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소설 장르의 저서를 그리 애호하지 않으며, 더불어 그림을 곁들인 것이라면 유별히 괜한 거부감에 손사레로 밀어내곤 한다. 그 까닭이야 꼴같잖은 허영심으로 읽어낼 수 있겠으나, 보다 선명한 연유를 밝혀보라면 고민을 거듭한다 한들 알 길이 없어 침묵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앞으로의 글은 소설 <창가의 토토>를 탐독하고 부족한 식견으로 서평을 가장하여 몇 자 적어 낼 객기의 산물이다. 이는 <창가의 토토>가 전 세계의 베스트셀러로 천만 부 그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한 수치적 까닭도 아니요, 삽화를 끼워 넣은 이와사키 치히로의 그림체가 유독 맘에 들어찬 이유도 아닌, 교육을 소재로 한 자전 소설이라는 표어의 매혹이 그 원인일 것이다.
봄 그리고 청춘의 흥취에 사리분별이 어려웠던 스무 살 언저리의 대학생으로서는 강단 교육의 무지몽매함을 감각하기 버거웠던 듯하다. 각진 강의동의 경직된 회색마저 그 앞을 거니는 학우들의 총천연색 옷차림에 가려 목격하지 못했을 그날, 교실 끝자락 책걸상에 걸터 앉은 청춘은 야속히도 푸른 호수와 만개한 분홍 꽃의 향연에 한껏 도취되어야 했다. 그렇게 날과 달, 그리고 해마저 보내어 어느덧 스물하고도 열의 반분을 살아 대학의 감흥에 질력이 날 때 즈음, 비로소 나는 무엇인지 모를 무게감에 짓눌릴 수 있었다. 


그 중량의 원흉은 명백 강단 인문학의 폐단에 있었다. 세세한 내용이 무엇인지를 시시콜콜히 토로하고자 한다면 한나절의 반은 누구든 붙잡고 떠들어야 성이 찰 일이다. 그러니 그저 대략의 골자만을 적어 두자면, 작금의 강단 인문 교육 아래 절반을 넘는 수의 인문학도들이 글벙어리가 되어버린 사실이 그것이다. 본디 인문학은 과거의 지식을 내재적 사유의 줄기로 흘려 지혜의 활자를 짜내어야 마땅할진대, 우리네 강단 인문학은 그저 경화된 지식의 퇴적만을 강요하며 수용자의 헤아림을 철저히 봉하고 있었다. 아마 이즈음의 인문 교육은 충실한 나팔수를 가꾸어 내고자 공을 들이는 듯했다. 스스로의 주견 없이 타인의 말이나 입장을 덮어놓고 따라 외워 대는 나팔수를. 나는 그 우악스러운 교육의 민낯을 목격한 이래, 비길 데 없는 아름다움이라 간주되어야 할 대학생활에 스스로 사망을 선고했다. 


강단을 책망함으로 스스로마저 미워한 날이 켜켜이 쌓였다. 고생하여 잊고자 글을 적고 그림을 휘갈겨도, 학기 중 필연 조우하는 교육의 폐단은 문득 나를 삼켰다. 그 억센 손아귀의 압력에 두렵고도 분통하다 한들, 한낱 학부생으로서 그 무용함을 타파하는 일이 불가능에 가까운 현실을 부정할 수 없음에 나는 더욱이 무기력으로 침전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도륙된 향년의 대학생활은 꼬박 두 해를 넘기어, 어느덧 교육의 우매함이 예사스러운 일로 인지되어 버린 또 다른 비극의 초입에서, <창가의 토토>를 들어 읽었다. 탐독 후의 소견을 미리 밝히자면 토토의 삶은 벅차게 유별남으로 눈부시게 아름다웠다는 것. 더불어 도모에 학교 교장선생님, 고바야시 소사쿠의 말과 행동으로 재차 표명되는 정의로운 교육의 지향 또한 고뇌를 넘어 체념으로 추락한 현실의 나를 위로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아쉽게도 아직 책을 접하지 못했을 누군가를 위해 그 인상의 토막이나마 공유하고자 하는 욕심으로 <창가의 토토>의 일면을 소개한다.
작가의 입을 빌어 <창가의 토토> 내부의 일화들은 모두 실화에 기저를 두며, 그는 이를 저술함으로 도모에 학교의 교장, 고바야시 선생님을 기린다. 그가 아이들에게 품었던 깊은 사랑, 나아가 그로부터 자연스레 도출되는 올바른 교육의 양상과 아이들의 변화를 구체적으로 전달하며 <창가의 토토>는 동화에 가까운 분위기를 조성한다. 우리는 그 목가적 인상을 감각할 수 있는 어귀에서 주인공 토토를 만난다. 


토토라는 앙증맞은 이름의 여덟 살 배기 소녀가 퇴학을 당하는 사건으로 이야기의 막은 오른다. 그 연유는 토토의 엉뚱함에 기원하는데, 개별적 사례들을 간추리자면 수업 도중 부지런히 책상 뚜껑을 열고 닫으며, 실컷하고 나면 창가에 서서 밖을 내다보고, 어느새 큰 소리로 밖을 지나는 악사 아저씨를 불러 연주를 요청하는 경우들이 그것이다. 이 사실들을 담임선생님에게 전해들은 토토의 어머니는 이내 토토의 전학을 결심하고, 토토는 여러 내막은 알지 못한 채 도모에 학교로 전학한다. 교문은 땅에서 자랐고, 교실 대신 전철이 들어서 있는 곳. 머리숱은 적고 앞니는 빠진 교장선생님이 토토를 반긴다. 그는 약 네 시간에 걸친 토토의 자잘한 이야기들을 묵묵히 들어주고는 그 머리에 손을 포개 얹어 입학을 허락한다. 


이후 나열되는 도모에 학교의 교육방침은 일반적 견해에 있어 사뭇 난해한 것으로 관찰될 뿐이다. 도시락의 메뉴는 ‘바다에서 나는 것과 산에서 나는 것’이어야 하고, 교실 좌석은 자율적으로 배정되었으며, 국어든 수학이든 학생이 선호하는 것부터 공부한다 한들 어떠한 탈도 없는 도모에 학교의 일상은 당대의 일본에게도, 또한 작금의 한국에는 더욱이 괴이한 교육기관으로 비추어 의아함을 자아낸다. 그러나 대개 병폐한 사회, 그 내부의 이질감은 정의의 다른 말이라 하지 않았던가. 이를 상기함으로 비로소 도모에 학교의 특색은 아름다운 도리로 변모한다. 아이들은 강당에 둘러앉아 각자의 도시락을 그득 채운 음식들을 나누며 어느 것이 바다에서 나고, 어느 것이 산에서 나는지를 체득하는 즐거움을 향유한다. 그날 기분에 따라 어떤 곳이나 마음에 차는 좌석에 앉으면 그만인 교실의 자율성은 새로운 관계의 설렘을 선사하고, 특정한 과목에 얽매이지 않는 도모에 학교의 수업 방식은 아이의 개성을 확립하고 학습의 즐거움으로 귀결한다.  


온전히 합당할 수 없다면, 그 모든 규칙을 제거한 교정. 수영장에서는 마른 아이도, 통통한 아이도, 남자도 여자도 모두 스스로 그러한 모습으로 웃고 소리지르며 잠수한다. 사람의 몸은 어느 경우이든 아름답다는 하나의 진리를 가르치고자 교장선생님이 조성한 도모에 학교의 수영장에서는 온몸은 새까맣게 타고 수영복 자국만 하얗게 남는 일이 없다. 아이들은 그렇게 자율성을 유영하며 타인을 사랑함으로 스스로를 사랑하는 지혜를 터득한다. 충만한 사랑의 뒤안길로 자연스레 차별과 위계는 소멸한다. 설령 신체적 불편함을 소유한 누구라 한들, 그저 배제 내지는 서툰 배려가 만연한 관계가 아닌, 진정한 친구로 혼재할 수 있는 도모에 학교는 어쩌면 실현되기 어려운 유토피아로 목격된다. 그 내부의 축복된 아이들은 하교와 동시에 해방의 기쁨이 아닌 추방의 슬픔을 감각한다. 이즈음에 이르러 작금 우리 교육의 현실을 곱씹어보는 일은 아마 무척 지독한 기백을 필요로 하지 않을까. 


그토록 찬란한 도모에 학교의 동화, 그 바깥의 현실은 점차 전운으로 포위된다. 어른들의 욕망이 마찰하여 패권을 차지하고자 감행한 갈등의 파편은 어느덧 교장선생님과 아이들의 소박하고도 전부였을 유토피아인 도모에 학교의 교문 앞마저 잠식한다. 일장기를 든 이웃 아저씨와 오빠들이 만세를 외치며 전장으로 떠났고, 일본 하늘에 미국 비행기가 폭탄을 싣고 다니는 모습이 빈번히 관찰되던 그날, 도모에 학교의 관리인 료 아저씨마저 아이들과의 작별을 고한다. 그렇게 문득 도모에 학교는 포화에 휩싸인다. 교장선생님과 사랑받은 아이들의 자지러지는 웃음소리가 아닌 땅과 건물을 무너뜨리는 포성으로 도모에 학교는 무너져내린다. 교장선생님은 그 얄궂은 불길을 보며 옆을 지키는 아들에게 넌지시 말한다. “야, 다음에는 어떤 학교를 만들까?” 


소설은 토토의 피난 길을 마지막으로 막을 내린다. 그저 아름다웠을 도모에 교정이 태평양 전쟁의 폐허로 몰락한 참상에 이르니 괜스레 입안이 텁텁하여 내어 놓을 언어가 소멸하는 듯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고바야시 선생님의 덤덤한 질문을 잊지 않음으로 걸음을 내딛을 수 있겠다. 작가의 후일담에는 전후 교장선생님의 행적이 서술된다. 그는 불이 난 자리에 유치원을 열고, 동시에 국립음악대학 보육과를 만드는 일에 협력하였다. 그곳 초등학교의 설립에도 조력한 바 있으나, 아쉽게도 꿈으로나마 그리던 도모에 교정과 꼭 닮은 초등학교를 다시 세우기 이전, 그는 예순 아홉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이제 도모에 학교는 없다. 일본의 사정이야 직접 겪은 바 없어 쉽사리 단언할 수 없을 터이나, 우리의 근거지, 이곳 한국은 분명 그렇다. 개성과 신념은 불필요한 것으로 치부되고, 오로지 수치만이 학생의 가치를 매길 권세를 누린다. 도모에 학교의 전부라 해도 과장은 아닐 체험으로 나아가는 학습이란 그저 구실일 뿐, 우리의 교육기관은 그저 칠판이라는 좁은 세계 내부에 온갖 잡스러운 지식들을 빼곡 채우고 지우기를 반복한다. 우리네 학생들은 산수유 열매의 빛깔은 본 일 없어도 <성탄제>의 주제는 알아야 하고, 김승옥의 삶은 차치하고서라도 <무진기행> 따위의 작품명은 암송할 줄 알아야 훌륭할 따름이다. 화를 잘 내지 않는 고바야시 선생님이라 한들, 작금의 실태를 목격한 그는 이 또한 용인하여 너털웃음을 보일 수 있을까.


초, 중, 고의 교육은 대개 보다 서열 높은 대학으로 진학하기 위한 배다리로 분류될 뿐이다. 청춘의 자유라는 광명과 더불어 밥벌이의 어려움을 누차 강조하는 담임선생님의 호통은 우리 청소년들을 희망으로 고문한다. 크게 바뀌는 것이 없음을 알면서도 미래의 허상을 주입하여 현재의 희생을 당연스레 치부하는 그들의 낯빛은 분명한 기만이다. 그 조롱을 멍청하게 믿어 대학에 진학한 나의 때늦은 불평을 듣고는, 진정한 학문의 교육 기관으로 대학원을 언급하며 둘러대는 여러 교육자들의 낯짝 앞에 나는 어떠한 거동으로 임해야 하는가. 그 뻔뻔함에 구역질을 하면서도 꾸역꾸역 학우들을 밟아 올라 취하는 상위의 학점은 어쩔 수 없는 나의 치부이다. 오롯한 사실로 적힌 <창가의 토토>가 환상문학으로 분류되어야 마땅한 지금, 나는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쳐 박아 그 장르가 다시금 리얼리즘으로 편입되기를 기원한다. 나야 이미 닳고 아파하여 넝마가 되어버렸을지라도, 후일의 아이들이나마 각자의 색을 선명히 하는 고운 천으로 자라기를 바라며. 



댓글(1)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arafina0605 2019-08-16 2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 글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