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한문장] 페미니스트 킬조이

[오늘의 한문장] 숄

숄 _ 잃어버린 삶

숄 ㅣ 문지 스펙트럼
신시아 오직 지음, 오숙은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11월

일단 책을 읽으면서 너무 가슴이 아팠고, 슬펐고, 안타깝기 그지 없었다. 학살의 한가운데서 생존자가 되어 난민 신분으로 낯선 이국 땅에서 정착하지 못하고 부유하며 과거에 묶여 단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한 여인, 로사의 이야기다.

로사는 거의, 늘 화가 나 있다.
폴란드 바르샤바 출신으로 아버지는 바르샤바 은행 총재였고, 어머니는 시인이었으며, 사남매 둥 둘째로 물리학자를 꿈꾸는, 유복하고 화목한 가정의 '폴란드인'이었다. 가정이 붕괴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하루 아침에 '유대인'으로 낙인 찍혀 굶주리며 매일 죽을 고비를 넘겼다. 결정적으로 어린 딸의 죽음을 눈앞에서 목격했으나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로사의 가장 큰 분노는 스텔라를 향하고 있다. 스텔라를 향한 분노는 증오에 가깝다. 딸 마그다의 숄을 빼앗고, 팔레스타인으로 보내질 순간에 거두어 미국으로 데려왔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미치광이 노인으로 치부하며 폴란드어를 아예 잊어버린 배은망덕한 조카.

잠시, 카프카의 소설을 보면 서유럽에 정착한 유대인들의 정체성 혼란(카프카 본인의 이야기기도 하고)에 대해 다루어진 부분들이 종종 보이곤 하는데, 로사의 경우는 정체성의 혼란이라기보다 가난하고 비루한 '유대인'과 동격으로 치부되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러한 맥락은 로사의 딸 마그다가 파란 눈과 금발 머리카락으로 미루어 아리아인 핏줄이라고 짐작하는 다른 유대인들의 시선을 두려워하면서도 실상은 마그다가 개종한 유대인과 비유대인 혼혈의 핏줄임을 밝히는 데에서도 드러난다.

<숄>에서 보여지는 홀로코스트의 참혹한 모습은 여타 소설이나 영화에서 익히 봐온 것과 다름하지 않다. 다만 그 혹독한 환경에서 딸의 목숨을 지켜내고자 분투하며 하루하루를 두려움에 떠는 젊은 엄마의 모습이 처절하게 다가온다. 또한 <로사>에서는 아이를 잃고 삼십 년을 훌쩍 넘는 세월을 지나온 로사의 광기어린 모습이 두렵다기보다 오히려 가련하고 측은하게 느껴진다.


잃어버린 게 뭐냐고 묻는 퍼스키에게 삶을 잃어버렸다고 대답하는 로사. 그녀는 스스로를 삶이 없는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스텔라가 로라에게 마그다를 잊고 새 인생을 살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지만, 마그다와 삶을 강탈당했다고 생각한 로라에게 새로운 인생이란 없다.

우리는 간혹 너무 쉽게 잊으라고 말한다. 이미 벌어진 일을, 지나간 과거를 어쩌라고 자꾸 들춰내냐는 말을 무람없이 뱉어낸다. 삶을 도둑맞았다고 믿는 이에게 생존이 과연 '살아있음'이었을까. 삶이 곧 죽음인 사람도 있다.

하지만 소설의 마지막. 당황해서 서둘러 자리를 뜬 퍼스키가 다시 돌아오자, 로사는 당당하게 그를 맞이하기로 한다. 마그다는 거기 없었다고 말하는 로사가 이제야말로 '삶'을 시작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퍼스키가 로사에게 살아갈 계기가 되어주기를.

[100자평] 정지용 전 시집 : 카페 프란스

정지용 전 시집 : 카페 프란스 - 윤동주가 사랑하고 존경한 시인 ㅣ 전 시집
정지용 지음 / 스타북스 / 2023년 12월

그야말로 예쁘고 다정한 시, 하면 떠오르는 시인이다. 밤이 긴 겨울에 함께 하고 싶은 시인.

정재서 교수의 새로 읽는 이야기 동양 신화

정재서 교수의 새로 읽는 이야기 동양 신화 - 동양적 상상력의 근원을 찾아서, 중국편
정재서 지음 / 김영사 / 2023년 12월

동양이든 서양이든 신은 인간으로부터 숭배와 경외의 대상이자 완전한 존재이지만, 그들의 삶과 활동은 인간적인 변모를 보여준다. 기쁨, 슬픔, 사랑, 분노 등 인간이 갖는 감정을 지녔고, 인간의 삶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도 한다. 판타지에 가까운 이야기들이 한편으로는 지극히 현실적인 모습을 담아내고 있어서 남녀노소 구분없이 신화가 꾸준히 읽혀지는 것일테다.  

인간 중심의 서양 신화와는 달리 동양 신화는 인간 중심을 벗어나 생명체 전체를 아우른다. 그리고 서양 신화가 신이 세상을 창조한 것(지배)에 기반한다면  동양 신화는 신화적 존재 자체가 세상 만물(지구)로 변화된다는 희생에 기초한다. 물론 희생적 신화는 인도나 바빌로니아 신화에서도 나타나고 인간의 몸과 자연을 동일시 하는 데에는 서양 신화도 마찬가지이나 차이가 있다면 동양 신화에서는 절대적 창조주가 없고 대체로 자연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마치 생태계의 순환처럼 자연의 이치대로 흘러간다는 것. 이분법적 논리로 동서양 신화를 가를 수는 없다만, 신화가 문화의 원형이라는 사실을 떠올려 볼 때 현재의 문화적 현상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어느 지역이든 태초의 신화는 혼돈 그 자체다. 저자는 혼돈은 언뜻 뒤죽박죽인 것 같지만 나름의 질서가 있으며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창조적 힘의 원천이라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의 위기 속에서 신화의 가치를 다시 되새겨보는 것이 유의미한 일일 것이다.  

읽기 전에 전제할 점이라면 신화가 생겨나던 시절의 중국 대륙은 수많은 민족이 어울려 살았고, 한반도 사람의 조상 역시 지금의 중국 사람 조상과 어울려 살았다. 따라서 중국 신화 속에는 동양 여러 민족의 신화도 함께 담겨 있기에 중국 신화는 사실 동양 신화라고 불러도 좋은 것이라는 사실이다. 또한 저자는 중국 신들의 이름이나 역할 또는 기능이 중복되거나 자리바꿈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 이유는 고대 중국 대륙에는 수많은 종족들이 광대한 영역에서 함께 살고 있었고 동시에 다양한 계통의 신화를 갖고 경쟁했기 때문이라고 풀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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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점을 발견했는데, 책에 실린 삽화나 벽화 등 그림을 보면 인간(그중에서도 미남, 미녀)들은 거의 다 눈의 크기가 눈동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고 가늘다. 반면 눈이 부리부리하고(적어도 눈동자가 보이는) 이목구비가 분명한 존재들은 대체로 요괴 또는 신인데, 신이라고 해도 어차피 사지육신이 인간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눈이 동그란(?) 사람이 등장하기 시작한 때는 국가 형성이 이뤄지면서 권력자가 등장하면서부터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그림을 통해 눈目이 갖는 상징성이 컸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요즘에도 마찬가지인 것 같고. 

외부에서 그려진 고대의 우리나라를 언급한 부분에서 무궁화에 대한 얘기가 나오는데, 이것이 현재 무궁화가 국화로 정해진 데 영향을 미쳤는지는 모르겠으나 당시에는 한반도에 무궁화가 지천으로 피었다는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그때도 이름이 무궁화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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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는 인류사와 무관하지 않다. 종교, 전쟁, 문명의 발달과 민족의 성립, 언어와 문자, 공동체의 위기와 극복, 민중의 갈망, 희대의 영웅, 신세계를 향한 동경과 탐험, 효와 충에 의거한 국가 이데올로기 및 정치 이데올로기의 이상화, 차별적인 계급관념, 가부장제, 부귀영화 혹은 낙원에 대한 염원, 죽음과 사후 세계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 등 신화의 이면에 숨겨져 있는 당시 사회상과 현실적 맥락, 그리고 고대 국가가 형성되면서 나타난 중화주의의 이데올로기 들을 내포하고 있다. 어쩌면 신화는 인간 세계의 절대적인 권력을 지닌 존재와 신을 동일시하기 위한 정치적인 작업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꾸준히 들었다.  

동양 신화 속 정위새가 한국 분단의 비극을 나타내는 설희새가 된 이야기를 비롯해, 구미호가 풍요와 다산의 상징이었다는 것, 고기를 베어내도 그 자리에 금방 다시 생겨났다는 시육이라는 소, 전쟁을 예고하는 주염, 염원을 담은 주술적 세계관을 상징하는 상상의 동물과 식물 등 인간 세상의 길흉화복과 깊게 연관되어 있는 생물들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태초부터 지금까지 인간이 바라는 것이 무엇일지, 우리는 무엇을 위해 이렇게 열심히 살아가고 있나를 새삼 생각해보는 시간이었다.  

저자는 책을 마무리지으면서 상상력의 편식을 우려한다. 한쪽으로 치중한 상상력, 독서, 학습으로 인한 획일화된 사회의 초래. 이는 신화에 한창 관심을 가질 연령대의 어린이에 국한하지 않는다. 책을 읽다보면 이러한 저자의 우려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충분히 짐작된다. 단순한 동.서양 가르기를 떠나서 성, 계급, 이념, 세대, 생태계 등 전지구적 우리 사회에서 존재하는 대부분의 경계와 장벽을 낮추고 조화와 상생으로써 아우르는 시각을 갖자는 것임을 말하는 듯하다. 

교훈적이고 교과서적인 것들을 떠나서 일단, 이 책은 재밌다. 익히 알고 있는 내용도 있고 처음 접하는 내용도 있으나, 알던 내용도 유래와 맥락을 알고 읽으면 더 재미지기 마련이다. 특히 책에 실린 삽화, 그림, 사진 등 볼거리가 많아서 눈이 즐겁다. 개인적으로 시각 자료를 볼 때마다 이런저런 다른 문헌을 찾아보는 것도 흥미로웠고, 다른 독자들도 아마 자료를 통해 연상되는 것들이 많았리라 생각한다.  

예전에 어딘가에도 썼지만, 나는 유난스레 옛날이야기를 좋아한다. 그 이유를 딱히 생각해본 적은 없고, 지금 이유를 물어와도 교과서에나 나올법한 뻔한 대답을 빼면 그냥 재밌기 때문에? 아무튼 어지간한 소설보다 재미는 보장한다(물론 개인 취향이다). 

사족
1. <산해경>을 읽고 싶어졌다.
2. 옥장판이 그냥 만들어진 게 아니었어. 다 이유가 있었던 거지.
3. 강태공, 냉혈한 같으니라고! 

※ 출판사 지원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