니고 그 이름이 세계일뿐임을요. 인간의 수만큼이나 다양한 마콘도들 혹은 매콘도들, 그것을 통칭해 세상이라 함을요.


푸쿠 대 사파

삶은 고해의 바다, 라고 말할 때의 그 고해. 그것이 푸쿠가 아닐까요. 출판사에서도 그 점을 간파하고 책 뒷면의 광고 문구를 이것으로 확정지은 듯 합니다.

저주 따윈 믿지 마. 삶, 그것으로 충분하니까

그래요. 삶,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우리의 하루는 온갖 푸쿠들로 우글거리고 이점은 내일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삶을 이어가나요? 그건 삶이 푸쿠로 가득한 것과 마찬가지로 삶이 사파로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푸쿠로 가득한 동시에 사파로 가득하다? 이 역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카브랄 가의 사람들이 이점을 몸소 설명해주었습니다.

벨리는 피투성이가 되어 옥수수 밭에 쓰러졌죠. 이곳까지 그녀를 이끈 힘은 푸쿠였고 그래서 그녀는 그것에 관해 생각합니다. 트루히요의 여동생이 보낸 악당들? 푸쿠의 정체는 그들이 아니었죠. '또 한번 당했다는 사실' '이번에도 갱스터와 산토도밍고의 노리개가 되었다는 사실' 이것이 푸쿠의 정체였습니다. 즉 자신의 어리석음 말입니다. 벨리는 마지막 남은 힘을 끌어낼 수 있었습니다. 그녀의 부끄러움이, 그녀의 깨달음이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이지요.

어리석음을 깨닫는 것, 그것이 사파가 아닐까요. 바로 그 순간 우리를 옭아매고 있던 푸쿠는 맥을 못 춥니다. 거기다 우리에겐 '너의 푸쿠''에 힘을 실어줄 사파도 구비되어 있습니다. 벨리에겐 라 잉카의 기도가 있고 롤라에겐 벨리의 기도가 있고 오스카에겐 롤라의 기도가 있습니다. 푸쿠에 대항하는 최고의 역주문, 우리가 가진 최고의 사파는 사랑이며 기도입니다. 오죽했으면 우리의 오스카가 여기에 목숨을 바쳤겠습니까. 푸쿠로 가득한 세상이지만 또 그만큼의 사파는 늘 존재하고, 그래서 오늘도 세상은 그럭저럭 굴러가는 것입니다.

녀석이 울먹이며 말했다. 나 여자랑 키스했어

주노 디아스는 유능한 변사입니다. 그는 어마어마한 이야기 주머니를 가슴에 품고 있는 남자인데, 그것도 잘 생긴 남자입니다. 그가 소설을 쓰고 있는 광경이 눈에 선합니다. 이야기가 풀려나오는 입구는 좁은데(글은 한번에 한자씩 써야 하니까요) 주머니 안에서는 이야기들이 서로 나가겠다고 아우성을 치는 형국. 그러니 그의 손이, 그의 펜이 얼마나 바빴을까요. 빽빽한 본문이, 이 숱한 괄호들이, 이 엄청난 주석들이 그 사실을 말해줍니다. 작가의 근성을요. 그가 진정한 이야기꾼임을요.

삶의 고통을 유머로 승화시킬 수 있다는 건 대단한 능력입니다. 갱스터의 아내가 누구인지 밝혀지던 순간을 기억하세요? 저는 대굴대굴 구르고 말았어요. 갱스터의 아내는, 하고 그는 말을 멈추더니 갑자기 저쪽을 향해 외칩니다. 어이, 거기, 드럼 좀 쳐주지? 관객들은 배를 잡고 웃는데, 변사는 이야기를 밀고 나갑니다. 갱스터의 아내는, 빌어먹을 트루히요의 여동생이었다!

덕분에 도미니카노가 어떤 사람들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야기 주머니 속에 갑갑하게 갇혀있을 사람들이 못 됩니다. 라틴 아메리카의 열정이 그들의 것이니까요. 그래서 작가의 손이 그처럼 바빴던 겁니다. 독재자는 스물 일곱 발의 총성에 쓰러졌지요. 작가는 이 숫자에 대해 참으로 도미니카스러운 숫자가 아닌가! 하고 말했습니다. 저는 이 말을 이해했고 그것으로 이 소설을 읽은 보람은 충분했습니다.

오스카, SF와 판타지의 광팬이자 꼴통스런 만화와 롤플레잉 게임이 삶의 전부였던 뚱땡이. 하지만 그 역시도 결국엔 도미니카 남자였습니다. '따끈따끈한 최신 꼴통 제품' 보다도 그가 정말 사랑한 것은 여자입니다. "녀석이 울먹이며 말했다. 나 여자랑 키스했어." 이 대목을 읽으며 미소 짓지 않을 독자가 있을까요. 오스카가 총각 딱지를 떼고 죽었다는 사실에 기뻐하지 않을 독자가 있을까요. 그의 죽음보다도 이 기쁨이 더 크게 다가오는 역설! 섹스와 목숨을 바꾸었다는 이 역설! 오스카 와오의 삶이 짧고 놀라운 이유가 여기에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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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양장)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청미래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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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먼지 묻은 노트 한 권을 발견했다. 들춰봤더니 20대의 일기다. 27살의 일기.

몇 줄 읽지도 않았는데, 머리속에 예의 그 안개가 스멀스멀 끼는 기분이다. 내 20대를 정의하는 키워드인 그 안개 - 이것이 무명(無明)의 다른 이름이었다는 사실을 최근에 알게 되었다. 그 안개는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도통 뭐가 뭔지 모르겠는, 갈팡질팡했던, 답답하고 갑갑했던, 사방이 꽉 막힌, 결국에 가서는 될 대로 되라는 식의 체념과 오기의 시간. 그것이 나의 20대였다.

이 안개는 '사랑문제'에 이르러 그 농도가 절정에 이른다. 한치 앞도 내다보기 힘들었다. 질척거리고 끈끈하기까지 한 이 안개에 발목이 잡혀 한 발자욱도 내딛기 힘들었다. 흡사 지뢰를 밟은 것과 같았다. 21살의 나는 29살의 내가 될 때까지 바로 그 자리에 발이 묵힌 채였다 -쓰고 보니 10년 동안 한 남자에게 목을 맸다는 뉘앙스군.  

이것이 내 탓일까. 이것이 운명일까. 

눈을 뜨면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또 한 개의 하루가 주어져 있다. 매 순간을 내 의지대로 선택하고 행동하며 살았다. 그런데도 어쩐지 뭔가에 조종당하는 느낌, 예정된 길을 걷는 느낌, 애초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는 느낌, 바로 이런 느낌에 지배당하던 시절의 기록을 지금 나는 손에 들고 있는 것이다.

이 먼지 묻은 노트와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를 나란히 놓고 보자.

내가 안개속을 헤맬 때, 23살의 알랭 드 보통은 그 안개를 자신에게서 멀찍히 떼어놓고 그것에 손끝 하나 젖지않은 채 균형 잡힌 의자에 앉아 안개의 성분을 하나하나 분석하고 있었다. 제기랄이다!

먼 옛날 중국의 시인은 말했다. '이 생에서 읽는 책은 이미 늦다!'고. 이 시가 단순히 독서의 문제, 전생과 이생의 문제를 말하는 건 아니다. 시인은 한 인간의 자질과 인격을 다른 한 인간의 자질과 인격으로 비교하고 있다. 천재는 전생에 이미 어떠한 단계를 수료한 사람이다. 평범한 자가 이생에서 그와 맞서려해선 안 된다. 그건 무모한 짓이며 다만 그가 이번 생에 해야할 일은 꼬리를 내리고 묵묵히 앉아 책을 읽는 것이다. 이 시는 바로 그와 같은 교훈을 들려준다.

알랭 드 보통의 분석에 나의 안개를 대입해 보는 순간, 그것들은 밝은 햇빛 아래 증발해버린다. 안개는 걷히고 맑은 시야가 확보된다. 나는 어찌나 개운한지.

그러나 알랭 드 보통의 칭찬은 여기까지다. 그가 이 책으로 칭찬 받아야 할 이유는 그가 이 책을 23살에 썼기 때문이다. 만일 이와 같은 책을 30대의 그가 40대의 그가 썼다면, 나는 몇 장 읽어보기도 전에 구토를 일으키고 말았을 것이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인 '사랑의 교훈'이 그점을 말하고 있다. 안개의 성분을 분석하는 일은 중요하다. 인간이 사랑에 빠졌을 때의 그 혼란과 갈등과 행복과 쾌락과 질투의 감정들은 어디까지나 사랑에 빠진 그 사람의 머릿속에서만 들끓는 안개다. 그의 연인이라도 그와 똑같은 안개를 공유할 수는 없다. 지금 그의 연인은 또 그만의 안개의 잡탕속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고독한 작업인 사랑에 빛을 비춰 그 성분을 하나하나 분석하고 분류하고 기록하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다. 왜냐면 사랑을 할 때 사람들은 그 안개와 한 덩이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기록을 읽으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는 기분을 경험하겠는가.

그러나!

그뿐이다. 이처럼 복잡하고 현학적인 자질구레한 지식을 갖다가 뭘 하겠는가. 이 책의 주인공 '나' 역시 그가 이 사랑에서 얻은 교훈이라고는 다음 사랑을 향해 뛰어들어야 한다는 사실뿐이다. 그래서 다시 한번 그 안개 속을 헤매고 질척거리는 방법 이외엔 별 수가 없다. 이 지긋지긋한 지식들과 철학자들의 온갖 해석 나부랭이들랑 쓰레기통에 처박은 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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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다예요 2007-11-16 17: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명쾌한 리뷰네요. 저도 지금보다 더 어릴 때에 이 책을 읽고 구원받은 느낌이었는데 말이죠.
10년 동안 한 남자에 목을 맸다는 뉘앙스를 저도 얼마나 오랫동안 풍기고 다녔는지, 아주 지긋지긋하고 구린내가 나네요. 안개에 대한 분석은 이제 그만 하고 싶어지는 나이라고 말하긴 그렇지만 왠지 알랭드의 다음 그 다음 그그다음 책을 읽어도 전만한 기분은 들지 않네요.
반가워요. ^^

무소유 2007-11-18 2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게다예요님,, 저도 정말 반가워요..^-^ 책을 통해 작은 마음이나마 서로 나눌 수 있다는 게 새삼 신기한 기분입니다..^^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페터 회 지음, 박현주 옮김 / 마음산책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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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을 읽겠다는 건 엄청난 여정을 각오하는 일입니다. 첫 장을 열기 전, 몇 가지 준비가 필요합니다. 우선 화장실을 다녀옵니다. 커피는 큰 컵으로, 과자도 노래방용으로 준비합니다. 빈둥거리는 일요일 오후여도 좋고 여름휴가의 막바지라도 좋습니다. 이제 만사를 잊고 거의 드러눕듯 쿠션에 기대앉읍시다. 이렇게 해서 낯선 눈과 빙하의 세계로 첫발을 내딛는 겁니다.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은 추리소설입니다. 그런데 좀 이상한 추리소설입니다. '추리소설이란 이런 것이다!'하고 소리 높여 주장하는 대신 '추리소설이 이럴 수도 있다!'하고 은근히 목소리를 깝니다. 하나의 전형을 제시하는 작품이 아니라 독창성으로 무장한 작품입니다.
그러니 일반적인 추리소설의 패턴을 기대해선 안 됩니다. 작가가 교묘히 던져주는 정보를 퍼즐 맞추듯 맞춰나가다 보면 어느 순간 전체적인 그림이 드러나겠지, 이런 기대는 금물입니다. 그런 기대는 몇 걸음 내딛지도 못한 우리를 지치게 할 뿐입니다.

이 말을 작가가 정보에 인색하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선 안 됩니다. 도리어 그는 끊임없이 정보를 쏟아냅니다.

그 양이 거의 눈사태급입니다. 신기한 것은 그런데도 우리는 정보에 목이 마릅니다. 여기에 아이러니가 있는 것이죠. 차라리 '기묘한 문학작품'을 읽고 있다 생각합시다. 그 편이 우리의 걸음에 힘을 실어줄 테니까요.

스밀라. 이누이트(식민지 정복자들은 이들을 '에스키모'라 불렀죠)의 피가 흐르는 여자. 눈(雪)에 대한 감각을 가진 여자. 추리소설 역사상 가장 매력적인 인물이란 타이틀을 거머쥔 여자. 이 여자의 매력은 그녀가 서있는 자리에서 기인합니다.

그녀는 경계인입니다. 얼음과 불, 야생과 문명, 냉정과 열정, 질서와 무질서 사이에 그녀가 서있습니다. 한 아이가 죽었습니다. 아이는 눈 위에 발자국을 남겼습니다. 눈에 대한 감각을 가진 스밀라는 발자국에서 뭔가를 예감합니다. 아이의 죽음은 단순한 사고사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녀와 의견을 달리합니다. 이렇게 해서 그녀는 또 다른 경계선에 섭니다. 진실과 거짓의 경계선 위에.

"나는 영웅이 아니다. 한 아이에 대한 애정이 있었을 뿐이다. 나는 그 아이의 죽음을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그 손에 내 집념을 맡겼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 말고는 아무도."

이 소설의 매력은 작가가 인물을 다루는 방식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작품에 등장하는 숱한 인물들. 우리는 결코 그들의 진심을 알지 못합니다. 입체적이다 못해 난해한 이 인물들은 그 누구 하나 진심을 내보이는 법이 없습니다. 이들은 흑(黑)을 생각하면서 백(白)을 말합니다. 도대체 지금 이 인물의 의도는 뭘까. 이 순간 그는 왜 저런 말을 내뱉는가. 이 순간 그녀는 왜 계단을 내려가는가. 이 순간 그는 왜 돌아서는가.

머리가 지끈거리는 가운데 우리는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인간이 얼마나 복잡한 존재인가를.

"결코 결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소설의 맨 마지막 문장입니다. 어쩌면 이것만이 세상의 유일한 진실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듭니다. 더불어 이런 통찰을 안겨줄 수 있는 추리소설이란 것이 그리 흔치 않다는 생각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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