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읽은 책 중에 가장 무서웠던 것은 무엇이냐는 질문을 호러가 유행하던 시절에 몇 번 받은 적이 있다. (…) 소설로 한정되는 경우는 별개이지만, 이것저것 생각해본 결과 성경이라고 대답했다. 불전이나 탈무드 등은 표현이 모호해서 잘 이해가 되지 않을지언정 비교적 일관성이 있는 데다 축적된 생활인의 지혜가 느껴지는데, 성경에서는 그런 것이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구체적인 에피소드가 많은 데 비해 하려는 말은 불명확하고 일관성이 결여되었다. 장치는 많은데 그에 대한 설명은 적다. 그것은 여러 가지로 깊이 해석할 수 있다는 뜻인 동시에 모순을 내포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성경을 읽다 보면 ‘신의 변덕‘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어느 날 변덕이 나 문득 그냥 생각나는 대로 끼적인 낙서를 툭 던져주고서는 인간에게 관심을 잃어버린 것처럼 보인다. 읽다 보면 높은 곳에 있는 존재가 느껴지는 만큼 그 맥락 없음, 부조리함이 더욱 무섭다. - P73
쓰치다 히데오 왈, 각본을 쓰는 것은 땅속에 묻힌 것을 파내는 일과 비슷하다. 그곳에 뭔가가 묻혀 있다는 것은 안다. 끄트머리는 보인다. 파다 보면 무늬가 있다든지 돌기가 있다든지 한다. 그러나 전체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끝까지 파봐야 안다. 아는 것은 좌우지간 뭔가가 묻혀있다는 사실, 자기가 그것을 파낼 수 있다는 것, 단지 그 뿐이다. - P97
컴퓨터로 입력하는 세계는 어딘지 모르게 남의 일 같다. 처음부터 활자로 읽으니 디오라마를 조감하는 듯한 거리감이 있다. 어떤 일이건 직접 보고 온 것처럼 거짓말할 수 있고, 전원을 끄면 잊어버릴 수 있다. 워드프로세서가 없었다면 소설가가 되지 않았으리라고 하는 사람을 몇 명 아는데, 그 말에도 일리가 있다. 워드프로세서는 거짓말을 한다. 글을 쓴다는 행위의 떳떳치 못함, 꼴사나움에 대한 저항을 상당히 경감시켜준다. 그러나 손으로 쓰는 경우, 글자를 한 자, 한 자 적다 보면 그 세계는 현실과 생생하게 연결된다. 낙인처럼 현실에 뚜렷이 찍혀 지울 수 없다. 아득히 먼 옛날,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부터 내 안에 존재하는 모순된 감정(떳떳치 못함과 창피함과 뒤죽박죽된 자존심)이 몸싸움을 벌이는데, 그래도 역시 글을 쓰지 않을 수 없다고 체념한다. 컴퓨터로는 쓸 수 있는 문장도 손으로 쓰려면 왠지 쓸 수 없는 경우가 있다. - P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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