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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 합격, 계급 - 장강명 르포
장강명 지음 / 민음사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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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장강명 작가이기에 쓸 수 있는 책이다> 라고 생각한다.

소설이 아닌 르포르타주인데 문학상과 대기업 공채 시스템, 국가 공무원의 공채 시스템을 분석, 비교하고 이 공채 시스템이 우리나라에서 기능하는 역할의 장점*단점, 앞으로의 모색 방향 등을 심도있게 다룬 한 권의 방대한 논문 같은 책이다. 현재 문단내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작가가 이런 민감한 문단 내의 실정과 문학 공모전이 가진 한계점을 샅샅이 파헤친다는 점에서 흥미로웠고, 일종의 내부 고발에 해당되는 부분이 언급되려나 하는 기대감이 컸다. 작가 지망생이 아닌 독자들 입장에선 각 문학 공모전이 어떤 방식으로 선정되고, 또 공모전을 통해 등단한 작가와 미등단 작가 사이에 어떤 차별과 배제가 존재하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냥 “책” 자체가 재미있기만 하면 되는 것 아닌가, 내가 그런 부분까지 알아야 할 필요가 있나 라고 생각하고 이 책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런데 장강명 작가 특유의 날카로운 예리함은 이 문학 공모전 시스템을 꾸준히 일종 기업 형태의 채용 시스템과 엮어가며 유사성을 증거로 제시한다. 그 형태가 놀랍게도 일치한다면?

문학 공모전과 기업. 국가 시험 채용 시스템이 갖는 공통점을 간략히 요약하자면

(207page : * 단체 시험 형태이고,

*경쟁률이 치열하며

*합격하면 갑자기 신분이 상승하고,

* 이후에는 좀처럼 ‘합격자’라는 신분을 뺏기지 않는다.


또, 일반 공채를 통해 높은 장벽을 뚫고(?)입사하는 대기업, 국가 유관기관에 근무하는 사람과 공모전을 통해 등단한 작가와 미등단 작가 사이의 간극을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간판’이 가지는 의미일 것이다.

대한민국에서는 간판이 가지는 의미와 중대성이 아주 크다. 장강명 작가는 이 ‘당선,합격,계급’에서 우리나라의 문화와 관습, 채용 시스템, 영화계의 아카데미, 언론사 공채 등의 현실을 밀도있게 취재하여 문학 공모전 시스템의 흑과 백을 낱낱이 들추었다. 심지어 이 책을 집필하는 기간 중에 작가 자신이 수림문학상과 한겨레문학상의 심사위원으로 예심 과정에 관여하면서까지 응모된 작품들의 완성도나 심사 과정을 세밀히 스케치했다. 특유의 기자 정신이 발현된 책이기에 그 집요함이 존경스러웠다. 다만, 이 책이 조금 더 문단 내 내부고발에 치중했다면 더 흥미로웠을 텐데,(하긴, 이건 소설이 아니고 르포르타주 장르이니까 한계가 있지만.)

작가 자신의 견해이긴 하나, 결과가 너무도 예상된 쪽으로 귀결되어 다 읽고 난 후엔 허탈감이 밀려옴은 어쩔 수 없다.



_이런 독자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_

?작가지망생에겐 필수!
(등단을 준비하는 작가 지망생들이 읽기엔 너무도 귀한 꿀팁!)

?각종 대기업 시험이나 국가 기관의 공채 시스템에 대해 샅샅이 분석한 결과를 알고 싶은 분.(합격 경향, 한계점)

?문단 내의 시스템에 대해 관심이 많은 독자



#장강명작가#당선합격계급#독서#일상#책책책#장강명#독서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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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논
폴 하딩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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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는 아이가 세 명이 있다. 4살짜리 아들과 9개월 된 쌍둥이 딸 둘.

아이가 생기고 나서 뉴스에 연일 보도되는 아동학대 사건들, 혹은 아이들과 관련된

안타까운 의료사고들,어린이집에서 일어나는 아동 사고들에 관련된 기사를 정면으로

마주하는 일이 너무 두려웠다. TV만 틀면 이영학, 조두순, 17살 여고생 두 명이 공모하여

한 명은 아이를 죽이고, 다른 한 명은 신체의 일부를 달라고 요구하여 보관하다가

제멋대로 처리했다는 둥 정말 끊임없이 연일 아동과 관련된 끔찍한 사건, 사고들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면 마치 내 아이가 그런 일을 겪은 듯한 공포감이 내게 밀려와

나는 그 사건들의 실체조차도 제대로 알고 싶지 않은 기분이었다.

그런데 유독 요즘 한국문학에서도 아이를 잃은 부재를 그린 소설들이 많이 출간되지

않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김영하 작가의 [오직 두 사람], 김애란 작가의 [바깥은 여름].

그 소설을 읽는 내 표정이 얼마나 어두웠던지 신랑은 내게 오죽하면 무슨 일 있느냐고

물어보았고, 나는 이 단편소설의 내용이 아이를 잃은 부모의 상실에 대한 내용인데

너무 절망적이고 꼭 내가 겪은 일 같아 기분이 좀 찜찜하다고 이야기를 하자

신랑은 내게 "제발 그런 것 좀 읽지 마라~ 기분풀려고 책 읽는건데 더 슬퍼지면 뭐하러

읽니."라는 핀잔을 주었다. 사실 두 작가님의 [입동], [아이를 찾습니다.]를 읽고 난 후

내가 좀 감정적인 부분이 있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많이 우울했다.

단지 소설인데 불구하고 왜이리 기분이 찜찜하지 싶었는데 지금 이 [에논]을 읽고

난 후 나는 그 이유를 깨달았다. 단편소설이라 슬픔에 빠져들게만 했지, 그 슬픔을

오랫동안 느껴서 절정에 이르게 한 다음 슬픔에서 건져내주는 과정이 빠져있었다.

그냥 나를 물가로 데려가 뒤에서 풍덩 빠뜨려 물에 젖은 생쥐꼴로 만들어 놓고,

그 뒤에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주고, 옷을 햇볕에 말려주는 그런 과정은 "쏙" 빠졌던

거다. 처음 당근님의 이색리뷰 소개글에 이 [에논]에 대한 간략한 소개글을 읽었을 때

이 소설을 내가 감당할 수나 있을지 심히 걱정이 됐다. "상실, 슬픔, 절망으로 빛나는 레퀴엠"

이 문장이 아름답게 느꼈으나 소설 속에 빠져드는 일이 두려웠다. 나는 겁이 많은 독자이기에.

그때 문득 책장 안에 박준 시인님의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이라는

책이 눈에 들어왔다. 그건 바로 이 책을 얼른 펴들고 슬픔에 푹 빠져보라는 어떤 게시와

같이 느껴졌다. 그제서야 조금 용기가 생겼다. 박준 시인님이 내게 "읽어도 괜찮을 거야..."

하고 조근조근 다정하게 말을 걸어주는 것 같다는 환상.


비교적 담담하고 사실을 나열하는 건조한 문체로 이 소설은 이야기를 시작한다.


*7page

[우리 집안 남자들은 대부분 아내를 과부로 만들고 자식들을 고아로 만든다. 나는 예외다.

  내 외동딸 케이트는 일 년 전 9월의 어느 오후 자전거를 타고 호숫가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차에 치여 죽었다. 케이트는 열 세 살이었다...]



그렇기에 주인공 찰리가 이미 딸 케이트를 잃은 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시점부터

전개가 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예상을 빗나갔다. 찰리는 케이트를 잃은 후 자기 감정을

절제하려고 노력하는 부인 수전과는 달리 슬픔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정신벽적인 증상

과 더불어 각종 환각과 약물, 신체적 고통을 겪는다. 비교적 이성적인 모습을 보이지 못하는

찰리의 심정을 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 어떤 부모가 먼저 자식을 떠나보내고 정상적인 삶을

이어나갈 수 있단 말인가.


*20page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내가 말했다.

  "그래도 해야 돼. 찰리" 수전이 말했다. 아내는 내 방으로 들어와 내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녀는 울고 있었다. 수전은 내 머리를 손가락으로 빗어넘겼다.

   "전부 우리가 해야만 해."

   "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아, 수. 하고 싶은데, 내 몸조차 움직여지질 않아."]



나는 사람이 겪을 수 있는 극한의 고통은 육체적 고통보다 정신적 고통에 무게가

더한다고 믿는 편이다. 그 심적 고통 중에 최상위에 속하는 것이 자식의 죽음, 그 다음이

배우자의 죽음이라 한다. 오죽하면 이런 말도 있지 않나.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어야

한다."라고.

 

 언젠가 KBS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 "한 백년 살아보니..."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방송에 출연한 99세 조동환 할아버지의 인간극장을 아주 재미있고, 또 인상 깊게

시청한 적이 있다. 조동환 할아버지는 한 백년을 살았어도 아직 인생이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말씀하셨다. 할아버님은 7명의 자녀를 낳아준 첫 부인을 병환으로 먼저

세상을 떠나보내고, 그 뒤를 이은 두 번째 부인도 8년 전에 먼저 세상을 떠나보냈다.

그리고 그의 형제들도 하나 둘 먼저 세상을 떠났고, 무엇보다 장남 내외가 할아버님

보다 일찍이 세상을 떠났다고 하셨다. 유독 장남 내외가 먼저 세상을 떠났다고 말씀

하시는 할아버님의 옆모습에서 그 아픔의 세월이 한참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아물지 않은 상처의 틈이 보이는 것 같았다.


*141page

[케이트의 죽음에 어떤 심오한 선함이나 축복의 의미가 있다는 생각은 상상 속에서는

품을 수 있었고 심지어 그것의 진실성을 받아들일 수도 있었지만, 실제로는 단 한 번도

그렇게 느낀 적이 없었다. 창조에 내가 범접할 수 없는 대단히 큰 의미가 있다고 해서 내

슬픔이 지워지는 것은 아님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142page

[나는 케이트의 죽음 이후 계속해서 세상이 끝난 것처럼 느끼는 나 자신이 당황스러웠다.



비록 자식이 나보다 먼저 죽고 오랜 세월이 흐른들 그 아픔이 아물 수 있으랴. 그냥 딱지가

지고 그 위에 계속 덕갱이가 져서 굳은 살로 남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래서 마음의 상처에

조금이나마 둔감해질 수 있다면 그나마 상처가 치유됐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찰리에게 있어 케이트는 케이트 그 자체의 존재만으로도 찰리의 주변을 빛내주었지만

케이트는 찰리 주변의 사람들과 찰리를 이어주는 어떤 "끈", "가교" 같은 존재였다.

그것은 케이트가 아직 수전의 배 속에서 아주 작은 생명체였던 태아 시절, 또 갓 태어난

아기였던 시절, 유년기 시절을 거쳐 케이트가 불의의 사고로 죽은 이후 역시 찰리의

어린시절 추억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할아버지에 대한 추억까지 소환했다.

 찰리는 비록 미쳐가는 중이었지만, 어떻게 보면 케이트의 죽음으로 인해 다시 한번

어린시절의 할아버지와 조우를 한 셈이다.


*40page

["수전" 잠시 후에 내가 말했다. "우리 아이를 어서 빨리 만나고 싶어." 나는 임부복 블라우스

위로 그녀의 배를 만졌다. "거기 안에 누구니." 내가 물었다. "난 네 아빠야." 나와 엄마는

어서 빨리 너를 만나서 네가 누군지 보고 어떤 아이인지 알고 싶단다." 수전이 자기 배에

놓인 내 손을 가져다 입을 맞췄다.


41page

[바로 그 순간 그것은 축복처럼, 사랑 그 자체처럼 느껴졌고, 비록 한 쪽으로 조금 치우친

사랑이어도 그것으로 충분했다.



*43page

[케이트의 존재로 인해 수전은 이 세상에 온전하게 그리고 전적으로 발을 붙이게 되었다.

이전에 수전과 나를 잇던 끊어질 듯 가느다란 끈은 케이트가 태어나자 더이상 쓸모가

없어졌다. 이전에 우리는 서로에게서 서서히 멀어지고 있었고, 나는 피할 수 없는 슬픔이

점점 닥쳐올 때 느낄 법한 우울감에 빠져 그 과정을 곱씹어보곤 했다. 그러나 케이트가

생겼다는 소식을 들은 후에는 상황이 달라졌다. 케이트는 우리를 다시 하나로 묶어주었다.

아니 사실은, 우리 각자가 따로 케이트와 단단히 묶여 있었기 때문에, 우리의 하나뿐인

소중한 딸을 통해 수전과 나도 한데 묶인 것이었고,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좋았다. 결국

우리는 서로를 향한 진정한 사랑 같은 걸 느끼게 되었다. 아니면, 나는 수전에게 그런 사랑을

느꼈고 그녀는 내게 깊은 애정을 품게 된 것이리라.



그러니 딸은 가버리고, 우리 둘만 남은 집에서 슬픔이 갑작스럽게 내리는 수많은 명령,

그중 단 하나만 닥친다 해도 우리를 서로의 주변을 맴도는 부실한 궤도 밖으로 밀어내버릴

만한 그런 명령들을 감당하려고 애쓴다는 것은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나는 사실 이 부분에서 케이트를 베재한 찰리와 수전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볼 수밖에

없었다. 소설의 초반부에서부터 이미 수전이 찰리의 곁을 영원히 떠남을 예고했었던 것

만큼, 왜 수전은 찰리의 곁에 조금 더 오래 머무르지 않고 마치 현실에서 도피하듯

친정 식구들 곁으로 급히 떠나간 걸까. 수전에게 있어 찰리는, 또 찰리에게 있어 수전은

과연 어떤 의미이고, 둘의 부부관계는 어떠했을까. 왜 그들은 차라리 치고박고 다투지

않고 서로에게 조심스럽기만 하고, 예의를 지키는 타인에 머물러 있는 건지 궁금했지만

수전은 더이상 찰리 곁에 머물러 있지 않으므로 그녀의 속내를 들여다 볼 기회가 없었다는

점이 사실 아쉬운 부분이었다. 어쩌면 찰리와 수전은 케이트를 잃은 슬픔을 치유하는

방법이 서로 달랐을지 모른다. 찰리는 철저히 자신의 슬픔 속으로 침잠해서 자기 자신을

파멸의 끝까지 몰고 가 절벽 끝까지 다다른 반면, 수전은 찰리에 비해 비교적 슬픔을 억누르고

현실에 적응해보려는 노력을 함으로써 슬픔과 타협해 간다. 단, 수전은 찰리가 망가져

가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는 것이 너무 두렵지 않았을까. 가까스로 슬픔과 절망의 감정을

추스른 자기 자신과 육체를 찰리가 자제력을 잃고 휘청거리는 모습을 목도함으로써

마음 속에 있는 무언가가 와르르 부서져 버릴까봐 일부러 외면하고 친정 식구들의 곁으로

떠나지 않았을까 싶다. 사실 소설을 다 읽은 지금도 수전의 행동이 내겐 여전히 아이러니로

남아있다. 그러나 같은 엄마로써 느낄 수 있다. 결단코 수전이 찰리에 비해 비교적 이성

적인 방법으로 슬픔을 헤쳐나가려는 마음가짐을 가졌다고 해서 케이트를 잃은 슬픔의

양이 가볍진 않을 거라는 것을. 수전의 상실감을 상상해 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마음 속이

먹먹해졌다.

 

 

[걱정인형을 산 이유 : 내 마음 속의 작은 절망과 상실감조차도 사라지거라~!!]


찰리는 케이트를 잃은 슬픔과 고통을 대부분 약물에 의존한다. 그럼으로서 그는 환각과

몽상 속에서 지난 세월을 거슬러 반추하고, 또 케이트는 물론 할아버지와 함께 했던

추억들을 떠올린다. 케이트와 할아버지를 떠올리는 일에 있어 이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에논"의 구석구석을 탐사하는 일 또한 소설을 감상하는 큰 묘미라고 할 수 있다.

에논은 상당히 아름답고 풍광이 뛰어난 공간이다. 찰리의 유년시절 아버지가 없던 찰리에게

할아버지와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던 놀이터이기도 하고, 또 케이트와 수많은 아름다운

추억을 공유한 공간이다. 그러나 그가 딸을 잃은 후 찰리의 눈에 비친 에논의 풍광은

더이상 아릅답지만은 않다. 각종 유령과 악몽들 축축한 습지만이 찰리의 주변을 에워싸고

있고, 아늑했던 집은 더이상 포근하고 따뜻한 공간이 아니다, 마치 찰리의 마음 속 상태를

암시하는 것 같은 기괴한 풍경들. 이런 찰리가 과연 슬픔과 절망 속에서 헤어나올 수나

있을지, 그의 몽상과 환각, 광기 어린 행동들이 언제쯤 제동을 걸게 될지 나는 몹시

궁금했다. 설마 한 인간이 절망의 나락으로 빠져들어 더 이상 헤어나오지 못한 상태로

끝맺음이 나는 건 아닌지,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우리 삶에서 어떤 반향을

일으키는 일들이 언제나 큰 사건, 사고가 아닌 것도 적지 않다.

 찰리는 극도로 미쳐가던 중 이십 년 전쯤 할아버지와 함께 시계를 수리하기 위해 찾아갔던

헤일 부인의 집에서 보았던 오러리를 다시 한번 보고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힌다. 이미 찰리는

자기 자신을 통제하고 절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기에 망설이지도 않고 헤일 부인의

집에 무단침입을 하여 오러리를 찾아보기로 결정하였으나 이내 헤일 부인과 맞닥뜨리게

된다. 나의 예상과 달리 헤일 부인은 꾸밈없이 솔직한 말을 찰리에게 건넨다.


*309page

["괜찮아요, 크로스비 씨. 하지만 지금 그 슬픔은 이기적이에요. 우울한 나날을 만들어내는 건 크로스비 씨 본인이에요. 자꾸만 이상한 불을 피워 딸을 태우고 있어요. 제 생각엔 그런 사랑스러운 자식이 있었다는 축복에 감사해야 할 것 같은데 말이에요. 도가 지나쳐요."



 때론 따듯한 위안보다 직설적인 충고의 말에 정신이 번쩍 뜨일 때도 있다. 아마 헤일 부인으로부터 냉정하리만치 날카로운 충고를 들은 찰리의 심정은 어땠을까. 찰리가 슬퍼할 때

딸을 잃은 찰리의 심정을 이해한다는 듯 안타까운 시선을 보낸 사람들은 많았지만 이토록

정신을 바싹 차릴 정도의 차가운 말로 찰리의 상태를 본인이 직시할 수 있게 한 충고는 없었

을 것이다. 찰리는 헤일 부인의 위엄에 놀라기도 하고, 또 자극을 받기도 하여 그 집을 빠져

나오게 되고, 에논 호수로 걸어들어가 빠져죽기로 결심하고 이를 실행에 옮기기에 이른다.


 결국 이와 같은 일련의 사건들이 찰리가 미약하게나마 다시 삶을 살아갈 희망을 갖게 한 것

같다. 찰리는 칠흙같은 어둠 속에서 한 가닥의 빛줄기를 잡고 있는 것처럼 다시 삶을 살아갈

이유를 스스로 발견하게 된다. 찰리를 죽인 것도 케이트이지만, 결국 절망과 상실의 늪에서

그를 구원한 것 또한 케이트이다.


*143page

[그렇긴 하지만...케이트가 아예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내 슬픔은 더욱 크지 않았을까?

그렇지 않았을까? 내 딸의 짧고도 행복했던 삶이 내 삶의 가장 큰 기쁨이었던 건 아닐까?

그 십삼년의 기쁨이. 비록 지금은 슬픔으로 둘러싸여 있지만 그로 인해 훼손되지는 않은

나름의 영역에 있는 것은 아닐까? 그것이 내가 스스로에게 했던 말이다. 그 나날들의

기쁨에는 그대로의 완전함이 있었고 케이트는 그 안에 존재했다.



*315page

[하지만 케이트가 내 삶에 기쁨을 주었다. 나는 그 아이를 전적으로 사랑했고, 내가 그 아이를 사랑하는 동안 세상은 사랑이었다.



*344page

[나는 하루를 감정가의 눈으로 바라본다. 때로 나는 앉아서 눈물을 흘린다. 때로 나는 말없이 앉아 설명할 수 없는 종류의 가슴 아픈 기쁨을 느낀다.




그리고 마침내 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 문단을 읽었을 때 나 또한 슬픔에서 조금은 해방될

수 있었다.


*345page

[그리고 날이면 날마다, 어딜 가나, 언제나, 네가 너무도 보고 싶다고. 너무도 사랑한다고,

그리고 이건 모두 꿈이라고, 꿈에서는 모두 그런 식이라는 걸 너도 알 거라고. 그리고 단 한

순간도 너를 내 마음속에서 지우려 한 적이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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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스터머
이종산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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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어떤 존재가 될지 스스로 선택한 사람"


이 문구가 나를 확 사로잡았다. 자기 확신을 가진 사람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나는 그 사람의 내부를 탐구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자연스레 나의 관심은

[커스터머]의 이종산 작가에 대한 관심으로 발전했다. 이종산 작가의 전작들을

읽어보지 않은 나로서는 작가님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검색창에 이종산

작가님을 쳐서 검색해보니 정말 앳된 모습의 작가님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상당한 동안이시네... 라고 생각하고 스크롤바를 내려서 보니 최근 [커스터머]

를 출간하면서 가진 인터뷰가 눈에 띄었고, 같이 게재된 작가님의 최근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공식 프로필 사진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무엇보다 강렬한

눈매와 눈화장이 인상 깊었다. 나는 작가님께서 이 소설을 쓰시면서 주인공과

동일시하기 위해 커스텀을 하신 건 아닌가 하고 조금 무리한 농담 같은 상상을

해보았다. 소설을 읽기에 앞서 작가님에 대한 정보를 먼저 검색해 보는 나의

독서습관은 다소 기이할지 모르지만 이만큼 모든 게 만족스러웠던 적도 없다.

그건 바로 모든 의미에서. 그리고 이 책을 다 읽은 지금도. 그만큼 나의 모든

기대를 충족시켜 주었다는 뜻이다.

 일반적인 현실에 사는 우리가 "커스텀"이라는 단어를 간혹 접해 보았을지 모른다.

내가 경험한 커스텀은 고등학교 시절 밋밋한 흰색 캔버스 천 재질의 운동화에

개성있는 그림을 그려 오직 하나뿐인 나의 운동화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것이 내가

경험한 커스텀이었는데, 대체 이 작가님은 커스텀을 가지고 어떤 이야기를 풀어

나갈지 너무 흥미로웠다.

 먼저 이 [커스터머]의 소설 속 세계에서의 커스텀의 사전적 정의와 커스터머가

의미하는 바를 콕 ! 짚고 넘어가면 비로소 커스터머의 세계속으로 입문할 준비가

된 셈이다.


*26page

[커스터머는 가장 적극적으로 커스텀을 즐기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아름다움에 대한 일반적인 기준을 넘어서는 커스텀을 한다.

"커스터머는 직업이 아니라 정체성과 관련된 것이다."]


*29page

[커스텀이 신체의 일부를 바꾸는 것이라면 커스터머는 신체를 바꿔서 다른 존재가 된 사람이다. "커스텀을 한 사람"과 "커스터머"는 다르다. 누군가는 그 차이를 미묘하다고 하겠지만 나에게는 아니었다. 둘은 완전히 다른 의미이다. 자신이 어떤 존재가 될지 스스로 선택한 사람. 그게 커스터머다.]


*48page

[커스텀은 신체는 물론 신체에서 나는 향기까지 커스텀 할 수 있다.]

[더티(용어의 뜻) : 몸 전체나 원하는 부위에서 특정한 냄새가 나게 해준다.]


 주인공 수니는 커스터머가 되기를 갈망하는 소녀이고 모래시(모래구역) 의

구설 지역에 살고있다. 모래시는 지역명에서 알 수 있듯이 온통 모래 사막, 먼지로

뒤덮인 황량한 도시인데, 이 도시에 사는 사람들을 "웜스"라고 지칭한다. 웜스는

흔히 현실 세계에서 우리가 백인종, 흑인종, 황인종이라고 인종을 구분짓는 것과

비슷한 개념이기도 하고, 또 수니가 살고 있는 이 사회에서 "웜스"의 존재는 일종의

소수민족의 개념에 속한다.


*22page

[나는 웜스다. 웜스는 사회에서 가장 낮은 쪽에 있는 사람들을 부르는 말이다. 사회의 가장 아래층.]


*27page

[아빠는 "공부를 잘해야 웜스에서 벗어날 수 있다."라고 자주 말했다.]


인종 간의 갈등, 혹은 인도의 계급 사회가 생각나게 하는 부분이었다. 주인공 수니는

이 모래시에 사는 것 자체를 아주 지겨워한다. 끝없이 펼쳐진 모래 더미, 공기를

에워싼 뿌연 먼지 속에서 한 치 앞, 미래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일까. 그러나 결국

그녀는 고등학교 배정을 태양시에 있는 시드 중앙 통합 고등학교로 배정받게 된다.

이곳에서 수니는 구설을(모래시) 떠나 학교 기숙사에서 생활을 하게 되고 같은 방의

룸메이트로 "안"과 만나게 된다. 안의 육체는 반은 여자이고, 반은 남자인 중성인

이다. 안 또한 커스터머이다. 첫 만남에서부터 이미 수니는 안에게 강렬하게 매료된다.


*166page

[사랑에는 두 가지 방향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한 사람을 보고 그가 누구인지 모른 채 사랑에 빠질 수도 있고, 어떤 한 사람을 만나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된 후에 비로소 사랑에 빠질 수 있다.]


 수니는 전자에 속한다. 처음 봤을 때부터 강렬하게 이끄는 자기장의 힘처럼 안에게

이끌린다. 그러나 수니 또한 여타의 사람들처럼 일종의 선입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이다. 선입견은 한 사람을 제대로 들여다보게 해 주는 기회 자체를 박탈한다.

나 또한 선입견이 존재하는 사람이지만 되도록 내가 직접 보고 경험한 바에 의해

사람을 알아가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수니는 안이 비취 구역에서 왔다는 사실을 알고 혐오감을 내비친다. (수니가 비취

구역 사람들을 혐오하는 이유는 직접 "커스터머"를 읽어보시면 알 수 있다. 이 또한

생각할 거리가 많은 주제이다.) 안 또한 자신에 대한 수니의 편견을 깨닫고 애써

무리해서 다가가지 않으려 하지만 안이 비취 구역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안에 대한

개인적인 이끌림을 멈출 수 없다. 여전히 수니는 비취구역 사람들에 대한 좋지 않은

편견을 마음 한 구석에 간직한 채 안에 대한 마음도 함께 간직한다.

 이 소설이 인상 깊었던 부분 중 하나는 시드 중앙 통합 고등학교에 다니기 위해 각 구역 모래시, 비취시, 또 비취시의 동굴구역, 시드시, 태양시에서 배정받아 온 각 학생의 무리들이 서로 다른 구역에서 온 학생들 무리와 조화롭게 섞이거나 어울리지 않고 갈등, 분열, 오해를 경험하고 다투는 사건들이 비일비재 하다는 것이다. 비록 갓

고등학생이 된 아이들에 불과하지만 이 아이들의 모습에서 투영되는 어른들의

심오한 세계를 엿볼 수 있다. 우리는 자신과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다. 동시에

우리는 타인에 대해 완벽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자신만의 잣대로 타인을 파악하고

평가한다. 결국 이런 편견과 선입견은 여러 의미의 유리장벽을 존재하게 한다.

 이 소설 속에서 각 인물들간의 작은 사건, 사고들 에피소드들은 우리 현실 사회에

산재해 있는 여러 이슈들을 떠올리게 한다. 장르는 "판타지 로맨스"라고 하나 읽는

내내 계속 내가 살고 있는 세상 속의 여러 문제점들, 부각되는 이슈들과 결부시켜

생각해 볼 수 있게 한다. 사실 커스터머에 대해 이 소설 속에서도 여러 찬, 반 의견

들이 존재한다. 나는 이 부분에서 무분별한 유전자변형의 행태(가령 난자은행, 검증

되지 않은 제대혈 보관 문제-차병원 일가가 자신들의 미용 목적으로 보관된 제대혈

세포들을 정상적 절차를 거쳐 이용하지 않고 사용한 점), 과한 성형의 부작용들에

대한 문제들을 떠올렸으며, 이 커스터머 소설 속에서의 "돌연변이"에 대해 언급되

는 부분에서 우리 현실 사회에서 선천적 장애를 갖고 태어난 이들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해 떠올리게 됐다.


*171page

[내가 보기에 다른 몸으로 사는 것을 선택했다는 점에서는 돌연변이나 커스터머가 다르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돌연변이로 태어나서 돌연변이를 없애지 않고 사는 것과 돌연변이로 태어나지 않았지만 자기 몸을 바꿔서 돌연변이로 살아가겠다는 것은 차이가 있다. 그 차이때문에 돌연변이 커뮤니티와 커스터머 커뮤니티 간에 충돌이 일어나기도 한다.]

 

 주인공 수니 또한 후천적 돌연변이에 속한다. 아이러니 하게도 후천적으로 자신의

외모를 변형시킨 커스터머는 커스터머의 세계 속에서 비교적 환대받는 반면, 선천적

돌연변이로 신체의 변형이 있는 이들은 어떤 무리에도 속하지 못하고 배제를 당한다.

결국 커스터머의 찬, 반 의견은 여러 갈래로 나뉘어지고, 또 여전히 부정적 시선도

존재한다. 그런데 커스텀이 대중화 되면서 소설 속 세계에서 휠체어를 탄 신체적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보기 힘들어졌다.


*71page

[웜스 구역에서도 휠체어를 탄 사람은 보기 힘들었다. 신체적 장애를 고치는 커스텀 기술이 충분히 발전했기 때문이다. 사고로 다리가 완전히 날아가도 상처만 회복되면 새 다리를 달 수 있었다. 외상으로 생긴 장애를 그대로 두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정말 가난한 사람이 아니라면 말이다.]


 나는 사실 이 부분을 굉장히 인상 깊게 읽었다. 이 부분을 커스텀이 대중화됨으로써

발생되는 이익이라고 볼 수 있을까. 후천적으로 불의의 사고를 당해서 하반신이 마

비된 사람들이 더이상은 휠체어를 타고 다니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마비된 하반

신을 커스텀 한다면 휠체어라는 장비에 평생을 의지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다는

것. 즉, 장애를 선택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른 것이다.

 그리고 유전자 변형을 통해 선천적으로 타고난 신체의 한계까지 극복할 수 있다는

것. 나는 소설이지만 진짜 이런 세상이 도래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인간이 도전할 수 있는 영역은 대체 어디까지인 건가 생각하게 되었다.

 여러 시사하는 바가 큰 소설이지만 내가 역시 소설을 읽는 제일 큰 이유 중 하나는

어느 소설에나 "사랑" 이야기는 대부분 빠지지 않고 등장하기 때문이다. 요즘 퀴어

소설이 대세인지 한국문학에서도 여성 간의 사랑을 다루는 소설들이 많이 출간되는

편이라고 생각한다. "커스터머" 역시 안과 수니의 티격태격 하는 사랑 이야기가 아주

흥미진진한데, 사실 안과 수니가 동성간의 사랑이라고 볼 수 있을지 조금 애매하다.

왜냐하면 엄밀히 따지면 안은 여성성, 남성성 두 가지를 동시에 갖고 있는 중성인이며, 또 신체적 구조 또한 상반신은 여자의 가슴을, 하반신은 남성의 성기를 가진 육체를

갖고 있다. 수니는 중성인인 안을 사랑하고 있고, 안 또한 수니를 사랑한다. 그들의

사랑은 여느 연인과 다르지 않다. 서로 애태우고, 싸우기도 하고 다시 사랑을 속삭

이며 꽁냥꽁냥 데이트를 한다. 그리고 둘이 가지고 있는 신체적 조건이 다르듯

안과 수니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 다름을 쿨하게 인정한다. 나는 이 부분이

매우 마음에 들었다. 언제나 우리는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려 들지 않고, 이해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갈등을 빚는다고 생각한다. 내가 아닌 타인을 완전히 이해하는 일이

과연 가능하기나 할까. 차라리 다름을 받아들이는 일이 더 빠를 것이다.


*342page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나는 사랑에 빠지면 순식간에 상대를 이해하게 될 줄 알았다. 하지만 그런 마법은 없었다. 사랑은 포기하지 않고 노력할 힘을 준다. 그뿐이다. 안과 내가 둘이 아니라 하나인 것처럼, 쪼개졌던 두 개의 거울이 다시 붙여진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지만 그건 순간적인 감정이다.]


*343page

[안과 나는 완전히 다른 두 존재, 타인이다. 나는 여전히 안을 알고 싶다.]


*347page

[싸우는 것도 괜찮다. 싸움은 우리를 깨뜨리는 게 아니라 견고하게 만든다. 실망과 이해를 반복하면서 안과 나의 관계는 조금씩 단단해진다.]


 수니가 안을 잘 모르고 알아가려고 노력하고, 또 수니는 자신의 기원에 대해서도

잘 몰랐기 때문에 자신에 대해 알아간다. 수니는 가장 가까이 존재한 부모님에 대해

서조차도 알아가는 중이다. 그들의 신체적 거리는 가까웠지만 실상은 "모르는 사람들"

에 불과했다. 또 태양시, 시드시, 비취시, 모래시에서 온 각 학생들의 무리조차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세상이다.


*161page

["네가 멀 안다고 그런 말을 해? 너한테는 여기 온 게 기회겠지만 우리한테는 아니야.우리한테는 여기 있는 게 그냥 시간 낭비라고. 우리가 여기서 느끼는 초조한 기분을 네가 알아?"

 나는 내 어깨를 누르고 있는 시아 그라시아스의 손을 뿌리치고 그 동네에서 나왔다.

뒤에서 시아 그라시아스가 욕하는 소리가 들렸다.

-비취들이 느끼는 초조한 기분을 아느냐고?

그러는 너는 웜스들이 느끼는 기분에 대해 뭘 아는데.]


누군가를 알아간다는 건 한 세계를 여행하는 일과 같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결코

혼자 살아갈 수 없고 더불어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타인을 알아가야 한다.

타인을 알아가는 과정 속에 내가 나를 알아가는 길이 존재할 것이라 믿는다.


*342page

[나는 달라 보이는 나를 보며 생각한다. "나는 웜스야. 그게 내 출발선이야!" 내가 어디서 출발했는지 잊고 싶지 않다. 나는 점점 더 복잡한 존재가 되고 있다.

길을 잃지 않으려면 내가 출발한 곳이 어디였는지 가끔 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어쩌면 수니가 꿈꾸는 세상은 이 세상에 없는 유토피아가 아닐까 싶다.


*232page

[그 세계 속에서는 모두가 다른 몸을 가지고 있다. 다른 몸을 가진 사람들이 마음껏 먹고 마신다. 그 세계에서는 누가 누구를 사랑하든지 아무도 비난하지 않는다.남자든 여자든 성이 여러 개거나 심지어 성이 없어도 사랑하거나 사랑받을 수 있다.나는 그 세계 속에서 자유롭다. 그 세계 속에서 나는 뭐든지 될 수 있고 뭐든지 할 수 있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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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논
폴 하딩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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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는 아이가 세 명이 있다. 4살짜리 아들과 9개월 된 쌍둥이 딸 둘.

아이가 생기고 나서 뉴스에 연일 보도되는 아동학대 사건들, 혹은 아이들과 관련된

안타까운 의료사고들,어린이집에서 일어나는 아동 사고들에 관련된 기사를 정면으로

마주하는 일이 너무 두려웠다. TV만 틀면 이영학, 조두순, 17살 여고생 두 명이 공모하여

한 명은 아이를 죽이고, 다른 한 명은 신체의 일부를 달라고 요구하여 보관하다가

제멋대로 처리했다는 둥 정말 끊임없이 연일 아동과 관련된 끔찍한 사건, 사고들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면 마치 내 아이가 그런 일을 겪은 듯한 공포감이 내게 밀려와

나는 그 사건들의 실체조차도 제대로 알고 싶지 않은 기분이었다.

그런데 유독 요즘 한국문학에서도 아이를 잃은 부재를 그린 소설들이 많이 출간되지

않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김영하 작가의 [오직 두 사람], 김애란 작가의 [바깥은 여름].

그 소설을 읽는 내 표정이 얼마나 어두웠던지 신랑은 내게 오죽하면 무슨 일 있느냐고

물어보았고, 나는 이 단편소설의 내용이 아이를 잃은 부모의 상실에 대한 내용인데

너무 절망적이고 꼭 내가 겪은 일 같아 기분이 좀 찜찜하다고 이야기를 하자

신랑은 내게 "제발 그런 것 좀 읽지 마라~ 기분풀려고 책 읽는건데 더 슬퍼지면 뭐하러

읽니."라는 핀잔을 주었다. 사실 두 작가님의 [입동], [아이를 찾습니다.]를 읽고 난 후

내가 좀 감정적인 부분이 있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많이 우울했다.

단지 소설인데 불구하고 왜이리 기분이 찜찜하지 싶었는데 지금 이 [에논]을 읽고

난 후 나는 그 이유를 깨달았다. 단편소설이라 슬픔에 빠져들게만 했지, 그 슬픔을

오랫동안 느껴서 절정에 이르게 한 다음 슬픔에서 건져내주는 과정이 빠져있었다.

그냥 나를 물가로 데려가 뒤에서 풍덩 빠뜨려 물에 젖은 생쥐꼴로 만들어 놓고,

그 뒤에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주고, 옷을 햇볕에 말려주는 그런 과정은 "쏙" 빠졌던

거다. 처음 당근님의 이색리뷰 소개글에 이 [에논]에 대한 간략한 소개글을 읽었을 때

이 소설을 내가 감당할 수나 있을지 심히 걱정이 됐다. "상실, 슬픔, 절망으로 빛나는 레퀴엠"

이 문장이 아름답게 느꼈으나 소설 속에 빠져드는 일이 두려웠다. 나는 겁이 많은 독자이기에.

그때 문득 책장 안에 박준 시인님의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이라는

책이 눈에 들어왔다. 그건 바로 이 책을 얼른 펴들고 슬픔에 푹 빠져보라는 어떤 게시와

같이 느껴졌다. 그제서야 조금 용기가 생겼다. 박준 시인님이 내게 "읽어도 괜찮을 거야..."

하고 조근조근 다정하게 말을 걸어주는 것 같다는 환상.


비교적 담담하고 사실을 나열하는 건조한 문체로 이 소설은 이야기를 시작한다.


*7page

[우리 집안 남자들은 대부분 아내를 과부로 만들고 자식들을 고아로 만든다. 나는 예외다.

  내 외동딸 케이트는 일 년 전 9월의 어느 오후 자전거를 타고 호숫가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차에 치여 죽었다. 케이트는 열 세 살이었다...]



그렇기에 주인공 찰리가 이미 딸 케이트를 잃은 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시점부터

전개가 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예상을 빗나갔다. 찰리는 케이트를 잃은 후 자기 감정을

절제하려고 노력하는 부인 수전과는 달리 슬픔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정신벽적인 증상

과 더불어 각종 환각과 약물, 신체적 고통을 겪는다. 비교적 이성적인 모습을 보이지 못하는

찰리의 심정을 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 어떤 부모가 먼저 자식을 떠나보내고 정상적인 삶을

이어나갈 수 있단 말인가.


*20page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내가 말했다.

  "그래도 해야 돼. 찰리" 수전이 말했다. 아내는 내 방으로 들어와 내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녀는 울고 있었다. 수전은 내 머리를 손가락으로 빗어넘겼다.

   "전부 우리가 해야만 해."

   "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아, 수. 하고 싶은데, 내 몸조차 움직여지질 않아."]



나는 사람이 겪을 수 있는 극한의 고통은 육체적 고통보다 정신적 고통에 무게가

더한다고 믿는 편이다. 그 심적 고통 중에 최상위에 속하는 것이 자식의 죽음, 그 다음이

배우자의 죽음이라 한다. 오죽하면 이런 말도 있지 않나.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어야

한다."라고.

 

 언젠가 KBS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 "한 백년 살아보니..."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방송에 출연한 99세 조동환 할아버지의 인간극장을 아주 재미있고, 또 인상 깊게

시청한 적이 있다. 조동환 할아버지는 한 백년을 살았어도 아직 인생이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말씀하셨다. 할아버님은 7명의 자녀를 낳아준 첫 부인을 병환으로 먼저

세상을 떠나보내고, 그 뒤를 이은 두 번째 부인도 8년 전에 먼저 세상을 떠나보냈다.

그리고 그의 형제들도 하나 둘 먼저 세상을 떠났고, 무엇보다 장남 내외가 할아버님

보다 일찍이 세상을 떠났다고 하셨다. 유독 장남 내외가 먼저 세상을 떠났다고 말씀

하시는 할아버님의 옆모습에서 그 아픔의 세월이 한참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아물지 않은 상처의 틈이 보이는 것 같았다.


*141page

[케이트의 죽음에 어떤 심오한 선함이나 축복의 의미가 있다는 생각은 상상 속에서는

품을 수 있었고 심지어 그것의 진실성을 받아들일 수도 있었지만, 실제로는 단 한 번도

그렇게 느낀 적이 없었다. 창조에 내가 범접할 수 없는 대단히 큰 의미가 있다고 해서 내

슬픔이 지워지는 것은 아님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142page

[나는 케이트의 죽음 이후 계속해서 세상이 끝난 것처럼 느끼는 나 자신이 당황스러웠다.



비록 자식이 나보다 먼저 죽고 오랜 세월이 흐른들 그 아픔이 아물 수 있으랴. 그냥 딱지가

지고 그 위에 계속 덕갱이가 져서 굳은 살로 남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래서 마음의 상처에

조금이나마 둔감해질 수 있다면 그나마 상처가 치유됐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찰리에게 있어 케이트는 케이트 그 자체의 존재만으로도 찰리의 주변을 빛내주었지만

케이트는 찰리 주변의 사람들과 찰리를 이어주는 어떤 "끈", "가교" 같은 존재였다.

그것은 케이트가 아직 수전의 배 속에서 아주 작은 생명체였던 태아 시절, 또 갓 태어난

아기였던 시절, 유년기 시절을 거쳐 케이트가 불의의 사고로 죽은 이후 역시 찰리의

어린시절 추억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할아버지에 대한 추억까지 소환했다.

 찰리는 비록 미쳐가는 중이었지만, 어떻게 보면 케이트의 죽음으로 인해 다시 한번

어린시절의 할아버지와 조우를 한 셈이다.


*40page

["수전" 잠시 후에 내가 말했다. "우리 아이를 어서 빨리 만나고 싶어." 나는 임부복 블라우스

위로 그녀의 배를 만졌다. "거기 안에 누구니." 내가 물었다. "난 네 아빠야." 나와 엄마는

어서 빨리 너를 만나서 네가 누군지 보고 어떤 아이인지 알고 싶단다." 수전이 자기 배에

놓인 내 손을 가져다 입을 맞췄다.


41page

[바로 그 순간 그것은 축복처럼, 사랑 그 자체처럼 느껴졌고, 비록 한 쪽으로 조금 치우친

사랑이어도 그것으로 충분했다.



*43page

[케이트의 존재로 인해 수전은 이 세상에 온전하게 그리고 전적으로 발을 붙이게 되었다.

이전에 수전과 나를 잇던 끊어질 듯 가느다란 끈은 케이트가 태어나자 더이상 쓸모가

없어졌다. 이전에 우리는 서로에게서 서서히 멀어지고 있었고, 나는 피할 수 없는 슬픔이

점점 닥쳐올 때 느낄 법한 우울감에 빠져 그 과정을 곱씹어보곤 했다. 그러나 케이트가

생겼다는 소식을 들은 후에는 상황이 달라졌다. 케이트는 우리를 다시 하나로 묶어주었다.

아니 사실은, 우리 각자가 따로 케이트와 단단히 묶여 있었기 때문에, 우리의 하나뿐인

소중한 딸을 통해 수전과 나도 한데 묶인 것이었고,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좋았다. 결국

우리는 서로를 향한 진정한 사랑 같은 걸 느끼게 되었다. 아니면, 나는 수전에게 그런 사랑을

느꼈고 그녀는 내게 깊은 애정을 품게 된 것이리라.



그러니 딸은 가버리고, 우리 둘만 남은 집에서 슬픔이 갑작스럽게 내리는 수많은 명령,

그중 단 하나만 닥친다 해도 우리를 서로의 주변을 맴도는 부실한 궤도 밖으로 밀어내버릴

만한 그런 명령들을 감당하려고 애쓴다는 것은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나는 사실 이 부분에서 케이트를 베재한 찰리와 수전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볼 수밖에

없었다. 소설의 초반부에서부터 이미 수전이 찰리의 곁을 영원히 떠남을 예고했었던 것

만큼, 왜 수전은 찰리의 곁에 조금 더 오래 머무르지 않고 마치 현실에서 도피하듯

친정 식구들 곁으로 급히 떠나간 걸까. 수전에게 있어 찰리는, 또 찰리에게 있어 수전은

과연 어떤 의미이고, 둘의 부부관계는 어떠했을까. 왜 그들은 차라리 치고박고 다투지

않고 서로에게 조심스럽기만 하고, 예의를 지키는 타인에 머물러 있는 건지 궁금했지만

수전은 더이상 찰리 곁에 머물러 있지 않으므로 그녀의 속내를 들여다 볼 기회가 없었다는

점이 사실 아쉬운 부분이었다. 어쩌면 찰리와 수전은 케이트를 잃은 슬픔을 치유하는

방법이 서로 달랐을지 모른다. 찰리는 철저히 자신의 슬픔 속으로 침잠해서 자기 자신을

파멸의 끝까지 몰고 가 절벽 끝까지 다다른 반면, 수전은 찰리에 비해 비교적 슬픔을 억누르고

현실에 적응해보려는 노력을 함으로써 슬픔과 타협해 간다. 단, 수전은 찰리가 망가져

가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는 것이 너무 두렵지 않았을까. 가까스로 슬픔과 절망의 감정을

추스른 자기 자신과 육체를 찰리가 자제력을 잃고 휘청거리는 모습을 목도함으로써

마음 속에 있는 무언가가 와르르 부서져 버릴까봐 일부러 외면하고 친정 식구들의 곁으로

떠나지 않았을까 싶다. 사실 소설을 다 읽은 지금도 수전의 행동이 내겐 여전히 아이러니로

남아있다. 그러나 같은 엄마로써 느낄 수 있다. 결단코 수전이 찰리에 비해 비교적 이성

적인 방법으로 슬픔을 헤쳐나가려는 마음가짐을 가졌다고 해서 케이트를 잃은 슬픔의

양이 가볍진 않을 거라는 것을. 수전의 상실감을 상상해 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마음 속이

먹먹해졌다.



[걱정인형을 산 이유 : 내 마음 속의 작은 절망과 상실감조차도 사라지거라~!!]


찰리는 케이트를 잃은 슬픔과 고통을 대부분 약물에 의존한다. 그럼으로서 그는 환각과

몽상 속에서 지난 세월을 거슬러 반추하고, 또 케이트는 물론 할아버지와 함께 했던

추억들을 떠올린다. 케이트와 할아버지를 떠올리는 일에 있어 이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에논"의 구석구석을 탐사하는 일 또한 소설을 감상하는 큰 묘미라고 할 수 있다.

에논은 상당히 아름답고 풍광이 뛰어난 공간이다. 찰리의 유년시절 아버지가 없던 찰리에게

할아버지와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던 놀이터이기도 하고, 또 케이트와 수많은 아름다운

추억을 공유한 공간이다. 그러나 그가 딸을 잃은 후 찰리의 눈에 비친 에논의 풍광은

더이상 아릅답지만은 않다. 각종 유령과 악몽들 축축한 습지만이 찰리의 주변을 에워싸고

있고, 아늑했던 집은 더이상 포근하고 따뜻한 공간이 아니다, 마치 찰리의 마음 속 상태를

암시하는 것 같은 기괴한 풍경들. 이런 찰리가 과연 슬픔과 절망 속에서 헤어나올 수나

있을지, 그의 몽상과 환각, 광기 어린 행동들이 언제쯤 제동을 걸게 될지 나는 몹시

궁금했다. 설마 한 인간이 절망의 나락으로 빠져들어 더 이상 헤어나오지 못한 상태로

끝맺음이 나는 건 아닌지,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우리 삶에서 어떤 반향을

일으키는 일들이 언제나 큰 사건, 사고가 아닌 것도 적지 않다.

 찰리는 극도로 미쳐가던 중 이십 년 전쯤 할아버지와 함께 시계를 수리하기 위해 찾아갔던

헤일 부인의 집에서 보았던 오러리를 다시 한번 보고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힌다. 이미 찰리는

자기 자신을 통제하고 절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기에 망설이지도 않고 헤일 부인의

집에 무단침입을 하여 오러리를 찾아보기로 결정하였으나 이내 헤일 부인과 맞닥뜨리게

된다. 나의 예상과 달리 헤일 부인은 꾸밈없이 솔직한 말을 찰리에게 건넨다.


*309page

["괜찮아요, 크로스비 씨. 하지만 지금 그 슬픔은 이기적이에요. 우울한 나날을 만들어내는 건 크로스비 씨 본인이에요. 자꾸만 이상한 불을 피워 딸을 태우고 있어요. 제 생각엔 그런 사랑스러운 자식이 있었다는 축복에 감사해야 할 것 같은데 말이에요. 도가 지나쳐요."



 때론 따듯한 위안보다 직설적인 충고의 말에 정신이 번쩍 뜨일 때도 있다. 아마 헤일 부인으로부터 냉정하리만치 날카로운 충고를 들은 찰리의 심정은 어땠을까. 찰리가 슬퍼할 때

딸을 잃은 찰리의 심정을 이해한다는 듯 안타까운 시선을 보낸 사람들은 많았지만 이토록

정신을 바싹 차릴 정도의 차가운 말로 찰리의 상태를 본인이 직시할 수 있게 한 충고는 없었

을 것이다. 찰리는 헤일 부인의 위엄에 놀라기도 하고, 또 자극을 받기도 하여 그 집을 빠져

나오게 되고, 에논 호수로 걸어들어가 빠져죽기로 결심하고 이를 실행에 옮기기에 이른다.


 결국 이와 같은 일련의 사건들이 찰리가 미약하게나마 다시 삶을 살아갈 희망을 갖게 한 것

같다. 찰리는 칠흙같은 어둠 속에서 한 가닥의 빛줄기를 잡고 있는 것처럼 다시 삶을 살아갈

이유를 스스로 발견하게 된다. 찰리를 죽인 것도 케이트이지만, 결국 절망과 상실의 늪에서

그를 구원한 것 또한 케이트이다.


*143page

[그렇긴 하지만...케이트가 아예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내 슬픔은 더욱 크지 않았을까?

그렇지 않았을까? 내 딸의 짧고도 행복했던 삶이 내 삶의 가장 큰 기쁨이었던 건 아닐까?

그 십삼년의 기쁨이. 비록 지금은 슬픔으로 둘러싸여 있지만 그로 인해 훼손되지는 않은

나름의 영역에 있는 것은 아닐까? 그것이 내가 스스로에게 했던 말이다. 그 나날들의

기쁨에는 그대로의 완전함이 있었고 케이트는 그 안에 존재했다.



*315page

[하지만 케이트가 내 삶에 기쁨을 주었다. 나는 그 아이를 전적으로 사랑했고, 내가 그 아이를 사랑하는 동안 세상은 사랑이었다.



*344page

[나는 하루를 감정가의 눈으로 바라본다. 때로 나는 앉아서 눈물을 흘린다. 때로 나는 말없이 앉아 설명할 수 없는 종류의 가슴 아픈 기쁨을 느낀다.




그리고 마침내 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 문단을 읽었을 때 나 또한 슬픔에서 조금은 해방될

수 있었다.


*345page

[그리고 날이면 날마다, 어딜 가나, 언제나, 네가 너무도 보고 싶다고. 너무도 사랑한다고,

그리고 이건 모두 꿈이라고, 꿈에서는 모두 그런 식이라는 걸 너도 알 거라고. 그리고 단 한

순간도 너를 내 마음속에서 지우려 한 적이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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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의 반격 - 2017년 제5회 제주 4.3 평화문학상 수상작
손원평 지음 / 은행나무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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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몬드-손원평 작가의 신작
[서른의 반격]을 읽고.

나는 책을 고를 때 제목의 비중을 꽤 크게 두는 편이다.

제목 또한 그 책의 일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손원평 작가는 책의 제목을 기막히게도

잘 뽑는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첫 장편소설

“아 몬 드”는 나의 최애책이다. “아 몬 드”하면 생각나는

이미지, 딱딱한 겉 껍데기 속의 고소한 풍미, 혀로 아몬

드를 굴릴 때의 꺼슬꺼슬 한 감촉이 떠올라서 읽는

재미는 물론, 왠지 맛보는 재미까지 선사할 것 같다는

생각에서 “아 몬 드”를 읽기 시작했고 박진감 넘치는

전개감과 생생한 이미지를 그려내는 생동감 넘치는

문체가 너무 인상이 깊었다. 이번 신작 “서른의 반격”

을 읽은 리뷰를 쓰기에 앞서 [아몬드]와 [서른의 반격]

을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각 사정은 결코 밝지 않고 오히려

절망적이고 암울하지만 소설 전체를 놓고 보면 어둡지

않고 유머감각이 있고, 이를 넘어서 유쾌함마저 가미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읽고 나면 뭔가 담백한 느낌이

랄까.

“서른의 반격”을 처음 받았을 때 제목이 주는 호기심에

정말 미치도록 읽고 싶었다. 이건 내 또래들의 이야기

가 아닐까 싶어서 어떤 연대기가 그려져 있을지, 나의

개인적인 스토리라고 할 수 있는 부분도 섞여있지

않을까 너무 기대가 됐다. 첫 장의 “차례”를 쭉~

훑기 시작했다. “1챕터”가 “1988년생”이었고, 타 출판

사의 책이 떠오른 것은 비단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제목이 주는 느낌도 그렇고 요즘 유행하는 페미니즘

소설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첫 챕터를 읽으면서

부터 마치 활자 안으로 미끄러지듯 쭉쭉 읽혀내려가

는 흡인력에 놀랐다. 나 역시 1980년대의 후반에

태어났고, 이 소설의 주인공인 김지혜와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이다. 김지혜가 보고 자란 것들, 그리고

당시 뉴스에 나왔던 시대적 배경들을 읽어내려가며

고개를 연신 주억거리면서 “맞아~맞아~”를 중얼거렸

다. 웃음이 나기도 하고 마치 흑백 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내가 자랐던 유년기의 시절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이 소설의 주인공

이름이 김지혜인 것도 재미있었다. 진짜 반에 김지혜

라는 이름을 가진 아이는 꼭 한 명씩 있었고, 꼭 김지

혜는 아니라 해도 성만 각기 다른 “지혜”들은 왜 그리

도 많았는지^^* 그녀들은 각자가 가진 고유의 정체

성을 “작은”, “큰”,혹은 “A”,”B”로 구분지어서 표현했

다. 그때의 “지혜”들은 지금 어디에서 어떤 일상을

살고 있을지 몹시 궁금했다.

어른들은 종종 이야기를 한다. 아니, 사실 서른이라

는 나이도 이미 충분한 어른이지만 우리 서른 즈음의

사람들보다도 더 어른인 분들은 늘 우리에게 “참 좋은

시절에 태어났고, 좋은 시대에서 살고있다.”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이야기를 하지만 정작 그 “좋은 시절”

이란 대체 어떤 시절인지 그다지 실감을 하면서 살아

오진 못했다. 주인공 김지혜의 모습은 사실 대다수

1980년 후반에 태어난 청년들의 자화상과 지독히

닮아있다. 아니, 닮아있는 수준이 아니라 그냥 우리의

일상이고 아직도 우리는 완전한 어른으로서 독립하

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김지혜를 알아갈

수록 참 눈물겹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곧 현실 속

나의 모습이었기에. 그리고 결혼 후에는 “유 팀장”

의 역할을 맡고 있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읽으니

서글픈 실소가 지어지기도 했다.

사실 1988년생은 결코 적지 않은 나이이다. 나 역시

1986년생이지만 사실 나 스스로가 진정한 어른의

삶을 살고 있다고 이야기를 할 자신은 없다. 우리는

중간에 “끼인 세대”이고, 어느 한 곳에 정착할 수 없는

유목민의 생을 살고있는 것 같다. 나의 이런 현실을

주인공 김지혜의 모습을 통해서 보자니 마치 유체이

탈을 해서 한 발짝 떨어진 곳에서 나의 지난 세월들,

또 지금의 삶을 반추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렇게 답답한 내용만 있는 소설이냐, 그건

결코 아니다. 이 소설의 제목이 “서른의 반격” 아닌가.

우리는 이 “반격”이라는 단어에 주목해야 한다.

늘 찌그러져서 살아오기에 급급했던 주인공 김지혜

의 일상에 느닷없이 괴짜 캐릭터라고 할 수 있은

미스테리한 남자 “이 규 옥”이 등장하면서 김지혜의

늘 똑같던 일상에도 조금씩 특별한 일들이 생겨난다.

규옥의 정체는 독자들에게도 영 수수께끼인데,

이 “규옥”이라는 인물이 소설의 톡톡한 감초 역할을

한다. 세상을 향해 늘 소심하게 혼자서만 중얼거리기만

했던 지혜는 규옥이라는 인물을 만나고 나서부터 조금

씩 대담하게 변해가고, 비록 아주 큰 “한 방”을 날리

지는 못하지만 소심하게나마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

하고, 또 부조리한 일들에 맞서는 부분에서는 내 속이

“뻥!!!”뚫리는 것 같았다. 나 역시 이런 일들을 겪어본

적이 있었기에 주인공 김지혜가 느끼는 감정과

상황들에 큰 공감이 갔고 동질감을 느끼면서 읽었다.

비록 나 하나 참는다면 세상이 조용하게 흘러갈지는

모르겠지만 계속되는 부당함과 상처는 고스란히

내 몫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규옥은 비록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라고 해도

이런 작은 몸부림들이 조금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

이슈화 시킴으로써 소심한 변화라도 이끌어 낼 수

있다고 믿는 인물이다.

[82page - “잘못된 걸 잘못됐다고 말하기만 해도
세상이 조금쯤은 바뀌지 않을까, 하는
생각”]

약간 정의의 사도와 같은 캐릭터라고 해야 하나.

규옥, 무인, 남은 아저씨, 지혜의 다양한 복수 활극들은

이 소설을 읽는 재미이고, 어둡기만 한 소재를 아주

유쾌하게 흘러가게 하는 윤활유 같은 역할을 한다.

어느새 나도 그들과 같이 작당 모의를 하며 사건을

벌이는 일에 동참하는 것 같았다.

이 [서른의 반격]은 모든 “N포 세대”의 이야기이자,

일상을 담은 소설이다. 나 역시 겪은 일들이고, 아직도

겪고 있는 ing형 이야기... 마냥 낙관하기에는 앞이

보이지 않는 터널을 걷고 있는 일상을 살고 있는

N포 세대들을 대변해서 톡 하고 쏘는 사이다 같은

반격을 가하는 등장인물들을 통해 조금은 뻥 뚫

리는 쾌감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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