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멜 표류기 1218 보물창고 19
헨드릭 하멜 지음, 최지현 옮김 / 보물창고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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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3년...

무려 364년 전이다.

물론, 그 한참 전의 역사에 대해서도 숱하게 읽었고, 드라마나 영화로도 보아왔지만

그 풍경 속에 선 푸른 눈의 서양인이라니...

어떤 SF보다도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걸 보니, 내 머릿속 조선의 이미지가 참 씁쓸하다.


영국과 프랑스, 네덜란드 등이 동인도를 중심으로 해상무역 경쟁을 벌이던 대항해 시대,

네덜란드 서부 해안의 소도시에서 태어나 21세에 동인도회사 선원이 된 하멜은

타이완에서 일본으로 가던 도중 풍랑을 만나 제주도에 표착한다.

위풍당당했던 거대한 범선은 산산이 부서지고, 생사고락을 함께 한 64명 중에 36명만이 살아남아

어디인지도 알 수 없는 곳에 심하게 부상당한 몸으로 굶주린 채 내동댕이쳐진 그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해적들이나 추방당한 중국인들의 소굴에 온 건 아닌지 겁에 질렸던 그들은

6일만에 제주 목사를 만났지만, '야판의 나가사키'라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억류되고 두 달 뒤에야 통역자가 도착했지만,

26년 전 하멜 일행과 똑같은 운명을 겪고 귀화한 네덜란드인 벨테브레이는 모국어를 거의 잊어버렸기에

한 달 가까이 함께 지내고 나서야 겨우 의사소통이 원활해져 궁으로 자신들의 사정을 적은 서신을 보낼 수 있게 된다.

1954년 5월 말경, 궁으로 오라는 왕명을 받고 한양으로 이송되어 왕을 대면하고 송환을 간청하지만, 

효종은 생을 마감하는 날까지 이곳에서 자신의 돌봄 아래 살아야 한다고 대답하고, 

하멜 일행의 신무기 제조기술에 관심을 보이며 왕의 호위대로 그들을 임명한다.

그러다 그들 중 두 사람이 만주 사절들에게 접근하는 사건이 터지고,

서양인의 존재를 감추고 싶었던 조정은 사절에게 엄청난 뇌물을 주고 이들을 전남 강진으로 유배했다. 

그 이후, 그들은 전라도 절도사의 관할 아래 긴 시간을 살아가고,

현종 즉위 후 3년간의 극심한 흉년을 겪으면서 굶주림과 고된 노역 때문에 22명밖에 남지 않게 된다. 

13년의 억류 기간 끝에 하멜은 동료 7명과 함께 나가사키로 탈출하고 고국으로 돌아간다.


하멜의 담담한 서술 속에 담긴 조선은 때로는 나를 자랑스럽게, 또 더 많은 순간은 나를 부끄럽게 했다.

처음 만난 제주 목사처럼 선하고 이해심이 많은 사람들이 준 온정과 측은지심은

하멜 일행이 잔혹한 운명의 장난 속에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힘이 되었고.

결국은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가능성도 열어 주었다.

그러나, 수장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일관성 없는 행정 절차, 비합리성, 거짓에 대한 너그러움 등은

지금의 이 나라 속에도 남아 있기에 더한 부끄러움을 느끼게 한다.


하멜의 13년에 대한 서술보다 더 충격적이었던 것은 나가사키 수장의 질문들이었다.

1년 동안 일본에 잡혀 있던 시적 돌안 또 얼마나 많은 정보를 캐냈을까 생각하면 소름이 끼친다.

그 이후에 일어났던 우리 역사의 비극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나라 안에 잡아두는 것이 최선책이라 여겼던 효종의 결정은 완전히 틀렸다.

그들의 바람대로 바로 송환했다면, 조선에 대한 지나치게 상세한 정보들이 노출될 일은 없었을 테니까.


너무나도 드라마틱한 '하멜 표류기'가 드라마화되지 않은 것은

조선에 대한 부정적인 서술들과 평가들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짐작도 할 수 없을 만큼 큰 두 세계의 문화적, 정서적 차이를 감안하고 객관적으로 형상화해서

'진짜 조선'을 만나볼 수 있는 날을 기대해 본다.

그것이 우리가 그 과거들에서 벗어나고 달라질 수 있는 시작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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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기의 끝 - 아서 C. 클라크 탄생 100주년 기념판
아서 C. 클라크 지음, 정영목 옮김 / 시공사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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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 이도 같고, 페이지 수만 좀 늘었는데, 가격은 엄청 올렸네요..시공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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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감옥 에프 모던 클래식
미하엘 엔데 지음, 이병서 옮김 / F(에프)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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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자유'라는 단어에 늘 마음이 설렜던 젊음의 어느 날,

<자유의 감옥>이라는 제목의 책이 나를 멈춰 서게 했다.

읽기도 전부터 머릿속을 오가는 수많은 의문, 해석들...

'자유'와 '감옥'이라니- 이렇게 완벽히 대치되는 단어들을 하나로 묶다니!

단박에 이 작가의 헤아릴 수 없는 깊이에 빠져버렸다.


그렇게 처음 미하엘 엔데를 만났다.


그리고, 10년 후 <자유의 감옥>이 새로 나온다는 소식에 어찌나 가슴이 뛰던지!

항상 하얀 수염으로 뒤덮인 후덕한 미하엘 할아버지의 사진만 보다가

지성과 따뜻함을 겸비한 장년의 엔데님 표지에 또 한 번 마음이 설레고...^^:

뚫어지게 바라보시는 시선에 더 집중해 이야기로 들어오라는 무언의 압박이 느껴지는 건 나 뿐인가?


좋은 책은 평생에 걸쳐 여러 번 읽어야 함을 알지만, 인생은 바쁘고 신간은 쏟아져서 그게 당최 되지를 않아

그렇게나 충격적이었던 엔데의 이 책도 먼지 쌓인 책더미 저 아래에서 바래지고 있었다.

운명적으로 다시 만난 이 책은

표제작인 '자유의 감옥'를 포함해, 첫 이야기인 '긴 여행의 목표'부터 시작해 마지막 이야기인 '길잡이의 전설'까지

모든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 '모든 인간의 이야기'가 되어 있다.

이건 지나간 내 10년의 힘일 것이다.

그 땐 신선하고 기발하면서도 결코 가볍지 않은 줄거리에 흡입력 있는 필체를 지닌 '명작'이었었는데,

덤덤한 말투로 조용히 건네지만 살아 숨쉬는 '삶'들이 되어 있다.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집'이라는 평범한 소유물을 가지지 못함을 견디지 못해 평생을 방황하는 시릴은

사랑 없는 환경에서 자라 소유욕과 지력 밖에 가지지 않은 소시오패스가 아니라,

모든 인간의 내면에 늘 존재하는 불안과 허기에 맨몸으로 쫓기는 가엾은 어린 아이다.   [긴 여행의 목표]


많은 이들이 항상 부족하다고 불평하는 '자유', '완전한 자유'라는 환상을 좇아 살다가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수없이 많은 불확실성 중에 어떻게 인간은 모든 것을 아는 듯이 결정할 수 있는가'(p.287)라는

질문에 대답해야 하는 '인샬라'가 겪는 고통과 절망을 통해 건네주는 지혜는 실로 깊다.  [자유의 감옥]


순수한 영혼이었던 아이가 세상과 사람들과 살아가며 자유의 가벼움(사실은 공허의 가벼움)을 익히고

그토록 찾아 헤매던 찬란한 '진짜 기적의 세계' 앞에서 절망하고, 그리고 다시 받아들여지는 이야기는

"너 자신을 스스로 판단할 수 있다고 믿은 오만"이 진짜 잘못이라 가벼이 책망하고, 

세상의 어떤 과오나 공로도 문제가 되지 않는 빛의 세계를 이야기하며 우리를 위로한다. [길잡이의 전설]



"누군가 진짜 기적을 찾아 나선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그 문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p.335)던 인디카비아의 다짐은

미하엘 엔데의 마음에도 있었던 것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책을 덮었다.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그 숙제를 건넨 것 아닌가 하는.


<마법학교>에서 나오는 마법의 공식 '진실로 원하는 것만이 네 자신의 마음이 될 수 있다'는

미하엘 엔데가 평생의 작품을 통해 끝없이 상기시키는 삶의 공식인 것 같다.

'내 마음이 진실로 원하는 것'을 두려움 없이 들여다보고 포기하지 않고 찾아갈 수 있는 용기와 희망이야말로

아이들에게나, 어른들에게나 꼭 필요한 생명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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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한 해 자수로 많은 시간을 보내고 마음을 다스렸네요. 우리 나라 작가들의 책들이 더 많이 나왔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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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클래식 보물창고 40
나쓰메 소세키 지음, 장현주 옮김 / 보물창고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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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사하고도 작은 꽃들이 가득한 표지에서

바람 끝에 희미하고도 달콤한 향기가 아련히 매달려 오는 듯하다.

'아, 이 향기가 뭐였더라? 분명히 아는 건데...'

자꾸 되뇌이게 하는, 그러면서 잡히지는 않는... 안타깝고 답답한...

그래, 그런 '마음'이다.

우리 가슴 속에 어쩌면 가장 깊은 곳에 가장 오래 남아 있는 것은

한없이 알고 싶으면서도 알지 못했던, 알려주고 싶으면서도 알려주지 못했던

소중한 사람과 차마 나누지 못했던 '마음'의 흔적들일지도 모른다.

안타까움을 떨치지 못하며 책을 덮고 나니, 꽃들 속 '마음'이 다른 음조로 읽힌다. 


여름 피서지에서 우연히 만난 '선생님'에게 끌리어 그의 삶 속으로 들어선 순수하고 젊은 나,

그런 그를 아끼는 듯 곁을 주었다가도 다음 순간 어느새 뒤로 물러서는 선생님...

늘 그늘 속에 머물러 있는 듯한,

분명히 따뜻한 성정을 지녔음에도 혼자여야 한다고 스스로 끝없이 되뇌이는 듯한 선생님.


"천벌이니까." (p.29)


자신의 삶을 '천벌'로 스스로에게 선고한 선생님이

삶을 끝내기 직전 유서로 그 '천벌 받을 죄'를 고백한다.


'나는 수천만 일본인 중에서 오직 자네에게만 내 과거를 말하고 싶네.

 자네는 진실한 사람이니까.' (p.154)


선생님은 이미 세상에 없다.

'나'와 함께 선생님을 왠지 좋아하게 되어버린 나는 이미 늦어버린 슬픔과 상실감을 안은 채

유서를 읽는다.

그가 털어놓는 삶의 자취 하나하나가 다 죽음으로 향한 행로로 읽혀 안타까울 뿐이다.


어쩌면 지나칠 정도로 도덕적이며 지적이고 스스로에게 엄격한 한 사람이,

스스로의 어둠을 마주하고 무너져내리고 만다.


'나는 인간의 죄라는 것을 깊이 느꼈네......

 스스로를 죽여야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네. ' (p.275)


세상엔 '죄'라는 것을 도대체 느끼지 못하는 자들로 넘쳐나는데,

자신에 대한 신념이 파괴당한 이는 아무도 묻지 않는 그 죄에 잠식당하고 만다.

간절히 바라는 것 앞에서, 곧 내 것이 될 거라 믿었던 것 앞에서 양심을 조금 제쳐 놓았던 순간들이

우리 삶엔 얼마나 많은가?

그 결과가 '죽음'이라는 극악의 사태를 빚어내진 않았기에, 잘 잊고 살아올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내 욕심이 낸 상처가 타인에게 어떤 정도였는지를 알 수 없었기에.

아니, 알아도 모른 척 할 수 있었기에.


오직 진실하고 싶었던 선생님의 절망적이고도 열정적인 질문이, 믿음을 구하는 눈빛이

한참 동안 내게 남을 것 같다.


"자네는 진정으로 진심인가?" (p.87)


이것은 또한, 우리가 삶의 매 순간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질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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