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 아니면 알 수 없는 것들 - 손미나의 사람, 여행
손미나 지음 / 씨네21북스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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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을 떠나기 전 찾는 공항에서의 움직임은 생기로 가득하다미답의 목적지를 향하는 설렘과 두려움은 가슴을 뛰게 하는 기제로 작용한다규율이 지배하는 일상을 벗어나 동경하는 곳을 찾는 즐거움은 밋밋한 생활을 견디게 한다자기 나름대로 성실히 일하였는데 사적인 권력을 이용해 기회를 박탈하는 횡포를 겪으며 답답함은 수위를 넘어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마음이 일렁거렸다나 홀로 어디든 길 따라 떠나고 싶은 열망으로 14명의 여행자들의 내밀한 삶의 단면 속으로 들어갔다나고 자란 공간을 떠나 이국적 정취 속에 지내온 여정은 새로운 세상을 보게 하는 동기를 부여한다.


  ‘제대로 살고 있는 것인가?’

  중년을 넘어서면서 든 물음은 내면을 지배하며 또 다른 공간을 품고 살게 하였다최고의 카피라이터 최인아 씨는 맡은 분야에서 능력을 발휘하며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혼의 고갈을 느껴 서른 살 무렵 인도를 찾았다고 하였다안정적인 생활 반경을 벗어나지 못한 채 현실에 안주하는 것은 아닌지 반문하며 떠난 인도 여행이 떠올라 인터뷰를 읽어가는 동안 공감은 컸다이대로 살아도 괜찮은지 자신에게 물으며 자기를 관리하여 자기 치유로 이끄는 여행은 떠나봐야 알 수 있는 것들을 넌지시 알려준다시간을 유동적으로 사용하고 싶어 이직한 흥행의 아이콘인 나영석 피디의 아이슬란드 여행은 오롯한 자신으로 서기 위한 방편을 일러준다타인의 눈에 비치는 자신을 각하기보다는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자신에게 솔직해질 때 의지대로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다.


  정착하기 위해 치열하게 움직이며 살아야 하는 공간 미국의 심장부 뉴욕에서 국제 변호사로 활약하는 이소은 씨의 도전은 진정한 도전의 의미를 떠올리게 한다미래에는 소용없는 지식을 암기하는 단순한 공부에서 자신을 밀어 넣고 싶은 분야에서 맹렬히 활동하는 여성상을 떠올린다수능시험을 치른 아들과 동갑인 임하영 군의 홈스쿨링과 여행 경험은 기존의 틀을 쉽게 부수지 못한 채 관성대로 움직이는 우리를 돌아보게 한다숙박비를 아끼기 위해 카우치 서핑으로 여행하면서 길거리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며 여행 경비를 조달하는 모습만으로도 긴장과 흥분을 더하였다한계가 지어져 있지 않은 세상으로의 여행을 통해 무한한 가능성을 발견하며 또 다른 꿈을 꾸며 ‘Link’ 인턴십에 지원하여 정책 연구원으로 자리하려는 포부를 드러냈다청소년들이 한자리에 모여 다양한 주제의 워크숍을 벌이는 독일의 한 지역 행사는 민주주의의 의미를 생각게 한다.


  ‘인생의 목적은 사랑받는 사람이 되는 게 아니라자기 자신이 되는 거야.’

  무라카미 하루키의 말은 죽음을 향하는 인생에 삶의 자세를 돌아보게 한다죽음을 피할 수 없다면 오롯이 자신에게 집중하며 살되 타인과 더불어 살아갈 힘을 보태는 일에 능동적인 오기사의 인도 바라나시 여행은 인생 고민마저 무색케 한다건축가 오 기사는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강가 바라나시에서 배설물들이 자연화 하는 과정을 통해 현안에 매어 사는 근시안적인 태도를 배제하며 사는 인생의 의미를 일깨운다.

외교관의 아내로 35년 이상을 외국에서 생활한 세계장신구박물관 관장인 이강원 씨의 수집은 열정이 낳은 부산물로 여겨진다휴지와 성냥도 없었지만 영적으로 충만한 시간이었다던 에티오피아남미의 파리라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미처 생각지 못했던 일들을 경험하고 싶은 생각으로 가득해진다생각 없이 걷다 우연히 발견하게 되는 예쁘고 아름다운 것들에서 기쁨을 느끼는 여행은 송은이김영철 씨 여행에서도 고스란히 나타난다일곱 살 때 봤던 영화에서 꿈을 키워 비전 있는 삶을 열정적으로 잇는 로봇과학자 데니스 홍의 여행 경험은 호기심을 재충전하기에 그만인 활동으로 자녀와 함께 하는 여행의 의미를 더한다.


  영화감독으로 일하면서 외국으로 나갈 기회가 많아진 류승완 감독의 삶의 방식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아 몰입함으로써 다양한 나라의 단면을 보게 되는 행운이 따른 듯하다감독은 여행길 안내자로 방향성만 제시하면서 흐름대로 흘러가게 두는 게 중요하다는 직업 속 가르침은 인생 전반을 관통하는 생활의 지혜로 다가왔다경제 중심으로 가치가 쏠리는 세태의 위험을 드러내며 행복은 촬영 중에 맛본 음식에서 찾을 수 있고 마주하고 밥을 나누는 이와의 대화 속에서도 스며들어 있음을 발견한다마흔에 철인 3종 경기를 시작한 이영미 편집장의 안나푸르나 트레킹은 느리게 움직이며 셰르파와 여행자와 함께 하는 생활의 의미를 일깨워준다약소국으로 강대국의 침입을 많이 받은 제국주의의 희생양인 우리나라의 시대적 양상을 확인하며 미래를 예측하며 살아야 할 과제를 안고 지낸다역사여행가 권기봉 씨의 궁궐 이야기는 일제에 무너져버린 나라의 기강을 떠올리며 애잔함에 잠긴다주체적인 사고로 이성적으로 판단하여 과오에서 벗어나 살고 싶은 나라의 위상을 회복하는 일은 우리 손에 달려 있다과거의 역사를 통해 현재를 진단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통찰적 삶을 이을 때 우리는 지금보다 영적으로 충만한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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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혼 시대 - 낡은 결혼을 졸업할 시간
스기야마 유미코 지음, 장은주 옮김 / 더퀘스트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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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나가는 겨울 끝자락 봄을 부르는 비가 내리는 날 창문 밖 풍경은 을씨년스러움을 더한다사위는 어둠 속 부유하는 불빛 따라 움직이고 내면으로 침잠하는 시간 지나온 시간을 돌아본다두 아이의 엄마로 직장 생활을 병행하며 힘겹게 살아온 시간들이 양적인 고단함으로 점철된 삶의 무게에 더께처럼 자리한다결혼 생활 26년 째 염세적으로 흐르는 부부의 거리를 인식하며 이제는 성년이 된 자녀들을 떠나보내고 자율적인 중년의 삶을 구상하여 본다부부의 연을 맺고 살아온 이와 살아왔던 시간들이 평행선을 그으며 스쳐간다다른 환경에서 나고 자란 생태적인 섭식과 삶의 방향은 유대하기 힘든 쪽으로 흘러 다툼으로 비화될 때가 있었다대치 상황을 대화로 풀어 보려 시도하였지만 어느 것 하나 쉽지 않았다.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살아야 할 부부라고 여겼지만 서로 다른 입장 차이를 확인하고 무덤덤한 채로 지내는 생활은 별 의미를 갖지 못했다수명이 길어져 부부가 함께 살아갈 날들이 아득하게 남아 보이는 지금 서로 다른 방향을 보면서 앞으로의 삶이 답답해진다면 부부가 떨어져 지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가까이에서 갈등 요인을 양산하기보다는 떨어져 지내면서 상대의 마음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기울이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상대가 자신이 가려는 방향을 따라와 주길 바라기보다는 상대의 독자성을 인정하면서 따로 또 같이 생활하는 졸혼은 결혼 제도에 묶여 힘들게 사는 것보다 낫다고 여기며 일본 부부의 졸혼 생활을 들여다본다.


  서로 간섭하지 않는 독립적인 생활을 이으며 보고 싶은 것 다니고 싶은 곳을 찾아 떠나고 필요에 따라 함께 이동할 때도 독립적인 개체로 자리하는 삶은 나와 가족이 행복해질 수 있는 방편 중 하나로 보인다떨어져 생활하는 부부이지만 저녁 식사 후 자신이 경험한 것과 앞으로 하고 싶은 내용을 공유하는 대화로 서로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사는 모습이 인상적이다서로의 개성과 본질을 꿰뚫어 이해하면서 붙어 지내는 것도 떨어져 지내는 것도 아닌 졸혼 생활에 만족해하는 부부의 모습은 상대가 하고 싶은 일을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는 일로 보였다아직은 보편성을 띠지는 못해도 시일이 더 지나면 맞지도 않는 결혼 생활을 고수하느라 지쳐가기보다는 다른 방법을 찾을 때 생각해볼 수 있는 새로운 풍속으로 떠오르는 졸혼이다.


  틀에 박힌 결혼을 졸업하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다는 뜻의 졸혼은 아직까지 낯설지만 자신이 추구하는 삶의 방향을 트는 기회로 작용할 수도 있다따로 사는 결혼으로 시작해 남편이 아내를 돕는 부부전업주부이던 아내가 생활비를 벌고 남편이 자유롭게 사는 부부 등 전형적인 결혼 생활에서 비껴난 부부의 모습은 인생의 황혼을 맞이하기 전 자신들이 원하는 생활을 이으며 그 나름대로의 의미를 발견하며 지냈다시행착오를 겪으며 부부만의 결혼 생활을 지속하는 모습은 한곳에 머무르지 않아도 가능하였다공평하게 일을 나눠 처리하며 살아가는 게 평등한 부부의 이상형으로 여기며 노력 여하에 따라 행복한 가족이 이뤄질 것이라 여겼지만 실상은 생각처럼 잘 되지 않았다.


  가족과 떨어져 지내는 생활을 달가워하지 않는 결혼 생활에 파문을 일으키며 가정 파탄으로 오해받을 수도 있지만 졸혼은 부부가 달라지지 않을 언쟁을 벌이며 대립의 골을 깊게 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힘에 부쳐 갑갑함을 느끼는 결혼 생활에 전환점이 될 수 있는 졸혼을 떠올리며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으며 지금껏 묻어뒀던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아 새로운 길을 열어가는 것도 에너지가 남아 있을 때 시도할 필요가 있다더 나은 결혼 생활을 위해 떨어져 지내는 시간이 필요하다면 기꺼이 응하여 결혼 생활의 패턴을 나은 방향으로 추구하며 살아갈 때 이후의 생활은 유의미해질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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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거기 있어 줄래요?
기욤 뮈소 지음, 전미연 옮김 / 밝은세상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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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이 아무리 피하려고 애써도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당신이 아무리 간절히 원해도 일어나지 않을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 라마나 마하르쉬

  되돌리고 싶은 일이 일어나 상실의 아픔과 고통에서 쉽사리 벗어나지 못할 때면 그 때 그곳을 가지 않았다면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지 반문할 때가 있다. 사랑하는 이를 잃고 힘들어하는 이에게 어떤 말로도 전하기 힘든 위로의 말을 건네는 대신 등을 토닥거리며 침묵한다. 죽음으로 연인과 함께 했던 시간까지 멈춰버린 때 살아남은 자의 상실감은 극에 달한다.


  수천 년이 지난 나무들의 정령이 묘한 기운을 발산하는 캄보디아로 의료 봉사를 나간 엘리엇이 구루 같은 노인이 건네 준 알약 10개를 받아들면서부터 330년 전으로 떠나는 시간 여행은 시작된다. 과거의 시간으로 돌아가 가장 이루고 싶은 그의 소원은 사랑하는 일리나의 목숨을 살려내는 일이다. 30년 전 수의사로 오션월드에서 돌보던 범고래 때문에 목숨을 잃은 그녀에 대한 그리움은 닿을 수 없는 세상에 대한 갈망처럼 보이기도 한다. 아내를 살리면 딸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서 엘리엇의 고민은 정점으로 치닫는다.


  아내를 떠나보내고 그녀를 가슴에 품고 사는 외과의사 엘리엇은 지금껏 딸 앤지를 돌보며 진정한 아버지로 자리할 수 있었다. 아버지로 태어난 게 아니라 시행착오를 겪는 과정에서 체득하는 삶의 통찰이 아버지가 되게 하였다. 환자와의 거리를 두지 않고 인술을 펴는 의사였기에 훌륭한 의사로 불리는 엘리엇은 사랑하는 여인을 살려냄으로써 연인을 구하지 못하였다는 죄책감을 씻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사랑한다면 끝까지 지켜주고 보듬어주는 것이라 여기는 이들에게도 인간 영역 밖의 일은 감내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일리나의 죽음을 막기 위해서는 그녀를 사랑하지만 이별을 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그녀와의 만남을 지속하는 결정은 예상치 못한 일들에 매여 가늠키 어려운 상황으로 내몬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전개되는 소설 속 구성은 삶의 의미에 대한 탐구를 과제로 전한다. 알약 한 알을 삼킬 때마다 과거의 인물들과 만나며 현재의 시간과 교차하는 사이 초로에 접어든 엘리엇은 그 역시 암환자로 죽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운명에 놓인다.


  딸이 태어나고 아버지로서 양육에 대한 부담을 느낄 새도 없이 앤지를 돌보며 이전에 느끼지 못하였던 혈육의 정을 확인한다. 딸이 살아갈 소비 중심의 세상을 비판하면서 딸의 미소를 떠올리며 딸에게 오롯이 집중하는 모습은 내리사랑을 실천하는 사랑꾼으로 비춰진다. 아버지가 이승을 뜨면 언젠가는 세상에 혼자 남을 딸이 자신의 삶을 통제하며 살아갈 힘을 얻기를 바라며 딸에게 남긴 메시지는 책무를 넘어서는 부성애로 앤지에게 전하고 싶은 사랑의 선물이다.


  익숙한 것들과 이별하고 사랑하는 대상들을 떠나보내는 삶의 과정은 유한한 생명에 대한 존엄성을 각인시킨다. 무엇을 바라며 살기 보다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고민하며 공공의 선을 실현하는 일에 자발적으로 나설 때 우리 삶의 윤기는 더할 것이다. 엘리엇이 의료기술이 낙후한 곳을 찾아 인술을 펴서 생명의 불꽃을 피우고 아내를 잃고 선물처럼 남은 딸을 사랑하며 죽음으로 이승을 떠나더라도 딸이 살아갈 수 있는 양분을 여러 방법으로 전하는 모습에서 사랑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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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아주 먼 섬
정미경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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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내야 더 좋은 사람이 오는 법이여.’

  이삐 할매의 말대로 태어나면서부터 시작된 이별은 본인의 죽음으로 갈무리된다. 얽히고설킨 인연의 끈으로 이어진 만남과 이별은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 헤어나기 힘든 마음의 짐을 지고 살아야 하는 고단한 일상을 낳기도 한다. 살아온 시간이 쌓일수록 누군가와 이별하고 비통해하는 시간은 늘어난다. 한 사람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도 사후에 알 수 있다는 말이 폐부 깊숙이 자리하는 것을 보니 어쩔 수 없는 중년이라는 생각에 서글픔이 밀려든다.


  가슴에 품고 사는 누군가에게 마음자리 하나 내어주고 사는 게 쉽지 않음은 시시각각 변하는 마음이 본인 중심으로 흐르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상대의 마음을 헤아려 아낌없는 사랑을 전하며 대가를 바라지 않기도 쉽지 않음은 인간의 이기심이 기저에 자리하고 있어서이다. 존재감 있는 개체로 살아남기 위해 경쟁에서 이기는 법만을 주입하며 성취를 높이는 일에 골몰하느라 지쳐가는 이들에게 외딴 섬은 서식처를 찾아 깃드는 철새들의 안식처이다.


  미래에 대한 희망을 꿈꾸기 힘든 섬에서 나고 자란 연수는 섬 생활을 청산이라도 하듯 서둘러 도시 한복판에 뿌리를 내리고 싶었다. 그녀는 섬의 유지로 재력 있는 집안의 아들 태원과 사랑했지만 사랑은 성취될 수 없었다. 수전노로 부를 축적하는 일에만 관심을 두는 영도의 눈에 비친 연수는 내세울 게 없는 하찮은 인물일 뿐이었다.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으며 힘을 냈던 기억이 없는 이들이 누군가를 사랑하며 사는 방법을 익히기는 힘들다. 학습 면에서 정모에게 뒤처진 태원을 위로하기는커녕 질책하며 힐난하던 그의 아버지 영도는 태원의 마음에 좌절감과 모멸감을 심어줬다.


  실패한 사랑의 쓰라린 기억으로 들끓는 연수의 냄비는 냉각되어 온기로 채울 마음까지 앗아 가버렸다. 자신의 삶도 책임지기 힘든 스무 살, 아이를 길러낼 능력도 없이 엄마가 된 연수는 딸 이우와의 만남이 버겁기만 했다. 엄마의 정을 쏟으며 딸을 살뜰히 키우기보다는 이상을 실현하며 사는 예술인으로 유명세를 떨치고 싶은 마음이 앞섰다. 무한 경쟁 시대에 다수의 경쟁자를 짓밟고 우위를 선점하기 위해 고독한 경주에 나서야 했던 고등학교 생활에 마음이 통하는 태이가 있어 이우는 구멍 난 마음을 붙들어 안고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운동장 한쪽 귀퉁이에 앉아 답답한 마음을 털어놓으며 이우는 태이의 호응에 기대어 안정을 찾으며 사랑을 속삭였다. 둘이 떠나는 여행길 돌연한 사고로 목숨을 잃은 태이를 가슴에 묻고 방황하는 이우를 보다 못한 연수는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섬으로 딸을 보낸다. 접점을 찾기 힘든 대척 상황에 놓인 모녀는 서로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갈라서야 했는지도 모른다. 한때 어울려 지내며 마음을 나누었던 친구 정모가 깃들어 살고 있는 섬에 딸을 유폐시키고 싶은 연수는 자기중심으로 기울었다.


  정모는 방치된 소금창고를 도서관으로 만들어 누구든 도서관을 찾아 책과 뒹구는 모습을 그리며 또 다른 세계로 나아가는 연결망으로 삼으려 했다. 말문을 닫고 자연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공생하는 삶을 잇는 판도는 이삐할매와 정모를 연결하는 시냅스로 사랑을 전한다. 머리를 무지개 색깔로 물들이고 나타난 이우는 이 세상에서 만날 수 없는 태이가 줬던 희망의 메시지를 무지개빛으로 투사했다. 상실감으로 휑한 마음을 부여안고 살아온 이우에게 섬 생활은 상처를 치유하며 살아갈 방법을 일깨워주었다. 가공되지 않은 순수함으로 그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반응하는 판도와 정모 덕분에 살아볼 만한 세상이라는 답을 얻을 수 있었다.


  마음이 통하는 이우를 두고 고통 속에 스러져 간 태이

  아버지 그늘에 기를 펴보지도 못한 채 사인 규명도 분명치 않은 태원

  두 사람의 죽음을 봤던 이우는 스무 살 어린 나이에 뱃속에 깃든 생명을 품고 살아갈 운명에 놓였다. 짠 내 나는 소금밭에서 비지땀을 흘리며 일할 때 소금 꽃은 슬프고도 찬란한 빛으로 피어나는 것처럼 생명이 다한 자리에 깃든 새 생명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으로 살아남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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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소녀 혹은 키스 사계절 1318 문고 109
최상희 지음 / 사계절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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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선택할 수 없이 세상에 태어난 이들은 우연적 상황이 빚은 필연적 시간을 살아내느라 고단한 시간을 보낼 때가 많아진다. 위협적인 파장이 무탈한 삶을 지배하며 파고를 넘나듦은 자립하여 살 수 있는 힘을 얻기까지 저마다의 사연을 안고 사는 이들의 상흔은 살아온 만큼 가슴속에 자리한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일이다. 본능대로 움직이며 학교 밖의 아이들과 어울려 지내는 아이를 감당하기 힘들어 하소연하는 친구를 보면서 저마다의 사연을 안고 사는 인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식의 방황이 멈추기를 바라며 많은 것을 내려놓고 사는 부모의 마음을 헤아리니 마음이 타들어간다.


  겉으로는 별 일 없이 지내는 것처럼 보여도 속을 들여다보면 각자 살아온 인생의 그림자가 삶의 영역을 지배하며 뜻밖의 인생으로 몰아갈 때도 있다. 뜻하지 않은 사건으로 사랑하는 가족들과 헤어져 홀로 살아내야 했던 절박함은 부족함과 외로움에 짓눌리면서도 같은 처지에 놓인 이와 정을 나누며 사는 이들이 있다. 슬프고 괴로웠던 기억들을 떨쳐내고 싶지만 쉽사리 떨쳐내기 힘들어하면서도 소라 껍데기를 귀에 대고 들려오는 바닷소리의 울림에 마음을 달래며 사는 무나와 이를 지켜주고 싶은 주인공은 흉포해진 세상에서 살아갈 이유를 발견했다. 끔찍한 상황에서 살아남았기에 곁에 있는 사람을 만나 사랑하며 살 수 있는 존재로 남아 서로에게 힘이 되었다.


  나이가 들면 자연스레 터득되는 것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의 의사를 묻지도 않고 다양한 재능을 쌓아야 한다고 다그치며 살아왔지만 결실이 좋았던 것은 아니었다.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지 못해도 세상 살아가는데 별 무리가 없는 것처럼 양팔 없이 태어난 아이에게 물고기처럼 유영하기를 바라며 수영 강습을 할 필요도 없었음을 뒤늦게 알아차린 주인공의 후회는 수영장에서만 벌어지는 일은 아닐 것이다. 갈비찜이 먹고 싶다는 식구의 말에 재료를 사러 갔다 돌풍에 떨어진 간판은 엄마의 머리를 가격하였고 목숨을 잃은 엄마는 이 세상에서는 볼 수 없게 되었다. 예기치 않은 사고로 가족을 잃은 상처는 쉽게 아물지 못할 상처를 남겨 음울함을 더하였다. 아내를 떠나보내고 망연자실하여 무심하게 지내던 남편이 사랑하는 이를 잃고 난 뒤 할 수 있는 일이 대홍수에도 가족들을 살려낸 방주를 만들어 재해를 대비할 뿐이었다. 뭇사람들이 미쳤다고 소리 질러도 자기 방어로 아들과 자신을 지키고 싶은 삶의 희망이자 은신처로 지하 벙크를 떠올렸다. 불안감을 숨기려 웃으면서 다른 공간으로 소풍 온 것처럼 말하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처연함이 더한다.


  누군가를 사랑해 본 사람들은 상대의 이름만 되뇌어도 가슴이 뛰고 설렌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머릿속에는 그 사람으로 채워지고 그 사람이 있는 공간으로 마음은 향한다. 책을 좋아하는 동아리 선배를 좋아하여 도서관을 자주 드나들며 그의 모습을 지켜보며 흐뭇해하며 그가 있는 공간이라면 어디든 찾아가서 무엇을 하는지 알고 싶어졌다. 선배 역시 밤거리를 헤매며 공원 벤치에 앉아 상념의 파고를 넘나들며 침잠하는 시간 서로의 사랑은 한 방향으로 향하지 않음을 알아차리고 비껴가는 사랑에 외로움은 녹아들어 상실의 슬픔을 더한다. 뛰는 가슴을 진정시킨 뒤 쭈뼛거리며 용기를 내어 첫사랑에게 고백하던 시절의 추억은 몇 날 며칠을 뒤척거리며 썼다 지웠다 반복하던 사랑한다는 한마디의 헛헛함을 알아차린 뒤라도 따스함을 준다.


  잇따라 부모를 여의고 일찍 철이 든 전학생 오란디는 절망 속에서도 꿋꿋하게 생존하는 표본처럼 낙담과 포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전학생이 오기 전 줄곧 1등을 도맡았던 주인공은 그녀에게 1등을 내주고 그녀를 향한 증오는 지키려는 것을 빼앗긴 자의 비굴한 감정이었음을 알아차려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당한 사고는 책상 앞에 앉아 공부할 기회마저 빼앗아버렸고 진통제에 의지하여 지내는 투병 생활에 길들여진 침묵은 이전의 자신과는 대별되는 모습으로 바꾸어버렸다. 겸손함과 배려로 자신을 무장해온 전학생은 정해진 시간 병실을 찾아 책을 읽다 가기를 반복하며 주인공의 마음에 자리한 증오를 조금씩 덜어주었다. 주인공이 건강을 회복하고 함께 그녀와 학교생활을 잇는 모습은 그려지지 않았지만 미움 저편에 자리한 사랑은 소리 없이 가슴 속에 들어앉아 생활에 활기를 더한다.


  이성 교제와는 거리가 먼 4명의 동성 친구들은 청소년시기 성에 대한 호기심은 한 문장의 홍보 문구에 끌리게 했고 급기야는 여체 인형 지나를 주문시키게 했다. 부모님이 집을 비운 틈을 타 배달된 인형을 한곳에 두고 친구 넷이 돌아가면서 외로움을 달래보려 했던 일이 변태로 내몰려 정학 처분까지 받아야 했다. 성장 시기마다 솟구쳐 오르는 욕망을 제어하기 힘든 때 경험하지 않은 세계를 향해 발을 내딛고 생각한 바를 감행하는 십대들의 모습에 가식 없는 용기를 읽는다. 표출하지 않고 음지에 숨어 갖은 욕망을 쏟고 배출하는 일보다 경험으로 자신을 바로 세워 중심을 잡아가는 과정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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