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의 프레임 - 우리는 왜 가짜에 더 끌리는가
샌더 밴 데어 린덴 지음, 문희경 옮김 / 세계사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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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를 되도록 보지 않으려고 힘쓴다. 오늘의 날씨를 알려주는 일기예보는 예외지만, 뉴스를 적극적으로 피하고 있다. 요즘 뉴스는 새로운 소식이 아니라 그냥 쓰레기이기 때문이다. 정크푸드로 악명 높은 패스트푸드만도 못한 게 요즘의 뉴스보도다. 그래서 평소 식단에 기울이는 열정의 배를 기울여 뉴스를 금식한다. 넘쳐나는 정보의 홍수와 가짜 뉴스의 도가니에서 나름 살아남기 위한 지적인 생존술이랄까. 가짜 뉴스와 사이비 광고, 거짓 음모론이 온갖 미디어를 타고 확산되고 있다. 특히 소셜미디어는 허위 정보를 퍼뜨리고 사람들을 속일 수 있는 위험한 매체가 되었다. '정보전염병'이란 말이 피부에 와닿는 요즘이다. 전염병만 백신이 필요한 게 아니다. 정보전염병도 백신 접종이 필요하다.

거짓은 힘이 세다. 가짜 뉴스와 잘못된 정보, 조작된 이야기는 바이러스처럼 금새 퍼지고 복제된다. 거짓은 속도가 엄청나다. "거짓은 날아가고 진실은 절뚝이며 뒤따라간다."는 말도 있고, "거짓이 지구 반 바퀴를 도는 사이 진실은 아직 신발을 신고 있다"는 말까지 나돌 정도다. 이처럼 거짓 뉴스는 진실 주장보다 훨씬 빠르고 깊고 넓게 퍼져나간다.

정보의 옥석을 가릴 줄 아는 안목과 진짜 뉴스와 가짜 뉴스를 분별할 줄 아는 지혜가 절실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 뇌는 꼼꼼한 팩트 체크 전문가가 아니라 직관이나 편향성에 의지하는 게으른 인지구두쇠다. 우리 스스로는 촉이 유달리 좋다거나 합리적 추론에 근거해 참과 거짓을 가릴 수 있다고 믿지만, 기실 순전히 직관에 의존해 자신에게 익숙한 것, 자신이 선호하거나 동의하는 정보를 진실이나 진짜 정보라 여기고, 진술의 진위와 관계없이 여러 번 반복해 들은 주장을 진실이라 믿기도 한다.

'잘못된 정보의 지속적 영향'이란 말이 있다. 가짜 뉴스에 반복적으로 노출되면 시간이 지나는 사이 잘못된 정보가 진실처럼 느껴지기 시작해 그 정보를 공유해도 윤리적으로 문제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된다. 가짜 뉴스에 휩쓸리는 '정보 좀비'가 되지 않으려면 보다 체계적인 심리적 백신 장비가 필요하다.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과 인지 능력 개발, 정보를 토대로 하여 결정을 내리는 역량 강화 등이 그러하다. 물론 가짜뉴스의 발생과 확산을 예방하는 기술적 차원의 소셜미디어 정책도 강구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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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자들의 죽음 - 소크라테스에서 붓다까지 EBS CLASS ⓔ
고미숙 지음 / EBS BOOKS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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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본질을 인식한 사람은 죽음 속에서 삶을 보지만 또한 삶 속에서도 죽음을 본다."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의 말이다. 세계의 본질을 인식한 사람, 그들을 가리켜 '현자'라고 한다. 중생에게 죽음은 고통이자 재앙이지만, 현자에게 죽음은 선물이자 축복이다. 중생에게 죽음은 존재의 소멸이지만, 현자에게 죽음은 존재의 해방이다. 중생에게 죽음은 상실이지만, 현자에게 죽음은 자유다. 중생에게 죽음은 슬픈 이별이지만, 현자에게 죽음은 명랑한 여행이다.

인문학자 고미숙은 소크라테스부터 붓다까지 동서양 현자들의 죽음을 통해 인간다운 삶의 깊은 차원을 드러낸다. 8인의 현자들은 문명권도 다르고, 살아간 시대도 다르고, 타고난 품성도 서로 달랐지만, 이들의 삶과 죽음은 커다란 공통점이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현자의 삶은 충만했고 죽음은 평온했다.

영혼불멸을 믿는 소크라테스에게 철학적 삶이란 곧 죽음의 연습이었다. 테스형은 독배 앞에서 어떤 미련도 회한도 없었다. 양생술의 대가인 장자에게 삶과 죽음은 대립하지 않았고, 오히려 죽음은 천지라는 큰 집에서 편히 쉴 수 있는 선물이었다. 불꽃과도 같은 치열한 삶을 산 간디에게 죽음은 영광스러운 해방이었다. 암살자의 총탄이 그의 심장을 관통하는 순간에도 만트라가 저절로 터져 나왔다.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은 동맥류라는 난치병이 자신을 죽음으로 인도하는 과정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우아하게 받아들였다.

조선의 대문장가 연암 박지원에게 죽음은 애도와 치유의 장이었고, 조선의 대학자 다산 정약용에게 죽음은 먼 훗날 역사의 증언을 위한 출구였다. 어쩌면 다산에게 죽음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헌신함에 따른 천주의 은총이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사리뿟따와 붓다에게 죽음은 욕망과 번뇌를 완전히 소멸시킨 지극한 고요와 평정에 이르는 '반열반'이었다. 참고로, 저자는 에필로그에서 티베트 불교의 수장인 달라이라마의 환생담까지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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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펜하우어의 고독한 행복 아포리즘 시리즈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지음, 우르줄라 미헬스 벤츠 엮음, 홍성광 옮김 / 열림원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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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리즘을 이용한 일기 쓰기에 관심이 있다면 쇼펜하우어나 니체, 스토아학파 철학자들의 글이 제격이다. 이를 '아포리즘 리추얼'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 일기 쓰기 목적이 신변잡기보다는 사색이나 힐링과 명상에 방점이 찍혔다면, 아포리즘은 글쓰기 리추얼을 위한 막강한 도구가 되어준다. 독일 철학자 아르투어 쇼펜하우어는 한때 니체와 바그너가 심취했던 철학자로, 염세주의자나 금욕적인 비관주의자로 종종 소개되곤 한다.

그런 대중적 오해는 쇼펜하우어의 철학적 감수성이 불교 색채를 띠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쇼펜하우어의 주저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와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을 번역한 역자 홍성광은 쇼펜하우어를 "연민과 온정의 철학자"로 평가한다. 행복과 처세, 삶과 죽음에 관한 쇼펜하우어의 아포리즘이 요즘 국내에서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는 이유도 바로 이런 '츤데레 스타일'의 연민과 온정 때문이지 않나 싶다.

"운명이 카드를 섞고 우리가 게임을 한다."는 말이나 "인생은 고뇌와 권태 사이를 오가는 시계추 같은 것이다"란 감성적 아포리즘이 벼랑 끝에 매달린 듯 절박한 오늘날의 한국인 심정과 너무 잘 통하는 것이다. 여기에 매콤함 한 수저 더 추가하자.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운명이라고 부르는 것은 대체로 자신의 어리석은 짓거리일 뿐이다." 길거리나 식당과 커피숍 같은 공공장소에서 짓거리나 개수작을 일삼는 쩌리에게 들려주고픈 말이다.

쇼펜하우어의 행복관은 소극적이고 소승적이다. "매우 불행해하지 않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은 매우 행복해지기를 요구하지 않는 것이다." "소유하면 매력이 떨어지고, 새로운 모습으로 욕망과 욕구가 다시 일어난다." 그리고 외부 환경보다 내면의 상태를 더욱 중시하는데, 특히 인격과 건강을 크게 강조한다. "우리가 가진 것보다 우리의 인격이 행복에 훨씬 더 많이 기여한다." 참고로, 쇼펜하우어는 인생의 자산을 인격, 재산, 명예 세 범주로 나눈다. 여기서 '인격'은 성격적인 측면 외에도 신체적 건강과 명랑한 기질까지 포함한다.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은 명랑한 마음이다. 많이 웃는 자는 행복하고, 많이 우는 자는 불행하다." "건강한 거지가 병든 왕보다 더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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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해피 - 행복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
스테퍼니 해리슨 지음, 정미나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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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행복은 후회없는 만족이라고 했다. 그럴려면 행복감의 크기가 너무 크면 곤란하다. 로또 당첨이나 사업 대박처럼 큰 행복은 우울감과 허무감을 불러오기 쉽다. 쓰나미처럼 몰려온 행복의 절정이 지나가면 이내 짙은 안개와 같은 권태감에 휩싸일 수 있다. 마이클 잭슨 같은 유명 스타의 삶을 잠시 떠올려보라. 결국 철학자 플라톤의 생각이 옳았다. "최고의 행복은 작은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다." 행복은 언제나 크기보다 빈도가 훨씬 중요한 법이고, 그래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소확행'이야말로 행복한 삶의 기본이다. 나는 쭉 그렇게 생각해왔다.

'소확행'은 '작지만 확실한 행복'의 준말이다. 세계적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에세이집 《이렇게 작지만 확실한 행복》에서 만든 말이다. 낡은 레코드 수집이나 마라톤 완주 뒤의 시원한 맥주 같은 매우 개인적인 취미 생활의 참맛을 강조하면서 꺼내든 표현이지만, 이내 국민 표어 수준의 대유행을 불러일으켰다. 대중 미디어가 행복의 소시민적 가치관을 논할 때면 동네 치킨집의 양념소스처럼 '소확행'이란 말이 흩뿌려졌다.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 없는 인생은 메마른 사막에 지나지 않는다"는 하루키의 말에 나는 꽤 오랫동안 공감했다.

그런데 '소확행'도 결국은 소비자본주의와 개인주의가 주입시킨 '낡은 행복'의 틀에 불과하지 않을까, 하는 의심을 강하게 품게 되었다. 긍정심리학 전도사 스테퍼니 해리슨의 '뉴해피'라는 개념 덕분이다. 저자는 낡은 행복(Old Happy)과 새로운 행복(New Happy) 을 구분하면서, 성공과 성취, 지배와 소유에 방점을 찍은 낡은 행복은 오히려 진정한 행복의 가장 큰 방해물이라고 지적한다. 대신에, 사랑과 봉사, 보편적인 인간성 추구에 방점을 찍은 새로운 행복을 '뉴해피'라고 불렀다. 내가 보기에, 낡은 행복이 이기적이고 사적인 행복관이라면, 뉴해피는 이타적이고 공적인 행복관이다.

낡은 행복은 개인주의, 자본주의, 타인을 지배하려는 욕망에 근거한 그릇된 행복관이다.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가 행복은 인간을 이기주의자로 만든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이게 다 낡은 행복의 문화 혹은 세계관이 사람들에게 미치는 악영향의 측면을 지적한 게 아닌가 싶다. 유튜브나 인스타그램을 하는 사람들 가운데 전형적인 관종이 많은 이유도 바로 이러한 낡은 행복의 세속적 가치관 탓이다. 돈, 유명세, 팔로워 숫자, 세련된 이미지 등으로 행복한 삶을 연출하곤 하는데, 이게 다 낡은 행복의 표상들이다. 반면에, 저자는 뉴해피라는 세계관으로 행복의 공적인 이타적 속성과 사회적인 웰빙 차원을 보다 강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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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리 카플란 생성형 AI는 어떤 미래를 만드는가 - 최정상 인공지능 전문가의 15가지 미래 예측
제리 카플란 지음, 정미진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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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문명은 과학기술의 날개를 타고 비상한다. 바퀴, 인쇄기, 전구, 페니실린의 발명은 교통, 정보의 전파, 생산성, 의료 등 인간 생활의 다양한 측면에 혁명적 파장을 일으켰다. 세계적인 인공지능 전문가 제리 카플란은 생성형 인공지능의 잠재적 영향력이 이런 역사적 발명품들의 혁신보다 훨씬 큰 영향력을 발휘할 것으로 전망한다. 생성형 인공지능과 이런저런 기술적 발명품과의 비교와 유비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일테면 사진, 축음기, 비행기, 원자력, 전화, 인터넷의 발명과도 견주어 설명될 수 있는 게 생성형 인공지능의 힘이다. 일례로, 저자는 생성형 인공지능을 "가축화된 전기"나 "길들여진 전기"로 해석한다.

생성형 인공지능은 스마트폰처럼 이미 우리 일상생활에 깊숙히 들어와 있다. 생성형 인공지능은 의료, 법률, 교육, 소프트웨어 기술 그리고 그래픽 아트, 사진, 음악과 같은 창의적 분야 등 다양한 산업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 중이다. 자, 생성형 인공지능은 작금의 의료 시스템을 어떻게 바꿀까. 만약 업계의 타성과 의료 협회의 저항이 가신다면, 지금의 인간 의사 시스템을 넘어서는 의료 서비스를 광범위하고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을 것이고, 그 결과 개발도상국의 영아사망률이 감소하고 기대 수명이 증가할 것이다. 법률 제도는 어떻게 바뀔까. 법률 지식에 특화된 생성형 인공지능 시스템은 머지 않아 인간 변호사가 따라잡기 힘든 수준으로 법원 서류, 계약서, 기타 합의서의 초안을 작성할 수 있게 될 것이고, 어쩌면 생성형 인공지능 시스템을 활용하지 않는 인간 변호사는 업무상 과실 혐의를 받게 될지도 모른다.

그럼, 생성형 인공지능은 교육을 어떻게 바꿀까. 우리는 곧 모든 학년과 모든 과목을 가르칠 준비가 된 생성형 인공지능 교사를 이용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배우고자 하는 열의가 있는 학생이라면 누구나 과거 왕족의 자녀처럼 매우 똑똑하고 충실한 개인교사 혹은 전자 비서를 곁에 두게 되는 셈이다.

모든 혁명과 혁신은 리스크가 따른다. 생성형 인공지능의 발전도 그러하다. 따라서 개인 생활의 차원, 산업과 상업의 차원, 그리고 공공정책의 차원에서 생성형 인공지능의 실질적인 파장력에 대한 광범위한 조사와 성찰이 필요하다. 특히 허위 정보나 알고리즘 편향 같은 생성형 인공지능의 잠재적 위험성과 살상용 로봇과 같은 윤리적 딜레마를 냉정하게 점검할 필요가 있다. 악은 디테일에 있다고 하는데, 심각한 리스크의 예방도 다를 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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