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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칙 연산으로 이뤄진 문제를 풀 때 더하기와 곱하기에는 실수를 하지 않으면서도 빼고 나눠주는 문제를 잘하지 못해 야단맞기 일쑤였던 아동기가 떠오른다. 학교를 파하고 나면 10리 길을 걸어오는 동안 개울가에서 고동을 잡거나 친구 집에 들렀다가 집에 도착하면 어느 새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말아 저녁밥을 지어야 했던 까닭에 조바심을 내며 잰걸음을 놀리던 1970년 후반이 떠오른다. 어머니 품을 떠나 객지를 떠돌며 눈칫밥을 먹으며 이를 앙다물고 살았던 것은 왠지 모를 미래에 대한 기대가 작용했는지도 모른다. 어엿한 사회인으로 자리하며 뭔가 자신의 길을 잘 걸어갈 것만 같은 막연한 감정에 충실하였던 치기어린 20대였는지도 모른다. 간절히 바라던 꿈을 현실화하여 청소년들과 함께 생활하였던 2012학년도를 갈무리하는 날 <<오늘, 뺄셈>>을 읽으며 뺄셈 철학을 배운다.

 

 

  더 많은 것을 얻는 것에만 급급한 나머지 불필요한 것을 비우고 소박하고 단순 명료한 삶과는 괴리된 일상을 살아냈다.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욕심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면서도 부를 축적하고 누리는 일에 관심을 보이며 살았는지도 모른다. 자신보다 많이 가진 남들과 비교하며 그들을 질시하며 선의의 경쟁이라는 허울 좋은 포장으로 스스로를 옥죄는 일을 서슴지 않았다. 불필요한 것을 빼내기보다는 가지지 못한 것을 더하는 일에만 골몰하여 보태지 못하여 괴로워하였던 적이 떠오른다. 많은 것을 얻고 누리려는 욕망의 노예로 전락한 채 순수한 영혼이 내는 소리를 외면하며 현재적 삶을 합리화하는 일에 촉수를 내밀고 살아온 것은 아닌지 돌아본다. 뺄셈 철학이란 필요 없는 것들을 자신의 의지로 비움으로써 소중한 것들을 잃지 않을 수 있다.

 

 

  댓잎으로 얼기설기 엮어 만든 라오스 퉁족의 집에 들어가 간소한 살림에 최소한의 것만 취하며 대가족이 함께 사는 모습을 돌아보고 나오는 길 넓은 집에서 식구 서너 명이 살면서도 더 큰 집에 사는 친구네를 보며 푸념을 늘어놓았던 기억이 떠올라 괴란쩍어진다. 물을 받아들여서 다른 곳으로 흘려보내는 갈릴리 호수는 맑은 물속에 노니는 물고기들을 볼 수 있지만 사해는 물을 받아들이기만 할 뿐 내보내지 않아 물고기 한 마리 살지 못하는 척박한 곳으로 변해 버렸다. 갈리리 호수와 사해의 발원지는 같지만 흘려보내고 비울 줄 모르는 사해는 소중한 것을 얻지 못하는 공간으로 변하고 말았다. 비움으로써 소중한 가치에 눈을 떠 삶의 또 다른 길을 열 수 있는 지혜를 얻어 삶의 균형을 잡을 수 있다는 가르침을 전한다. 서로의 욕심을 채우며 사랑했던 연인이 결혼 생활을 원만히 유지하기 위해서는 마음을 비우는 일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말이 예사로이 들리지 않는 것은 이기심을 버리지 못하고 살아가기 때문일 것이다.

 

 

  진로 시간 ‘나의 꿈’을 소재로 글쓰기 과제를 부여받은 아이들은 어떤 사람이 되어 돈을 많이 벌고 높은 지위를 누리고 싶다는 표현으로 마무리 짓는 일이 흔했다. 부모, 교사의 입장에서 욕심을 버리지 못한 채 기성세대가 정해 둔 틀에 아이들을 가두고 이들이 어떤 특정 목표를 향해 더하는 삶을 다짐하도록 강요해왔을 것이다. 자기에게 가장 의미 있는 일을 골라낸 다음 그 이외의 일은 확 줄임으로써 최대의 효과를 내는 바바우타의 방식은 물지게를 지고 물을 나르던 이의 샌 양동이에서 흘러내린 물이 척박한 땅에 생명의 꽃을 피운 것처럼 비움으로써 얻을 수 있는 가치를 보여준다. 바깥일을 하다보면 크고 작은 스트레스가 쌓여 마음고생을 하는 경우가 있지만 집안에까지 그것을 가져가지 않으려 실천해야 한다. 자신이 받은 스트레스를 무의식중에 발산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조율하며 스트레스를 버려야 한다.

‘손을 움켜쥐면 아무것도 가질 수 없지만, 손을 펴면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다.’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누구나 쉽게 실천하는 경우는 드물다. 사랑하는 이를 만나면 상대를 소유하려고 갖은 애를 쓰며 집착하는 감정의 노예로 전락할 때가 있다. 하지만 대학시절 연인이었던 타나를 사랑했던 살라비앙이 암을 선고받고는 그녀의 행복을 위해 곁을 떠났다가 멀찍이서 연인을 지켜보던 것처럼 내 것으로 만들려는 마음을 버리고 담담히 응시하며 지켜주는 사랑은 욕심을 비우고 뺌으로써 가능해진다. 무엇인가를 얻을 수 있는 선택은 그것에 집중함으로써 그 외의 모든 것을 버리고 희생을 감수해야 하는 경우가 더 많다. 반드시 어떤 일을 하며 살아야 한다는 당위성으로 자신을 옭아매며 번잡하게 살기보다는 하고 싶은 일을 찾아 단순하게 살아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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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MBC 특집드라마 '눈 먼 새의 노래'가 방영되었을 때 상상조차 힘들었던 성공 신화를 이뤄낸 한국 최초의 시각 장애인 고(故) 강영우 박사의 삶은 푸념을 일삼던 자신의 삶을 반추하며 힘을 내어 열심히 살아야 할 당위성을 일깨워줬다. 그 후로 언론에 보도되는 강영우 박사의 삶은 불가능에 도전하여 가능성을 발현하는 입지전적인 인물로 그의 실명 이후의 생활을 재조명하는 일로 시청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신체적 장애를 생의 걸림돌로 여기며 비탄에 젖기보다는 새로운 꿈을 품고 실현하는 일에 집중할 수 있는 혜안을 주어 장애를 통해 세상을 변혁시켜 가는 일에 일조할 수 있었다고 토로하며 <<내 눈에는 희망만 보였다>>는 책으로 남은 생을 정리하였다. 고 강영우 박사는 투병 중에도 장애인들이 법적인 보호 속에 비장애인들과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사회 구조를 위해 불평등한 제도의 벽을 허물어 장애인들의 인권 신장을 위한 실천적인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운동장에서 뛰어놀기를 즐기던 열네 살의 중학생은 친구들과 함께 축구를 하다 축구공에 맞아 그만 시력을 잃고 말았다. 반복되는 수술이 있었지만 시력을 회복하지 못한 채 시각 장애인으로 살아야 한다는 장남의 실명 소식에 충격을 받은 어머니는 투병하다가 세상을 뜨고 연이어 누나까지 목숨을 잃어 어린 동생들과 흩어져 지내야 하는 운명에 놓이고 말았다. 맹학교와 철물점, 고아원으로 흩어진 3남매는 고립무원의 상황에 좌절하고 비탄에 빠질 새도 없이 생존하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을 정도로 살아남는 게 절박한 과제였다. 실명한 강영우는 서울 맹학교에 입학하여 시각장애인 재활의 선구자인 한국의 이와하시 다케오가는 되겠다고 각오하고는 점자로 공부하며 어렵게 연세대학교 입학시험 응시 기회를 얻어 대학 생활을 이어갔다. 진리 탐구와 학문의 전당이라는 대학마저 시각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겪어야 하는 편견이 자리하여 고착화된 생각부터 깨나가는 일을 시작하여 갔다. 장애를 통해 세상을 변혁시켜 가는 일에 적극성을 띠기 위해서는 심도 있는 학문을 연마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대학을 졸업하고 유학을 준비하였지만 신체장애를 유학의 결격 사유로 정해 놓은 불평등한 법조항을 타파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했다. 불평등한 법적 조항에 맞서 자신의 뜻을 관철한 강영우는 피츠버그 대학 대학원에 합격하여 세계 속의 한국인으로 위상을 드러낼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해 나가기 시작했다.

 

 

  대학 재학 중에도 시간을 쪼개어 자신의 일부를 나누며 봉사하는 삶을 보람으로 여기는 여대생 누나의 진정성을 받아들여 결혼식을 올린 강영우는 도미하여 수학한 끝에 한국 최초의 시각 장애인 박사가 됐다. 시각장애인들의 재활과 인권을 위해 평생을 바친 이와하시 다케오와 친분을 쌓으며 일하던 그는 신체적 장애를 극복하고 사회적 약자들을 배려하는 영웅들과 교류하며 장애인들도 보통 사람들과 같은 대우를 받으며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일에 적극적인 관심을 드러냈다. 장애인이 일할 권리와 자유가 박탈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장애인 민권법을 통과시키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기본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는 법을 성문법으로 명기하여 장애인 인권 운동을 확산해 가는 일에 세계적인 지도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해나갔다. 빗속에서 지팡이를 들고 홀로 걸어가던 강 박사를 눈여겨보던 딕 손버그 장관과의 만남은 그가 국제무대에서 활동하며 비전을 제시하는 이로 자리할 수 있는 길에 날개를 달아줬다.

 

 

  장애를 극복하고 유학 시절의 어려움을 이겨내었던 석의 시대 10년을 지나 직장에서 자리잡고 아이들을 키워내며 열심히 살아온 은의 시대 10년은 미국 백악관 국가장애위원회 정책차관보를 거쳐 유엔 세계장애위원회 부의장 겸 루스벨트 재단 고문으로 세계 장애인의 복지 향상을 위해 헌신하였던 옥의 시대를 열었다. 눈 뜨고도 가질 수 없는 비전을 가지고 있는 남편을 아내는 등대로 여기고, 남편은 아내를 삶의 지팡이와 동반자로 여기며 섬김과 나눔을 실천하는 일에도 적극적이었다. 장애를 뛰어넘은 아버지의 비전과 특수교육 교사로 활동하며 봉사를 잇는 어머니를 보고 자란 자식들은 세상을 변혁하는 일에 솔선하는 꿈을 품고 자존감을 드높여 갔다. 어떤 상황에서도 긍정적인 믿음으로 고난을 극복해 가는 강 박사의 삶에 감화를 받은 조카들에게도 역할 모델로 자리하여 산교육의 증인으로 인식될 정도였다.

 

 

  자유, 인간애, 인권, 민주주의를 가슴에 품고 역사 속에서 세상을 움직인 인물로 뽑힌 강 박사는 루스벨트 재단 선정 127인의 공로자에 선정되었고, 루스벨트 국제 장애인상의 수혜로 받은 5만 달러를 기부하여 올해의 장애 극복상을 제정하여 장애인들에게 힘을 불어 넣어주었다. 췌장암 말기 판정을 받은 강 박사는 이 사실을 담담히 받아들였고, 투병 중에도 자신의 삶을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을 주어 축복이라며 국제 로터리 재단 친선대사 장학생으로 수학한 피츠버그 대학 시절을 떠올리며 재산을 정리하였다. 자신이 입은 은혜를 사회에 환원하려는 뜻을 비치자 두 아들은 각기 25,000달러를 내어 기부한도인 25만 달러를 기부하여 장학금 수혜자가 장애를 극복하고 도전의 힘을 얻길 바라는 마음에 함께 했다. 실명은 자신의 삶을 바꾸어 비전을 품게 했고, 믿음으로 하나 된 가족은 구성원들의 마음에 자리 잡은 심지를 붙잡고 성실한 삶을 살게 한 축복의 시간들로 단 열매를 거두게 한 과정이었다고 고백하는 고 강영우 박사의 일생은 어떤 장애도 실패한 인생은 아님을 넌지시 일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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