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세상이여, 그대는 어디에
샐리 루니 지음, 김희용 옮김 / arte(아르테)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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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어떤 면에서 내 삶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고. 내 삶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거의 없어. 때때로 삶에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알고 보니 아무 의미가 없고, 나를 사랑해야 할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지 않을 때면, 이해하기가 무척 어려워.



20대에 단 두 권의 소설로 스타 작가 반열에 올라 돈과 명성을 얻었지만 지독한 신경쇠약에 걸려 2년 동안 전혀 글을 쓰지 못하고 있는 앨리스, 형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한데다 어머니가 임종한 뒤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 부유하다 직장을 잃고 물류창고에서 일하는 펠릭스, 어려서는 언니에게 치였고 대학 생활 내내 우수한 성과를 냈지만 박봉의 문학잡지 편집자 자리에 그친데다 사랑도 결실을 맺지 못해 실패한 인생이라고 자조하는 아일린, 늘 가벼운 만남 만을 추구하는 진중한 가톨릭교도 사이먼.  


소설은 네 남녀의 우정과 사랑을 사실적이고 신랄하게 그리고 있다. 과거에 저지른 죄와 죄책감, 후회와 용서, 우성과 사랑의 경계선, 성性과 사랑, 성공과 실패 등 2,30대 청년들이 한번쯤은 고민해봤을, 혹은 중년의 우리가 경험했을 감정들이 등장인물들을 통해 묘사된다.   






열여덟 살에 대학에서 처음 만나 룸메이트로 시작해 10년이 넘도록 절친 사이인 앨리스와 아일린. 현재 두 사람은 이메일을 주고 받으며 서로의 일상을 비롯해 정치, 사회,철학, 예술, 환경 등 여러 생각들을 공유하며 연애나 가족 문제까지 조언해주지만, 정작 가슴 깊은 곳에 숨겨진 감정은 털어놓지 않는다. 또한 이메일 쓸 때마다 사랑한다, 보고싶다라는 말을 덧붙이지만 두 사람이 만난지는 오래 전이다.  



두 커플의 관계도 상당히 대조적이다. 
먼저 앨리스와 펠릭스는 데이트 앱을 통해서 처음 만났고, 만난지 얼마 되지 않았다. 앨리스는 작가지만 펠릭스는 독서를 전혀 하지 않는다. 그들이 서로에게 건네는 말에는 조심성이나 배려를 염두하지 않는듯 보인다. 일회성 만남으로 끝날줄 알았던 그들은 우연히 재회하면서 만남을 이어간다. 반면 아일린과 사이먼은 유년 시절부터 한 동네에서 자란 이웃이다. 사이먼은 청소년기의 아일린에게 대화가 가능한 유일한 사람이었고, 평생 동안 친구로 지내게다고 약속했다. 두 사람의 서로에 대한 과한 배려는 오히려 서로를 밀어내는 꼴이 되고 만다.  


자신의 삶에서 사이먼이 없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는 아일린은 섣부른 연인 관계였다가 오히려 그를 잃게 될까봐 가까이 가는 것을 망설였고 그와의 관계에서 자신이 늘 기대기만 하는 민폐같은 존재인 것 같아 불편했다. 사이먼은 평생 친구로 남아 있겠다는 약속을 미욱스럽게 지키며 다른 여성들과 가벼운 만남을 가장해 늘 아일린의 주변을 지킨다. 사이먼은 펠릭스에게 한때 사제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지만 혼자 있고 싶지 않아서 그런 생각을 그만두었다고 털어놓는데 어쩌면 아일린을 사랑해서였기때문이 아니었을까 짐작한다.


만취해서 온 펠릭스는 관계에 어려움을 겪는 앨리스의 상처를 건드린다. 앨리스 입장에서는 누군가 건드려주기를, 그래서 마음껏 화라도 낼 수 있기를 바랐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어째 펠릭스의 자격지심도 조금 느껴진다. 


결국 눌러놨던 감정의 찌꺼기와 말하고 싶어도 말하지 못했던 솔직한 심경들이 한꺼번에 터져나오게 되는데 그들에게는 진정한 카타르시스가 되었겠다는 생각이 든다(그렇다고 해서 모두 이들처럼 아름다운 결말에 도달하는 것은 아니다. 여차하면 평생 원수가 될 수도 있다). 소설에서 네 남녀의 심리는 단순하게 정의되지 않는다. 너무나 복잡미묘해서 만약 내 친구가 나에게 이러한 심정을 토로한다면, 두 손 두 발 다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외롭고, 돈 때문에 불안한 삶.
행복과 불행이 오락가락하며 때로는 그 감정선이 롤러코스터를 탄다. 
사랑이 전부라고 할 수 없지만, 사랑 없이는 살 수 있는 게 인생 아닌가.
상처 받고 아물기를 반복하는 것이 청춘의 전유물은 아닐터다. 


그들,
아직 아프고 상처받을 날이 더 많겠지만, 그래도 사랑하기를. 




280.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는 것보다는 무언가를 사랑하는 게 훨씬 낫고,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것보다는 누군가를 사랑하는 게 훨씬 낫지. 그리고 나는 여기 있고, 내가 존재하지 않는 순간을 바라지 않으면서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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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과 의사 페이지터너스
마샤두 지 아시스 지음, 이광윤 옮김 / 빛소굴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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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제작을 포함한 중단편 소설 다섯 작품이 실린 마샤두 지 아시스 선집이다. 실린 작품 모두 인상적인데, 다섯 편의 소설을 관통하는 주제는 인간 본성에 대한 고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보잘 것 없는 우월감, 알맹이 없는 허위와 허세, 의미 없는 미사여구, 사악한 칭찬과 찬사, 위장된 겸손, 이성, 그리고 광기와 폭력.  


<점쟁이>에서 부정을 저지른 두 인물을 통해 두려움은 이성을 멀게 하고, 인간은 제가 바라는대로 상황을 해석함을 볼 수 있다. <회초리>에서의 다미앙은 양심의 가책은 뒤로하고 너무나 손쉽게 권력 앞에 무릎을 꿇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럼으로써 권력의 폭력성과 그 안에서 약자끼리 제 살 파먹기를 종용하는 구조를 짚고 있다.  








이 선집에서 압권은 표제작인 중편소설 <정신과 의사>다.

이 소설에서 모순은, 애초에 시망 바카마르치 박사가 목적한 것은 이성과 광기의 경계를 구분짓는 것이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는 인간의 이성을 믿지 않는 듯 보인다. 인간은 자신이 이성적이라고 생각하지만 경중의 차이일 뿐 대부분은 광기가 있으며 이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읽혔다. "인간 이성을 마비시키는 바스티유 감옥" 이라는 표현 역시 역설의 의미를 담은 건 아닐런지. 


또한 시위대를 조직한 이발사 포르피리우 역시 처음 의도와는 다르게 시위를 개인의 정치적 야망으로 이끌어 나갔고, 시위의 당초 목적을 상실하고 말았다. 거기다 권력의 추에 따라 이리저리 움직이는 약제사 크리스핑 소아리스의 처세는 비열하다고 말할 수 있겠으나 우리는 두려움과 공포가 이성을 앞지른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정신의학과 과학에 대한 열정을 넘어선 광기, 명예를 탐하는 욕망. 박사의 열정이 오직 의학의 발전과 인류에 대한 봉사이기만 했을까. 더하여 금전적 이득을 취하지만 않는다면 과학의 발전이라는 명분 아래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러도 무방한가.  


소설의 결말은 그야말로 블랙코미디가 아닐 수 없다. 한바탕 소동이 휩쓸고 간 자리에는 무엇이 남았을까. 정의와 공정과 공평보다는 불의와 불공정과 불공평이, 검소와 나눔과 배려보다는 사치와 탐욕과 이기심이 더 일반적이니, 따라서 광기에 사로잡힌 인간이야말로 '정상'이고, 이성적이고 도덕적인 인간이 비정상이라는, 그래서 도덕성이 우월한 사람이 정신병원에 수용되는 기막힌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어쩌면 세상 전체가 '카자 베르자 병원'이라고 말하는 걸지도 모르겠고.   


이타구아이시市에는 단 한 명의 정신병자도 없다는 진실의 씁쓸함, 그리고 '겸손함'이라는 병명으로 카자 베르자 병원에 스스로 수용되기를 선택하고 끝내 퇴원하지 못한 시망 바카마르치 박사. 어쩌면 우리의 의문은 그가 카자 베르자에 입원할 '자격'이 있는지의 여부일지도 모른다.


<정신과 의사>를 읽다보면 1789년 바스티유 감옥 습격을 시작으로 1799년 나폴레옹 정부 수립까지 숨가쁘게 지나간 프랑스 혁명의 단면을 보는듯 하다. 또 다른 한편에서는 우리나라를 포함한 몇몇 나라의 독재 정권 시대를 연상케하고.   



사이사이 공포스럽기까지 한 소설들을 다 읽은 후 되짚어봤다. 19세기 중후반, 브라질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지만 현재의 세계 어느 도시든 큰 괴리가 없다. 폭력을 단죄하기 위해 폭력을 행사하고, 부정한 권력을 비판하기 위해 부정한 방법을 사용하는데 개의치 않는다. 정직과 성실의 가치는 시대착오적인 구습으로 치부된다. 얄팍한 술수와 비겁함이 경쟁력으로 포장된다. 우리가, 내가 있는 곳은 어디인가. 우리 사회가 '카자 베르자 병원' 이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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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책들 세계문학 첫 문장 111
열린책들 편집부 지음 / 열린책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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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사람들은 살기 위해 이곳에 온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말테의 수기'에서) 



열린책들 세계문학전집이 현재 286권이 출간됐다. 그중에서 111권의 표지와 첫 문장을 모은 엽서북이다. 사실 엽서북이라고 생각도 못했다가 인친님 피드를 보고 엽서북인 줄 알게 됐다. (이 아까운 걸 어떻게 엽서로...!) 








제임스 A. 미치너의 <소설>로 시작해서 셰익스피어의 <소네트집>이 마지막 장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유명한 작가ㅡ괴테, 아서 코난 도일, 유진 오닐, 버지니아 울프, 카뮈, 카프카, 헤밍웨이, 빅토르 위고, 대실 해밋, 아서 코난 도일, 제임스 조이스 등ㅡ들 외에도 체사레 파베세, 베르톨트 브레히트, 레이먼드 챈들러 등 개인적으로 너무나 좋아하는 작가들의 작품 표지가 보여서 반가웠다. 


아직 한 작품도 읽어보지 못한 베르코르, 존 파울즈, 조르지 아마두, 나기브 마푸즈, 마이크 레즈닉, 에릭 앰블러, 옌스 페테르 야콥센 등은 목록에 올려놓고 차곡차곡 순차적으로 읽어볼 생각이다. 


책에 담은 내용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첫문장은 베르코르의 <바다의 침묵>, 페터 한트케의 <어느 작가의 오후>, 로렌스의 <채널리 부인의 연인>. 아직 읽지 않은 작품들이라도 첫문장을 읽으면 대략 유추되는 것들이 있다. 소설의 분위기, 문체, 정서적 배경이나 등장인물의 직업 등. 무엇보다 첫문장은 독자들이 이 책을 읽을지 말지를 결정하는 데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표지는 점점 더 작품의 얼굴이 되어가고 있는 듯 하고. 


이외에도 <연애 소설 읽는 노인>의 표지를 보면서 지난 코비드 시국에 코로나 감염으로 임종한 루이스 세풀베다가 떠올라 잠시나마 추모의 시간을 가졌고, 몇 권의 책들은 독서모임 멤버들과 나눴던 이야기들이나 추억이 생각나기도 했다. 그리고 이 전집에 있는지 몰랐던 윌라 캐더의 작품(나의 안토니아)을 발견한 것도 나에게는 수확이라면 수확이다. 생각보다 전집에 출간된 지 몰랐던 작품들이 꽤 되더라는. 



한 장 한 장 넘기자니 유독 마음이 갔던 작품들이 눈에 들어와 남겨놓았던 독후기록도 찾아서 읽어보고, 동시에 작가들 면면도 찬찬히 살펴보는, 나에게는 휴식의 시간이었다. 불현듯 도록을 이렇게 만들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에 들어서 가까운 몇몇 이들에게 요령껏 활용하라고 선물할 요량이다.  



"우리 시대는 본질적으로 비극적이어서 우리는 그것을 비극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채털리 부인의 연인, 첫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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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믿고 추락하던 밤
시리 허스트베트 지음, 김선형 옮김 / 뮤진트리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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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독특하다. 내용면에서 조금 기괴한 면이 없지 않고, 네 장章으로 나뉘어진 구성 방식 역시 시기를 달리하며 서술하고 있다. 이 작품을 이십대 여성의 청춘과 방황, 혼란과 불안이라고 선을 긋기에는 많은 것들을 담고 있다. 







1장의 그로테스크한 분위기에서 시작하는 소설은 주인공 아이리스의 정체성과 자아, 그리고 타자와의 경계를 여러 장치ㅡ죽은 사람의 물건, 사진, 병病, 앙복, 스카프 등ㅡ를 통해 때로는 직설적으로, 때로는 비유적으로 그려내며 끊임없이 묻고 답하기를 반복한다.  


'이야기'에 집착하는 모닝 씨, 자신을 타자화해 본인의 이름을 목놓아 부른 O부인, 진부함과 평범함을 참지 못해 이미지를 만들어가는 스티븐, 순간의 포착을 향한 열정과 욕망에 충실한 조지, 결정적인 순간에 비열함을 드러내는 팰리스, 온화함 뒤에 숨겨놓은 마이클의 푹력성, 그리고 가난으로 인한 고통과 육체적 갈망, 혼란스러운 자아, 주체할 수 없는 광기에 몸살을 앓는 아이리스.   


소설의 원제는 'The Blindfold'다. 눈가리개는 마이클이 아이리스에게 선물한 고가의 스카프인데 장난처럼 시작한 눈가리개 놀이가 종단에는 강간 시도와 폭행으로 이어진다. 이외에도 아이리스의 다른 자아를 나타내는 양복이나 언어와 소통을 상징하는 속삭임, 그리고 분노와 광기를 대신하는 물기bite, 몽환의 세계로 빠뜨리는 극단의 편두통 등은 현실과 비현실(망상)의 모호한 경계를 보여준다.   



안타까운 점은, 아이리스는 누구를 만나든 상대에게 휘둘린다. 모닝 씨의 엽기적인 연구 보조를 할 때에도, 조지의 사진 모델을 할 때에도, 정신병동에 입원했을 때에도, 마이클 로즈의 연구조교로 들어가 번역을 맡았을 때에도, 그녀는 늘 그들에게 이입된다. 결과적으로 추락하는 이는, 그들을 향한 믿음이 무색하게 뒤통수를 맞는 아이리스다. 


아이리스가 마이클에게 끌렸던 이유는 아마 다정함이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낯빛을 살피며 밥 한 끼를 사주는 사람의 마음에 흔들리지 않을 사람은 없는 것 같다(그런데 그 마음에 재를 뿌리다니!). 적어도 시크한 척 뒤늦게 "옛다, 사랑!"하고 내뱉는 조지의 고백같지 않은 고백보다야. 



소설의 마지막, '지옥에서 내빼는 박쥐처럼 죽도록 내달'린 아이리스가 향한 곳은 어디일까? 그녀가 비록 도망쳤지만, 희망적인 것은 어느 순간에도 아이리스는 살아가는 것을 포기한 적이 없다는 점이다.  


도망쯤이야 어떠랴. 
도망을 가면 돌아오는 날도 있으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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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마지막 여름
지안프랑코 칼리가리치 지음, 김현주 옮김 / 잔(도서출판)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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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여쪽의 많지 않은 분량이지만 읽으면서 내내, 시종일관 좋았던 소설이다. 책을 덮고 20여분 가까이 그 여운에 말없이 차만 마셨고, 그 다음에는 누군가와 이 소설에 대해 종알종알 떠들고 싶었으며, 그 다음에는 작가가 궁금해졌다.  


일단 이 소설의 백미는 유려한 문장이다. 현대인의 고독과 방황을 소재로 하는 소설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이를 뻔하지 않게 서술하는데, 많은 문장들이 필사를 하고싶을만큼 가슴에 와닿는다. 그 시기(나이뿐 아니라 감정적으로도)를 지나왔거나 지나고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경험해봤을 법한 무엇들이 자연스럽게 읽는 이에게 스민다. 








레오는 배울만큼 배웠지만 불안해 하고, 동시에 막연한 기대감에 무엇인가를 기다리며 방황하는 젊은 엘리트다. 그는 침묵에 익숙하고, 있는 듯 없는 듯 주변 상황에 녹아드는 게 편하다. 몽환적이고 즉흥적이며 어딘가 이질적인 아름다운 아리아나는 걱정에 짓눌려 예민하며 강박 증세까지 있다. 작은 상처에도, 잠을 자다가도 죽을까봐 걱정한다. 그래서 인생이 늘 되풀이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산다. 


두 사람이 서로에게 끌렸던 이유는 사회의 규범에 순응하며 자연스러운 세상사의 일부로 살아가는 다른 사람들처럼 살지 못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자신조차 자신을 감당하지 못하는 그들에게 사랑은 그저 두렵고 위태로운 감정이 아니었을지, 그래서 레오의 고백에 아리아나가 강하게 부정한 건 아니었을까. 하지만 사랑을 고백한 레오 역시 자신 또한 누군가를 사랑할 여력이 없음을 깨닫는다.  


겪어보지 않은 것을 그리워하는 것은 바보같다고 말하는 아리아나는 안정감을 핑계로 세상물정에 녹아들어가 감정을 잃어가는 나이듦을 혐오한다. 언니 에바가 남편을 닥달하며 제 성에 차지 않자 이혼한 것도, 로마에 오기 전과는 다르게 성마른 성격으로 변한 것도 다 돈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의 불안과 구질구질한 것들에 초연할 수 있는 부자가 되고 싶다는 소망은 아리아나가 갖는 모순이기도 하면서 한편으로 극도로 예민한 그녀가 갈구하는 안정을 필요로 하는 이유일 것이라 짐작한다.   


레오의 친구 그라지아노는 자신을 포함한 레오같은 사람을 세상에서 '멸종된 종'이라고 표현하면서, 그들은 우연히 살아남은 사람들일 뿐이라고 말한다. 즉 세상이 돌아가는 궤도에 올라타지 않은 자신들을 아예 인류의 별개 종種이라고 칭한 것이다. 레오는 정규직 제안을 계속 거절하다가 결국 입사를 결정한 것에 대해 '투항'이라고 정의했다. 또한 안정을 찾아 부자 예술가와 결혼을 결심한 아리아나를 보면서 평온하지만 사진 속에 갇혀 있는 사람이라는듯 바라본다.  


오랜만의 재회에 아리아나는 마치 오늘 하루만 살 사람처럼 닥치는대로 돈을 쓴다. 그녀는 지루하고 따분한 매일을 그렇게 보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아리아나의 모습은 현재를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아닐까싶다. 


ㅡ 


계산적이고 즉흥적인 관계에서 오는 감정 소모와 피로, 대도시의 황량함과 고독. 혼자 있을 때보다 집단에서 더 커지는 외로움과 소외감. 꿈과 사랑, 소박한 즐거움에서 행복해지기 어려운 현실, 그리고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불안.  


다짐하고 또 다짐한 삶은 반복되는 일상의 무료와 고단함에 생명력을 잃어 '살아가는 것' 자체에 지쳐간다. 죽는 것도 사는 것도 두려운, 하지만 도대체 무엇을 위해, 무엇을 하고자, 왜 살고 있는지 길을 잃어버린 사람들.  


소설 초반, 레오와 아리아나가 달라져 가는 세상에 갖는 아쉬움들은, 유리병에 든 우유를 못 마시게 된 것, 서점의 책들이 비닐에 싸여 읽을 수 없다는 것, 사라져가는 종이 봉투, 오랜 가죽에서만 맡을 수 있는 냄새 등이었다. 소설의 마지막 장을 읽으면서 이 부분이 다시 생각났다.  


레오는 당부한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존재하는 것에 대해 정당성을 갖기를.
이 얼마나 아픈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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