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딜레마
B. A. 패리스 지음, 김은경 옮김 / arte(아르테) / 2021년 5월
평점 :
추리소설이나 심리 스릴러 소설의 경우에는 특히 굉장히 인상적이었던 작품을 만나게 되면 그 작가의 작품은 꾸준히 믿고 보는 편이다. B. A. 패리스의 소설을 처음 만난 것이 바로 <비하인드 도어>였다. 심리 스릴러물 중에서는 정말 손에 꼽을 정도로 굉장한 작품으로 기억하는 책이다. 그래서 그 이후부터는 이 작가의 신작들은 꼭 챙겨서 읽는데 이번에 B. A. 패리스의 신작이 나왔다는 반가운 소식을 접했다.
<비하인드 도어>, <브레이크 다운>, <브링 미 백>에 이어 이번에는 <딜레마>로 돌아왔다. 뭐니 뭐니 해도 가장 강력하고 숨통을 조여오는 가스라이팅의 모습을 보여준 <비하인드 도어>가 나에겐 작가의 작품 중에서는 으뜸으로 꼽는다. 모든 작품이 다 흥미롭고 대단한 내용들이지만 비하인드 도어가 너무나 강력한 인상을 남겼기에 그 이후에 나왔던 브레이크 다운은 살짝 뭔가 아쉬움이 남았다. 그리고 브링 미 백은 브레이크 다운보다도 정서적 폭력, 심리 스릴러 다운 면은 약간 아쉬움이 남았었다. 그런데 이번 <딜레마>는 작가가 다시금 늘어진 나사를 바짝 조은 느낌이 <비하인드 도어>의 첫 작품에서처럼 신선하고 작가 특유의 뛰어난 심리 묘사를 느낄 수 있어 좋았다.
흔히 우리가 스릴러물이나 심리소설을 읽을 때면 거대한 사건에 휘말리거나 엄청난 일이 벌어지곤 하는데 이번 <딜레마>에서는 거대한 사건이나 무시무시한 반전 이런 거 없이 한 가정에서 서로가 서로를 위한다는 생각으로 각자의 비밀을 숨긴 채 벌어지는 심리에 대해 파고들고 있다. 사랑하기 때문에, 행복을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진실을 묻어둔 채 살아가는 우리의 흔한 일상과 너무 닮아 있어 더 공감되고 몰입하게 되는 소설이었다.
책의 전체적인 큰 줄기는 남편과 아내가 각기 다른 딸에 대한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는 점이다. 가장 사랑하는 사이고 가장 가까운 사이지만 정작 서로에게 진실을 말하지 못하고 마음 졸이고 각자 괴로워하는 심리를 탁월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야기는 요일과 시간에 따라 남편 애덤과 아내 리비아의 입장에서 쓰이고 있다.
처음에 6월 9일 일요일 오전 3시 30분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처음에는 리비아와 애덤 각자의 이야기가 서로에게 어떻게 맞물리는지 알 수가 없다. 모호한 표현들... 하지만 뭔가 심상치 않은 일들이 일어날 것임을 짐작하게 만드는 요소들을 깔아놓고 있다.
그 새벽 애덤은 결국 참지 못하고 오토바이를 타고 미친 듯이 도로를 질주하기 시작하고 과속으로 달리는 애덤은 경찰에게 붙잡힌다. 대체 무슨 일 때문에 이렇게 엄청난 속도로 달리냐고 묻자 애덤은 자신의 딸 때문에 그렇다고 말한다.
바로 이 대목이 이 책의 핵심이자 본격적인 사건 속으로 들어가는 부분이 된다. 대체 딸 마니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걸까? 독자로 하여금 궁금하게 만든 후 그 이후부터는 딸 마니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애덤과 리비아 각자 딸과의 비밀이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딸 마니는 어디에 있는 걸까? 그리고 애덤은 왜 저렇게 폭주하는 걸까? 궁금증을 던져놓고 이제는 전날 아침의 시간으로 돌아가 이야기가 펼쳐진다.
애덤과 리비아는 리비아가 열일곱 살 때 흔히 말하는 사고를 쳐서 임신을 하게 된다. 어린 나이에 부모가 된 애덤과 리비아. 제대로 된 결혼식도 올리지 못하고 학업도 중단해야 하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 그래도 사랑의 힘으로 둘은 건강한 가정을 이끌어가게 된다. 하지만 리비아의 부모님은 어린 나이에 엄마가 된 리비아를 용서할 수 없어 연을 끊어 버렸다. 아들과 딸을 훌륭하게 잘 키워내고 어느새 독립할 나이가 되었고 생계도 안정적으로 되었으며 모든 것이 완벽하게 느껴지는 시기가 되었다. 변변한 결혼식도 못 올린 그녀는 자신의 마흔 번째 생일에 거대한 파티를 계획하게 되고 그날만을 위해 행복한 꿈을 꾸며 지내왔다.
홍콩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딸 마니가 엄마의 생일 파티에 참석할 수 없다고 엄마에게 말한다. 하지만 사실은 아빠 애덤에게만 말하고 깜짝 선물로 파티 당일 짠~ 하고 나타날 계획이었다. 딸이 돌아온다는 사실은 아빠인 애덤만 알고 있고 아무도 모르는 사실. 그런데 딸이 홍콩에서 카이로 -암스테르담 - 런던을 경유해서 돌아오는 비행기를 예약하게 되는데 딸이 카이로에서 탈 비행기가 추락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애덤은 딸의 행방을 알기 위한 피 말리는 시간이 시작된다. 딸에게선 비행기의 연착으로 환승에 문제가 생겼다는 문자가 와 있었고 그 이후로는 연락 두절이 된다. 딸이 사고 비행기에 탔을지 안 탔을지는 애덤도, 독자도 너무나 궁금한 부분이었다. 딸의 생사 여부를 알 수 없는 가운데 아무것도 모르는 아내 리비아는 파티 준비가 한창이다.
아내가 가장 행복해할 파티날에 딸의 소식을 전해야 할지 말지 애덤은 고민하게 되고 혼자서 괴로워하는 그 심정을 정말 탁월하게 묘사했다. 또한 단순히 현재의 상황만 묘사한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두 사람이 가족을 이루고 살아가며 함께한 시간들 속에서 서로 다르게 느끼는 감정들과 마음의 상처를 입는 부분 등 가족이라는 틀 안에서 이루어지는 서로 간의 감정과 심리를 실낱 하게 묘사하고 있다.
숨겨서는 안 되는 중대한 비밀을 밝혀야 할지 말아야 할지... 서로 고민하는 가운데 남편과 아내, 각자의 위치에서 느끼는 감정들과 심리가 너무도 공감되어 숨이 막 조여오는 것을 느꼈다.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 가족의 의미, 사랑하는 사이지만 서로를 위한다는 명목 아래 저지르는 거짓말들. 숨겨진진실들...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드는 놀라운 작품이었다.
비하인드 도어 이후로 다시금 숨 막히고 심장을 죄어오는 통증을 느낀 작품이었다. 진정한 가족 심리스릴러 소설이다.
정말 심리스릴러의 대가다운 작품이었다. 그녀의 다음 작품이 벌써 기대가 된다.
마니가 내가 임신한 나이인 열일곱 살 생일을 맞이했을 때 나는 마니를 바라보며 이런 생각을 했더랬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지? 어떻게 부모님은 나와 연을 끊을 수 있었지? 그때 이런 생각을 했던 것도 기억난다. 나는 마니가 무슨 일이든 하게 해줄 거야. 무슨 짓을 해도 용서해줄 거야.
어쩌면 신은 내가 운명에 도전하고 있다고 판단해 나를 시험에 들게 하고 있는 걸까. - P130
속 좁은 생각인 건 나도 안다. 사실 그런 생각은 그 힘들던 시간을 떠올릴 때만 하게 된다. 하지만 가끔은, 아주 가끔은 사랑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는 게, 걱정으로 이성의 끈이 끊어지는 게 어떤 건지 남편도 느껴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최악의 상황을 두려워한다는 게 어떤 건지. - P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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