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호품이라는 존재는 문화 그 자체다. 살아가는 데는 결코 필요하지 않지만 필요하지 않기에 필요하다는 점에 인간이라는 동물의 특질과 부조리함이 드러나는 데다가, 동물인 인간을 불투명한 막으로 덮어 ‘인간‘이라는 다른 존재로 바꿔준다. 그 부분을 야만이라느니 낭비라느니 몸에 나쁘다느니 하는 말로 물리적으로 깎아내면 속살이 날로 드러나 껄끄러워진다. 너무 과하게 씻으면 좋지 않다. 때를 너무 많이 벗겨내면 면역력이 떨어져 감기에 걸리지 않던가. 인간은 몸에 나쁜 것을 좋아하는 동물이고, 그것이 인간을 인간답게 한다. - P177
맹렬한 기세로 떠드는 사람들을 보니, 이야기의 원형은 구술 기록이라는 것이 실감되었다. 다른 곳에서 온 사람이 이야기한다. 낯선 땅에서 일어난 사건을 기록한다 하는 형식에 상상과 각색이 더해져 픽션이 되어간다. 그것을 또 다른 사람이 듣고 기록하고 각색해, 이윽고 누구나 아는 전설이 된다. 모든 것은 듣는 데서 시작하는 것이다. - P186
자세히 보니 도서관 구석 곳곳에 엄숙한 작업대가 놓여 있고, 책 무더기 틈새로 노트북의 파란 불빛이 보인다. 사서가 아예 도서관 내에 자리를 잡고 정리를 하는 것이다. 이런 데서 일년 중 대부분을 보내는 생활은 어떤 걸까. 역시 유령이 나올까. 서가 사이로 옷자락 스치는 소리가 난다든지, 위치가 늘 달라지는 책이 있다든지, 책이 피를 흘린다든지. - P191
오빠에게 무사히 돌아왔다고 메일을 보낸 뒤, 나리타 익스프레스를 기다리는 역 플랫폼에서 나도 모르게 캔맥주를 하나 사고는 거의 조건반사처럼 따 단숨에 들이켰다. 아아, 일본 맥주. 이 습한 기후에는 역시 일본 맥주가 으뜸이다. 살아 돌아왔노라고 진심으로 실감한 것은 이때였다. 내 기나긴 공포의 여행은 드디어 끝난 것이다. - P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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