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다 안다는 착각 - 무의식은 어떻게 나를 뒤흔드는가
카렌 호나이 지음, 서나연 옮김 / 페이지2(page2)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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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의 기본 멘탈은 신경증이다.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대중들의 디폴트 멘탈 모드를 신경증이라고 강조한 정신의학자는 바로 20세기 초에 활동했던 최초의 여성 정신분석가 카렌 호나이다. 호나이는 남성과 여성의 심리적 차이가 생물학적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문화와 사회의 차이에서 나타난다는 문화 환경적 특성을 강조했다. 즉 프로이트와 달리, 성차의 원인을 성이 아닌 젠더와 문화적 프레임에서 찾은 것이다. 그러고보니 프로이트가 내세운 음경 선망이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같은 이론이 동양인인 내가 보기엔 영 위화감 만땅의 별나라 구라처럼 다가왔는데 이게 다 문화적 차이 때문이 아닐까. 

사람이 살면서 번뇌와 고난이 없을 수는 없다. 호나이는 "심리적 장애의 중심에는 두려움과 무력함, 고립감을 느끼는 삶을 견디기 위해 발생한 무의식적 분투가 있다"고 하면서, 이를 '신경증적 경향'이라 불렀다. 신경증적 경향은 생애 초기, 기질적 영향과 환경적 영향이 결합하여 생기며, 강박적 욕구가 특징이다. 가령 완벽주의나 병적인 결벽증, 강박적 겸손 등이 그러하다. 흠, 내가 보기에 물질적 부와 성공을 지향하는 자본주의적 가치관과 정신사나운 디지털 생활방식에 젖은 현대인들은 누구나 다 욕구불만에 시달리는 신경증 환자다. 나도 당신도 모두 신경증적 주체다.

이 책 《나를 다 안다는 착각》(페이지2북스, 2023)에서, 호나이는 신경증을 두드러진 강박적 욕구의 유형에 따라 열 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이를테면 애정과 인정에 대한 신경증적 욕구, 삶을 책임져줄 '동반자'에 대한 신경증적 욕구, 협소한 경계 안에서 삶을 제한하려는 신경증적 욕구, 권력에 대한 신경증적 욕구, 이성과 선견지명을 통해 자기와 다른 사람을 통제하려는 신경증적 욕구, 의지의 전능함을 믿으려는 신경증적 욕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다른 사람을 이용해 그들을 능가하려는 신경증적 욕구, 사회적 인정이나 명망에 대한 신경증적 욕구, 개인적 존경에 대한 신경증적 욕구, 개인적 성취에 대한 신경증적 욕구, 자족과 독립에 대한 신경증적 욕구, 완벽함과 철저함에 대한 신경증적 욕구가 그러하다. 

앞서 언급한 신경증적 경향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더불어, 카렌 호나이는 심리적인 문제를 혼자서 해결하면서 자신에 대한 진실을 찾아가는 자기분석의 방법론도 강조하고 있다. 자기분석 기법은 전형적인 정신분석 과정에서 상호작용하는 환자와 분석가의 역할을 응용한 것이다. 

"대체로 환자가 자기 생각과 감정, 충동을 드러내면 분석가는 자신의 비판적 사고를 이용해 환자가 무엇을 의도하는지 인지한다. 분석가는 환자가 한 진술의 유효성에 의구심을 갖고 질문해보며, 겉보기에는 동떨어진 자료들을 조합하여 어떤 의미가 있을지 제안해본다."(14, 15쪽)

호나이는 정신분석의 유용한 가치를 크게 두 가지로 설정한다. 하나는 신경증을 치료하는 '의학적 가치'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들이 최대한 발전할 수 있도록 잠재적 능력을 키워주는 '인간적 가치'다. 정확한 지적이 아닐 수 없다. 프로이트라는 거대한 우상의 몰락 이후에도, 우리가 여전히 정신분석을 버릴 수 없는 두 가지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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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대에 행복한 고령자 - 마흔부터 준비하는 ‘백세 현역’을 위한 70대의 삶
와다 히데키 지음, 허영주 옮김, 김철중 감수 / 지상사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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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와 양생의 기본은 '빼기'일까 '더하기'일까. 그동안 나는 '빼기 의료'의 추종자였다. 절대 소식하고 몸에 안 좋은 술, 담배, 탄산, 백미, 튀김은 금하는 편이었다. 요즘은 커피도 빼기 목록에 추가했다. 주변에서는 나를 빼기 양생법의 전도사쯤으로 바라본다. 하지만 거꾸로 '더하기 의료'를 주장하는 안티에이징과 노화 연구의 대가들도 적지 않다. 더하기 의료의 전도사들은 고령기에는 대체로 부족한 편이 남는 것보다 몸에 더 좋지 않다는 논리를 편다. 예컨대 세계적 권위자인 프랑스의 클로드 쇼샤르 의학박사는 '적기에 영양 공급'을 장수와 노화 예방의 대원칙으로 강조한다. 그리고 내장의 대사 리듬에 맞추어 단백질, 밥, 디저트 순으로 식사하는 것을 중시한다. 

고령자 전문 정신과 의사 와다 히데키는 '더하기 의료'의 전도사다. 50대 이상이 되면, "어떤 영양이라도 극단적으로 과잉 섭취하지 않는 한 '부족한 것보다 많은 편이 좋다'는 것이 노화 예방의 대원칙"이라고 강조한다. 그리고 더하기 의료의 관점에서 노화가 시작되는 40대부터 90대까지 '백세 현역'을 위한 건강한 양생 비결을 소개한다. 

행복한 고령자가 되려면 어찌 해야 할까. 더해야 하나 빼야 하나, 그것이 문제로다. 저자는 누차 강조한다, 고령자는 허리둘레를 걱정하기보다는 제대로 잘 먹고 영양 상태를 유지하는 '허약 예방'을 고려해야 한다고. 청장년이라면 대사증후군 대책이 적절하다. 즉 머리에 피도 안마른 새파란 젊은이들은 내장 지방의 축적에 의한 비만증, 고혈압, 당뇨병, 고지혈증 등 생활습관병을 예방하는 데 힘을 써야 한다. 하지만 은발족들은 얘기가 달라진다. 고령기에는 BMI가 '보통'에 해당하는 18.5~25 사이보다 조금 높은 편이 영양 상태 및 총사망률의 통계상으로도 좀더 좋다. 가장 장수하는 집단의 BMI는 '약간 살찐' 편인 25~29.9였다. 

"현재 우리의 대사증후군 대책은 고령 의료 현장을 전혀 모르는 학자나 관료들이 주도해서 만들어낸 잘못된 시책에 불과합니다. 그 시책에 따라 열심히 지도해서 마른 체형이 되어 버리면 반대로 수명 단축이라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통계 데이터가 말해주고 있는데 말입니다."(103, 104쪽)

나는 노화의 가장 큰 증상이 노안이라고 여긴다. 노안은 보통 40대 후반부터 시작된다. 일반 안경을 쓰고 책을 보기가 곤란해진다. 일단 노안이 왔다면 몸의 노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증거다. 그런데 저자는 전두엽의 위축과 쇠퇴를 노화의 본격으로 말하고 있어 흥미롭다. 잘 알다시피, 대뇌의 앞쪽에 있는 전두엽은 사고, 창조, 의욕, 이성 등을 관장한다. 또한 호기심이나 감동, 공감이나 설렘 같은 보다 인간적인 감정을 담당하고 있는데, 전두엽이 쇠퇴하면 의욕이 저하되고 감정 조절이 잘 되지 않는다. 

저자는 60대는 정신 건강에 신경써야 한다고 말한다. 60대는 정년퇴직과 재취업의 고비를 겪는 나이, 그리고 부모의 병간호를 하거나 부모의 죽음을 경험하는 나이다. 고전적인 정신분석에 따르면 우울증의 최대 원인은 대상의 상실이고, 현대적인 정신분석에 따르면 정신 건강에 가장 해로운 것은 자기애 상실이다. 부모의 죽음처럼 사랑하는 대상을 잃거나 평생 다니던 직장을 잃은 경험은 대상 상실과 자기애 상실을 동시에 일으키는데, 그 시점이 바로 60대다. 고령자의 우울증은 불면증과 식욕부진 등 일반적인 증상뿐만 아니라 기본적으로 뭐든 귀찮아하고 기억 장애가 따르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고령자의 우울증을 치매로 오진하는 경우도 있다.

70대가 되면 우울병보다 치매의 비율이 높아지고(열 명 중 한 명은 치매), 건강이나 운동기능의 개인차가 무척 커지게 된다. 이른바 '로코모티브 신드롬'(운동기능저하증후군)이 현저하게 나타나는 것도 70대부터다. 그리고 배우자의 병간호나 죽음을 경험하는 사람이 늘어나게 된다. 저자는 70대 고령자의 경우 건강 진단을 받지 않는 편이 정신 건강에 좋다고 조언하는데, 나 역시 크게 공감하는 편이다. 건강 진단 결과와 실제 건강 상태가 그다지 일치하지 않는 게 현실이고, 혈당치나 콜레스테롤치를 무리하게 정상치로 낮추는 것은 위험하다. 다만 명심해야 할 것은 돌연사를 피하기 위해 심장과 뇌의 정밀 건강 검진은 유익하다는 사실이다. 이십 년후, 나도 심장과 뇌는 정밀 검진을 한번 받아볼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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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감 중독 사회 - 분노는 어떻게 정의감을 내세운 마녀사냥이 되었나?
안도 슌스케 지음, 송지현 옮김 / 또다른우주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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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계기로 정의 담론이 우리 사회 전반을 휩쓸고 다닌 적이 있다. 문재인 정권 시절만 해도 '공정'과 '적폐청산'을 주요정책 과제로 삼아 정의감을 거의 으뜸 의제로 삼기도 했다. 하지만 정치판에서 정의는 언제나 뒤집기 한판이 가능한 공허한 수식어다. 가령 진보 진영의 적폐청산을 보수 진영은 정치보복으로 간주했다. 사실 정의와 정의감처럼 고귀한 단어도 없다. 하지만 정치판의 선전선동과 조작은 이를 매우 하찮은 수식어로 전락시켰다. 샌델과 같은 정치철학자의 고상한 정의 담론이 정작 정치판에서 전혀 맥을 못추고 있는 실정이다. 

정치판에서 정의가 너무 쉽게 소비되고 낭비되고 있다. 그런데 정치판뿐만 아니라 디지털 온라인 세상도 정의감은 파도처럼 몰려왔다가 순식간에 사그러들고 만다. 인터넷 세상의 정의감 역시 너무 쉽게 생겨나고 눈 깜짝할 새에 소비되기를 반복한다. 온라인 무대의 왕따, 조리돌림, 마녀사냥, 악플러의 배후엔 왜곡된 정의감 혹은 '정의감 거품'이 존재한다. '키보드 워리어'라는 말처럼, 온라인에서 정의감을 칼처럼 휘두르며 화내는 사람이 넘쳐 난다. 

정의감의 표출은 언제나 사적 차원이 아닌 공적 차원이 중요한 법이다. 올바른 정의감은 으레 분노를 수반하기 마련인데, 그 분노는 사적 분노가 아니라 공적 분노다. 정의를 외치는 목소리는 공적 분노를 담고 있어야 하지만, 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런 목소리 밑바닥에 사적 분노는 물론 원망, 우울, 짜증, 무기력이 도사리고 있음을 깨닫곤 한다. 

정의의 반댓말은 부정부패, 부조리, 불공정, 불평등 등이다. 사회 차원에서 정의감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사적 차원에서 통쾌한 복수를 갈망하는 이들이 늘어나기 마련이다. 요즘 유행하는 드라마는 바로 그런 대중의 갈망을 여실히 반영하고 있다. 학폭을 소재로 삼은 「더 글로리」를 비롯해 핫한 드라마의 태반이 사적 복수극이라는 점을 본다면, 사회 전체에 만연한 불공정에 대한 원망과 지탄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그만큼 우리 사회가 권선징악이나 사필귀정과 같은 '공정한 세계 가설'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아닐까 싶다. 공정한 세계 가설이란 "정의는 보상을 받고, 악은 그에 상응하는 벌을 받는다. 성실한 사람은 행복해지고, 게으른 사람은 불행해진다는 사고방식"을 말한다. 

우리는 이미 '정의감 중독 사회'에 진입한 것은 아닐까. 일본의 앵거 매니지먼트 협회 대표이사인 안도 슌스케는 툭하면 정의감을 내세워 마녀사냥을 일삼는 지경에 이른 작금의 사태를 고발한다. 그리고 정의감 중독의 유형을 크게 급성 정의감 중독과 만성 정의감 중독으로 구분하고, 만성 정의감 중독의 유형을 다시 다섯 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고독한 유형, 질투 유형, 독선가 유형, 집단 심리 유형, 열등감 유형이 그것이다. 정의감 중독 유형은 행동력 정도와 정보에 대한 민감성(정보력) 정도를 조합한 결과다. 가령 고독한 유형은 행동력이 높고 정보력은 낮은 사람이고, 질투 유형은 행동력도 높고 정보력도 높은 사람이다. 독선가 유형은 행동력이 낮고 정보에도 둔감한 편이며, 집단 심리 유형은 행동력이 낮고 정보력은 높은 사람이다. 열등감 유형은 행동력과 정보력 둘 다 중간 정도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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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07 16: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최인훈은 이렇게 말했다 - 최인훈과 나눈 예술철학, 40년의 배움
김기우 지음 / 창해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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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스승에 대한 사랑과 존경, 요즘 말로는 '추앙'이 듬뿍 담긴 문학 노트를 발견했다. 소설가 김기우가 제자의 눈으로 문학 거장 최인훈의 문학과 예술 그리고 작품세계를 밀착취재한 꽤나 두꺼운 노트다. 무려 40년 동안의 기록이니, 그 한결같은 열정과 사랑이 남다르지 않을 수 없다. 저자는 서울예술대학 문창과 시절부터 기록한 수업 노트와 일기, 그리고 스승의 문학작품에 근거해, 최인훈의 문학세계를 정밀하게 그려보려는 시도를 감행한다. 저자는 최인훈 작가의 평생주제로 "우연에 의한 세상의 진화, 현실의 황당함에 무너지는 이상적인 이론, 결과를 예측할 수 없다는 과학의 법칙 등"을 꼽는다. 

이 책 『최인훈은 이렇게 말했다』(창해, 2023)는 적재적소에 최인훈 작품의 담론을 적극 인용하고 있는데, 최인훈의 문학과 예술 그리고 인생철학을 폭넓게 그려보인다. 한국 문학에 흥미가 없는 문외한도 최인훈의 대표작 『광장』 이나 『회색인』에 대해선 꽤 많이 들어보았을 것이다. 두 작품 모두 문학의 현실참여에 대한 고민과 반성이 잘 드러나 있다. 먼저, 『회색인』의 주인공은 소설을 쓰는 국문학도 독고준이다. 독고준은 행동대장이 아니라 회색의자에 묻혀 사유를 즐기는 사색형 인간이다. 『회색인』은 4.19 혁명 직전의 시공간을 무대로 청년의 고뇌와 허무를 명철하게 그리고 있다. 한편, 소설집 『광장』은 사실주의 계열의 『광장』과 환상주의 계열의 『구운몽』이 함께 수록되어 있는데, 『광장』이 4.19 혁명과의 조우라면, 『구운몽』은 4.19 이후 5.16의 악몽을 표현한 작품이다. 『광장』의 주인공은 제3국으로 향하는 타고르 호에 탑승한 전쟁포로 이명준이고, 『구운몽』의 주인공은 간판공으로 일하는 조용한 청년 독고민이다. 『광장』은 이념과 이데올로기, 체제 비판의 색채가 짙지만, 결국 이념과 사상보다는 사랑의 힘을 부각시켰고, 소설가 김기우의 말대로, '벗'도 '적'도 아닌 '사랑'의 이름으로 부를 수 있는 이성을 원한다는 메시지로 읽히기도 한다.

문창과 '소설창작' 수업의 교재는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이었다. 구보는 원래 소설가 박태원의 호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은 구보 박태원의 동명 단편소설을 패러디한 작품으로, 총 15편의 단편소설로 엮어진 단행본이다. 소설가 김기우는 "구보 씨는 문장의 기교를 가르쳐 줄 뿐만 아니라, 그를 통해 작가의 일상을 낱낱이 알게 되어 좋았다. 선생님 세대의 문단 풍경도 그대로 드러나고 예술가들의 사회 인식, 예술관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고 술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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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버뷰
존 르 카레 지음, 조영학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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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소설을 영화로 찍는다면 첫 장면은 무조건 장례식이다. 장례식의 주인공은 '실버뷰'라는 저택의 실질적인 여주인 데버라 에이번. 유가족으로 남편 에드워드와 딸 릴리 그리고 두 살배기 외손자 샘이 있다. 서양의 귀족과 동양의 선비들은 자신의 저택에다 고상한 이름을 붙였다. '실버뷰'라는 이름은 독일 철학자 니체의 저택명에서 따온 것이다. 예전에 데버라의 부친이 살아있을 때에는 메이플스라고 불렸다. 데버라는 용감무쌍한 영국 첩보국 스파이다. 첩보국의 일류 중동 분석가로 명성이 높고, 지역 도서관의 비상임이사를 엮임하기도 했다. 실버뷰의 가족들은 학습된 훈련 덕분에 모두 그럴듯한 '위장 시나리오'에 익숙하다. 아, 릴리의 연인인 신출내기 서적상 줄리언 론즐리도 빼먹을 순 없다. 본래 "런던에서 아주 잘나가는 증권 중개인"이었는데, 작은 해변 마을에 책방을 열게 된다. 

줄리언 제러미 론즐리는 이 소설에서 사건 전개를 위한 '전령사' 역할이다. 줄리언의 선친인 헨리 케네스 론즐리는 성공회 목사 출신인데 여성 문제로 스캔들을 자주 일으켰다. 선친과 에드워드는 초등학교 때부터 알고 지낸 친구 사이로, 토론이 없는 토론클럽인 '귀족 클럽'의 같은 회원었다. 헨리가 회장, 에드워드가 부회장이었다고. 당시 무정부주의, 볼셰비키, 트로츠키 등 이념서들과 교의들을 닥치는대로 섭렵했는데, 젊은 시절 헨리는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활동가로서 활약하기도 했다. 하지만 종교의 품에 안기게 되었고, 이내 다시 발길을 돌려 탕아가 되었다. 그럼, 젊은 시절의 에드워드는 어땠을까. 모범생이거나 머리만 굴리는 사색인은 분명 아니었을 것이다.

노신사가 된 에드워드는 줄리언에게 서점 운영에 대한 팁과 아이디어를 건네면서 왕래가 잦아지게 되고, 실버뷰에서 에드워드의 가족들과 안면을 트게 된다. 에드워드는 줄리언에게 비어 있는 서점 지하실을 '문학 공화국'으로 만들자고 제안한다. 

"그저 위대한 소설가들이 아니라, 철학자, 자유사상가, 위대한 운동의 창시자들 얘기요. 우리와 맞지 않는 위인들까지 포함하면 더 좋겠구려. 저 흔해 빠진 문화관료들이 아니라 론즐리의 베터북스가 직접 선정하는 거요."(37쪽)

줄리언은 점차적으로 에드워드를 의지하면서 에드워드의 첩보전에 가까운 은밀한 심부름도 수행하게 된다. 에드워드와 줄리언의 대화에 자주 등장하는 책이 있는데, 바로 제발트의 《토성의 고리》다. 이 책은 비밀 접선을 위한 신분확인 용도로 활용된다.

첩보물의 거의 모든 등장인물들이 비밀이나 은밀한 구석을 갖곤 한다. 그래도 그중에서도 가장 미스터리한, 정체를 종잡기 어려운 회색인이 있기 마련인데, 여기서는 폴란드 출신의 에드워드 에이번이 바로 그런 베일에 싸인 인물이다. "교수라는 얘기도 있고 구호단원이라 전세계를 돌아다닌다는 얘기도 있고", 아무튼 에드워드도 첩보국의 스파이다. 

부부 스파이들의 실제 삶은 어떠할까. 데보라와 에드워드의 경우, 부부 스파이로서의 활약상은 그리 숨가쁘지도 않고 종종 암시적이다. 오히려 첩보국에서 일하는 스파이 부부의 역할과 아이러니한 관계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건 종양학자 스튜어트 프록터와 아내 엘렌의 경우다. 이들 부부도 스파이고, 이들과 동료의 입을 통해서 에드워드의 화려한 과거사에 대해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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