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단하고 녹슬지 않는 위픽
이혁진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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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과학기술 윤리에서 시작해 기업 윤리를 지나 삶과 고통의 의미, 그리고 사랑에 대해 이야기한다.   
 




 
소설은 근미래라고 할 것 없이 지금의 세태를 얘기하고 있다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AI를 과신해 인간이 해야하는 일들을 떠맡기면서 인간은 손가락 외에는 움직일 일이 거의 없어져 간다. 운전은 자율주행자동차가 하고, 양육과 교육은 인공지능이 대신한다. 아이들은 고글을 뒤집어쓰고 AI가 제공하는 교육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며, 양육자는 편리성을 좇으며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 제2의 양육자에게 자진해서 제 자리를 내어준다.  


소설에서는 AI에게 결괏값을 입력하는 주체인 인간이 도리어 수치화의 대상이 되는 모순된 상황이 일어난다. 슈마허 개발 회사의 사장인 세희는 언제는 그렇지 않았냐고 되받아친다. 틀린 말이 아니다. 학교에서는 성적을 통해 철저하게 계급 사회를 이루고, 이는 기업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뿐인가. 보험사 평가액, 결혼 정보 회사의 회원 등급제, 서비스 업종에서 이루어지는 고객 등급 등 우리는 수많은 평가 기준에서 우열의 대상이 되어 숫자로 표시된다. 세희와 테드의 주장에 빗대어 봤을 때 과연 나는 얼마짜리 가격표가 매겨지려나.  


돌발 사고 시 노인보다는 아이를, 빈자보다는 부자를 선택하라는 결괏값이 입력된 자동차가 낸 사고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그 책임에 금전적 보상만 이뤄진다면 무방하다는 금전만능주의 사고를 과연 소설일뿐이라고 치부할 수 있는가. 인간이라면 어떤 선택도 할 수 없는 도덕적 딜레마에서 인공지능이 인간을 구원한 것이라는 세희의 어불성설이 그녀만의 생각은 아니리라 생각한다.  



AI 슈마허와 함께 소설의 다른 한 축을 이루는 것은 또다른 AI 아리스토텔레스다. 화장실 갈 때를 제외하면 무버에서 내려오지 않고, 인간이 걷는 시대는 끝났다고 주장하며 걷는 행위를 야만적이라고 말하면서 무버에서 내려오라는 부모를 향해 정신적 학대를 운운해가며 자유와 권리를 제한하려고 한다는 말까지 서슴없이 던지는 여덟 살 건주의 모습은 크게 어색하지 않다. 지금도 대형마트, 헤어샵, 식당에서 아주 흔하게 접하는 장면은 채 서너 살도 안 됐을 것 같은 어린 아이들이 태블릿 PC나 스마트폰에 고개를 박고 한시도 눈을 떼지 않는 모습이다. 심지어 유모차에서조차 손에 스마트폰을 쥐고 있는 아이도 있었다.  


세상만사 모든 것을 기술이 해결해 줄 거라고 말하는 세희와 아들에게 해도 되는 것, 해야만 하는 것, 해서는 안 되는 것들의 '기준'을 가르치겠다는 재호의 아내는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소설 속 대다수의 어린이들이 무버 위에서 아르스토텔레스를 이용하며 부작용에 시달린다. 소설에서 보여지는 부작용은 현재 스마트폰 중독을 우려하는 양상과 비슷하다. 재호의 아들 건주와 매튜의 딸 애나는 둘 다 아리스토텔레스를 사용하지만 두 아이는 다른 모습을 보이는데, 그 차이점은 부모와의 애착형성과 소통이다. 재호 부부가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양육자의 자리를 위임했다면 매튜는 AI를 보조자 혹은 교육 도우미로 활용했다. 



이같은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할까.
우리는 그에 대한 답을 영인을 통해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인간조차 자율이라는 명분으로 악의적이고 잔인한 횡포와 억압을 자행해 왔다. 그런데 그 자율을 기계에까지 부여하려 든다. 영인은 사람이 사람인 이유 중 하나는 용기라고 말한다. 실패와 좌절 앞에서도 다시 일어서기 위해 노력하는 용기, 불의를 제거하려는 노력, 우리가 견뎌내는 고통의 의미, 그리고 사랑에 대한 기억. 영인의 말처럼, 나는 나를,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지킬 수 있는 단단하고 녹슬지 않는 사람인지를 생각해본다. 



언제부턴가 로맨스 소설을 읽지 않는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별다른 이유가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럼에도 사랑에 대한 소설이라면 내용도 정확히 모르면서 시큰둥해지곤 했는데, 작가의 다른 작품은 읽어볼 생각이 들었다.   




덧.
1. 성장촉진제 주사를 맞을 아이들이 무버에 탄 채 길게 줄을 선 모습은 가히 상상만으로도 참담하다. 
2. 표지에 쓰인 '어느 늙고 미친 여자가 이 하찮은 일에 자기 목숨을 걸었다고'가 이렇게 뭉클한 말일줄이야.  




※ 출판사 지원도서

나는 봐야겠어요. 그래야 하는 게 있다는 걸, 원래, 누가 뭐라든 세상이 어떻고 세월이 어떻든 아무 상관 없이 당연히 그래야만 하는 게 있다는 걸요. 우리가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는 걸 허무하지 않게 만들어주는 게 하나라도, 단 하나라도 있다는 걸요. 그게 내가 생각하는 정의正義라는 말의 뜻입니다. 원래 그래야 하는 것, 누구도 아니라고 할 수 없이 당연히 지켜야 하고 그래서 적어도 내 가장 소중한 단 하나만큼은 허무한 게 되지 않게 해주는 것. - P123

내가 사랑한 건 인생이나 세상 같은 게 아니었어요. 사람이었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그 사람들 때문에 내 인생도, 세상까지도 사랑하려고 했었죠. 날 지치고 두렵게 하는 사실과 진실들을 안 보고 못 본 척하면서까지요. 하지만 그렇게 사랑한 것마저 잃을 수 있어요. 아무 이유 없이요. 말했듯 그게 세상이고, 그게 인생이니까요. 하지만, 정말 고통스러운 건 그 고통이 다른 수많은 고통과 다르기 때문이에요. 그 고통엔 의미가 있죠. 아무도 몰라도 나는 아는, 나한테는 전부이고 모든 것인 의미가요. - P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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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카듀 - 경성 제일 끽다점
박서련 지음 / 안온북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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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1920년에서 시작한다.
조선 최초의 호텔 커피숍은 제물포의 대불호텔, 경성의 조선인 최초 끽다점은 백림관, 두 번째가 카카듀다.







책의 앞표지를 펼칠 때만해도 '카카듀'를 미처 생각하지 못했고, 첫 페이지의 '현앨리스가 나타났다'라는 문구를 보면서도 별 생각없이 읽었는데, 미옥이 부산에서 하와이로 향하는 배를 타기 전 자신의 첫 이름은 미옥이 아닌 '앨리스'였다는 대목에서 "으... 응?" 하다가 "?!!". 그렇다, 이 소설 대부분의 등장인물들이 실존했던 이들이었고, 사실을 바탕으로 쓴 작품이었다(변사의 느낌이 좀 나려나?).  


소설 속 서술자는 1인칭 화자로서 배우이자 감독인 이경손. 그를 비롯해 한국의 마타하리라 불리는 독립운동가 현앨리스, 배우이자 감독 나운규와 정기탁, 배우 김일송, 가수 이애리수, 의학박사 이성용, 작가 김명순 등이 대거 출연(?)한다.  


일제강점기 시절 극예술 및 영화예술을 소재로 1920년대를 풍미했던 대중예술인과 독립운동가 들, 그리고 당시 대중적으로 유행했던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사실에 바탕해 풍성하게 서술한다. 


3부까지가 관훈동을 중심으로 한 예술가들과 10여년에 걸친 이경손의 눈물겨운 영화 제작에 대한 이야기였다면 마지막 4부에서는 현앨리스의 삶을 조명함과 동시에 당시 여성의 삶과 조선 밖에서 벌어진 조선의 대외 정치적 상황을 단편적으로나마 그리고 있다. 상해에서 박헌영과의 만남과 사회주의 사상, 아버지만큼이나 단단했던 어머니의 권유로 떠난 일본 유학, 현실적인 안주와 너른 세상을 향한 자유와 가족의 기대 사이에서의 갈등, 결혼과 이혼, 하와이 이주민 2세대이면서 조선과 상해와 일본을 넘나들었던 독립운동가이자 사상가였던 현앨리스의 안타까운 최후. 그리고 그녀를 향한 이경손의 애잔한 그리움. 소설 속에서 그의 그리움은 개인 대 개인을 넘어선,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있음을 우리에게 알리고 싶은 간절함이라는 생각이 든다.  



소설 속 앨리스와 이경손은 경계에 선 인물들이다. 조선의 구습에 순종하지 않고 과감하게 제 인생을 선택했고 스스로 조선인의 정체성을 잃지 않았으나 이념과 국가의 경계에서 사라져버린 미옥, 현앨리스. 이경손 역시 누대 의관 집안에서 보헤미안을 자청하며 부와 명예가 보장된 삶을 뿌리치고 나왔으나 계속되는 실패로 인해 문중의 일원이 아닌 개인으로서 현실적 한계를 깨달으며 열패감에 시달린다. 또한 경손은 미옥을 바라보며 정치와 사상, 그리고 자유를 향한 갈망에 남녀 구분이 없음을 인정지만, 결국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속된 자신의 이중성을 깨닫는다.  


이경손은 앨리스의 최후를 알았을까.
앨리스가 늘 그래왔듯 소식 한 장 없이 아무렇지 않게 눈앞에 나타나기를, 이국 땅에서 기다리는 이경손의 마음이 애틋하게 전해진다.  


ㅡ 


<체공녀 강주룡>이 실제 인물과 사건을 사실적으로 그려냈듯 이번 작품에서도 모든 인물들이 생생하게 살아 있다. 1920년대를 배경으로 제작한 OTT 시리즈 한 편을 본 듯한 기분이다. 


여차하면 무거워질 소지가 다분한 내용을 유머러스하게 펼쳐놨다. 특히 화자인 이경손은 시종일관 진지와 허당을 오가며 스토리를 이끌어가는데, 어딘가 어리숙하고 보헤미안을 꿈꾸는 그는 매력적인 캐릭터다.  


당시의 영화 시장과 현장에 대한 서술은 예상치 못한 재미 중 하나였다. 캐스팅이 확정된 주연 배우가 도망가는 건 예사고(감독도 튀고, 제작자도 튄다), 영화를 찍네 마네 변덕을 부리는 일도 허다하다. 거기다 투자도 즉흥적으로 이루어졌다가 느닷없이 발을 빼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읽는 나는 웃었지만, 당시 관련자들은 속 꽤나 상했겠구나싶다.   


ㅡ 


현앨리스나 김명순 작가의 삶을 들여다보면 애통할 일이다.
앞서 썼듯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부분이 실존했던 인물들이다. 그들 중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람은 나운규 정도가 아닐까. 이러한 소설들을 읽을 때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후대를 위해 길을 만들어 갔는지 새삼 먹먹해진다. 그들 나름의 선택이 대의에 기반하든 사적인 욕망이었든, 그들의 삶으로 우리의 삶이 또다시 다음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오늘도 배운다. 




※ 출판사 지원도서
​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 말하는 일은 얼마나 즐겁고 쓸쓸한가. - P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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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2세 열린책들 세계문학 287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박우수 옮김 / 열린책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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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불링브루크의 추방에서 시작해 리처드2세의 죽음으로 끝을 맺는 이 희곡은 사실상 1399년 여름부터 1400년 2월까지, 약 6개월 동안 벌어진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작품에서는 아주 빠른 속도로 전개한다. 희곡에는 고트의 존과 리처드2세의 관계와 그들의 과거에 대한 전혀 설명이 없어서 지금의 독자는 배경 지식을 조금 알면 훨씬 더 맛있게 읽힐 것이다.




 
 



작품에서 셰익스피어는 리처드2세를 성급하고 방종하며, 허영과 사치, 욕망과 자기과시가 커 폭정을 일삼고 영국을 파국으로 이끌 사람으로 묘사한다. 심지어 극의 말미에서는 왕궁의 정원사조차 리처드왕과 그의 총신들을 낮잡아 무시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반면 반정을 일으키고 새로운 왕으로 추대되는 불링브루크에 대해서는 사뭇 다른 평가를 내린다.  


더구나 작가는 작품 속에서 리처드2세의 죽음을 두고 신하의 지나친 충성심에서 우러나온 사고에 불과한, 마치 헨리4세는 리처드왕의 죽음과 전혀 무관하다는듯 그리면서 그의 포용력이 넘치는 인간적인 면모를 부각시킨다. 셰익스피어가 글을 썼을 당시 참고한 사료 역시 승자의 기록임을 감안해도 작품 전반에 걸친 셰익스피어의 감정은 리처드2세보다는 헨리 4세에게 훨씬 더 호의적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객관적으로 봐도 리처드2세가 훌륭한 왕이었다고 말하기에는 어렵다. 그렇다고해서 반정을 일으켜(그것도 사적인 사건을 계기로) 왕이 된 인물을 일방적으로 정의의 사도로 그려서는 안 될 일이겠으나 다만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이 실제 공연을 목적으로 둔 희곡이라는 점에서 인물의 극대화는 충분히 납득이 된다. 결국 역사에 대한 어떠한 판단을 할 때 정확한 근거와 앞뒤의 맥락을 짚어낼 힘이 필요한 건 후대인 우리가 갖춰야할 소양일 것이다. 



역사적 사실을 차치하고 극의 재미를 찾아보자면, 
불링브루크(헨리4세)는 리처드왕을 런던 탑으로 보내고 다음 수요일에 대관식을 거행하겠으니 준비하라고 지시한다. 희곡에서는 헨리4세가 리처드2세를 유폐시킬 장소로 일단 런던 탑으로 결정을 하다가 나중에 폼프릿 성으로 바꾸는데, 런던 탑을 현재의 규모로 확장한 사람이 리처드2세라는 점은 아이러니하다. 실제로 폰트프랙트 성에서 사망한 리처드2세가 처음에는 런던 탑으로 보내질 계획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굳이 연극에 이 대목을 넣은 데에는 셰익스피어의 짓궂은 장치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작품 속 왕비는 상당히 성숙한 모습을 보이는데 사실 리처드2세가 왕권을 잃었을 당시 그녀가 고작 열 살 남짓이었음을 감안하면 셰익스피어의 그려낸 <리처드2세>는 역사적 틀만 가져왔고, 인물에 대한 묘사는 허구적 요소가 꽤 많음을 짐작할 수 있다.  



셰익스피어의 여타 작품들처럼 이 희곡 역시 은유와 직유, 그리고 언어유희를  본문 곳곳에서 그려냄으로써 문학이 왜 언어 예술이라고 불리는지를 너무나 잘 보여주고 있다. <리처드 2세>와 <헨리 4세>가 비슷한 시기에 쓰였고, 셰익스피어가 헨리 4세에 훨씬 우호적이라는 점을 짐작해볼 때 두 작품을 나란히 읽으면 더욱 다이내믹한 독서가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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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카듀 - 경성 제일 끽다점
박서련 지음 / 안온북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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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특한 제목만큼이나 기대되는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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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읽는 루쉰 A Year of Quotes 시리즈 4
루쉰 지음, 조관희 옮김 / 니케북스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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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의 문헌에서 금과옥조같은 글들만 뽑아 매일 조금씩 읽을 수 있게끔 엮은 책이다. 하루하루 날짜가 표기되어 있지만 굳이 순서대로 읽을 필요는 없다. 다만 날짜를 따라가면 1년의 루틴이 만들어질 수 있겠다는 생각은 든다. 필사하기에도 좋은 분량이다. 루쉰 선생은 개인적으로는 네 번째로 존경하는 인물인데(나에게는 존경하는 다섯 명의 인물이 있다), 역시... . 두 번 완독(한 번은 천천히, 한 번은 속독으로)했지만, 날짜에 맞춰 매일 한쪽씩 읽을 요량이다.  






늘 미래와 청년을 걱정했던만큼 청년을 향한 응원의 목소리.
미래를 만들어갈 젊은 세대를 위해 토양이 되어야할 기성세대와 저항의식 없이 무력한 지식인을 향한 쓴소리.
과거의 구습에 얽매인 탓에 서로 이해하지 못하고 마치 쟁반 위의 모래처럼 흩어진 세태에 대한 비판.
희망이 되어줄 청년 세대와 개혁의 의지를 억압하는 기득권층을 향한 풍자와 역설逆說과 우화. 


선생은 허위와 몽매와 폭력에 맞서야하고, 타인의 고통으로 이룬 성공에 의의를 두지 말아야 하며, 모두가 정당한 행복을 누릴 수 있어야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문예가 반드시 살아야하는 이유와 문예운동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더하여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역설力說하는데, 그의 창작과 혁명과 저항의 밑바탕에는 늘 사랑이 존재했다. 선생이 말년에 느낀 고독, 청년 시절의 외로움과 방황의 심정, 그리고 그의 사색과 성찰도 적은 분량이나마 만날 수 있다. 


ㅡ 


실은 앤솔러지 혹은 '하루 한 문장'처럼 발췌글들로만 채워진 책들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한 작가를 진득하게 읽는 걸 선호하는 입장이다보니 여러 작가의 짧은 글이나 혹은 앞뒤 맥락없이 싹둑 잘라온 글들이 오히려 읽기에 불편하기 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방식으로 편집한 책에도 양서가 있고, 나에게 편견이 있음을 인정한다. 이 책은 이런 나의 부정적인 시선에서 많이 벗어나 있다. 일단 오직 루쉰의 글로만 이루어져 있다는 점, 무엇보다 루쉰 선생에 대한 남다른 마음이 크게 작용했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가장 큰 장점을 꼽자면 '루쉰'이라는 이름에 장벽을 느끼는 독자라면 큰 부담없이 읽을 수 있다. 사이사이 선생의 뼈때리는 직설 화법이 재밌기도 재밌고. 


아무튼 책장을 넘기면서 "역시... 좋네, 좋아"를 연발하다가 어느 지점에서는 또 울컥하며 읽었다. 3월, 섣부른 감이 없지 않지만 올해 친구들 생일 선물은 이 책으로 정했다.




※ 출판사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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