쥐들의 사건을 가지고 그렇게 떠들어 대던 신문이 이제는아무 소리도 없었다. 쥐들은 눈에 띄는 거리에 나와 죽었지만사람들은 방 안에서 죽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신문은 오직 거리에서 일어나는 일에만 관심이 있었다. 그러나 도청과 시청에서는 의문을 느끼기 시작했다. 의사들이 제각기 기껏 두세 가지 경우 정도만 알고 있을 때에는 누구 하나 움직이려 들지 않았더랬다. 그러나 결국 그 모두를 한데 합해 본다는 데 생각이 미치기만 하면 충분히 깨달을 수가 있는 것이다.
ㅡ1부, 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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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고독과 가난과 가까운 사람들에게서 받은 모욕이 자신을 작가로 만들어주었다고 말했다. 그것이 작품의 모티프가 되었냐는 진행자의 질문에는, 소설이란 자기 인생이라는 집을 부수어 그 벽돌로 다른 새로운 집을 짓는 일이라는 외국 석가의 말을 인용한 뒤 그러나 옛 친구들이 자기 소설을 읽지않기를 바란다고 농담했다.
ㅡ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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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를 혐오하다
김용민 지음 / 지식의숲(넥서스)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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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히 짚고 넘어가자. 하나님은 성서에서 자살한 사람을죄인으로 정죄하지 않았다.
자살에 대한 하나님의 최종적이고도 정확한 의중은 ‘간곡한 만류이다. 에스겔 16장 6절에 "핏덩이로 누워 있는 너에게, 제발 살아만 달라고 했다"는 말씀이있다. 이 메시지의 맥락은 극단적으로 소외되거나 절망감에 싸여도 ‘살라‘고 당부하는 것이다. 갓난아기가 탯줄을 절단받지않았고 누구로부터도 씻김받지 않았으며 강보에 싸이지도 않은 채 들에 버려진 상태. 또 맹수가 물어가거나 요행히 그런 일이 없어 굶어 죽어도 관심조차 받지 못할 사정, 이 생각만 해도참혹한 상황에서도 살라는 당부다.
ㅡ1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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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에 대항하기 위해서라면 모든 수단이 용납된다는 판단을 내리는 순간, 선은 애초에 파괴하려고 했던 바로 그 악과 구별할 수 없게 된다. ㅡ91쪽

영화 <사바하>의 결말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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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의 대상은 대개 균질화되지 못한 사람이다. 즉 사회적소수자다. 통념이나 대세를 따르지 않은 경우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사람을 혐오하는 이는 누구인가. 다수자, 강자이고, 아니면 누군가로부터 혐오 당할까봐 노심초사하는 부류아닐까. 그래서 모든 혐오는 떨쳐내야 한다. 어려운 것이 아니다. 각자 고유의 기질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면 된다. 각자의 개성을 부정하지 않으면 된다. 길들여질 필요가 없는 것까지 길들여지면 길들이려는 자만 행복해진다. ㅡ1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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