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의 기생충 같은 이야기
서민 지음, 지승호 인터뷰 / 인물과사상사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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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의 솔직한 자신의 얘기를 듣노라면, 금방 나가는 글에서 ‘감사합니다‘ 라고 지승호씨께 말할뻔했다는 빵 터짐이 이어진다. 읽은 지 며칠 지났음에도 여운이 오래남는 글이다. 솔직함의 힘이란 게 이렇게 큰거구나! 싶다..책을 읽어야 먹는 것을 나눠서 먹어야 하는 것을 알지 않겠느냐. 급공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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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 항쟁과 저항의 미래 : 마르크스주의적 분석 - 수배 중인 광우병대책회의 행진팀장이 쓴
김광일 지음 / 책갈피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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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배 중인 광우병대책회의 행진팀장이 쓴

<촛불 항쟁과 저항의 미래>...김광일

마르크스주의적 분석

......을 읽고




제목: 촛불집회에 대한 섬세한 분석을 통해 운동을 배우다




<<저항과 혁명은 트로츠키 말처럼 “대중이 역사에 적극적으로, 깊숙이 개입하는 것”이다. 파리 노동자들이 스스로 역사에 적극 개입해서 기존 국가기구를 파괴하고 스스로 권력을 장악한 것이다.>>...150쪽

이 글귀가 유달리 가슴에 아로새겨져 남는 것은, 2008년 촛불집회가 감동과 아쉬움을 동시에 남기는 역사의 위대한 현장이었기 때문일까.




촛불집회는 미국산 광우병 위험 쇠고기 수입 반대로 촉발됐지만 이명박 정부의 국민과의 소통 불통으로 인하여 현 정부 정책 전반에 걸친 시위로 장기화되고 확산됐다. 정부정책은 의료 민영화, 공공방송, 대운하 건설, 공공 서비스 민영화, 공교육 양극화를 포함한 국경과 부문을 불문하고 무차별적으로 침투하는 신자유주의 정책들이다. 이로 인한 고용불안, 정리해고, 임금삭감, 비정규직 확대, 실업 등으로 고통이 고스란히 노동자들에게 가중될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이런 급박한 상황 속에서 거대한 촛불시위가 왜 노동자 파업과 같은 효과적인 방법과 연결돼 혁명으로까지 승화되지 못했는지 몹시 안타까울 따름이다.

 


2008년 촛불집회는 처음부터 모든 집회 참가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이명박 OUT’ 구호를 가열차게 외쳤고, 이명박 정부가 실행하려던 신자유주의 정책들에 반대했다는 점에서 당연히 정치적인 시위였다. 따라서 ‘순수 시민’ ‘정치성을 배제한 저항’등 촛불집회를 비정치적이라는 말은 형용모순일 뿐이라는 저자의 지적에 동감한다.



이 책에선 2008년 촛불집회에 참여한 다양한 목소리들이 어떻게 조율되고 성장, 변모했는지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섬세한 통찰력으로 분석하고 있다.






<<저항의 본질을 명확하게 분석하고 규정하는 것은 사태를 이해하고 대처하는 데 중요한 출발점이다. 내 분석의 방법론은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이다.

마르크스주의적 방법의 핵심 요소는 변증법으로...중략

그리고 자본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의 핵심에는 자본가계급의 노동계급 착취가 있다. 따라서 계급적대와 계급대립이라는 핵심 개념이 나의 중요한 분석 틀이다.>>...37쪽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저자는 촛불시위의 성격을 다음과 같이 분석하고 있다.




2008년 촛불시위는 이명박 정부에 맞선 반정부 시위였다. 즉, 정치권력에 맞선 정치투쟁이었고 이 저항이 정치투쟁이었다는 것은 이 투쟁이 자본주의적 정치권력에 맞선 계급투쟁의 성격을 일부 지녔다는 점을 의미한다.




시위대의 중요한 세력은 바로 비정규직이나 청년 실업자를 포함하는 미조직 청년 노동자들이었다. 그리고 촛불시위의 의제들은 모두노동계급과 피억압자들의 삶과 관련 있는 것들이었다.




‘민주주의’로 호명된 데다 조직된 노동계급 참가가 저조했고 투쟁 참가자 의식이 ‘자각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계급투쟁 자체는 아니지만, 그 “맹아”였다. 아쉽지만, 조직된 노동조합원들이 하나의 계급으로서 행동하지 않았던 것이 촛불시위의 최대 약점이었다.




사실 2008년 촛불시위가 맹아적 계급투쟁이었다는 것은 지배계급의 거의 모든 기구들이 촛불을 끄려고 갖은 애를 다  쓴 데서도 드러났다. 청와대와 경찰과 검찰이 촛불시위에 강경하게 대응했고, 대법관 신영철의 촛불재판 개입에서 드러난 것처럼 사법부까지 나섰다. ‘조중동’같은 우파 언론은 물론이고 전경련, 경영자총협회, 한국무역협회, 대한상공회의소, 중소기업중앙회 등 주요 자본가 단체들도 “시위와 총파업 주장은 경제를 더욱 어렵게 할 것”이라며 시위를 비난했다.




그리고 촛불시위를 반신자유주의 운동으로 규정한다. 신자유주의 정책은 기업 이윤과 부자들의 소득에 대한 세금 감면, 국유 산업과 서비스의 민영화, 사기업 규제 폐지, 금융자본의 국내외 이동 규제 폐지 등을 추진하며 빈곤을 확대하고 경제적 양극화를 가속화했다.

 

따라서 촛불시위는 국가권력에 맞선 반신자유주의의 정치투쟁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촛불시위에서 ‘공공부문 민영화 반대’라는 반신자유주의 정책 구호를 외쳤던 시위 참가자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분석이라고 본다.

그리고 많은 시위 참가 청년들의 불만이 ‘왜 저소득층의 서민이 이명박을 지지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고 하는 데서 시위자들이 계급을 암암리에 의식해가는 것도 볼 수 있었다. 이 문제와 맞물려 이 책에서는 마르크스는 의식을 계급 구분의 기준으로 삼지 않고 생산관계에서 처한 객관적 위치를 계급 구분의 기준으로 삼았다. 라는 의미를 깊이 깨달을 수 있다. 그리고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인한 고용불안, 실업, 해고 등으로 고통이 고스란히 노동자들에게 전가될 것임에도 불구하고 민주노총과 노동자들이 촛불시위에 소극적 파업이나 참가를 보면서 의아해했다. 노동자들이 동맹파업이나 대중파업을 할 수는 없었을까. 라는 생각을 했다.




다함께 5월 5일 신문에서 “ 5월 2일 촛불집회와 같은 거대한 대중행동과 서울 도심에서의 위력적인 거리 행진 등이 계속 확대 발전되면서 강력한 노동자 파업으로 연결된다면 고장난 불도저 이명박은 ‘다우너’처럼 맥없이 무릎을 꿇을 수 있다.”는 낙관적 주장을 폈다. 시위 참석한 많은 사람들은 이런 염원이 간절했기에 그 밤새 폭우와 경찰의 과잉 폭력진압에도 굴하지 않고 시위를 계속할 수 있었을 것이다.




저자는 촛불시위를 분석하면서 다음과 같은 문제점도 지적하고 있다.

대중투쟁에서 대중에 뒤처지는 것이 진정한 문제다.

다함께 논란과 관련해 촛불시위에 참여한 각 단체 간 차이가 대중에게 충분히 입증되지 않았기 때문에 특정 단체에 가해졌던 불가피한 오해들.

운동이 지속적이 되려면 조직이 필요하다는 점.

민주노총의 입장은 결국 조직노동자들의 힘을 원자화했다는 점.




자발성, 운동과 리더십 문제에서 운동이 자발성만으로 국가 탄압에 맞설 수는 없다고 지적한다.

자발성과 의식성(지도적 요소)의 변증법이라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모든 투쟁에 지도적 요소가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아무리 작은 파업이라도 아무리 작은 시위라도 누군가 처음 호소한 사람이나 집단이 있는 법이다. 그 호소를 한 사람이나 집단은 더 많은 사람들을 동참시키기 위해 더 설득력 있고 더 효과적으로 제안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을까? 요컨대, ‘순수한’ 자발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자발성과 리더십 둘 다 필요하다. 진정한 리더십은 자발성을 키우고, 자발성에서 배우고 대화하며 동시에 운동의 방향을 제시하기 위해 투쟁하는 리더십이어야 할 것이다. 굳건하고 민주적이며 급진적인 리더십 말이다. 그리고 그런 리더십은 개인이 형성할 수 없다. 계급투쟁에서 리더십을 형성하는 것은 집단적 경험과 기억을 일반화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특히 자발성, 운동과 리더십 문제에 대해 돌이켜 보면, 경찰의 강경진압으로 산발적이나마 경찰 봉쇄를 따돌려가며 가두시위를 시도할 때 즉각적인 전술 제시가 선두에서 빠른 시간 안에 합의를 통해 이뤄지기도 했다. 전략, 전술에 있어서 시위자들 전부가 “그저 투쟁이면 된다.” 라는 생각을 가졌던 것은 아니었다. 끝까지 시위를 함께 하는 사람들은 조직된 전략, 전술에 무엇보다 목말라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효과적인 시위를 하고 싶었지만 충분히 조직되지 못한 운동은 다소 소모적으로 흐를 수 있다는 회의적인 목소리도 많았다. 그리고 ‘자발성주의’에 함몰돼 운동의 응집력이 방해받는다면 그것이 더 문제라고 생각한다.







의제 확장이 이뤄져야 할 때 공통된 의제가 확장되면 충분히 함께 할 수 있는 것이 시민운동의 성격임을 깨닫는 시간이어야 한다. 그런데 의회주의 이해관계 때문에 정권 퇴진 요구를 두려워하는 세력도 있다. 민주당은 가축전염병예방법을 고리로 한나라당과 타협해 국회로 돌아갈 채비를 시작했다. 얼토당토않게도 촛불 운동 참가자 일각에서 “구관이 명관”이라는 식의 지지를 받고 있는 노무현은 “청와대로 행진하거나 정권 퇴진을 요구해선 안 된다”며 운동이 체제 내에 머물 것을 촉구했다.

촛불 지지 주류 언론의 자유주의적 본질도 드러내고 있다. MBC 논평과 <경향신문>에서 “제도권 수렴”을 촉구했다.

그러나 정부의 임기를 보장해주는 ‘헌정질서’는 국민을 등쳐먹는 이명박 정부의 사회적 기반인 재벌, 강부자 집단을 위한 질서일 뿐이다.

이 부분은 시위 내의 정서를 충분히 담아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미 처음부터 '이명박 OUT'을 외쳤다는 점에서 말이다.

물론 다음과 같은 방해 요소들도 작동했다.


 

경쟁교육, 민영화, 한미FTA 등은 바로 노무현과 민주당이 추진을 시작한 것이기 때문이다.

민주당은 자본가계급에 기반을 두고 있고 이명박 정부가 추진하는 신자유주의 정책의 전임 집행관들이다. 그래서 민주당은 우리 운동의 요구와 이익을 결코 일관되게 옹호하지 못한다. 오히려 본질적으로 그것에 반하는 세력일 뿐이다.





시민. 사회단체가 대중의 ‘보수화’에 좌절감을 느끼고 있었고 그래서 이 운동의 잠재력에 대한 믿음을 여전히 결여하고 있었다.



이명박 퇴진을 둘러싼 운동내 강온파가 본격적으로 대립하면 이명박은 강경파를 고립시켜 탄압하며 통제력을 회복하려 할 수 있다.




공공노조의 공공서비스 사유화 반대, 대운하 반대, 유가인상 반대 등의 요구는 다양한 요구와 쟁점을 제기해 운동을 더 확대시켰다. 확대된 요구의 성취는 이명박 정부와는 성격이 다른 진정한 진보적 정권이 들어섬으로써 가능하다.



‘대의제 민주주의’로는 정부의 개악은 못 막고 오히려 국회 밖에서 언론 노동자들의 파업과 같은 저항이었다. 즉, ‘조직노동자의 힘을 동원하는 것’이었다.






2008년 촛불시위 대차대조표 그리기를 살펴보면

촛불시위의 영향으로 이명박 지지율은 곤두박질쳤다. 촛불시위는 분노의 초점구실을 해 이명박 정부를 폭로하고 그 권위를 추락시켰다. 촛불시위 최고조기에 이명박 지지율이 7퍼센트까지 추락한 것도 놀랍지만, 이제 겨우 1년 된 정부의 지지율이 기껏해야 30퍼센트 대라는 것 또한 놀라운 일이다. 이는 ‘정상적 통치’가 불가능할 정도로 형편없는 지지율로서 괜히 정부 측 인사들이 ‘촛불 때문에 1년 허송세월 했다’고 한탄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촛불은 이명박 불도저를 한동안 저지했고, 심지어 폐기할 수 있는 가능성마저 힐끗 보여줬다.

하나의 저항과 투쟁을 분석할 때 구체적 요구의 성취보다 더 중요하게 고려해야 하는 것은 의식의 변화와 조직의 성장이다. 이런 면에서 볼 때 2008년 촛불시위는 매우 중요한 퇴적물을 남겼다. 역사는 단순한 반복을 허용하지 않는다. 다음번 저항의 분출을 앞당기고, 그 기회가 왔을 때 저항의 힘을 효과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또 다른 저항의 ‘봄’을 위하여 2008년 촛불시위의 성과와 약점을 집단의 기억으로 새길 필요가 있다.








2008년 촛불시위의 중요한 문제였던 개혁주의. 개혁주의는 개혁을 통해서만 사회 변화가 가능하다고 여긴다. 반면 고전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바꿔야만 중요한 변화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촛불시위는 ‘범국민적 투쟁’이었다. 심지어 민주당조차 시위에 참가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사회변혁과 개혁을 위한 투쟁에서도 그 투쟁의 효과를 전략적으로 극대화 할 수 있는 사회 세력이 있다. 바로 조직된 노동계급이 그렇다. 개혁주의의 다른 특징은 ‘국민주의populism’다. 국민주의는 조직된 노동계급의 힘을 그저 ‘국민’의 한 요소로만 여기기 때문에 이 무기를 사용하는 데 적극적이지 않다. 게다가 국민주의는 모든 세력의 입장을 반영해야 한다는 태도 때문에 운동에 온건화 압력으로 작용한다.

국민주의의 좀 더 구체적 형태는 계급 연합이다. 예컨대, 자본가계급을 지지 기반으로 삼는 민주당에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있다. 이해관계가 서로 다른 조직 노동계급과 민주당이 과연 상시적이고 포괄적으로 연합할 수 있는 사회 세력인가 하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

개혁주의에는 또 다른 중요한 함의가 있다. 우선, 개혁주의의 지도자들은 나름의 물질적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다. 이것이 개혁주의 이데올로기의 토대다. 예컨대, 민주노총 지도부가 정부 관리나 사용자를 만나 협상하는 임무, 즉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노동조건을 둘러싸고 협상해야 하는 객관적 조건이 개혁주의의 토대가 된다. 민주 노동당이나 그것에서 분당한 진보신당은 바로 민주노총 지도부를 기반으로 만든 정당이기 때문에 역시 개혁주의적이다.

 

NGO 지도자들은 민주노동당 같은 진보 정당이 출현하기 전까지 정부와 국회에 대해 ‘시민’의 ‘대리자’ 구실을 해왔다. 이것이 NGO 지도자들의 개혁주의 토대다. NGO 활동가들이 스스로 인정하듯이 NGO는 “준 정당적” 활동을 해왔다.




시민운동의 등장은 운동의 일부가 “민중운동의 패러다임”과 단절해, 급진적 이념과 투쟁방식에서 절차적 민주주의 확립을 통한 민주 정부 수립 노력 같은 정치활동으로 변모하는 것을 뜻했다. 계급투쟁이 아니라 다양한 사회운동을 강조하는 신사회운동을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NGO는 ‘개혁정부’와 모종의 끈을 유지했다.




일상적 시기에는 개혁주의 단체 지도자들뿐 아니라 대중의 의식도 개혁주의에 이끌린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 근원은 바로 자본주의 체제다. 자본주의 체제하의 소외 경험 때문에 대중의 이데올로기는 자본주의를 총체적으로 변혁하려는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파편화하고 분절된 점진적 개혁주의에 끌리게 된다. 자본주의는 노동자들이 단결해 싸우게도 만들지만, 또한 노동자들을 분열시키고 경쟁으로 내몬다.

그리고 자본주의 체제는 정치와 경제를 분리시키는 경향이 있다. 정치 투쟁은 개혁주의 정당이, 경제투쟁은 노동조합이 맡는 분업 체계를 만든다.

이런 요인들 때문에 노동자들은 기존 체제의 틀 안에서 변화를 추구하는 개혁주의에 이끌리게 된다.

한편, 개혁주의 지도자들이 때로 대중투쟁을 조직한다는 것도 중요한 점이다. 이것은 그들의 지지 기반이 지배계급이 아니라 노동계급 그리고/ 또는 다른 천대받는 사회집단들에 있기 때문이다.

두 가지 요소, 즉 대중의 개혁주의적 의식과 개혁주의 지도자들의 간헐적인 대중투쟁 지도를 정확히 인식해야 한다. 고전 마르크스주의는 대중이 자신의 행동과 투쟁을 통해 의식이 변한다고 여긴다. 이것을 현실에서 구현하는 데 필요한 것이 바로 공동전선이다. 공동전선은 개혁주의 지도자들과 함께 운동을 확대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이 투쟁의 전망을 제시하고 가장 적극적인 투쟁 부위가 돼 변혁적 대안의 올바름을 대중에게 입증하는 전략. 전술이다.

개혁주의 문제의 또 다른 쟁점은 로자 룩셈부르크가 110여 년 전에 던진, “사회 개혁이냐, 혁명이냐” 하는 질문의 유효성이다.




그리고 촛불시위의 화두였던 ‘민주주의’와 ‘폭력 비폭력’문제를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으로 명확하게 분석하고 있다.




촛불시위 행진팀장으로서 현장성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으면서 마르크스주의 이론으로 실천적 내용들을 자세하고 꼼꼼하게 분석하고 있다.  많은 부분 헷갈리고 혼돈스러웠던 것들에 대해 해답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다른 촛불관련 책들이 팩트를 중심으로 역사적 자료로서 기록을 중점적으로 하고 있는 반면, 이 책은 팩트에 충실하지만 마르크스주의 관점에서 운동을 분석하는 어려운 작업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운동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더해준다. 아울러 미래의 저항을 위한 배울 점을 나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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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MB공화국, 고맙습니다]-하재근

혼자 읽기엔 너무 아까운 책이어서 강추합니다.

짧게 내용 맛보기...




<<<경쟁은 군림과 복종의 지배질서를 만든다.




김영삼 정부 때부터 경쟁굿이 벌어지고 있다. 경쟁강도를 더 높이지 않으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공포분위기가 조성되었다. 도대체 왜? 앞에서 경쟁과 서열은 동전의 앞뒷면이라고 했다. 경쟁이 강화되면 서열체제도 강화된다. 그리하여 지배체제가 강화되고 승자독식사회가 된다.




경쟁강화 ->승자독식강화 ->서열강화 ->지배질서강화

경쟁약화 ->승자독식와해 ->서열와해 ->지배질서붕괴




조선시대 때는 소수가 모든 것을 갖는 체제가 정당화됐었다. 그 땐 노비가 왜?라고 묻지 않았다. 노비가 왜 양반 자식만 영의정을 하고 내 자식은 영의정을 하지 못하는가라고 묻지 않았다는 뜻이다. ‘왜?’라고 묻는 노비는 대역죄로 참수 당했다. 그래서 조선시대는 소수독식사회였다. 그런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은 ‘왜?’라고 물으면서 시작된 체제다.




왜 누구는 나면서부터 귀족이고 누구는 나면서부터 노비여야 하지?




왜 부와 권세를 소수가 대물림하면서 독식하고 나머지는 그 밑에 있어야 하지?




왜 내 자식과 그들의 자식이 가는 인생행로가 달라야 하지?




소수독식사회는 이 물음에 답을 해야 했다. 그래서 소수독식사회의 현대판 신버전이 태어났다. 바로 승자독식사회다.

‘승자’라는 말은 ‘경쟁’을 전제로 한다. 일단 겨루는 과정이 있어야 이기든 지든 결판이 날 것 아닌가. 조선시대는 겨루는 과정이 필요 없었다. 태어나면서부터 모든 게 결정됐기 때문이다. 홍길동은 태어나는 순간 호부호형을 할 수 없는 운명이 결정됐다. 엄마가 종이었으니까. 왜? 묻지 마라. 그냥 그런 거다. 그게 지엄한 법도다. 노비가 양반에게 경쟁하자고 하면 곤장을 맞는다. 조선은 그런 나라였다. 동양 신분제 사회 민란의 대표적인 구호는 이것이었다.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으랴!




이 구호를 외친 민란주모자들은 참살 당했다. 당시는 씨가 따로 있는 사회였으니까. 그래서 씨가 다른 사람들은 서로 다른 교육을 받으면서 서로 다른 트랙의 인생을 살았다. 소수는 명문 사립교육기관(서원)에 갔고 다수는 동네 서당에 가거나 아예 안 가기도 했다.

민주공화국의 시민에게 이런 걸 강요했다가는 당장 ‘왜?’라고 묻는 민란이 일어날 것이다. 이것이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없는 사회의 혼란상이다. 이 사회에서는 소수의 부와 권세가 안전하지 않다. 귀족트랙도 안전하지 않다. 이런 혼란을 잠재우는 마법의 주문이 바로 ‘경쟁’이다. 부와 권세를 갖고 싶다고? 왕후장상이 되고 싶다고? 자기 자식이 비참하게 사는 게 싫다고? 그렇다면 한국인들이여 경쟁하라!

그래서 한국인은 경쟁한다. 경주마가 되어 평생 달린다. 한참동안 달리다보면 알게 된다. 누군가는 특별한 트랙에 올라타 별개의 인생을 살고 있다는 걸. 우리 사회는 승자독식사회라는 걸 말이다. 그래도 사람들은 불만을 갖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기들은 패자니까. 경쟁했는데 졌을 뿐이니까. 사람들은 받아들인다.




비록 왕후장상의 씨는 따로 없지만 승자의 영광과 패자의 비참함이 엇갈리는 건 당연하지.




그렇게 한국인은 자발적으로 자기와 자기 자식의 비참한 삶을 받아들인다. 이것이 ‘경쟁’의 마법이다.




경쟁이 이룩한 나라




외환위기 이후 한국 사회는 전면경쟁체제로 재편됐다. 김영삼 정부 때부터 경쟁강화굿이 펼쳐졌다는 건 이미 설명했다. 그 후 우리 사회는 어떻게 됐을까? 이명박 정부의 미래를 힘들게 예측할 필요는 없다. 지나온 15년을 돌아보면 이명박 정부의 미래도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동안 겪은 일은 간단하게 표현할 수 있다. 양극화, 중산층 붕괴다. 경쟁으로 승패가 결정되어 승자독식체제가 강화된 것이다. ....중략




이명박 정부의 답은 이거다.







양극화 심화, 탈규제, 교육자유화로 경쟁촉진 정책 강행




-소득이 더 줄도록 노동유연화, 구조조정을 실시하겠다.

-집값이 더 올라가도록 부동산 개발로 지가 상승을 이끌겠다.

-교육비가 더 들어가도록 자사고, 국립대법인화 등으로 등록금을 올리겠다.

-사교육비가 더 들어가도록 입시경쟁을 심화시키겠다.

-영어사교육비가 더 들어가도록 영어몰입교육을 하겠다.

-생활비가 더 들어가도록 민영화 등으로 공공서비스 요금을 상승시키겠다.

-의료비가 더 들어가도록 의료보험을 약화시키겠다.

-세금을 줄여 복지혜택을 줄이겠다.

-지방이 더 황폐화되도록 수도권규제 풀겠다.




그러니 잘 살려면 자유경쟁에서 승리하라




물론 잘 해주려는 것도 있다. 이런 거다.




쇠고기값이 덜 들도록 값 싸고 질 좋은 미제 쇠고기를 공급하겠습니다. 많이 먹고 뛰세요.




사람들은 왜 저항하지 않을까? 왜 분노하지 않을까? 미제 쇠고기 정도엔 화를 내지만 더 근본적인 자유화, 경쟁강화, 시장화에는 저항의 강도가 약하다. 그것 때문에 자살까지 불사할 정도로 고통을 겪으면서도 말이다.>>>///////[MB공화국, 고맙습니다] 하재근...97~103쪽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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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정부의 정,동맥을 흐르고 있는 정책 전반의 작동 기제가 무엇인지를 상세하게 까부수고 있다. 민주공화국을 유지하기 위해서 우리가 어떤 구조 속에서 몸부림치고 있는지. 우리가 함께 고민해야 할 문제들이 어떤 것들인지, 그 원인은 무엇인지 정도는 알아야 할 책임이 시민으로서 있다면 이 책은 성실하게 그 문제의 원인과 대안들을 구체적으로 모색하고 있다.




강추강추강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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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를 꼭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이유는 오늘 김규항 선생님과의 만남에 128명의 댓글과 참석을 원했으나 참석할 수 없었던 분들에게 자그나마 위로가 될 수 있을까 해서다.








김규항 선생님은 안동 토론회 때 발제자로 첨 뵀었다. 이번이 두 번째다. 더 젊어지셨고 늘 유머가 넘치신다. 평소 모자 쓰신 모습만 봤는데 모자 벗으신 모습이 훨씬 멋지시다.








여기서 다른 내용보다 질문과 답변을 통해 오고갔던 내용들을 쭈욱 적어보려고 한다.



질문자의 내용은 김규항 선생님의 답변 글을 통해 유추가능하리라 보고 주로 선생님의 답변을 조용조용 정리해 보겠다.








상식이 통하는 세상에서, 상식은 여러 가지며 먹고살만하고 문화를 향유할 만큼의 여유가 있는 사람들과 생존을 위해 사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상식은 다르다.(왜 아니겠는가. 있는 사람들이 매일 먹는 식사가 상식이라면 먹고 살기 힘든 사람들에겐 그 상식이 일 년에 한 번 먹을까 말까 하는 특식일 수도 있지 않겠는가..이건 제 유머..)








더불어 사는 삶을 사는 것과 개인의 꿈과 욕망을 위해 사는 삶은 꼭 다르다고 볼 수는 없다. 더불어 사는 삶이 고통과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부분이 있고 내 꿈과 욕망을 추구하는 것이 개인적이고 이기적일 수도 있지만 그러나 보편적이라면, 내 꿈이 더불어 사는 삶을 지향하는 것일 수도 있듯이 이 문제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는 선택의 문제다.








평화가 온순하고 조용해야 한다고 보는 것은 나쁜 의도가 깔려있다. 평화란 깨진 균형, 조화를 회복하는 것이다. 그 조화를 회복하는 데는 온순하고 조용하지 않고 소란스러운 것일 수 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은 비폭력주의자다. 악에 저항하기 위해 전쟁이라는 극단의 폭력을 일삼는다는 부시도 비폭력주의자라고 말한다. 즉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도 비폭력주의자라고 한다. 폭력이 나쁘다는 말은 아무것도 말하는 게 없다. 비폭력은 폭력의 현장에서만 가능한 말이다. 간디 등 비폭력주의자들은 폭력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그러나 우리나라 비폭력주의자들은 논평으로 비폭력을 말한다. 그러나 성실히 일해도 품위유지는 고사하고 자존심도 유지할 수 없는 사람도 많다. 이런 사람들이 폭력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돼 있는 것이고 이런 사람들이 비폭력을 말하는 것은 정당하다. 이런 사람들은 하루 종일이 운동이고 싸움이다. 촛불시위에서 폭력, 비폭력을 말하는데 이런 사람들은 촛불시위에 나갈 수도 없다. 폭력의 현장에 충분히 자신을 노출시키고 난 다음에 비폭력을 말해야 한다.








목사나 교회에 대한 선택이나 비판에 대해선 먼저 예수정신이 살아있는지 따져볼 필요가 있고 없다면 교회가 아닌 동네 가게나 마트다. 기독교 이전 예수님은 유대교시절 성전 안엔 지성소라는 하느님이 살고 있었음에도 인민을 억압하는 체제의 본거지였기에 벽돌 하나 남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다라고 용기 있게 말씀하셨다. 교회를 잘 따져봐야 한다. 오히려 예수를 사칭, 빙자한 것이지 교회가 아닐 수도 있다.








옳고 그름에 있어서 모든 사람에게 다 옳고 다 그르고 다 선이고 다 악인 것은 없다. 한미FTA도 이건희나 극우파, 노무현이나 유시민처럼 개혁우파들에겐 이익이 되지만 그렇지 않은 쪽도 있다. 옳고 그름은 어느 계급, 계층에서 생각하느냐에 따라 가치가 달라진다. 국가전체를 내세우는 사람들의 생각과 성실히 일해도 자존심조차 세울 수 없는 사람들과 먹고 살만하고 문화를 향유할 만한 여유를 가진 사람에게 있어서 옳고 그름은 차이가 큰 것이며 별의미가 없다. 오히려 부각될수록 상황은 나빠진다. 개인의 선택이며 계급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편협하고 편향된 의견이다. 국민, 국가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나라에선 정직하게 일하면서도 인간적 자존심을 유지하기조차 힘든 상황이다. 이것은 팩트다.








제도권 교육에서도 좌파 10년이라고 쓴다. 민주화는 자본화였을 뿐이고, 김대중, 노무현 정권은 신자유주의를 가속화했을 뿐이고. 이런 곤혹스러운 상황에서 좌파가 경직돼있다고 하는 것은 문제다. 다른 가치가 존재한다. 좌파입장에서는 많이 과격한 게 아니다. 팩트를 말하는 것뿐이다.








주변에 존경하는 예수님 같은 존재가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 수많은 작은 예수들을 만난다. 실제 예수님은 너무 다양한 면모를 가지고 있고 포괄적이다. 즉 정치적 급진성을 가지셨고 차별받는 여성 편에 선 페미니스트시고 장애인들을 위로하고 소수자, 약자편이시고 특히 아동을 가장 높이셨고 이방인들에게 배타적이지 않으셨고 등등..에 부합하는 헌신적인 활동가들이 많다.








[예수전]을 쓰기 위해 많은 자료 연구를 하셨을 텐데 어디서 오는 통찰력이신가? 라는 질문에선, 순수한 탐구와 진실을 밝히고 접근하려는 진지한 태도면 가능하다고 본다. 삶의 현장에서 순수하게 길어 올릴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자신의 생각을 예수에게 뒤집어씌우는 것은 나쁘다고 본다. 즉, 예수는 영성가였다라든가, 농촌공동체복원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예수가 그런분이셨다라든가, 예수 믿으면 축복 받는다라든가. 이런 것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진지하고 순정한 마음에서 해석하고 말씀과 행동을 잘 묵상하는 게 중요하다. 그러나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을 예수에게 뒤집어씌우는 것은 나쁘다. 교회에 대해서나 예수론을 비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것은 잘못된 역사 개념에 기대는 것이기 때문이다. 김규항 선생님은 자신의 독설에 대한 비판에 있어서 오히려 예수님의 말씀을 통한 묵상과 고민을 통해서 과격한 말, 행동을 위로받는다.








아이를 키우는 문제에 있어선, 우리 아이들이라고 작은 김규항이는 아니고. 어린이의 사회의식은 감당할 수도 참여할 수도 없고 정서적, 감성적으로도 결여돼 있다. 다만, 제국주의 문제나 불이익을 당하는 약자를 위한다든가 하는 것은 또래집단에서 할 수 있는 것을 한다. 모든 것은 아이들이 선택할 문제다. 아이들이 잘, 행복하고 풍요롭게 살기를 부모는 바라고 그렇게 살도록 도울 의무와 책임이 있다. 그러나 잘, 행복, 풍요가 뭔가? 라는 가치기준의 문제이고 여기에 어떤 가치를 두느냐에 따라 다르다. 운전면허 시험에 합격하기 위해 학원을 다니는 사람도 있고 단번에 합격하는 사람도 있다. 여기에 학원을 다녔느냐 안 다녔느냐가 그렇게 가치판단이 들어갈 문제가 아니라 이것은 실용적 가치의 문제이듯이. 우리 아이들이 요즘 시대에 학원을 안 보내는 건 아이들을 희생시키는 것 아니냐도 같은 문제일 뿐. 아이들이 학교 수업으로는 수학을 이해하기 힘들다면 그 땐 학원을 다닐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교육은 자본주의 가치가 배어 있는 가치관의 문제고 고통과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선택의 문제다.








복음이 뭐냐? 라는 질문에, 기쁜소식.. 인문학 공부를 안 하고 생각하고 실천하는 것이 가장 지적인 상태다. 최고의 지적 경지는 개념어가 들어가 있지 않은 상태다. 지적언어는 학술용어다. 그러나 개념어가 들어가 있지 않은 가장 쉽게 글을 쓰면 책을 통해 습득한 사람들은 불편해한다. 동네 아파트에서 평소에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를 과연 몇 명이 사용하는지 봐라. 그리고 젠더라는 용어를 제대로 이해하고 쓰는 사람들이 몇 명이나 되겠는가. 아마 1000명 중 한 명도 안 될 거다.








글을 통해 <내 안의 이명박>이라는 말을 자주 쓰는데 내 안과 밖의 이명박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자기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진다. 지금 정부는 한국의 상태를 그대로 반영한다. 이건희 대 이건희를 욕하는 사람의 차이가 뭔가. 차이는 돈이 많고 적고 차이일 뿐이다. 삶의 가치관, 철학에선 차이가 없다. 이명박 정부는 쿠데타나 외부의 강제적 힘으로 된 정부가 아니다. 우리의 선택이고 지금 시대의 반영이다. 가장 인간적인 것은 다른 게 아니라 인간 본래의 모습, 하느님의 형상대로 만든 신성을 되찾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억압해선 안 된다. 온전한 개인의 변화가 중요하다. 체제가 변한다고 하느님의 나라 새로운 세상, 차별 없고 편견 없는 새로운 세상이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다.








[예수전]을 통해 영성만을 좇는 교회가 바뀌기를 바라고 예수님은 우리의 이분법적 사고로 나누듯 정치성과 영성성이 둘이 아닌 하나로 동시에 갖고 계셨다.








마무리 질문으로 정태춘 선생님의 질문인 새로운 세상에 대해, 너무 당연한 것을 회복하는 것. 새로운 세상이란 사람이 사람을 억압, 착취하는 것에서부터 벗어나는 것들이다. 러시아 혁명도 사실 쿠데타식 혁명론이었고 그 당시 그 사회의 반영이었고 그 통제 방식들에 세뇌돼 있는 구성원들의 내면은 계량할 수가 없다. 그것이 영성인데 겉으론 열심히 하나 속으론 얼마나 동조하는지 알 수 없다. 그 안에서 이중성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래서 자발성에 기초해서 하는 것이 중요하다. 즉, 기도하는 것이다. 내 안에 있는 것들을 은폐하지 말고 삶으로 열심히 싸우고 기도하고 동시에 해야 한다. 진정한 혁명은 종교적이다. 싸우고 기도하고. ‘영성 없는 혁명’, ‘혁명 없는 영성’이 아닌 온전한 개인의 변화가 우리사회에 지배적 형태가 될 때 새로운 세상이 가능한 것이다. 노동운동은 사람이 상품이 아닌 인간인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노동자의 권리, 임금, 생존권을 위한 투쟁도 중요하지만 노동자 자신을 더 상품화시키고 제값받기 운동은 될지 모르나 진정한 혁명은 아니다. 오히려 기득권에 부합하는 것이다. 제주도 늙은 해녀가 해녀복장으로 힘든 잠수를 하자 스킨스쿠버 장비를 이용하면 100명분을 할 수 있을 텐데 왜 안 하냐는 물음에 늙은 해녀가 말하길 그럼 99명은 어쩌냐는 답변에서 우리는 삶에서 가져가는 혁명성을 엿볼 수 있다. 우리 안에는 자본가들이 심어준 정서가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 안에는 혁명의 씨앗이 있다. 예수님이 기도하고 싸우는 영성 속의 정치성은 하나였듯.








이렇게 3시간 넘는 질문, 대답들이 오갔다. 잠시잠시 웃느라 붙잡지 못한 얘기들도 있고 잠시잠시 김규항 선생님 외모 감상하느라 핵심이 빗나간 것도 있으나 [예수전]책 속에 고스란히 있기 때문에 현장성을 살려 정리해 보았다. 가지 못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됐으면 하는 바람일 뿐이다.








김규항 선생님의 시기적절한 [예수전] 출간에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질문에 대한 성실하고 유머 넘치는 답변이 무척 재밌었다. 알라딘의 단골 주 고객이면서도 이런 행사는 첨이었는데 너무나 유익했고 알라딘 주최 측에게 거듭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제 개인적인 감상으로 글을 마무리 한다면



종교화된 예수상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세포의 부활이 아닌 예수님의 태도로 내 삶이 바뀌는 혁명을 매일매일 싸우며 기도로 가져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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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불온한가]에서 김규항 선생님은 "예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을 하셨다. 예수는 무슨 꿈을 꾸셨으며 어떤 삶을 산  분이셨기에 믿으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걸까? 그러나 진작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님에 관해선 대부분 역사를 통해 다듬어지고 정리된 예수상이다. 특히 기독교에서 강요하는 교리 안에 갇힌 예수 믿기란 때론 불편할 때가 많다. 그런데 [예수전]에서 기존 교회에서 얘기되는 예수님에 반해 예수님이 사셨던 시대적 배경을 통해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갈 수 있다. 아울러 예수님이 꿈꾸셨던 세상과 그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의 역사를 알게 되면서 지금 제국주의 미국을 등에 업고 전쟁을 일삼는 잔인한 전쟁국가 이스라엘에 대해 아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예수님이 바라는 새로운 세상이란?  

예수님이 공생애 동안 지속적으로 하셨던 사회비판이란 그 시대 지배체제가 허용하고 수용 가능한 개혁의 차원이 아닌, 그 시대 인민들이 겪는 억압, 가난, 고통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새로운 세상이었다.  예컨대,  사회체제를 고치는 개혁이 아니라  체제 변혁을 뜻한다.   

2000년 전 예수님은 갈릴래아, 사마리아, 이스라엘의 지배체제가 인민들에게 가난과 억압과 고통을 지속적으로 강요하는 걸 변혁하려고 했음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의 사회주의 입장에서 보자면 자본주의의 극한치인 신자유주의체제가 갖는 근본적인 문제점은 예수님이 꿈꾸시던 사회주의의 변혁만이 새로운 세상을 여는 열쇠라고 볼 수 있다.  1930년대 대공황과 1979년, 2009년 자본주의가 겪는 주기적인 공황을 본다면 자본주의는 인민들이 열심히 일할 수록 고통과 불안과 가난으로 신음하게 만들어가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 책에서 폭력, 비폭력에 대한 글을 옮겨 본다.
<< 예수는 오히려 폭력에 매우 익숙한 사람이었다.  

갈릴래아에선 크고 작은 봉기가 셀 수 없이 일어났다.
예수는 그런 현장을 외면할 수 있는 특권계급이 아니었다.
예수가 형 혹은 삼촌이라 부르던 사람들이 무수히 죽어 갔고 나중엔 친구와 동생들이 죽어 갔을 것이다. 예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말하자면 그들은 오늘 이스라엘로부터 압살당하는 팔레스타인 점령 지구의 청년들과 같다.

그들이 비폭력을 지향했던 건 분명하나, 폭력의 현장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앉아 ‘폭력은 나쁜 거야’라고 설파하는 한심하고 염치없는 비폭력주의자들이 아니었다는 건 더욱 분명하다. 사실 예나 지금이나 ‘폭력주의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싸움질을 벌여 파출소에 잡혀 온 동네 양아치도 자신은 싸우고 싶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끊임없는 침략전쟁을 벌이는 제국주의자들도 전쟁이 싫지만 ‘악의 세력에 저항하기 위해’ 어쩔 수 없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세상에 비폭력주의자가 아닌 사람이 없는데 온 세상이 폭력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런 현실에서 비폭력주의는 무엇인가?  

 

비폭력주의는 오로지 폭력의 현장에서만 주장될 수 있다.

제국의 미사일 공격에 제 새끼가 찢겨 죽은 어미가 죽음보다 더한 슬픔을 뚫고 ‘우리는 똑같은 폭력의 보복을 해선 안 된다’고 말할 때 우리는 누구도 그 말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폭력의 현장에서 멀찍이 떨어져 1년 내내 뺨 한번 맞을 일 없는 사람이 점잖은 얼굴로 ‘저항으로서 폭력도 폭력이다’라고 뇌까리는 건 참으로 몰염치한 짓이며 폭력의 피해자에게 가해자의 폭력보다 더 끔찍한 폭력이 된다.  


비폭력주의의 목표는 ‘비폭력’이 아니라 ‘저항’이라는 걸 잊어선 안 된다. 예수는 결코 안온한 예배당이나 연구실에서 비폭력론을 주장하지 않았다. 예수는 언제나 폭력의 현장에서 그 폭력을 몸으로 감당하며 비폭력으로 저항했다. ‘20세기 비폭력주의 운동의 대명사’라 일컬어지지만 일각에서는 인도 ‘민족’에 집착하여 인민들의 정당한 투쟁을 훼방한 사람으로 비판받기도 하는 간디조차 ‘무기력하고 비굴한 비폭력보다는 차라리 정당한 폭력이 낫다’고 말했다. 비폭력주의는 폭력적인 투쟁 방법을 넘어서는 투쟁 방법이지 폭력적인 투쟁 방법에도 못 미치는, 투쟁의 정당성은 부인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려는 유약한 인텔리들의 요사스러운 말장난이 아니다. 진정한 비폭력주의자들이 결국 폭력에 희생당하는 운명을 갖는 건, 지배체제가 그들에게서 무장투쟁을 선택한 운동가들보다 오히려 더 큰 위협을 느끼기 때문이다. 237,8,9쪽>>  

 

'성전 성화' 사건에서.. 

181,182쪽..<< 그러나 예수 당시의 성전이 단지 종교적 의미를 넘어 지배체제의 핵심이었다는 사실에서, 예수의 태도를 전 사회적 영역으로 확대해 보아야만 한다. 예수는 억압의 사회체제가 피억압자들의 비굴과 무기력에 힘입어 유지된다는 사실을 폭로한다. 앞서 말했듯 인민들은 성전의 실상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들은 "저것은 더 이상 성전이 아니다.", " 하느님은 저곳에 거하시지 않는다"고 말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침묵했다. 그리고 그 침묵엔 예의 순진함 외에 '세상이 다 그런 거지' 하는 비굴과 무기력이 들어 있었다. 

 

우리는 대개 어떤 불의한 사회체제를 유지하는 힘이 전적으로 그 체제의 지배세력에서 나온다고 생각하곤 한다. 이를테면 1970년대 한국의 군사 파시즘 체제를 유지하는 힘은 전적으로 박정희 패거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인민은 다만 그 포악한 체제의 일방적 희생자로 묘사된다. '박정희 군사 파시즘에 신음하던 인민들.' 그러나 그 시절 대개의 인민들은 '신음'하지 않았다. 오히려 '세상이 다 그런 거지','사람이 하는 일인데 완벽할 수야 있나' 하며 제 식구들 챙기며 오순도순 살았을 뿐이다. 불의한 사회체제를 유지하는 더 근본적인 힘은 바로 인민들의 비굴과 무기력이다. 사실 제아무리 포악하고 강한 사회체제라고 해도 대다수 인민들이 한꺼번에 거부의사를 표시하면 당장이라도 맥없이 무너지게 되어 있다. 

 

예수는 수많은 인민들 앞에서 그들의 비굴과 무기력을 일깨우는 것이다. 결국 예수의 '난동'은 침묵하는 억압의 체제에 균열을 일으키는 장엄한 퍼포먼스였다. 지배자들은 그 퍼포먼스를 통해 하느님의 권위로 은폐된 그들의 썩은 실체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그리고 인민들은 '인민들의 순진함'으로 가려진 제 비굴과 무기력을 비로소 되새기며 인간적 위엄을 회복할 채비를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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