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는 ‘나’라는 사람을 얼마나 설명해 줄까? 인간의 평균 수명은 1800년대에 30~35세였는데, 1900년대에는 45~50세가 되었고, 현재는 1년에 세 달꼴로 수명이 연장되고 있다. 평균 수명이 길어지면 그저 살날만 늘어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삶과 맺는 관계가 근본적으로 바뀐다. 학업, 직업, 가족, 사랑에 관한 가치관이 이미 이전 세대와 상당히 달라지지 않았는가. 서류상의 나이가 나라는 사람을 설명하는 데 부족함이 커질수록 우리는 앞으로의 날들을 어떻게 살아갈지 자신의 길을 스스로 찾아야 한다.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사람이 왜 저래?”라는 누군가의 흉을 들어본 적이 있지 않은가. 한때 나이는 한계, 제약의 다른 이름이었고 나잇값을 못 하는 건 부끄러운 일이었다. 나이를 먹을수록 ‘하면 안 되는 일, 포기해야 하는 일’의 리스트는 길어지기만 했다. 이러한 통념에 대해, 이 책은 ‘나이듦’에 관한 새로운 사유를 전하며 “포기를 포기하라”고 과감하게 말한다. 아직도 삶이 한창인데 왜 정리하고 양보하고 포기하면서 살아야 할까? 자리, 욕망, 사랑, 죽음 등의 주제에 대해 저자가 던지는 10가지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 보자. 오래 살고 싶은가, 치열하게 살고 싶은가? 존재의 피로와 황혼의 우울을 어떻게 견딜 것인가? 인생을 계속 뜨겁게 움직이는 힘은 무엇일까?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기대와 설렘의 시간으로 만드는 것은 결국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
[인터넷 교보문고 제공]
50세가 되면 인생이
정말로 짧아지기 시작한다.
생이 짧으면
치열하게 살 이유가 생긴다.
50세를 넘으면 이런저런
욕구가 샘솟아 마음이 급해진다.
언제 병이나 사고로
세상을 떠날지 모르니 더욱 그렇다.
르네 데카르트는
˝지금의 나는 다음 순간에도 자신이
이러할 것이라고 보장하지 못한다˝ 고 했다.
의학이 발전에도 불구하고 미래의 불확실성은
17세기보다 결코 덜 비극적이지 않으며
매일매일의 덧없음을 상쇄해주지 않는다.
의학에서는 사람이 45세가 넘으면
관자놀이에 총구를 겨누고 사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한다.
발사를 늦추느냐 방아쇠를 당기느냐는
그 사람에게 달렸다.
행복한 노년의 비결은 오히려
정반대의 태도에 있을 수도 있다.
좋아하는 일, 할 수 있는 일을
최대한 늦게까지 하라.
어떠한 향락이나 호기심도
포기하지 말고 불가능에 도전하라.
생의 마지막 날까지
사랑하고, 일하고, 여행하고,
세상과 타인들에게 마음을 열어두어라.
‘넌 하나도 안 변했다˝라는 말은 조심스럽운 확인 요청이다. 30대가 됐든 60대가 됐든 우리는 상대가 듣기 좋은 말을 해주기를, 우리가 표준시간에서 잘 버티고 있다고 확인해주기를 원한다. 오랜만에 옛 친구를 만나면, 목격자가 유리창 너머로 범인 얼굴을 확인 할때처럼 안면 인식 프로세서가 작동한다. 뇌는 재빠르게 계산을 수행하면서 상대의 이목구비를 뜯어보고 기억을 되살려냈다.-61
60세가 넘으면 근본적인 질문이 떠오른다.
무엇이 우리를 살게 하는가?
무엇이 아침마다ㅡ우리를 침데에서 일으켜 세상사에 다시 매진하게 하는가?
20세 때는 있는 힘껏 미래를 열고 싶다.
뭔가 놀랍고 대단한 일을 해내고 싶다.
이때는 기계적인 삶이 혐오스럽고 어떻게든 몰두 할수 있는 일에 열광하고 싶다.-72
스쳐 지나가는 시간, 희마한 기쁨조차도 어찌나 다채롭고 충부한지 똑같은 시간,똑같은 기쁨은 결코 없다.하루동안의 시간에도 오만가지 가능성이 꿈틀거린다.광맥에 묻혀있는 다이아몬드를 캐내듯, 그 가능성을 다시 발굴해야 하는 것이다.
운명이 빈약할수록 픽션은 건실해진다.픽션이 한없이 작은 것을 파고들 때, 보일듯 말 듯한 뉘앙스를 잡아낼때, 지나칠수도 있는 것을 비극의 반열에 올려 놓을때는 실로 그렇다. 성장이란 모든 것에서 찬란함을 재발견하는 것이다.썰물의 나날에도 미세한 격량은 일어난다.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에도 서사 구조는 있다. 그게 바로 소설적인 것이다. 픽션은 이야기라는 복된 짐을진 욕망에서 나온다.-73~74
‘하루하루를 삶의 완성처럼 살아라‘라는 말은 그만큼 현명하게 살라는 뜻이지만, 최대한 즐기면서 살라는 뜻이기도 하다. 세상은 처음 보듯 바라보고 처음 사는 듯 살아야 한다.마지막으로 보듯 보고 마지막으로 사는 듯 살아야 한다. 일단은 세살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 새로워져야 한다.그리고 생을 언제라도 빼앗길수 있는 재화처럼 여기고 지금 당장 누려야 한다. 이 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으니 현재에 집중해야 한다.섬광 같은 순간, 시간의 지속으로 부터 훔쳐낸 순간이다.
어느 나이에나 ‘잘 사는 법‘에는 상호 보완적인 두 제안이 있다. 카르페디엠은 날과 시간과 기회를 붙잡는 기술이다, 또 다른 제안은 언제 끝날지 모르는 장기적인 계획을 품는 것이다. 매 순간이 결정적이고, 매 순간은 지나가는 과정이다.그렇지만 매일 아침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면 즐겁게 살 수가 없다. 기쁨, 사랑,우정은 공동의 미래를 열어준다는 가치가 있을 뿐이다.-106
철학은 삶을 배우는 것, 특히 유한의 지평에서 다시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하루는 호기로운 아침, 눈부신 정오, 차분한 석양까지, 사랑의 한 평생과 닮았다. 또한 인생은 봄과 뜨거운 여름, 가을과 겨울이라는 한 해와도 구조가 같다. 그래도 우리는 내일도 깨어날테고 내년에도 인사를 나눌 것이다.-107
‘황혼은 완성의 시기인가, 또 다른 사춘기인가?˝
어느새 4월도 말일로 가까와 지고 있고, 세계적인 지성이 전하는 나이듦의 새로운 태도‘ 아직 오지 않는 날들을 위하여‘를 읽었다.
책을 읽다 보니 언젠가 어느 한 쇼핑몰 앞에서 친구를 기다리며 마주했던 한 장면이 떠올랐다.
70대 어르신들의 동창 모임이 있으셨으리라 짐작되는 데
문 앞에서 할머님 두 분의 담소를 나누시다가 친구분으로 보이는 또 다른 할머님이 계단을 올라오시자 반갑게 맞으시며 ‘어머 ~넌 하나도 안 변했했다아~‘한다.속으로 정말 ? 주름진 얼굴에 굽은 허리의 진짜 할머님인데?!...‘
하면서도 깔깔거리시며 소녀 같은 어르신들 모습에 미소가 지어졌다.
아직 50대인 난, 어느땐 오늘이 마지막인것처럼
또 어느 땐 카르페디엠을 외치며 나름 여기까지 살아왔다.
기계처럼 일하는 것이 싫었고 뭔가 몰두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죽어라 애써왔는데 요즘 들어 그렇게 안달복달하며 살았던 시간이 그런 내가
딱해지곤 한다.
나조차도 이제 몇년 후면 할머니가 되리라.
죽음이 두렵지 않다면 저깆말일지도 모르겠다
그보다 앞서 나이가 들어가며 가장 걱정이 되었던 건 아마도 건강과
가정경제였던것이리라.
미리 걱정하고 나이듦을 두려워 하는 나에게
노작가는 새으이 마지막 날까지 ‘사랑하고 일하고 춤추라!‘충고한다.
원래부터 우리는 잠시 스치는 존재,
우리를 초월하는 전체의 한 파편이었다.
그동안 잘 버텨왔고 아직도 세상의 호의를 느낄수 있음을 기뻐하자.
행복한 인생이었든 고통스러운 인생이었든,
어느덧 땅 거미가 내려 앉으니 우리에게 주어진 행운의 크기가 가늠된다.
우리는 상처 받았지만 충만함을 얻었다.
이루어지지 않은 기도가 참 많다. 그렇지만 우리가 올리지 않았던 기도가
100배로 성취되기도 했다.
우리는 악몽을 관통했고 보물을 받았다.
삶은 참 잔인하거나 지독할수도 있고 충성 할 수도 있었다.
매일 아침, 받은 바에 감사하면서 입 밖으로 소리내어 ‘고맙습니다‘라고
말하자.
당연리 받았어야 했던 것은 하나도 없었다.
이 터무니 없는 은총이 감사하다.-304
마지막 페이지를 읽으면서 참고 있는 눈물이 터져나온다.ㅜㅜ
‘이루어지지 않은 기도가 참 많았지만 돌아보면 울리지 않았던 기도가 100배로 성취되었고 ‘
그럼에도 하나님이 주신 가장 은혜로운 보물인 사랑으로 모든 것을 감싸주는 지혜를 주시고 나날히 충만해지게 해주기에....
‘하루하루를 삶의 완성 처럼 살아라‘
오늘 하루도 감사로 하루를 시작해본다.
요컨대, 흔들림 없이 자기 힘을 시험하라.
하루하루가 완전한 인간 극장이다.
하루는 삶을 잘라내 보여주는 상징체계다.
눈부신 새벽, 의기양양한 정오, 수고로운 오후, 차분한 황혼을 보라.
잠에서 깨어나는 것은 일상의 죽음에서 벗어나는 작은 부활이다.
우리는 매일 죽고 다시 태어난다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