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스피드
김봉곤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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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13page
나는 이제 누군가를 만나는 일은 완전히 그만두었으며
성적 긴장감은 망상이 아니라면 없다.
인간때문에 기쁠 일은 점점 줄어가고 그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한 지도 이미 오래.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은 쇼와를 환기하는 물건과 건물, 식물,
때때로 강렬하게 사로잡히는 이형 동질을 발견하는 일이 거의 다다.

*48page
나는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그 어느 때보다 성실해졌다.
그것은 하나도 섹시하지 않았지만, 내가 가장 멋질 때라는
건 잘 알았다.

나를 절하하는 건 얼마든 좋았지만, 내 삶을 할인하고 싶지는 않았다.

*85page
또 너한테 말리는구나.
헷갈리게 흘리는 거 여전하네.
그렇지만 밤의 맥박으로 뚜벅뚜벅.

영우가 날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을 때,
그건 오직 한 사람이 날 거부한 것이었지만
나는 세상 모든 사람으로부터 거절당한 기분이 들었다.
왜 그건 잘 구별이 되지 않을까.

*133page
내가 사랑만 하지 않으면 얻을 것은 너무 많다.
비약적으로 내 삶은 윤택해질 것이다

*163page
우린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과거에 와 있어.
우린 같은 곳에 있고, 같은 것을 보고 있고, 같이 있어.
쭉 그리워해왔잖아? 이것인지 이곳인지를. 뭔지도 모르면서.

*186page
사랑만큼 기표와 기의의 관계를 살피고, 정의하기 곤란한 단어는 없을 것이다.
무한대의 크기를 가진 그릇, 사랑.
그 어떤 말로 정의하려 해도 사랑은 충분하지 않다고
말한다. '이것도 사랑이지 않을까?'하며 스르륵 들어와서는
사랑의 뜻 역시 무한으로 넓어진다.

*187page
어쩌면 사랑은 영원히 정의되지 못한 채 부유하며 말할 수 없음,
으로 남을지도 모른다. 혹은 그것을 느꼈다, 라고
말하는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소설가는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 책 한 권을 써내며,
음악가는 선문답처럼 음악을 만들고,
누군가는 그림을 그리고,
누군가는 춤을 추며
투박해지는 것에 저항한다.

*202page
일방적인 통보는 예의가 없는 것처럼 느껴졌고, 여전한
단답형의 대답은 나를 전혀 존중하지 않는다고 여기게
만들었다. 사랑에 문맹이 있다면 그였고, 배우지 못한 게 있으면
내가 가르쳐주어야만 할 것 같았다.

*203page
그와의 사랑은 끝났고, 끝나버렸고,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나는 담담하게 받아들여야 했다.
담담하게 찾아와버리는 것에 맥이 풀렸다.

*218page
글쓰기와 사랑은 용기를 필요로 했고, 나에게 용기를 주었다.
그와의 사랑이 끝난 지금, 끝나가는 지금,
나는 반쯤 용기를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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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 노트 쏜살 문고
로제 마르탱 뒤 가르 지음, 정지영 옮김 / 민음사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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쏜살문고의 판형 사이즈와 북디자인이 마음에 들어서
집에도 몇 권 소장하고 있는데, 내가 소장 중인 쏜살문고 중에 제일 예쁜 책이다.

책은 텍스트를 읽는 기능도 있지만 손으로 잡았을 때의 감촉과
북디자인이 내 취향에 맞아떨어질 때 종이책을 읽는 일이 더 즐겁게 느껴진다.

열네 살인 사춘기 소년 다니엘과 자코. 한창 예민하고 감수성이 풍부한 시기에 둘은 회색으로 장정된 노트에 둘만의 비밀노트를 교환하는 형식으로 서로에 대한 감정과 우정, 사랑, 은밀한 고백을 주고받는다.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조차 말 못할 심적 갈등과 고민들을
두 소년은 그 시기에 품을 수 있는 애틋한 감정들로 채워나가는 편지글 형식으로 읽자니, 예전 나의 사춘기 시절이 생각나 간질간질도 하고, 공감되는 부분도 있었다.

서로에 대한 인상이나 품은 감정을 고백하는 편지 내용도 꽤 많았는데, 우정이 지나쳐 혹시 둘이 사랑하는 관계는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관계가 끈끈했다. 요즘 문학계에서 퀴어소설의 반응이 뜨거워서 그런지, 내게는 좀 그런 부분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다소 억측일지는 모르겠다. 그건 독자들의 상상력에 맡겨두길.
(바로 이 부분이 회색노트 소설을 읽는 묘미이기도 하다.)


-81page
오, 사랑하는 나의 벗이여,
너를 나에게 주신 하느님께 얼마나
감사하고 있는지 몰라. 우리가
우리 자신을 분명히 알기 위하여,
그리고 우리가 자신의 진정한 천분에
환상을 품지 않기 위하여 우린
영원토록 얼마나 서로 필요한지!

나는 너를 열렬히 사랑해.
나는 지금 오늘 아침처럼
열렬히 네 손을 잡는다.
알지? 무한한 기쁨 속에
전적으로 너의 것인 나의 온몸을
다 바쳐서!


-82page
나는 고민하고 사랑하고
희망하기 위해 태어났고,
또한 희망하고 사랑하고 고민하고
있어! 내 일생의 이야기는
단 두 줄로 요약될 수 있어.
나에게 살아가는 힘을 주는 것은
사랑. 그리고 나에게는 단 하나의
사랑이 있을 뿐인데, 그건 너야!


흥미로운 건 다니엘과 자코의 성격적 성향이 닮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둘은 정반대다. 다니엘은 진중하고 진지하고
성숙한 이미지인 반면, 자코는 다소 충동적이고 흥분을 잘하고
불같은 성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둘은 물과 기름처럼
분리되는 존재가 아닌 자연스럽게 서로의 반대 성향에
이끌린다. 따라서 둘은 융화된다.


아침 출근길, 그리고 퇴근길에 지하철 내에서 이 책을 읽다보니 마음을 다독이는 글귀들이 많아서 좋았다.
출근길과 퇴근길의 여정에 동반자였던 [회색노트]
그 문구들을 함께 공유하고 싶다.


-41page
마음 진정할 것,
마음을 굳게 먹을 것,
신뢰를 가질 것......


-65page
"버리십시오! 버린다 함은 누룩과 같습니다.
누룩이 가루를 삭이듯,
욕망을 버림은 나쁜 생각을 삭여서
'선'을 부풀어 오르게 하는 것입니다."

-66page
"주여, 제 뜻대로 이루지 마옵시고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 주옵소서."


-73page
공부하라! 희망을 가지라! 사랑하라! 독서하라!

-76page
세월은 흐르고 우리를 시들게 해. 그러나 실제로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어. 우리는 늘 우리일 뿐이야.
아무것도 변한 것은 없어.
기운이 빠지고 나이를 먹었다는 느낌 외에는.

우리는 생각을 너무 많이 해!
아무것도 돌아보지 않고,
이것저것 생각하지 않은 채
위험을 향해 뛰어드는 젊음의 의기가 부러워!


독서를 할 때 킬링타임용 책이 있다. 그냥 술술술술
흥미롭게 잘 읽히고 재미를 주는 책. [회색노트]는
잘 읽히기는 하나, 엄밀히 말하자면 킬링타임용으로
시간을 죽이기 위해 읽는 책은 아니다.
적은 분량에 비해 생각할 것이 많은 책이다.
페이지를 멈추고 잠시 생각을 하게 된다.
피와 열정으로 들끓는 두 사춘기 소년의 모험과 무모한 도전이 재미있기도 했고, 그런 모험 과정에서 다니엘이 겪은 일들이나, 이성을 바라보는 욕망에 대한 관점에 변화가 생긴 경험은 매우흥미로웠다.

어떻게 직접적으로 성적 묘사를 하지 않고도
여인과 다니엘의 만남과 성적 흥분이 오롯이
짜릿하게 느껴질 수 있는지, 그런 부분이 참 신선하게
다가왔다.

그리고, 다니엘의 어머니 퐁타냉 부인이 자신의
남편인 제롬에게 마지막 일격을 가하는 부분에선
박수라도 치고 싶었다.바람꾼 남편 제롬,
그러나 치명적으로 매력적인 남자 제롬.
퐁타냉 부인은 제롬과의 약혼시절 일기장에
제롬을 이렇게 묘사했다.

"나의 애인은 인도의 왕자처럼 아름답다."

우아하고 동양적인 매력을 뿜어내는 제롬,
그러나 그는 부인 퐁타냉의 주변 친구와 사촌여동생,
집안의 여공들까지 농락한 희대의 바람꾼이다.
때문에, 퐁타냉의 주변엔 이제 아무도 없다.
정말 막장 드라마가 따로 없다.
드라마였다면, 아마 제롬은 김치싸대기라도 맞지 않았을까 ㅎ

퐁타냉은 상당히 자기 절제감을 가지고 오랜만에 집에 들어온 제롬을 조용히 집 밖으로 내쫓는다.

퐁타냉 부인이 그간의 마음 고생과 시름에서 벗어나
다니엘, 제니와 함께 행복한 인생을 살아갔으면 좋겠다.


*다니엘, 자코 사춘기 소년들의 뜨거운 우정과 마르세유까지의 여행.

*퐁타냉 부인의 고독감과 바람꾼 남편 제롬에 대한 감정, 그리고 제롬의 여인들과 퐁타냉 부인이 만나서 나눈 대화들.

*앙투안과 자코의 다소 수줍은 형제애.
사랑스러운 여동생 제니와 다니엘의 남매애.

*다니엘이 거리에서 헤매다가 만난 여인과의 경험 등

이 소설의 흥미진진함은 무궁무진하고,
또 마음에 담아둘 만한 문구들이 많다는 것이
독서포인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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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롬 토니오
정용준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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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만큼이나 몽롱하고, 몽환적이고 신비로운 느낌이 책을 덮은 후에도

내 머리와 마음을 꽉 채우고 있는 것 같다.


배경은 포르투갈의 마데이라 섬, 뜨거운 태양빛이 작렬하는 남미의 이미지와

함께 푸른 파도도 같이 떠오른다.

고래는 바다에 사는 생물 중 내가 제일 좋아하는 생물이다.

오키나와의 츄라우미 수족관에 갔을 때 거대한 수족관 안은 또다른 시공간의

세계처럼 느껴졌다. 초대형 수족관 안을 고래상어 두 마리는 유유히 헤엄치고 있었다.

희고 넓다란 배를 드러내며 수족관 안을 미끄러져 헤엄치던 고래의 이미지가

[프롬 토니오]를 읽는 내내 생각났다.

 

 

 

 

어느 날 마데이라 해변가에 수많은 고래떼들의 죽은 사체들이 밀려온다.

'스트랜딩'이라는 용어를 이 소설을 읽으며 처음 알게 됐다.

궁금해서 네이버에 쳐보니 '해양 동물의 갑작스런 집단자살 현상' 이라고 한다.

이 스트랜딩에는 여러 가지 설이 난무하는 데, 환경 이상 징후라는 설,

고래가 바다의 길을 읽었다는 설, 혹은 어떤 중역대의 소음 전파로 인해

고래의 신경계에 혼란이 와서 스트레스를 받고 스트랜딩 현상이 일어난다는 설 등

무엇하나 명확하게 규명할 수 없는 설들이 많은데, 이런 스트랜딩에 대한 호기심이

소설을 읽는 내내 촉매제로 느껴졌다.


 이 포르투갈의 섬 마데이라 해변가에서 수십 마리의 고래 떼가 집단으로

폐사 현상이 알어나고, 이 수많은 고래의 떼죽음으로 인해 마데이라 해변가는

갑작스럽게 해양생물 학자들의 연구 근거지가 된다.


시몬은 이날도 마데이라의 해변가를 '떠돌고' 있었다.

그 역시 연구원이기는 하나, 최근 들어 발생한 고래의 스트랜딩 현상을 연구하는 해양학자는 아니다.

시몬은 미국인 화산학자로서 마데이라 섬에서 수년째 일본인 지진학자 데쓰로, 해양학자 앨런과

함께 팀을 이뤄 지각 현상을 연구 중이었다. 물론 현재 그들의 연구 성과는 답보 상태다.

시몬은 현재에 살고 있으나, 과거에 얽매인 존재.

갑작스러운 예견치 못한 사고로 같은 팀원이자 시몬의 애인, 촉망받는 해양학자였던

연인 앨런을 잃게 되었다.

그는 거의 반미치광이 상태로 마데이라의 해변가에 보트를 띄우고,

그 위에서 하염없이 바다를 헤매이며 앨런을 찾는 일에만 몰두한다.

그는 지금 제정신이 아니다.

그런 상태로 해변가를 서성이던 그가 수십 마리의 고래떼의 죽음을 목격하게 되고,

그중 제일 거대하고 육중한 흰수염고래의 입에서 토해져 나온

한 생명체와 만나게 된다.



기이하지만 운명적인 생명체와의 첫 만남. 미끌미끌하고 얇은 막에 둘러싸인

그 생명체의 정체는 외계에서 온 괴생명체 같기도 했고,

혹은 방사능에 노출되어 유전자 변형을 일으킨

이물감이 느껴지는 물고기 같다는 느낌도 받았다.


시몬은 그 알 수 없는 생명체를 룸메이트인 일본인 지진학자 데쓰로의 동의도 없이

집으로 데려오게 된다.

기이하고 이상하지만 신비롭고 아름다운 이야기는 읽는 내내 계속 나를 끌어들인다.


생명체는 하루가 다르게 외형을 바꾸어 거의 인간의 모습이 되어가고,

결국 시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데쓰로가 토니오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시몬과는 다르게 데쓰로는 토니오를 경계하고, 시몬과 데쓰로는 알 수 없는

생명체로 인해 그동안 앨런의 죽음으로 각자에게 앙금처럼 남아있던 상처를

본의 아니게 서로 들추게 된다.

 

 

시몬이 토니오와 함께 고래의 사체가 있는 해변가로 갔을 때

토니오가 몸을 구부려 고래의 영혼과 나지막이 텔레파시를 주고받고,

그들의 언어가 어떤 빛을 내뿜는 오로라처럼 연무를 이루어 허공에

번짐과 동시에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장면은 신비로운 주술의 힘을

경험하는 것 같았다.


이밖에도 토니오는 앨런이 머물고 있는 바닷속 세계에 가서

앨런의 영혼과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그 징표로 은목걸이를 시몬에게

건네주기도 한다.


시몬도 이 알 수 없는 현상 앞에 자신의 정신이 피폐해져서

드디어 돌이킬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인가 자문하지만,

그 징표인 앨런의 은목걸이를 보고선 토니오가 전해주는 앨런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프롬 토니오] 속의 신비로운 세계 유토, 토니오의 영원한 친구 거대한 고래 룸,

또다른 세계인 우토, 토니오는 시공간을 넘어서 우리 곁에서 여러 존재로서의

모습을 보여준다.


시공간을 넘나들며 살았던 토니오의 현재에도

늙는다는 일과 죽음은 피할 수 없는 것.


*253page

"우린 약속했네. 곧 다시 만나자고. 더는 육체에 매인

존재가 아닌 자유로운 영혼의 형태로 못다 한 이야기를

하자고. 죽어가는 고래들은 슬퍼하거나 비장하지 않았네.

그들에겐 죽어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지."



*276page

"우리들에게 죽음이 두려운 이유는 뭘까? 죽는 순간의 통증?

더 살 수 없다는 아쉬움? 아니야. 사랑하는 이들을 두고

혼자 떠나야 한다는 사실이지. 떠나는 자도 남겨진 자도

같은 이유로 두려워하네.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것.

새로운 기억을 만들 수 없다는 것.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야. 죽음 저 너머로 떠나는

사람은 사랑하는 이들을 가슴속에 데리고 간다네.

남겨진 자들은 반대로 죽은 자들을 떠나보내지 않고

기억 속에 담아 함께 살아가지."


그에게도 죽기 전에 현재로 돌아오게 된 이유이자

유일한 소망이 남아있고, 포르투갈에서 프랑스의 그라스로

가기 위한 여정 속에 시몬, 데쓰로, 마우루(포르투갈 마데이라 섬의 현지 의사)

의 츤데레 우정은 빛을 발한다.


이 소설을 읽으며 제일 짜릿하고 소름끼쳤던 부분은

사실 [어린 왕자]와의 연관성이다.

정말 생각지도 못한 부분에서 토니오의 정체가 드러나고,

그것이 생택쥐베리의 소설 [어린 왕자]와 연결이 되고

그럼으로써 시공간의 넘나듦이 이해가 되고,

마지막으로 토니오가 시공간을 넘어서라도 현재로 돌아와서

그 먼 여행을 향해가는 그 개연성과 플롯에 감탄했다.

이렇게 설득력이 있을 수가.


최근 들어 단편소설의 매력에 푹 빠져있던지라

장편소설을 읽는 일이 망설여졌는데,

이번 여름 휴가 책으로 [프롬 토니오]를 선택한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방구석 휴가를 즐기는 나를 남미의 해변가, 또 리스본,

신비로운 세계인 유토와 우토, 고래의 배속, 프랑스 등으로

여행시켜 준 책.


예쁜 표지만큼이나 내용 또한 몽환적이고 신비롭고 아름다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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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 오빠 강민호
이기호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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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호 작가의 모든 소설을 다 읽어본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그의 소설을 읽은 후의 내 감상은 늘 유머러스해서 재미는 있으나

불편했다. [최순덕 성령충만기], [사과는 잘해요.], 그리고 이번 소설집

[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 오빠 강민호].

다 읽은 후에도 웃기긴 웃긴데 대체 왜 개운치 못하고 불편한 걸까

라는 생각에 리뷰를 쓰려 생각하다가, 펜을 들었다가 다시 놓기가 일쑤.

이 불편함의 근원이 뭔지 찾고 싶기도 했다가

이내 머리가 아파져 또 관두었다.


그러다가 오늘 다시 한번 이 [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 오빠 강민호]

를 훑어보고, 내가 느낀 불편함의 근원이 아마 부끄러움을 자꾸 건드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단편소설집에서 제일 인상 깊었던 단편은 역시 첫 편인 [최미진은 어디로]

였다. 그리고 많은 독자들이 혹시 작가의 실제 경험담은 아닐까 궁금해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주는 아니지만, 중고나라 사이트에서 필요한 물건들을 저렴한 가격에 "득템"

하기도 하는데, 나의 경우에 아무리 서점에서 파는 가격보다 훨씬 저렴하다고 해도

책을 사는 것만큼은 왠지 끌리지 않는다.


그래도 책을 판매하는 셀러들이 꽤 많은 것을 보면,

또 [최미진은 어디로]에서 나와있듯이 꽤 많은 책을 판매하는 사람은

책 개별의 가격을 일일이 책정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룹으로 묶어 판매하기도 하기에, 이 [최미진은 어디로]

가 비단 100% 허구는 아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슬며시 웃음이 났다.

적어도 이기호 작가가 중고나라 사이트에 들어가서

각종 베스트셀러 목록을 꾸려 판매하는 게시글을 굉장히 인상깊게

보았겠구나 하는 것은 팩트가 아닐까 생각하니

해실해실 웃음이 나왔다.


특히 이 단편에서 나의 웃음 코드에 딱 맞아떨어진 부분!

이기호 작가가 중고나라 사이트에 들어가서 자신의 책을 1 + 1 취급 하는

것을 목격하고


분노 -> 절망 -> 모욕 -> 상실


을 느끼며 싱숭생숭 하다가 자고 있는 아내의 곁에서 슬며시 하소연을 하는 데,

이때 이기호 작가 아내의 대사가 너무 웃긴 거다.


-15page


"혹시 ...내가 아는 사람 아닐까? 일부러 나한테 모욕을 주려고...

난 왠지 꼭 그럴 것만 같거든..."


(중략)


"그러니까 인터넷 그만하고 소설이나 쓰라고!

소설을 안 쓰고 있으니까 그런 것만 보이지!

소설가가 소설 못 쓰면 그게 모욕이지,

뭐 다른 게 모욕이야!"


아내에게 퉁박을 받는 소설 속 작가가 왠지 안쓰럽게 생각되면서도 나는 이내 진지해졌다.


살면서, 소소하게 모욕을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럴 때 나는 이 모욕을 되갚아주어야 하는 것인지, 내 마음 모른 척

호구로 남아야 하는 것인지 판단이 서지 않을 때가 있다.

대체로 상처가 되는 모욕이 아닌 이상 스무스하게 넘어가면서도

영 내심 찜찜한 것은 사실이다.


작가는 [최미진은 어디로]에서 이런 관계에서 오는 감정들을

매우 유머러스하게 담아내면서도 독자들로 하여금

우리가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 악의가 담겨있지 않은

모욕을 상대방에게 안겨주고 있지는 않은지 곰곰이 생각해보게 한다.

그런 것을 느끼는 순간 또 이내 숙연해지는 거다.

어떤 것이 꼭 어떤 의도를 품어야만 하는 걸까.

모르고 안겨주는 모욕과 상처는 상대에게 상처가 되지 않는 것일까 하는 그런 생각.


대체로, 이번 이기호 작가의 단편들을 읽어보면

공통된 화두가, 하나로 모아지는 공통점이

"우리는 어떤 감정들을 마땅히 그래야 할 사람에게 정당하게 표출하고 있느냐"

하는 점이다.


[권순찬과 착한 사람들]에서, 동네 주민들은 성의로 똘똘 뭉쳐 성금을 걷어

궂은 날씨에도 아랑곳 않고 천막 농성을 이어가는 권순찬 씨에게

700만 원의 성금을 전달한다.

그러나 권순찬은 그 돈을 받을 수 없다고, 딱 잘라 거절한다.

왜냐, 그 성금은 그가 받아야 할 대상인 사채업자로부터 받은 돈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동안 자신들만의 선의로 똘똘 뭉쳐 있던 입주민들은 그 선의를 거절당하는 순간,

원망과 분노, 한풀이의 대상을 이내 권순찬에게로 돌린다.

화를 내야 할 이유가 있어 화를 낸다기 보다, 그들에겐 어떤 하나의 대상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그리고 이 소설의 작가 역시, 권순찬의 멱살을 잡고 흔들다가 그를 추궁하며, 힐난한다.


-101page


"애꿎은 사람들 좀 괴롭히지 마요!

애꿎은 사람들 좀 괴롭히지 말라고!"


누가 누구를 괴롭히고 있는지 잘 모르는 순간,

내가 화를 내고 있는 대상이 과연 적절한가 싶은 순간.


우리는 살아가면서도 계속 소소하게 진실과 기억들을

시시때때로 망각하며 살아가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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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리 서점의 크리스마스 이야기
에드 맥베인.로런스 블록 외 지음, 오토 펜즐러 엮음, 이리나 옮김 / 북스피어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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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여름은 더워도 정말 너~~~무 덥다.
흡사 열기로 가득찬 유리돔 안에 들어있는 것처럼
더운 열기가 주위를 감싸다 못해 몸 안까지 밀고
들어오는 것 같다.

이럴 때는 뭔가 오슬오슬 하게 서늘한 책을
읽고 싶은데, 무서운 공포 책 이런 건 너무 공포스
럽거나, 잔인하거나. 혹은 너무 시시하거나.
모 아니면 도, 그럼 탈락이다.

침대 머리맡에 들쑥날쑥 쌓아놓은 책들을 찬찬히
훑어보다가 눈에 띈 [미스터리 서점의 크리스마스
이야기]

이리나 역자님의 최근 신간 [한 시간 사이에 일어난
일]을 읽었을 때 페이지가 술술 넘어갔던 기억을
떠올려, 책을 집어들었다. 일단 17편의 단편으로
엮어져 있어 책의 두께가 두꺼움에도 읽는 데
부담이 없었다.

이 17편의 단편에는 모두 공통점이 있다.
바로 서점 주인 오토펜즐러 (흰머리가 성글성글하고, 옷을 매우 맵시 입게 잘~~입는 중년 꽃미남 스탈, 내스탈)가 운영하는 미스터리서점이 꼭 배경이
되어 이야기가 전개될 것, 또 미스터리한 요소를
가미할 것!!

미스터리 장르 소설에 입문한 지가 얼마 안되었는데,
나와 같이 아직 장르 소설에 조금은 생소한 독자분
들이 이 [미스터리 서점의 크리스마스 이야기]로
추리소설에 빠져보는 것도 좋은 선택이라는 생각이
든다.

일단, 크게 잔인하거나 거부감이 드는 소재가 아니
다. 오히려 단편 한 편, 한 편이 모두 마음 훈훈한
크리스마스 이브 저녁과 잘 어울린다.

또, 책과 서점을 좋아라 하는 책덕후들이 읽으면
흥미로울 거라는 점.
하나같이 실제 뉴욕에 위치하고 있는 오토펜즐러가
운영하는 미스터리 서점의 내부를 묘사하는데,

천장까지 가득한 장서의 양, 또 희귀한 초판본은
물론 유명 추리소설 장르의 작가 사인본들로 가득
한 서재, 서점 내부를 꽉 채우고 있는 나무향 가득
한 목재 책장, 2층 서재로 올라가기 위한 조금은
아슬아슬 발을 헛디딜 것만 같은 나선형 층계를
떠올려보자.

크리스마스 전야를
명망있는 뉴욕에 위치한 미스터리 서점에서
소중한 지인에게 책을 선물하기 위한 사람들, 혹은 크리스마스 이브를 추리소설을 읽으며 보내려는 사람들,
어쩔 때는 오토펜즐러가 주최하는 크리스마스
와인 파티에 초대되어, 짭쪼롬한 치즈와 크래커,
달콤한 과일에 둘러싸여 드라이한 와인 한 잔을
기울이며, 미스터리한 서점에서 벌어지는 미스터리
한 사건 현장에 함께 엮어드는, 말려들어가는
그런 스릴감 넘치는 독서 경험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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