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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오직 그녀의 것
김혜진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9월
평점 :
끝내 자기 형태와 색을 가지지 못하는 그림자처럼, 편집자는 잿빛 어둠에 숨어 있는 존재다. 살아있는 모든 책에 반드시 존재하지만, 구체적인 형태와 색은 없다. 전면에 나서는 적이 없는 그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소설이라는 사실에 끌려서 책을 샀다. 심지어 저자가 내가 좋아하는 김혜진 작가다.
김혜진 작가 특유의 수줍은 듯 덤덤한 말투, 하지만 무심하지 않은 세심한 서술로 시작되는 이야기에 가슴이 뛰었다. 소리 없이 뜨거운 애정을 단단하게 지켜나가는 편집자의 수줍음과 열정을 그 문체로 보여주다니 영화에서 딱 맞는 배우가 역할을 소화해 주는 쾌감이 느껴지기까지 했다.
표현 못했고, 인지하지 못했던 일의 감정과 고단함과 의미를 풀어주는 문장마다 밑줄을 그어가며 순식간에 읽었다. 나, 이 작가의 글을 정말 좋아하는구나. 난 작가의 문체가 정말 좋았다. 편집자의 정체성과 어울리는 서술에 짜릿한 전율이 느껴질 정도다. [딸에 대하여]도 문장에 밑줄 그어가며 여러 번 읽었는데, 이번에도 미치도록 글이 좋다.
다만 주인공이 너무 편집자의 정석과도 같아서 좀 괴리감을 느꼈다. 주인공 본인은 인식하지 못했지만, 천상 편집자였던 사람. 그리고 끝까지 살아남은 사람. 본질을 지키면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는 걸까, 의문이 남았다. 마냥 관찰자의 시선으로 소설을 대하긴 어려운 입장이라 그랬을까, 소설가가 쓴 편집자의 삶이 낯설다. '편집' 업에 대한 고민은 늘 있는 일이니 뒤로 젖혀 두고, 김혜진 작가의 다른 소설도 읽어야겠다. 한 사람의 일을 들려주는 작가의 목소리가 참으로 매혹적이라 그 감각을 계속 마음에 채우고 싶다.
글을 마무리하다, 문득 소설의 제목이 떠올랐다. 끝까지 살아 남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오롯이 나를 담아 내 것으로 만들어 냈느냐의 문제, 작가가 편집자의 삶을 이야기하며 보았던 건, 그 마음 아닐까, 자신을 온전히 쏟은 마음.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모여 각자의 방식으로 업을 이어가지만, 그 마음은 같다. 책을 좋아하는 마음을 공유한 채, 각자의 방식으로 연주하는 업. 그게 출판이다. 이 소설은 그들 중 마음을 지켰던 어느 한 구성원의 이야기고, 여전히 고군분투하는 다른 이들을 향한 응원이자, 헌사라는 생각이 든다.
오래도록 그녀에게 열정은 한순간 사람을 사로잡는 무엇이었다. 그건 스스로 만들어낼 수 없고, 이성으로 통제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이런 생각에 변화가 찾아왔다. 열정보다 중요한 건 그것을 일깨우고 유지하는 의지라는 것. 그것이 향하는 곳은 따로 있었다는 것. - P34
그녀는 사람을 대할 때의 미숙함을 글을 대하는 데서 채우려고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 일에 대한 어떤 마음을 지키기 어려울 거라는 막연한 예감때문이었다. - P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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