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레마
B. A. 패리스 지음, 김은경 옮김 / arte(아르테)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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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소설이나 심리 스릴러 소설의 경우에는 특히 굉장히 인상적이었던 작품을 만나게 되면 그 작가의 작품은 꾸준히 믿고 보는 편이다. B. A. 패리스의 소설을 처음 만난 것이 바로 <비하인드 도어>였다. 심리 스릴러물 중에서는 정말 손에 꼽을 정도로 굉장한 작품으로 기억하는 책이다. 그래서 그 이후부터는 이 작가의 신작들은 꼭 챙겨서 읽는데 이번에 B. A. 패리스의 신작이 나왔다는 반가운 소식을 접했다.


<비하인드 도어>, <브레이크 다운>, <브링 미 백>에 이어 이번에는 <딜레마>로 돌아왔다. 뭐니 뭐니 해도 가장 강력하고 숨통을 조여오는 가스라이팅의 모습을 보여준 <비하인드 도어>가 나에겐 작가의 작품 중에서는 으뜸으로 꼽는다. 모든 작품이 다 흥미롭고 대단한 내용들이지만 비하인드 도어가 너무나 강력한 인상을 남겼기에 그 이후에 나왔던 브레이크 다운은 살짝 뭔가 아쉬움이 남았다. 그리고 브링 미 백은 브레이크 다운보다도 정서적 폭력, 심리 스릴러 다운 면은 약간 아쉬움이 남았었다. 그런데 이번 <딜레마>는 작가가 다시금 늘어진 나사를 바짝 조은 느낌이 <비하인드 도어>의 첫 작품에서처럼 신선하고 작가 특유의 뛰어난 심리 묘사를 느낄 수 있어 좋았다.


흔히 우리가 스릴러물이나 심리소설을 읽을 때면 거대한 사건에 휘말리거나 엄청난 일이 벌어지곤 하는데 이번 <딜레마>에서는 거대한 사건이나 무시무시한 반전 이런 거 없이 한 가정에서 서로가 서로를 위한다는 생각으로 각자의 비밀을 숨긴 채 벌어지는 심리에 대해 파고들고 있다. 사랑하기 때문에, 행복을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진실을 묻어둔 채 살아가는 우리의 흔한 일상과 너무 닮아 있어 더 공감되고 몰입하게 되는 소설이었다.


책의 전체적인 큰 줄기는 남편과 아내가 각기 다른 딸에 대한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는 점이다. 가장 사랑하는 사이고 가장 가까운 사이지만 정작 서로에게 진실을 말하지 못하고 마음 졸이고 각자 괴로워하는 심리를 탁월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야기는 요일과 시간에 따라 남편 애덤과 아내 리비아의 입장에서 쓰이고 있다.

처음에 6월 9일 일요일 오전 3시 30분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처음에는 리비아와 애덤 각자의 이야기가 서로에게 어떻게 맞물리는지 알 수가 없다. 모호한 표현들... 하지만 뭔가 심상치 않은 일들이 일어날 것임을 짐작하게 만드는 요소들을 깔아놓고 있다.


그 새벽 애덤은 결국 참지 못하고 오토바이를 타고 미친 듯이 도로를 질주하기 시작하고 과속으로 달리는 애덤은 경찰에게 붙잡힌다. 대체 무슨 일 때문에 이렇게 엄청난 속도로 달리냐고 묻자 애덤은 자신의 딸 때문에 그렇다고 말한다.

바로 이 대목이 이 책의 핵심이자 본격적인 사건 속으로 들어가는 부분이 된다. 대체 딸 마니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걸까? 독자로 하여금 궁금하게 만든 후 그 이후부터는 딸 마니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애덤과 리비아 각자 딸과의 비밀이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딸 마니는 어디에 있는 걸까? 그리고 애덤은 왜 저렇게 폭주하는 걸까? 궁금증을 던져놓고 이제는 전날 아침의 시간으로 돌아가 이야기가 펼쳐진다.

애덤과 리비아는 리비아가 열일곱 살 때 흔히 말하는 사고를 쳐서 임신을 하게 된다. 어린 나이에 부모가 된 애덤과 리비아. 제대로 된 결혼식도 올리지 못하고 학업도 중단해야 하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 그래도 사랑의 힘으로 둘은 건강한 가정을 이끌어가게 된다. 하지만 리비아의 부모님은 어린 나이에 엄마가 된 리비아를 용서할 수 없어 연을 끊어 버렸다. 아들과 딸을 훌륭하게 잘 키워내고 어느새 독립할 나이가 되었고 생계도 안정적으로 되었으며 모든 것이 완벽하게 느껴지는 시기가 되었다. 변변한 결혼식도 못 올린 그녀는 자신의 마흔 번째 생일에 거대한 파티를 계획하게 되고 그날만을 위해 행복한 꿈을 꾸며 지내왔다.

홍콩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딸 마니가 엄마의 생일 파티에 참석할 수 없다고 엄마에게 말한다. 하지만 사실은 아빠 애덤에게만 말하고 깜짝 선물로 파티 당일 짠~ 하고 나타날 계획이었다. 딸이 돌아온다는 사실은 아빠인 애덤만 알고 있고 아무도 모르는 사실. 그런데 딸이 홍콩에서 카이로 -암스테르담 - 런던을 경유해서 돌아오는 비행기를 예약하게 되는데 딸이 카이로에서 탈 비행기가 추락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애덤은 딸의 행방을 알기 위한 피 말리는 시간이 시작된다. 딸에게선 비행기의 연착으로 환승에 문제가 생겼다는 문자가 와 있었고 그 이후로는 연락 두절이 된다. 딸이 사고 비행기에 탔을지 안 탔을지는 애덤도, 독자도 너무나 궁금한 부분이었다. 딸의 생사 여부를 알 수 없는 가운데 아무것도 모르는 아내 리비아는 파티 준비가 한창이다.

아내가 가장 행복해할 파티날에 딸의 소식을 전해야 할지 말지 애덤은 고민하게 되고 혼자서 괴로워하는 그 심정을 정말 탁월하게 묘사했다. 또한 단순히 현재의 상황만 묘사한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두 사람이 가족을 이루고 살아가며 함께한 시간들 속에서 서로 다르게 느끼는 감정들과 마음의 상처를 입는 부분 등 가족이라는 틀 안에서 이루어지는 서로 간의 감정과 심리를 실낱 하게 묘사하고 있다.

숨겨서는 안 되는 중대한 비밀을 밝혀야 할지 말아야 할지... 서로 고민하는 가운데 남편과 아내, 각자의 위치에서 느끼는 감정들과 심리가 너무도 공감되어 숨이 막 조여오는 것을 느꼈다.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 가족의 의미, 사랑하는 사이지만 서로를 위한다는 명목 아래 저지르는 거짓말들. 숨겨진진실들...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드는 놀라운 작품이었다.

비하인드 도어 이후로 다시금 숨 막히고 심장을 죄어오는 통증을 느낀 작품이었다. 진정한 가족 심리스릴러 소설이다.

정말 심리스릴러의 대가다운 작품이었다. 그녀의 다음 작품이 벌써 기대가 된다.



마니가 내가 임신한 나이인 열일곱 살 생일을 맞이했을 때 나는 마니를 바라보며 이런 생각을 했더랬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지? 어떻게 부모님은 나와 연을 끊을 수 있었지? 그때 이런 생각을 했던 것도 기억난다. 나는 마니가 무슨 일이든 하게 해줄 거야. 무슨 짓을 해도 용서해줄 거야.

어쩌면 신은 내가 운명에 도전하고 있다고 판단해 나를 시험에 들게 하고 있는 걸까. - P130

속 좁은 생각인 건 나도 안다. 사실 그런 생각은 그 힘들던 시간을 떠올릴 때만 하게 된다. 하지만 가끔은, 아주 가끔은 사랑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는 게, 걱정으로 이성의 끈이 끊어지는 게 어떤 건지 남편도 느껴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최악의 상황을 두려워한다는 게 어떤 건지. - P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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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발의 고독 - 시간과 자연을 걷는 일에 대하여
토르비에른 에켈룬 지음, 김병순 옮김 / 싱긋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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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자고로 쉽게 변하지 않는다. 인생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 봉착했을 때 비로소 지금과는 전혀 다른 선택과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인생을 살며 쌓아온 가치관과 삶의 방식 등을 갑자기 고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상황에서 좌절하게 되고 새로운 선택에 적응하기까지 힘든 시간을 보내야 하는 경우가 많다. <두발의 고독>의 토르비에른 에켈룬 작가 역시 자신의 인생에 있어 갑작스러운 위기가 닥치지만 그는 좌절하지 않고 또 다른 삶의 방식을 선택, 걷기를 통해서 삶을 일깨우고 사유하는 생활을 선택하게 된다.




나는 이제 더이상 자동차를 모는 사람이 아니었다. 차를 몰고 나가는 대신 어디든 두 발로 걸어 다니는 사람이 되었다. 그러한 변화에 적응한 내 모습은 이전에 상상했던 그런 좌절한 모습이 전혀 아니었다. 실제로 그것은 해방된 삶이었다. 나는 그동안의 습관을 바꿨을 뿐 잃은 것은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생활은 느려졌고 맥박은 안정되었다. 세상은 어렸을 때 이후로 겪어보지 못한 방식으로 내게 활짝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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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계시이자 구원이었다. 갑자기 나는 어디서든 길을 볼 수 있었다. 그 길은 여태껏 그것이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던 중요한 길이었다. 푸른 잔디밭을 가로지르는 좁다란 오솔길, 수풀 속으로 난 짐승들이 다니는 길, 산울타리를 관통하고 정원들 사이를 들락날락하고 운동장과 주차장을 가로지르는 지름길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심지어 그동안 아무 생각 없이 타성에 젖어 집까지 늘 다니던 길도 새롭게 눈에 들어왔다.

p. 25


저널리스트이자 작가인 토르비에른 에켈룬은 어느 날 갑자기 인터뷰 도중 쓰러지게 되었고 뇌전증 진단을 받고 더 이상 차를 운전할 수 없다는 충격적 사실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는 자신의 상황을 받아들이고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는 방식을 택했다.

이 책은 더 이상 운전을 할 수 없게 된 작가가 뇌전증 진단 후 걷기를 통해서 길 위에서 느끼고 바라보는 생각들을 기록하고 있다.



길의 역사는 또한 막 사라지려고 하는 세계의 역사이기도 하다. 우선, 사람과 동물이 오가며 자연스레 만들어진 좁은 오솔길은 도로로 바뀌었고, 두 발로 걷던 길은 마차와 수레가 다니는 길이 되었고, 흙길은 아스팔트와 콘크리트길로 대체되었다. 더 최근에는 마차와 수레가 승용차와 트럭으로 바뀌었고, 도로는 더 넓어졌다. 늪의 물이 빠지고, 산이 폭파되고, 평원지대에는 자잘하게 부순 자갈들이 깔렸다.

옛날에는 여정을 짤 때 어떤 길을 가느냐가 중요한 변수였다. 하지만 오늘날은 자연경관을 개조하고 변경하는 것이 가능하다. 산을 폭파시킬 수도 있고, 습지의 물을 뺄 수도 있고, 강물의 물길을 파이프를 통해 다른 데로 돌릴 수도 있다. 우리는 여행을 가로막는 물리적 공간의 장애물들을 거의 다 제거했다. 반면에 시간은 오늘날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p. 20


길의 역사는 우리의 역사와 다르지 않다. 함께 흘러가는 것이다. 시대가 변함에 따라 길은 더 많아지고 이동에 방해되는 요소들을 없애는 등 편리함과 빠른 이동이 가능해졌지만 돌아보면 그만큼 자연이 훼손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책의 초반에 기록된 이 문장들이 참 인상적이었다. 인간의 편의성과 인류 문명의 발전으로 인해 좋아진 것도 있지만 우리의 손으로 자연을 파괴하고 훼손시킨 결과가 멸종된 동물들과 기후 위기라는 현실로 다가오고 있으니 말이다.


옛날에 길은 자연 풍광과 서로 어울렸다. 길은 자연경관을 파괴하지 않았다. 그러나 도로는 달랐다. 도로의 출현은 모든 것을 바꿨다. 도로는 자연 본래의 풍경을 개조했을 뿐 아니라, 계절이 바뀜에 따라 먹이를 찾아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이 생존에 필수적인 불곰과 순록, 연어, 늑대 같은 거의 모든 살아 있는 생명체들의 이주를 가로막는 방해물이 되었다.

동물들의 이동 경로는 가로놓인 거대한 도로들 때문에 막혔다. 철새들의 이동 경로는 어느 날 갑자기 창공을 지배하기 시작한 날아다니는 거대한 금속 흉물덩어리들 때문에 끊기고 말았다. 해마다 물고기들이 알을 낳기 위해 상류로 이동하는 길도 강물을 가로막은 댐과 다리들 때문에 끊겼다. 수많은 종이 천연 서식지를 잃고 멸종되었다.

p. 21


우리가 당연시 누리며 살아가던 세상 속에서 그 대가로 피해를 입은 자연과 생명에 대해 생각해 본 이가 얼마나 될까.






혼자 걷는 것과 다른 이와 함께 걷는 것의 차이는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매우 크다. 그것을 과장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동행이 한 명이든 스무 명이든 상관이 없다. 한자냐 혼자가 아니냐가 문제일 뿐이다. 혼자 걸으면,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없다. 따라서 귀에 들리는 것은 길을 걷는 자기 발소리뿐이다. 심지어는 본능적으로 그런 소음들조차 줄이려고 애쓴다. 아무런 간섭도 받고 싶지 않고 누구에게도 노출되고 싶지 않다. 이런 각별한 조심은 또다른 뜻밖의 결과를 낳는데, 주변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들을 평소보다 더 많이 보고 들을 수 있다는 것이다.

p. 240-241


나는 주로 가족과 여행을 다니지만 최근 몇 년 사이 혼자 여행하는 일이 더러 있었다. 함께 다닐 때와 혼자일 때는 여행에 있어서도 그 차이가 크다. 처음에는 혼자 여행을 한다는 것이 조금 외롭고 긴장되기도 했지만 혼자 여행을 해 보니 누군가와 함께 하는 여행과는 사뭇 다른 느낌, 전혀 다른 경험을 가져다주었다. 평소에는 시간 절약과 빠른 이동을 위해서 차를 이용하지만 혼자 여행을 할 때면 조금 다른 방식의 여행을 선택하기도 하고 느린 여행을 선호하게 된다. 작가의 말처럼 혼자 걸으면 걷는 동안 생각이 정리가 되고 마음도 차분해진다. 그리고 주변의 소리에 귀 기울이게 되고 자신의 내면에도 집중하게 되기에 혼자 떠나는 여행도 가끔은 꼭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과거의 나, 지금의 나, 미래의 나를 생각하며 삶을 더 다지게 만드는 시간이 참 좋다. 그래서 혼자 떠나는 여행도 종종 하려고 노력한다. 차로 달리면 이동하는 도중의 풍경은 그냥 스치게 되지만 걸어 다니게 되면 아무래도 더 많은, 숨어 있는 풍경을 마주하게 된다. 마치 숨은 보물을 발견하기라고 한 것처럼 작은 행복과 기쁨을 선사하는 풍경을 만나기도 한다. 홀로 걷지만 혼자가 아닌, 자연이 말벗이 되어주고 작은 생명들이 친구가 되어주는 여행, 자신과 마음의 대화를 할 수 있는 시간인 것이다.




걷고 또 걸으며 발견한 사유와 걷는 과정을 통해 얻은 깨달음들을 읽다 보면 함께 공감하고 두 발로 걷는다는 것이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지 느끼게 한다.

'길은 혼돈 속의 질서'라는 말처럼 길 위에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발견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기에 더 많이 걸어야겠다는 동기부여를 한다.

나의 여행기가 누군가에게 작은 희망이자 안내서 역할을 하는 것처럼 작가의 '시간과 자연을 걷는 일에 대하여' 쓴 글을 통해 많은 이들이 걷고 싶은 생각이 들 것이다.

<두 발의 고독>은 고독이 아니라 걷기를 통해 얻은 진정한 자유의 다른 표현이리라.


교유당 서포터즈로 책을 제공받아 읽고 솔직하게 작성된 글입니다.

나 자신이 모든 것의 바깥에 있음을 발견했어요. 나와 풍경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어요. 나는 걷고 또 걸었어요. 나는 끊임없는 흐름 속에 있었어요. 마치 하루에 몇 시간씩 명상을 하고 있는 것 같았죠. 처음 4주 동안은 발바닥이 부르트고 물집이 생겨 매우 쓰리고 아팠지만, 이내 상태가 좋아졌어요. 나는 생각했지요. 걷고 또 걸어라. 이게 바로 인생이라고. - P64

나는 이제까지 얼마나 자주 그 오솔길 위를 걸었을까? 지금은 그것을 헤아릴 수 없다. 다만 분명한 건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여동생들과 함께 그 길을 걸었던 때가 내 생애 최고의 시기였다는 것이다. - P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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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린의 심장 - 교유서가 소설
이상욱 지음 / 교유서가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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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 이상욱 작가의 소설 <기린의 심장>은 9개의 단편 이야기들이 묶여진 소설집이다.

첫 페이지를 펼쳐 <어느 시인의 죽음>부터 읽기 시작했는데 딱 첫 편의 단편소설을 읽고 나서 느낀 점은 '아! 이 작가 뭔가 독특한데?'였다. 뭔가 신선하고 기발한 발상과 독특한 점이 어색하거나 이상하지 않고 묘하게 재밌고 끌렸다. (비현실적이지만 현실적일 것만 같은) 첫 번째 단편을 읽고 이상욱 작가에 대한 기대감이 상승하면서 다음 이야기도 빨리 읽고 싶어 책장을 넘기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인상적이었던 내용을 꼽자면

<어느 시인의 죽음>과 <라하이나 눈> 그리고 <허물>과 <하얀 바다>였다.

지구를 침공해 인간을 먹고 사는 외계인 가브들의 이야기는 SF적이면서도 기발하고 재미있지만 가브들에게 제물로 바쳐지는 인간의 기준 등의 이야기는 결코 가볍게 흘러가지 않는다.

그림자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열심히 달리며 산 그는 육체의 동기화로 다이어트를 대신해 주는 베타의 삶을 사는 이야기 <라하이나 눈>

돈 있는 자는 마음껏 먹고 놀면서 몸짱이 되고 돈이 필요한 자는 끊임없이 달리고 칼로리를 소비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모든 칼로리가 모두 자신에게로 돌아오게 되고 죽음으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기발하면서도 자본주의 사회의 무시무시한 현실을 보여주는 거 같다. 파출소에 있게 된 한 소설가에게 경찰 k가 들려주는 동물원 이야기는 마치 기묘한 이야기의 한 장면 같다. 기린의 심장이 무엇을 상징하는지... 인간의 끝없는 욕구와 욕망에 대한 시선을 담은 꿈인지 현실인지 모호하게 알 수 없는 기묘한 이야기다.

뱀이 된 소년의 이야기인 <허물>의 내용을 읽노라니 정밀아의 <심술꽃잎> 노래가 절로 떠올랐다. 할머니 집에 맡겨진 아이는 언제 엄마가 데리러 올까...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버림받았을지도 모를 불안함이 소년을 뱀으로 변하게 한지도 모르겠다. 이 이야기를 읽고 있으니 문득 애니메이션 <울고 싶은 나는 고양이 가면을 쓴다>도 생각이 났다. 

<허물>은 아릿한 통증이 밀려오는 이야기였다. <하얀 바다>도 마찬가지였다.

자식의 죽음 그 슬픔과 아픔의 내용을 보면서 김애란 작가의 <바깥은 여름> 중 <입동>도 절로 떠올려졌다. 세상은 녹아내릴 듯 더운데 내 안은 시리도록 차갑고 혹독하기만 한 시간들.

<연극의 시작>에서는 비정규직 근로자였던 김용균 씨의 죽음도 생각났고 대구지하철 방화사건도 생각나게 했다.

이렇듯 소설은 9개의 각기 다른 이야기들을 담고 있지만 삶과 죽음이라는 주제를 관통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은 얼마나 다른지요. 협곡에 갇혀 옴짝달싹할 수 없는 저는, 그럼에도 삶과 세상에 대한 미련을 쉽게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죽음이 주는 안식은 절대 돌아올 수 없는 비가역성(非可逆性)을 담보로 합니다. 그 담보가 저는 두려웠습니다. 할 수 있다면 맹수를 만난 타조처럼 땅속에 머리를 묻고 영원히 눈을 감아버리고 싶었습니다. 삶과 죽음, 고통과 안식, 유한과 무한, 가역과 비가역, 돌이켜보면 저는 평생을 이 갈등 속에서 살아온 게 아닌가 싶습니다.

p. 153~154 <허물>


작가가 9편의 이야기 속에서 담고자 한 것들이 바로 이러한 것들이 아닌가... 싶다.

이상욱 작가의 9편의 이야기는 흥미롭고 심오하며 신선하고 독특하고 인상적이었다.

재미도 있지만 그 속에 왕따, 자살, 성소수자 문제 등 다양한 사회적 문제들도 내용 속에 자연스럽게 녹여내고 있어 인상적이었다. 신인작가인데도 단편마다 글의 힘이 느껴졌고 굉장히 신선하고 독특하다는 인상을 받았기에 다음 작품이 기대가 된다.

어떤 내용들은 조금 더 이야기를 확장시켜 장편으로 써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흥미롭고 좋았다.

단편소설이 재미와 여운을 주기가 쉽지 않은데 출판사 측에서 범상치 않은 작가를 발굴했기에 이렇게 아무런 정보도 없이 사전 서평단을 꾸려 보란 듯 작가와 작품을 알리는 것인가 싶기도 하다.

경쾌하진 않지만 너무 묵직하지도 않고 적당히 여운과 잔상을 남기는 그런 이야기들이다.

어쨌거나 데뷔작이 이 정도라니... 새로운, 꽤 기대되는 신인 작가를 알게 되어 기쁘다.


사전 서평단 선정으로 가제본을 받아 읽고 솔직하게 작성된 리뷰입니다.

그림자 속엔 어두운 마음이 숨어 있거든. 원하던 걸 얻지 못할 때, 사랑하는 사람을 잃거나 몸에 병이 찾아오면, 그림자에 숨어 있던 어두운 마음이 슬그머니 나타나 발목을 움켜쥔단다. 그러니 아빠와 삼촌을 미워하지 마라. 저 나이가 되면 누구나 그림자에 쫓기며 사니까. - P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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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키호테의 식탁 - 돈키호테에 미친 소설가의 감미로운 모험
천운영 지음 / arte(아르테)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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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도착하기 전, 검색부터 해보았다. 과연 어떤 책인지... 미리 알아보고자.

검색을 하니 책이 검색되는 것이 아니라 온통 스페인 식당 이름인 <돈키호테의 식탁>이 줄줄이 나왔다. 그런데 가만~~ 보니 그 스페인 식당을 연 이가 바로 천운영 작가라는 걸 알게 되었다. 돈키호테에 빠져 스페인에서 400년 전 돈키호테 소설 속에 나오는 음식을 찾아 나선 것도 모자라 식당도 열고 책도 냈다는 결론인데... 이 작가 추진력 좀 보소~ 돈키호테 못지않음에 놀랐다. 작가는 레지던스 프로그램으로 스페인에 지내며 돈키호테에 빠져들기 시작했고 그 후 2년간 스페인을 오가며 <돈키호테>에 나온 음식들을 찾아다녔다고 한다. <돈키호테의 식탁>은 그 음식 순례기의 결과물인 셈이다.



나도 뭔가 하나에 꽂혀 빠져들기 시작하면 심취하는 스타일이기는 하지만 천운영 작가의 돈키호테 뽕빨 뽑기에는 감히 명함도 못 내밀 정도의 경지에 이른다. 돈키호테를 내가 제대로 읽기나 했던가? 생각해 봐도 잘 모르겠다 싶을 만큼 뭔가 알기는 아는 거 같으나 제대로 아는 건 거의 없다는 사실이 참 애매모호했다. 내용도 가물거리는데 소설 속에 나오는 음식은 더더욱 알 턱이 있나. 목차를 보자니 <돈키호테>가 음식 소설인가 싶을 만큼 꽤 많은 음식들이 등장을 한다.

우리도 즐겨 먹는 음식도 있는가 하면 상당히 낯선 음식들도 있다.



 일러스트와 함께 각각의 음식 이야기를 돈키호테 소설 속 이야기와 함께 버무려 참 맛깔나게도 적었다. 목차마다 갖가지 다양한 음식을 맛보는 기분이랄까. 돈키호테에 빠진 작가는 어쩜 이야기도 이렇게 맛깔나게 스페인과 한국을 오가며 잘도 버무렸을까. 글맛이 참 좋다.유쾌하고 즐겁게 읽었던 흥미로운 음식 에세이다. 무엇보다도 스페인이라는 낯선 나라의 이야기가 있고 문화가 있고 음식이 있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돈키호테>라는 소설이 있다. 소설 속 음식이라는 매개를 통해 소설 속 장면과 작가의 삶이 녹아나는 인생 이야기들이 어우러져 더 빠져들며 읽었다.




기억해 두고 싶은 문장들이 참 많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내용을 꼽자면 "무화과"와 "잔칫집 홍어" 이야기다.

무화과는 어른의 과일이라는 작가의 이야기가 가장 크게 공감되었고

곰삭은 홍어의 냄새만큼이나 강한 인상을 주었던 결혼식 홍어 이야기는 무척이나 재밌었다.

고전 소설인 <돈키호테>를 이런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것도 대단하지만 그걸 재미나게 이야기로 풀어내는 것도 작가적 능력이다. 이 책을 통해 천운영 작가의 다른 책들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돈키호테도 제대로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앞으로 돈키호테를 읽게 된다면 소설 속 음식들에 눈이 더 갈 거 같고 '아... <돈키호테의 식탁>에서 천운영 작가는 이렇게 표현했지?'라며 절로 연상될 것만 같다.

스페인도 가보고 싶고 스페인 음식도 먹어보고 싶은 충동이 드는 맛깔나는 음식 여행기 책이었다.









인생 별거 있소?

살거나 죽거나지.

그러니 있는 그대로,

우리 모두 함께 살아가면서

평화롭게 함께 먹도록 합시다.

하느님이 아침을 여실 때

모두를 위해 여시는 것 아니겠소?

 - P184

돈키호테의 말마따나 자신을 이기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바랄 수 있는 가장 큰 승리. - P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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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은 고양이 인생그림책 9
이덕화 지음 / 길벗어린이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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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만 보고도 홀딱 반하고 말았다. 길벗 어린이 출판사의 인생 그림책 시리즈 9권으로 출간된 이덕화 작가의 <봄은 고양이>

환한 봄빛을 담은 표지와 함께 앙증맞은 고양이.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너무 기대가 되었다.



이덕화 작가는 볼로냐 국제어린이도서전에서 '올해의 일러스트레이터'로 선정이 된 작가이다. 간결한 문장과 함께 페이지마다 노랑노랑한 그림들이 봄빛으로 물들게 하는 것은 물론이고 너무너무 행복해지는 책이다.



이 책은 1923년에 쓰인 이장희 시인의 <봄은 고양이로다> 시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그림책이라고 한다.




야몽은 봄을 만드는 아주 작은 고양이다. 이 야몽들이 민들레 씨앗처럼 세상에 퍼지면 사람들을 나른하고 둔하게 만들기도 한다. 야몽의 털에 묻어 있는 가루가 졸음을 몰고 오는데 야몽들이 눈꺼풀에 매달려 자장가를 부르기도 하고 사람들의 콧속에 들어가 재치기를 유발하기도 한다. 사람의 가슴에 파고들면 두근두근 봄의 설렘을 느끼게 하는 야몽들.



아... 봄이면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나 했더니 이제야 그 답을 찾았다. 모두 야몽들 때문이다. 사랑스럽고 귀여운 야몽들.


봄과 고양이는 참 잘 어울린다는 걸 고양이와 함께 살면 살수록 느낀다. 오래전 이미 느낀 이들이 시도 쓰고 소설도 썼다. 봄에 일어나는 다양한 현상들을 고양이와 연결시켜 사랑스러운 그림과 함께 짧지만 강렬하게 공감되는 문장으로 완성시킨 그림책.

이건 정말 소장각이다. 그냥 그림만으로도 힐링이 되고 봄의 기운이 가득 느껴져 좋다. 게다가 내가 좋아하는 고양이 이야기라니...


매년 봄이면 꺼내보고 싶은,

이제 매년 봄이면 봄에 일어나는 현상들을 보면서 야몽을 절로 떠올리겠지.

나에겐 사계절 내내 야몽같은 사랑스러운 우다다 패거리들이 있어 참 행복하다.









야몽의 웃음은 봄이 오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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