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결하는 소설 - 미디어로 만나는 우리 창비교육 테마 소설 시리즈
김애란 외 지음, 배우리.김보경.윤제영 엮음 / 창비교육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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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책, TV, 블로그, 유튜브, 중고앱, 언어 등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고 매일 쓰는 미디어 즉,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다양한 매체를 소설로 구성한 책이다. 처음 제목을 들었을 때는 뭘 연결한다는 건지 의아했는데 한 섹션씩 소설을 읽어보니 단편소설이지만 마치 장편 소설을 읽는 것마냥 하나의 주제로 내용이 광범위하게 통일되는 걸 느낀다.


이야기는 인간들에게 주어진 특권이다. 이야기를 만들고 전달하고 또 이야기가 사라지는 세상 속에서 우리는 지금 너무나 많은 이야기가 범람하는 시대에서 살고 있다. 예전에는 이야기를 생산하는 주체가 대개 정해져 있었지만 이제는 나 또한 이렇게 블로그 포스팅을 하면서 하나의 이야기꾼이 되는데 스스럼이 없으니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전달하는 미디어를 어떻게 활용하고 선택해야 하는지 이야기를 통해 배워 나간다.


연결하는 소설은 마치 논문처럼 정해진 주제가 재밌는 이야기로 탈바꿈해 전달되는 재밌는 책이다. 읽는 내내 "아, '말'이란 추상적인 단어가 이런 서사를 가질 수 있구나" 감탄했고 TV 매체가 얼마나 큰 영향을 가지고 한 사람의 인생을 뒤바꿀 수 있는지 재확인했다.


이제 우리도 쉽게 미디어를 활용한다고 생각하지만 구독자 수 증가, 광고수입 증대의 달콤한 상 뒤엔 어떤 벌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어쨌든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미디어는 양면의 습성을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고 우리는 그 점에서 한계 지어질 수밖에 없다.


소수 언어 박물관에는 약 천여 명의 화자가 천여 개의 언어를 지키며 고독하게 살고 있다. 아주 드물게 부부, 부모 관계도 있으나 거의 홀로 언어를 지킨다는 명목 하에 살아지고 있고 '이 안에서 어떤 이들은 고독 때문에, 또 어떤 이들은 고독을 예상하는 고독 때문에 조금씩 미쳐갔다<p21>'는 말처럼 누군가 내게 말을 걸어주지 않는 이상 자신이 상징하는 그 언어를 내뱉을 일이 좀처럼 없었다.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다른 부족 사람들과 대화할 일도 없고 관리자조차 언어의 고유성을 핑계로 교류를 막았으니 많이 쓰고 퍼져야 할 언어가 점점 작은 세계로 좁아지는 아이러니함이 남았다.


이 소설은 마치 현재 우리의 모습을 보는 듯했다. 각자 할 수 있는 말이 있지만 입으로 내뱉지 못하고 손가락으로 타이핑 치면서 카톡, 게시판, 오픈톡에 줄줄 써대기만 하는 모습들이 떠오른다. 그렇다면 결국 우리는 침묵의 미래에 살게 되는 걸까. 함께 있지만 소통하지 못하고 홀로 남겨진 세계에서 고립된 채 살아가는 우리들이 자꾸만 떠오른다.


자신이 후원하고 있는 아동에게 선물을 하고 싶다며 어떤 선물을 원하는지 알려달라고 했을 때 담당 복지사가 말한 것은 고가의 '나이키' 운동화라는 이야기에 후원자가 어이없다는 투로 게시글을 썼다. 기초 수급 대상자인 저소득층인 아이가 이런 고가의 선물을 바라는게 놀라웠고 선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담당자의 말에 자신의 선의가 속물로 보인 것이 불쾌하단 이야기가 여러 SNS에 퍼지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후원 재단에서 일하는 윤미도 한 부모 가정에서 어렵게 자란 이력이 있는, 그 모습을 대중에게 공개해 후원금을 받았던 사회 복지사다. 미디어의 영향 덕분에 저소득층 후원 아동은 바르게 클 수 있었지만 그 장면을 위해 보이기 위해 엄마와 윤미가 살아왔던 모습은 어딘가 어색하고 불편했고 이번에 터진 사건에서 혹여 후원 아동이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건 아닌지 걱정하는 윤미.


윤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프로그램의 방향이 정해졌다. 메인 작가는 윤미의 교복 치마가 반질반질 닳아서 반짝일수록, 운동화 뒤축이 납작하게 눌릴수록 좋은 그림이 나온다며 윤미를 설득했다. 생크림이 눈처럼 뿌려진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먹던 안방의 시청자들이 전화기를 들어 후원금을 보낼 확률이 높다고 말이다. '없느느 사람'임을 윤미의 입을 통해 드러내선 안 되었지만, 미디어라는 방식을 통해 드러내면 결과가 확연히 달라졌다. <후원명세서, P79>


이제는 방송국놈들이란 말을 쉽게 할 만큼 자극적인 소재를 위해 어느 정도방송의 연출이 가능하다는 걸 알지만 그걸 뻔히 보면서도 우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만한 요소 없이 담담하고 건조한 장면을 외면하고야 만다. 결국 미디어의 영향을 키우는 건 대중들이고 그걸 잘 이용하는 게 좋은 일인지 아닌지는 누구도 판별할 수 없다. 우리는 복잡하게 연결돼 있지만 그 교류가 차라리 단절이 나았을 정도로 불행해지는 건 한 순간이니까.



연결하는 소설에서 내가 가장 흥미롭게 읽은 소설은 고요한 시대다. 아무래도 언어를 다루고 카피를 매만지는 직업과 연관되어서 그런지 몰라도 국립대학에서 인지 언어학 강의를 하는 주인공 신영희가 여당의 한 의원으로부터 '어떤 놈을 떨어뜨릴 문구 하나만 만들어 달라'라는 의뢰를 받으면서 시작한다.


언어는 무기다. 특히 정치판에서 표 하나를 얻기 위한 전략은 언어, 정당 구호에서부터 시작하며 어떤 프레임으로 본인을 포장하고 또 상대를 곤란에 빠뜨릴 것인지 정하는 주요 전략. 포털 게시판에 댓글 정치가 판을 치는 시대에 이 언어는 사람을 살리고 죽이는데 능숙한 도구가 된다. 하지만 시대가 변하면서 이 언어도 점점 소통의 낡은 도구로서 사양될 위기에 처하고 과연 우리의 미래에 언어라는 게 지금과 어떻게 달라져 있을지 생각해 볼 만한 주제다.


"인터넷 초창기만 해도 소통의 혁명이 가져올 찬란한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가득했어요. 집단 지성의 노래를 합창했죠. 그 희망이 사라진 게 언제부터인 줄 아세요?"

"언제부터였는데?"

"나라와 기업이 개입하면서부터요. 공무원과 직장인들이 돈을 받고 군인들이 상부 명령으로 댓글과 게시물을 퍼붓기 시작하면서부터요. 지금 인터넷에는 텅 빈 죽은 말만 가득해요. 늙은이들이나 남아 있죠."

<고요한 시대, p178>


뜨끔. 우리는 수없이 텅 빈 말에 둘러 싸여 살아간다. 정보라는 포장지를 입었지만 막상 뜯어보면 속빈 강정과 다름없는 말들밖에 남아 있지 않고 이 속에서 진주같은 이야기를 찾는다는 건 불가능해 보일 정도로 말, 글, 언어대신 우리의 진심을 보여줄 수 있는 다른 대체제가 필요해 보인다.

하지만 과연.. 과연 우리는 이 언어를 통하지 않고서 함께 살아낼 수 있을까.


언어에 생각이 담긴다.

하지만 만약 다음 세대가 언어를 생각의 도구로 쓰지 않는다면, 더 이상 그릇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사람의 마음은 앞으로 어디에 담길까?

<고요한 시대, p187>



창비교육의 테마 소설 시리즈 중 하나, 연결하는 소설은 과거와 현재, 미래의 미디어를 다루며 생길 수 있는 여러 이야기를 전한다. 이 책 또한 미디어의 한 구성으로 작가와 독자는 서로의 얼굴을 볼 필요 없이 각자 쓴 문장과 읽는 문장에 기대 서로의 생각을 교류하며 결국 연결되는 지점을 지나고 있다. 이 소통이 각자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우리가 끊임없이 연결되려는 이유는 자신의 세계를 확장하고 함께 살아내기 위해서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과연 어떤 방법으로- 침묵, 언어, 몸짓, 익명의 공간, VR의 세상, 소리없이 글들로 채워진 세계- 연결의 지점을 찾아야 하는지 고민해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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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디스 헌의 외로운 열정 암실문고
브라이언 무어 지음, 고유경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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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하고 나이 든 너희 중에

사랑을 구하는 자는

죄가 없이도 세상의 벌을 받으리라



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예언이란 말인가.

1950년대에 못생기고 늙은(40대) 미혼 여성은 오롯이 설 세상이 없다.

남편이 없으면 삶의 안전을 보장받지 못하고 그렇다고 하여 본인이 재능이 뛰어나 직업적으로 성공하는 것도 희박한 일.



주디스 헌은 부모님 없이 이모에게 길러져 노망난 이모의 병수발을 드는 바람에 좋은 나잇대를 그냥 넘기고 살아온 인물로, 가장 취약한 점은 바로 '못생김'이다.


아무리 나이가 많고 가난해도 얼굴이 예뻤다면 늙은 영감이라도 한번씩 얼굴을 들이밀겠지만 헌에게는 그 어떤 남자와 그림자도 곁에 머무르지 않는다.

이모가 죽고나서 아일랜드의 한 하숙집으로 거처를 옮기며 하숙집 주인의 오빠, 뉴욕에서 온 제임스 매든을 만나게 되면서 주디스 헌의 인생은 꽤 괴롭게 흘러간다.

사실 이 책이 명확하게 관통하는 지점은 주디스 헌이 느끼는 외로움이다.


요즘 이 책을 읽으면 무슨 남자 하나 없다고 세상이 무너지고 외로워 술주정뱅이가 되냐고 묻겠지만 아까 말했듯이 이 시대에서 남자는 곧 세상과 연결되는 소통창구이고 여성의 존재 유무를 밝히는 중요한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청혼받은 적 하나 없는 주디스 헌에게 결혼은 그녀가 평생 이루고 싶은 꿈이고 소망이며, 그 세계가 허락되지 않는 세상에서 느끼는 감정은 외로움일 수밖에 없다.


외로움은 주디스 헌을 더욱 혼자로, 쓸쓸하고 추잡한 망상가로 만든다.

늘 남자들은 헌양 옆을 떠나려고 애썼지만 영화도 보여주고 밥도 사주는 매든을 보며 자기를 좋아하고 있다고, 곧 결혼을 해서 함께 뉴욕에 갈 일을 꿈꾸는 여자. 하지만 매든은 주디스 헌을 돈 많은 여성으로 오해해서 의도적으로 접근한 것이고, 헌 양도 결국 이 매든이 뉴욕에서 한 일이 사업이 아니라 호텔 도어맨이였다는 것에 엄청난 실망을 한다.

제3의 눈으로 볼 땐 왜이렇게 오바를 하는지 모르겠지만 외로워서 그런다.

옆에 아무도 없어서. 혼자니까.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 세계가 얼마나 쓸쓸하고 차가운지.

하여간 남자들이 문제다. 애초에 이 여성에게 돈을 목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더라면 어떻게든 헌은 살아남았을테니까.

점점 수강생이 줄어드는 피아노 선생으로서도 어떻게든 살았을 것이고 연간 100파운드로 연금을 받으며 자기가 살 궁리를 했을텐데 마지막 사랑이라고 믿은 남자에게 배신당하면서 신을 원망하기에 이른다.(메든이 주디스 헌의 사랑 고백을 가멸차게 뿌리치기 때문)

문제는 이 외롭고 복잡한 마음을 술에 기댄다는거다. 술이.. 주디스 헌의 감정을 증폭시키고도 남을 위스키가 위로한다는게 문제였고 술 때문에 그나마 옆에 있던 사람들과 멀어지고 결국 요양원에 가는 신세가 되고 만다.


아아, 비혼의 늙은 여성의 갈 곳은 결국 요양원이란 말인가/라고 부정적인 시선으로 보기보다는 이건 주디스 헌의 운명일 뿐이니.

그동안 내가 읽어 온 고전 소설 속 비혼 여성들은 자기 삶을 더 낫게 개척하려는 사람도 많았고 적어도 술이나 허울뿐인 사랑에 기대지 않으려 한 사람도 있었다.


그러니까 주디스 헌의 결말은그녀 스스로 이끌어온 운명의 몫인 것 뿐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술 탓으로 돌리고 싶지 않다. 못생겼단 이유로,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처지가 불쌍해진 이모를 돌보다가 가난해졌다는 이유로 이 여성에게 차갑게 등 돌릴 이유는 없으니까. 여성이 홀로 설 수 없는 시대에 태어나 홀로 살아갈 운명을 지녔기 때문에 주디스 헌에게는 외로운 열정이 필요했고 그것이 신이었고, 기도였다가 그 응답조차 듣지 못한 채 술이 주는 달콤한 세계에 빠졌을 뿐이다.

정말, 그랬을뿐이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주디스 헌이 가엾고 안됐고 불쌍하고 뭐 그런 감정이 지배적으로 들었던 것 같다.

사실 사람이 외로우면 무슨 짓인들 못하랴. 지금 뉴스에서 나오는 사건 사고의 범인들도 내면 깊숙이 파고들면 늘 혼자였고, 왕따였고 곁에 아무도 없었다고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말이다. 그에 비하면 헌 양은 술에 취해 신에게 대들고, 신은 없다고 부정하며 다시 회개하는 길을 따르고 있으니 얼마나 가련하고 슬픈 삶인가 말이다.

퇴근 후 이 「주디스 헌의 외로운 열정」을 보면서 외로운 감정에 얼마나 증폭되고 또 객관적으로 볼 수 있었는지 모른다.

나의 약점이자 내가 좋아하는 감정 '외로움'에 대해 오늘도 이렇게 책으로 또 한 겹의 세계를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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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나, 마들렌
박서련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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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8개의 단편으로 이뤄진 소설집. 나, 나, 마들렌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캐릭터들이지만 그들이 맞닥뜨리는 상황과 그때 느끼는 감정과 선택하는 순간들은 결국 우리의 이야기다.


한 편의 이야기마다 결코 예측할 수 없는 전개들로 흡입력이 뛰어나고 책을 덮고서는 무엇 하나쯤은 가슴에 남은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그동안 박서련 작가가 보여온 세계에서 더욱 확장된 우리의 이야기지만 우리의 이야기가 아닌 것 같기도 한 세상들을 만날 수 있다.

첫 이야기를 읽는 동안 몇 번이나 앞장을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읭? 내가 제대로 읽고 있는 게 맞아" 하는 의구심을 안고 처음 생각했던 글과 다른 전개로 훅훅 넘어가는 <오직 운전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는 좀비가 출현한 시대에서 좀비보다 인간을 더 두려워하는 화자가 운전대를 잡고 도망치는 이야기다. 책을 읽으면서 "역시 도망가려면 운전을 할 줄 알아야 하는가"에 쓸데없는 생각을 더하면서 이런 상황에서는 감염자보다 비감염자에게서 더 다양한 위협을 느낄 수 있겠구나 싶었다. 인간이란 결국 좀비보다 못한 것들이란 결론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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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로의 변성기>는 젤로의 목소리를 연기하는 성우 오선재가 픽업 라디오스타로 데뷔한 성우돌로 인기를 얻고 있는 후배 이희강에게 묘한 감정을 품으면서 생기는 이야기다.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롭게 읽은 챕터이고 박서련 작가의 상상력의 또 다른 부분을 발견한 곳이기도 하다. 젤로는 일본 애니메이션의 주인공으로 열여덟 살의 소년 악마이기 때문에 50대의 한국 여성이 더빙을 맡는다는 게 쉬이 상상은 안 가지만 혹여 나이가 들면서 목소리가 변할까 싶어 온수에 희석한 석류즙을 마시며 나름 관리하는 오선재의 노력이 뜻하지 않은 일로 변성기를 맞는다는 일이 너무 신선하고 독특해서 좋았다. 아마 이 챕터의 내용은 아래 한 문장으로 모든 것이 요약될 것이다.

"네가 사랑하는 젤로는 너를 사랑해서 어른이 되어버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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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진의 경우>의 김수진은 트랜스젠더. 좀 더 입체적인 인물로 묘사하자면 엄마가 되고 싶은 여자. 다른 트렌스젠더들과는 다르게 수술비도 대주고 늘 옆에서 기꺼이 예뻐하고 아껴주는 엄마가 있지만 정작 본인이 엄마가 되는 앞에서 엄마에게 "그거 얼마래니?"라는 물음을 받고 슬퍼서 화내는 여자.

여기서 그것은 김수진 몸에 인공 자궁을 만들고 인공임신을 하는 프로젝트로 이 이야기 또한 박서련 작가의 제대로 된 상상력을 엿볼 수 있는 챕터였다.

엄마가 되고 싶은 트랜지스터라니. 과연 이 여자는 엄마가 무사히 될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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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하던 소설가의 수업에서 만난 애인 마들렌. 그런 애인을 성추행한 소설가에게 묘한 서운함과 연민을 느끼는 나. 분명 애인을 사랑하지만 소설가에게 느껴지는 이상한 감정으로 '나'는 결국 둘로 쪼개지는 상황까지 만들어진다. 이건 재치라고 할 수밖에 없다. 내 안에 내가 너무 많은 건 당연한데 그런 내가 물리적으로 몇 개씩 쪼개져 애인의 재판장에 같이 가는 내가 있고, 소설가를 동경으로 바라보는 내가 있다. 마치 마음을 사과처럼 둘로 쪼개는 것처럼 분열된 내가 있다면. 과연 진짜 나는 누구인가.


이 리뷰에 담지 못한 <한나와 클레어> <세네갈식 부고> <마치 당신 같은 신> 또한 다른 독자들에게는 더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올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신선함을 느끼는 지점은 각기 다르고 그 발화 온도도 엄청난 차이를 보일 것이다. 요 근래 재밌는 이야기꾼을 찾아 여름을 보내고 있는 독자들이 있다면 이 나, 나, 마들렌을 적극 추천한다. 왠지 봄, 가을, 겨울보다는 지금 이 계절에 시원하게 에어컨을 틀어 놓고 소파에 누워 한 장씩 읽으면 박서련 작가가 차려놓은 세계로 금방 빠져들 수 있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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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에 대해 쓰려 했지만
이향규 지음 / 창비교육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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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색 바탕 위에 연필로 그린 듯한 사람들.

처음에는 표지가 독특하다고 생각했는데 책을 다 읽고 다시 표지를 덮어 봤을 때 무척 이 이야기와 잘 어울리는 그림인 생각이 들었다.

「빅이슈」 잡지에 실린 글들을 모아 발행된 「사물에 대해 쓰려 했지만」은 결국 사람에 관한 이야기가 되었다.


사물을 관찰하고 느끼는 모든 감각의 끝은 사람을 향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이 더없이 따뜻한 이유다.


작가는 서울에서 나고 자랐지만 남편 토니와 두 딸 에린, 린아와 함께 영국에 이주한 뒤로 영국과 한국을 오가는 생활을 하면서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이 책을 빌려 썼다. 외국에서 바라보는 모국의 느낌은 늘 그립고 애탈 것 같지만 의외로 산뜻한 시선으로 담은 장면도 많고, 특히 한국전쟁에 참여한 영국 청년들의 이야기를 읽을 때면 그동안 여기서 나고 자란 내가 너무 무지한 시선으로 살아왔다는 생각도 든다.

파킨슨병 진단을 받은 남편을 받아들이는 마음, 이제 스무 살이 되어 독립을 준비하는 첫째 딸을 응원하는 마음, 공동체를 이루며 언제든 함께 그러나 적정한 거리에서 살고 있는 이웃들의 마음을 찬찬히 드러내는 이야기들이 어쩐지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건 왜일까.

주변에 있는 사물에 깃든 추억과 감정이 우리가 쉽게 느낄 수 있는 것들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어떤 사람은 직접 투병 중일 수도 있고, 또 어떤 부모는 아들을 군대에 보냈었을 수도, 혹은 가족과도 가까운 이웃을 지척에 두고 사는 사람도 많을 테니까.


「사물에 대해 쓰려 했지만」 속에는 혼자 그러나 함께라는 수식어가 잘 와닿는 책이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건 나 혼자인 것 같지만 우리는 가족, 이웃, 친구, 사회, 여러 곳에 알게 모르게 연대 되어 있고 그 사실을 모른 척하기도 한다. 하지만 꼭 그럴 필요는 없을 것이다. 작가의 남편이 찬 파킨슨병 환자를 나타내는 팔찌는 주위 사람들이 느긋하게 그를 기다려 줄 수 있도록 하고 채리티샵에서 자원봉사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세계 정복이 아니라 무탈하게 세상이 돌아갈 수 있도록 하는 마음에 있으니 말이다.

혼자인 것 같지만 함께다.


스튜어드는 사람들 곁에서 규칙을 잘 지키도록 안내하는 도우미로 작가가 영국에서 성당을 다닐 때 맡았던 역할이다.

팬데믹으로 인해 거리 두기 등 여러 가지의 규칙이 생겼고 나이 드신 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필요한 봉사의 영역인데 작가는 장례 미사에서 이 스튜어드를 많이 경험했다고 한다. 확실히 외국의 장례식과 우리나라의 장례식은 많이 다르다. 외국에서는 장례식장에서 음악을 트는데 그건 고인이 좋아했던 음악일 수도, 혹은 가족이나 친구들이 고인을 떠오르는 음악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나도 죽으면 나의 장례식에 음악을 틀어 놓고 싶은데 그건 아직 먼 이야기이고 ^^;;

작가의 시어머님이 돌아가셨을 때는 아일랜드 민요를 틀었고 딸 다니나는 장례 미사 안내지 뒷면에 아일랜드 기도문 그를 지켜 주옵소서를 넣었다고 해서 어떤 내용인지 너무 궁금했다. 그래서 찾아보니, 이거 이거 내용이 너무 좋음.(책 읽다가 워드로 쳐서 프린트까지 해놓음 ㅎ)

사실 음악은 한순간에 그 시절, 그 기억으로 나를 넘어가게 하는 한 방이 있는 주문이다. 꼭 장례식장에서만이 아니라 길을 걷다가 가게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어도, 한강을 건너는 찰나에 귓가에 들리는 음악도 모두 누군가를 소환한다.



이 책을 읽으면 자꾸만 착해지고 싶다.

이웃들에게 좋은 사람이 되고 싶게 만드는 책

그러니까 이건 연대의 이야기다. 개인의 특별함이 강조되고 혼자 사는 이야기가 박수받는 시대에 ‘우리’라는 이름으로 함께 하면 좋은 이야기를 내밀하고 사적인 경험으로 정답게 쓴 책, 그래서 단숨에 후루룩 읽을 수 있었고, 읽는 내내 내 주변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워낙 무심하고 이기적인 내가 친절할 수 있는 방법은 뭐가 있을까 싶었는데 여기 나오는 펍의 주인 아일랜드인 에이드리언의 사고방식이 무척 와닿았다.

"당신 로컬이 뭐예요?"

"레드 라이언이요. 그쪽은요?"

"허스트 암즈예요."

무슨 대화냐면? 아마 영국에 펍이 유명한 건 다들 아실 터. 위의 대화는 당신이 자주 가는 로컬 펍이 어디냐고 묻는 거다.

이 대화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으로 펍이 동네의 마을회관의 역할을 한다는 것만 이해하면 된다.

펍은 '퍼블릭 하우스'의 줄임말이다. 개인 집이 가족을 위한 사적 공간이라면, 펍은 누구나 드나들 수 있는 공공의 공간이다.

-130


그 정도로 펍은 남녀노소 누구나 모이고 대화하고 정보를 교환하고 때론 혼자 홀짝 술을 마시며 공공의 사적인 공간을 확보하는 곳으로 우리나라로 치면 사랑방 같은 개념인데 작가가 사는 동네의 펍 주인 에이드리언은 단골손님에게도 사무적으로 대하는 일명, 얄짤없는 주인이다. 그래서 작가는 이 사람을 살짝 얄밉게도 생각하지만 의외의 면을 발견한 건 펍에서 열린 바비큐 파티에 갔을 때였다. 무료로 열린 파티에 자선 기부금을 모아 어린이 병원에 기부하는 주인에게 왜 이런 번거로운 일을 하는지 묻자 그가 하는 대답이 내겐 멋지게 들렸다.


그냥 비즈니스를 하는 거야. 펍은 지역 주민들이 와 줘야 운영되는 거고, 그들에게 좋은 일을 해야 계속 찾아올 거고, 그래야 사업이 계속되는 거잖아. 커뮤니티가 강해지면 펍도 잘 되니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거지.

그의 말속에는 도덕적으로 옳은 일을 한다고 믿는 사람이 갖는 우월감이나 자부심이 없었다. 그래서 야박하다고 여겼던 그의 사무적인 태도가 오히려 좋았다.

사물에 대해 쓰려 했지만 / 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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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터 2023.6
샘터 편집부 지음 / 샘터사(잡지)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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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샘터 6월호 주제는 『운동의 즐거움』

근 3년여 동안 필라테스를 하고 있는 나조차도 운동이 재밌나? 즐겁나?를 반문하게 만들지만 ^^

역시 사람은 다양하고 나와 달리 진정 운동을 즐기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독자 사연 중에 「갱년기 우울증을 날려준 마라톤」과 「가장 나다워지는 요가시간」은 잊고 있던 나의 운동 초보시절을 기억나게 해주었고 자칫 허리가 좋아져 잃을 뻔했던 초심을 다시 다잡게 해준 이야기들이었다.


🔖 처음 몇 주는 소파에 누워 감자칩이나 먹고 싶은 충동을 떨치느라 힘들었다. 하지만 그 고비를 넘기고 나자 재미가 붙었다. 머릿속을 비우고 풍경에 집중해 달리면 음악 없이도 시간이 잘 갔다. -26


🔖 모양에만 신경 쓰지 말고, 몸의 감각에 집중해 보세요. 겉보기에 이상하다고 틀린 자세가 아니거든요. 내가 맞다고 느끼면 그게 맞는 자세예요.-27

이번 샘터 6월호에서 보인 가장 흥미로운 운동에 관한 이야기는 바로 이색운동을 취미로 이끄는 코치들 섹션이었다.

개그우먼으로 잘 알려진 김혜선님의 점핑 피트니스와 물속에서 하는 사이클 운동 아쿠아바이크, 정말 생전 처음 들어본 와인 요가와 바위의 갈라진 틈을 이용해 산을 오르는 크랙등반까지..

정말 세상은 넓고 운동도 다양하구나.

이중에서도 와인을 마시며 하는 요가라니..! 얼마나 근사하고 낭만적으로 들리는지 모른다.물론 요가 한 자세를 하기 위해 몸을 구기고 호흡을 가쁘게 내뱉고 얼굴엔 평온한 미소를 지어야하지만 사실 운동이란 게 모든 그런 게 아니겠는가.

본인의 신체를 이용해 정신적 낭만을 충분히 흡수하고 몸으로 표현해 내는 것.

운동의 즐거움 중 하나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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