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는 오래 산다 - 30년 문학전문기자 생애 첫 비평에세이
최재봉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평소 문학보다는 비문학을 즐겨 읽는지라, 내 독서이력에는 상대적으로 문학이 부족한 편이다. 이런 내가 문학 독서를 보충해야겠다고 생각한 건 작년에 읽은 김금희 작가님의 동아일보 칼럼과 <책 먹는 법>(유유)의 ‘문학 읽는 법’ 챕터 때문이다. 칼럼과 책 모두 <파이 이야기>의 저자 얀 마텔이 캐나다 수상에게 문학을 읽으라며 4년가량 편지를 보낸 일화를 소개하는데, 특히 마텔이 문학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한 말에 정곡을 찔렸다.



"이에 대해 마텔은 일반인이라면 상관없지만 “나를 지배하는 사람이라면 그가 어떤 책을 읽는지가 내게 무척 중요하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면서 만약 수상이 문학을 읽지 않는다면 인간 조건에 대한 통찰력을 어디에서 얻고, 인간다운 감성을 어떻게 구축할 것이며, 무엇을 근거로 상상하고 그 상상의 색깔과 무늬는 무엇이겠느냐고 반문합니다."


김이경, <책 먹는 법>(유유), p.138 

*인용문 원 출처는 <각하, 문학을 읽으십시오>(작가정신), 2013



  <이야기는 오래 산다>는 저자가 30년간 한겨레신문의 문학 전문 기자로서 취재해 온 한국 문학의 궤적이 담긴 책이다. 이 책으로 나에게 부족한 문학적 소양을 어느 정도 채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조금은 게으른 생각으로 읽게 되었다. 물론 이 한 권으로 그간의 편독을 벌충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저자의 글을 따라가며 한국 문학의 주요 작가들과 작품들을 충실한 해설과 함께 접할 수 있었다. 서문에서 저자는 기자 생활을 마무리하는 성격으로서 이 책을 정의하는데, 나에게는 이 책이 한국 문학사 가이드처럼 느껴졌다.


  본문에는 작품 비평과 한국 문학의 주요 작가에 대한 소개, 문학 관련 쟁점이 담긴 칼럼이 수록되었다. 특히 1부에서 3부까지는 문학 작품이 세계와 연결되는 과정이 돋보였다. 1부에는 저자가 주목해 온 작가나 작품들을 소개하는 글이 배치되었다면, 2, 3부에서는 개별 작품에서 한 발짝 멀어져 작품을 둘러싼 외부 환경을 다뤘다. 한국 문학의 경향이나 문단 권력 등 쟁점이 되는 내용뿐 아니라, 사회 속에서 문학이 차지하는 역할을 제시하며 문학이 세계와 관계 맺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부록으로 실린 ‘북에서 만난 작가들’도 흥미로웠다. 2005년에 북한에서 열린 ‘6·15 남북공동선언 실천을 위한 민족작가대회’에서 남북 작가들이 만났는데, 이 대회를 취재한 기사가 실린 것이라고 한다. 평소 알지 못했던 북한 작가들을 알 수 있어 새로웠다. 북한의 홍석중 작가가 <임꺽정>을 쓴 벽초 홍명희의 손자라는 것도, 그의 작품 <황진이>가 한국에서 인기를 끌었다는 것도 처음 알게 되었다. 이산가족이라는 공통점을 가진 남과 북의 두 시인이 만나 슬픔을 나누는 장면은 눈시울을 자극했다. 한겨레에서 최초로 북한 작가들을 취재했다고 하니, 저자만의 차별점이 드러나는 내용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책을 읽을수록 관심이 가는 작품이 많아져 문학 독서에 대한 의지를 다잡을 수 있었다. 황석영 작가의 장편소설 <손님>이나 진이정 시인의 <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 등, 발표된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현 사회에도 유효한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오래 산다"라는 제목이 말해주듯, 이야기는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우리 곁에 살아서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고 사회에 필요한 질문을 던질 수 있는 힘을 지닌 것 같다. ​​


한겨레출판으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쟁 이후의 세계 - 다원 패권 시대, 한국의 선택
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전쟁 소식에 무뎌져 간다는 게 무섭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이어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 계속되는 상황이다. 무고한 시민들이 입은 피해에 경악하면서도, 전쟁이 당장 나의 일상에 관계되지 않는다는 감각 때문인지 가끔 뉴스를 찾아보는 것 이상으로 관심을 가지진 못했다. 방위 산업 수출액이 늘었단 기사를 보면서도 수출된 무기가 평화를 위협하는 도구가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 전쟁의 심각성을 실감하지 못했던 나에게 이 책은 계속되는 전쟁의 의미를 되짚고 평화로 이행하는 일이 시급한 과제임을 느끼게 해 주었다. 저자는 러시아의 사회 상황과 국제 정세를 분석하며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의미를 풀어낸다. 러시아계 한국인으로서 러시아 사회가 한국 사회에 던지는 시사점을 짚어내고, 한반도 평화를 위해 조언한다는 점도 특징적이다. 일상화된 전쟁과 무기 경쟁에 무뎌진 감각을 깨우는 ‘평화인지감수성’이 필요한 이들에게 추천한다.


  러시아는 옛 소련 연방이었던 우크라이나 영토를 회복해 자원과 노동력을 획득하려는 제국주의적 의도로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저자는 푸틴이 상대적으로 약화된 미국의 패권을 감지했기 때문에 이번 전쟁을 결정했다고 본다. 즉, 러-우 전쟁은 미-러 사이의 대리전 성격을 지닌다. 동시에 그 이면에는 경제적인 문제도 연관돼 있다. 러시아는 군수 산업에서 상대적으로 우위를 점하고 있기 때문에 전시 특수를 이용해 무기 산업에서 이익을 취하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서방의 제재에도 불구하고 전쟁 동안 러시아의 무역 이익이 증가했다고 한다. 이 외에도 러시아 내 극소수에 불과한 좌파 세력, 부족한 계급 의식, 관료 집단에 대한 견제 등 다양한 사회적 상황이 러시아의 침략을 가속화한 요인으로 지목된다.


  한편, 최근 여러 열강이 신자유주의와 세계화를 벗어나 전체주의, 보호주의로 회귀하는 모습이 눈에 띈다. 일례로 러시아와 중국은 협력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인도, 베트남 등 주변 아시아 국가와 함께 서로를 견제하는 파편화 경향을 보인다. 저자는 각 나라가 고립돼 자국의 이익을 추구하는 현상을 ‘다극’ 체제를 넘어 ‘무극’ 체제로 이행하는 국면으로 풀이한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이 미국에만 협력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여러 열강의 주도권 싸움에 휘말릴 우려가 있다. 저자는 이 지점에서 전쟁과 군사 제도가 현재의 민주주의나 복지 등 여러 사회 제도의 형성과 긴밀하게 연결돼 있고, 여전히 국가의 서열을 결정짓는 요소는 군사력이라는 점을 지적하며 냉정한 현실 인식을 요구한다. 전쟁의 위험은 여전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며, 군사적 충돌을 막기 위해 정부의 신중한 태도가 필수라는 것이다.


  러-우 전쟁의 의미와 국제 정세에 대한 내용 외에도 러시아와 한국의 민족주의를 비교 분석한 3장의 내용이 특히 흥미로웠다. 러시아와 한국은 ‘주변부 콤플렉스’라는 공통된 민족 정체성을 공유한다. 저자는 그 예시로 우리나라가 러시아 교과서에 실린 한국 관련 서술이 너무 짧다고 문제 제기한 사례를 제시하며, 러시아도 미국, 유럽 등 서방에 대한 콤플렉스가 강해 서방의 인정을 원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을 짚는다. 이러한 열등감은 ‘타자’에 대한 민감성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피해자 민족주의’가 강해지면 우리 민족이 누구도 침략한 적 없다는 ‘수난사’만이 강조돼 침략을 행한 과거를 은폐하는 결과를 낳는다. ‘민족’이라는 개념 자체도 ‘몰계급적 집단성’만을 내세워 같은 민족 내의 계급 차이로 인한 피해를 감춘다는 점에서 문제다. 일제 강점기 때 많은 조선 기업인이 일제의 침략을 기회로 삼아 이득을 취한 것이 대표적이다.


  푸틴은 이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우크라이나 정체성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데, 우리나라도 비한국적 조선인 디아스포라 집단에 대해 민족주의를 강요하고 있는 것은 아니냐는 저자의 질문이 인상적이다. 저자가 예시로 든 재중국 동포에 대한 차별은 물론이고, 총련계 재일조선인에 대한 배제도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했다. 관련 문화 예술인이나 지원 단체를 제재하는 움직임까지 나타난 상황이기 때문에 민족주의 문제를 성찰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주변부 민족 정체성’을 편협한 민족주의가 아니라 타자에 대한 이해로 확장해 나가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우리 안의 민족주의를 넘어서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연대할 때 평화의 목소리에 힘을 실을 수 있을 것이다.



한겨레출판으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기획회의 602호 : 2024.02.20 - #2024 로컬 트렌드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지음 /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 2024년 2월
평점 :
품절


이번 호에서는 로컬만의 고유한 이야기를 찾아내는 데 성공한 사례들이 눈에 띄었다. 제주 한경면에 정착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나의 맥락으로 연결하면서 콘텐츠를 만들어 낸 제주 <Sarm> 잡지나 지역 출판사들의 콜라보로 만들어진 어딘가에는 @ 있다시리즈, 로컬X컬처 키워드 연재의 익산 이야기처럼 자기가 속한 지역이 가진 고유한 이야기를 포착하는 것이 로컬 크리에이터들에게 주어진 과제인 것 같다. 나아가 이러한 이야기들이 지역민들로부터 공감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는 것이 중요해 보인다. (익산에서는 글에서 소개한 이야기들이 잊히고 있다고 해 안타까웠다…)


특히 대전의 이유출판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는데, 지역이라는 틀에 갇히고 싶지 않다는 생각으로 출판사를 운영하던 필자가 어딘가에는 @ 있다시리즈를 만들며 책을 만드는 일은 본질적으로 지역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 놀라웠다. 필자가 시리즈 제작에 앞서 확신이 없어 망설일 때 힌트가 되어주었다는 오키나와의 지역 출판 사례도 흥미롭다. 오키나와에서는 일본 본토와 다른 문화를 지키기 위해 지역 서점과 출판사가 긴밀한 협력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시민들도 오키나와의 고유한 이야기를 중요시한다고 한다. 지역적 정체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아서 가능한 일인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이유출판이 시리즈를 낸 후 대전의 독자들이나 독서 모임, 활동가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었다는 것을 볼 때 우리나라에서도 충분히 시도해 볼 수 있는 모델이 아닐까 싶다.


기획자 노트 릴레이와 ‘2024 동네서점대상코너에서는 질문하는 능력이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모든 사람에 대한 이론>이 부조리한 현실에 질문을 던지고 <대전은 왜 노잼도시가 되었나>가 서울이라는 모범 답안이 제시되는 상황이 과연 바람직한지를 질문한 것처럼, 지금껏 당연하게 여겨져 온 사회적 관습이나 주류적인 가치에 대해 질문하는 것은 대안적인 가치의 가능성을 인식하는 계기가 된다고 생각했다. 앞서 제시한 로컬 기반 콘텐츠도 서울 중심적인 사회에 대한 의문에서부터 시작했을 것이다. 모범 답안에 더 많은 질문이 제기되어 더욱 다채로운 이야기를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기획회의 601호 : 2024.02.05 - #2024 로컬 담론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지음 /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 2024년 1월
평점 :
품절


대학에 진학하고 나서야 서울에서 나고 자란 것이 특권이었음을 알게 되었다는 편집위원의 인트로에 공감이 갔다. 나 역시 대학 입학 후 타 지역 출신의 친구들을 만나기 전까지는 내가 서울에서 혜택을 누리고 있었다는 점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친구들 덕분에 다행스럽게도 나의 좁은 시야를 자각할 수 있었다.

최근 지역 인구가 감소하면서 지역소멸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도시의 경쟁적인 분위기에 피로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로컬의 가치가 강조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번 호를 읽으면서 경향신문에서 읽었던 ‘사표 쓰고 귀농’과 ‘탈서울 라이프’ 연재 기사가 떠올랐다. ‘사표 쓰고 귀농’은 기자가 사표를 쓰고 귀농을 한다는 컨셉으로 쓰인 기사이고, ‘탈서울 라이프’는 서울에서 살다가 지역으로 이주해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기사다.

서울에서만 살던 나로서는 쉽게 상상할 수 없는 귀농·귀촌 생활을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할 수 있어서 재미있게 읽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나처럼 서울에서 살던 청년들이 지역에 정착한 사례가 인상적이었다. 서울에서는 빠르고 치열하게 살지 않으면 생존하기 어렵다는 그들의 문제의식을 나도 똑같이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슷한 시기에 한겨레출판사에서 <탈서울 지망생입니다>를 출간한 것으로 볼 때, 그러한 문제의식이 비단 나만의 생각은 아니었던 것 같다.


*


‘지금 로컬을 말하는 이유’에서 조희정 연구원 역시 사람들이 로컬에 주목하는 이유는 지금 나의 삶이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경쟁과 발전 패러다임 하에서 획일적인 가치만을 좇았음에도 삶이 나아지지 않았기 때문에 주류에서 벗어나 행복의 다양한 형태를 고민할 필요가 생겼다는 것이다. 이어지는 두 개의 글은 ‘로컬 콘텐츠’를 주제로 제주와 양양의 사례를 소개하며 성공적인 로컬 콘텐츠를 만들기 위한 방법을 제시한다. 두 필자가 공통적으로 로컬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브랜딩을 강조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1960~70년대에 제주는 주어진 자연환경을 기반으로 감귤 산업과 야자수를 도입해 고유의 정체성을 만들어냈다. 나아가 ‘보헤미안’이라는 키워드도 제주로 이주민을 끌어들이는 역할을 했는데, 이는 개인의 라이프스타일에 기반한 브랜딩이 이루어진 결과다.

한편, 로컬 콘텐츠가 한철 유행에 지나지 않도록 고민하는 것도 중요해 보인다. 최근 언론 보도에 따르면 ‘제주살이 열풍’이 끝나고 20대 청년층의 인구 유출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고 한다. 제주 청년이 겪는 어려움 1위로는 일자리 부족이 꼽혔다. ‘로컬X컬쳐 키워드’ 연재에서 박우현 에디터가 지적했듯, 지역 소멸을 막기 위해서는 지역 인구가 도시로 유출되는 이유를 짚어봐야 한다. 그런 점에서 청년의 지역 정착을 장려하기 위한 정책적인 노력이나, 밀양에서 관계 인구를 창출하기 위한 시도들이 소개되어서 좋았다. 계간 창작과비평 2023 겨울호에서도 서울에 살던 전북 부안 출신 청년이 부안으로 다시 돌아와 지역 활동가로서 정착한 이야기가 실렸는데, 이렇게 청년들이 지역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글을 더 많이 볼 수 있기를 바란다.

지역출판사의 역할을 제시한 ‘나는 대구의 출판인이다’도 인상적이었다. 대구의 학이사는 지역출판사가 단순히 책을 만드는 것뿐만 아니라 지역 시민의 삶을 기록하고, 지역의 도서관이나 책방과 함께 독서 문화를 만드는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코로나19 확산 당시 지역 시민들의 삶을 기록해 책으로 엮은 것처럼 그 지역만의 차별화된 이야기를 발굴하는 능력이 지역출판사에게는 큰 강점이 될 것 같다.


*


이 외에도 <보통 이하의 것들>의 기획부터 출간까지를 다룬 녹색광선 대표의 글이나 시네마틱 쇼츠, 맥락이 담긴 큐레이션 등 읽을거리가 많아 즐거웠다. 다음 호에 실릴 이야기들이 궁금해진다.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본 헌터 - 어느 인류학자의 한국전쟁 유골 추적기
고경태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본 헌터>는 A4-5를 비롯한 유골들의 삶과 이들을 땅 밖으로 내보낸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한국전쟁 시기 아산 지역 민간인 학살의 진상을 탐구하는 책이다. 유해로 발견된 피해자 개개인이 자신의 삶을 진술하는 형식으로 서술된 홀수 장과 유해 발굴을 통해 이들의 삶을 추적하는 인류학자 '선주'의 여정이 담긴 짝수 장으로 구성됐다. 저자는 유골이 주체가 되어 자신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을 활용함으로써 전쟁이라는 거대담론 속에 가려진 개인의 삶에 주목하고, 독자로 하여금 국가 폭력의 비극성을 실감하게 한다. 책장을 넘길수록 홀수 장과 짝수 장의 간극이 좁혀지면서 인류학자 선주가 한국전쟁 유골을 탐구하기까지의 과정을 파악할 수 있었다.

민간인 학살의 원인은 이념 대립만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내용이 인상적이었다. 학살이 발생한 표면적인 이유는 1·4 후퇴 당시 부역자 처형이었으나, 그 이면에는 지주 - 소작인 간 계급 갈등이나 사적 원한 관계가 포함되기도 했다. 1948년 농지 개혁 이후 지주들의 농지가 소작인에게 분배되었고, 곧이어 일어난 전쟁에서는 인민군 점령기에 소작인이 인민위원회의 간부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당시 지주들은 소작인에게 구타를 당하는 등 곤욕을 치렀는데, 인민군이 물러나자 지주들은 다시 소작인에게 폭력을 행사했으며 일가족을 몰살하기도 했다. 민간인 학살의 원인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복잡한 사회적 맥락을 고려해야 한다는 점을 깨달았다.

유해를 발굴할 때 공평하게 주목 받지 못한 뼈들이 있었다는 점도 기억에 남는다. 애초에 국가가 유해를 발굴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책에서 인류학자 선주는 국군 전사자 유해 발굴을 국가와 국민 간 계약 관계로 설명한다. 국민이 국가에 대해 여러 의무를 수행하는 만큼, 국가는 전사한 국민의 주검이라도 찾아서 돌려줘야 한다는 것이다. 조선인 강제 노동 희생자 유해 발굴에 참여한 승려 도노히라는 ‘역사와 목숨에 대한 상상력’을 강조한다. 그렇다면 국가 폭력 피해자 유해 발굴은 폭력으로 인해 사망한 이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이자, 고통받은 목숨들을 만든 역사를 성찰할 수 있는 기회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선주가 국군 전사자의 뼈와 대우중공업 노조 활동가의 뼈 두 개를 쳐다보는 장면에서는 국가 주도로 발굴되고 보호 받는 뼈와 관심의 대상조차 되지 못하는 뼈의 이미지가 대비되어 안타까웠다.

선주가 이념 문제에 좌우되지 않고 국방부나 진실화해위원회 등 여러 분야에서 폭넓게 유해 발굴 작업을 하는 모습은 학자로서의 탐구 정신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연구의 원동력은 이념보다는 지적 호기심이었다. 우리가 사실처럼 알고 있는 어떤 지식이 꾸며진 이야기일 수 있다는 ‘모던 미스’ 개념을 강조했다는 점에서도 진실을 탐구하려는 그의 의지를 느낄 수 있었다. 현재 2기 진실화해위원회가 민간인 희생자 유해 발굴을 담당하고 있는데, 발굴 참여 자격을 문화재 관련 학과 출신으로 제한하면서 인류학자 선주를 비롯해 발굴 경험을 쌓아온 이들이 작업에 참여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위원장과 관련한 잡음이 계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진상 규명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지 지켜봐야겠다.



한겨레출판으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