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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뢰성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김선영 옮김 / 리드비 / 2022년 9월
평점 :
나오키상 수상을 포함해 일본 미스터리 4대 랭킹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본격 미스터리 베스트10>, <주간문춘 미스터리 베스트10>, <미스터리가 읽고 싶다!>에서 모두 1위를 차지하며 신기록을 세운 소설, 『흑뢰성』. 화려한 타이틀답게 출판사에서 적극적인 홍보활동을 하고 있었다. 리뷰 및 피드도 활발했다. 역사소설의 왕도와 미스터리의 정수를 모두 성취한 걸작이라고 한다. 내게 있어 ‘역사+미스터리’는 그냥 넘길 수 없는 조합이라……. 호기심을 가지고 읽었다.
이 책은 일본 전국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게다가 책의 주인공은 가장 유명한 전국시대의 삼걸이 아니다. 삼걸은 이름만 언급될 뿐, 직접 등장하는 경우는 단 한 번도 없다. 주인공은 한때 오다 노부나가 휘하의 무장이었던 아라키 무라시게다. 소설은 그가 노부나가에 반기를 들고, 아리오카 성에서 농성을 하는 시점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한편 무라시게를 설득하기 위해 오다 측에서 군사(君師) 구로다 간베에가 찾아오는데, 무라시게는 간베에를 감옥에 가둔다.
초반부부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책, 진입 장벽이 높겠다는 생각. 전국시대라는 배경이 안그래도 낯선데다가, 전국시대 당시의 인명?지명?관직 등이 독자를 매우 혼란스럽게 만든다. 예를 들어 주인공 아라키 무라시게는 과거에 불리던 이름이 따로 있었고, 관직명으로 지칭되기도 한다. 한데 이런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또 전국시대의 유명 인사들이 등장하지만, 유명세를 떨치기 전의 이름으로 나오는 경우도 있다. 하시바 지쿠젠이 단적인 예다. 이후 히데요시란 이름이 나오지만, 그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임을 한번에 알아차리는 독자가 과연 얼마나 될까? 또한 이야기는 아라키 성을 주 무대로 진행되므로, 등장인물들은 대부분 무라시게의 사람들이다. 초반부터 부하들이 대거 증장해서, 헷갈렸다. 처음 등장했을 때 인물이 소개된 부분을 출판사 측에서 등장인물 표를 제시해줬다면 더 편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내 경우에는 이미 『대망』을 독파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수월하게 읽을 수 있었다. 전국시대에 대해 약간의 배경지식이 있어서인지, 내용이 무척 흥미로웠다! 전국시대의 역사적 흐름을 배경으로, 그 사이의 공백을 채운 작가의 절묘한 상상력에 감탄하며 읽었다. 역사적 미스터리를 소설적 상상력으로 차근차근 풀어나가는 작가의 솜씨가 일품이었다. 탄탄한 구성과 정교한 서술이 돋보이는 각 장, 그리고 그 과정들이 응집된 결말에 탄복했다. 인과가 움직이기 시작했고, 마침내 인과가 돌아온다. 수미상응의 완벽한 구성. 구성과 전개가 완벽했다. 평단의 호평이 이해가 갔다.
또 소설은 주요 등장인물의 내면 심리를 묘사하는 부분에서도 나무랄 데가 없다. 아라키 무라시게와 구로다 간베에. 두 인물의 심리를 쫓는 것도 책을 읽는 또다른 재미였다. 특히 주인공 무라시게는 결말을 생각하면 참 모순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작가는 그 모순이 캐릭터성과 충돌하지 않으면서 결말이 합당하게 느껴질 수 있도록, 심리 묘사에 공을 들였다. 아라오키 성의 성주이자 아라키 가문의 당주로서 굳건하고 강직한 모습을 보이던 무라시게. 그가 시간이 지날수록 흔들리고 번민하다가, 결말 부분에서 의외의 모습으로 변모하는 장면은 어떤 의미에서는 전율이었다.
구로다 간베에도 흥미로운 인물이다. 그는 작중에서 싱그러운, 외모가 아름다운 무사(p18)라고 묘사된다. 그랬던 그가 지하감옥에 갇히고 난 뒤, 가혹한 환경에서 버티느라 몰골이 말도 안 되게 변해버린다. 간수에게 맞아서 머리에 끔찍한 흉터가 생기고 오랫동안 움직이지 못한 탓에 절름발이가 되어버린다. 안타까웠다……. 한데 간베에의 진가는 외모가 아니라 두뇌에 있다. 무라시게는 성내에서 기괴한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간베에의 지혜를 빌리러 지하감옥으로 내려간다. 간베에는 안락의자형 탐정에 가까운데, 무라시게의 말만 듣고 사건의 진상을 맞추는 비범한 통찰력을 보인다. 역사가 곧 스포, 간베에의 미래를 알고 있는 이상 느긋한 마음으로 그의 활약을 지켜보았다. 그의 비범함은 특히 결말에서 빛난다. 또한 무라시게와 달리, 등장인물 중 유일하게 해피엔딩을 맞이한 인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처음 제목을 봤을 땐 무협소설인가? 했던 『흑뢰성』(‘흑뢰성’은 간베에가 갇힌 감옥을 의미한다). 요네자와 호노부의 작가 활동 20년이 응축된 기념비적인 걸작이라 생각한다. 요네자와의 책으로는 『왕과 서커스』를 읽었을 뿐인데, 그때에 비한다면 작가로서의 기량이 절정에 올랐음을, 이 책을 보며 느꼈다. 흥행성과 작품성을 거머쥔 보기 드문 작품이다. 간만에 묵직한 중량감을 제대로 느끼며 읽은 역사 소설이었다.
덧.
1. 전국시대 문화
무사에게 투구는 중요했다. 신분을 증명하는 물건이기 때문이다. 또한 무사들에게 전투에 있어 수훈을 세우는 방법 중 하나는 투구 쓴 무사의 목을 치는 일이었다. 그것도 직접 칼로 쳐야 했다. 활과 철포는 확인할 길이 없으므로 수훈으로 인정받기가 어려웠다. 투구 쓴 머리를 베는 것은 이름 있는 적을 쓰러뜨렸다는 최고의 증거(p189). 반면 졸병은 아무리 쳐도 공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 조금 씁쓸했다.
한편 무사가 가져온 투구 쓴 머리는 사화장을 해야 한다. 오물을 씻어내고 보기 좋게 꾸미기 위함이다. 적이라 해도 그 대우는 같았다. 작중에서는 적의 벤 머리가 흉상(凶相)으로 변한 것이 문제가 되는데, 흉상을 묘사하는 부분은 꽤 오싹했던 장면이었다.
2. 이 소설에서 가장 중대한 적으로 등장하는 오다 노부나가. 적이므로 그의 잔인한 행적들이 부각되어 나타난다. 그런데 그 잔인한 행적이 거짓이 아닌 사실이라는 점. 어쩌면 결말에 제시된 노부나가의 최후 또한 이 소설에서 강조하는 인과가 적용된 경우일 수도 있겠다.
3.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딱 한 번 언급된다.
4. 전국시대는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가 참 많구나. 작가님, 다음엔 아케치 미쓰히데를 주인공으로 해서, 혼노지의 변을 다뤄보심이 어떠하실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