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조금씩 자란다 - 살아갈 힘이 되어주는 사랑의 말들
김달님 지음 / 창비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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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부터 따뜻하고 아름다운 책.

첫 장을 펼치자마자 마음을 울리는 문장을 담고 있는 책.


책에도 표정이 있다면 과연 이 「우리는 조금씩 자란다」 책은 온화하고 따뜻한 미소를 띠고 있을 것이다.


아마 개인적으로 내가 힘들고 외로울 때 우리는 조금씩 자란다를 펼쳐서일까. 누군가의 조곤조곤한 말소리가 책의 문장을 타고 넘어와 내 마음에 살랑 바람을 불어 넣었다.

"괜찮다고. 괜찮다고."

나는 주인공이 약점을 극복하고 가족을 지키며 세계를 구한다는 식의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영웅이 존재하지 않는, 등신대의 인간만이 사는 구질구질한 세계가 문득 아름답게 보이는 순간을 그리고 싶다.


이 첫 프롤로그는 김달님 작가가 이 책에 어떤 이야기를 담았는지 압축해 놓았다.

첫장에서 보이는 구질구질, 문득, 아름답게, 순간. 이 4개의 단어는 인생의 모든 장면을 특별하게 만들어 버리는 마법같은 주문이자 이 책에서 우리에게 전하는 따뜻한 메세지다.


분명히, 지금 힘든 시기를 지나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김달님 작가의 「우리는 조금씩 자란다」를 읽어보길 바란다.

문득, 아름답게 위로 받을 것이다.

이 책의 부제 '살아갈 힘이 되어주는 사랑의 말들'처럼 이 책엔 작가가 듣고 건져 올린 소중한 말들이 적혀 있다. 대개 그 말을 전해준 이들은 우리 옆에 있는 사람들 p85 이산가족 부부, 환경미화원, 청년 농부, 댄서, 신인배우, 이발사, 여자 야구단, 글쓰는 할머니, 마을신문 기자단, 환경운동가, 식당주인, 간호사, 사회복지사, 동네 통장, 인쇄소 직원, 치어리더, 시니어 바리스타, 과일가게 사장님, 라디오 DU 등... 이 있는데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정리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글로 읽히는 직업인 작가덕분에 우리는 그토록 기다렸던 말들을 만날 수 있었고 의도하지 않게 다가와 콕 박히는 말들도 읽을 수 있었다.



P120

이번에는 정말 될 거라 예상했던 공모전에서 최종 탈락했던 날, 그와 편의점 야외 테이블에 앉아 과자 한 봉지를 나눠 먹다가 물었다. 혹시 다음에도 안 되면 어떻게 할 거냐고. 그래도 계속하겠느냐고. 그때 나는 그를 조금은 미련하다고 여겼던 것 같다. 이날의 대화를 여전히 기억하는 건 뒤에 이어진 그의 대답 때문이었다.

"지금은 되게 하는 것이 나의 몫이야"



우리가 말 한마디에 자극을 받거나 위로를 얻는 건 거창한데서 나오는게 아니다. 예상하지 못했던 사람에게서 의외의 말을 듣게 되었을 때 우리는 그 말을 머리 속으로 기억했다가 복기하며 가슴으로 저장한다. 누군가는 다이어리에 적어 놓거나 또 누군가는 영상으로 만들어 놓을 수도 있겠지. 여하튼 자신만의 방법으로 사랑의 말들을 건지고 기억하는 일은 나에게 가장 필요한 말이며, 스스로에게 전하는 진심이기에 이토록 소중하다.

나에겐 '지금은 되게 하는 것이 나의 몫이야'란 말이 큰 울림이 있었다. 쓰고 싶은 글을 게으름 때문에 못 쓰고 있을 때나 언제 터질지 모르는 회사 업무를 꾸역꾸역 하고 있는 지금, 어떻게든 소설을 쓰고 일을 이어하는 게 나의 몫이라고 내게 말할 수 있었고 뭐라도 시작하는데에 힘이 되었다.


김달님 작가의 책은 처음 읽어 봤는데 이 「우리는 조금씩 자란다」만 읽고도 어떤 이야기를 짓고 맺는 사람인지 알 것 같았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따뜻하고 귀를 크게 열어 멀리 있는 사람말고 옆에 있는 사람의 말을 주의깊게 들으며, 그 말을 자신만의 온도로 다시 채색할 줄 아는 사람일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글만으로 이런 결을 느끼게 할 수 없을테니까.

P185-186

"작년 12월에 태어난 아이가 얼마 전에 처음으로 열 걸음을 걸었어요. 그 전까지는 막연한 두려움이 있었거든요. 이 아이가 과연 걸을 수 있을까? 걷지 못하면 어떡하지? 그런데 하루는 아이가 제 손을 놓고서 한 발 한 발 자기 힘으로 걷더라고요. 세어보니 딱 열 걸음. 그 모습을 보는데 세상이 너무 아름답게 느껴졌어요. 열 걸음을 걸었으니 이 아이는 앞으로도 잘 살아갈 거야. 그런 믿음이 생겼어요."



이 문장을 읽고 나선 한동안 다음 문장을 이어가지 못했다. 내가 모르는 엄마와 아빠의 모습이 떠올라 가슴이 먹먹했기 때문인데 아마 우리 부모님도 내가 처음 걸었을 때 이런 마음이지 않았을까 싶어서 자꾸만 기억도 나지 않는 나의 어린 시절로 뛰어갔다. 또한 내게도 아이가 있었다면, 내가 부모였다면 나의 아이가 처음 걸었던 그 날의 마음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었을까 싶어서. 너무 놀라고 벅찬 마음에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조용히 그 순간을 목도하며 지나갔을 싶지만 이제 내가 위의 문장을 가슴에 남겼기에 앞으로 이런 비슷한 상황을 만난다면 이 글에 기대어 내 마음을 더 크게 부풀릴 수도 있으리란 생각에 몇 번이나 이 페이지를 다시 읽었는지 모르겠다.

김달님작가의 그리운 것들은 「우리는 조금씩 자란다」 책이 되었다.


결국 우리를 키우고 돌보는 것들은 내가 만나는 사람들에게서, 즉 한 사람의 세계를 잠시 엿보는 찰나에 이뤄지는 거였다. 그런 모든 순간들이 퍼즐처럼 맞춰져 어느 날의 내 모난 마음에 맞기도 하고, 또 어느 날의 다정한 마음에 들어오기도 한다. 차분한 목소리로 그녀가 겪은 상실감에서 건져올린 소중한 말들을 「우리는 조금씩 자란다」에서 읽어 본다면 분명히 허전하고 외로웠던 마음 한 편이 따뜻해질 것이다. 이렇게 확신할 수 있는 이유는 내가 직접 그 과정을 겪었기 때문이고 당장 이 책을 지금 내 주변에서 가장 힘들어하고 있을 친구에게 선물할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가을로 들어서는 이 시점에서 이 책은 옆 사람에게 선물하기 좋았다. 이것을 계기로 만나서 두 눈을 직접 마주치며 서로의 목소리를 들어도 좋을 것이다.

그동안 묻어왔던 이야기를 나누고 농담을 주고 받으며 낄낄거리며 또 하나의 장면을 만드는데 더할나위없이 좋은 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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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광준의 생활명품 101
윤광준 지음 / 을유문화사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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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명품'이라니. 명품이란 말에 휘둘린 걸까?

일상을 유용하고 아름답게 만든다는 부제 아닌 부제로 이 책은 단번에 나의 픽이 되었다. 과연 명품이란 무엇인가.

오픈런을 하고 훨씬 오른 가격을 치르고 나서야 얻는 전리품 같은 것?

명품 앞에 <생활>이 붙는 한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말 그대로 생활명품은 내 옆에 있는 일상적인 물건의 가치를 다시 되뇌고 그 심미적 기능을 찾아 새롭게 바라보는 의미니까.


이 책은 윤광준의 생활명품 시리즈의 완결판으로 2002년에 시작한 그의 생활 물건을 바라보는 안목에 열광한 대중들에게 에센셜 한 물건을 소개하는 자리다. 그만큼 엄선한 물건이나 도구들이 예사롭지 않은데 그만이 포착한 물건의 기능, 브랜드의 역사, 디자인의 미적 감각까지 오감을 총동원해 우리에게 전달한다.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너도 나도 취향을 탐색하고 리치할수록 취향의 고급함을 인정받는 사회에서 꼭 비싸고 잘난 물건만 사랑받을 필요는 없다는 것을 알려주고 그 취향이라는 것마저도 자신에게 행복을 주고 안정감을 느끼게 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취향의 본질적 의미를 제시한다. 특히 매일 쓰는 물건일수록 우리는 내 손에 착 감기고 내 눈에 꼭 들어맞는 물건을 쓸 권리가 있다고 말하는 이 책은 그래서 유용하고 아름답다.

이 책을 제일 재밌게 읽을 수 있는 방법!
차례에서 내가 흥미 느끼는 물건을 쭈욱 살펴보고 그 페이지부터 읽는 것이다.

처음 보는 브랜드도 많았고 어떻게 쓰는 물건인지 흥미로운 것들도 있었는데 개인적으로는 내가 아는 물건이 있고 나 또한 평소 그 물건을 탐냈거나 갖고 싶었던 거라면 저자가 쓴 내용에 훨씬 이입이 잘 된다. 나의 경우 허먼밀러 뉴 에어론 체어와 몽블랑, 몰스킨, 무인양품, 연두, 파타고니아, 다이슨이 눈에 띄었고 역시나 재밌게 읽었다.

그럼 모르는 물건들의 이야기는 재미가 없냐고?

그럴 리가! 내가 밑줄 긋고 필사한 내용은 그동안 전혀 몰랐던 브랜드 혹은 생활명품이라고 생각해 본 적 없는 물건들에게서 보였고 이 책 덕분에 내가 물건을 고르고 보는 가치관이 더 확장되었다.


「윤광준의 생활명품 101」은 저자가 물건의 기능을 재정의하고 문화적으로 표현하는 데에 놀라운 책이다. 잠깐의 메모를 하는 포스트잇에도, 작업하기 위한 장갑의 기능에서도 단순히 물건이 지닌 기능을 넘어서 그 기능이 가능해지기까지의 고민을 문학적으로 풀이한다.

p251, 바리고

온습도계의 역할은 불현듯 궁금해지는 실내 상태의 체크다. 약간 추운 듯한데 현재 온도는? 건조한 느낌인데 가습기를 틀어야 할 때인가 등등. 상태의 정량화로 쾌적하게 일할 수 있게 했다. 무심코 보았다가 하는 일이 의외로 많지 않던가. 보지 않으면 연상도 상상도 없다. 생각의 환기가 이루어져 막혔던 아이디어의 물꼬를 터뜨릴지 모른다. 미처 챙기지 못한 사안도 불현듯 떠오르게 된다.


이쯤 되면 이것은 예술책이다. 소비와 취향을 문학적으로 반영하지만 생활의 장면들에게서 동떨어지지 않은. 생활예술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라고나 할까.

그런 의미에서 「윤광준의 생활명품 101」 책은 이쁘다. 즉, 소장용으로 좋다는 의미다. 책꽂이에 착 하나 꽂아두면 하얀색과 회색의 경계에서 밝게 빛나는 표지, 그 위에 깔끔한 타이포그래피, 가름끈까지 책 분위기와 어울리는 색으로 마감한 센스. 을유문화사의 로고도 잘 어울리는 생활명품 책으로 손색없다. 이왕이면 표지까지 내 마음에 드는 책을 읽는 나, 기분 좋아지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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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존하는 소설 창비교육 테마 소설 시리즈
안보윤 외 지음, 이혜연 외 엮음 / 창비교육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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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만나는 창비 미디어 교육의 소설은 뭐랄까, 마치 "옜다 읽어봐라. 여기서 맘에 드는 작가 한 명 못 만나나 보겠어!" 하는 느낌이다.


매월 책 자체를 만나는 기쁨도 크지만 그 안을 꽉 채운 소설가들의 이름을 보면서 "우와, 이건 꼭 소장해야 한다고!!!"를 외치는 것 같다.


이번 「공존하는 소설」에서는 나의 최애 서유미 작가의 이야기가 있었고(물론 예전에 벌써 다 읽어본 타르트 ^^) 최은영, 조남주 작가의 팬들도 기꺼이 행복했을 거라 생각한다.


물론 이번에 처음 보는 소설가분들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공존하는 소설」이 뜻하는 바를 조금씩 알게 되었으니 이른바, 사회적 약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함께 바라보는 시선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코로나는 단순히 바이러스를 감염시킨 것만이 아니다. 사회를 통제하고 사람과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것도 모자라 강한 사람은 더 강해지고 약한 사람은 더 약해지는 상황으로 바꾸어 놓았다. 운이 좋았다면 코로나 시대에 별다른 일 없이 단지 코로나 감염에 걸렸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투정 아닌 투정을 부렸을 테지만 운이 나빴거나 혹은 생계가 무너질 위기에 처해 본 사람이라면 단절된 사회를 더욱 외롭게 느꼈으리라.



「공존하는 소설」은 학대받는 아이, 외국에서 일하러 온 불법 근로자, 이제 막 서울로 독립을 시작하는 지방러, 동성을 좋아했던 학생, 치매가 오는 엄마를 바라보는 사람 등 특수하지 않은 평범한 일상에서 만날 수 있는 이른바 사회가 좀 더 너그러운 시선으로 감싸줘야 할 사람들의 이야기다. 한 작가 당 한 편씩의 글이 묶여 있기 때문에 얼핏 보면 전체적인 소설 흐름이 부자연스러울 수 있다고 생각되지만 막상 책을 펼쳐 읽어 보면 우리 주변에서 가까이 일어나고 있는 이야기가 한 권의 소설 흐름으로 자연스레 묶여 있다.


결코 우리가 외면해서는 안 될 사회적 약자들의 이야기를 한껏 흡수해야 한다.


인간은 사회에 속해 있고 한 사회는 국가에 속해있다. 이 말은 사람이 아무리 혼자서 산다고 외쳐도 우리는 결국 사회가 만들어 놓은 시스템에 의해 굴러가고 이 안에서 자신의 행복을 누리며 살아야 할 존재라는 뜻이다. 하지만 지금 현재 우리 사회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안고 사는 것처럼 불안하다. 뉴스에서는 연일 묻지마 살인과 폭행을 다루고 교사의 권리와 학생의 의무가 바뀐 세상에서 혼란스럽다. 그러니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 살만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다시 한번 진지하게 주위를 둘러보아야 한다. 아니면 이 책이라도 읽어보시길. 너무도 자연스럽게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사람들의 약한 구석이 쓰여 있고 그것을 서로 바라보며 품는 사람은 또 다른 약자라는 걸 확인할 수 있다.



p36. 밤은 내가 가질게


네가 학부모에게 아이 발달 사항을 설명하고 그에 맞는 조언을 해 주면 가끔 선생으로 인정받을 때도 있겠지. 근데 그게 너를 존중한다는 의미는 아니야. 그 사람들은 서비스 받는걸, 과도하게 친절한 서비스를 제공받는 걸 당연하게 생각해. 그러니까 원생이든 선생이든 누가 마음에 안 들면 쫓아내라고 난리를 피우는 거지. 우리 근간은 서비스직이야. 거기까지만 생각해.



학대받는 주승이의 어린이집 선생님인 '나'는 경찰에 신고함으로써 얻는 칭찬이 어색하다. 자신은 선생으로서 그 일을 한 게 아니라 그저 서비스직의 개념으로 한 일이라는 걸 본인이 너무 잘 알고 있어서다. "나는 주승이 선생님이 아니에요. 나는 한 번도 선생님이었던 적이 없어요. 나는 그냥"


처음부터 '나'가 그랬던 건 아니다. 선생님이라는 명칭 속에 자부심도 있었을 것이다. 아이들을 잘 가르치고 싶다는 희망. 하지만 몇몇 개념 없는 부모짓에 짓눌리기 시작하고 얼마 안 돼 마음을 고쳐먹었다. 어린이집 선생님은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서비스를 제공하는 직원이라는걸.


이런 '나'의 곧은 마음에 균열을 내는 건 늘 순진하고 착해빠져서 사람들을 쉽게 믿는 언니다. 쉽게 사랑에 빠지고 사기를 당하는 언니의 모습을 보면서 진저리 치는데 어느 날 언니가 유기견을 데려와 키우고 싶다는 생각에 또 한 번 화가 난다. 도대체 책임감 하나 없이 불쌍하다는 마음 하나로 그렇게까지 또 일을 크게 만들어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p46 밤은 내가 가질게


언니가 말했다.

아무 의심 없이 대할 수 있는 존재가 내 앞에 있다는 거. 그래서 내가, 아직 상냥한 채로 남아 있어도 된다는 거. 그게 나한테는 정말 중요해.


「공존하는 소설」을 읽으면서 계속 '상냥함'이란 단어가 떠올랐다. 누군가에게 친절을 베푸는 행위 혹은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네줄 줄 아는 마음 같은 것.


정확한 형태는 모르겠지만 가슴속에 품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따뜻해지고 스스로에게 미소가 지어지는 상냥함.


그런데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하면서도 가장 부족한 것이 바로 이 상냥함인 것 같다. 다들 특정 주제에 예민해져 물어뜯고 공유하며 서로 낄낄대는 마음이 자칫 농담이란 한 단어에 쉽게 넘어가고 있는 건 아닌지. 상냥한 건 쉽게 나올 수 있는 행위가 아니다. 본인이 죽을 만큼 힘든 상황에서도 가까스로 진실한 마음을 쥐어짜내어 상대에게 내놓을 수 있는 사랑이다.



미주는 주나와 진희와 고등학교 친구였다. 일종의 베스트 프렌드여서 서로를 너무 좋아하고 만나면 재밌고 그 어떤 세상에서 그들만 있으면 행복했다. 어느 날 진희가 자신은 여자를 좋아하는 레즈비언이라고 고백한 말에 주나는 "정말 역겹다"라는 말 한마디를 내뱉고 그 자리를 떠났고 미주는 할 말을 찾지 못해 교복 치마만 만지작거렸다. 그렇게 어색하게 헤어지고 그날 이후 진희는 세상을 떠났다.



p119 고백


시간을 되돌려 어느 한순간으로 갈 수 있다면 그때로 가고 싶다고 미주는 간절히 생각했다. 그때로 돌아간다면 이야기해 줘서 고맙다고. 나는 너의 편이라고 말할 거라고. 너를 그렇게 외롭고 아프게 하지 않을 거라고. 하지만 그때의 미주는 더듬거리다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진희는 역겹다 말하며 돌아선 주나에게도 슬펐겠지만 아무 말 하지 못한 미주의 행동에도 마음이 아팠을 것 같다. 서운하고 섭섭한 감정보다는 슬프고 외롭게 그 길을 친구들과 헤어지며 돌아왔을 때 아마 친구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어도 "괜찮아. 우린 네 편이니까"란 단 한마디의 상냥함만 있었더라면 진희는 덜 외롭지 않았을까.


「공존하는 소설」에서 사회적 약자에 노인을 포함시켰다는 건 씁쓸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받아들여야 하는 나의 미래였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늙고 치매는 사람을 걸러 오는 게 아니니까. 백은 빌딩에서 학원 강사를 하고 있는 경화는 그 옆 낡은 상가가 없어지고 새로운 요양원이 크게 들어선다는 말에 마음이 불편해졌다. 당장 아이들이 공부하는 환경인데다가 왠지 요양원은 그 동네의 이미지를 깎아먹는 것이라고 생각했을지 몰랐기 때문인데, 그런데 이혼 후 아이를 키우며 함께 돌봐주시던 친정어머니가 치매가 올 위기가 되자 돌연 요양원이 꼭 생겨야만 하는 입장으로 바뀌었다. 그전에는 내게 독이라고 했던 존재가 지금은 득이 되었고 사회적 약자로 돌아선 순간의 양면적 마음이 나쁘지만 않게 보인 건 우리들에게도 그런 순간들이 많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 아이가 없던 여성이 마음대로 식당을 다녔다면 결혼 후 아이를 낳고 난 뒤 노키즈존이 이렇게 많았었는지 의문이 드는 것처럼 사람의 상황은 언제나 바뀔 수 있고 사회적 약자로 두 발이 땅에 닿는 느낌은 생존과 직결된 문제일 수도 있을 것이다.



p205 백은학원연합회 회장 경화


경화도 백은빌딩 옆에 요양원이 들어오는 것은 싫다. 적당한 위치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건축주 입장에서 생각해도 그렇다. 신념도 좋지만 집값도 땅값도 만만치 않은 서울 한복판에서 요양원과 데이케어 센터를 운영하는 게 수지 타산이 맞는 일인가.



가난, 여성, 노인, 아이, 비정규직, 지방

위의 단어는 어느 정도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되뇌어도 비슷한 감정을 일으키는 말이다.


소수자 혹은 약자로.



세상은 불공평한 게 맞다. 모두에게 똑같이 공평한 세상은 지구 어디에도 없다. 신도 해낼 수 없는 일은 사람이 해내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지만 우리가 인간이고 최소 교육을 받고 말과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는 한 사회적으로 약한 사람들을 보호하고 그들이 이 사회에서 사람으로서 몫을 해낼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공존하는 소설」은 단순히 소설로서 끝나는 게 아니다. 우리가 알 수 없는 세계를 만나고 그 속의 사람들과 대화하면서 내가 아직 가닿지 못한 상황을 미리 살아볼 수 있게 하는 것. 그럼으로써 우리는 더 큰 사람이 되는 것. 우리가 소설을 읽고 좋아하는 이유다.



내가 언제든 사회적 약자가 될 수 있다는 걸 잊지 말고, 상냥함으로 서로에게 손 내밀어 줄 수 있는 용기를 갖고 싶다.


그래서 이 세상이 안전하다는 걸 우리의 다음 세대들에게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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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이 온다 창비교육 성장소설 10
이지애 지음 / 창비교육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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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흡입력이 좋은 책

★ 성장소설로 손색없는 책

★ 여러 생각과 사고를 확장시켜줄 수 있는 책

★ 새로운 가족형태를 만날 수 있는 책

이지애 작가는 미술치료사로 일하며 글을 쓰는 소설가이기 때문일까. 「완벽이 온다」는 꽤 흡입력이 좋아 하루만에 술술 읽을 수 있는 책이었고 다 큰 어른이 읽어도 여러모로 생각해볼거리가 많은 책이었다.


민서는 엄마가 집을 나가고 아빠마저 자신을 그룹홈에 맡긴 뒤 18살이 되자 독립을 하면서 살고 있는 주인공이다. 야간근무를 하며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날 중 그룹홈에 있던 선생님으로부터 전화가 오는데..


"너희 아버지 돌아가셨대. 지금 부산에서 장례 치르고 있다더라. 선생님도 급하게 연락받느라 경황이 없어서... 내일이 입관이래. 갈거면 주소 알려주고."

"아, 알려주셔서 감사해요. 문자로 보내 주세요. 먼저 끊을게요."


나를 버린 아버지라고 생각하지만, 그래서 원망도 하고 싫어해보기도 하지만 완벽하게 끊을 수 없는건 가족이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만날 수도 있는, 그러나 적극적으로 찾고 싶지는 않은. 하지만 돌아가셨다는 사실에 또 슬픈..

그룹홈은 공동생활 가정은 피치못할 사정으로 모인 아이들이 함께 사는 곳으로 겉으로 보기엔 일반 가정집이지만 그 안에서 배우고 지켜야 할 규율이 있고 규칙이 있다.


-13

그룹홈은 해야 할 일과 하면 안 되는 일이 너무 많다고 불만을 가지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들 중 몇몇은 그룹홈을 떠났다. 나는 갈 곳이 없었기 때문에 적응했다. 하지만 만 18세가 되자 시설에서 나가야 한다는 규정으로 인해 나는 떠밀리듯 세상으로 나오게 되었다. 통장에 찍한 오백만 원의 자립 지원금과 함께 그룹홈에서 만들어진 생활 패턴은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 무로 돌아갔다.


「완벽이 온다」에서 완벽은 그룹홈에서 함께 지낸 해서 언니의 아이 태명이다. 민서와 해서는 그룹홈에서 자매처럼 지냈고 이번에 함께 산부인과를 가게되면서 해서에게 조금 더 관심을 갖게 된다. 그동안 민서는 사는 게 힘들고 무슨 일이든간에 심드렁했고 열심히 산다고 생각했지만 또 그렇지만도 않은, 주변 사람들을 잘 챙길 줄도 모르고 사람에게 어떻게 관심을 갖고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모든 게 서툴렀다.


-15

또래 알바생들은 불편했다. 그들과 같이 웃어야 할 타이밍을 맞추는게 어려웠다. 다들 웃는데 나 혼자 웃지 못하는 순간이 가장 난처했다. 생각하는 걸 다 말하는 게 아니라고 배웠지만 그다음은 익히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해서가 연락이 안 되고 민서는 해서를 찾으려 해도 그동안 언니에 대해 알고 있는게 하나도 없다는 걸 알고 예전 그룹홈에서 같이 지냈던 설, 솔 자매에게 연락을 한다. 이 자매는 아빠가 알코올 중독자여서 할머니를 때렸고 이를 자매가 신고하여 그룹홈에 들어왔다. 그룹홈의 특성상 아이들 개개인은 저마다의 사정과 슬픈 서사를 안고 있기에 서로에게 겨누는 눈빛과 마음은 날카롭지만 그 뒷면으로는 본인의 모습이 투영돼서 결국 가족처럼 받아들이는 관계이기도 하다.


솔은 그동안 해서와 연락을 주고 받은 사이였고, 가끔씩 오랫동안 연락이 안 되는 아이였기 때문에 너무 조급하게 찾지 말라고 민서에게 전한다. 그러면서 오랜만에 만난 민서와 가까워지게 되고 설의 죽음, 할머니의 치매 등 그동안 묵혀 두었던 삶을 이야기하는데...


-113

아빠는 밖에서는 멀쩡하게 술을 마시고 집에만 오면 돌변했어. 설이 전에 신고를 해서 그런지 술만 먹으면 자꾸 설한테 시비를 걸더라. 설은 자기만 참으면 된다고, 나한테 신고하지 말라고 했어. 신고하면 다시 흩어져서 살아야 하는데 그러기 싫다고. 우리는 가족이니까 한번만 더 용서해 보자고.



가족이란 울타리는 한 인간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그것이 좋은 가족이든, 나쁜 가족이든.


아니, 나쁜 가족인 경우 더 큰 재앙과 불행을 갖고 오는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사이가 왜 이렇게 틀어지는지 알 수 없지만 그룹홈에서 만난 민서와 해서, 솔은 서로의 불안을 껴안으며 새로운 가족의 형태를 만드려고 한다.


이들의 연대는 완벽한 가정을 꾸리고 싶었던 해서가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솔과 살게 되면서, 그 집에 민서까지 집보증금을 들고와 함께 하면서 더 단단해질것이다.

흔히 부모가 없는 아이들, 불안한 가정 속에 방치된 아이들을 곱지 않은 시선과 동정으로 마음을 처리하곤 하는데 「완벽이 온다」를 읽는 동안 그런 편견은 흐지부지해졌다.

단 하나 마음에 남은 건 불안을 함께 겪은 아이들이 그것을 폭력이나 불법적인 일로 이루지 않고 성실한 인간으로 성장하는데 써왔다는 것이 기특했으며 함께 하는 마음을 거부하지 않고 각자의 불행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어른들로 되어가는 과정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완벽은 완전한 것과 다르다. 모든 것이 완벽하다는 말은 흐트러짐 없이 정상적인 수치와 기준에 딱 들어맞는 걸 의미하지만 완전한 건 그런 형태와 상관없이 내 마음의 완전하게 편안하고 좋으면 충분한 의미에 가깝다.


그래서 「완벽이 온다」는 결국 완전한 가족을 이루는 이들의 미래를 뜻하는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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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터디 위드 X 창비교육 성장소설 9
권여름 외 지음 / 창비교육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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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표지만 보면 학교소설, 청소년 소설의 단순한 이야기일 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첫장을 펼치고 그 다음, 또 그다음 장을 읽고나면 어느 새 책 한 권을 다 읽게 될 것이다.


그정도로 흡입력이 짱짱이고 지금의 학생들과 예전의 학생이었던 내가 읽어도 비슷한 결의 감정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라떼들은 말한다.

"요즘 학생들은 너무 버릇이 없어"


최근 교사의 죽음과 구타당한 교사들의 기사를 보며 앞으로 우리 학생들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우려와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그러다 이 「스터디 위드 X」를 보면 그런 걱정은 더 가중된다. 사회 축소판 학교에서 벌어지는 복잡미묘한 관계와 상황들. 이곳을 벗어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나이.


학교는 학생들에게 안전한 공간이자 불안한 곳이기도 하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학교폭력, 왕따, 성적비관은 어김없이 전해지고 거기에 요즘은 카카오톡과 더불어 다양한 매체에 의한 정신적 가해의 층위가 깊어졌으니 요즘 학생들이 느끼는 불안과 공포는 우리 세대와는 판이하게 다를 것이다.


이상하게 돌아가는 상황에서 이상하게 꼬여버리는 심리와 관계를 이 소설에서는 무서운 장치과 엮어 풀어나간다.


그 장치는 때로는 귀신이 되기도 하고, 친구의 반전 모습에 기대는데 생각보다 공포스러운 이야기들로 읽는 동안 몇 번의 섬뜩함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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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연아, 나는 성공한 사람이 될 거야. 그래서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그런 사람. 근데 이젠 단순히 공부만 잘하고 좋은 대학에 간다고 해서 무조건 성공하는 시대가 아냐. 학벌은 기본이고, 특출한 기술이나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돈이건 명예건 일단 유명해져야 따라온다구.


성공하는 방법이 많아진 것만큼 해야 할 일도 다양해진 사회에서 부와 명예를 바라보며 공부하는 학생들은 이제 책만 봐서는 성공할 수 없다. 일찌감치 그걸 알아버린 아이들은 건전한 야심이 뭔지도 모른채 오직 성공의 목표만을 향해 걸어간다.


수아는 전교 1등 학생. 스터디 위드 미를 주제로 꾸준히 유튜브를 올리는 학생이다. 소연이는 공부는 못 하지만 수아의 유튜브를 우연히 발견한 뒤로 남몰래 응원하면서 점점 힘이 없고 아픈 수아를 걱정하게 되는데...

더 큰일인 건 수아의 영상에서 보이는 귀신 두 명이 수아를 괴롭히는 장면을 보는 것이다.


이 사실을 친구에게 알릴 것인가, 말 것인가.

「스터디 위드 X」의 첫 단편 소설로 나오지만 나는 여기서부터 결말에 놀라고 말았다.


응? 헉! 뭔가 무서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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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범인을 만들고 싶어 했어.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건 범인이 아니라 희생자를 만들어 내는 일이었어. 게임에서 관찰해야 할 대상은 다른 아이들의 손이 아니라 아이들 자체였으니까. 성격이 드센지 소심한지, 이 게임을 재밌게 생각하며 함께 가담할지 아니면 속절없이 말려들지. 지금 와 생각해 보면 초등학생에 불과한 아이들이 어떻게 그 정도로 영약할 수 있었나 싶어.


이 책에서 내 이마를 가장 찌뿌리게 만든 이야기. 슬프고 또 슬퍼서 하수구 아이를 진심으로 안아주고 싶었던 이야기이자 좋은 어른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게 만든 이야기.


소심하고 어리숙한 평범한 아이가, 아니 집안이 어둡고 가족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아이가 어떻게 반에서 왕따가 되고 더 나아가 큰 사건의 희생양이 되는지 알려주는 이야기는 아이와 어른들의 세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패턴이라 외면하기 힘들었다.


그저 장난으로 시작한 소문이 사실이 되고, 사실을 믿는 게 아니라 믿는 일이 곧 진실이 되는 작금의 현실을 소름끼치게 마주하게 만든다.


비단 초등학생들이 영악해서 그런 건 아닐거다. 모두 어른들에게 배운, 미디어에서 파생된 복합적이고 자극적인 이야기들이 아이들의 머릿 속에 박혔을테고 재미와 장난의 이름 뒤에 숨어 결국 희생양을 찾고야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오싹한 현실을 마주하며 살아내는 힘겨운 아이들 옆엔 친구가 있다. 적극적으로 마음을 나누는 친구 혹은 소극적으로 마음을 내보이는 친구까지.


외롭지만 외로울 수 없도록 옆에 소중한 누군가가 있다는 건 잠깐의 희망, 쉼이었을 수도.


그래서 「스터디 위드 X」는 무섭지만 슬프고 마음이 아릿한 이야기들이 많았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은 더 묘하게 무서웠는지 모르겠다.

뜨거운 이 여름, 지금 반드시 읽어봐야 할 우리의 이야기!


학생들에게는 뜨거운 몸에 차가운 이야기로 덮어 열기를 식혀줄 것이고 어른들에게는 차가운 감정에 뜨거운 이야기를 꺼내게 해줄 수 있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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