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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삶을 견디는 기쁨 - 힘든 시절에 벗에게 보내는 편지
헤르만 헤세 지음, 유혜자 옮김 / 문예춘추사 / 2022년 12월
평점 :
삶을 견딘다‘라는 표현에 공감했고, 저자는 내가 좋아하는 <데미안>의 작가 헤르만 헤세(1877~1962)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 책에 실린 그림은 모두 헤세의 작품이다.
1920년 11월경에 작성한 병상일기가 있고 1922년에 출간한 <싯다르타>가 언급되니 1920년 전후로 쓰인 글이리라.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이다.
코로나19가 등장했을 때 스페인독감(1918년~1920년 유행)이 생각났듯이 현재 진행 중인 우크라이나, 러시아의 전쟁도 세계 1차 대전을 떠오르게 한다.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인간을 둘러싼 환경이나 삶, 그 안에 존재하는 고통과 기쁨은 크게 다르지 않다.
예민하고 섬세한 감수성을 지닌 헤세는 14세에 엄격한 학교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와 자살 시도 후 신경과 병원에 입원한 이력이 있다. 1차 세계대전 시 반전 활동을 하면서 정신적 고통에 시달린 헤세는 칼 융의 제자에게 치료를 받았고 그 이후에 [데미안]을 발표했다. 이 책에도 심리학적인 내용이 실려 있다.
그렇게 자살을 시도하고 정신과 치료를 받았지만 정작 헤세는 같은 세대보다 더 장수하고 85세에 죽음을 맞이했다. 그를 살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이 <삶을 견디는 기쁨>인 듯하다.
시간이 부족하다며 늘 전전긍긍하고, 재미있는 일이 없다며 항상 따분해하는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다. 날마다 벌어지는 사소한 기쁨들을 가능한 한 많이 경험하고, 거창하고 짜릿한 쾌락은 휴가를 즐길 때나 특별한 시간을 보낼 때 조금씩 맛보는 것이 더 좋다는 것을. 지친 몸을 추스르고, 일상의 피로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은 거창한 쾌락이 아니라 사소한 즐거움이기 때문이다.
<삶을 견디는 기쁨> p.21
그런데 아주 익숙하다.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지혜로운 조언은 동일하지만, 그 100년 동안 그것을 행한 이들은 그리 많지 않을 듯싶다.
나 또한 그렇다. 직장인의 바쁜 일상을 벗어나 넘치는 여유를 누리지만 안타깝게도 사소한 즐거움을 찾지 못하고 있다. 늘 거창한 계획을 세운다. 그래야만 즐거울 수 있을 거라는 착각 속에 말이다.
2023년에는 아주 작은 기쁨을 찾는 노력을 기울여 보고자 한다. 일단 2023년 1월 1일의 눈부신 햇살부터 만끽하리라.
행복과 고통은 우리의 삶을 함께 지탱해 주는 것이며 우리 삶의 전체라고 할 수 있다. 고통을 잘 이겨 내는 방법을 아는 것은 인생의 절반 이상을 산 것이라는 말과 같다. 고통을 통해 힘이 솟구치며 고통이 있어야 건강도 있다. 가벼운 감기로 인해 어느 날 갑자기 쓰러지는 사람은 언제나 ‘건강하기만‘한 사람들이며 고통받는 것을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다. 고통은 사람을 부드럽게 만들고, 강철처럼 단단하게도 만들어 준다.
<삶을 견디는 기쁨> p.67
하지만 피할 수만 있다면 고통을 피하고 싶다. 고통은 나를 예민하고 까칠하게 만들고 깊은 우울 속에 처박고 때로는 나만 고통받는 것 같아서 분노하게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고통은 삶의 한 부분이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버틸 수 있다. 고통을 견디면 다시 소소한 일상을 누릴 수 있다는 기대를 품는다. 그렇다. 별것 없는 시시한 일상이 대단한 행복임을 깨닫게 된다.
이번에도 견디어 낸다면 나에게 무엇을 해 줄지 계획을 세우고는 한다. 사실 고통이 끝나면 잊고는 하지만 말이다.
<고통을 이겨내는 방법을 아는 것>은 중요하다. 그 방법을 찾는 것은 순전히 내 몫이다.
무거웠던 마음이 서서히 사라지고 삶은 다시 경쾌해졌고, 하늘은 아름다워졌으며, 산책길은 의미심장한 길이 된다. 그런 시간이 되돌아오면 나는 아픈 몸이 회복되었을 때처럼 나른함과 피곤함을 느끼기도 하고, 어쩔 때는 씁쓸함을 느끼지 못하는 굴욕감을 맛보며, 자기 스스로를 경멸하지 않는 고마운 마음을 갖게 된다.
삶의 곡선이 서서히 위를 향해 올라간다. 입에서 콧노래가 슬슬 흘러나온다. 이제는 걸어가다가 예쁜 꽃을 보면 눈길도 주고, 지팡이를 이용해 장난도 치고, 그렇게 생동감 넘치게 살아간다. 다시 위기를 극복한 것이다. 앞으로도 위기는 극복할 것이고, 더 자주 그렇게 될 것이다.
<삶을 견디는 기쁨> p.139
삶의 곡선을 제대로 타야 한다. 그 경사는 되도록 완만해야만 한다. 요가, 명상, 산책, 종교가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나 자신에 대한 탐구가 필요하다. 진정 내가 나에게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알고 싶다.
자, 당신의 존재가 좁고 깊은 호수라고 한번 상상해 보라. 그리고 그 수면이 바로 의식이다. 그곳은 밝은 빛을 비추고 우리가 생각이라고 부르는 일이 그곳에서 일어난다. 한편 그 수면을 형성하는 호수의 분자는 무한히 작다. 그곳의 분자는 공기 또는 빛과 접촉하면서 물이 새롭게 변화하고 풍성해지기 때문에 가장 멋지고 흥미로운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수면에 있는 물 분자 자체는 쉴 새 없이 바뀐다. 끊임없이 밑에 있는 물 분자가 위로 올라오고, 또 위에 있는 물 분자가 아래로 내려가면서 흐름이 생기고 보충을 하기도 하고 위치 이동이 일어난다. 또한 어느 물 분자나 한 번쯤은 위에 머물고 싶어 한다.
물로 이루어진 호수처럼 우리의 자아 혹은 우리의 정신 역시 수천, 수백만 개의 분자, 즉 끊임없이 성장하고 교체되며, 무언가를 소유하고 기억하며 표현하려는 욕구로 이루어져 있다. 호수에서 우리의 의식이 보는 부분은 좁은 수면뿐이다. 정신은 수면 밑에 펼쳐진 무한하게 넓은 부분을 보지 못한다. 그러나 넓고 어두운 공간을 벗어나 좁은 수면의 밝은 부분을 향해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교체가 진행되는 정신은 풍부하고 건전하며 다행히도 능력이 있는 것 같다.
<삶을 견디는 기쁨> p.235~236
마음에 드는 비유다.
헤세는 넓고 어두운 호수 밑 무의식의 물 분자를 수면으로 끌어올리라고 한다. 모든 것은 표면 위로 올라와야 하는데, 해롭다고 인식되는 것을 막는 것은 <윤리>라고 한다.
하지만 사실상 해롭거나 이로운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은 선하거나 중립적이다. 개인은 누구나 자신에게 속하며 스스로에게 유익하지만 표면 위로 올라와서는 안 되는 것들을 내면에 지니고 있다. 윤리는 그런 것들이 위로 올라오면 불행이 따른다고 가르친다. 하지만 그로 인해 오히려 행복이 따를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표면 위로 올라와야 하며 윤리에 복종하는 사람만 불쌍해질 뿐이다.
<삶을 견디는 기쁨> p.236~237
나는 이 부분은 반대한다. 타인을 공격하고 해치는 이들도 분명 존재하기 때문이다. 무의식중에도 자신의 쾌락을 위해 타인을 가스라이팅 하는 이들을 본 적이 있다.
나의 행복만큼 타인의 행복도 존중받아야 한다. 내 무의식 속에도 남들에게 말할 수 없는 괴물이 산다. 언젠가 이 괴물도 수면 위로 올라오겠지만, 그때는 내가 컨트롤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