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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극장 - 영원회귀와 권력의지의 드라마
고명섭 지음 / 김영사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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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평성을 골자로 한 상대평가라는 미명 아래 철저히 분해되어버린, 아니 어쩌면 도륙되어버린 한국의 인문학 강단 그 내부의 학부생으로서 나는 긴 시간 괴로워야 했다. 주관적 사유는 배제한 채 과거의 지식만을 늘어놓아야 마땅한 지필고사에서, 읽기 어려운 문체는 필시 학부생의 글은 아닐 것이라 단정하는 노교수의 강의동에서, 진즉 부끄러움을 알아차린 나는 스스로 떳떳할 서식지를 찾지 못해 그저 방랑해야 했다. 그럼에도 우매한 강단으로부터 스스로 물러나는 기백은 보이지 못하고, 교보재와 필기구를 욱여넣은 가방을 싸매 강의실 한 켠 구석에 엉덩이를 붙였다. 억울하고 분한 마음으로, 식어버린 교수들이 건네는 부패한 인문학을 주둥이를 벌려 받아 씹고 씹었다. 혀를 감싸는 시큼함, 코로 내뿜는 비릿함 따위의 불쾌한 이물감도 개의치 않았다. 현 인문학의 무용성을 통렬히 지적하는 반동분자를 자처한 나는 동시에 우수한 학부생임을 흉내 내야 마땅했다. 대개 어떠한 비판이든, 그 효용은 권세를 가진 이의 입에서 비롯되어야 획득되어 버리곤 한다. 우리네 세상은 무능력한 비평가의 언행을 도피로 매도하여, 되려 그들을 조롱하는 것으로 현재의 체제를 고수하고자 열과 성을 다하지 않던가.


그 속사정이야 그렇다 한들, 강단의 우악스러운 평가 기준에 부합할 수 있도록 꼬박 앉아 학기를 썩히는 일은 여전히 쓰라렸다. 그리하여 짬을 내어 스스로 철학서를 탐독하는 일은 더욱이 즐거울 뿐이었고, 그 도상 어디쯤 나는 니체와 조우했다. 진실되고 명랑한 자, 그리고 극복하는 자로서 나약한 범인들을 정신의 귀족으로 상승시키고자 삶을 연소했던 그의 투쟁은 그 가치를 함께 좇을 동지로서 나를 포섭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나야 그 교육에의 고찰에 이끌려 니체의 새끼임을 자청하였으나, 사실 인간 문화 전반을 아우르는 그의 통찰 일반은 매몰차고 날카로움으로 힘을 가진다. 그 사상적 고매함과 더불어 억세되 수려한 그의 문체에 홀리는 독자 또한 적지 않을 것으로 헤아린다. 작금에 이르러 출판 시장을 성공적으로 잠식한 에세이들을 찬찬히 곱씹어보면, 걔 중 절반 정도의 것은 니체의 글솜씨와 무척 닮아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 그들 중 몇몇은 니체의 잠언을 각색도 없이 적어 놓고는 마치 제 글인 양 필력을 과시하며 작가의 반열에 올라있을 따름이니, 글로써 세계의 지축을 흔들고자 했던 니체의 염원은 지금 여기에 이르러 넘치게 달성되었다.  


그러니 니체를 돌아보는 일은 작금의 문화인들에게 있어 분명한 효용을 가질 것이다. 그러나 나는 현재의 쉽게 쓰인 글에 익숙해져 버린 독자들에게 있어 니체의 글은 사뭇 난해하고 폭력적인 글로 인지되어 버릴 위험을 안다. 그리하여 니체와의 만남 이전 한 번의 우회를 거치는 경로를 소개하고자 하는 바인데, 한겨레신문의 논설위원으로 역임 중인 고명섭 저자의 <니체 극장>이 그것이다. 굳이 이를 니체와의 조우, 그 초입에 배치하여 만남을 주선한 까닭은 조금은 버거운 분량을 상쇄할 훌륭한 가독성도 하나의 큰 요소로 꼽힐 수 있겠으나, 니체의 생애를 지루하지 않도록 담은 글임에 보다 주요한 의의가 있다. 어떠한 사상이든 적확한 의의를 깨닫고자 한다면, 그 사유의 뿌리가 되는 사상가의 생애를 붙들고 늘어져야 한다. 이러한 과정이 결여된 철학, 더 나아가 인문학이라 함은 곱게 말해 몽상이요, 진실로는 허상일 뿐이다. 부족한 식견으로 떠드는 부끄러운 아는 체는 이만 각설하고, <니체 극장>의 표제를 풀이하는 저자의 말을 인용하는 것으로 저서의 일면을 소개하고자 한다. 


“니체의 철학 작품들은 하나의 독특한 공간을 구성한다. 그 공간은 극장이라고 이름 붙일 만한 공간이다. 니체의 예외적인 삶이 떠받치고 그의 특별한 문체가 만들어내는 한없이 낯선 분위기의 공간, 그 극장의 무대에서 니체는 모놀로그를 한다…”


“니체의 작품이 만들어낸 공간은 현실에서 용납하기 어려운 파괴적이고 비도덕적인 열정들이 날뛰는 공간이다. 비도덕적인 것들이 비도덕적인 것 그대로 이 공간에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자신의 가치를 주장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 공간에 함께 입회하여 비도덕적인 것들과 대면하고 그것들의 가치를 재평가할 기회를 얻게 된다. 니체가 작품을 통해 창조한 공간은 그런 의미에서 일종의 극장이다. 이 극장에서 니체는 여러 가면을 쓰고 등장해 관습과 전통을 조롱하고 도덕과 윤리를 해체하며 통상의 수준에서 볼 때 허용되기 어려운 극단적이고 반사회적인, 그리고 정치적으로 몹시 위험한 주장들을 쏟아놓는다…”


“고대 그리스의 비극 상연장이 시민-관객의 동참과 몰입 속에서 삶과 운명을 뼈저리게 느끼게 했듯이, 니체 극장은 독자-관객에게 위험한 사상들을 강렬하게 느끼고 겪고 평가할 기회를 준다.”


“한 사람의 삶에 대해서, 그의 정신에 대해서 긴 글을 쓴다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일이다. 그 사랑에는 사랑하는 마음만 있는 것이 아니다. 비판하는 마음도 섞여 있고, 부정하고 외면하는 마음도 들어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뜨거운 사랑 없이 한 인간의 삶을 글로 옮긴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니체는 사랑을 고백할 만한 사람이다. 그 사랑 안에 그 사랑에 육박하는 반감과 불편과 괴로움이 스며들어 있다 하더라도, 그 사랑의 밑바탕에 무언가를 공모한다는 비밀스런 느낌이 깔려 있는 한 사랑은 여전히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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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소설 장르의 저서를 그리 애호하지 않으며, 더불어 그림을 곁들인 것이라면 유별히 괜한 거부감에 손사레로 밀어내곤 한다. 그 까닭이야 꼴같잖은 허영심으로 읽어낼 수 있겠으나, 보다 선명한 연유를 밝혀보라면 고민을 거듭한다 한들 알 길이 없어 침묵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앞으로의 글은 소설 <창가의 토토>를 탐독하고 부족한 식견으로 서평을 가장하여 몇 자 적어 낼 객기의 산물이다. 이는 <창가의 토토>가 전 세계의 베스트셀러로 천만 부 그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한 수치적 까닭도 아니요, 삽화를 끼워 넣은 이와사키 치히로의 그림체가 유독 맘에 들어찬 이유도 아닌, 교육을 소재로 한 자전 소설이라는 표어의 매혹이 그 원인일 것이다.
봄 그리고 청춘의 흥취에 사리분별이 어려웠던 스무 살 언저리의 대학생으로서는 강단 교육의 무지몽매함을 감각하기 버거웠던 듯하다. 각진 강의동의 경직된 회색마저 그 앞을 거니는 학우들의 총천연색 옷차림에 가려 목격하지 못했을 그날, 교실 끝자락 책걸상에 걸터 앉은 청춘은 야속히도 푸른 호수와 만개한 분홍 꽃의 향연에 한껏 도취되어야 했다. 그렇게 날과 달, 그리고 해마저 보내어 어느덧 스물하고도 열의 반분을 살아 대학의 감흥에 질력이 날 때 즈음, 비로소 나는 무엇인지 모를 무게감에 짓눌릴 수 있었다. 


그 중량의 원흉은 명백 강단 인문학의 폐단에 있었다. 세세한 내용이 무엇인지를 시시콜콜히 토로하고자 한다면 한나절의 반은 누구든 붙잡고 떠들어야 성이 찰 일이다. 그러니 그저 대략의 골자만을 적어 두자면, 작금의 강단 인문 교육 아래 절반을 넘는 수의 인문학도들이 글벙어리가 되어버린 사실이 그것이다. 본디 인문학은 과거의 지식을 내재적 사유의 줄기로 흘려 지혜의 활자를 짜내어야 마땅할진대, 우리네 강단 인문학은 그저 경화된 지식의 퇴적만을 강요하며 수용자의 헤아림을 철저히 봉하고 있었다. 아마 이즈음의 인문 교육은 충실한 나팔수를 가꾸어 내고자 공을 들이는 듯했다. 스스로의 주견 없이 타인의 말이나 입장을 덮어놓고 따라 외워 대는 나팔수를. 나는 그 우악스러운 교육의 민낯을 목격한 이래, 비길 데 없는 아름다움이라 간주되어야 할 대학생활에 스스로 사망을 선고했다. 


강단을 책망함으로 스스로마저 미워한 날이 켜켜이 쌓였다. 고생하여 잊고자 글을 적고 그림을 휘갈겨도, 학기 중 필연 조우하는 교육의 폐단은 문득 나를 삼켰다. 그 억센 손아귀의 압력에 두렵고도 분통하다 한들, 한낱 학부생으로서 그 무용함을 타파하는 일이 불가능에 가까운 현실을 부정할 수 없음에 나는 더욱이 무기력으로 침전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도륙된 향년의 대학생활은 꼬박 두 해를 넘기어, 어느덧 교육의 우매함이 예사스러운 일로 인지되어 버린 또 다른 비극의 초입에서, <창가의 토토>를 들어 읽었다. 탐독 후의 소견을 미리 밝히자면 토토의 삶은 벅차게 유별남으로 눈부시게 아름다웠다는 것. 더불어 도모에 학교 교장선생님, 고바야시 소사쿠의 말과 행동으로 재차 표명되는 정의로운 교육의 지향 또한 고뇌를 넘어 체념으로 추락한 현실의 나를 위로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아쉽게도 아직 책을 접하지 못했을 누군가를 위해 그 인상의 토막이나마 공유하고자 하는 욕심으로 <창가의 토토>의 일면을 소개한다.
작가의 입을 빌어 <창가의 토토> 내부의 일화들은 모두 실화에 기저를 두며, 그는 이를 저술함으로 도모에 학교의 교장, 고바야시 선생님을 기린다. 그가 아이들에게 품었던 깊은 사랑, 나아가 그로부터 자연스레 도출되는 올바른 교육의 양상과 아이들의 변화를 구체적으로 전달하며 <창가의 토토>는 동화에 가까운 분위기를 조성한다. 우리는 그 목가적 인상을 감각할 수 있는 어귀에서 주인공 토토를 만난다. 


토토라는 앙증맞은 이름의 여덟 살 배기 소녀가 퇴학을 당하는 사건으로 이야기의 막은 오른다. 그 연유는 토토의 엉뚱함에 기원하는데, 개별적 사례들을 간추리자면 수업 도중 부지런히 책상 뚜껑을 열고 닫으며, 실컷하고 나면 창가에 서서 밖을 내다보고, 어느새 큰 소리로 밖을 지나는 악사 아저씨를 불러 연주를 요청하는 경우들이 그것이다. 이 사실들을 담임선생님에게 전해들은 토토의 어머니는 이내 토토의 전학을 결심하고, 토토는 여러 내막은 알지 못한 채 도모에 학교로 전학한다. 교문은 땅에서 자랐고, 교실 대신 전철이 들어서 있는 곳. 머리숱은 적고 앞니는 빠진 교장선생님이 토토를 반긴다. 그는 약 네 시간에 걸친 토토의 자잘한 이야기들을 묵묵히 들어주고는 그 머리에 손을 포개 얹어 입학을 허락한다. 


이후 나열되는 도모에 학교의 교육방침은 일반적 견해에 있어 사뭇 난해한 것으로 관찰될 뿐이다. 도시락의 메뉴는 ‘바다에서 나는 것과 산에서 나는 것’이어야 하고, 교실 좌석은 자율적으로 배정되었으며, 국어든 수학이든 학생이 선호하는 것부터 공부한다 한들 어떠한 탈도 없는 도모에 학교의 일상은 당대의 일본에게도, 또한 작금의 한국에는 더욱이 괴이한 교육기관으로 비추어 의아함을 자아낸다. 그러나 대개 병폐한 사회, 그 내부의 이질감은 정의의 다른 말이라 하지 않았던가. 이를 상기함으로 비로소 도모에 학교의 특색은 아름다운 도리로 변모한다. 아이들은 강당에 둘러앉아 각자의 도시락을 그득 채운 음식들을 나누며 어느 것이 바다에서 나고, 어느 것이 산에서 나는지를 체득하는 즐거움을 향유한다. 그날 기분에 따라 어떤 곳이나 마음에 차는 좌석에 앉으면 그만인 교실의 자율성은 새로운 관계의 설렘을 선사하고, 특정한 과목에 얽매이지 않는 도모에 학교의 수업 방식은 아이의 개성을 확립하고 학습의 즐거움으로 귀결한다.  


온전히 합당할 수 없다면, 그 모든 규칙을 제거한 교정. 수영장에서는 마른 아이도, 통통한 아이도, 남자도 여자도 모두 스스로 그러한 모습으로 웃고 소리지르며 잠수한다. 사람의 몸은 어느 경우이든 아름답다는 하나의 진리를 가르치고자 교장선생님이 조성한 도모에 학교의 수영장에서는 온몸은 새까맣게 타고 수영복 자국만 하얗게 남는 일이 없다. 아이들은 그렇게 자율성을 유영하며 타인을 사랑함으로 스스로를 사랑하는 지혜를 터득한다. 충만한 사랑의 뒤안길로 자연스레 차별과 위계는 소멸한다. 설령 신체적 불편함을 소유한 누구라 한들, 그저 배제 내지는 서툰 배려가 만연한 관계가 아닌, 진정한 친구로 혼재할 수 있는 도모에 학교는 어쩌면 실현되기 어려운 유토피아로 목격된다. 그 내부의 축복된 아이들은 하교와 동시에 해방의 기쁨이 아닌 추방의 슬픔을 감각한다. 이즈음에 이르러 작금 우리 교육의 현실을 곱씹어보는 일은 아마 무척 지독한 기백을 필요로 하지 않을까. 


그토록 찬란한 도모에 학교의 동화, 그 바깥의 현실은 점차 전운으로 포위된다. 어른들의 욕망이 마찰하여 패권을 차지하고자 감행한 갈등의 파편은 어느덧 교장선생님과 아이들의 소박하고도 전부였을 유토피아인 도모에 학교의 교문 앞마저 잠식한다. 일장기를 든 이웃 아저씨와 오빠들이 만세를 외치며 전장으로 떠났고, 일본 하늘에 미국 비행기가 폭탄을 싣고 다니는 모습이 빈번히 관찰되던 그날, 도모에 학교의 관리인 료 아저씨마저 아이들과의 작별을 고한다. 그렇게 문득 도모에 학교는 포화에 휩싸인다. 교장선생님과 사랑받은 아이들의 자지러지는 웃음소리가 아닌 땅과 건물을 무너뜨리는 포성으로 도모에 학교는 무너져내린다. 교장선생님은 그 얄궂은 불길을 보며 옆을 지키는 아들에게 넌지시 말한다. “야, 다음에는 어떤 학교를 만들까?” 


소설은 토토의 피난 길을 마지막으로 막을 내린다. 그저 아름다웠을 도모에 교정이 태평양 전쟁의 폐허로 몰락한 참상에 이르니 괜스레 입안이 텁텁하여 내어 놓을 언어가 소멸하는 듯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고바야시 선생님의 덤덤한 질문을 잊지 않음으로 걸음을 내딛을 수 있겠다. 작가의 후일담에는 전후 교장선생님의 행적이 서술된다. 그는 불이 난 자리에 유치원을 열고, 동시에 국립음악대학 보육과를 만드는 일에 협력하였다. 그곳 초등학교의 설립에도 조력한 바 있으나, 아쉽게도 꿈으로나마 그리던 도모에 교정과 꼭 닮은 초등학교를 다시 세우기 이전, 그는 예순 아홉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이제 도모에 학교는 없다. 일본의 사정이야 직접 겪은 바 없어 쉽사리 단언할 수 없을 터이나, 우리의 근거지, 이곳 한국은 분명 그렇다. 개성과 신념은 불필요한 것으로 치부되고, 오로지 수치만이 학생의 가치를 매길 권세를 누린다. 도모에 학교의 전부라 해도 과장은 아닐 체험으로 나아가는 학습이란 그저 구실일 뿐, 우리의 교육기관은 그저 칠판이라는 좁은 세계 내부에 온갖 잡스러운 지식들을 빼곡 채우고 지우기를 반복한다. 우리네 학생들은 산수유 열매의 빛깔은 본 일 없어도 <성탄제>의 주제는 알아야 하고, 김승옥의 삶은 차치하고서라도 <무진기행> 따위의 작품명은 암송할 줄 알아야 훌륭할 따름이다. 화를 잘 내지 않는 고바야시 선생님이라 한들, 작금의 실태를 목격한 그는 이 또한 용인하여 너털웃음을 보일 수 있을까.


초, 중, 고의 교육은 대개 보다 서열 높은 대학으로 진학하기 위한 배다리로 분류될 뿐이다. 청춘의 자유라는 광명과 더불어 밥벌이의 어려움을 누차 강조하는 담임선생님의 호통은 우리 청소년들을 희망으로 고문한다. 크게 바뀌는 것이 없음을 알면서도 미래의 허상을 주입하여 현재의 희생을 당연스레 치부하는 그들의 낯빛은 분명한 기만이다. 그 조롱을 멍청하게 믿어 대학에 진학한 나의 때늦은 불평을 듣고는, 진정한 학문의 교육 기관으로 대학원을 언급하며 둘러대는 여러 교육자들의 낯짝 앞에 나는 어떠한 거동으로 임해야 하는가. 그 뻔뻔함에 구역질을 하면서도 꾸역꾸역 학우들을 밟아 올라 취하는 상위의 학점은 어쩔 수 없는 나의 치부이다. 오롯한 사실로 적힌 <창가의 토토>가 환상문학으로 분류되어야 마땅한 지금, 나는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쳐 박아 그 장르가 다시금 리얼리즘으로 편입되기를 기원한다. 나야 이미 닳고 아파하여 넝마가 되어버렸을지라도, 후일의 아이들이나마 각자의 색을 선명히 하는 고운 천으로 자라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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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rafina0605 2019-08-16 2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 글이네요^^~
 
나무의 말이 좋아서
김준태 지음 / 김영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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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의 삶을 동경하였다. 그럼으로 몸 이곳 저곳에 나무 그림을 새기고, 스스로를 한 그루의 묘목이라 비유하며 살고 있으니, 나의 동경은 그저 치기어린 갈망만은 아닐 것이라 여긴다. 그렇게 아낀다 한들, 나무와의 조우는 쉬운 일이 아니다. 내가 발을 붙인 도시는 회색 건물들이 똬리를 틀어 우리를 가두고 몇 남지 않은 녹음은 대개 상징물로서 존재할 따름이다. 사회에 낭자한 ‘자연친화적’이라는 형용을 내보이기위한 몰염치한 심벌, 그마저 아니라면 스스로 해하여 파생한 자연의 귀함을 기회로 삼아 다시금 상품화된 그것으로 지폐를 벌어들이려는 열망, 딱 그 정도. 그런 꼴들이 미워 산으로 올라 민낯의 자연과의 조우를 꾀하고자 하는 마음은 잦게 오르지만, 이마저 나에겐 꽤나 어려운 일탈일 뿐이다. 도시는 그들이 조성한 자연이 아닌 억지의 꾸밈이 없는 자연과의 독대를 꺼려하는지라, 그 내부의 소시민들로 하여금 감당하기 어려운 과제들을 쌓아 올린다. 나 또한 아직은 충실한 도시민을 스스로 벗어날 용기가 없어, 그 무게에 머리를 조아리고는 어떠한 불평도 없이 매일을 산다. 그러니 나는 그저 나무를 소재로 한 모든 창작물 앞에 한없이 감사할 따름이다. 야망을 품어 상경한 탓에 더 이상 식구라 말하기 죄스러운 부모와의 통화가 야기하는 모호한 정동은 아마 예술로 품은 나무와의 만남이 불러오는 그것과 꼬박 같을 것이다. 


<나무의 말이 좋아서>의 저자 김준태는 생명철학의 탐구자이자 교육자로서, 어쩌면 허무주의의 시대라 할 수 있는 작금에 자연의 지혜를 전하기 위해 사진을 찍고 글을 쓴다. 그의 입을 빌자면 저자가 나무의 삶을 꼭꼭 씹어 독자에게 건네는 지혜의 농축은 다음으로 간추릴 수 있을 것이다. 


“숲길에서 나무들과 문답하고 평정을 찾는 일상을 반복했다. 나무가 보내준 답은 지극히 평범했다. 내 일터에서 책무를 다하고, 남에게 상처 주지 않으며, 나를 나로서 존중하는 삶을 살아가기. 이 세 가지 명제를 알기까지 이토록 많은 시간이 걸렸던가. 경쟁, 비교, 집착 등 익숙한 용어들을 지운다.”


참 상투적이다. 그럼에도 실망하기에는 섣부른 까닭은 인간의 언어로 쓰인 위 결론에 도달하기까지 작가가 경청한 숲나무들의 말만은 생기 있게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하나의 사실에 있다. 그리고 어쩌면 보편 인간의 삶에 통용될 수 있는 삶의 지혜란 필연 상투적이어야 할는지도 모를 일이 아닌가. 필자는 <나무의 말이 좋아서>의 서문에서 저자가 밝힌 세 가지 명제를 도출하는 저서 내부의 요소를 속속들이 나열할 마음은 없다. ‘책무를 다함’, ‘상처 주지 않음’, ‘나를 존중함’ 따위의 미덕들은 그 실현 양상이 모두에게 다른 터라, 그 몫은 온전히 앞으로의 독자들만의 것이어야 한다. 그럼에도 본디 책을 소개함은 그 주선의 글을 읽는 이로 하여금 흥미를 일으킬 수 있을 정도의 매혹은 부려낼 수 있어야 한다. 고심을 거듭한 끝에 필자는 <나무의 말이 좋아서>의 도드라지는 특색인 작가의 글솜씨를 보여줌으로 저서의 매력을 알리고자 한다. 그러나 이 또한 필자 나름의 취향에 부합하는 문체일 수 있음을 알기에 조심스러우나 적어도 불호의 대상은 아닐 것이라 감히 헤아린 희망으로 사계절을 그린 구절을 몇 개 옮긴다.


“우수도/ 경칩도/ 머언 날씨에/ 그렇게 차가운 계절인데도/ 봄은 우리 고운 핏줄을 타고 오고/ 호흡은 가빠도 이토록 뜨거운가?” 신석정의 시 <봄을 기다리는 마음>이다. 어찌 봄을 쉽게 만난 적이 있던가? 봄옷을 입을까 겨울옷을 입을까, 몇 번을 망설여야 봄이 온다. 그래도 자꾸 봄옷으로 마음이 가는 것은 봄이 새 출발이고 희망이기 때문이리라.”


“팔월 숲을 더욱 우거지게 만드는 식물들이 있다. 댕댕이 덩굴, 종덩굴, 사위질빵… 바로 덩굴식물들이다. 이들에게서 큰 나무를 감아 올라 빛을 차지하는 전략을 발견한다. 처음에는 미약했지만, 빠르게 생장하는 위세가 큰 나무의 자존심을 건드린다… 그러니 숲 바닥부터 큰 나무 꼭대기에 이르기까지 팔월 숲이 얼마나 치열하던가. 이 전장이 사람 눈에는 그냥 녹색 잔치이다.”


“바람이 쌀쌀하다. 형형색색 낙엽들이 숲길을 구르고, 사람들의 시선은 게절의 끝자락에 멈춰 있다. 누군가에게는 이른 겨울의 시작이겠지만, 아직은 가을이고 싶다. 그래서 늦은 가을, 만추이다. 낙엽의 궤적이 단풍 가득한 풍광을 가른다. 하루가 다르게 기온이 낮아지고 그만큼 코트 깃도 곧추선다. 보내야 하나 보내고 싶지 않은, 그래서 하루가 아쉬움으로 가득하다.”


“추우면 따뜻한 나라로, 더우면 시원한 나라로 오가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제자리에서 혹한을 껴안고 사는 사람들이야 겨울 숲을 지키는 벌거벗은 나무와 다를 바 없다. “겨울이 따뜻하면 흉년이 든다. 겨울에 눈이 많이 와야 풍년이 든다.” 겨울이 추워야지 하면서 거꾸로 희망을 이야기한다. 그 속내에는 추위에 떠는 자에 대한 연민도 있고, 따뜻함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반전도 숨어 있다. 그렇게 추위도 숙명으로 받아들이며 시간을 넘고 넘는 사람들이다. 그래도 그들이 사는 겨울에는 가족과 이웃이 있고, 오늘보다 나은 내일이 희망으로 함께한다.”


분명한 축복인 봄에서 겨울까지의 계절의 순환이 당신 머리에 잔상으로 남기를 바랐다. 부족한 필자의 탐독으로는 해당 저서는 그 전체보다는 부분이 남는 글의 집합이 아닐까 한다. 마치 우리 각자의 눈이 나무의 뿌리부터 잎사귀까지의 전체가 아닌 그 부분들에 보다 매료되는 편향처럼. 그럼에도 부분을 사랑함으로 전체를 사랑하는 일은 한결 쉬이 될 터이니 아쉬워하지 않아도 좋다. <나무의 말이 좋아서>를 읽은 당신이 나무를 아끼게 되기를, 나무를 아낌으로 자연을 애정하기를, 자연을 애정함으로 인간 세상마저 아름다움으로 변모할 수 있기를 바라며 서툰 소개의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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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르케고르, 나로 존재하는 용기 - 진실한 삶을 위한 실존주의적 처방
고든 마리노 지음, 강주헌 옮김 / 김영사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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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매체를 통해 정부 주도의 핵심청년일자리 정책의 유효는 송신된다. 그 내용을 가만히 듣자 하면, 약 15개월간 32만개의 일자리 창출 효과가 있었으며, 이는 약 1조를 웃도는 투자금, 즉 1인당 약 367만원의 지원금을 그 기저에 둔 성공이라는 목소리다. 한편, 청년 체감실업률은 올해 상반기에 들어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는 보도 또한 인터넷 매체로 송신된다. 이는 아마 정부의 청년 일자리 정책의 지원기간이 3년에 그치는 중단기 일자리의 양산이라는 사실 등의 정책적 맹점에 근거한 청년 세대의 슬픈 자화상이리라. 


글을 쓰는 본인은 스물 중반을 갓 넘어 청년으로 분류되어 마땅함에, 그저 우리의 입을 빌어 말을 전할 수 있을 뿐이다. 대한민국의 청년은 대개 취업의 꿈을 꾼다. 그리 거창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서류와 면접을 유연히 통과해, 평일 오전 설렘과 긴장을 함께 안아 지하철에 오르고, 계좌에 적힌 일곱 자리 금액의 월급으로 부모에게 내복하나 내어주는 일, 그러나 이는 더 이상 소박함이 아닌 거창한 일이 되었으니, 앞서 말한 나의 건방진 헤아림은 오류로 귀결한다. 


더 두꺼운 서류철로 스스로를 전시하고자, 지금의 청년들은 손과 발이 갈리도록 적고 뛴다. 학점, 어학점수, 대외활동이 기재될 공란에 보다 높은 수치와 부피를 기록하기위해 우리는 매일을 별일 없이 산다. 아마 작금의 젊은이들을 휘몰아 쓸은 소확행의 급류는 우연의 산물만은 아닐 것이다. 마땅히 푸르러야 할 청춘이 그저 건조한 회색으로 남은 억울함에, 다색의 빵과 케이크를 입으로 밀어 넣어 분하고 원통한 마음을 풀어내 버리는 젊은이들의 소비는 그저 철없는 사치로움으로 분류될 수만은 없는 슬픔의 행복이다. 필자는 이에 동고(同苦)하는 무색의 젊은이로서, 하나의 책을 주선하는 것으로 그대들을 가리키는 소박한 위로를 건네고자 한다. 마련된 저서의 이름은 <나로 존재하는 용기>로, 이는 실존주의 철학의 선구자격으로 분류되는 키르케고르의 사상적 흔적을 되새긴다. 


실존주의라 함은 삶의 의미에 대한 지속적인 반추가 하나의 핵심적 요소로 꼽힌다. 인간의 역사 내부에서, 특히나 현대에 있어서는 제1차, 2차 세계대전 내지는 홀로코스트 등의 대격변으로 인류가 과거의 관례화된 일상의 닻에서 풀려날 때 실존주의는 보다 조명되었다. 어떻게 살 것인가, 즉 삶의 방식을 곱씹는 실존주의의 소화법은 인간 존재의 특이점이 공공연히 인지되는 순간 세계로 하여금 그 절실한 필요를 인정받은 것이다. 실존주의자들은 삶에 있어서의 감정의 영역에서 심도 깊은 논의를 전개한다. 그들은 불안과 우울 질투와 죄책감 등의 감정을 이성적이며 합리적인 판단의 질서를 흩뜨리는 골칫거리로 배제하지 않고, 되려 직접적인 해결을 지향한다. <나로 존재하는 용기>가 표방하는 키르케고르 역시 감정을 이성의 밝음을 해하는 내면의 잔해로 저하하지 않는다. 키르케고르에게 있어 불안은 어떠한 양상으로 설명될 수 있는지를 보자. 


그의 해석에 따르면, 불안은 인간으로 하여금 그 자신을 파악할 수 있도록 하는 유용함을 내포한다. 불안은 우리에게 여타의 선택의 경로가 있음에도 지금의 자신을 선택한 존재임을 증명하는 정서이다. 오전 아홉시에서 오후 여섯시에 이르기까지 전공 강의가 빼곡히 자리한 월요일, 얄궂게도 해는 오르고 꽃은 살랑인다. 생동의 정서를 가진 청춘이라면 누구나, 강의실의 좁은 책걸상을 벗어나 회색의 강의동을 벗어나고자 애를 쓸 것이다. 그렇게 마주한 자연은 무척이나 푸르러, 우리의 청춘은 그저 눈을 감아 순간을 향유한다. 허나 얼마 지나지 않아 불안이 엄습한다. 행여 전공 교수님께 지금의 일탈이 발각되어 불이익을 받으면 어쩌나, 만일 운좋게 그렇지 않았다 한들, 하필이면 오늘 다음시간에 제출해야 할 과제에 대해 공지하면 어쩌나 하는 식의 사소한 고민들이 그것이다. 키르케고르는 위의 청춘에게 어떠한 조언을 선물할 수 있을까? 아마 그는 용기로 성취한 현재의 자유를 충실히 만끽할 것을 말할 것이다. 키르케고르는 불안을 ‘자유의 현기증’이라 묘사했다. 즉, 불안을 통해 우리가 자유롭고, 모든 면에서 가능성을 담지한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게 된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키르케고르는 다수의 사람은 불안에 시달리며 힘겨워하고, 이로부터 탈출하고자 끊임없는 시도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럼에도 그는 “불안은 자유의 가능성”이라 역설하며, 불안이 인간을 구원하리라는 믿음을 설파한다. 사실 불안은 인간의 선택에 의한 하나의 결과로, 그 불안은 대개 스스로가 선택하지 않은 경로를 고찰함으로 형성된다. 결국 키르케고르가 불안의 감정을 설명하는 일에 있어 무게를 두는 하나의 주안점은 어쩌면 당연한 감정인 불안으로 현재의 향유에 실패하는 우를 범하지 말라는 조언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는 키르케고르의 입을 빌어 전해지는 절망의 경우를 살펴보기로 하자. 그에게 있어 절망은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자아를 제거하려는 욕망이 그 징후가 된다. 또한 대체로 그러한 욕망은 현재의 그 자신이 아닌 타인이 되고자 하는 바람의 형태로 구현된다. 키르케고르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서술한 바 있다. 


“(…)그 ‘무엇인가’ 때문에 절망할 때, 그는 실제로 ‘자신에게’ 절망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자신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한다(…)정확히 말하면, 제왕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절망하는게 아니라, 그가 그 자신이라는걸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키르케고르는 자신의 저서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세 종류의 자아를 보여준다. 첫째로는 ‘구체적인 자아’이다. 이는 <나로 존재하는 용기>의 저자의 경험을 기반으로, 의사가 되겠다는 포부에 매몰되어 외과 대학원에 입학하고자 시험을 치루고, 응급 구조사 자격증을 취득하려는 4학년 학생이 일례로 제시된다. 다음의 자아는 자아가 열렬히 소망하는 ‘이상적인 자아’이며, 이는 의사로 설명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자아는 그 자체로는 특별한 무언가가 결여된 ‘진정한 자아’이다. 이는 키르케고르에게 있어 종교적 맥락에서 설명되지만, 이를 배제한다면 결국 도덕적 이상향으로 요약될 수 있다. 즉, 진정한 자아는 우리가 도달하고자 하는 유형의 인간상이며, 우리가 무엇이 될 수 있는지를 상기시키는 사람이다. 


위의 자아의 분류에 있어, 두 번째로 서술된 이상적인 자아의 실현에 있어 키르케고르는 그들은 목표 성취에 성공했다는 생각을 품을 것이라 설명한다. 허나 이와 달리, 이상적인 자아를 성취하지 못하고 불운한 꼴로 우울에 시달리는 이들에게는 잠시나마 그 자신의 과오를 되짚어볼 시간이 선물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키르케고르는 “행복은 절망의 가장 적합한 은신처”임을 말하는데, 이는 진정한 자아가 아닌 이상적 자아라는 소기의 성과에 도취되어 그 자신을 잃는 이들이 아닌 실패의 경험으로 스스로의 진정한 자아와 조우하는 시간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바이다. <나로 존재하는 용기>의 저자는 이를 “당신이 실제로 여기에 존재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잊고 있다면, 성공의 지고한 행복도 똥 더미일 수 있다. 반대로 암울하고 음울한 고투의 시간이 반드시 절망적인 시간인 것은 아니”라고 기술한다. 


필자는 구태여 청년세대의 공통된 불안과 절망을 사례로 나열하여, 그 각각에 키르케고르의 조언을 적용해 하나의 해결방안과 유사한 문장들을 나열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그저 필자의 바람은 하나의 책과 그대들의 주선을 도맡는 것으로, 그 각자의 어려움에 있어 나름의 해결방안을 스스로 도출하기를 희망하는 바이다. 필자가 대표격으로 나열한 키르케고르의 불안과 절망의 서술 이외에도, <나로 존재하는 용기> 내부에는 죽음, 사랑 등의 개념을 가리키는 실존주의적 해석법이 서술되어 있다. 또한 책의 저자인 고든 마리노는 그 자신의 경험을 기저에 둔 여러 사례들을 제시함으로 어쩌면 조금은 난해하게 들릴 수 있는 키르케고르와 실존주의의 대가들의 목소리의 송신을 돕는다. 감히 추측하건대, 이는 철학이라는 학문에 반감을 가지거나, 또는 생소했던 이들 또한 저서의 충실한 독자가 되는 일에 큰 어려움이 없을 정도의 장점으로 기능할 것이다. 키르케고르는 “이 세상을 버리면” 우리 자신을 끊임없이 타인과 비교하는 강박에서 해방될 수 있음을 역설한다. 이는 그 스스로의 사유에 있어 온전한 자립을 강조하는 바이며, 그렇기에 스스로의 고찰과 해석이 가미되지 않은 <나로 존재하는 용기>의 참의미는 온전히 그 몫을 다할 수 없다. 


부디 필자를 포함한 모든 이가 우울과 절망에 수렁으로 침전하여 세상의 아름다움을 괄시하는 일이 없기를, 그리고 어쩌면 건방지게도 필자가 주선한 책과의 만남이 그대들의 책장 한 켠에서 스스로의 삶의 흔적을 되새기는 하나의 촉매로 남기를 바라며 어쩌면 무용할지 모르는 이제까지의 독백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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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학자의 통찰의 기술 - 미래를 꿰뚫어 보고 변화를 주도하는 생각의 도구
최윤식 지음 / 김영사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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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학자의 통찰의 기술>의 저자인 최윤식은 아시아를 대표하는 미래학자로, 미중 양국의 패권전쟁 발발을 적확히 예측하여 큰 주목을 받은 바 있다. 미래학이라 함은 미래사회와 그 내부의 인간상을 여러 학문을 도구로 하여 고찰해, 예견되는 결과값을 내놓음을 목적으로 한다. 저자는 그 미래를 예견하는 요긴한 도구로서 통찰을 그 중심에 두어 책 전반의 논지를 전개한다. 그가 말하는 통찰의 효용은 다음과 같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속담이 있다. 하지만 솟아날 구멍이 있어도 이를 발견할 능력이 없으면 무용지물이다. 하늘이 무너지는 위기 속에서 솟아날 구멍을 찾으려면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 정신을 똑바로 차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바로 생각하는 힘을 키워 통찰력을 가지라는 말이다.”

아무리 어려운 경우에 처하더라도 살아 나갈 방도는 생기기 마련이나, 그 방법과 도리를 알지 못해서야 그저 무너질 따름이며, 그 방법과 도리를 일러주는 구원자가 곧 통찰이라는 저자의 설명이다. 통찰의 사전적 정의는 예리한 관찰력으로 사물을 꿰뚫어 봄을 말한다. 이때 꿰뚫어 보다라 함은 이쪽에서 저쪽까지, 내면에서 외면까지를 꿰어서 뚫음을 말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책의 저자는 통찰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통찰은 영어로 ‘insight’. (in)을 들여다본다(sight)는 뜻이다. ‘은 눈에 보이는 현상이고 이면이다. 눈에 보이는 현상 이면을 들여다본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 것, 숨겨진 중요한 것, 변화의 원리를 파악하는 것이다. 이것을 이치라고 한다(…)”

최윤식의 통찰은 이치의 탐구와 그 결이 같다. 모든 영역의 기초인 이치를 통찰함은 이로부터 갈려 나오는 모든 변화나 복잡한 현상의 최종 결론의 인지로 귀결한다. 그렇기에 저자는 기술보다 통찰이 먼저임을 선포한다. 미래의 결론을 이미 알고 있기에, 현재의 올바른 선택과 의사결정이 자연스레 후행하고, 또한 정확한 의사결정을 하기에 자원의 효울적 배분과 사용을 통해 기업의 속도를 높일 수 있다는 논리가 그의 설명이다.

사물의 이치를 아는 것이 큰 힘이라는 것은 역사가 증명한다. 인간은 새처럼 날지 못하지만, 새가 하늘을 나는 이치를 통찰해서 비행기를 만들었다.”

저자는 통찰력을 선험적이며 신비한 능력이라고 간주하는 세간의 오해에 안타까움을 표하며, “통찰력은 결코 초인적인 능력이 아니며 생각의 기술임을 주창한다. 그에 따르면, 통찰력은 훈련의 산물이자, 그렇게 훈련된 뇌가 곧 통찰력의 핵심이자 차별화된 재능이라는 설명이다. 그렇기에 <미래학자의 통찰의 기술>은 통찰력을 함양케 하는 실용적인 기술과 저자 나름의 통찰력 향상 알고리즘을 상세히 기록해 둔다. 물론 이는 철학 및 수학 영역의 지식이 전혀 전제되어 있지 않은 독자들에게는 다소 생소하고 그 말씨 또한 어찌 보면 부드러운 맛이 없이 엄격히 비춰질 수 있다. 허나 양약고구(良藥苦口)를 말한 사기의 지혜를 상기했을 때, <미래학자의 통찰의 기술>은 다소 입에는 쓸 수 있으나 분명한 효력이 있으리라. 우리가 미래를 알고, 또한 그 미래를 조망하는 통찰력을 함양해야 하는 까닭을 저자의 입을 빌어 적어 둠으로 글을 마친다

미래가 내게 변화를 강요하면 고통이지만, 내가 미래를 주도하면 변화가 곧 기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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