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오랜 적폐의 원리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1989년의 대학생들도, 채만식도 알고 있었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집단적 무지 혹은 망각을 기반으로 축적된 부가 한국 사회를 움직이는 힘의 근원이다. 그러므로 부의 축적을 위해 한국 사회는 사회적 원인에서 비롯한 고통이라 할지라도 개인적 차원으로 축소시켜 관리한다. 물속 아이를 구해달라고 호소하는 부모들에게 미개하다고 말하는 까닭이, 그들을 순수한 유가족‘ 이라고 일컫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러나 딜레마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들의 고통이 개인적 차원에 머무는 한, 지금까지의 관행은 되풀이될 수밖에 없다. 적폐는 적폐를 청산할 수 없고 국가는 국가를 개조할 수 없다. 타인의 고통을 향한 연대에서 나온 책임감만이 이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 P63
우리 세대는 경제적 풍요를 가장 큰 가치로 삼기 시작했다. 그건 이제 가족을 이끌게 된 세대가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그러나 타인의 고통에 무지하거나 망각하는 방식이 아닌 다른 길을 찾아보려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우리의 실패는 예정돼 있었다. 어떤 풍요인가라는 질문 없이 경제적 풍요만을 최고의 가치로 여겼기 때문에, 우리 세대는 이 끔찍한 실패 앞에서도 사회적 약자의 고통에 공감하는 것은 사회 불안과 분열을 야기해 경제에 악영향을 끼친다고 주장하는 정부를 투표로 뽑은 것이다. 이런 세상이라면 다시 이십 년이 지나 더 많은 평형수를 줄이고 더 많은 화물을 적재한 위태로운 여객선을 계약직 선장이 운행한다고 해도, 그래서 이십 년 전의 서해 훼리호와 마찬가지로 이십 년 뒤의 또 다른 여객선이 우리의 손자들을 태우고 가라앉는다고 해도 이상할 일은 하나도 없다. - P64
인간의 몸과 그에 딸린 감정이란 잠시 동안의 것들이다. 전사의 분노를, 미녀의 미소를, 왕의 고뇌를 전시하는 박물관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인간의 몸이란 아무리 길어야 백 년쯤 일렁이다가 절로 사그라드는 불꽃 같은 것이고, 제아무리 격렬하다 해도 그 몸에 딸린 감정들 역시 마찬가지다. 고작 백 년만 지나도 오늘의 희로애락을 증언할 입술은 이 땅에 하나도 남지않는다. - P72
그렇게 이십 년도 더 넘게 소설을 쓰면서, 나는 타인의 죽음을 이해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는 사실 또한 깨달았다. 들어가도 되냐고 묻고 또 물어도 우리에게 되돌아오는 건, 그 누구도 타인의 죽음은커녕 손가락 끝으로 파고든 가시만큼의 고통 속으로도 들어갈 수 없다는 진실뿐이다. 타인의 고통과 그의 죽음은 그토록 견고한 것이라 결코 이해되지 않은 채로 우리 마음속에 영영 남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건 분명히 괴로운 일이리라. 누군가의,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죽음을 가슴에 묻고 살아가야 한다면 말이다. 그럼에도 남은 삶은 계속된다는 건 무슨의미일까? - P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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