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인간 선언 - 기후위기를 넘는 ‘새로운 우리’의 발명
김한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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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마트에 갈때마다(굳이 대기업형 마트가 아니더라도), 동네를 산책할 때마다 드는 생각이 있다. 한 건물 너머 있는 치킨집을 보면서 '저 많은 닭들은 어디에서 왔을까', 그리고 마트에 탑처럼 쌓여 있는 계란을 보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닭이 하루에 몇 개나 알을 낳으면 계란이 저렇게 쌓일 수 있지...?' 라는 궁금증. 살면서 양계장이라는 곳을 가본적이 없어 그저 책에서 읽은 것이 전부니 정말 수천마리의 닭들이 옴짝달싹 못하고 기계처럼 알을 낳는다는 데에 상상도 쉽지 않다. 간혹 고속도로에서 닭을 실어 나르는 대형 트럭을 볼 때면 잠깐 짐작할 따름이다. 
 






 
이 책은 기후 위기에 관련해서 아주 절박하고 시급하며 극단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래서 아주! 속이 시원했다. 그리고 이론이나 사고의 지적 유희가 아니라 현실과 호흡하며 얻은 실천적 성찰들의 모음이라고 밝힌다. 그래서인지 너무나 현실적이고, 격하게 와닿는다.  


기후 위기에 당면한 현재, 대응책을 모르는 사람도, 국가도 없다. 문제는 변화를 거부하는 관성이다. 이 틈을 자본과 기술이 해결하리라는 낙관론, 그리고 자국 이익이라는 기득권 세력 중심의 이기적 관점이 파고든다. 현재 시급한 문제는 변화의 큰 방향보다 변화의 속도다. '시한폭탄'을 손에 들고 취지는 좋으나 성급하다고,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을 하는 이들은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는 한가로운 말이라고 일갈한다.  


저자는 코로나19 사태를 들어 인간의 적응력, 무언가를 추동할 감각을 마비시키는 적응력이 두렵다고 썼다. 폭염은 에어컨, 미세먼지는 공기청정기, 식량부족은 인스턴트식품, 불편한 진실은 가짜 뉴스, 장마는 건조기 등. 나는 인간의 적응력 뒤에 양산되어 기후 위기를 촉진시킬 그 엄청난 것들이 더 두렵다.  


그는 코로나19와 기후 위기를 같은 선상에 놓고 서술한다. 대기 오염을 '침묵의 팬데믹'이라고 칭하면서 현재 얼마나 심각한 상황인지를 절박하게 얘기하면서, 코비드 시국과 마찬가지로 국가, 정책, 개인 가리지 않고 할 수 있는 건 모두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해법은 체제 변화뿐이라며 작은 실천을 폄하해서도 안 되고, 개인의 실천만 강조해서도 안 된다. 무엇보다 (과학)기술이 모든 걸 다 해결해준다는 망상은 곤란하다고 당부한다. 기후 위기를 드러내고 싶지 않은 집단은 당장 눈에 보이는 현상조차 숨기고 가리기에 급급하다. 하지만 거짓말로 해결할 수 없는 것이 기후 위기다.  


지구 환경에 악영향을 미치는 것만큼이나 나쁜 것은 환경적 영향에 대한 '생각 없음' 이다. 경쟁과 분열이 추동의 연료가 되는 사회, 누가 하나 양보없는 성장의 카르텔이 아닌 무작성 부숴놓고 보는 개발보다 공공적 가치를 우선하는 진정한 도시재생, 녹색 성장이 아닌 탈성장과 성숙을 실현해야 할 때다. 저자는 기후 위기가 체감하기에 와닿지 않는다면 가닿으라고 말한다. 와닿는 순간이 오면 그때 이미 늦었을테니까.  


ㅡ 


저자는 서문을 통해 도구적.실용적인 관점을 떠나 인간에게 쓸모가 없더라도, 존재 그 자체로서 타자의 살아갈 이유를 긍정하는 것이 타자를 알아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탈인간의 궁극적인 지향점을 타자에 대한 앎을 넘어 타자와의 연대를 통한 공동체 구성원의 테두리를 확장해 소외되고 새로운 구성원들을 포용하는 일이다. 


저자가 생각하는 교차성의 힘은 정체성이 아닌 '동일시'에 있다. 차별과 착취의 지배자 원리, 그리고 약자와 소수자가 가장 먼저, 가장 큭 피해를 입는 것은 기후 위기도 예외는 아니다. 사라져가는 북극곰과 고래, 해수면이 높아져 가라앉는 남태평양의 어는 섬주민과 동일시는 바라지도 않는다. 저자가 이 시대의 꼰대들에게 경청은 최소한의 예의라고 충고한 것처럼 제발 제대로 듣고, 제대로 보기라도 하자.  




※ 출판사 지원도서

생태계에는 고정된 중심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무한한 관계들이 얽혀 있을 뿐이다. - P12

소수의 사려 깊고 헌신적인 사람들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걸 결코 의심해서는 안 된다. 사실, 그것 없이 바뀐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인류학자, 마거릿 미드) - P20

마지막 나무를 베고 나서야, 마지막 물고기를 먹고 나서야, 마지막 시냇물을 오염시키고 나서야, 그제야 인간은 깨달을 것이다. 돈을 먹고 살 수 없다는 것을.
( 북아메리카 원주민 크리족 속담) - P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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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의 삶
아니 에르노 지음, 정혜용 옮김 / 열린책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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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부터 1999년까지의 일기다.  
<바깥 일기>에서부터 이어지는 책으로써 여기에 실린 글들은 <바깥 일기>보다는 직접적인 일기체이고, 타인의 삶과 일상을 좀 더 깊숙이 사유한다.    






여러 장소에서 만나게 되는 다양한 형태의 관계를 가진 이들의 대화나 행동을 통해 간접적이나마 타인의 삶을 경험할 수 있다. 작가는 몇 분 동안 마주치는 사람들을 꼼꼼히 관찰함으로써 그들의 삶에 갑작스레 가까워진 것 같다고 쓰면서 만약 이런 실험을 계속 해나간다면 세계와 그 자신을 보는 시각에 근본적인 변화가 생길 테고, 어쩌면 자아가 남지 않을 것이라 예상한다.    


리얼리티쇼. 폭탄 테러. 거리의 악사. 연인. 곳곳에서 만나는 평범한 일가족 일상의 단면. 걸인. 전철 안 모녀의 대화. 방송을 통해 전달되는 노동자 지구의 사망 사고와 뒤이은 총리의 희망찬 경제 지수 전망. 예전의 페스트 환자들처럼 거의 다 화장되는 HIV 보균자. 이주민의 향수. 노숙인 자립을 향한 편협한 시선. 봄을 알리는 이웃의 명랑한 어린 형제. 허위로 가득찬 교사의 수업. 고령화와 젊은 육신에 대한 열망. 존엄사. 전쟁으로 폐허가 된 도시와 사람들. 정치인의 가식. 실존의 공포. 노동자 파업. 망자에 따라 죽음을 관조하는 대중의 대조적 감정과 태도. 글쓰기의 윤리. 버려짐과 가난의 무력함. 달라지지 않는 인종주의의 현실. 갈수록 익숙해지는 타인의 고통.   


이렇듯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관찰하면서, 보고 읽고 들은 내용을 기술한 작가의 글들은 한 시대의 증거가 된다.   


ㅡ 


책을 다 읽고 창고에서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사이의 몇 권의 일기와 다이어리를 꺼내왔다. 다이어리에는 일정을 꼼꼼히 빼곡하게 적어놨고, 일기장에는 그날 그날의 기록이나 감정들이 쓰여 있었다. 작가의 기록과 다른 점이라면 타인에 대한 관찰은 거의 전무하다. 친구와 직장 동료 등 나와 관계있는 사람이 아닌 이들에 대한 내용은 거의 없다.  


이 무렵 나의 생활권에 있는 도시의 풍경은 어떠했던가. 걸인이 있었나? 있었다. 명동 거리 한 복판에 두 다리가 절단되어 음악을 틀고 동전 바구니를 올린 좌판 수레를 밀며 느릿하게 앞으로 나아갔던 아저씨, 그리고 강남역 O번 출구의 중간 계단에 어김없이 앉아 있던 아저씨. 전철 안에서 특이한 물건을 팔았던 상인들과 아주 가끔 껌을 팔았던 아주머니.   


어지간한 밥 한 끼 가격보다 비쌌던 크리스마스 시즌 카페의 음료값. 화장품 가게와 식당의 호객 행위. 발디딜 틈 없는 백화점. 놀이공원의 긴 줄. 만화가게의 따뜻함.  신문마다 IMF 사태 보도. 실직자가 된 아버지들. 새 정권 출범 후 금 모으기. 세기 말의 긴장과 기대감.   


이렇게 꽤 오래된 지난 기억을 더듬어 쓰다보니 아니 에르노라는 작가가 얼마나 대단한지 새삼 느낀다. 포착된 순간을 기록하고 그때 들었던 감상과 생각을 한두 줄에 압축적으로 정리해 써내려가는 이 필력. 거기에 독자의 가슴에 날아와 확 박히는 무심한듯 쓰인 촌철살인의 문구 몇 개.  



작가는 스물두 살에 처음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당시에 일상의 소소함을 기록하려는 시도를 해보지 않았음을 후회한다. 나는 이와 비슷하게 나의 일기가 나 자신에게만 머물러 있음이 후회스럽다.   


한 인간의 긴 수명은 대다수의 사람이 살아보지 못했던 생물학적 시간을 지나왔다는 데에 의의를 둘 뿐이다. 작가는 백 세가 넘은 고령자 여성의 죽음을 통해 기록의 의미를 다시 짚는다. 누군가의 기록이 시대의 증언이 될 수 있음에, 그가 짚어낸 의미는 또 나에게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 준다. 




사족 
전철의 하차 승객을 기다리지 않고 밀고 들어와 스스럼없이 스낵 봉지를 뜯어 와작와작 소리내어 먹는 여자를 죽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작가의 글에 빵 터져서 한참을 웃었다.  






사람들은 선한 일을 하려고 타인에게 주는 게 아니다. 사람들은 사랑받으려고 준다. - P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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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는 작품
윤고은 지음 / 은행나무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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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틱하고 아름답게 시작한 소설은 미스터리물로 급선회하나싶었는데, 갈수록 독자에게 딜레마를 쏟아내고 있다. 혼란, 진실, 왜곡, 선택, 자기 검열, 소통의 오류, 예술의 윤리성, 예술과 노동, 예술의 상업화 등 읽다보면 여러 측면에서 생각을 하게 된다.








무심코 업로드한 그림이 유명 재단의 이사장에게 선택되어 16주간의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된 작가 안이지. 계약 내용 중 가장 큰 특이사항은 창작 프로그램을 통해 완성한 작품들로 단독 전시회를 한 후 전시회 마지막 날에 작품 중 하나를 소각해야하는데, 소각할 작품은 재단(의 이사장)이 선택한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불태워질 작품의 소유권은 작가도, 재단도 아니라는 단서가 붙는데, 이는 소설의 맨 처음에 등장하는 빌 모리 사진의 소유권 문제를 상기시킨다.  


로버트 재단은 유난스럽다고 할만큼 정돈되어 있다. 작은 것 하나라도 모두 제자리에 있어야만 할 것같은 흐트러짐 없는 모습. 지역 전역이 산불과 화재로 북새통인데 재단 안은 그야말로 별천지 세상이다. 또한 재단의 모든 시스템은 이사장인 로버트에게 맞춰져 있다. 재미있는 점은 몇몇 부분에서 인간 독자가 읽기에 빈정상할 수 있겠지만, 인간과 동물의 차별에 대한 논쟁을 떠나서 결국 권력자에게 시스템이 맞춰져 있음(하다못해 문ㅡ물론 작가의 방은 해당되지 않지만ㅡ의 크기까지)을 생각해 본다면 우리가 씁쓸해야하는 지점은 '개'가 아닐지도 모르겠다. 


소설에서 웃기지만 웃을 일이 아닌 것은 언어, 즉 소통의 오류와 왜곡이다. 서너 단계를 거치는 통역(이라고 하지만 제멋대로 생략, 누락, 편집에 의한 의역), 그리고 문화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해 생기는 오류(상여가 슈퍼카라니!)의 확정으로 인해 화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청자에게 와전되어 전달될 수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는 단순한 의사 소통의 혼란을 넘어서 일방적이며 이해를 하려는 노력조차 않는 고압적인 태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읽다보면 로버트 재단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를 보낼 수 밖에 없는 설정들이 있다. 독자는 안이지처럼 '로버트'라는 존재에 대해 의혹을 갖는다. 그러다 어느 순간 안이지가 그랬듯 천재견을 인정한다(사실 안이지의 말대로 인정 안 한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겠나). 하지만 의문을 거둘 수 없는 점들이 하나둘씩 보이는데, 독자는 이러한 궁금증을 끝까지 안고 간다.   


ㅡ 


우리는 늘 존재의 이유를 증명하여 살아야 한다. 일탈은 용납되지 않는다. 시기에 맞는 걷기, 말하기, 성적, 입시, 취업, 결혼 등 안이지가 16주 안에 작품을 완성해야 하듯 말이다. 소설에서 배달 앱이 나오는데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처리를 완료해야하는 배달 앱의 라이더처럼 안이지나 우리나 각자 맡은 임무를 완수해야 한다. 로버트가 말하지 않던가, 매일 쉬지 않고 일하지 않으면 어떻게 발전할 수 있겠느냐고(이렇게 쓰다보니 괜히 서글퍼진다...).  


소설의 후반부로 가면 독자가 예술과 예술품에 대해 좀더 숙고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다. 예술성은 창조되는가, 만들어지는가. 예술은 작품인가, 상품인가. 예술 행위는 노동으로 인정되는가. 예술의 윤리성이 갖는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소설 말미에 대니가 주장하는 로버트 재단이 존재해야 하는 목적성은 그가 한 말에 대한 진정성을 떠나 한번쯤 생각해볼 만하다. 어디에 더 무게를 두냐에 따라 지지하는 방향도 달라질 터다. '로버트'라는 상징성(그런데 로버트만 두고 생각하면 또 못할 짓이고), 아니면 창조적 예술의 확대와 지원.  


마지막 아트 딜러의 말은 그야말로 뜨악할 지경이다.
작가가 자신의 그림을 그대로 복제한 것은 위작인가 아닌가.
우리는 왜 진품에 열광하는가. 
이에 대해 생각하다가 느닷없이, 내 '인생'은... 온전히 나를 위한 '진품'일까?

수없이 버려진 습작들의 가치를, 우리는 모른 척 하며 살고 있는 건 아닌지.




※ 출판사 지원도서

그때 로버트는 낯선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특별함을 증명해 보여야했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지금 존재 증명을 해야 하는 건 내 쪽이었다. - P149

불타는 작품만이 진짜라고. 불타고 있을 때, 그 순간의 화력만이 사람의 영혼을 움직인다고. 그런 의미에서 화염을 피해 밖으로 나온 건 진짜일 수가 없다고. - P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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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위대한 승리일 뿐
김솔 지음 / 안온북스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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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 상당히 흥미롭다!
일단 1장을 통과하면 그 다음부터는 책을 덮지 못한다(그렇다고 해서 1장이 지루하다거나 어렵다는 의미는 아니고, 글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해서. 김솔 작가님의 장편을 두어 편 읽어 본 개인적 경험으로 장편이 대체로 이런듯한 느낌적인 느낌?).  


소설을 1장까지 읽고나면 도대체 어떤 내용이길래 프롤로그는 이토록 비장하며, 도입부는 이렇게 장황할까, 싶다. 그런데 2장에 들어서면 충분히 비극적으로 읽혀지는 운명적 만남과 한 사람의 처절한 복수의 서막이 오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 남자가 법정에서 천 시간의 사회봉사 명령을 받고 보호시설에 왔다. 아름다운 용모, 세상 걱정 없어 보이는 표정, 고급 의복과 승용차. 그는 한눈에 봐도 유력한 집안의 자제였고, 사회봉사는 그저 시간 채우기에 불과한 형식적인 행사였다. 어느날, 겟세마네라는 방에 수용 중인 사지절단 행려병자가 그에게 접근해 마치 세에라자드처럼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줄테니 대신 올 때마다 자기에게 음식을 한 가지씩만 가져다 달라는 제안, 아니 유혹을 한다. 이야기를 통해서만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행려병자의 말은 진짜일까, 아니면 식탐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면 다른 숨은 의도가 있는 것일까.  
 
'나'는 청년에게 그가 13년 전의 일을 기억하도록 몇 개의 단서를 제공하지만 그는 '나'와의 사랑도, 자신의 죄악도, '나'라는 사람도, 전혀 기억해내지 못한다. 



소설은 화자에 따라 복수의 대상이 2인칭 '너' 혹은 3인칭 '형제님(그)'으로 불리면서 서술한다. 독자는 쳥년에게 중남미 여행기를 들려주는 자가 당연히 '나'일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읽을수록 오리무중에 빠진다.  


독자가 추적해 나가는 것은 13년 전 사건의 진실, 그리고 보호시설 내부에서 과연 '나' 가 누구냐는 것이다. 책을 읽다보면 화자를 유추할 수 있는 부분들이 사이사이 등장한다. 성별, 과거의 직업, 대화 패턴, 이어지는 크고 작은 반전들. '그'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화자의 정체, 그리고 '그들'이 '그'와 독자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의 진실과 거짓 여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백지상태인 '그'보다 이 책을 읽으며 그들의 대화와 독백을 읽고 관찰하는 독자가 더 혼란스럽다.  


이 소설에서 인상적인 부분은 사건의 가해자이자 복수의 대상인 '그'의 목소리를 전혀 들을 수 없다. 13년 전 뿐만 아니라 최근의 사건 내막까지 가해자 당사자의 입장은 직접적으로 언급되지 않는다. 오로지 사건의 피해자인 '나'에 의해서만 모든 정황을 설명한다. 왜일까? 어쩌면 피해자의 목소리에 귀를 닫아버리는 현실에 대한 일갈 또는 한풀이(?)라는 생각이... .


ㅡ 


성폭력 사건, 사회적 약자 차별, 권력층의 카르텔, 존엄한 삶, 이기와 탐욕, 상실된 인간성, 현실의 문제를 외면한 종교와 신앙 그리고 신념의 옳고 그름, 증오와 사랑, 죄악과 용서. 파블로가 들려준 남미 여행기와 그의 과거사 중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알 수 없다. 다만 그의 이야기는 장소와 사람을 달리했을 뿐 13년 전의 '그'와 현재의 우리 사회를 겨냥한다. 


소설의 후반부를 읽으면서 문득 든 생각은...  우리는 존엄한 죽음에 대해서는 말하면서 살아가는 중인 지금 당장의 존엄한 삶에 대해서는 왜 논하지 않을까. 서점 스터디셀러에도 존엄성에 있어서 삶보다는 죽음을 다룬 책들이 훨씬 많은 양을 차지한다. 우리는 어째서 한순간의 죽음보다 더 긴 삶의 존엄성을 간과하고 있나. 존엄한 삶을 살면 존엄한 죽음은 자연스럽게 따라온다는 누군가의 말이 떠오른다. 


보호시설의 원장신부를 비롯한 성직자와 의료진, 자원봉사자, 그리고 수용인들까지 드러나지 않은 그들의 민낯은 추악하기 그지없다. 자신이 괴물이라는 인지조차 하지 못하는 자들이 갖는 위험성, 죄를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용기. 과정이야 어떻든 우리는 결과적으로 잘못을 저지르고 이를 반복한다. 어쩌면 무인도에서 혼자 살지 않는 이상,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미덕이야말로 인정認定과 용서라는 생각이 든다. 


이야기꾼, 연출가, 암살자, 이들 중 누가 과연 '나'일까. 그들 모두일지도 아니면 그들 모두 아닐지도. 


이 책 자체가 '그'에게 전하는 메세지이자 우리 사회에 던지는 질문들이다. 




※ 출판사 지원도서 

피해자를 위무할 수 없을 수준의 처벌은 오히려 피해자에게 또다시 가해지는 폭력일 뿐이다. - P251

나를 존재하게 만드는 건 이 책을 쓴 자가 아니라 읽는 자이다. - P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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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 일기
아니 에르노 지음, 정혜용 옮김 / 열린책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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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부터 1992년까지 쓴 글인데, 1986년에 집중되어 있다.
이 글이 집단의 일상을 포착해 한 시대의 현실, 특히 신도시에서 느껴지는 현대성에 가닿으려는 시도라고 밝힌 작가는 포착한 장면에 끼어들거나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일은 가능한 피하려고 했지만, 당초의 예정과는 다르게 자신을 투여했다고 썼다. 







구급차에 실려가는 여인. 열차 안의 사람들. 쇼핑센터 안의 손님과 계산원 들. 대중교통에서의 에티켓과는 무관한 사람. 눈도 마주치지 않고 주문과 계산을 하는 채소 장수와 손님. 백화점 앞의 호객꾼. 노숙자. 타인을 향한 쑥덕거림. 지레짐작과 막무가내의 뒷담화. 자유주의 함께 등장한 단어, 무쓸모 인간. 20년간 유지되었다가 사라진 이민자들을 위한 임시 주거지. 작가의 눈에 들어온 사람과 장소 들. 


전철역의 노래하는 맹인과 개 한 마리의 조작, 그리고 동전을 던진 이들이 갖는 그날 하루의 보시에 대한 기대감. 인격이 존재하지 않는, 그래서 모멸감 따위는 감수할 준비를 해야하는 먹고 사는 현장. 자신의 아이만 최고이기를 바라고 그 아이가 자라서 그들이 이루지 못한 계급에 속하기를 바라는 부모들의 열망. 기계와 숫자로 '판독'되어지는 '나'라는 존재. 거지의 순종을 망치는 노출증 남성. 전철 안에서 타인의 태도와 말을 통한 의도없는 망연한 상상. 병원 응급실에서의 주저. 이입되는 타인의 죽음. 소비를 통해 은연 중에 자신의 사회적 위치를 표출하는 소비자. 쇼핑 카트에 담는 신도시 중산층 주민이라는 자부심. 생계를 위한 피지배자들의 파업을 열등한 존재의 우둔한 행위로 바라보는 시선들. 현실의 몰이해와 모든 척도를 자신에게 두는 일방적 견해와 판단, 뒤따라오는 이를 통한 자기만족과 안도감.   


​아니 에르노는 이 모든 것들에서 그녀 자신을 본다. 


ㅡ 


글 안에는 우리가 평소에 쉽게 마주할 수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담겨있다. 바로 근처에 있는 독자의 이웃 혹은 직장 동료 등 생활권 내에서 일상적으로 마주하는 이들이다. 장소 역시 전철, 광장, 공원, 쇼핑센터, 미용실, 병원, 우체국 등 아주 익숙하다(개인적으로 나름 신도시라는 곳에 살고 있는 나로서는 더욱 그렇다. 참고로 책에서 언급한 도시는 꼭 신도시만의 풍경은 아니다). 


약 30여 년 전의 풍경에 대한 8년간의 기록은 형태를 달리해 여전히 우리의 모습을 띠고 있다. 신체 노출이나 '구걸'은 현실 세계가 아닌 SNS의 화면 안으로 들어가 더 많은 불특정다수를 대상으로 하고 있고, 일자리 부족과 생계에 따른 경쟁은 '삶의 질'이라는 명분으로 더욱 치열해졌다. 출산율이 낮아지니 자식의 장래에 거는 기대치는 무한대로 높아져 감당할 수 없는 사교육비를 양산함에도 불구하고 아이도 부모도 만족하지 못하다. 아동의 아사는 극빈층에 대한 무관심에서 다른 범죄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타인을 향한 무례가 스스로를 우월하게 만든다는 얄팍하고 질 낮은 자신감을 부끄러운 줄 모르고 목소리를 높이는 이들. 제가 내뱉는 말들이 곧 자신의 인격임을 전혀 모르는 무지. 벗어나기 요원한 노동의 굴레. 그리고 더 다양한 방식으로 진화(?)한 여성 폭력.   


이러한 것들에 대해 작가는 타자화를 시도하지만 결국 인간이라면 누구나 크든 적든 공통된 점을 발견할 수밖에 없음을,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자신을 투영하게 됨을, 작가는 고백한다. 여러 군데에서 무척 공감했고, 종종 작가의 행동에 웃음이 나기도 했다(너무 인간적이시다).



역자는 서문에서 '이화감異化感'이라는 새로운 번역어를 제시한다. 기존 한국어 번역을 존중한다면 '소외감'으로 번역하는 것이 상식적이지만, 따돌림의 감정이 아닌 자기 자신과 타자성으로 분열된 주체의 상태를 담아내기 위해 제시한 단어라고 각주를 달았다. '문화적 이질감'과는 다른 의미일까? 간혹 세대 간, 지역 간 차이에서 내가 종종 느끼는 감정이라... .  






자신들이 내 역사의 일부를 보유하고 있다는 의심조차 않는 무명의 사람들, 내가 결코 다시 보게 되지 못할 얼굴들, 육체들 안에. 아마도 거리와 상점의 군중에 섞여 든 나 역시 타인의 삶을 지니고 있으리라. - P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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