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용 전 시집 : 카페 프란스 - 윤동주가 사랑하고 존경한 시인 전 시집
정지용 지음 / 스타북스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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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용 시인의 시집 <정지용 시집>과 <백록담>이 실려있는 전 시집이다. 이 시집의 장점이라면 시인이 생전에 써던 원전 그대로를 유지했다는 것과 앞선 두 시집에 담지 않은 미수록 작품을을 더했다는 점이다.  


특히 옛 표기법은 물론 중세 국어 표기법까지 그대로 살려서 읽는 맛에 '보는' 맛까지 더했다. 우연찮게 두어 달 전에 중세 국어 문법에 대해 살펴볼 일이 있어서 책을 읽었는데 시집에서 보니 괜히 반가웠고, 드물지만 192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중세 국어 표기법을 사용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해서 읽는 데에 있어 크게 어려움은 없다. 앞위 문맥상 충분히 유추가 가능하고, 대부분은 각주가 달려 있어서 어느 독자가 있든 불편함은 없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훨씬 시를 읽는 재미가 있었다.)


그리고 후반에 배치한 '미수록 작품'들을 읽어보면 몇 작품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정지용 시인의 말년에 쓰여졌다는 점과 광복 전후로 하는 애국시와 혁명시, 더하여 종교적 색채가 짙다는 데에 그동안 시집에 포함되지 못한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추측해본다. 특히 1940년대 후반과 1950년에 걸쳐 유독 혁명에 대해 언급하는 작품들이 두드러지는데, 그의 죽음을 떠올려볼때 그가 이 시기에 어떤 생각을 했었는지 어렴풋이나마 알 것 같았다.





 
시 '향수'가 너무 유명한 탓에 자칫 정지용 시인의 시들이 모두 서정시 혹은 향토시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실려 있는 시들을 읽어보면 서정시뿐 아니라 모던하고 세련된 시구들도 적지 않고, 자유에 대한 열망, 애국과 혁명에 대한 애끓는 마음도 전해진다. 또한 독실한 크리스찬임을 알 수 있는데, 이처럼 다양한 갈래를 넘나들며 써내려간 그가 왜 천재라고 불리는지, 윤동주가 왜 가장 존경하는 시인이라고 했는지 납득이 된다.  



그렇지만 여전히 그의 서정시에 눈이 가는 건 어쩔 수 없다. 자연과 아이를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에는 사랑과 애틋함, 그리고 망연한 그림움이 느껴진다.  


'이 아이의 비단결 숨소리를 보라.
이 아이의 씩씩하고도 보드라운 모습을 보라.
이 아이의 입술에 깃드린 박꽃 웃음을 보라.'
('태극선'에서) 



때늦은 눈雪을 보며 다시 솜웃을 껴입더라도 춥고 싶다는, 새삼 돋는 빗속에서 붉은 잎을 소란히 밝고 가겠다는, 바람에 별과 바다가 씻기우고 바람이 음악이라는, 시인의 순수한 마음에 어떻게 독자의 마음이 동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의 시구처럼 나는, '탐하듯이 호흡한다', 그의 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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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스트 킬조이 - 쉽게 웃어넘기지 않는 이들을 위한 서바이벌 가이드 Philos Feminism 9
사라 아메드 지음, 김다봄 옮김 / arte(아르테)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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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에서 보여지듯 이 책은 페미니스트 킬조이의 정의를 비롯해 페미니스트 킬조이로서의 생존 방법, 그리고 페미니스트 킬조이가 문화비평가, 철학자, 시인, 활동가가 될 수밖에 없는 까닭에 대해 서술하는데, 특히 순응하라는 압력 아래서 생각을 말로 드러내고 사고와 감정에 형태를 부여할 방법을 찾기 때문에 시인이라고 하는 데에 공감하는 바다. 또한 이 책의 목적은 페미니스트 킬조이들에게 자원이 되는 것, 즉 다양한 형태의 불평등 및 부정의와 싸우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라고 밝혔다. 





 



 '킬조이'라는 단어의 역사를 살펴보면 그에 대한 이미지의 핵심은 누구도 되고 싶지 않은 인물이다. 킬조이가 한때는 인물 유형을 그려내는 데 이용되었다면, 이제는 정치 스타일을 묘사하는 데에 더 자주 쓰인다. 중요하게 짚어야 할 것은 사실을 왜곡하거나 교묘하게 비틀어서 사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점이다.   


불행한 여성들은 모두 페미니스트라는 인식, 젠더 평등을 위해 싸우는 것을 천성에 대항해 싸우는 일이므로 우리를 불행하게 만든다는 것 편견 등, 사람들이 말하고 행동하는 방식을 바꾸어야 한다고 말하기만 해도 당장 킬조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다. 더 격렬한 사회 변화의 시기에 더 많은 킬조이가 등장한다는 의미이다.  


킬조이는 과민하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어느 순간부터는 센 사람으로 여겨지고, 주변 사람들로부터 거슬리는 존재가 된다. 그러면서 주위 사람들과 다르게 영향받음(차별적 발언을 농담거리로 써먹거나 혹은 무의식적으로 사용하는 상황에서 웃음에 동참하지 않는 것과 같은)으로써 소외되고, 상황의 책임을 스스로에게 돌리는 지경에 이르며, 이후부터는 자기 검열이 따른다.   


저자는 남들이 듣게 하려고 소리를 질러야 한다면, 소리를 지르라고 말한다. 이 말이 이해가 되는 이유는, 페미니스트는 종종 너무 극단적이고 과격해서 싫다는 말을 듣는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사회적 약자의 조용한 외침에 귀기울이는 기득권층은 없다고 대답한다. 페미니스트뿐 아니라 세상의 약자ㅡ인종, 성, 장애, 유아동ㅡ들이 그렇게 소리라도 지르고 과격한 퍼포먼스라도 해야 관심은 고사하고 시선이라도 돌리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이렇듯 같은 말을 계속 반복하고 있다는 것은 달리지지 않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어야 자연스러운 일이 아닐까. 


ㅡ 


저자는 페미니즘이 '백인 페미니즘'으로 인식되어 있음을 꼬집으며 페미니스트 내 인종차별에 대해서 언급하고 이방인에 대해 출신이나 소속이 아닌 '어울리지 않는 신체'로 여겨짐을 짚는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이후에 서술하는 문화비평, 철학, 시詩 등을 통해 여러 사례와 함께 설명한다. 


그는 문화비평을 통해 우리 사회가 갖는 허위와 위선 뒤에 감춰진 본질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또한 미처 의식하지 못했던 행복의 대체성, 목적으로서의 행복과 수단으로서의 행복, 문화(종교)적 제약과 차별을 통해 관습적이고 국가주의에 대해 면밀하게 짚는다. 또한 주류적 보편성(책에서는 백인)에 진입하기를 의도하면서, 그렇지 못하면 낙오자인양 취급하고(책에서는 대표적인 예로 시민권을 든다), 이와 동시에 현재에는 개방과 공정이 보편적이고 차별과 괴롭힘이 일부 소수 집단에서 일어나는 일인양 축소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책에는 홀로코스트와 트렌스젠더를 향한 폭력을 비교 상대로 들먹이는 함의에 대해 서술하는 부분에서 몇 가지 사례를 들어 설명하는데 우리가 익히 함정에 빠지는 문장 프레임들이 떠올려진다. 활동가인 정희진, 리베카 솔닛이 자신들의 저작에서 재차 강조했던, 말(용어)이 얼마나 막강한 힘을 갖고 있는지 새삼 느낀다.   


5장에 '문간'이 갖는 공간적 의미에 대해 서술하는 부분이 있다. 문은 문간이 되는데 사회 구성원의 일부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장벽이 아니라 사회적 경험의 가장자리에서, 그늘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 그늘이 떨어지듯 떨어지는 이들, 쓰러진 자들이 모이는, 온전히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위험한 이들을 위한 공간이 된다고 썼다. 그늘 속에 남음으로써 살아남는다는 문장이 무척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그늘에 머무르는 것으로써 살아남는 이들이 과연 서구 사회의 흑인과 유색(또 그 안에서 여성)인의 서사이기만 할까.  


ㅡ 


책은 페미니스트 킬조이의 이야기를 수집해 담았다. 그리고 페미니스트 에세이와 문학, 영화 등 여러 분야에서 페미니스트가 어떤 식으로 등장하는지 살펴보는데 이를 통해 독자는 여러 사례들을 공유하고 자신의 경험을 투영해볼 수 있다. 


저자는 페미니즘의 정치적 운동의 필요성을 피력하며 약자의 연대는 생존과 연결되어 있음을, 개인적인 것이 역사가 됨을, 말한다. 개인적인 것들이 모여져 전기가 되고, 제도가 되고, 역사가 될 터다.


나의 짧고 부족한 독후 기록이 혹여 책의 내용을 오해하게 할까싶어 저어된다. 페미니즘은 물론이고 우리의 일상에서 볼 수 있는 차별과 혐오에 대해 느껴지는 바가 많고,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는 책이니 여력이 된다면 읽어보기를 바란다.  




※ 출판사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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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지 스펙트럼
신시아 오직 지음, 오숙은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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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책을 읽으면서 너무 가슴이 아팠고, 슬펐고, 안타깝기 그지 없었다. 학살의 한가운데서 생존자가 되어 난민 신분으로 낯선 이국 땅에서 정착하지 못하고 부유하며 과거에 묶여 단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한 여인, 로사의 이야기다.

로사는 거의, 늘 화가 나 있다.
폴란드 바르샤바 출신으로 아버지는 바르샤바 은행 총재였고, 어머니는 시인이었으며, 사남매 둥 둘째로 물리학자를 꿈꾸는, 유복하고 화목한 가정의 '폴란드인'이었다. 가정이 붕괴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하루 아침에 '유대인'으로 낙인 찍혀 굶주리며 매일 죽을 고비를 넘겼다. 결정적으로 어린 딸의 죽음을 눈앞에서 목격했으나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로사의 가장 큰 분노는 스텔라를 향하고 있다. 스텔라를 향한 분노는 증오에 가깝다. 딸 마그다의 숄을 빼앗고, 팔레스타인으로 보내질 순간에 거두어 미국으로 데려왔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미치광이 노인으로 치부하며 폴란드어를 아예 잊어버린 배은망덕한 조카.

잠시, 카프카의 소설을 보면 서유럽에 정착한 유대인들의 정체성 혼란(카프카 본인의 이야기기도 하고)에 대해 다루어진 부분들이 종종 보이곤 하는데, 로사의 경우는 정체성의 혼란이라기보다 가난하고 비루한 '유대인'과 동격으로 치부되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러한 맥락은 로사의 딸 마그다가 파란 눈과 금발 머리카락으로 미루어 아리아인 핏줄이라고 짐작하는 다른 유대인들의 시선을 두려워하면서도 실상은 마그다가 개종한 유대인과 비유대인 혼혈의 핏줄임을 밝히는 데에서도 드러난다.





<숄>에서 보여지는 홀로코스트의 참혹한 모습은 여타 소설이나 영화에서 익히 봐온 것과 다름하지 않다. 다만 그 혹독한 환경에서 딸의 목숨을 지켜내고자 분투하며 하루하루를 두려움에 떠는 젊은 엄마의 모습이 처절하게 다가온다. 또한 <로사>에서는 아이를 잃고 삼십 년을 훌쩍 넘는 세월을 지나온 로사의 광기어린 모습이 두렵다기보다 오히려 가련하고 측은하게 느껴진다.


잃어버린 게 뭐냐고 묻는 퍼스키에게 삶을 잃어버렸다고 대답하는 로사. 그녀는 스스로를 삶이 없는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스텔라가 로라에게 마그다를 잊고 새 인생을 살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지만, 마그다와 삶을 강탈당했다고 생각한 로라에게 새로운 인생이란 없다.

우리는 간혹 너무 쉽게 잊으라고 말한다. 이미 벌어진 일을, 지나간 과거를 어쩌라고 자꾸 들춰내냐는 말을 무람없이 뱉어낸다. 삶을 도둑맞았다고 믿는 이에게 생존이 과연 '살아있음'이었을까. 삶이 곧 죽음인 사람도 있다.

하지만 소설의 마지막. 당황해서 서둘러 자리를 뜬 퍼스키가 다시 돌아오자, 로사는 당당하게 그를 맞이하기로 한다. 마그다는 거기 없었다고 말하는 로사가 이제야말로 '삶'을 시작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퍼스키가 로사에게 살아갈 계기가 되어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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